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지구온난화에 대해 말들이 많다. 그 누구도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이 뜨거워져 동식물이 멸종하고,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미래가 현실이 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을 알리는 책들은 꽤 많이 나와있다. 아직 많은 책들을 접해보진 못했지만 어떤 책은 구체적인 통계자료와 수치를 통해 온난화의 위험성을 알리고, 어떤 책은 직접 재앙의 현장을 묘사하며 이렇게 변화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지구 재앙 보고서>는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그 세부묘사와 답사경험이 집 안에서 편히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절실히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콜버트라는 미국 뉴욕타임즈의 기자가 쓴 책으로, 글을 읽고 있으면 기자의 필체가 확실히 느껴진다. 대개 전문가가 아닌 기자가 쓴 책은 잘 만들어진 한편의 보고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하지만 그다지 호소력이 있다거나 행동의 변화를 꿰하지는 못하는 듯 하다. 지구 온난화를 이야기함에 있어 참고할 만한 자료로서는 손색이 없으나 이 책을 통해 아 이만큼이나 위험하구나, 나부터라도 생활 속에서 지구온난화를 지연시킬 수 있는 실천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까지는 이어지기 힘들다는 말이다.

  오히려 얼마전 읽은 <기후의 역습>이 이 책 보다는 가독성도 높고, 확실한 그래프와 통계를 통한 수치도 제공해주며, 호소력도 강하다. 알래스카 주 데드호스, 레이캬비크 교외, 그린란드 빙상에 위치한 연구 기지인 스위스 기지 등 북극권 이북 지역을 저자가 직접 탐방하고 취재한 기록들을 담았다고 하는데 다소 산만하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가 결국 도달해야 할 곳은 독자의 머리와 마음일텐데 거기까지는 힘겹다.

  온난화는 당면한 현실이고, 지금 이대로라면 암울한 미래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지구 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인식가능한 개체라면 당연히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의 환경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동식물의 생존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나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에서라도 지구온난화의 현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인식에 도달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더불어 <기후의 역습> 도 필히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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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moon 2007-05-0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후의 역습, 서점에서 찾아봐야겠어요. ^^

마늘빵 2007-05-0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302moon 님. 네. 관련된 책들을 계속 살펴보려고 하는데, 아직까진 <기후의 역습>이 낫네요. 한권에 압축적으로 알려줄거 다 알려주고 호소력도 있고.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영화는 좋았는데 책은 어떨지.

네꼬 2007-05-0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히" 읽으라고 하시니 원,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에잇. 땡스투 누르고 담아가요. 총총.

마늘빵 2007-05-10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 ^^ 흐흣.
 
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절판


"추위가 오고, 더 많은 남쪽 지역이 북극형 생물에 적합한 환경으로 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온난한 환경에 맞는 기존 생물은 밀려나고 북극형 생물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아울러, 온난한 지역의 생물은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 기후가 다시 따뜻해지면 북극형 생물은 북쪽으로 물러가며, 온난한 지역의 종이 이들의 뒤를 바짝 쫓아간다. 그리고 산기슭부터 눈이 녹음에 따라, 북극형 생물은 동족이 북상하고 있는 동안, 해빙된 땅을 장악한 뒤 기온이 상승할수록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다윈 <종의 기원> '지리적 분포' 편 中)-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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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5. 9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5511&ref=61&m_type=0

 

* 스포일러 경고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을 본 관객들 사이에서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여선생 장귀남(박솔미 분)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니 그녀가 범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보건소장 제우성(박해일 분)이 마을주민을 상대로 실험을 했으니 그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범인 여부가 확실히 가려지지 않고 의견이 나뉘는 것은 그만큼 영화의 결말이 애매하게 마무리되었다는 뜻이다.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대개의 추리소설류에서 볼 수 있는 마무리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명확히 드러나는 것 하나 없는 결말과 미궁에 빠진 채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건, 그 사이에서 극장을 빠져 나온 관객들은 두뇌게임을 즐긴다.

