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담 & 싱어 : 매사에 공평하라 지식인마을 16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7년 2월
장바구니담기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당사자의 행복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또는 촉진시키거나 억누르는) 경향에 따라 모든 각각의 행위를 승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모든 각각의 행위란 개인의 사적인 모든 행위뿐 아니라 정부의 모든 법령의 작용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벤담) -63쪽

"옳은 행위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성립시키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 모두의 행복이다. 그 자신의 행복과 다른 행복을 놓고서, 공리주의는 행위자로 하여금 공평무사한 선의의 관망자로서 엄격히 불편부당해지기를 요구한다."
(<공리주의> 2장, 밀) -63-64쪽

노직은 사람들이 이 기계(경험기계)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즐거움 그 자체보다는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현실의 인간 관계와 사회 및 자연 환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직은 이런 것을 무시하는 쾌락주의는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본다면 공리주의도 옳지 않다. -79쪽

벤담은 감옥이 터무니없이 잔인한 고통을 주는 곳이 아니라 참회하면서 개과천선하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의도로 팬옵티콘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감옥은 아주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이었는데 벤담이 설계한 팬옵티콘은 위생적인 화장실과 환기, 중앙 냉난방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시민에게 공개되어 시민이 교도소 운영을 감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죄수들은 억압과 굶주림, 질병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이 점에서 팬옵티콘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시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팬옵티콘은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교화시키는 '교도소'의 선구적인 모델이었다. -89쪽

"나는 이제, 나 자신의 이익 대신에, 나의 결정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고려는 나에게 모든 이익들을 측정해서 영향받는 사람들의 이익을 최대화할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적어도 어떤 수준에서 도덕적인 추리를 할 때, 나는 영향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행동을 선택해야만 한다." (싱어, <실천윤리학>(33-34쪽)) -99쪽

"공리주의는 최소한의 것이며, 이기적인 의사 결정을 보편화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첫 번째 지점이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한 이러한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공리주의를 넘어서서 공리주의적이지 않은 도덕적 규칙잉나 이상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이렇게 더 나아가야 할 합당한 이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이유가 만들어질 때까지, 우리가 공리주의자로 남아 있어야 할 까닭이 있다." (싱어, <실천윤리학>(35쪽)) -100쪽

우리가 말을 하기 전까지 윤리적인 행동이라고는 기껏해야 상대방이 은혜를 갚으면 우호적으로 핥아주고, 갚지 않을 경우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하게 되면서 그런 행동 대신에 "왜 그런 일을 했지?" 라고 물을 수 있게 된다. 이유를 묻는단든 것은 곧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102쪽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내가 단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면, 또한 전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이익이 내가 속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타인들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즉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의 사회가 여러 사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좀 더 확대된 시각에서 볼 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 구성원의 이익이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윤리적 추론은 일단 시작되면 당초에 제한되어 있던 윤리적 지평을 밀어내고 좀더 보편적 관점을 취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싱어, <사회생물학과 윤리>(216쪽))-109쪽

싱어가 공리주의자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모든 사람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라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벤담이나 밀, 싱어 모두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익을 말하지만 그 이익이 약간 다르다. 벤담과 밀에게 이익은 행복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그들의 슬로건이었고 행복은 즐거움이 있고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했다. 그들도 물론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행을 최소화하는 행동을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행복과 불행의 양을 계산하여 행복의 양이 더 크면 그 행동은 받아들인다. -115쪽

고전적 공리주의에서 가장 윤리적인 행동은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고통보다 즐거움을 더 많이 산출하는 행동이다. 반면에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에서는 최소한의 고통을 산출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공리주의를 부정적 공리주의라고 부른다. 또 싱어가 거론한 이익들은 우리가 바라는 바이기는 하지만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고통을 피했다고 해서, 남에게 간섭을 안 받는다고 해서 즐겁기까지 하겠는가? 그렇지만 그런 이익들은 분명히 우리가 바라고 선호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즐거움(쾌락)에 주목하는 고전적 공리주의와 달리 싱어와 같은 공리주의는 선호 공리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공리주의자는 어떤 행동이 즐거움을 산출하든 안하든 많은 사람의 욕구 또는 선호를 만족한다면 그 행동은 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116쪽

벤담이나 싱어는 고통의 양이 똑같을 때 인간이라고 해서 우선 고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사람의 고통이 더 큰데도 그것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줄 몰라서 고통을 더 크게 느끼기도 한다.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붙잡았을 때 동물은 자신을 지금 보호하기 위해 붙잡았는지 죽이려고 붙잡았는지 구분할 줄 몰라서 훨씬 더 공포를 느낀다. 이성이 있다면 상황을 얼른 파악해서 편안함을 느낄 텐데 말이다. 인간과 동물의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물에게 가해지는 엄청난 고통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만이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특성이다. -164쪽

공리주의자라면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쁘다고 대답할까? 공리주의는 즐거움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경향에 의해 행위를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비록 고통을 수반하지는 않는 죽임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즐기고 있는 행복이 없어지므로 나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잘 풀리지 않는 일도 있고 고민도 있지만 내 인생을 전체적으로 계산하면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살아있는 것 자체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죽으면 그런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죽으면 행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살인이 나쁜 공리주의적 이유였다. 그런데 내가 죽으면 행복을 누가 누릴 수 없는가? 내가? 나는 더 이상 없는데?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는데 언니가 먹어버렸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못 먹게 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내'가 죽는다면 어떨까? 더 이상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으니까 안타깝다고? 누가?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누군가? 나는 죽어서 없어졌는데. 결국 공리주의는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쁜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죽임이 왜 나쁜지 간접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다. 나에게 죽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해보자. 나는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나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 계획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거창한 것일 수도 있고 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죽는다는 것은 그 계획들을 헛되게 만들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나의 삶을 덜 행복하게 만든다. 그런 불안이 없다며 나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할 수 있었으므로 공리주의에서는 살인이 나쁘다는 것이 간접적으로는 설명이 된다. 물론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종을 의미하고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불안감을 준다.

