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지금-여기의 ‘대중문화’는 에코가 이 글을 썼던 64년과 어떻게 다른가? 73년 포디즘 체제 붕괴 이후의 물적 토대의 변화(유연적 축적체제?)와 68이후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문화현상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지도 20여년이 지난 지금-여기와, 40년 전의 ‘대중문화’의 물적 토대와 현상은 분명 다르다. (지금-여기의 한미 FTA문제 또한 이러한 물적 토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 터이다.)
에코가 염두에 두고 있는 ‘대중문화(mass culture)’는 매스‘미디어’mass media에 의해 중개되는 것이고, 이 매스미디어는 지배계급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적인 문화 모델을 자신들의 자율적인 문화의 표현으로 오인한 채 그대로 소비하게 만드는 대중문화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스누피, 49면) 일괄적이고 똑같이 ‘생산’되어 ‘소비’되는 대중문화. 이에 대해 에코는 이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는 메시지의 생산 문제보다는 수용, 즉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스누피, 20면) 포디즘-케인주의의 가장 큰 특성인 ‘획일성’을 ‘다르게’ 전유한다는 것. 모든 텍스트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특히 ‘대중문화’라는 텍스트에 적용하기는 기피했던(에코 시대에는) 것을 반박하고 있는 셈이고, 이 책은 이러한 반박문들이다.
그런데, 지금-여기에서의 ‘대중문화’로 눈길을 돌려보자. ‘대중’이라는 물신화된 개념을 ‘전체’로 인식하고, ‘문화’라는 것을 생활방식으로 바꾸어서 생각해볼 수 있다면1), 지금-여기의 문화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중개되었지만, 미디어에 의존하지만은 않은 움직임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에코가 “대중문화는 대중을 위해 생산하고, 대중교육을 계획하는데 너무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공개적이든 은밀하게든 주체성과 주체의 파괴를 가져온다” (스누피, 39면)고 함에도 한편으로는 이를 극복하는 ‘다르게 읽기’ 즉 ‘주체적 읽기’를 강조했지만, 지금-여기에서의 ‘대중문화’에서 널리 알려진 현상들을 되돌아보면, 40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대중’들이 ‘대중문화’의 생산자로, 또는 ‘다르게 읽기’의 주체로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Blog들의 발전, 개인방송(일인방송)들, TRPG, 코스프레, 팬픽2), 고딩들이 쓰는 무협지와 연애소설, 패러디 사진들 등. 기존 ‘미디어’를 전유하고, 자신의 분야를 점차 확장시켜 나가는. 이것이 물론 자본에 의해, 산업에 의해, 다시 이용되는 측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주체성’이라는 것이 40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일 터이다. 물론 이것이 어떻게 ‘혁명적’이냐, 혹은 어떻게 자본에 ‘거스르게’ 작동하느냐는 질문은 가능할 것이지만, 이 또한 모두 ‘자본’의 지배하에 작동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러한 지금-여기의 ‘대중문화’를 물을 때, 우리는 40년전 에코가 물었던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어떻게 유효하게 변형시켜야 할까? “메시지의 구조에 대한 분석(메시지의 형태와 메시지 전송의 객관적 조건), 대중의 다양한 수용 방식, 대중들의 메시지에 대한 만족도와 이에 대한 문화적 개입의 가능성과 기본조건” (스누피, 53면 참고) 이러한 질문들은 뚜렷하게 ‘문화생산자’(미디어의 매개)-> 대중(문화수용자)라는 이분법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외부 ‘주체’로서의 연구자도. 문화적 ‘개입’은 ‘대중문화’ 밖에서만 올 수 있다.) 그러한 이분법이 지금-여기의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데 적절한 인식틀일까? 아니면 현재의 대중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인식틀은 다양한 피드백과 피드백 자체도 그 개념 속에 포괄하는 생물학적인 ‘재귀-조직’으로서 바라보아야 할까? 혹은, 그 전에 ‘대중문화’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인식틀이 도출 되는 것일까..
