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한미FTA....

한미FTA....

되려나?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한 달에 한 번꼴로 돌아오는 신문 칼럼 쓰는 날이 다음 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좀 소박하게 써봐야지 하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그래 생활밀착형 칼럼을 쓰자!

이렇게 마음 먹고 먹을거리 이야기를 하자고 해서
쇠고기 이야기를 쓰려고 했더니 한미FTA가 걸려 있습니다.
음, 이번엔 인터넷 공간에서의 파파라치, 음파라치, 영파라치 이야기를 하자
그래서 알아보니 이것도 한미FTA가 걸려 있더군요.
월트 디즈니를 말하려고 해도 한미FTA,
문화다양성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고 생각해서
문화다양성협약에 대해 알아보니 이것도 한미FTA가 걸려 있습니다.
국가의 기능에 대해 말하려고 해도 한미FTA,
세계화 체제에 대해 말하려고 해도 한미FTA,
도대체가 작게는 아침 밥상에서
크게는 문화다양성 협약에 이르는
모든 것이 한미FTA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왜 요새는 한동안 우릴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WTO는 쏙 들어가고
갑자기 FTA가 부각되는지 아세요?
WTO는 다자간 협상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미국이 주도한다고 해도
사실 미국 마음대로 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FTA는 1대 1 협상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협상이란 서로 대등한 상대끼리 하는 것이 협상이지요.
미국과 1대 1로 붙어서 협상한다는 건, 협상이 아니라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후처리 보상문제에 대한 타협같은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FTA협상에서 미국을 그야말로 왕따시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왜 미국이란 우선적으로 협상하고 있나요?

평소 말 잘 듣는 정부, 반미 외치면 죽는 줄 아는 국민,
IMF 이후 해고와 실업에 대한 공포에 제압당한 사회,
다른 말로 하자면 한 차례 세계체제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했다는 학습 효과를
단단히 기억하여 잔뜩 주눅든 언론들이
크든작든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별로 안 나누고 있네요.

FTA요?
합시다! 까짓거... 꼭 필요하다면...
그런데 우선 미국하고는 하지 맙시다....

* 그런데 칼럼 이런 식으로 쓰면 짤리겠지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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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교수의 품위, 대학의 품위

낮에 전철에서 읽으면서 옮겨놓는다고 해놓고 깜박한 기사가 있다. 이른바 '석궁사건'의 주인공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재판이 주초에 있었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대학사회에 던지고 있는 한정숙 교수의 칼럼이다. 재판관련 기사와 함께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3. 09) 교수의 품위, 대학의 품위

이 일이 다시 상기되는 것을 본인들은 쑥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삼십대 초반의 청년이던 장희창 교수는 1987년 재직하던 부산의 한 사립대학에서 해직당했다. 그는 86년 봄 정국을 소용돌이치게 한 대학교수 시국성명 발표 당시, 재직 대학에서 이 일에 앞장섰다. 교수들은 대통령을 선거인단 간선제로 뽑게 돼 있던 5공 헌법을 고쳐 국민이 직접 선출토록 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 당연한 일에 동참했던 그는 그 직후부터 대학 당국한테 시달림을 받다가 끝내 재임용 탈락 통보를 받았다. 이유는 그가 대학교수로서 ‘품위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가깝게 여기던 동료에게 회식 자리에서 가벼운 기분으로 한 말과 행동이 ‘품위 없음’의 사례로 찍혔다. 대학 쪽은 교수를 해직시키면서도 그가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것을 근거로 대지 않고 ‘품위 없는 교수’라는 이유를 댐으로써 인간적 모멸을 더했다. 얼마 후 대학에서는 입시부정이 있었고, 장 교수와 함께 시국성명에 동참했으나 대학에 남아 있다가 부정에 항의한 두 교수도 마저 해직당했다.

그 후 제기한 복직소송에서 이들은 계속 패했고 한국사회의 어떤 제도권 기관도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직 뒤 20년 만인 지난해 복직을 할 때까지 학원 강사로, 프리랜서 번역가로 사는 동안, 이들은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이상한 인간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생각해 보자. 독재정권에 저항한 교수들과 그들을 내쫓은 대학, 어느 쪽이 품위 상실의 주역인지.

