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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 - 고소한 맛 ㅣ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4
김용규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고소한맛)은 동일제목의 책 '담백한맛'에 이어 인식론과 과학철학을 이야기한다. 지난번 책에서는 앎이란 무엇인가로 시작된 물음에서부터 데카르트의 인식론까지 이어졌고, 이번엔 데카르트를 넘어선 칸트와 자신으로서 철학을 끝내려했던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더 유명한 포퍼, 수능시험 언어영역 지문에 자주 출제되었던 패러다임 이론의 주인공 쿤,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처음 들어본 마투라나를 다룬다.
흔히 '서양철학사'라고 했을 때 마지막에 다루어지는 철학자는 칸트, 헤겔, 니체, 하이데거 정도다. 그러니 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나로서도 학부시절 따로 관심갖고 찾아보지 않는한, 어느 정도 들어본 철학자는 거기에서 그칠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서양철학사'의 범주는 매우 작은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여기서 쿤이나 포퍼 같은 이들은 철학사의 영역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어떤 기준으로 철학사에 들어갈 철학자와 그렇지 않은 철학자를 분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모든 학문에 있어서 논의의 끝에선 00철학을 다루기 때문에, 영역의 구분짓기가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본래 생물학자였다가 사색의 끝에서 철학과 조우하고 여기서 새로운 논의를 창출해낸 이를 두고 철학자로 분류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고민은 '철학사'를 집필하는 이들에겐 그야말로 고민이다.
하지만 '철학사'를 집필하는 것이 아닌, 각각의 해당 분야, 인식론, 형이상학, 과학철학, 분석철학 등등에서 논의를 시작하면, 그가 무엇을 전공했고, 무엇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든 간에 관계없이, 의미있는 논의를 이끌어낸 이들은 모두 포함될 것이다. 인식론을 다루는 이 책에서 끝에 마투라나 라는 생소한 이름을 접하게 된 건 그런 맥락이다. 마투라나는 인지생물학자로 분류되어있고, 그의 주전공 또한 생물학이다. 그러나 그는 인지론에 있어 상대주의적 인식론인 급진적 구성주의의 정초자로 알려져있고,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철학의 영역과는 만날 일이 없지만, 인식론에 있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는 철학자이다. 마투라나는 생물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인지생물학, 인식론, 인지론으로 나아가 윤리학과 조우한다.
"......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내놓은 '어느 한' 세계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그리고 우리가 다르게 살 때만 세계가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 p.257 : 마투라나, <인식의 나무> 中)
"우리의 세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내놓은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이들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함께 살야 하는 한' 자신만의 확실한 어떤 것을 진리라고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싶으면 그것이 아무리 마땅치 않게 보인다고 해도, 그들에게 확실한 것 또한 '우리의 것만큼이나 정당하고 타당함'을 인정해야 한다. ...... 이런 행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좀 약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내 곁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 p258 : 마투라나, <인식의 나무> 中)
이로부터 저자 김용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놓는다.
"윤리와 지식에 대한 마투라나의 입장은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는 그의 아포리즘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함'과 '앎'을 각각 행위와 경험, 곧 '세계를 내놓은 행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렇다면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라는 아포리즘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세계를 내놓은 행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 즉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에서 지식과 윤리가 분리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함'과 '앎'이 서로 반복하여 순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를 구성해 내놓으면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며,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면 다시 '그렇게' 세계를 구성해 내놓는다는 말이다. 달리말해, 우리가 '그렇게' 존재하면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나타나고,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면 우리가 다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에서 지식과 윤리가 서로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이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함'과 '앎'의 이러한 순환구조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윤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함'과 '앎'의 순환은 당연히 그것을 결정한다. 즉 '세계를 내놓는 행위',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선하면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악하면 악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p260-261)
인식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 앎과 함은 동일하며, 마투라나에게 있어서 '세계를 내놓는 행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은 분리시킬 수 없다. 고로 우리의 인식과 존재는 서로가 반복 순환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고, 윤리는 우리의 인식과 존재로부터 결정된다. 어떻게 세계를 인지하고 내놓는가에 따라 선순환과 악순환은 결정된다. 그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이 윤리학과 만나는 지점이다.
가볍게 읽으려고 접한 철학통조림을 통해 기대보다 꽤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일단 저자의 글솜씨와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에 놀라고, 내 머리 속에 조각들로 존재하는 지식을 한 줄로 꿰어줬다는데 고마움을 느끼고, 이름만 알고 책은 읽어보지 못했던 쿤과 포퍼, 비트겐슈타인, 로티을 접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또 생소한, 하지만 유명한 인지생물학자 마투라나를 알게 해주었다. 이래저래 이 책은 애초 나의 기대보다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지식의 조각들이 팽팽하게 들어맞지 않는 한 이 시리즈를 반복해서 읽을 것이다.
지난주 신문에서 마투라나의 새 책을 접했다. 매주 신문 책 소개란을 보면서 보관함에 넣는 책이 많아지는건 그만큼 관심갖는 영역이 넓어졌다는 뜻일게다. 이 책을 통해 마투라나를 접하지 않았다면 나는 <앎의 나무>를 보관함에 넣지 않았을 것이고, 그가 쓴 이전의 다른 책들 또한 무심코 지나가버렸을 것이다. 좋은 책 한 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심의 영역을 넓혀주며 동시의 인식의 영역에 있어서도 넓이와 깊이를 더해준다. 매달 지출하는 도서비용은 점점 더 늘어날테지만 앎의 영역을 확장하는건 나에겐 즐거움이다. 이 책이 내게 준 부차적인 도움들을 제외하고라도 순수하게 이 책의 기획의도와 목적만을 놓고 평가해봤을 때도 매우 잘 쓰여진, 누구에게나 유용한 철학서다.
* 이번에 출간된 마투라나의 <앎의 나무>는 그의 저서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인식의 나무>의 새 번역본이다. '인식의 나무'가 '앎의 나무'로 제목만 바뀌어 새 옷을 입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