수많은 추리들이 가능하지만 이 글에서는 제우성(박해일 분)이 범인이라고 가정하자. 박해일은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자신이 연구하던 신약 실험을 감행하기 위해 "보건소장"의 신분으로 마을에 잠입했다. 마음씨 좋고 친절하고 똑똑하고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보건소장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마을 주민이라고 해봐야 2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사람 사는 맛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간다.

조용한 섬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살인사건. 아니 살인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밤새 고스톱을 치던 세 사람이 엉켜 피범벅이 되어있었다는 사실뿐.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은 없다. 몇 안 되는 마을 주민들은 모여서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놀라움에서 "누가 범인일까?" 라는 의심 품은 의문으로 넘어간다. 범인을 찾자. 분명 이 섬마을 안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짓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군가이다. 사건 그 날 밤의 일을 떠올리며 목격자를 찾아보자. 그러나 사건발생일로부터 날이 지날수록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져든다.




 

* 하얀 가운 입고 해맑게 웃는 박해일이 범인이란 말인가. 정말로. 마을 사람들에게 더없이 친절하고 헌신적인 이 사람이 정말로 범인이란 말인가. 의심하라.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건소장 제우성은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섬마을 주민들을 택했고, 그들에게 처방해주는 약 안에 실험물질을 넣음으로써 장기적으로 그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고자 했다. 애초부터 지금과 같은 결과를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그 실험이 그들 몰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잘못이라고 할 순 있겠지만, 적어도 그는 좋은 목적을 가지고 실험에 임했다. 그렇다면 애초 좋은 목적을 가지고 행했으나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결과가 발생했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일까.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실험했던 제우성의 잘못일까.

의무론으로 살펴본 보건소장 제우성의 행동

철학. 그 중에서도 윤리학에는 의무론과 결과론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행동이 윤리적인가 비윤리적인가를 판단할 때 의무론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를 중시하는 반면, 결과론은 행위의 결과를 중요하게 여긴다. 길거리에 지갑이 떨어져있다. 열어봤더니 안에는 현금 5만원과 신분증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주인에게 연락해서 직접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현금 5만원만 쏙 빼고 쓰레기통에 내다 버릴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흔히 전자를 착한 행동으로, 후자를 악한 행동으로 규정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에게 돌려줬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착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행위의 원인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신분증 사진을 보아하니 내 또래의 이쁜 여학생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냥 돌려주느니 이렇게라도 인연을 만들어 그녀와 어떻게 잘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둘째, 5만원 다 가져가고 지갑 버리는 건 양심상 못하겠고, 주인에게 돌려주면 사례비로 조금 떼어주지 않을까. 사례비면 내가 부당하게 취한 이득도 아니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도 없다. 셋째, 당연히 사람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 넷째, 지갑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이 불쌍하고 갖다 주면 행복해할 거 같아서. 그 외에도 행동의 몇 가지 원인을 더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셋째 당연히 사람 된 도리로서 그렇게 해야지, 라고 생각해서 지갑을 돌려줬다면 그는 의무론자요, 넷째 지갑을 잃어버리고 슬퍼하고 있을 그 사람에게 행복을 돌려주기 위해 지갑을 줬다면 그는 결과론자다. 의무론은 그 규칙을 지키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론이고, 결과론은 행위가 가져올 결과나 목적을 따져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옳은 행위라고 판단하는 이론이다. 의무론에서는 의도만 좋다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용서가 되지만, 결과론에서는 의도가 좋더라도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면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거꾸로 나쁜 의도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결과론에서는 허용되지만 의무론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제우성이 범인이라고 할 때 -범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의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죽어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애초 신약 개발이라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험했지만 그 결과는 살인과 자살이었다. 의무론에서 봤을 때 제우성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으니 잘못한 것이 아니고, 결과론에서 봤을 때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실험에 임했지만 그 결과가 잘못되었으니 잘못을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의무론자로 분류되는 칸트의 경우,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으므로 할 수 있는 것만을 의무로 부과했고, 따라서 우리는 의무에 따라서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에게 칼을 빌려줬던 친구가 어느 날 찾아와 시일이 됐으니 칼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친구는 굉장히 흥분해있었고 내게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말을 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하는가. 칸트에 따르면 그렇다. 내가 친구에게 칼을 빌린 것이 사실이고, 약속한 시일이 다 되었다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흥분한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한다. 나의 의무는 거기까지이고, 이후 그 친구가 실제로 그 칼로 누군가를 죽였든 말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칸트에 따르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주어진 의무에 따라야 한다. 선한 동기, 선한 의도에 따라 의무를 다 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든 괜찮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의무가 더 들어가 있다. "친구에게 칼을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도 내가 지켜야 할 의무이지만,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의무도 내가 지켜야 할 의무다. 그러면 우리는 두 가지 지켜야 할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동기와 의무만을 우선하는 의무론자들에게는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칸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보건소장 제우성은 잘못이 없다. 신약을 개발해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의무에 의해서 실험을 했고, 비록 죽음이라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건 예상하지 못했던 바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다.