서울 쪽 한 대학에 재직하다가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명호 교수가 복직소송 2심에서 패했다. 그는 대법원에서도 판결 번복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2심 담당법관과 옥신각신하다가 상대에게 상해를 입혔고, 이 때문에 형사범이 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 월요일에 첫 공판이 있었다. 그가 재직 대학의 수학 입시문제 오류를 지적했다가 미움을 받아 재임용에서 탈락했음은 대한민국이 다 안다. 그런데 대학 쪽은 인간적 갈등에서 빚어진 몇 사례를 극단화시키고서 그를 ‘교수 품위를 떨어뜨린 인물’로 몰아 해직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실 대학이란 데가 그렇게 품위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은 아니다. 성추행자도 있고 소위 ‘또라이’도 없지 않다. 정작 이런 사람들도 대학이라는 강자의 비위만 거스르지 않으면 무사하다. 조직 이기주의 아래 보호받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 철칙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었고 해직이 그 대가였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다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종교재판을 주관한 교황청과 학문적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갈릴레이, 이 둘 가운데 인간의 품위에 치명타를 가한 쪽은 누구일까. 갈릴레이는 극한 상황을 피하고자 자기 학설을 일시적으로 철회했다지만, 김 교수는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법원에서는 종교재판 때 같은 극한 상황이 없으리라 믿었기에 변호사도 없이 혼자 법리를 따져가며 재판에 임했다. 자기가 옳다는 것이 자명했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리라 믿었다. 그러나 법원은 그를 인간적으로 모욕한 강자의 정의를 수호했을 뿐이다.

만약 법관 재임용제도로 법관들도 함부로 해고된다면, 그리고 그들에게 변호사 개업이라는 출구가 없다면, 법관들은 ‘내 탓이오’라고만 여기고 이를 받아들일까?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대한수학회는 김 교수 해직을 두고 지금껏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이 사건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가장 미스테리한 일이면서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수학자들의 '계산법'이라지만 나의 상식으론 이해되지/납늑되지 않는다). 10년도 넘게 제도권에서 버림받은 채 유랑 세월을 살아 온 그의 큰 울음소리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석궁이 등장했다. 소속 연구자가 학문적 양심을 수호하려다 고통받을 때 학회가 할 일은 무엇일까?(한정숙/서울대 교수·서양사)

경향신문(07. 03. 06) ‘그들만의 재판’ 겨눈 ‘석궁 교수’

“판사님이 법에 따라 판결하시겠다고 약속하거나 맹세할 수 있습니까?” 현직 부장판사에 대한 ‘석궁테러’ 사건 피고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50)는 당당했다. 판사는 “답변하지 않겠다. 당연한 얘기다”라며 고개를 돌렸지만, 표정은 몹시 곤혹스러워 보였다. 판사와 피고인의 입장이 뒤바뀐 듯한 순간이었다.

5일 오전 10시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김 전 교수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김 전 교수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법정에 들어섰다. 손에는 작은 법전 한 권과 대학노트가 들려 있었다. 이날 김 전 교수는 시종 자신의 행동이 “정당방위이며 국민저항권을 행사한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규정과 원칙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김 전 교수는 재판부와 검찰에 대한 불신을 공판 내내 숨기지 않았다. 본인 확인을 위해 판사가 사는 곳을 묻자 “성동구치소입니다”라고 답해 법정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함께 사는 가족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다른 수용자 두 명과 함께 살고 있다”고 답했다. 검찰의 피고인 심문 때는 심문 내용을 문서로 요구해 꼼꼼히 읽어가며 심문을 받았다. “‘불만’이라는 표현은 문제가 있다”거나 “석궁을 ‘겨누었다’는 표현은 쓰지 말아달라”는 등 표현 하나하나를 반박하거나 수정했다.

