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5. 9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5511&ref=61&m_type=0

 

* 스포일러 경고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을 본 관객들 사이에서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여선생 장귀남(박솔미 분)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니 그녀가 범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보건소장 제우성(박해일 분)이 마을주민을 상대로 실험을 했으니 그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범인 여부가 확실히 가려지지 않고 의견이 나뉘는 것은 그만큼 영화의 결말이 애매하게 마무리되었다는 뜻이다.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대개의 추리소설류에서 볼 수 있는 마무리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명확히 드러나는 것 하나 없는 결말과 미궁에 빠진 채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건, 그 사이에서 극장을 빠져 나온 관객들은 두뇌게임을 즐긴다.

수많은 추리들이 가능하지만 이 글에서는 제우성(박해일 분)이 범인이라고 가정하자. 박해일은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자신이 연구하던 신약 실험을 감행하기 위해 "보건소장"의 신분으로 마을에 잠입했다. 마음씨 좋고 친절하고 똑똑하고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보건소장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마을 주민이라고 해봐야 2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사람 사는 맛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간다.

조용한 섬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살인사건. 아니 살인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밤새 고스톱을 치던 세 사람이 엉켜 피범벅이 되어있었다는 사실뿐.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은 없다. 몇 안 되는 마을 주민들은 모여서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놀라움에서 "누가 범인일까?" 라는 의심 품은 의문으로 넘어간다. 범인을 찾자. 분명 이 섬마을 안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짓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군가이다. 사건 그 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목격자를 찾아보자. 그러나 사건발생일로부터 날이 지날수록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져든다.




 

* 하얀 가운 입고 해맑게 웃는 박해일이 범인이란 말인가. 정말로. 마을 사람들에게 더없이 친절하고 헌신적인 이 사람이 정말로 범인이란 말인가. 의심하라.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건소장 제우성은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섬마을 주민들을 택했고, 그들에게 처방해주는 약 안에 실험물질을 넣음으로써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고자 했다. 애초부터 지금과 같은 결과를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그 실험이 그들 몰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잘못이라고 할 순 있겠지만, 적어도 그는 좋은 목적을 가지고 실험에 임했다. 그렇다면 애초 좋은 목적을 가지고 행했으나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결과가 발생했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일까.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실험했던 제우성의 잘못일까.

의무론으로 살펴본 보건소장 제우성의 행동

철학. 그 중에서도 윤리학에는 의무론과 결과론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행동이 윤리적인가 비윤리적인가를 판단할 때 의무론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를 중시하는 반면, 결과론은 행위의 결과를 중요하게 여긴다. 길거리에 지갑이 떨어져있다. 열어봤더니 안에는 현금 5만원과 신분증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주인에게 연락해서 직접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현금 5만원만 쏙 빼고 쓰레기통에 내다 버릴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흔히 전자를 착한 행동으로, 후자를 악한 행동으로 규정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착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행위의 원인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신분증 사진을 보아하니 내 또래의 이쁜 여학생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냥 돌려주느니 이렇게라도 인연을 만들어 그녀와 어떻게 잘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둘째, 5만원 다 가져가고 지갑 버리는 건 양심상 못하겠고, 주인에게 돌려주면 사례비로 조금 떼어주지 않을까. 사례비면 내가 부당하게 취한 이득도 아니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도 없다. 셋째, 당연히 사람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 넷째, 지갑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이 불쌍하고 갖다 주면 행복해할 거 같아서. 그 외에도 행동의 몇 가지 원인을 더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셋째 당연히 사람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해야지, 라고 생각해서 지갑을 돌려줬다면 그는 의무론자요, 넷째 지갑을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에게 행복을 돌려주기 위해 지갑을 줬다면 그는 결과론자다. 의무론은 그 규칙을 지키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론이고, 결과론은 행위가 가져올 결과나 목적을 따져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옳은 행위라고 판단하는 이론이다. 의무론에서는 의도만 좋다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용서가 되지만, 결과론에서는 의도가 좋더라도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면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거꾸로 나쁜 의도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결과론에서는 허용되지만 의무론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제우성이 범인이라고 할 때 -범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의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죽어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애초 신약 개발이라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험했지만 그 결과는 살인과 자살이었다. 의무론에서 봤을 때 제우성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으니 잘못한 것이 아니고, 결과론에서 봤을 때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지만 그 결과가 잘못되었으니 잘못을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의무론자로 분류되는 칸트의 경우,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으므로 할 수 있는 것만을 의무로 부과했고, 따라서 우리는 의무에 따라서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에게 칼을 빌려줬던 친구가 어느 날 찾아와 시일이 됐으니 칼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친구는 굉장히 흥분해있었고 내게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말을 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하는가. 칸트에 따르면 그렇다. 내가 친구에게 칼을 빌린 것이 사실이고, 약속한 시일이 다 되었다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흥분한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한다. 나의 의무는 거기까지이고, 이후 그 친구가 실제로 그 칼로 누군가를 죽였든 말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칸트에 따르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주어진 의무에 따라야 한다. 선한 동기, 선한 의도에 따라 의무를 다 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든 괜찮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의무가 더 들어가 있다.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도 내가 지켜야 할 의무이지만,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의무도 내가 지켜야 할 의무다. 그러면 우리는 두 가지 지켜야 할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동기와 의무만을 우선하는 의무론자들에게는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칸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보건소장 제우성은 잘못이 없다. 신약을 개발해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의무에 의해서 실험을 했고, 비록 죽음이라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건 예상하지 못했던 바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다.