 

* 혹자는 박해일이 아니라 박솔미를 범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생존했고 박해일의 노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미 영화를 본 나로서도 결과가 어찌되었는지는 머리 속에 명확한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그 혼란이 비단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영화는 혼란한 틈새에서 홀로 빠져 나왔지만 우리는 아직 그 안에서 혼란을 겪고 있음을. 범인은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해진 것은 없다.


결과론으로 살펴본 보건소장 제우성의 행동

정말 잘못이 없을까. 결과론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자. 결과론은 행위하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 따라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 이론이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 의무나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를 살펴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의도나 의무보다는 결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도덕 원리이다. 결과론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도덕이론이 "공리주의"라는 것이다. 많이 들어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문구는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표어다. 엄밀히 들어가면,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엄격히 다르지만, 대개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공리라는 것은 한 집단 내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은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벤담을 계승해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던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

"옳은 행위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성립시키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 모두의 행복이다. 그 자신의 행복과 다른 행복을 놓고서, 공리주의는 행위자로 하여금 공평무사한 선의의 관망자로서 엄격히 불편부당해지기를 요구한다." (<공리주의> 2장)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제우성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20명도 안 되는 섬마을 주민들을 다 희생해서라도 신약 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면 고통받는 더 많은 이들의 삶을 구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도 제우성은 잘못이 없다 하겠다. 그는 그들이 모두 희생될지를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설령 모두 희생되었다 하더라도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면 그보다 몇 백배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실험대상이었던 마을 주민이 모두 죽었다면 그건 실험에 성공한 것이 아니므로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준다는 것 또한 거짓이다. 이들에게 투여해서 효과를 봤어야만 다른 이들에게도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가져다줄 이익은 이들의 생존을 전제한다. 제우성은 실험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실험 결과 더 많은 이들에게 이득을 가져다 주지도 못했으므로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는 유죄다.

마무리 발언

제우성이 무죄이건 유죄이건 영화 속 섬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강한 의무감은 때로 도덕적 광신을 불러온다. 제우성은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다는 자신에게 부과한 강한 의무감으로 무장했고, 결국 강한 의무감은 도덕적 광신 상태를 불러왔다. 그는 그가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과 동일한 사람을 대상으로 무작위 실험을 했고, 실험결과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타인에게 살해되건 스스로 자살하건 그도 아니면 미쳐버리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지고 살겠다는 사명감을 지닐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그 짐을 지울 필요도 없다. 아무런 의무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사회부적응자가 되거나 범죄자가 되기 마련이지만, 지나친 의무감을 자신에게 지운 자 역시 자신에게 마찬가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32명을 살해한 승희-조가 어떤 작은 분노에 의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보겠다고, 거기에 일조해보겠다고 그랬는지 단정지어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있었고, 자신의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정화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승희-조뿐 아니라 의무와 사명감이 광신으로 나아간 사태는 곳곳에 널려있다.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게 하라"는 칸트의 명언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 선을 넘어가는 순간 의무는 광신으로 돌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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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5-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넘 멋쪄! *_*