김 전 교수와 재판부는 공판이 끝날 무렵 ‘충돌’했다. 검찰측 증거신청 절차가 진행될 때 김 전 교수가 “나도 증거신청할 권리가 있다. 내 의견도 물어달라”고 이의를 제기, 논쟁의 막이 올랐다. 김 전 교수가 “검찰은 증거가 각각 어떤 공소사실을 입증하는지 설명해야 한다”며 “형사소송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판사와 검사는 김 전 교수를 설득하는 데 5분이 넘도록 진땀을 빼야 했다.

변호인측과 재판부의 신경전도 날카로웠다. 변호사가 김 전 교수를 계속해서 “김교수님”이라 부르자 판사는 “피고인으로 부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기욱 변호사는 “공판에서 피고인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법으로 규정돼 있지 않다”며 공판이 끝날 때까지 김 전 교수를 ‘피고인’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날 공판을 지켜본 임종인 의원은 “법조인들만의 용어와 방식으로 진행되는 재판에 대해 김 전 교수가 신선한 문제제기를 했다”고 말했다.(박영흠기자)

07. 03. 10.

P.S. 내친 김에 예전에 읽었던 도정일 교수의 칼럼까지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1. 19) 타락한 문화가 ‘석궁’을 쏘았다

한때 국제 학계에서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라는 두 개의 축 가운데 어느 쪽으로 더 쏠리는가에 따라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규정해보려는 연구를 꽤 열심히 진행했던 적이 있다.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충돌론’을 들고 나와 문화에 대한 사회과학의 관심을 정치학 쪽으로 납치하게 된 1990년대 초반까지 10년 남짓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같은 분야의 상당수 연구자들을 매료했던 것이 바로 그 집단주의 대 개인주의라는 화두다. 당시의 연구들을 보면 북서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개인주의 문화’의 강세지역에 속하는 반면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남부 유럽 일부 국가들이 ‘집단주의 문화’의 강세지역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계열의 연구들은 그 방법론이 너무 단순하고 연구에서 얻어진 발견들도 상식을 크게 넘어서지 못할 정도로 진부한 것일 때가 많다. 집단주의 문화가 개인의 행복보다는 집단의 이익과 명예를 중시하고 개인의 자유보다는 가족 등 친밀집단에 대한 충성을, 수평적 평등관계보다는 수직 위계서열과 상부권위에 대한 숭상을, 개인의 도드라짐보다는 집단의 내부 인화와 화합을 더 중하게 여긴다. 속담을 빌리면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시끄러운 바퀴에 기름“ 칠해주고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반면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집단을 앞세우는 문화에서는 소속 집단에의 무조건적 복종이 강조되고 소속원들은 자기 집단을 위해 기꺼이 싸울 것은 물론 목숨까지 바칠 용의도 갖고 있다. 집단문화에 대한 이런 식의 기술은 이미 낯익은 것이다. 집단주의 문화의 가치서열을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 소위 ‘개인주의 문화’가 된다는 식의 주장도 별로 새로울 것 없어 뵈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그 1980년대식 문화연구에 귀담아 들을만한 발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 문화권에서 ‘가치’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반드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한 액면가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적 가치들은 인간사회의 문화적 ‘보편’이 아니라 ‘특수’이며 지역적 크기로 따져도 세계의 70%는 오히려 집단주의 문화의 특성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지리적 이동성이 높아지면 질수록 개인주의적 가치들이 우세하게 나타나고 개인주의가 개인이기주의로 변질하는 정도도 높아진다, 이런 문화적 변동은 상당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 당시 연구자들이 내놓은 이런 발견은 지금도 경청할만한 것들이다.

민주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개인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 역시 당시 연구가 내놓았던 발견 사항의 하나다. 미국과 달리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는 지금도 개인의 품위와 그의 사회적 책임을 나란히 강조하는 건강한 개인주의 문화 모델들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당시 연구에서 나온 발견의 일부다. 한때 미국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행복과 이익 말고도 공동체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알았으나 현대 미국의 개인주의에서는 다른 어떤 고려사항보다도 개인 이익의 최대화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의 미국 백인 중산층 사람들은 자신을 개인적 특성, 선호, 욕망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반면 아시아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사회관계의 망 속에서 자기 위치를 규정한다. “그래서 내게 득 되는 것이 뭐지?”가 현대 개인주의의 지배적 질문 방식이다. 그러나 만사를 개인 이익을 잣대로 해서 따지고 드는 극단적 이기주의 성향이나 탐욕은 인간본성의 항구한 법칙도 보편사항도 아니다- 이런 주장도 지금의 경제학이나 생물학이 들으면 웃을 소리 같지만 그 80년대 연구들이 내놓았던 발견의 일부다.

