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드팀전님께...

흐흐, 드팀전님...

드팀전님이 남길 글을 읽다가 갑자기 열불이 나서 그냥 되는 대로 날 것 그대로 올려봅니다.

칼 맑스는 자본의 착취 과정이 어떻게 은폐되는가를 연구했습니다. 영주에게 농노로 고용되었던 농노는 누가 자기를 착취하는지 명확하게 알았지요. 그것이 모호해진 것이 자본주의고, 이전까지는 자본이 착취 과정이 주로 민족국가 단위에서 이루어졌다면 이제부터 자본의 착취 과정에 대한 연구는 세계단위의 연구 없이는 드러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타벅스가 돌멩이 던지는 팔레스타인 애들 때려잡으라고 돈 주는 거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요? 안 그래요? 그렇다고 한국 스타벅스 지사 앞에 가서 이거 따지는 일은 또 얼마나 뻘쭘해요. 지들은 사회적 책임 다하고 있단 거죠. 전세계적으로 이디오피아 커피는 인정받는 고급 제품이죠. 그런데 스타벅스에 이걸 아마 이게 1kg에 1.69달러인가에 구입하다는군요. 그리고 스타벅스에서 팔 때는 56달러 정도 한다죠. 그래서 이디오피아가 자기네 지역명을 따서 이걸 브랜드화하여서 일중의 상품특허를 출원하려고 했더니 이걸 가로막은 게 스타벅스에요. 지금 소송 진행 중이라던가? 아마 그렇다죠.

얼마전엔가 다국적제약회사에서 인도의 특정 지역에서 자라는 약초를 자기네가 특허출원해서 신약개발해서 다시 이걸 비싼 값에 팔려다가 인도 사람들이 무슨 말이냐. 우린 어렸을 때부터 누구나 다 이 약초를 특효를 알고 먹어왔는데, 이제와서 니네가 무슨 권리로 이걸 특허를 낸다만다 하냐 뭐 그런 소송을 진행해서 이겼다는 뉴스도 있었죠. 관료화되고, 기업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꼭 자본주의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이런 흐름을 가속화하는 것이긴 하지요. 눈 감으면 코 베가는 거죠. 하여간 국가가 나서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냐고요? 아니죠. 못해요. 글른 거죠. 그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나라는 지금 지구상에 거의 없어요.

그래도 국가가 기능을 하고, 아니면 민족국가 단위에서 어떤 문제든 해결해나가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믿던 시기만 하더라도 어느 기업이 문제 일으키면 국가기구에 달려가서 하소연이라도 할 터인데, 이제는 그게 어렵죠. 가끔 제가 요즘 다국적기업들 보면서 그런 농담하곤 해요. 지금 다국적기업들은 근대 이전의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가, 부르봉 왕가 같다고요. 스페인 국왕인데 스페인 말 못하죠. 스페인 사람도 아녜요. 제1차 세계대전 일어나기 전에 영국 국왕이랑 러시아 국왕이랑 독일 국왕이랑 셋이 촬영한 사진 본 적 있어요? 이 셋이 수염이며 헤어스타일이며 다 똑같아요. 셋이 친척이거든요. 다 같은 가문이죠.

그런데 통치했던 나라는 다 틀려요. 그래도 이 때는 통치자의 얼굴도 있고, 어느 가문 출신인지 다 드러나죠. 하지만 다국적펀드에 국적이 있나요? 가문이 있나요? 원래 자본의 속성이란 자본가도 소외시키는 법이죠. 지금 이건희 잘 나가죠. 하지만 그 사람도 소외당하고 있는 거죠. 다만 우리랑 틀린 건 그래도 그는 자본을 소유는 하고 있다는 건데, 몇 %죠? 하여간 이걸 국가가 나서서 보호하는 거죠. 안 보호하면 안 되게 되어 있는 건 맞아요. 지금 삼성공화국 어쩌고 하잖아요. 그런 흐름이 그냥 온 것도 아니고, 민중이 돌대가리라 그걸 참고 넘기는 것도 아닐 겁니다. IMF 직후 괜찮은 은행, 기업 죄다 넘어갈 때, 보고 배운 거죠. 잘못하면 X된다. 외국 자본이 들어와서 그나마 괜찮은 기업들 인수해서 결국 다 우리에게 되팔고 나갔죠. 그 사이에 거기에서 일하던 사람들 죄다 정리해고 되고... 그래도 그 자본들은 다 돈 벌었어요. 세계화 어쩌구 해도 국민기업인지 나발인지는 살려야겠구나. 왜? 자본은 환치기해서 되팔고 나가도 돈 벌지만 기업이 없어지면 우리만 쪽박차니까. 그런 거죠. 그게 강화되어서 지금처럼 된 거죠.