비로그인 2007-05-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굳~! ㅡ_ㅡb

마늘빵 2007-05-0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네꼬님과 테츠님께서 좋으시다니 저도 좋습니다.
속마음1 : 니가 좋은거야 당연하지. 니가 쓴건데.
속마음2 : 아니다. 내가 쓴거래도 맘에 드는건 별로 없다.

비로그인 2007-05-0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난 어렵지... ㅠㅠ...

antitheme 2007-05-09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스포일러 경고
이글 때문에 내용은 안봤어요.
담에 영화보고 나서 읽어보겠습니다.

마늘빵 2007-05-09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 엄... 익숙한 분야가 아니라 그런가봐욤. 내가 어렵게 썼나? -_-a
안티테마님 / 넵. 스포일러 경고에요. 영화 보실거라면 이후에 보세요. :)

fallin 2007-07-25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리뷰네요^^의무론과 결과론..쉽고 재밌게 설명 잘하시네요ㅋㅋ 칸트의 칼이야기..과제때문에 읽었던 플라톤의'국가정체'라는 책에서도 나왔던 거 같아요. 철학이란 게 가끔은 말장난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또 어떻게 보면 참 재밌는 것도 같고...암튼 영화와 철학을 참 잘 접목시키셨어요..잘 읽고 가요 ^^

마늘빵 2007-07-25 22:28   좋아요 0 | URL
전적으로 제 머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_- 그간 읽어온 책들에서 영향을 받았겠죠. 칼의 예는 여기저기 많이 나오는 것이고. 이런거 저런거 다 빼고 나면 남는게 없습니다. 크흣.

kitsch78 2009-03-2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맞게 하라"는 칸트의 명언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 선을 넘어가는 순간 의무는 광신으로 돌변한다.

이거 무슨 뜻으로 쓰신 것인지 모르겠네요. 칸트의 정의가 당연히 '보편적 입법 원리'를 준칙으로 삼은 언명인데, 어디까지나 '보편적 입법'에 한해서다라는 말씀은 왜 나오는 건지?
말은 멋있어 보이긴 하는데 알맹이가 없네요.

마늘빵 2009-03-21 11: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건 조승희가 어떤 사명감이나 의무감으로 일을 저질렀다면(가정과 추측), 사건을 벌인 조승희의 그 의무는 광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칸트의 의무감이 아닌.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 개정증보판 정재승의 시네마 사이언스
정재승 지음 / 동아시아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 정재승씨야 이미 언론에 많이 노출되었고, 그의 다른 책 <과학콘서트>가 티비 책 소개 프로그램에 한번 뜨면서 유명해져, 그의 '책'은 몰라도 그의 '이름'은 한번쯤 다 들어봤을 것이다.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는 정재승씨가 예전에 대학원 시절부터 <과학동아>에 '시네마 사이언스'라는 코너에 연재하던 글들을 기초로 하여 보완/보충하여 엮어낸 책이다. 철학과 영화의 결합은 더 이상 특별한 만남이라 볼 수 없고, 이제는 과학과 영화의 새로운 만남이 시도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다른 분야들간의 이종교배가 이뤄지기 전인 1999년에 이미 만들어져 최근의 추세보다 먼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 과학기술부인증우수과학도서'라는 마크기 찍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고 난 나로서는 인정하기 힘들다. 내용이 깊이있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영화 속의 실수, 오류 잡아내기에 주력하고 있는 책의 내용들이 썩 유쾌하지 않다. '오류를 잡아내기 위해 잡아내는 글'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399쪽에 달하는 상당한 두께의 책에서 그는 꽤 많은 영화들을 통해서 독자에게 과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인상을 전해주기보다는 영화 속 과학적 오류 잡아내기에 집중하고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 뒷부분으로 넘어갈수록 그래도 좀 나아지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와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중이 과학에 좀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해 영화를 매개로 삼아 작업한 것이라면,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99년부터 17쇄를 찍었다고 하는데 이 책이 인기를 끈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정재승'이라는 이름의 유명세가 그리 만든 듯 하다.

