한 권으로 읽는 한국철학 - 인물들과 함께 떠나는 한국철학 시간여행
황광욱 외 지음 / 동녘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한국철학. 국내 대학의 학부 철학과의 커리큘럼은 대학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아직은 독일과 영미철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우리나라에 서양철학이 상륙했을 때, 그것은 일본으로부터 건너왔고, 일본의 서양철학은 독일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커리큘럼 또한 독일 철학이 주를 이루었고, 칸트와 헤겔이 그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철학의 흐름이 영미로 건너왔고, 이에 관한 과목들이 개설되며 독일철학에 편중된 비중은 줄어들게 되었다.

  동양철학에 관해 말해볼까. 동양고대철학사, 동양근현대철학사 와 같은 개론 과목들을 제외하면 동양철학 과목은 아마 서양철학 과목에 비해 적을 것이다. 이것도 역시 대학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주역연구, 장자 강의, 노자 강의, 유학철학 등등의 과목들이 언뜻 떠오르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철학 과목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개론으로 한국철학사 가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지만 철학사를 다룸에 있어서 한국철학은 소외되어있다. 기껏 성균관대 유학철학과에서, 혹은 동양철학과에서, 정식으로 다룰 뿐이다. 마치 중국철학과 유행하는 서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그래도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로서 한번쯤 알고 가자라는 식의 곁다리 역할 정도를 할 뿐이다.

  oo철학과 같이 '철학' 앞에 나라이름을 붙여 철학을 칭할 수 있는 국가는 몇 없다.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중국, 인도 정도가 다이고, 한국도 여기에 포함된다. 한국이란 나라는 물론 그것이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철학의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나름 독창적인 철학사고를 했다고 보여지는, '철학사'를 이야기했을 때 꽤 큼지막한 건들이 있는 그 몇 안되는 철학하는 국가에 포함된다. 한국인들을 '지금 여기'에 놓이게 한 근원은, 철학이다.

  지구 전체가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인 세계화에 참여해있고, 이러한 세계화는 "작은 공동체의 일원이기 이전에 세계인으로서의 소양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 '나'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지 않고 세계인이 되는 것은 '나'를 버리고 '남'에게 흡수되는 것 밖에 될 수 없"으며, 고로 '지금 이곳의 나'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근본은 철학이 될 것이다. 한국철학은 현재 유행을 타고 있는 서양의 어떤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나'를 알고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 길거리에 널려 있는 한번쯤 발로 건드리고 가야하는 돌이 아니라, 강을 건너기 위해 반드시 밟고 넘어가야만 하는 돌이다.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 제일 밑바닥에 깔아야 하는 돌이다.

  여기 이 책에 열 여덟 명의 한국철학자들이 놓여있다. 최치원, 정몽주, 송시열, 최제우, 최익현, 원효, 지눌, 서경덕, 이황, 이이, 조광조 등등 대개는 우리가 한번씩 접해본, 최소한 이름은 알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황과 이이가 천원권과 오천원권에 괜히 얼굴을 들이민 것은 아닐게다. 그만큼 한국이란 나라가 오늘에 이르는데 막중한 역할을 했고, 그것이 비록 정치적이거나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라 할지라도, 한국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일 터이다. 그 둘을 비롯하여 오늘날의 한국을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던 열여덟 개의 돌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p.s.
 