하여간 그러다보니까 세계화란 건 기존의 은폐된 자본주의를 더욱더 이해하기 어렵고, 어디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겠금 현실을 더욱더 은폐하게 됩니다, 저도 몇 군데 다국적기업의 사례를 주워섬기지만 제가 알고 있는 것도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죠. 따라서 세계화론자들이 주장하든 진보론자들이 주장하든 세계화라는 혼돈의 과정은 그 은폐과정에 대한 연구 없이는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미FTA협상이 진행중인 서울 남산 후암동 쪽 하이야트 호텔 근처를 지날 일이 있었죠.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전경 방패로 겹겹이 에워쌓인 채 저 산 꼭대기 위에 자리 잡은 높은 콘크리트 건물, 호텔 안에서 한미FTA협상이 진행되고 있더랬지요. 이건 너희들과는 관련없는 일이라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전경들의 얼굴, 시대는 바뀌어서 민주주의라고 합니다만 저는 이게 민주주의란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요새 제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이들이 누군지 아세요?

민주주의 말하는 사람들이죠. 어쩌다 우리 사회에서 최장집, 백낙청 교수가 가장 뛰어난 민주주의 이론가, 우리 지식사회의 가장 윗자리를 내어준지 모르겠지만... 이 두 분의 차이 아닌 공통점은 바로 민주주의의 시대에 가장 많은 말들을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거겠지요.

80년대 이후 90년대 들어서 대한민국 지식사회의 가장 큰 맹점은 현장과 연계된 활동을 하는 지식인들, 그것도 큰 어른 지식인이 부재하다는 겁니다. 불나비 김진균 선생이 안 계시다는 거, 리영희 선생이 연로해지셨다는 거...

그러다보니 현장과의 연계가 끊긴 지식인들이 여태도 맨날 고담준론 늘어놓으며 민주주의 타령만 하고 있는 거죠. 가만 생각해보세요. 이번 정권 사라지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요? 민주화 세력이 다음 정권 차지하든, 못하든 뭐가 그리 달리지죠? 미국이랑 북한이랑 짝짜꿍해도 문제요, 안 해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가장 큰 문제가 민주주의일지도 모르지만 이때 문제가 되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과도한 민주화 담론이 정작 잊고 있는 문제, 그것이 우리 시대 진보의 목줄을 죄고 있는 상황이죠. 절차적 민주화, 다음 정권 창출, 책임있는 양당체제 어쩌구저쩌구 떠들면서 최장집 교수의 주장과 백낙청 교수의 주장에 휩쓸려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아젠다인 줄 착각하는 동안에 진보는 유리잔 안에 갇히게 된 겁니다.

민주주의가 뭐가 중요해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진보가 반체제민주화운동을 했던 것인데, 반체제는 어느샌가 사라져버리고 민주화만 남았다는 겁니다. 낮술 마실 일이 있어서 취해 잠들었다가 깨어나서 간만에 지랄 한 번 하자면 그런 겁니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는 그랬어요. 80년의 수많았던 당신들, 나랑 어깨걸고 나갔던 당신들, 내가 언제 민주화만 하자고 그랬어요? 난 반체제민주화하자고 그랬던 건데, 이것들이 어느새 말을 싹 바꿔서 민주화만 하자고 그랬던 것처럼 반체제 말은 쏙 빼버린 거죠. 진보요? 좋지요. 하지만 반체제를 생각지 않는 진보가 무슨 힘이 있어요.

그 지식인이 누구든 지금 자신을 조금이라도 진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반체제민주화운동에서 민주화만 말하면 지금 시점에선 결국 아무 말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민주화란 말로 모든 가치가 일원화된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파쇼해도 좋으니까 박정희를 살려내라! 두환이를 살려내라! 안 살려내면 어깨 스크럼 짜고 나가리라. 외치는 거겠죠.( 이 구호가 불경스럽게도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와 겹쳐도 하는 수 없죠. 바로 그 작자들이 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올초에 박종운인가 하는 작자가 지 블로그에 그렇게 썼다죠. 지금 종철이가 살았다면 친북좌파 정권 때려잡자는 운동을 했을 거라고... 이런 코미디가 있나? )

하여간 민주화 이후 모든 민주주의는 민주화란 한 마디로 정리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이며 국민이란 범주를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모든 국민의 정치적 염원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가? 생각해봐야죠. 최소한 전 아니거든요.그래서 저는 지금 우리나라의 지식인들, 진보, 좌파가 우파보다 덜 솔직하거나 최소한 정직하지 않다고 느껴요. 이런저런 걸 다 고려에 넣더라도 최소한 엄청 소심한 거죠. 국가보안법이 그냥 살아있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무슨 얼어죽을...