  글 자체를 놓고 봤을 때도 그다지 질적으로 우수하다고 할 순 없다. 역시 후반부의 글들은 괜찮지만 전반부의 글들이 문제다. 아마도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그 당시 저자가 텀을 두고 작성했을 가능성이 많고 - 연재물이다보니 - 이후에 추가 작성된 글들은 저자 개인의 역량이 좀더 발전한 상태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괜찮겠지만, 초반의 글들은 아니올시다이다. 연재물을 그대로 싣지 않고 다시 한번  손보면서 대거 수정/보완했다면 더 좋은 글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과학콘서트>는 재밌게 봤지만, 이 책은 아니다.

  p.s. 과학과 영화의 교배작으로는, 현재 한국일보에 주일우씨가 과학@영화 라는 제목으로 매주 연재하고 있는 글이 마음에 든다. 아직 10여회 밖에 작성하지 않았고, 또 그가 스스로 책으로 엮어낼 의지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과학@영화 시리즈가 하나의 완성된 책으로 묶어져 나오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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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공주 2007-05-0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추천하신 컬럼부터 읽어봐야겠네요.

마늘빵 2007-05-0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한국일보 주일우씨 칼럼 매주 보고 있습니다. 분량도 많아요.

마늘빵 2007-05-0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일보 사이트에서 문화면 들어가시면 왼쪽에 연재물 메뉴 나올 겁니다. 거기에 과학@영화 로 들어가세요.

책읽기는즐거움 2007-05-11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아프락사스님 제생각과 약간 다른 부분이 있는것 같아서 글을 올려봅니다,
저도 정확히 몰라서요. 물어볼겸 해서요^^
윗글 중에서
'정재승'이라는 이름의 유명세가 그리 만든 듯 하다.
라는 부분이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위책이 출판되어 잘팔렸기때문에 정재승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게 아닐까요? 물론 2000년대 초반부터는 정재승이란 이름때문에 책이 많이 팔렸겠지만요.
그리고 몇년전부터는 여러곳에서 영화와 과학을 접목시켜 어느 수준이상의 글이 많이 나오기시작했는데 99년 그 당시에는 정재승씨 정도의 수준으로 영화와 과학을 접목시켜 글을 적을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이쪽에 관심이 많아 당시에 열심히 찾아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대부분의 글이 과학적 설득력이나 구성력에서 떨어지는 글이었습니다. (굳이 꼽자면 딴지 일보에서 좀 괜찮게 적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외에는....-_-;;:)

책읽기는즐거움 2007-05-1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정리하여 말해본다면 그 텍스트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물론 요즘의 기준으로 만족하기 힘든 책일 수도 있지만 시대적 상황과 결부시켜서 생각해보면 이런쪽의 글을 어느정도 대중화시키는데에 공헌했다고는 볼수 없을까 생각해서 글을 올려 봅니다.^^ 뭐든지 첫걸음이 힘든 편이 잖아요ㅋ
대중에게 이책이 끼친영향도 무시할수는 없고요ㅋ
그리고 솔직히말해, 그동안 과학과 영화를 접목시켰다는 미명하에 나온 책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10년전의 글에 비해 요즘 신문에 기재되는 생생한 글이 큰 차이를 보이지 못한다면 그거야 말로 글 쓰는 사람들이 통렬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그냥 아프락사스님의 글을 읽으니 여러가지 생각과 궁금증이 나서 끼적끼적ㅋㅋ
거려 봤습니다. 부드럽게 봐주세요^^