1999년 '한국철학, 화두로 읽는다'라는 제목으로 나온 바 있는 이 책은, 2007년 '한 권으로 읽는 한국철학'이란 제목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제목이 바뀌고 좀더 보완 집필 되었다. 기존의 책은 안에 들어있는 한국철학의 거장들을 시대순으로 구성했었고, 이번에는 인물들을 세 개의 주제로 나누어 구성했다는 차이가 있고, 기존의 열 다섯명에서 세 명을 추가해 열 여덟명으로 바꾸었다는 정도의 변화가 있다.  이전의 책을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저자들은 이전 책이 팔리지 못했던 이유가 제목과 내용구성에 있었다고 판단한 듯 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바뀐 순서와 제목보다 그때가 더 나았겠다 싶다. '한국철학, 화두로 읽는다' 보다는 '한권으로 읽는 한국철학'이 더 대중적인 제목이고 눈에 띄기는 하지만 내용을 살펴봤을 때 그에 더 적절한 제목은 이전의 것이었다. 내용구성 또한 별 의미 없는 세 개의 주제로 나누어 쪼깨느니 시간순서대로 구성하거나 아니면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었던 철학자들끼리 묶어 배치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5-12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 앞에 나라이름을 붙여 철학을 칭할 수 있는 국가는 몇 없다."
한국에 고유의 철학이 없다하더라도 부끄러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상기 언설처럼 세계제국중 고유의 철학을 내세울 만한 국가가 손 꼽을 정도이므로.

다만 근세에 단기간에 '합리성'을 앞세워 유입된 서양철학의 세례를
받은 세대로서, 과연 한국인으로서 나자신의 철학적, 사상적 아이덴티티는?
현대 한국인의 화두일 것입니다.
현대 한국 젊은이들에게서 그 징한 마르크스와 대머리 푸코와 데리다와
민주와 평등과 인권과 노동과 생태보전과 더불어 삼과 신영복과 리영희를
제외하고 나면 멀쩡한 고대 한국인이 남을 듯 합니다. 하하
그러므로..
제가 뒤늦게 유학공부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아프락사스님
유학이 비록 서양철학과 마찬가지로 한국 고유의 철학은 아니지만
근1000년간 한국인의 의식과 생활속에 녹아든, 체화된 철학이니 만큼
유학을 모르고서 한국철학을 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로그인 2007-05-1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의 '한국철학'에 대한 젊은이 답지 않은 관심에.. 추천 한방!!
하하

마늘빵 2007-05-12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현대 한국의 철학을 말하라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어느 하나의 국가에 있어서 철학이라는 것은 해당 공동체를 살아가는 구성원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것이어야하는데,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제외한다면 남는 것은 없을 듯 합니다.

얼마전 한국의 지식인이라 일컫는 이들을 대상으로 현대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조사해봤는데 푸코와 마르크스, 리영희, 강준만 등이 많이 나왔더랬죠.

글쎄요. 오늘날의 한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 근원을 과거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선은 다릅니다) 철학자 탁석산에 의하면, 한국의 정체성이란 것은 오늘날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누리고 좋아하는 그것인데, 오늘날 한국철학의 정체성 역시 지금의 한국이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푸코와 데리다와 마르크스를 논한다고는 하지만 그들을 무조건 추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이론을 가지고 새롭게 한국사회에 적용해 정착한 이들이 있을 것이고, 새롭게 변형된 형태로 존재할테니까요.

물론 과거부터 계속 영향을 끼쳐왔던 유학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기초로 시대를 건너오며 영향을 끼친 새로운 인물들까지도 연구에 포함해야 할테지요.

yamoo 2010-03-12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지나가다가 몇 자 적습니다..푸코와 마르크스..특히 프랑스 철학을 보면 정말 현란한 개념의 잔치가 펼쳐집니다. 모르면 무식한 것 같고...한국에는 철학이 없는 것 같고..논리도 없는 것 같고...우리 철학은 너무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탁석산 님의 한국인의 정체성 주체성도 읽어 봤지만 그의 한국철학적 판단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얼마전에 원효의 저저들을 묶은 책을 봤는데, 넋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 치밀한 논리와 현란한 불교의 개념들이 펼쳐지는데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학계가 너무도 연구를 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아, 글 참 잘읽고 갑니다~^^