그런데 저보고 어떤 반체제 하자는 거냐고 묻지는 마세요. 그건 아직 저도 모르죠. 게다가 모든 천국이 그러하듯 추상적일수록 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법이죠. 또 한 가지 저는 어차피 석유 떨어지면 원튼 원치 않든 세계는 달라지리라 봅니다. 요새 쿠바를 하나의 대안으로 말하는 이들 많은데... 하이하바에 살든, 인더스트리아에 살든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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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자본가 없이 자본주의 만들기

한국일보의 서평을 둘러보다가 어제 지면에서도 지나쳤던(게재는 되었던 것일까?)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미스테리한 것은 아직 어느 온라인서점에서도 이 서평기사의 대상이 떠 있지 않다는 점. 무슨 유령 같은 책이다. 기자가 서평을 작성한 것으로 보아 언론사에는 '뿌려진' 듯하지만 다소 늦게 보내진 탓에 다음주로 서평들이 미뤄지거나 별로 주목을 못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만 해본다. 한데 주제 자체는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있는 쪽이어서 책은 나오는 대로 훑어봐야겠다. 그 책의 타이틀은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시유시, 2007)이다.

원저의 제목은 <자본가 없이 자본주의 만들기(Making Capitalism Without Capitalists)>이며 지난 1999년 버소출판사에서 나왔다(부제는 '사회주의 이후 중부유럽에서의 계급형성과 엘리트 투쟁'이다). 이런 류의 책으로는 좀 오래된 듯한 인상을 주는 게 흠이긴 한데, 책에서 다루는 러시아나 동유럽 경제만 하더라도 2000년 이후에 상당히 변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는 맘에 든다.

한국일보(07. 03. 10)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동유럽의 脫공산주의 다시보기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속속 몰락하자 미국의 정치학자 후쿠야마는 재빨리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가 냉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헤겔-마르크스가 말하던 진화적 역사가 끝났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이 책의 저자들도 후쿠야마의 판단에 딱히 이의를 제기할 것 같진 않다. 대신 그 선정적 구호를 ‘역사의 다양한 종언’이라고 바꾸지 않을까.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본주의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이다. 책은 그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특히 유산 부르주아 층이 빈약한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로 역이행하면서 밟는 다양한 경로에 주목한다. 저자들은 그 대표적 사례로 동유럽 국가의 변동 과정을 실증 분석한다. 설명에 따르면 사유재산을 가진 계급이 없었던 이들 나라에서 체제 전환을 진두지휘한 것은 교양 부르주아였다.

이들 대부분은 국가사회주의를 공격하던 반체제 지식인이었다. 예상과 달리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귀족 관료는 신체제에서 기존 권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대신 신세대 관료라 할 수 있는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가 교양 부르주아와 손잡고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등장했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에서 두드러진,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야말로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이었다. 이 같은 현상의 분석 틀을 마련하고자 저자들은 베버와 브루디외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한다. 전자에선 신분과 계급의 구별을, 후자에선 정치자본 문화자본 경제자본 등을 포괄하는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빌렸다.

이 관점에서 동유럽의 탈공산주의를 들여다보면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역동성이 포착된다. 체제 변동에 뒤쳐질세라 개인들은 앞 다퉈 사회주의적 신분에서 자본주의적 계급으로 정체성을 조정한다. 바꿔 말하면 변화한 환경에 유리한 자본은 늘리고 불리한 것은 버리면서 자본 포트폴리오=아비투스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치열한 적응 과정을 거치며 문화자본을 가진 지식인-기술관료 연합은 정치·사회자본을 갖춘 엘리트 관료를 압도한다. 교양이 권력과 권위 위에 군림하는,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진풍경이 펼쳐진 셈이다.

영미식 모델에 구애받지 않고 각각의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특성을 드러내는 것. 저자들은 이 야심찬 기획을 ‘신고전사회학’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으로 대표되는 고전사회학이 19세기 근대자본주의 이행을 분석했다면, 신고전사회학은 20세기 말 자본주의로의 역이행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설명이다.(이훈성 기자) 

07.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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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유교적 공부는 과연 공부를 재발견할 수 있는가?

* 한겨레(2007. 3. 8)  / 공부란 ‘물러남’을 아는 것이니라
교육열에 미친 세상, 조선 선비한테서 ‘참공부법’ 구해보니
그들은 일상에 발 딛고 ‘학’과 ‘도’의 세계를 추구했다
나아감과 물러남을 구별했기에 출세에 함몰되지 않아
근대교육 도입되면서 ‘학’만 발전해 기현상 초래
한겨레  임종업 기자
» <공부의 발견>정순우 지음. 현암사 펴냄. 1만5000원
고3생을 둔 집은 전쟁이다. 몇달 뒤면 아이의 삶이 갈리기 때문. 성적순으로 끊어 운명을 재단하는 사회구조 앞에 개인은 한없이 초라하다. 교육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는 흉물스런 이름 ‘교육인적자원부’다. 개인의 인격이 아닌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적자원을 관리하는 데라는 뜻. 학생1, 학생2가 있을 뿐 장삼, 이사가 있을 턱이 없다.