어떤 문화도 완벽하게 집단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80년대 문화연구자들이 설정했던 집단주의/개인주의의 구별 역시 순진한 2분법의 적용이기보다는 학문적 연구를 위한 순수모델, 또는 ‘아이디얼 타이프’의 일종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변화가 어떻게 문화변동을 유도하고 가치체계를 서서히, 때로는 급격하게 변화시키는가라는 문제다. 지난 30년 혹은 40년간 우리 사회에 발생한 변화들, 특히 경제적 변화가 현대 한국인의 가치관, 인생관, 정체성 규정방식, 교육목표 등 문화적 차원에 일으켜 온 지형변화는 실로 심대한 데가 있다. 전체 그림을 놓고 보면 가장 현저한 문화변동의 패턴은 ‘집단주의적 문화로부터 개인주의적 문화로의 대이동’이다.

이 이동 패턴의 어떤 부분은 정치 민주주의나 개인의 품위 향상 등 사회발전이나 인간발전에 긍정적인 것인 반면 어떤 부분은 아주 부정적이다. 이 부정적 변화들 중에서 우리가 백번도 더 주목할 것은 1980년대 연구자들이 집단주의/개인주의로 분류한 문화적 특성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들을 용케도 골라서 뭉쳐낸 ‘악성조합’의 측면이다. 집단주의 문화나 개인주의 문화의 좋은 가치들은 다 내버리고 집단주의의 가장 나쁜 것들과 개인주의의 가장 나쁜 것들만 골라 선택 조합하고 결합시키는 것이 악성조합이다. 문화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 집단주의의 가치, 이데올로기, 지향들과 근대 개인주의적 문화 요소들이 아주 어지럽게 혼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혼재양상의 지배적 특성은 두 문화의 악성조합, 곧 문화의 타락상이다.

이 타락을 보여주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거의 매일, 하루에도 수백건씩 발생하고 있다. 최근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전직 대학교수와 판사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석궁사건’이다. 사건의 발단 지점을 들여다보면 대학, 학회, 정부 부서, 사법 당국 등 우리 사회의 위세당당한 집단들이 집단주의 문화의 악성 요소와 개인주의 문화의 악성 요소들을 잘도 결합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집단주의가 악성의 개인주의와 결합하면 집단이기주의 혹은 ‘집단적 개인주의’가 된다. 개인주의가 악성의 집단주의와 결합하면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집단의 뒤에 숨어서, 집단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개인 집단주의’가 나온다. 이런 악성조합의 결과는 문화의 타락이다. 그 타락은 누가, 무엇이, 치유할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타락 앞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울어야 할 이유를 갖고 있다.(도정일/ 문학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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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번역투 문장은 왜 나쁜가- 멀고느린구름

요즘 논술 탓에 글쓰기 관련 서적이 넘쳐나고 있다. 얼마 전 지인의 부탁으로 쓸만한 글쓰기 참고 서적을 찾아보기 위해 영풍문고를 갔었다. 내가 글쓰기 공부를 할 적만해도 국내작문론 서적으로는 이태준의 '문장강화'가 거의 유일했는데, 몇 년만에 수 십 가지로 책이 늘어났더라. 작문론 코너에서 이리저리 책을 살펴 보았다. 거의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개 중에는 바른 문장쓰기와 관련한 책도 여럿 있었는데 재미난 공통점이 있었다. 다들 하나 같이 번역투의 문장은 안돼! 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엉? 왜에?