마늘빵 2010-03-12 17:52   좋아요 0 | URL
저 역시 탁석산의 한국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읽었지만, 매우 흥미로웠고, 호감이 생겼음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정체성에 대한 재정의에는 동의합니다. ^^ 푸코와 데리다, 라깡, 들뢰즈 등등 현재 철학자들이 쓰는 어휘는 매우 현란하죠. 푸코는 그마나 좀 접해본 축이고, 데리다, 라깡, 들뢰즈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한국에는 철학이 없다기보다는, 한국 철학을 너무 협소한 범위 안에서만 찾기 때문에 없어 보이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철학자 김상봉 선생님을 한국의 현대 철학자로 뽑습니다. <서로주체성의 이념>이 선생님의 기본 철학 뼈대입니다. 그분은 또 함석헌을 한국의 철학자로 바라보고 계시죠. 한국 철학의 빈곤은 한국의 철학 전공자라는 분들이 대개 서양의 학문을 번역하고 전파하는 데 몰두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kokoball 2022-08-24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똑똑하신 분들이 많네요;; 오우... 글 잘 읽고 갑니다! :)
 
동양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70
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구판절판


공자의 인은 사람다움을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예절을 갖추어야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음악을 잘 연주해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낮추어 개 같다, 돼지 같다 하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겉이 번드르르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훌륭한 글을 쓴다고 해도 기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 훌륭한 글을 쓴 사람들이 한편으로 정신대나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열심히 외치고 다녔던 일이 있습니다. 그렇제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라면, 남에게 권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임이 분명하고 사람다운 행동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나의 임무이며, 죽은 뒤에나 그만 둘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공자편) -51-52쪽

공자의 자공의 대화

"정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경제를 풍족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세 가지 중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국방을 포기하겠다"
"둘 가운데 다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경제를 포기하겠다. 예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예 사회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논어> '안연'편)-58쪽

도는 길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니면 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 길을 넓히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길 아닌 곳으로 가면 가시 덩굴이나 진흙탕에 빠져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길로 가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요즈음은 인도보다 차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람이 갈 길에 차들이 점점 쳐들어와 인도가 차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 중략 ...

차는 사람이 몰고 가는 것이므로 차도도 결국 인도입니다. 공자는 어진 사람이면 차를 타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 막 뒤집힐 듯한 우산을 요리조리 가누면서 인도로 걸어가는 사람과 자가용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도로 가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그러나 공자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어가는 사람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정도의 배려만 있다면 이런 불평등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길을 넓히는 데 반대하지 않으며, 때로는 새 길을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장자는 공자의 말이 그럴듯 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속임수라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차도로 가도 좋고 길을 넓힐 수도 있다는 공자의 말은, '사람다운 사람'의 이름을 빌린 인간들이 길을 넓힌단든 명목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옹호해주고, 가난한 백성이 부역과 전쟁에 동원되어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죽고 마는 상황을 합리화한다고 장자는 생각하였습니다. 공자가 군대(군사력, 식량(경제력), 백성들의 신뢰(권력의 정당성) 가운데 정치가가 끝내 잃어서는 안되는 것은 백성들의 신뢰라고 한 것을 생각해보면, 장자의 비난이 지나친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자는 '부국강병'을 외치는 법가나 '도덕 정치'를 외치는 유가나, 춥고 배고픈 백성들의 눈으로 보면 그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자편) -119-120쪽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또 좋아함과 싫어함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선택하고, 싫은 것을 버리게 합니다. 이러한 분별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고 싫은 것을 벗어나려 경쟁하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연관되어 있고 세계가 하나임을 아는 사람을 지극한 사람, 달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장자편)-136쪽

장자는 사람들이 미인 대회를 열어 고르고 고른 미인이라도 물고기가 보고는 물속으로 숨고, 새들에게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이 보고는 결사적으로 도망칠 것이니, 미인 대회에서 뽑은 미인은 진정한 미의 기준에 맞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판단 차이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장자는 세상에서 소외된, 세상의 기준에서 비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온전한 덕과 인간미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장자의 주장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나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싫어하고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를 포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장자편) -137쪽

순자는 인간의 화와 복은 오직 인간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순자의 생각은 인간의 지위와 실천을 극대화한 인물 정신의 완성이었습니다.
하늘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순자의 눈에 보인 인간의 참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순자의 성악설입니다. 순자의 성악설은 판도라의 상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순자의 판도라 상자 속에는 악한 본성을 이겨 나갈 숭고한 인간의 의지가 남아있었습니다. 순자의 철학이 인문 정신의 극치를 보였음에도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본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순자는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뒷날 많은 학자들에게 두고두고 비판받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순자편)-180쪽