책읽기는즐거움 2007-05-1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그리고 덧붇이면 처음시도 되는 분야의 글을 쓰는데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수 있으려면 영화에 사용된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가는것 보다는 오류를 짚어내며 글을 쓰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오류만 그렇게 잡아내지도 않는데 초반에 그런 관념이 박혀 있으니 님께서 책을 읽으시면서 계속 그렇게 생각하신게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물론 아닐수도 있어요^^;;;;) 좀 글의 순서를 잘만 배치했더라면 아프락사스님이 더재밌게 책을 읽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분명히 한챕터안에 오류도 잡아내고 그 영화의 다른 부분에서의 과학적 원리도 설명했었거든요. 오류만 냅다 잡아낸 부분은 없었던걸로 기억하는데,,,,아무래도 제 기억이 조작된듯 하네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비전공자는 그 잡아낼수없는 부분들을 잘 잡아 냈었다는 기억도 있는데 오래되어서 책을 봐야지만 그부분이 어딘지 기억해 낼수 있겠군요ㅜ.ㅜ이런 기억력이 점점 쇠퇴하는듯ㅜ.ㅜ
 
벤담 & 싱어 : 매사에 공평하라 지식인마을 16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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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당사자의 행복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또는 촉진시키거나 억누르는) 경향에 따라 모든 각각의 행위를 승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모든 각각의 행위란 개인의 사적인 모든 행위뿐 아니라 정부의 모든 법령의 작용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벤담) -63쪽

"옳은 행위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성립시키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 모두의 행복이다. 그 자신의 행복과 다른 행복을 놓고서, 공리주의는 행위자로 하여금 공평무사한 선의의 관망자로서 엄격히 불편부당해지기를 요구한다."
(<공리주의> 2장, 밀) -63-64쪽

노직은 사람들이 이 기계(경험기계)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즐거움 그 자체보다는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현실의 인간 관계와 사회 및 자연 환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직은 이런 것을 무시하는 쾌락주의는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본다면 공리주의도 옳지 않다. -79쪽

벤담은 감옥이 터무니없이 잔인한 고통을 주는 곳이 아니라 참회하면서 개과천선하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의도로 팬옵티콘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감옥은 아주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이었는데 벤담이 설계한 팬옵티콘은 위생적인 화장실과 환기, 중앙 냉난방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시민에게 공개되어 시민이 교도소 운영을 감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죄수들은 억압과 굶주림, 질병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이 점에서 팬옵티콘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시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팬옵티콘은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교화시키는 '교도소'의 선구적인 모델이었다. -89쪽

"나는 이제, 나 자신의 이익 대신에, 나의 결정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고려는 나에게 모든 이익들을 측정해서 영향받는 사람들의 이익을 최대화할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적어도 어떤 수준에서 도덕적인 추리를 할 때, 나는 영향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행동을 선택해야만 한다." (싱어, <실천윤리학>(33-34쪽)) -99쪽

"공리주의는 최소한의 것이며, 이기적인 의사 결정을 보편화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첫 번째 지점이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한 이러한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공리주의를 넘어서서 공리주의적이지 않은 도덕적 규칙잉나 이상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이렇게 더 나아가야 할 합당한 이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이유가 만들어질 때까지, 우리가 공리주의자로 남아 있어야 할 까닭이 있다." (싱어, <실천윤리학>(35쪽)) -100쪽

우리가 말을 하기 전까지 윤리적인 행동이라고는 기껏해야 상대방이 은혜를 갚으면 우호적으로 핥아주고, 갚지 않을 경우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하게 되면서 그런 행동 대신에 "왜 그런 일을 했지?" 라고 물을 수 있게 된다. 이유를 묻는단든 것은 곧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102쪽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내가 단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면, 또한 전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이익이 내가 속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타인들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즉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의 사회가 여러 사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좀 더 확대된 시각에서 볼 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 구성원의 이익이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윤리적 추론은 일단 시작되면 당초에 제한되어 있던 윤리적 지평을 밀어내고 좀더 보편적 관점을 취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싱어, <사회생물학과 윤리>(216쪽))-109쪽