이러한 현실 뒤에 진화론이 똬리져 있다. 교육을 효율성과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학교는 정글. 적자만 살아남는다. 무차별 경쟁에 노출된 아이들은 서로가 적이다. 그러기에 우리사회는 ‘교육열’로 터질 듯하다. 학원산업이 재벌기업에 못잖고 사회 공기인 신문·방송에서도 과외를 한다. 좋은 학교가 있다는 강남 학군은 집값이 몇배나 비싸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중압감을 못 이겨 자진하는 아이도 있다. 교육열을 두고 어느 미래학자는 발전 원동력이라고 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속성재배해 때깔이 좋을지 몰라도 쉬 물러터지는 딸기처럼 사람도 사회도 건강을 잃어버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미치광이 사회를 살아야 하나. 언제까지 인간다운 삶을 유보하고 살 것인가.

<공부의 발견>(현암사) 지은이는 조선시대로 눈길을 옮겨 참다운 공부법을 찾자고 말한다. 고리타분한 성리학이 지배했던 전근대사회에서 가능할까? 지은이는 그때를 ‘공부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며 그곳에 길이 있다고, 적어도 지금과 같은 미친사회를 보완할 대안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조선 후기 교육사와 지성사를 전공한 한국학대학원 정순우 교수.

공부를 가장 깊이 논의한 사람은 퇴계 이황이다. 그의 공부론은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지향하며 존천리 거인욕(尊天理 去人欲), 즉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는다는 체계에 자리잡고 있다.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순수하고 선한 본연지성을 최대한 늘리고 형기(形氣)의 구속을 받는 기질지성을 도려내는 게 초점이다. 그 방법은 경(敬). 경이란 무엇이뇨. 정좌법이 요체라. 언제나 일상의 세계에 머물며 또랑또랑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새벽 잠에서 깨어나 저녁에 다시 잠들 때까지 도덕적 각성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는 일신우일신으로서 구도적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달점은 티끌 욕망도 없는 순백 도덕세계 즉 성인의 경지다. 성인이란 본래 인간의 참모습을 회복한 상태를 말한다. 결코 쉽지 않은 공부법이다.

퇴계, 인간 참모습 위해 ‘일신우일신’

» ‘고산구곡도시화병’ 가운데 제5곡인 소현서원도(1803, 개인소장). 율곡의 강학처인 황해도 고산의 소현서원을 그린 그림이다. 현암사 제공
유학의 공부론은 시대와 사람에 조금씩 변주를 한다.

목이 뻣뻣한 선비’ 남명 조식은 세상과 한발짝 떨어져 살았지만 세상을 향한 고민은 거두지 않았다. 그는 학문을 알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몸소 실행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마음공부를 위해 깨끗한 대접에 물을 가득 담고 두손을 받들어 밤새도록 엎지르지 않도록 하여 뜻을 지키는 고행을 참아내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역사의식과 실천을 중요시하여 문하에서 의병이 많이 배출되었다. ‘세상과 불화한 자’ 허균은 인간을 응고된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감성과 미학적 상상력의 대상으로 파악하면서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하고자 했다. 그한테는 예교 세계를 거부하고 모든 도덕 규범과 준칙을 거부하는 자유정신이 스며있다. “남녀의 정욕은 천성이고 남녀를 분별하는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은 성인보다 높으니 성인을 어길지언정 감히 하늘이 품부한 본성을 어길 수 없다”는 주장은 당시로서는 파천황이었다. 순암 안정복은 “공부의 공(工)자는 여공(女工)의 공 자와 같고, 부(夫)는 농부(農夫)의 부 자와 같다”며 “사람이 학문을 하되, 여공이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농부가 농사에 힘쓰듯 해야 한다”고 말했다. 추상화하고 허문화한 성리학적 공부론은 마치 기생이 <예경>을 외우는 것과 같다며 생활 속의, 구체적인 삶을 중시하는 교육을 강조했다. “이론적 앎과 실천적 익힘이 동시에 이뤄져야 참된 앎을 이룬다”는 다산 정약용은 가치명제와 사실명제를 구별한 아동 한자학습서를 만들었다.

식민화교육정책의 잔재 지금까지

예로 든 다섯 선비는 일상에 단단히 발을 딛고서 학과 도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특징을 가졌다.

지은이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나아감’의 쌍이었던 ‘물러남’ 철학이 소멸된 점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과거제도를 경계로 하여 세간과 출세간에 걸쳐 있었다. 역사에 개입하고 현실의 구체적 삶에서 충실해야 할 때는 출사하여 벼슬살이를 하고, 역사와 현실의 무게가 버거울 때는 출세간하여 처사가 되었다. 즉 유가의 교육에는 나아감 철학과 더불어 이를 억제하는 또 다른 축인 물러남 철학이 있었다는 것. 물러남 철학은 존재의 내성적 성찰을 중시하고 세속적 욕망의 절제를 가르쳤다. 그런 까닭에 조선의 교육은 천박한 출세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맹목적인 교육열에 들뜨지 않을 수 있었다. 존재의 내성적 성찰을 중시하는 교육에서 교육열이라는 현상은 일어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학교가 제향-강학 두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 공간이 학의 세계에 관여한다면 도통의 세계에 몸담은 제향 공간은 도의 세계를 표상한다. 그런데 개화기 근대교육이 도입되면서 도의 세계는 사라지고 오로지 남은 학의 세계가 진화론과 결합하면서 사단이 생겼다. 나아감 철학만 기형적으로 발전하고 물러남 미학이 소멸되면서 과도한 교육열을 냉각시킬 작동기제가 멈춘 것이다.