"아주 옛날에는 임금도 없고 신하도 없었다. 사람들은 우물 파서 물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으며,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었다. 매이지 않은 배처럼 자유로웠고, 편안하며 만족했다. 경쟁이 없고 영리를 바라지 않았으며, 명예도 없고 치욕도 없었다.
만물이 서로 화합하여 자연의 도에 드렁가므로 역병이 유행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완전한 삶을 누릴 수 있었고, 마음이 착해서 욕심이 없었다. 입에 먹을 것을 물고 즐기면서 배를 두드리고 놀았다. 그들의 말은 화려하지 않았고, 그들의 행동에는 꾸밈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어떻게 무거운 세금을 매겨 백성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엄한 형벌을 받아 굴에 갇힐 수 있었겠는가? "
(갈홍, <포박자> '힐포'편 : 포경언의 말)

-278-279쪽

"임금과 신하의 신분이 생기면 변화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본래 수달이 많아지면 물고기가 놀라고, 매가 많아지면 작은 새가 근심하는 법이다. 부리는 사람이 늘어나면 인민은 고통스러우며, 위에 바치는 것이 많아지면 아랫사람은 가난해진다."
(갈홍, <포박자> '힐포'편 : 포경언의 말)-279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5-11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교빈의 동양철학 에세이는 "제목에 낚여" 아이들 교육용으로 한권 산적이있지요.
곧바로 쓰레기통..
한국의 고등학생용 교양목록 리스트에서 이 책이 사라지기를 희망합니다.
아프락사스님.

마늘빵 2007-05-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랑은 생각이 좀 다르시네요. 저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볼 수 있는 괜찮은 책이라 생각했는데요. 내용이 가독성이 높지는 않고, 문장이 조금 딱딱하기는 하지만, 다른 동양철학 대중서에서 보이지 않는 농가 등의 다른 부류도 넣었다는 점에서도 괜찮았구요.
 
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지구온난화에 대해 말들이 많다. 그 누구도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이 뜨거워져 동식물이 멸종하고,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미래가 현실이 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을 알리는 책들은 꽤 많이 나와있다. 아직 많은 책들을 접해보진 못했지만 어떤 책은 구체적인 통계자료와 수치를 통해 온난화의 위험성을 알리고, 어떤 책은 직접 재앙의 현장을 묘사하며 이렇게 변화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지구 재앙 보고서>는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그 세부묘사와 답사경험이 집 안에서 편히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절실히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콜버트라는 미국 뉴욕타임즈의 기자가 쓴 책으로, 글을 읽고 있으면 기자의 필체가 확실히 느껴진다. 대개 전문가가 아닌 기자가 쓴 책은 잘 만들어진 한편의 보고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하지만 그다지 호소력이 있다거나 행동의 변화를 꿰하지는 못하는 듯 하다. 지구 온난화를 이야기함에 있어 참고할 만한 자료로서는 손색이 없으나 이 책을 통해 아 이만큼이나 위험하구나, 나부터라도 생활 속에서 지구온난화를 지연시킬 수 있는 실천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까지는 이어지기 힘들다는 말이다.

  오히려 얼마전 읽은 <기후의 역습>이 이 책 보다는 가독성도 높고, 확실한 그래프와 통계를 통한 수치도 제공해주며, 호소력도 강하다. 알래스카 주 데드호스, 레이캬비크 교외, 그린란드 빙상에 위치한 연구 기지인 스위스 기지 등 북극권 이북 지역을 저자가 직접 탐방하고 취재한 기록들을 담았다고 하는데 다소 산만하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가 결국 도달해야 할 곳은 독자의 머리와 마음일텐데 거기까지는 힘겹다.