 

  그러게, 왜? 왜 번역투의 문장은 쓰면 안된다는 걸까? 국적없는 표현이라서? 아래 한 문장론 책에서 인용한 것을 먼저 보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낮술마신달님의 블로그에서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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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없는 번역투 표현'란에서 대표적 사례를 부분 옮겨본다.

 

 

 '피동형'은 글심(표현력)을 약하게 한다.

 

 '피동형'은 '사동형'이나 '능동형'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책을 읽히다'(사동형), '책을 읽다'(능동형)

 

 

  ㄱ.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있습니다.

  ㄴ. 회의를 보다 즐거운 것으로 하기 위하여, 좋은 제안을 보내 주십시오.

  ㄷ. 새 달 중순경 회의를 가지려 합니다.

  ㄹ.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ㅁ. 오늘 중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ㅂ. 더 일찍 제출할 터였는데 미안합니다.

  ㅅ.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시킨 것일까요.

 

이렇게 고쳐야 한다.

 

  ㄱ. 이 책은 젊은이들이 많이 읽고 있습니다.

  ㄴ. 즐거운 회의가 되게끔, 좋은 생각을 보내 주십시오.

  ㄷ. 새 달 중순께 회의하겠습니다.

  ㄹ. 계획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ㅁ. 오늘 중으로 하여야 합니다.

  ㅂ. 더 일찍 내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ㅅ.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을 행한다', '~을 갖는다'는 쓰지 마라

 

 '을 행한다', '~을 갖는다'는 번역투 말이다. 구수한 청국장 냄새나는 우리식 표현으로 고치자.

 

 

 7년간 연구를 행한 끝에 -> 7년간 연구한 끝에

 전문적 조사를 행하고서야 -> 전문적으로 조사해야

 재판이 행해진 뒤에 -> 재판 끝난 뒤에

 

 단독 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 단독 회담 자리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진 사이인지 -> 어떤 사이인지

 예정대로 입학식을 갖기로 했다. -> 예정대로 입학식을 하기로 했다.

 

 

조심할 번역투

 

'~을 시키다'는 번역투 표현이므로 '~하다'로 바꾸자.

 

 환경을 개선시키다 -> 환경을 개선하다

 회장을 구속시키다 -> 회장을 구속하다

 전투기를 격추시키다 -> 전투기를 격추하다

 계획을 구체화시키다 -> 계획을 구체화하다

 

 '~화하다'는 '~해지다'로, '~화되다'도 번역투이므로 '~이되다'로, '~화되어지다'도 '~화하다'로 바꾸자.

 

 비대화한 도시 -> 비대해진 도시

 폐허화된 평양 -> 폐허가 된 평양

 조직화된 종교 -> 조직화한 종교

 산업화되어진 오늘 -> 산업화한 오늘

 

 

 '~적', '~화', '~성'의 남용

 한자어 접미어 '~적(的)' '~화(化)' '~성(性)'은 모두 추상(抽象)을 나타내는 접미사들이다. 너무 많이 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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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소위 '번역투' 문장을 다른 여러 서적에서도 문제 삼고 있다. 글쓴이의 나이가 많으나 젊으나 한 결 같이 그건 안돼! 라고 외친다. 그러나 다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단지 한국적이지 않다 라든가, 전통을 무시한다 라든가 하는 궁색한 근거만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문장 혹은 표현에 '국적'이 있다는 생각은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일까? 물론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법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가 개인이 구사하는 표현이나 문장을 가지고 국적을 들먹이며 규제할까?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첫 번째 주의에서 "피동형은 글심을 약하게 한다" 라고 외치고 있는데, 정말 그런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글심이 약해지는 것은 오히려 '능동형만'을 사용했을 경우의 현상이다. 피동형과 능동형을 함께 사용했을 때 되려 더욱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다. 예를 보자.

 

 

ㅅ-1.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시킨 것일까요.