“학교는 공장이다.” “학생은 원료품이다.” “기계 같은 교과서를 사용하여 만들어낸 생산품, 학생은 다른 공장의 공산품 같이 거의 비슷하다.” 일찌기 <개벽>이란 잡지에서 주장했던 국가주의적 교육이념이다. 일제는 식민화정책에 이를 교묘히 이용했고 이 여파는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 밤도 창백한 형광등 아래서 청춘이 피 말리고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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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이것은 시(詩)가 아니다 !

* 시(詩)에 대한 도발적 페러디, 아니 도발적 전복을 시도하는 이승훈 교수의 <이것은 시가 아니다>(세계사, 2007)가 출간되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크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페러디한 시(詩) 제목으로서 시적 본질주의에 그야말로 똥침을 가하는 통쾌함을 가득 지니고 있는 것 같아 자꾸 웃음이 나온다. 아래에 나와 있는 이 시집에 실린 몇몇 작품만 읽어봐도 작가의 시적 세계에의 지향성이 어떠한지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도발적 전략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먹힐지는 두과 봐야 할 일이다.

* 한겨레(2007. 3. 8)  / 이게 시냐, 시와 시비붙은 시인

 

서정시가 끝난 시대, 순수도 서정도 폭력이다
순수는 불행을 모르고 서정은 불순하고…
결국 난 시를 쓰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
‘시는 끝났다’는 도발적 주장을 위한 ‘반시로서의 시’
한겨레  최재봉 기자
» <이것은 시가 아니다> 이승훈 지음. 세계사 펴냄. 6000원
“학교 연구실에서 20년 매일 잡채밥을 시켜 먹는다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빗물 묻은 우비를 걸치고 배달 온 청년이 묻는다 다른 건 잘 못 먹어요 청년이 나가면 연구실 낮은 탁자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맛없는 잡채밥을 먹는다 학생들이 연구실에 앉아 잡채밥을 먹는 걸 보면 실망할지 몰라 문을 잠그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전 열한시 반 낡은 잠바 걸치고 앉아 고개 숙이고 잡채밥 먹는다 물론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그릇을 신문지에 싸서 연구실 문밖에 내놓는다”(<잡채밥> 전문)

이것은 시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승훈(65·한양대 국문과 교수)씨가 새로 낸 시집에 실려 있는, 엄연한 시다. 시집 제목은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집에는 같은 제목을 단 표제작도 들어 있다. 그 작품의 전반부는 이러하다.

“한양대 교수로 직장을 옮긴 1980년대 초 밤이면 김일성이 자신의 집을 폭파하겠다고 전화를 하고 밤새도록 지붕 위엔 낯선 비행기가 떠 있다고 편지를 보낸 제자가 있었다 춘천교육대학을 중퇴하고 결혼에 실패한 그는 대학 시절 서울 집으로 간다며 철길을 계속 걸어간 적이 있지 어느 날은 그의 시집을 영국에서 출판하게 되었으니 선생님이 평론을 쓰셔야 한다는 편지도 보냈다”

이것 역시 시가 아니다. 그런데, 또한 이것은 엄연한 시다.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에는 이와 비슷한 ‘것’들이 81편이나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시이면서 시가 아니고, 시가 아니면서 동시에 시이기도 하다. 시인이 주장하는바 ‘불이(不二)’의 경지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는 제목은 물론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따온 것이다. 화폭에 분명 담배 파이프를 그려 놓고 제목에서는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우기는 마그리트의 그림은 존재와 기호, 사물과 회화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모더니즘·해체시론 이론가인 시인

<모더니즘 시론> <해체시론> 등의 연구서를 낸 이론가이기도 한 시인은 시집 뒤에 붙인 해설성 시론 ‘누가 코끼리를 보았는가’에서 마르셀 뒤샹의 설치 작품 ‘샘’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능가하는 현대 미술의 스캔들로 일컬어지는 작품 ‘샘’이란 그저 평범한 남성용 소변기였던 것. 마그리트의 그림과 뒤샹의 변기는 미술과 예술에 관한 기존의 관념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든 문제작들이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 까다로운 철학적 화두를 던졌다면, 뒤샹의 변기는 예술과 비(非)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혁명적 도발이었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가리켜 ‘시가 아니’라고 선언하며 뒤샹의 변기를 거론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시로써 ‘시라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순수도 서정도 폭력이다 순수는 불행을 모르고 고통을 모르고 타자를 모르고 서정도 서정도 허위다 서정시가 끝난 시대에 서정을 주장하는 건 불순하고 순진하고 천진하고 시가 갈 길은 무수히 많다 갈 데가 없으므로 갈 데는 많고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지금 책상에 날아와 앉는 파리처럼 갈 곳이 없고”(<서정시> 부분)