  온난화는 당면한 현실이고, 지금 이대로라면 암울한 미래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지구 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인식가능한 개체라면 당연히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의 환경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동식물의 생존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나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에서라도 지구온난화의 현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인식에 도달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더불어 <기후의 역습> 도 필히 읽었으면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2moon 2007-05-0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후의 역습, 서점에서 찾아봐야겠어요. ^^

마늘빵 2007-05-0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302moon 님. 네. 관련된 책들을 계속 살펴보려고 하는데, 아직까진 <기후의 역습>이 낫네요. 한권에 압축적으로 알려줄거 다 알려주고 호소력도 있고.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영화는 좋았는데 책은 어떨지.

네꼬 2007-05-0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히" 읽으라고 하시니 원,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에잇. 땡스투 누르고 담아가요. 총총.

마늘빵 2007-05-10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 ^^ 흐흣.
 
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절판


"추위가 오고, 더 많은 남쪽 지역이 북극형 생물에 적합한 환경으로 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온난한 환경에 맞는 기존 생물은 밀려나고 북극형 생물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아울러, 온난한 지역의 생물은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 기후가 다시 따뜻해지면 북극형 생물은 북쪽으로 물러가며, 온난한 지역의 종이 이들의 뒤를 바짝 쫓아간다. 그리고 산기슭부터 눈이 녹음에 따라, 북극형 생물은 동족이 북상하고 있는 동안, 해빙된 땅을 장악한 뒤 기온이 상승할수록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다윈 <종의 기원> '지리적 분포' 편 中)-8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 5. 9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5511&ref=61&m_type=0

 

* 스포일러 경고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을 본 관객들 사이에서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여선생 장귀남(박솔미 분)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니 그녀가 범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보건소장 제우성(박해일 분)이 마을주민을 상대로 실험을 했으니 그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범인 여부가 확실히 가려지지 않고 의견이 나뉘는 것은 그만큼 영화의 결말이 애매하게 마무리되었다는 뜻이다.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대개의 추리소설류에서 볼 수 있는 마무리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명확히 드러나는 것 하나 없는 결말과 미궁에 빠진 채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건, 그 사이에서 극장을 빠져 나온 관객들은 두뇌게임을 즐긴다.

수많은 추리들이 가능하지만 이 글에서는 제우성(박해일 분)이 범인이라고 가정하자. 박해일은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자신이 연구하던 신약 실험을 감행하기 위해 "보건소장"의 신분으로 마을에 잠입했다. 마음씨 좋고 친절하고 똑똑하고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보건소장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마을 주민이라고 해봐야 2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사람 사는 맛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간다.

조용한 섬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살인사건. 아니 살인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밤새 고스톱을 치던 세 사람이 엉켜 피범벅이 되어있었다는 사실뿐.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은 없다. 몇 안 되는 마을 주민들은 모여서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놀라움에서 "누가 범인일까?" 라는 의심 품은 의문으로 넘어간다. 범인을 찾자. 분명 이 섬마을 안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짓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군가이다. 사건 그 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목격자를 찾아보자. 그러나 사건발생일로부터 날이 지날수록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져든다.




 

* 하얀 가운 입고 해맑게 웃는 박해일이 범인이란 말인가. 정말로. 마을 사람들에게 더없이 친절하고 헌신적인 이 사람이 정말로 범인이란 말인가. 의심하라.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건소장 제우성은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섬마을 주민들을 택했고, 그들에게 처방해주는 약 안에 실험물질을 넣음으로써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고자 했다. 애초부터 지금과 같은 결과를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그 실험이 그들 몰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잘못이라고 할 순 있겠지만, 적어도 그는 좋은 목적을 가지고 실험에 임했다. 그렇다면 애초 좋은 목적을 가지고 행했으나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결과가 발생했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일까.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실험했던 제우성의 잘못일까.