2. 에코도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다. “현재 막연히 매스미디어로만 알려져 있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를 산업 사회가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있다면, 이러한 매스미디어로 하여금 문화적 가치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문화적 가치’, ‘산업 사회가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있는 ‘매스미디어로만 알려져 있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라는 것이 의미는 모호하다. 앞서도 문제제기했듯이, 포디즘-케인즈주의가 40년전의 산업 사회를 의미했다면, 유연적 축적 체제 하에서의 ‘서비스’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매스미디어’라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는 변화되었다. 매스(mass=대중)와 mass media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media 즉 medium의 복수는 ‘매개’물이다. 무엇을 ‘mass’에게 매개하는가는 알 수 없다. 이는 정태적으로 mass가 있고, mass media가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mass는 mass media 때문에 mass로 형성된다고 보아야 한다. 즉 mass media에 의해 매개되어 형성된 존재로서의 mass. 그래서, 지금-여기에서 ‘대중’을 mass라고 보지 않을 수 있는 실마리가 존재한다. 大衆, 즉 큰무리와 mass사이의 간격. 지금-여기와 40년전 사이의 간격. (물론 지금-여기에서도 인식의 차가 존재한다. 2002월드컵과 ‘대중’. 동원되었지만, 또 자발적으로 조직된. 미디어가 모았지만, 미디어가 놀라버린.. 여기에서 야기되는 문제는 ‘대중’mass 또는 여러 다른 이름들, 민중, 인민, 시민, pt, 하위주체, 다중, 개중 등으로 이름붙여진 ‘주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적어도 이를 지금-여기의 대중문화와 연결시켜 볼 때 이것을 꼭 ‘매스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문화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존재로는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조금 미루어 두어야 한다. 호미바바나 스피박 등을 통과하고 참조만 하면서, 결국에는 그러한 할아버지 할머니들과는 전혀 다른 물적 토대 위에 세워진 전혀 다른 ‘대중문화’를 우리는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40년전 에코가 말하는 대중문화는 mass culture의 의미이고 이는 mass media에 의해 매개된 문화를 의미한다. “대부분 아주 복잡하고 전문적인 문화 기술에 문외한인 무작위적인 소비자 대중에게 호소하는 문화 산업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효과를 판매하는 동시에 그러한 제품의 사용 조건을 미리 규정하며, 또 메시지와 함께 그러한 메시지가 환기해야 하는 반응도 미리 처방해준다.” (스누피, 103면)
이러한 다시금 오래된 구조와 주체의 문제를 야기하게끔 하는 ‘대중문화’와 ‘대중’이라는 개념틀을 에코는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 “출판 산업에는 ”문화 상품을 생산해내는 사람들“ 이외에도 특정 시기의 출판 산업 체계를 뛰어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러한 체계를 활용하는 ”문화의 생산자들“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누피, 76-77) ‘대중문화’라는 구조 밖에서 ‘개입’할 수 있는 주체 또는 주체효과의 존재. 때문에 연구하는 것이니까. (이러한 연구자는 마치 「공산당 선언」에서의 pt=문화 소비자와 자본의 생산양식=출판 산업 체계를 뛰어넘는 ‘공산주의자’와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일종의 ‘비판적-건설적 개입’이라고 주장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 과학자들이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란 오늘날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연구하는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반론적인 숙고의 차원에서 진행되던 논의는 실천적인 결정이라는 차원으로, 즉 한편으로는 협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건설적인 분석이라는 이중적인 형태 속에서 수행되는 개입의 차원으로 이전된다.” (스누피, 80) 이러한 에코의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그가 보고 있던 40년전과 지금 우리가 보는 현상은 분명 다르다. “특출한 재능을 가졌고 또 공동체의 해석자 역할을 떠맡게 되는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형태의 ”집단 창작“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관계를 온정주의적 관계에서 변증법적인 관계로 전환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자가 후자의 요구와 요청을 해석하는 관계로 말이다.” (스누피, 81) 이것이 산업사회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근대-산업사회에서 문화라는 것이 ‘미디어’를 통해 이제 비로소 일반 대중이 소비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교양요소들을 갖추게 되었다면, 이제 오늘날 생산수단이 ‘우리’에게 있다. 인터넷이 접속된 컴퓨터. 생산수단과 문화 노동자의 결합? (문화) 생산양식의 변화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삶의 양식이 ‘우리’가 바라던 것과는 거리가 분명 있다. (앞서 「공산당 선언」과의 비유를 계속해본다면, 이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서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점유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이라는 ‘권위적’이면서 또 ‘권력적’인 주체가 존속하는 것과 비교해볼 수 있다. 전자는 pt를 대변하는 당이 존재함으로서, pt가 구조에 종속된 것으로 남는 것이다. 이제 지금-여기의 문화현상은 ‘일부’ 문화 노동자들이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지만, 실제 그들의 삶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작동한다. 전자가 ‘집단 주체’를 가장한 당에 의해 개인이 소외된 것이라면, 후자는 ‘문화’라는 공간에 앙상히 남은 ‘주체’가 해방의 가능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 이제 다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에코의 위의 질문을 제시하고 이를 변형해보자.