-187-188쪽

"감각 있는 존재는 가치있는 것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며, 그릇이 깨어진다 해도, 내용물이 파손되지 않고 옮겨질 수 있는 다른 그릇이 있는 한, 그릇이 깨어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비록 육식가들이 그들이 먹는 동물의 죽음과 그 동물들이 경험했을 쾌락의 상실을 야기시키기도 했지만, 그들은 또한 더 많은 동물의 출생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식용으로 사육될 동물은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식가가 한 동물에 대하여 가하는 손해는 ...... 그들이 다음 동물에게 부여한 이익에 의하여 균형을 이루게 된다."
(싱어, <실천윤리학>(154쪽)) -193쪽

"단지 먹히는 동물에 대해서라면 먹는 것을 용서받을 매우 좋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동물을 먹음으로 인해 더 이익을 보고, 동물들도 결코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오랫동안 연장되는 미래의 불행에 대한 예감을 갖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의 손에서 공통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죽음은, 자연의 불가피한 역정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비하면 훨씬 신속하고 덜 고통스러운 것이다." (벤담) -194쪽

"다른 존재가 자의식적인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인격체를 죽이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으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존재가 인격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실제로 의심이 간다면, 우리는 그 존재에게 의심의 이득을 주어야만 한다."
(싱어, <실천윤리학>(131쪽)) -209쪽

사냥되는 동물이 고통 없이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동물을 죽이기만 할 뿐 다른 동물로 대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싱어는 이러한 사정 때문에 비록 스스로 대체 가능성 논변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음식을 얻기 위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은 전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동물의 고기를 먹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될 때마다 이 동물이 편안하게 사육되었고 고통 없이 죽었는지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들을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러할 때 그들의 삶은 우리의 단순한 욕구에 비해 가벼운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동물을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 사용하는 한,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마땅한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가 될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단지 그들의 즐거움 때문에 동물들을 계속 먹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사람들에게 동물을 존중하고 그들의 이익에 대하여 동일한 관심을 가지라고 고무할 수 있겠는가?" (싱어, <실천윤리학>(167-168쪽))

-211쪽

유인원 프로젝트의 기본 강령은 유인원들에게 이런 기본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을 죽이거나 이유 없이 고통을 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처럼 유인원을 죽이거나 이유 없이 고통을 주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싱어의 논의에 따르면 유인원뿐만 아니라 다른 젖먹이동물에게도 이런 권리를 줘야 하짐나 우선 유인원부터라도 그런 권리를 주자는 것이 이 프로젝트다. -215쪽

한편 개고기 비판에 대한 가장 흔한 반론인 문화상대주의도 올바른 반론은 아니다. 문화상대주의는 우리 문화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우리 문화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남아 선호 사상이나 노비제가 우리의 문화였다는 사실이 그 문화가 옳음을 보여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론매체에 종종 보도가 되지만 보신탕용 개는 특히 비참한 환경에서 사육되고 잔인하게 도살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개는 몽둥이로 패서 잡아야 맛있다고 했다. 지금이야 그렇게 개를 도살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개지옥'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개들을 열악한 환경에서 기르는 모습들이 인터넷에 종종 공개된다. 개의 이익을 평등하게 고려하자는 것은 개를 애지중지 키우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개도 우리처럼 맞으면 아프고 죽지 않고 계속 살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배려해주자는 것이다. 다른 동물도 그렇지만 우선 개에게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218-219쪽

사회생물학과 같은 과학은 관찰자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윤리는 참여자의 관점이다. 예를 들어서 과학자로서의 나는, 굶고 있는 사람에게 기부를 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 가족을 위해 그 돈을 쓸 것인지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 덕분에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에 대해 가능한 모든 이론들을 갖추게 되었다고 해보자. 심지어 나와 모든 조건(재산, 가족, 성격 등)에서 비슷한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는 기부를 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면 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은 선택을 할까? 수많은 이론과 자료가 있지만 여전히 갈등할 수 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기부를 한단든 지식이 나에게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영향을 주어 오히려 반대로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는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과학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이론은 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다. -247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5-0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과 벤담을 읽다보면, 결국 흄을 읽게 되더군요..
싱어는 고통받는 존재의 범위를 인간에 한정하지 않고 동물까지 확장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동정심.. 인간적 감정.. 설령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윤리적 판단과 실천의 근원이리리 생각합니다.
현대의 윤리학자 중 싱어의 의견에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답니다.
특히 동물을 대하는인간의 태도 면에서,


마늘빵 2007-05-03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벤담과 밀, 그리고 흄은 뗄 수 없는 관계지요. 곧 저도 흄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을게 참 많습니다. 흄까지 관심이 가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듯 해요.
싱어의 저서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싱어는 제 관심에서 없던 인물인데, 이번 기회에 깊이 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