ㅅ-2.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적을 지키기 위해 피동형(ㅅ-1)을 능동형(ㅅ-2)으로 바꾸어 보면 문장의 늬앙스가 전혀 달라진다. ㅅ-1의 문장에서 그녀는 어떤 외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행위를 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것 같다. 허나 ㅅ-2의 그녀는 스스로 어떤 일을 해버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걘 왜 그랬대? ㅅ-2의 그녀는 왠지 얄미운 그녀이다. 자랑스런 문장의 국적을 지키기 위해 모든 '위기의 그녀'를 '얄미운 그녀'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두 번째 주의, '행한다, 갖는다'를 쓰지 말라고? 이런 무지막지한 폭력이 어디 있는가. 뻔히 있는 표현을 쓰지 말라니. 언어는 기본적으로 풍부할 수록 좋은 것인고, 표현 또한 선택지가 많을 수록 재미난 것이다.

 

예정대로 입학식을 갖기로 했다. -> 예정대로 입학식을 하기로 했다.

 

앞의 문장은 소위 번역투이다. 영어의 have 표현을 우리말로 옮겨 온 것. 자 우리 입학식으로 다양한 말을 만들어 보자.

 

 

입학식을 열다.

입학식을 하다.

입학식을 개최하다.

입학식을 치르다.

입학식을 겪다.

 

 

입학식이라는 주어로 우리는 숱한 다른 형태의 표현들을 만들 수 있다. 여기에다 영국에서 물 건너 온 '갖다'라는 표현을 하나 더 붙이는 게 그렇게 몹쓸 짓이란 말인가.

 

 

입학식을 갖다.

 

 

표현이 좋지 않은가? 영어식 표현에는 시적인 것이 많다. '입학식을 갖다'라는 표현 역시 사물이 아닌 것에 사물을 소유한다는 뜻의 '갖다'를 붙임으로서 독특한 늬앙스를 전달한다. 창의적인 언어 사용자라면 더 참신한 표현을 발명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입학식을 풀다', '입학식을 맞이하다', '입학식을 잡다', '입학식을 낚다' 등등도 아직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든지 의미의 전달이 가능한 표현들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표현 방법은 풍부하면 풍부할 수록 좋다.

 

 

 문장이나 표현의 '국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나친 민족주의자이거나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문장,표현의 국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전통이란 과연 어느 시대의 것일까. 아마도 일제시대, 좀 더 길게는 조선시대의 것일 터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 테니 그 전통이라고 해봐야 끽해야 3~400년 정도이다. 그러나 이 3~400년 동안 우리 한반도의 언어가 단일한 표현 방식으로 균일성을 유지해 왔다고 볼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언어와 요즘의 언어 사이에서 조차도 도드라지는 이질성이 발견되니까. 언어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엄연한 언어의 자연(스스로 그러함)이다. 언어는 도도히 흐르고 흐르는 강물과 같다. 그것을 인간의 보수적 욕심으로 틀어막아 버리면 물이 고여 썩게 된다.

 

  언어는 흐르고 흘러 저 다른 세계의 강줄기와도 뒤섞이며 넓고 넓은 바다가 되어야 참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 민족의 언어는 참으로 품이 넓은 언어이다. 영국식 표현이든, 일본식 표현이든, 중국식 표현이든 모두 우리의 언어 속에 품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이는 '문장, 표현의 국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우려처럼 재앙인 것이 아니라 한국어를 구사하는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혜택인 것이다. ~행하다도 쓰고, ~하다도 쓰고, ~시키다도 쓰고, ~갖다도 쓰고,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가지 다양한 국적의 독특한 표현들을 문맥의 상황에 맞게 맛깔나게 쓰면 그만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입학식을 갖도록 하셈!' 이라고 쓴다고 해서 훈민정음이 알파벳이 되지는 않는다.

 

  사족으로 몇 년전에 어떤 국어학자(아마도 민족주의자)가 방송에 나와서 대한민국을 표현할 때 '저희 나라' 라고 하면 안 되고, 꼭 '우리나라' 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덕분에 요즘 어디가서 저희 나라가... 어쩌구 라고 말 시작하려 하면 철썩! 뺨 맞는다. 그런데 이게 참 웃기는 일이다, 웃기는 일. 아니, 나라를 좀 낮추면 어때서 그러는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모든 존재에 앞서서 존재하는 최상의 것인가. 옳지 않은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국가가 평화에 대한 신념을 지키는 나라보다 항상 우위에 있는 나라인가. 대한민국은 내가 태어난 나라이기 때문에 항상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훌륭하고 좋은 나라로 대접해주어야만 하는 걸까.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를 통하여 교묘하게 국가주의를 학습시키려는 계략에 온 국민이 얼씨구나 하며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 건 아닐까. 오호 통재라!