싱어가 공리주의자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모든 사람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라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벤담이나 밀, 싱어 모두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익을 말하지만 그 이익이 약간 다르다. 벤담과 밀에게 이익은 행복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그들의 슬로건이었고 행복은 즐거움이 있고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했다. 그들도 물론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행을 최소화하는 행동을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행복과 불행의 양을 계산하여 행복의 양이 더 크면 그 행동은 받아들인다. -115쪽

고전적 공리주의에서 가장 윤리적인 행동은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고통보다 즐거움을 더 많이 산출하는 행동이다. 반면에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에서는 최소한의 고통을 산출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공리주의를 부정적 공리주의라고 부른다. 또 싱어가 거론한 이익들은 우리가 바라는 바이기는 하지만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고통을 피했다고 해서, 남에게 간섭을 안 받는다고 해서 즐겁기까지 하겠는가? 그렇지만 그런 이익들은 분명히 우리가 바라고 선호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즐거움(쾌락)에 주목하는 고전적 공리주의와 달리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는 선호 공리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공리주의자는 어떤 행동이 즐거움을 산출하든 안하든 많은 사람의 욕구 또는 선호를 만족한다면 그 행동은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116쪽

벤담이나 싱어는 고통의 양이 똑같을 때 인간이라고 해서 우선 고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사람의 고통이 더 큰데도 그것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줄 몰라서 고통을 더 크게 느끼기도 한다.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붙잡았을 때 동물은 자신을 지금 보호하기 위해 붙잡았는지 죽이려고 붙잡았는지 구분할 줄 몰라서 훨씬 더 공포를 느낀다. 이성이 있다면 상황을 얼른 파악해서 편안함을 느낄 텐데 말이다. 인간과 동물의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물에게 가해지는 엄청난 고통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이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특성이다. -164쪽

공리주의자라면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쁘다고 대답할까? 공리주의는 즐거움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경향에 의해 행위를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비록 고통을 수반하지는 않는 죽임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즐기고 있는 행복이 없어지므로 나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잘 풀리지 않는 일도 있고 고민도 있지만 내 인생을 전체적으로 계산하면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살아있는 것 자체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죽으면 그런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죽으면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살인이 나쁜 공리주의적 이유였다. 그런데 내가 죽으면 행복을 누가 누릴 수 없는가? 내가? 나는 더 이상 없는데?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는데 언니가 먹어버렸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못 먹게 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내'가 죽는다면 어떨까? 더 이상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으니까 안타깝다고? 누가?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누군가? 나는 죽어서 없어졌는데. 결국 공리주의는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쁜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죽임이 왜 나쁜지 간접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다. 나에게 죽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해보자. 나는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나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 계획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거창한 것일 수도 있고 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죽는다는 것은 그 계획들을 헛되게 만들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나의 삶을 덜 행복하게 만든다. 그런 불안이 없다며 나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할 수 있었으므로 공리주의에서는 살인이 나쁘다는 것이 간접적으로는 설명이 된다. 물론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종을 의미하고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불안감을 준다.

-187-188쪽

"감각 있는 존재는 가치있는 것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며, 그릇이 깨어진다 해도, 내용물이 파손되지 않고 옮겨질 수 있는 다른 그릇이 있는 한, 그릇이 깨어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비록 육식가들이 그들이 먹는 동물의 죽음과 그 동물들이 경험했을 쾌락의 상실을 야기시키기도 했지만, 그들은 또한 더 많은 동물의 출생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식용으로 사육될 동물은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식가가 한 동물에 대하여 가하는 손해는 ...... 그들이 다음 동물에게 부여한 이익에 의하여 균형을 이루게 된다."
(싱어, <실천윤리학>(154쪽)) -193쪽

