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과 김용옥 - 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1년 10월에 구입하고선 읽다 만 책이다. 2001년 12월에 입대 했다가 2004년 1월에 나왔으니 책이 출간된지는 오래되었으나 내가 이 책을 구경한 건 기껏해야 1년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기점으로해서 한겨레 신문의 칼럼연재를 중단하고,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기를 갖겠노라며 절필을 선언했지만, 당시 강준만 교수가 한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강준만 교수는 엄청난 다작가다. 그는 한국사회에 대해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책 내기를 책 읽기 하듯이 한다. 절필을 선언하기 전까지 그가 수년간 낸 책만 해도 수십권은 될 것이다. 그의 저작이 너무 많아 일일이 세는 것이 귀찮고 힘들다.

 어떤 이들은 그의 저작들의 수준을 이야기하며 다작을 하는 대신 전문성이 떨어진다고도 비판하지만 그가 써내는 책이 학술서도 아닌 사회비평서라는 점에서 일정한 깊이를 유지하면서 그만한 다작을 하기란 힘들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오히려 그의 글이 일정부분 전문성이 떨어지고 정성이 들어가지 않아 보이는 것은 글의 내용보다는 그의 문체에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소설가도 아닌 이에게 무슨 '문체'냐고 할테지만 비평가들에게도 그만의 문체가 존재한다. 강준만은 매우 쉬운 구어체를 구사하면서 아주 알아듣기 쉽게 풀어써내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 직설과 풍자면에서는 진중권에 비할바가 아니지만 쉽게 풀어쓰기 면에서는 진중권보다는 강준만이 앞선다.

 <이문열과 김용옥>이라는 책은 전권 2권으로 되어있으며, 상편은 이문열에 대해서, 하편은 김용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김용옥만을 보고 싶다면 굳이 상편을 볼 필요는 없다. 상편과 하편은 전체적으로 이어져있는 있으며, 지식폭력과 문화특권주의를 살피는데 있어 중요한 두 명을 모두 봐야하겠지만, 이문열이나 김용옥 둘 중 한명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에 대해 강준만이 어떻게 썼는가를 궁금해한다면 두 권중 한권만을 봐도 무방하다.

 강준만은 대단한 수집가다. 그가 이 책속에서 인용하는 신문기사와 각종 칼럼들은 모두 그의 수집벽에 의해 이루어진 성과다. 물론 항간에는 그를 위해 자료를 모아주는 도우미가 있다고도 하지만 자료를 모아준다고 해도 그 자료를 모두 읽어내는 것은 오로지 그가 해야하는 작업이다. 그가 이문열과 김용옥에 대해 책 한권 분량을 써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이들의 저서는 물론이고, 인터뷰와 칼럼, 비평까지도 모두 읽어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봐야한다.

 강준만은 이문열을 무지하게 싫어한다.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싫은 건 아닌 것 같다. 그는 이문열이 싫은 이유에 대해서 엄청난 근거를 대가며 말하고 있다. 강준만의 이문열에 대한 비판은 가차없다. 아주 매몰차다. 그래서 이문열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도 화병이 나서 당분간 앓아눕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치만 이문열은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강준만을 자신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문열이 흔히 말하듯 아이가 어르신을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는 강준만의 비판을 하찮게 무시해버리고 말 것이 뻔하다.

 나는 이문열을 잘 모른다. 그 유명한 이문열의 <아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 <떨어지는 곳에는 날개가 있다> 는 물론이고 자라나는 어린이라면 인생에 한번쯤 읽을 이문열 번역의 <삼국지> 조차도 읽지 않았다. 난 황병국의 삼국지를 읽었다. 앞으로 삼국지를 추가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장정일과 황석영의 삼국지를 읽을 것이다.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이문열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소설가나 번역가로서의 그와 칼럼니스트(?)로서의 그를 엄연히 구분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싫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 텍스트를 온전히 읽어낼 자신이 없다. 그에 대한 편견이 이미 심어져있는 상태에서 그의 텍스트를 온전하게 읽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는 잘못이다. 텍스트와 저자는 엄연히 구분해야하니까.