 “이 시는 시의 고민이 사라지고 쓰는 시 아무렇게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시 비가 오면 아무 일도 못하고 비 때문에 비 때문에 이제 시는 끝났다 비가 올 때 끝나고 시의 문제는 철학의 문제로 넘어간다 아슬아슬하게 넘어간다 시와 산문의 전쟁도 끝나고 오늘부터 끝나고 시의 종말은 시의 죽음이 아니야 한 시대가 끝난 거야 이젠 무슨 시론도 본질도 없지 최근 젊은 애들이 쓰는 시를 욕해선 안되지 이게 우리 시의 희망이고 미래야 본질주의자들은 엿이나 먹어라! 또 비가 오잖아? 사흘만 참으면 돼 사흘 뒤에 사흘 뒤에 너를 만나겠지”(<개는 사람을 문다> 부분)

본질주의자들은 엿이나 먹어라!

인용한 시들에서 서정시나 순수시, 또는 시의 ‘본질’에 관한 시인의 거부감은 격렬하다. 다른 시들에서도 마찬가지. “사유는 결국 미친 짓이죠 무슨 영혼, 진리, 본질 따윈 버리세요”(<우리가 할 일은 웃는 것이다>)라거나 “그저 언어가 있으므로 시를 쓴다”(<언어가 있으므로 시를 쓴다>), “현대시는 끝났어 이젠 모두가 시이고 모든 게 가능해”(<나는 다른 누구일 뿐이다>), “결국 난 시를 쓰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시론>)와 같은 도발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을 쉽게 만날 수 있다.

 

 

 

» 이승훈/시인
시는 끝났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쓰여지는 시. 시의 죽음을 먹고 사는, 하이에나 같은 시. 이승훈씨의 시는 그야말로 ‘반시(反詩)로서의 시’라 이를 법하다. 시인 자신 예의 해설성 시론에서 “내 시의 종말(end)이 내 시의 목적(end)이고 내 시의 목적이 내 시의 종말”이라고 선언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의 ‘시’들이 주장과 이론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집의 전반부에는 일상에서 마주친 시적 순간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한 일상의 시편들이 배치되어 있다.

“올 겨울엔 이런 일이 있었다 진눈깨비 치던 오전 난 택시를 타고 공항터미널로 가고 있었다 그날 제주에서 제주대 대학원 박사 논문 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사 옆에 앉고 그는 50대로 보이는 남자 공항터미널로 가면서 그가 힐끗힐끗 곁눈으로 나를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은 무얼 하십니까? 난 검은 바바리를 걸치고 낡은 밤색 가방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글쎄 뭐 하는 사람 같아요? 그랬더니 기사 왈 철학하는 사람 같군요! 네? 철학이요? 왜 있잖아요? 풍수도 보고 예언도 하는 철학 말입니다 진눈깨비 치던 겨울 오전이었다”(<철학> 전문)

이런 것을 시로 보아야 할까. 시인의 주장대로 이제 시는 끝났고 그 주검 또는 부정이 시의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것일까. “선생님 어떻게 이런 게 시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시가 싫어서 시를 쓴다. 쓸 것이 없는 시, 시 되기를 거부하는 시”라거나 “나는 무엇을 창조한 게 아니라 그저 기표를 따라 표류했을 뿐이다”(‘해설성 시론’)라고 답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이승훈씨의 새 시집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 한 보따리를 독자에게 던져 준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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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서로 주체성': 주체성의 새로운 구성

* 김상봉 교수의 신간 <서로 주체성>(길, 2007. 3)이 나왔다.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아 그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서구 철학사 전체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주제인 '주체성'의 문제를 재구성한 저작인 듯싶다. 이른바 그의 정신 노동의 결과는 '서로 주체성'이라는 다소 생소한 철학적 개념을 탄생시켰다. 책 전체 내용을 가늠할 수 없지만 리뷰 기사만을 읽어 봤을 때, 이 책의 핵심요지는 주체와 타자의 상호 공존적 영토를 철학적으로 보증하자는데 있는 것 같다. 이를 위해 저자는 서구 철학사 뿐만 아니라 동북아 철학사 전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들을 포착하는데 꽤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같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나'인 주체와 '너'인 타자의 서로 상호 배제적 관계가 아닌 상호 포함적 관계에서의 만남을 철학적으로 기획하고 있는 듯하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생각이지만 이는 리꾀르의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의 개념과 잇닿아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한다. 덧붙여 '서로 주체성'의 개념이 성립된다면 '서로 타자성'의 개념도 성립되지 않을까? 물론 이 '서로 타자성'은 내가 타자가 되고, 타자가 내가 되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서로 주체성'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작업은 윤리학적 문제 의식을 동반한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거기서 제기되는 정치적 요소의 판단(아래의 리뷰 기사만을 읽어봤을 때 다른 철학자들은 잘 모르겠고 니체에 대한 해석은 지금 당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에 대해 이 책이 얼마만큼의  긍정적인 대답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에 붙인다.