 

* 혹자는 박해일이 아니라 박솔미를 범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생존했고 박해일의 노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미 영화를 본 나로서도 결과가 어찌되었는지는 머리 속에 명확한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그 혼란이 비단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영화는 혼란한 틈새에서 홀로 빠져 나왔지만 우리는 아직 그 안에서 혼란을 겪고 있음을. 범인은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해진 것은 없다.


결과론으로 살펴본 보건소장 제우성의 행동

정말 잘못이 없을까. 결과론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자. 결과론은 행위하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 따라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 이론이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 의무나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를 살펴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의도나 의무보다는 결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도덕 원리이다. 결과론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도덕이론이 "공리주의"라는 것이다. 많이 들어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문구는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표어다. 엄밀히 들어가면,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엄격히 다르지만, 대개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공리라는 것은 한 집단 내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벤담을 계승해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던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

"옳은 행위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성립시키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 모두의 행복이다. 그 자신의 행복과 다른 행복을 놓고서, 공리주의는 행위자로 하여금 공평무사한 선의의 관망자로서 엄격히 불편부당해지기를 요구한다." (<공리주의> 2장)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제우성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20명도 안 되는 섬마을 주민들을 다 희생해서라도 신약 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면 고통받는 더 많은 이들의 삶을 구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도 제우성은 잘못이 없다 하겠다. 그는 그들이 모두 희생될지를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설령 모두 희생되었다 하더라도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면 그보다 몇 백배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실험대상이었던 마을 주민이 모두 죽었다면 그건 실험에 성공한 것이 아니므로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준다는 것 또한 거짓이다. 이들에게 투여해서 효과를 봤어야만 다른 이들에게도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가져다줄 이익은 이들의 생존을 전제한다. 제우성은 실험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실험 결과 더 많은 이들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지도 못했으므로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는 유죄다.

마무리 발언

제우성이 무죄이건 유죄이건 영화 속 섬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강한 의무감은 때로 도덕적 광신을 불러온다. 제우성은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다는 자신에게 부과한 강한 의무감으로 무장했고, 결국 강한 의무감은 도덕적 광신 상태를 불러왔다. 그는 그가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과 동일한 사람을 대상으로 무작위 실험을 했고, 실험결과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타인에게 살해되건 스스로 자살하건 그도 아니면 미쳐버리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지고 살겠다는 사명감을 지닐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그 짐을 지울 필요도 없다. 아무런 의무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사회부적응자가 되거나 범죄자가 되기 마련이지만, 지나친 의무감을 자신에게 지운 자 역시 자신에게 마찬가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32명을 살해한 승희-조가 어떤 작은 분노에 의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보겠다고, 거기에 일조해보겠다고 그랬는지 단정지어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있었고, 자신의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정화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승희-조뿐 아니라 의무와 사명감이 광신으로 나아간 사태는 곳곳에 널려있다.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게 하라"는 칸트의 명언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 선을 넘어가는 순간 의무는 광신으로 돌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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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5-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넘 멋쪄! *_*

비로그인 2007-05-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굳~! ㅡ_ㅡb

마늘빵 2007-05-0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네꼬님과 테츠님께서 좋으시다니 저도 좋습니다.
속마음1 : 니가 좋은거야 당연하지. 니가 쓴건데.
속마음2 : 아니다. 내가 쓴거래도 맘에 드는건 별로 없다.

비로그인 2007-05-0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난 어렵지... ㅠㅠ...

antitheme 2007-05-09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스포일러 경고
이글 때문에 내용은 안봤어요.
담에 영화보고 나서 읽어보겠습니다.

마늘빵 2007-05-09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 엄... 익숙한 분야가 아니라 그런가봐욤. 내가 어렵게 썼나? -_-a
안티테마님 / 넵. 스포일러 경고에요. 영화 보실거라면 이후에 보세요. :)

fallin 2007-07-25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리뷰네요^^의무론과 결과론..쉽고 재밌게 설명 잘하시네요ㅋㅋ 칸트의 칼이야기..과제때문에 읽었던 플라톤의'국가정체'라는 책에서도 나왔던 거 같아요. 철학이란 게 가끔은 말장난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또 어떻게 보면 참 재밌는 것도 같고...암튼 영화와 철학을 참 잘 접목시키셨어요..잘 읽고 가요 ^^

마늘빵 2007-07-25 22:28   좋아요 0 | URL
전적으로 제 머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_- 그간 읽어온 책들에서 영향을 받았겠죠. 칼의 예는 여기저기 많이 나오는 것이고. 이런거 저런거 다 빼고 나면 남는게 없습니다. 크흣.

kitsch78 2009-03-2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게 하라"는 칸트의 명언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 선을 넘어가는 순간 의무는 광신으로 돌변한다.

이거 무슨 뜻으로 쓰신 것인지 모르겠네요. 칸트의 정의가 당연히 '보편적 입법 원리'를 준칙으로 삼은 언명인데,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라는 말씀은 왜 나오는 건지?
말은 멋있어 보이긴 하는데 알맹이가 없네요.

마늘빵 2009-03-21 11: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건 조승희가 어떤 사명감이나 의무감으로 일을 저질렀다면(가정과 추측), 사건을 벌인 조승희의 그 의무는 광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칸트의 의무감이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