의무론으로 살펴본 보건소장 제우성의 행동

철학. 그 중에서도 윤리학에는 의무론과 결과론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행동이 윤리적인가 비윤리적인가를 판단할 때 의무론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를 중시하는 반면, 결과론은 행위의 결과를 중요하게 여긴다. 길거리에 지갑이 떨어져있다. 열어봤더니 안에는 현금 5만원과 신분증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주인에게 연락해서 직접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현금 5만원만 쏙 빼고 쓰레기통에 내다 버릴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흔히 전자를 착한 행동으로, 후자를 악한 행동으로 규정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착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행위의 원인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신분증 사진을 보아하니 내 또래의 이쁜 여학생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냥 돌려주느니 이렇게라도 인연을 만들어 그녀와 어떻게 잘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둘째, 5만원 다 가져가고 지갑 버리는 건 양심상 못하겠고, 주인에게 돌려주면 사례비로 조금 떼어주지 않을까. 사례비면 내가 부당하게 취한 이득도 아니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도 없다. 셋째, 당연히 사람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 넷째, 지갑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이 불쌍하고 갖다 주면 행복해할 거 같아서. 그 외에도 행동의 몇 가지 원인을 더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셋째 당연히 사람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해야지, 라고 생각해서 지갑을 돌려줬다면 그는 의무론자요, 넷째 지갑을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에게 행복을 돌려주기 위해 지갑을 줬다면 그는 결과론자다. 의무론은 그 규칙을 지키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론이고, 결과론은 행위가 가져올 결과나 목적을 따져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옳은 행위라고 판단하는 이론이다. 의무론에서는 의도만 좋다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용서가 되지만, 결과론에서는 의도가 좋더라도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면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거꾸로 나쁜 의도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결과론에서는 허용되지만 의무론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제우성이 범인이라고 할 때 -범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의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죽어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애초 신약 개발이라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험했지만 그 결과는 살인과 자살이었다. 의무론에서 봤을 때 제우성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으니 잘못한 것이 아니고, 결과론에서 봤을 때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지만 그 결과가 잘못되었으니 잘못을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의무론자로 분류되는 칸트의 경우,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으므로 할 수 있는 것만을 의무로 부과했고, 따라서 우리는 의무에 따라서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에게 칼을 빌려줬던 친구가 어느 날 찾아와 시일이 됐으니 칼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친구는 굉장히 흥분해있었고 내게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말을 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하는가. 칸트에 따르면 그렇다. 내가 친구에게 칼을 빌린 것이 사실이고, 약속한 시일이 다 되었다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흥분한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한다. 나의 의무는 거기까지이고, 이후 그 친구가 실제로 그 칼로 누군가를 죽였든 말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칸트에 따르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주어진 의무에 따라야 한다. 선한 동기, 선한 의도에 따라 의무를 다 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든 괜찮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의무가 더 들어가 있다.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도 내가 지켜야 할 의무이지만,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의무도 내가 지켜야 할 의무다. 그러면 우리는 두 가지 지켜야 할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동기와 의무만을 우선하는 의무론자들에게는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칸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보건소장 제우성은 잘못이 없다. 신약을 개발해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의무에 의해서 실험을 했고, 비록 죽음이라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건 예상하지 못했던 바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다.




 

* 혹자는 박해일이 아니라 박솔미를 범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생존했고 박해일의 노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미 영화를 본 나로서도 결과가 어찌되었는지는 머리 속에 명확한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그 혼란이 비단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영화는 혼란한 틈새에서 홀로 빠져 나왔지만 우리는 아직 그 안에서 혼란을 겪고 있음을. 범인은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해진 것은 없다.


결과론으로 살펴본 보건소장 제우성의 행동

정말 잘못이 없을까. 결과론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자. 결과론은 행위하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 따라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 이론이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 의무나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를 살펴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의도나 의무보다는 결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도덕 원리이다. 결과론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도덕이론이 "공리주의"라는 것이다. 많이 들어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문구는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표어다. 엄밀히 들어가면,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엄격히 다르지만, 대개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공리라는 것은 한 집단 내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벤담을 계승해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던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

"옳은 행위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성립시키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 모두의 행복이다. 그 자신의 행복과 다른 행복을 놓고서, 공리주의는 행위자로 하여금 공평무사한 선의의 관망자로서 엄격히 불편부당해지기를 요구한다." (<공리주의> 2장)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제우성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20명도 안 되는 섬마을 주민들을 다 희생해서라도 신약 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면 고통받는 더 많은 이들의 삶을 구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도 제우성은 잘못이 없다 하겠다. 그는 그들이 모두 희생될지를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설령 모두 희생되었다 하더라도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면 그보다 몇 백배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실험대상이었던 마을 주민이 모두 죽었다면 그건 실험에 성공한 것이 아니므로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준다는 것 또한 거짓이다. 이들에게 투여해서 효과를 봤어야만 다른 이들에게도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가져다줄 이익은 이들의 생존을 전제한다. 제우성은 실험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실험 결과 더 많은 이들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지도 못했으므로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는 유죄다.