 철학자 가다머는 독자는 텍스트의 제자로서 임해야한다고 말한다. 텍스트에서 내가 원하는 부분을 얻어내고 나머지는 가지쳐 자른다면 이는 올바른 텍스트의 이해라 할 수 없다. 개인의 역사적 상황과 시대의 역사적 상황인 텍스트를 모두 반영하고 고려해야한다는 것이 가다머의 텍스트와 저자에 대한 입장이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이문열의 작품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내가 강준만의 이문열 비판에 대한 저서를 읽어도 되는 걸까, 라고 속으로 질문해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된다. 읽어도 된다. 왜냐면 강준만은 이 책을 통해 이문열의 지식특권주의와 지식폭력을 비판하려는 것이지 그의 소설의 문학성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문학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문학평론가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문방송학과 교수인 강준만이 소설가인 이문열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진 않다. 나는 칼럼니스트(?)로서의 이문열은 잘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으니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강준만의 이문열 비판을 읽더라도 내가 순전히 강준만에 의해 나의 생각이 뒤바뀌거나 휘둘릴 염려는 없다. 그런점에서 내가 강준만의 생각 속으로 소속되어버릴 염려는 거두어도 좋다.

 강준만에 의하면 이문열은 지식폭력의 희생자다. 그는 초등학교를 제외하고 제대로된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으며, 독학으로 공부하고 책읽기를 통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대단한 인물이다. 홀로 독학을 통해 그만한 지식을 갖추고 글쓰기를 통해 돈과 권력, 명예를 쥐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지식폭력의 희생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달성된 현재의 그는 신분이 미천한 인물들을 무시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신춘문예라는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평가들과 소설가들을 그는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대접하지 않는다. 이는 지식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역할바꿈을 한 그의 현실이다.

 또한 그는 대단한 문화특권주의를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현실 정치에 대해 발언하며 이럴 때는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불리할때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강조한다. 자기 필요에 따라서 색깔을 달리하는 카멜레온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내뱉은 발언이 문제시 되면 그는 그의 소설가라는 문인의 위치로 돌아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문열이 입지전적인 대단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그는 대단한 문화권력을 지니고 문화계뿐 아니라 정치, 사회계에서도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점에서도 대단한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의 발언이 문제시되는 것이고, 그가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사태 또한 문제시되는 것이다.

 강준만의 이문열에 대한 비판은 그가 조목조목 드는 근거로 보아도 타당하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은 이문열의 소설을 한권도 사보지 않은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 이문열의 매니아들이다. 그들은 이문열의 소설을 통해 이문열을 접했고, 이문열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침묵하는 지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이문열을 다시 생각해봐야하며, 이문열의 실체를 알았다면 그의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자신을 거둬야 할 것이다.


덧붙이며...
  나는 이문열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읽을 계획이다. 다만 그것은 이문열을 알기 위해서이며 또한 책을 읽더라도 사서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책을 사서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돈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보고픈 책을 모두 사보지는 못한다. 이문열의 새 책을 구입함으로써 그의 소설 몇십만부 돌파라는 기록에 한몫 보태줄 생각은 없다. 다만 헌책방 나들이를 통해 그의 책이 발견된다면 그걸 사보도록 하겠다. 그 책들은 그의 기록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5-02-07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내기를 책읽듯이 한다. -_-b

하이드 2005-02-07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등학교때 뭔 멋이 들었었는지, 이문열 책 다 찾아 읽었었는데요, 요즘은 이문열 비판 속시원히한 책 있으면 끌리더군요. 이 책 궁금하네요.

마늘빵 2005-02-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책내기를 책읽듯 한다는건 좀 심했나요? ㅋㅋ 사실 고등학교때 책에 관심을 가진 학생이라면 아무래도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을 먼저 찾기 마련이죠. 전 그땐 책에 별로 그렇게 관심이 있지 않았답니다. 그때 이문열을 접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문열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강준만의 이 책을 권해드립니다. 더불어 이 책속에 소개된 다른 이의 이문열 비판에 대한 소개도 있어 이 책을 통해 다른 책으로 확장해나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김승환 2006-04-12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강준만을 읽고 이문열을 읽지 않은 반면 전 강준만은 읽지 못했고 이문열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으면 엄청난 수준의 지적 과시에 의해 의식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좌절감이나 intimidation 을 느끼게끔 되있습니다. 이문열이라는 작가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지식 폭력의 의도가 그의 소설들을 통해 투영된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저도 의식없이 읽던 어린 시절에는 그의 소설의 마력과 흡입력에 매료되 그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와서는 그 영향력의 잔재에 의해 내 자신이 또 하나의 지식 폭력 가해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목격 하며 몸서리 치게 됩니다. 님의 리뷰 잘 읽었구요 이 책을 한번 읽어봐야 겠군요.
 
