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학 스케치 1 - 이야기로 만나는 교양의 세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 풀빛 / 2007년 2월
품절


지눌은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기만 한다면 여러 이론을 놓고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입장에서의 논쟁을 화해시키려고 한 원효의 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처음부터 논쟁 자체가 필요 없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고 아울러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다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는다면 처음부터 차별이 없기 때문에 논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욕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 자체도 본래 부처의 마음이라고 보았다. 욕심을 일으키는 것도 마음이고 깨닫는 것도 마음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한 마음에 두 개의 문이 있다고 한다. -84-85쪽

지눌은 돈오와 점수 두 가지 가운데 자신이 부처임을 깨닫는 돈오가 먼저라고 한다. 그래서 선오 후수, 즉 돈오가 먼저고 점수가 나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때 주의할 것은 첫째, 자기 마음이 부처의 마음인줄 모르고 깨닫는 일은 뛰어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나같이 능력 없는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를 낮추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우쭐해져서 더 이상 수양하려고 하지 않는, 스스로를 높이는 태도다. -86쪽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어떤 사물을 대하든지 나라는 존재의 입장을 버리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생겼다고 하자. 그 일은 민족을 또는 우리 마을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다보면 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때 내게 이로울 것인가 해로울 것인가를 따진다면 전혀 일이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지눌은 분별을 버리면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남을 위하는 일이 바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런 의식을 갖고 사물을 보았을 때 비로소 참답게 필요한 일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역사상 거란과 싸운 승병이나 임진왜란에 참여한 승병들은 모두 이와 같은 불교의 정신을 실천으로 나타낸 예다. -90쪽

정몽주는 불교를 엄격히 배척했다. 불교식의 장례를 금하고 유교 장례 의식을 보급한 사람도 정몽주였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승려를 불러다 재를 올리며 종이돈을 태운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매장을 하고, 주자가 정해 놓은 절차대로 죽은 자와 이별하는 예식을 행한 다음 때맞추어 제사를 지낸다.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제사 관습은 바로 정몽주에서 시작된 것이다. 또 정몽주는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세속을 떠나 도를 닦아야 하는데, 그런 일은 평범한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처럼 어렵게 도를 닦기보다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등 일상생활 속에서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불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전형적인 성리학자의 태도였다. -117쪽

민본사상과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상은 다르다. 민본의 이념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므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백성을 위한다'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이념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에 '백성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설명하면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했다. 민본사상은 이 중에서 '국민을 위한' 이라는 면을 생각하지만 '국민의'나 '국민에 의한' 이라는 면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민본사상에서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122쪽

조광조의 사상은 다음 말 속에 집약되어 있다. "도학을 높이고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를 일으킨다." 여기서 도학은 '도'를 배우는 학문을 뜻한다. 도는 본래 '길'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길을 따라 가지 않으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길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거리에만 길이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 속에도 길이 있다. 거리의 길이 장소를 옮겨가기 위한 것이라면 마음 속의 길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길이다. 길을 잘못 들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듯이 마음 속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하고 짐승과 다름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139-140쪽

철학은 본래 체계를 갖춘 사유다. 따라서 생각하는 목적이나 사물을 보는 눈이 다르면 생각하는 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에 논쟁이 생긴다. 철학 논쟁은 자신의 의견이 옳고 상대방의 의견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싸움이다. 하지만 논쟁이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논쟁은 자기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자기 생각을 체계적이고 날카롭게 다듬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논쟁이 풍부했던 철학은 그만큼 발전하게 된다. 또한 논쟁은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참다운 논쟁은 언제나 논쟁 전과 후의 모습을 달라지게 만든다. 논쟁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아가 서로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나은 이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162-163쪽

이언적은 진리가 모든 만물보다 앞서는 궁극적 본질이지만 구체적으로는 경험 세계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장은 진리가 한갓 사물의 존재 법칙이 아니라 도덕 원리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그 원리를 따른다면 도덕적 실천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도덕적이라는 확신과 아울러 마땅히 그 본성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170쪽

이황은 리와 기가 같이 있다고 해서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본다면, 결국 인간의 순수한 마음과 욕심 섞인 마음을 하나로 보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침내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군자는 자신의 인간다움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 닦는 지성인이고 소인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욕심꾸러기다. 이황의 주장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옳고 그름을 따지다가 비록 목숨을 잃더라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꿋꿋이 실천해 가는 군자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짓밟고 해치는 소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단은 언제나 선이기 때문에 사단을 따르는 사람은 소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단이나 칠정이 모두 악이 될 수도 있는 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결국은 군자와 소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182쪽

허균은 똑똑하고 글을 잘 지었지만 행동은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았다. 그래서 '남녀의 정욕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고, 남녀가 나뉘는 윤리와 도덕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으니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감히 하늘이 준 사람의 본성을 어길 수 없다."라고 했다.
(안정복의 <천학문답>, 심재의 <송천필담> 中)-22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