* 한겨레(2007. 3. 8)  / 진정한 주체는 너와 내가 만난 우리

 

서양정신은 자기만을 사랑한 ‘홀로주체성’
주체와 타자의 참된 만남을 사유하지 못했다
반면 우리 역사는 자기상실의 역사
철저히 잃어봤기에 참된 만남이 가능하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이정아 기자
» 「서로주체성의 이념」
커버스토리 / 김상봉 교수가 창립한
‘서로주체성’이란

우리 역사는 최소한 지난 100년만 돌아보면, 자기 상실의 역사였다. 자기를 잃어버리기만 했을 뿐, 자기를 자기로서 정립하지 못했다. 자기를 자기로 세우지 못했다는 것은 주체가 아니었다는 뜻이고, 자유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주체만이 자유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인만이 주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지평 위에서 자유와 주체 문제를 집요하게 물어온 철학자가 김상봉 교수(전남대 철학과)다.

그는 서양에서 빌려운 주체의 개념이 아닌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낸 주체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립하려고 쉼없이 ‘정신의 노동’을 반복했다. 그 고된 노역에서 발견한 개념이 ‘서로주체성’이다. 그의 최신 저작 <서로주체성의 이념-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도서출판 길 펴냄)은 그의 땀이 밴 ‘서로주체성’ 개념을 ‘홀로주체성’ 개념과 명확히 대비시킨 뒤, 그 개념의 근거를 도출하고 확인하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전작 <나르시스의 꿈>에서 서양 정신의 특성으로 제시했던 홀로주체성을 더 과감하고 더 투철하게 규명하고, 그 한계를 넘어 참된 보편적 주체성으로서 서로주체성을 이끌어낸다.

그가 우리의 주체성 개념을 세우는 데 심혈을 다하는 것은 주체란 것이 애초에 자기 힘으로 자기를 해명하고 형성하는 것 위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해명한다는 것은 세계를 해명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세계를 해명할 때 자기를 해명할 수 있고, 자기를 자기 힘으로, 자기 언어로 말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주체,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자유는 오직 자기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해가는 활동 속에서만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최신작서 개념의 근거 도출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지난 시절에도 자유인이 아니었고 현재도 자유인이 아니다. 남이 가진 세계지도와 남이 만든 설계도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주하는 곳은 타자의 지도에 의해 구획되고 규정된 남의 세계”일 뿐이다. 남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노예이거나 머슴이거나 기껏해야 손님일 뿐 자유인은 아니다. 남의 언어를, 남의 생각을 빌려쓰며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정신의 빈곤’ 상태가 오늘 이 땅의 모습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서양 정신에 매혹당했고 압도당했을 뿐, 우리의 지도를, 우리의 설계도를, 다시 말해 우리의 정신을 세우지 못했다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 김상봉 교수는 ‘서로주체성 이념’의 주창자이다. 새 철학 저서 <서로주체성의 이념>에서 그는 서양 정신의 홀로주체성을 규명한 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서로주체성을 찾아낸다. 너와 내가 만나 서로를 정립하고 ‘우리’가 되는 서로주체성은 타자를 알지 못하는 서양의 홀로주체성을 극복한 진정한 보편적 주체성이다. 이정아 기자
지은이는 서양 정신을 ‘나르시시즘의 정신’이라고 규정한다.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매혹돼 자기와 사랑에 빠졌듯, 서양 정신은 자기 안에서 자기와 사랑했을 뿐, 한번도 타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기를 양도하고 그럼으로써 자기를 잃어버리는 경험이다. 자기를 자기 아닌 타자에게 잃어버린 적이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서양 정신의 특성이다. 그것을 가리켜 지은이는 ‘홀로주체성’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는 나르키소스에게 반해 사랑에 빠진 에코처럼 끝없이 그가 하는 말의 메아리만을 되풀이했다.