이문열과 김용옥 - 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장바구니담기


"문화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치경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비해 권력과 금력에 있어서 우위를 누리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문화 분야의 종사자들이 정치경제 분야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권리는 누리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정서를 '문화특권주의'라 한다."(머리말)-5-6쪽

"'지식폭력'은 삶의 실질과는 무관하거나 큰 관계가 없는 현학적 지식 또는 제도적 지식 자격증으로 그걸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 고통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게 만드는 '상징적 폭력'을 의미한다."(머리말)-6쪽

"주고받는 계도 속에 명랑사회 이룩된다" -19쪽

"어떤 작품도 그것을 산출시킨 현실의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더구나 한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을 생성시킨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37쪽

"어떻게 해서든 이데올로기화 시켜 자신이 그 수호의 전위를 자처함으로써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지키고 더 키우고자 하는 이문열의 무서운 욕망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83쪽

"공인된 절차? 나는 정말이지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신하는 게 너무 싫다. 학력과 학벌이라는 '공인된 절차'로 인해 서러움을 겪은 사람이라면 절대 '공인된 절차'를 앞장서서 역설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며 알맹이와 내실을 따져야 한다는 주장을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195쪽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처럼 문학에도 담합, 파벌, 섹트가 좌우합니다. 거기에 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또 어떤 중심주의가 존재합니다. 서울중심주의, 무슨 대학교 중심주의 같은, 문제는 중심을 하나만 설정한다는 거죠. 다원적으로 설정하고 가치를 상대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론적인 중심에 들어가야 될 것 같은 느낌. 그 다음에 또 획일성, 베스트셀러 하나를 보면서도 느끼는데, 10위 안에 들지 못하면 흐름이 없다가 10위 안에 들면 사람들이 막 사는 거죠."
(<민족예술>지 2001년 4월호 문학평론가 방민호의 말)-19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사는 지성인이다
헨리 지루 지음, 이경숙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12월
장바구니담기


"학교를 민주적 공공영역으로 바꾸기 위한 첫번째 과제는 교육자들을 위해 공적 언어, 바로 비판의 언어를 개발하는 것이다. 비판의 언어는 교사와 학생이 집단 투쟁과 사회 정의를 위해 공적 삶을 재구성할 수 있게 허용하는 언어이다. ...중략... 언어는 '바깥에 있는' 사회적 실재를 반영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실제로'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피터 맥라렌, '지루를 읽기 위하여') -26쪽

"정치적 중립을 가장하여 난해한 지식이나 전문 지식을 휘두르는 행위에 맞서 교사가 사회적으로 변혁적인 실천을 심사숙고하는 변혁적 지성인이 된다면, 교사가 기존 진리체제들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피터 맥라렌, '지루를 읽기 위하여')-27쪽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정치, 윤리적 실천이며, 사회,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구성물이라고 본다. 교육은 결코 교실로만 제한될 수 없다. 의미의 생산과 구성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의도적 시도가 있는 때라면 언제라도 그곳엔 교육이 연루되어 있고, 어떻게 그리고 어떤 지식과 사회정체성이 특정 사회관계 속에서 생산되는가 하는 문제에도 교육은 연루되어 있다. 교육은 가르치는 실천이기도 하려니와 가르치는 활동이 옹호하는 문화정치에 대한 인식과도 관련 있다." (피터 맥라렌, '지루를 읽기 위하여')-30쪽

"학교문화는 지배계급 출신의 학생들에게는 용기를 북돋우고 특권을 주면서, 피재배집단의 역사, 경험, 꿈은 배제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 아이들을 기죽인다. 학교가 무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전통교육자들에 반대해서, 진보교육자들은 국가가 선별적 수상, 자격증 정책, 합법적 권력 따위를 통해 교육실천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도록 손을 쓴다는 점을 면밀히 보여준다." ('서문')-38쪽

"권력은 신비화나 왜곡만 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진짜 위험성은 권력이 진리와 적극적 관계를 맺는 것, 즉 권력이 만들어내는 진리의 효과이다."(샤론 웰치)-46쪽