마무리 발언

제우성이 무죄이건 유죄이건 영화 속 섬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강한 의무감은 때로 도덕적 광신을 불러온다. 제우성은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다는 자신에게 부과한 강한 의무감으로 무장했고, 결국 강한 의무감은 도덕적 광신 상태를 불러왔다. 그는 그가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과 동일한 사람을 대상으로 무작위 실험을 했고, 실험결과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타인에게 살해되건 스스로 자살하건 그도 아니면 미쳐버리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지고 살겠다는 사명감을 지닐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그 짐을 지울 필요도 없다. 아무런 의무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사회부적응자가 되거나 범죄자가 되기 마련이지만, 지나친 의무감을 자신에게 지운 자 역시 자신에게 마찬가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32명을 살해한 승희-조가 어떤 작은 분노에 의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보겠다고, 거기에 일조해보겠다고 그랬는지 단정지어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있었고, 자신의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정화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승희-조뿐 아니라 의무와 사명감이 광신으로 나아간 사태는 곳곳에 널려있다.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게 하라"는 칸트의 명언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 선을 넘어가는 순간 의무는 광신으로 돌변한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네꼬 2007-05-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넘 멋쪄! *_*

비로그인 2007-05-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굳~! ㅡ_ㅡb

마늘빵 2007-05-0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네꼬님과 테츠님께서 좋으시다니 저도 좋습니다.
속마음1 : 니가 좋은거야 당연하지. 니가 쓴건데.
속마음2 : 아니다. 내가 쓴거래도 맘에 드는건 별로 없다.

비로그인 2007-05-0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난 어렵지... ㅠㅠ...

antitheme 2007-05-09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스포일러 경고
이글 때문에 내용은 안봤어요.
담에 영화보고 나서 읽어보겠습니다.

마늘빵 2007-05-09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 엄... 익숙한 분야가 아니라 그런가봐욤. 내가 어렵게 썼나? -_-a
안티테마님 / 넵. 스포일러 경고에요. 영화 보실거라면 이후에 보세요. :)

fallin 2007-07-25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리뷰네요^^의무론과 결과론..쉽고 재밌게 설명 잘하시네요ㅋㅋ 칸트의 칼이야기..과제때문에 읽었던 플라톤의'국가정체'라는 책에서도 나왔던 거 같아요. 철학이란 게 가끔은 말장난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또 어떻게 보면 참 재밌는 것도 같고...암튼 영화와 철학을 참 잘 접목시키셨어요..잘 읽고 가요 ^^

마늘빵 2007-07-25 22:28   좋아요 0 | URL
전적으로 제 머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_- 그간 읽어온 책들에서 영향을 받았겠죠. 칼의 예는 여기저기 많이 나오는 것이고. 이런거 저런거 다 빼고 나면 남는게 없습니다. 크흣.

kitsch78 2009-03-2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게 하라"는 칸트의 명언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 선을 넘어가는 순간 의무는 광신으로 돌변한다.

이거 무슨 뜻으로 쓰신 것인지 모르겠네요. 칸트의 정의가 당연히 '보편적 입법 원리'를 준칙으로 삼은 언명인데,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라는 말씀은 왜 나오는 건지?
말은 멋있어 보이긴 하는데 알맹이가 없네요.

마늘빵 2009-03-21 11: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건 조승희가 어떤 사명감이나 의무감으로 일을 저질렀다면(가정과 추측), 사건을 벌인 조승희의 그 의무는 광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칸트의 의무감이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