 

 

 

2007. 3/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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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라 > 10년뒤에도 여전히 복잡한 반성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 90년대 학생운동의 성찰과 전망 - 컬리지언총서 1
이후 외 / 이후 / 1998년 5월
절판


대학사회라는 기반과 학생운동 자체의 괴리는 학생 대중들에 대한 정서적 유대의 강화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사고되었다. 지식의 문제, 교육의 문제 등은 이제 무의식적으로도 운동의 사정권 안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 이는 대중의 지식인화가 아니라 지식인-대중의 분담관계를 전제한 뒤 그 안에서 둘의 유대를 추구한 NL 주류 사상의 심층의 문제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62쪽

의식화의 처음에는 역시 대학사회 본래의 긴장점에서 출발하지만 (학회) 이후의 활동가 의식화의 과정은 학생회 활동으로, 그리고 사실상 정파 중앙에 의해 내리먹여지는 협소한 정치투쟁 및 대중사업에의 참여 등으로 채워졌다. 일단 활동가가 되고 난 뒤에 활동가 자신이 경험하는 운동이란 결국 일정하게 고착된 관료적 실천이 대부분이었다. 시위에서의 대중동원 여부가 관건이었고 총학생회 선거에서 자기 정파가 승리하는 것이 1년 활동의 목표였다. -63쪽

학생 대중들에 대한 정서적이고 이해중심적인 접근과 활동가들의 과잉 정치주의의 이분법적 세계는 신세대 현상에 대한 최악의 접근의 가능성을 그대로 실현시켰다. 학생 대중들과의 접촉면에서는 신세대들의 소비문화 흡수에 유착하는 문화주의적 접근이 취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에 의해 감소되는 학생운동의 급진성은 활동가 이념의 폐쇄성으로 치환, 해결되었다. -66쪽

단, 적어도 학생운동 출신이라면 이 사회에 중심적 모순을 해결하는데 자기가 하고 있는 실천영역이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만, 분명히 하고, 그것만 분명하다면 할 일은 얼마든지 많다.-308쪽

여전히 학생운동을 고민하는 친구들의 고민이 너무 추상화되어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로 계속 '말의 성찬'이지 않나 싶다. 다양한 얘기들이 많은데, 담론의 부재를 얘기하면서 담론 과잉이라는 극단적 평가가 있을 만큼, 학생운동이 지나치게 담론의 영역 안에만 있다. 물론 그 자체를 못 세우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학생운동의 특성이라는 것이 실사구시가 안되는 점이기도 하다.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어야 실천이 되는 나름의 특성이 있긴 하지만, 문제에 실천적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아쉽다.-319쪽

운동적 기득권에서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 거칠게 표현해서 80년대 화려했던 학생운동의 전성기에 대한 미련, 그것을 여전히 학생운동은 그러하다든지, 혹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선배들은 과거 영웅적인 투쟁을 했는데 우리는 왜 못하냐, 그런 강박관념에서 빨리 벗어나라. -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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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님의 "번역의 어감 - 골목쟁이 빌보"

진짜, 어감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한자어가 존칭어로 (치아) 순 우리말 (이빨)이 비존칭어로 쓰이는 것이, 이제 영어가 세련됨, 한국어가 촌스러움으로 정착되는 것 같아서 쫌 그러네요 ^^; 하루아침에는 안 되겠지만, 끊임없이 한국어를 풍부하게 만드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이제 대학 강단에서는 영어로 강의하게 하고...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꿈꾸고, 한국어로 사랑하고, 한국어로 멋내는 것. 그래서 '한국인'의 사유지평도 넓고 깊어질 것 같은데요. 물론 외래어 또한 한국어의 일부가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외래어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면서도, 한국어도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일이 동시에 필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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