서양 정신이 자기만을 사랑한 건 그만큼 그들의 긍지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 긍지는 그들이 자유의 발견자요 자유의 개척자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자유로운 삶의 방식에 관한 한 서양 문명은 언제나 역사의 개척자였다.” 문제는 그 자유가 홀로 아름답고 홀로 긍지를 느끼는 상태의 자유였다는 사실이다. 홀로주체의 자유는 모든 타자를 배제하고 부정하는 자유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그 홀로주체의 자유를 면면히 드러내 보인다.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은 그 홀로주체의 자기정립을 정점에서 보여준다. 뒷세대 게오르크 헤겔은 타자를 사유함으로써 칸트를 극복해보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자기 안에서 자기를 객관화함으로써 자기를 타자로 삼고, 그 타자를 다시 자기 안에 통합함으로써 더 큰 홀로주체가 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헤겔과 대결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내 안의 힘을 발견하고 그 힘으로써 나를 극복하려는 자기 의지여서, 나르시시즘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 새로운 세계관을 열었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타자를 자기 안의 무의식으로 설정했을 뿐이다. 서양 정신의 이런 나르시시즘은 제국주의로 귀결했으며, 거기에 대한 어떤 진지한 철학적 반성도 주체와 타자의 참된 ‘만남’을 사유하지 못했다.

동-서·남-북 ‘서로주체’로 만나야

지은이는 이런 진단 위에서 서로주체성을 선언한다. 진정한 주체는 홀로 서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오직 너와 나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되는 서로주체가 될 때만 주체로서 성립한다. 만남이란 능동적인 것임과 동시에 수동적인 것이다. 내가 의욕하는 만남도 있지만 내게 닥쳐오는 만남도 있다. 닥쳐오는 만남은 자주 수난이 되고 고통이 된다. 우리 역사에서 서양 정신과의 만남은 수난과 상실을 동반하는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 수난과 상실 속에서도 참된 만남이 가능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왜냐하면 만남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상실의 깊이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철저히 잃어본 적 있는 자만이 만남의 뜻깊은 은혜를 안다.

만남은 부름과 응답의 교환이다. 너와 내가 만나 부르고 응답할 때, 그리하여 내가 너를 형성하고 너가 나를 형성할 때, 그리고 다시 그 너와 내가 우리가 될 때 참된 주체가 나타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 참된 주체의 이름이 서로주체다. 주체는 언제나 나인 채로 우리인 주체, 곧 서로주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서로주체를 다만 이념으로, 철학으로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이 서로주체로 만날 때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현실이 될 것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우리 속에서 존재의 진리 끌어내자” 첫 자작서 사유의 씨앗

김상봉 교수는 지금까지 모두 일곱 권의 철학적 저서를 냈다. 그 저서들에서 그는 서로주체성이라는 주제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고 개념의 나무로 키웠다.

첫 철학 저작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한길사, 1998)에서 그는 서양 철학의 근본 문제인 ‘존재’(있음)의 문제를 파고들어 그것을 비판적으로 규명하려 했다. 벌써 이 책에서 그는 서로주체성을 말한다. “존재의 진리는 고립된 홀로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서로주체성으로서 발생하는 ‘우리’의 자기의식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나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존재의 진리를 이끌어내야 한다.”

두번째 책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탄생> (한길사, 1999)에서 그는 서양 윤리학의 역사를 탐색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관심은 우리 역사에 놓여 있다. “어떤 민족도 윤리와 도덕을 포기한 채 오로지 행복과 쾌락만 추구하면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산 예는 일찍이 없었다. (…) 인간의 행복은 우리가 행복에 대해 적당히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울 때에만 우리 곁에 가까이 온다.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의 행복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지 않을 때, 욕망이 아니라 선과 도덕을 행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숭상할 때, 도리어 행복은 우리 모두에게 더 가까이 오는 것이다.”

세번째 철학 저작 <나르시시즘의 꿈> (한길사 2002)에서 그는 ‘서양 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을 본격화하고 홀로주체성을 면밀히 따지기 시작했다. “서양철학은 한 번도 자기 밖으로 걸어나와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적이 없는 닫힌 정신만을 보여줄 수 있는 꿈의 파노라마다. 나르시스는 타자적 주체를 알지 못하는 정신이다. 그는 언제나 홀로주체로서 존재한다. 그의 세계에서는 자기만이 주체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의 객체이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3)는 서양 정신이 홀로주체성에 갇힌 정신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배워야 할 자유의 정신을 시원에서부터 고민하고 발전시킨 정신임을 그리스 비극에 담긴 자유인의 긍지를 살핌으로써 뚜렷하게 보여준다. 서양정신의 극복은 그것을 일거에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배워 넘어설 때 가능함으로 역설하는 책인 셈이다. 이어 출간한 <학벌 사회> (한길사, 2004)에서 그는 서로주체성을 사회철학적 차원에서 탐구하면서 한국 사회의 질병인 ‘학벌’의 문제를 규명했다. <도덕교육의 파시즘> (길, 2005)은 이 땅의 도덕교육이 어떻게 진정한 도덕을 가르치지 못하고 정신의 노예를 기르는 노예도덕이었는지 성찰하면서 참된 도덕 교육을 길을 찾는다. 그 길은 지은이의 용어로 말하면, 서로주체를 기르는 데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 왼쪽부터 <자기의식과 존재사유>,<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탄생>,<나르시시즘의 꿈>,<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학벌 사회>,<도덕교육의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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