“현재 막연히 매스미디어로만 알려져 있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를 산업 사회가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있다면, 이러한 매스미디어로 하여금 문화적 가치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화적 가치’의 의미. ‘커뮤니케이션 관계’를 ‘재귀-조직’으로의 변화.
“지금 당장 과학자들이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란 오늘날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연구하는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반론적인 숙고의 차원에서 진행되던 논의는 실천적인 결정이라는 차원으로, 즉 한편으로는 협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건설적인 분석이라는 이중적인 형태 속에서 수행되는 개입의 차원으로 이전된다.”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판적-건설적인 분석이라는 개입’이 되는가? 이 또한 ‘대중문화’의 하나로서? 그러면 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다른가? 아니면 결국 그 이야기인가?
3. 또 흥미로운 지점은, 어떻게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적-건설적 분석’이 개량주의적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문화의 영역에서는 개량주의에 의한 현상의 고착화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이 영역에서는 일단 자신을 묶어 놓았던 족쇄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점진적인 의식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매스커뮤니케이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어야 한다. 침묵은 결코 항의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공범 관계를 맺을 뿐이다.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자세 또한 마찬가지다.” (스누피, 79) 침묵이 공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비판적-건설적 분석’의 이데올로기성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이것 또한 ‘개량주의적’으로 취급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개량주의자들의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적-건설적 분석’은 어떻게 비개량주의적이 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비판적-건설적 분석’이라는 것은 이 자체로 형용모순인가? 그러니까 그 ‘비판성’과 ‘건설성’의 특징이 무엇인가? 이것은 효과로 사후적으로 판정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매스미디어에 대한 ‘개입’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된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다. 그 개입은 물론 매스미디어에 의해서 생산된 ‘문화산업’의 내적인 측면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놓여있는 산업적 틀 또한 마땅히 비판의 대상에 올려야 할 것이고, 대중문화 연구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될 성질의 것이 아닐까...
1) 왜 이렇게 인식해야 할까. 대중mass이 mass media에 의해 매개되어 생성된 존재들이라 할 때, mass media에 의해 중개되고 생산된 mass culture에 대한 분석이라는 인식틀이 40년 전 물적 토대에 부합하는 방식이었고, 이를 통해 大衆의 삶의 방식-즉 문화-를 탐구할 수 있었다면, 지금-여기에서의 大衆의 삶의 방식은 꼭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어 mass로 형성되는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大衆’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이다. 이를 나이브하게 ‘전체’로 파악하게 된다면 사실 ‘대중’과 ‘대중문화’라는 개념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는 단지 사람과 문화로 환원가능하기 때문이다. mass와 mass media, mass culture라는 개념은 그 작동방식과 연구대상의 구체성 때문에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여기에서는 이미 상당부분 ‘大衆’의 현실 삶과는 유리된 인식틀이라고 판단된다. 아니면 노동자, pt 또는 subaltern만을 문제삼는 정치적 전제가 강하게 깔린 인식틀도 가능하다. (2번 문제제기 참고)
2) 국문학도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끄는 존재가 아니지만, 대중문화이론가나 특히 여성학 전공자들의 관심은 엄청나다. 팬들의 관심은 차치하고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