"문화자본 개념은 학교가 제도로 만들어놓은 특정한 방식의 말하기, 활동, 감동, 옷 입기, 사회화를 표상한다. 학교는 교육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지배사회의 문화를 배우고 사회에 존재하는 계층, 계급 간의 차이를 학생들이 경험하는 장이기도 하다."-57쪽

"교사와 행정가들은 방법론 사용에 정통하고 능숙하기보다는 자신의 사회관, 학교관, 해방관을 검증하고서 교육에 임해야 한다. 교육자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가치관을 회피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직시해야한다. 그래서 사회가 개인인 자신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교육자들이 무엇을 믿는지, 학생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62쪽

"인간은 상당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날 수도 있고, 살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나 한 가지 흠이 있다. 바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133쪽

"위대한 진실은 비판 받기를 원하지, 우상화를 원하지 않는다" (니체)-145쪽

"이론이 실천으로 녹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중략... 이론은 어느 한 사회의 '사실'과 경험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는 반대 담론으로 이루어진다. 실천과의 긴장과 갈등은 이론의 본질이며, 이론의 구조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론은 실천을 지시하지 않는다. 차라리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면 안에서 필요한 프락시스 유형을 중재하고 비판적으로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주 : 지루가 프레이리의 이론에 대해 말하며...)-230쪽

"하나는 역사가 현존 제도들과 사회관계들 속에서 현존 제도와 사회관계들의 의미를 알려주는 '역사적 맥락'과 그들의 정치적 기능을 은폐하기도 하고 명시화하기도 하는 '유물'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가 역사사회적 존재인 우리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역사는 우리가 말하고, 사고하고, 옷 입고, 활동하는 방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적 형식 속에서 닻을 내린 것이며, 이런 역사가 역사적 분석의 주제가 된다." (주 :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며)-231쪽

"첫째, 교사의 활동을 순수한 도구적 용어나 교수 용어로 한정하는 대신, 지적 노동으로 규명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둘째, 교사들이 지성인 역할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적 조건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셋째, 교사 자신이 인정하고 활용하는 교육을 토해 자신이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적 이해관계를 생산하고 합법화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다." ('교사는 변혁적 지성인이다')-241쪽

"그 학문의 일원이 된다는 건 특정 질문에 답하고, 일련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고, 한정된 영역을 연구한다는 의미이다." -271쪽

"지성인은 사상의 생산자이자 전달자라는 문자적 의미 이상이다. 지성인은 관념과 사회적 실천을 중재하고 정당화하고 생산하는 자이다. 그들은 본래 정치적 역할을 뛰어나게 잘 해낸다. 그람시는 보수적인 유기적 지식인과 진보적인 유기적 지식인을 구분했다. 보수적인 유기적 지식인은 지배계급에게 도덕적, 지적 지도력을 제공한다. 현 상태의 대행자로서 보수적인 지식인은 지배자의 권력관계를 동일시하며, 의식했든 아니든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선동한다. 이런 지식인들은 지배계급에게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형태를 지지하는 근거를 부여한다."

"그람시는 진보적인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계급에게 도덕적, 지적 지도성을 부여하려 애쓴다고 주장한다. 더 구체적으로, 진보적인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계급이 정치적 각성을 높이고, 그래서 지도성을 개발하고 집단투쟁에 참여하도록 돕는 데 필요한 교육적, 정치적 기술을 부여한다."-278쪽

"변혁적 지성인 개념은 그람시의 진보적인 유기적 지성인 개념과는 다르다. 변혁적 지성인들은 그들의 사회형태를 만든 억압적 지식과 실천에 저항하는 집단이면 어떤 집단 출신이건, 어느 집단과 일하건 상관하지 않는다. 변혁적 지성인은 억압의 조건에 변혁적 비판을 가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이들에게 도덕적, 교육적, 지적 지도성을 제공한다."-279쪽

"꿈은 낮에도 밤에도 찾아온다. 어떤 꿈이든 그 동기는 실현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그러나 백일몽은 밤에 꾸는 꿈과 다르다. 낮에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철저히, 의식적으로, 개인적으로 소망했던 더 나은 삶의 환경과 이미지를 상상한다. 백일몽의 개념은 밤에 꾸는 꿈처럼 억제된 표현과 그런 표현의 연상으로 돌아가는 여행이 아니다. 백일몽은 가능한 한 아무 거리낌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여행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것을 재구성하는 대신, 아직은 아닌 것의 이미지를 삶과 세계에서 꿈꿔보는 것이다." (에른스트 블로흐)-311쪽