"단지 먹히는 동물에 대해서라면 먹는 것을 용서받을 매우 좋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동물을 먹음으로 인해 더 이익을 보고, 동물들도 결코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오랫동안 연장되는 미래의 불행에 대한 예감을 갖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의 손에서 공통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죽음은, 자연의 불가피한 역정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비하면 훨씬 신속하고 덜 고통스러운 것이다." (벤담) -194쪽

"다른 존재가 자의식적인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인격체를 죽이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으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존재가 인격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실제로 의심이 간다면, 우리는 그 존재에게 의심의 이득을 주어야만 한다."
(싱어, <실천윤리학>(131쪽)) -209쪽

사냥되는 동물이 고통 없이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동물을 죽이기만 할 뿐 다른 동물로 대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싱어는 이러한 사정 때문에 비록 스스로 대체 가능성 논변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음식을 얻기 위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은 전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동물의 고기를 먹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될 때마다 이 동물이 편안하게 사육되었고 고통 없이 죽었는지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들을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러할 때 그들의 삶은 우리의 단순한 욕구에 비해 가벼운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동물을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 사용하는 한,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마땅한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가 될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단지 그들의 즐거움 때문에 동물들을 계속 먹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에게 동물을 존중하고 그들의 이익에 대하여 동일한 관심을 가지라고 고무할 수 있겠는가?" (싱어, <실천윤리학>(167-168쪽))

-211쪽

유인원 프로젝트의 기본 강령은 유인원들에게 이런 기본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을 죽이거나 이유 없이 고통을 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처럼 유인원을 죽이거나 이유 없이 고통을 주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싱어의 논의에 따르면 유인원뿐만 아니라 다른 젖먹이동물에게도 이런 권리를 줘야 하짐나 우선 유인원부터라도 그런 권리를 주자는 것이 이 프로젝트다. -215쪽

한편 개고기 비판에 대한 가장 흔한 반론인 문화상대주의도 올바른 반론은 아니다. 문화상대주의는 우리 문화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우리 문화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남아 선호 사상이나 노비제가 우리의 문화였다는 사실이 그 문화가 옳음을 보여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론매체에 종종 보도가 되지만 보신탕용 개는 특히 비참한 환경에서 사육되고 잔인하게 도살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개는 몽둥이로 패서 잡아야 맛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그렇게 개를 도살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개지옥'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개들을 열악한 환경에서 기르는 모습들이 인터넷에 종종 공개된다. 개의 이익을 평등하게 고려하자는 것은 개를 애지중지 키우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개도 우리처럼 맞으면 아프고 죽지 않고 계속 살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배려해주자는 것이다. 다른 동물도 그렇지만 우선 개에게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218-219쪽

사회생물학과 같은 과학은 관찰자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윤리는 참여자의 관점이다. 예를 들어서 과학자로서의 나는, 굶고 있는 사람에게 기부를 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 가족을 위해 그 돈을 쓸 것인지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 덕분에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에 대해 가능한 모든 이론들을 갖추게 되었다고 해보자. 심지어 나와 모든 조건(재산, 가족, 성격 등)에서 비슷한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는 기부를 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면 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선택을 할까? 수많은 이론과 자료가 있지만 여전히 갈등할 수 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기부를 한단든 지식이 나에게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영향을 주어 오히려 반대로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는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과학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이론은 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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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0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과 벤담을 읽다보면, 결국 흄을 읽게 되더군요..
싱어는 고통받는 존재의 범위를 인간에 한정하지 않고 동물까지 확장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동정심.. 인간적 감정.. 설령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윤리적 판단과 실천의 근원이리리 생각합니다.
현대의 윤리학자 중 싱어의 의견에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답니다.
특히 동물을 대하는인간의 태도 면에서,


마늘빵 2007-05-03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벤담과 밀, 그리고 흄은 뗄 수 없는 관계지요. 곧 저도 흄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을게 참 많습니다. 흄까지 관심이 가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듯 해요.
싱어의 저서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싱어는 제 관심에서 없던 인물인데, 이번 기회에 깊이 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