"능력별 편성은 학생들을 학교 교육에서 소외시키는 것 이상이다. 학생들의 사회적 포부나 자아존중감마저 훼손해버린다. 오크스는 사회적 서열이 밑바닥인 학생들은 학교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접한다는 각성도 없이 자신의 포부부터 낮춘다고 비판한다. 오크스의 입장은 이 지점에서 매정하게 돌변하여, 사회적 실패를 개인의 실패로 부당하게 바꿔치기하고, 그 실패가 장래에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흐려놓는다. 본질적으로 학교의 역할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즉 불평등한 사회를 수용하도록 학생들을 사회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33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사는 지성인이다
헨리 지루 지음, 이경숙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먼저 보고 이 책을 본 것은 다행이었다. 만약 헨리지루의 <교사는 지성인이다>를 먼저 읽고,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봤다면, <페다고지>를 읽는데 지장은 없었겠지만 <교사는 지성인이다>를 읽는데는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

 <교사는 지성인이다>에서 헨리 지루는 파울로 프레이리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 에른스트 블로흐 등을 인용하면서 많은 부분을 그들에게 할당하고 있다. 때로는 헨리지루가 아닌 다른 이들의 의견이 뒤범벅되면서 내 머리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이고는 정리가 안되어 지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탁월한 그들의 견해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이 책을 끝까지 읽어냈다. 사실 읽었다기보다는 훑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교육이론에 대한 나의 내공이 부족한 탓인가. 하여튼 이 책을 읽는데 내용이 한눈에 쏙쏙 들어오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별로 어려운 말도 없고, 비비꼬지도 않았건만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결국 그의 주장은 프레이리와 거의 다르지 않고 새로울 것도 없는 듯 하다. 이렇게 평하면 너무 가혹한 것인가? 하지만 동일 주장을 여러 사람이 한다고해서 어느 한 사람만 창의롭고 다른 이는 따라쟁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각각의 내세우는 주장이 결국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언어로서 풀어낸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의미가 있는 주장이 될 수 있을 터다.

 결국 주장하는 바는 오늘날의 학교는 정지되어 있어 교사가 인위적으로 학생에게 기존의 지식을 주입하는 식의 교육을 답습하고 있으며 변화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교육은 변해야하고 교육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교사가 변화를 해야한다. 뭐 이런 말인 거 같다. 또한, 교사의 정치중립성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교사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정치적 인간이어야 함을 언급하기도 한다.
 
 교사는 변혁적 지성인이어야하고, 가르치는 학생과 더불어 기존의 헤게모니를 거부하고 개혁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하며, 이것이 결국 사회적인 진보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우리네 학교 현실에서 교사 개인이 그러한 노력을 해서 사회변화를 꽤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말고도 지나치게 많은 행정업무에 시달리며 녹초가 된 선생이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삶에 찌들어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싶다. 하지만 교사는 지성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나도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고 전적으로 그에게 동의한다.

 별 다섯개를 다 주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다.  글은 좋으나 내가 다 이해하지 못했으니 거기에는 나의 내공이 부족한 탓도 있을 것이요, 나의 게으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내게 흡족하게 다가오지 않은 것은 나만의 책임은 아니겠다는 생각에 하나를 깎는다. 이번에는 훑어읽었지만 다음에는 제대로 읽어봤으면 한다. 전체적인 주장 밖에는 파악하지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522 기타코드사전
이정선 / 이정선음악사 / 1994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 역시 기타를 배우려고 구입한 책이다. 나는 뭘 시작할 땐 참 이것저것 준비는 잘 해놓는다. 손을 안대서 문제지. 이런 사람들을 보고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하나? ^^; 모르겠다.

  이 책은 오로지 기타코드만 그려져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기타코드만! 딴거 없다. 오로지! 기타 코드만. 우선 기타를 연주하자면 코드를 알아야하고 기본 코드 가지고 연주하다보면 파워코드나 다른 이상야릇한 코드도 알아야하기 때문에 구입해놨다. 이정선씨가 쓴(썼다기보다 그린) 책이다.

  이 책 말고도 코드만 나온 조그마한 다른 책이 있으나 이게 더 자세하고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어서 결국 이 책을 선택했다. 값도 뭐 그리 비싸진 않은거 같다. 칠천원이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