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대학 밖에서 꽃피는 인문학?

아침에 경향신문에서 읽은 칼럼은 '대학 밖에서 꽃피는 인문학'. 실제 대학 밖의 비공식 '강의'도 한두 가지 맡아서 하고 있는 처지라 눈길이 가는 제목이었다. 기사의 낙관적인 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교양 인문학의 향방과 관련한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더불어, 대학가 교양 과목들의 폐강 현황을 다루고 있는 문화일보의 기사도 옮겨놓는다. 이 또한 호들갑을 떨 만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고, 은근히 '교양과목' 경시 풍조를 정당화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있지만 '데이터'로서의 가치는 있다(사실 교양 과목의 폐강에는 대학마다 최소 수강인원을 30명 이상 등으로 '과도하게' 설정하고 있는 것도 주된 이유로 작용한다. 비용 절감 차원이라지만 그로 인한 '과밀 강좌'가 교양과목 개설의 본래 취지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문화일보(07. 03. 19) '교양’이 무너지는 상아탑

교양 인문학과 제2외국어 강좌들이 대학에서 대거 퇴출되고 있다. 취업 준비에 목을 매고 있는 학생들에게 역사·문화·민속 등 순수 인문학 교양 강좌는 ‘사치’가 됐기 때문이다. 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컴퓨터 교양 강좌도 대거 폐강됐다. 학생들의 관심이 ‘개발’보다는 ‘활용’으로 넘어간 세태 변화를 반영한 것이지만, 교양을 쌓아야 할 대학신입생들로부터 ‘교양’을 아예 배제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교양 인문학은 퇴출 1순위 = 역사와 문화 등 교양 인문학 강좌들은 대부분 대학의 폐강 리스트에서 발견된다. 성균관대에서는 ‘일본역사탐구’, ‘세계영화와 문화교류’ 등 10여개의 역사·문화 관련 강좌가 최소 수강인원을 못채워 폐강됐다. 중앙대에서는 ‘문화 이해와 수사학’ ‘현대사회와 민속’ 등이, 한양대는 ‘동아시아 문화’ 등이 폐강 명단에 포함됐다. 철학 관련 강좌도 인기가 없기는 마찬가지. 동국대에서는 ‘철학·과학·생명·가치’, ‘현대사회의 철학적 이해’ 등의 강좌가 폐강됐고, 서강대에서는 ‘신학적 인간학’ 등이 기준 수강생을 채우지 못했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수용자 중심의 교육으로 바뀌고 학생들이 취직 준비 등을 우선시하면서 실용적인 학문에 치우쳐 공부하는 현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 했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도 “최근 대학들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 배출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지식의 변화속도 가 매우 빠른 현대 사회에서 대학은 오히려 기초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2외국어도 관심 밖으로 = 국내 기업의 중국 진출이 확대되면서 중국어 인기는 여전하지만 독일어나 프랑스어 등 전통적 제2 외국어는 학생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중앙대에서는 ‘독일문화와 예술’, ‘독일 정치와 사회’ 등이 폐강됐고, 성균관 대에서도 ‘독어의미론’ 등의 강좌가 폐강됐다. 숙명여대의 ‘ 독일어1’ 강좌, 단국대의 ‘기초독일어’ 등의 강좌도 폐강됐다. 동국대에서는 ‘기초독일어’, ‘기초불어’ 등이 폐강됐다.

김영주 숭실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사실 우리나라에 진출한 독일 기업만도 300여개가 되는데 세계화가 미국화로 오인되면서 독일 관련 과목들이 폐강되고 있다”면서 “진정한 세계화를 위 해서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컴퓨터 언어도 옛날 얘기 =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과 관련된 기초 강좌들도 쇠퇴 일로를 걷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인력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학생들의 관심은 컴퓨터 활용에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에서는 ‘자바(JAVA)프로그래밍’과 ‘웹 프로그래밍’ 강좌가, 단국대 ‘비주얼베이직(Visual Basic) 입문’, 동국대 ‘프로그래밍기초와실습’ 등의 강좌가 폐강됐다. 연세대의 ‘컴퓨터와 IT 기술의 발전과 활용’, 성신여대의 ‘IT와 지리정보’ 강좌 등도 폐강 리스트에 올랐다.(음성원 기자)

경향신문(07. 03. 19) 대학 밖에서 꽃피는 인문학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는 필자에게 최근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최근 한 단체의 초청을 받아 근현대사를 강의했는데, 수강생들의 자세가 대학과 달리 진지하고 열정적이어서 내심 놀랐다고 말했다. 수강생들은 복지재단이나 장애인·아동생활시설 등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 그는 사회복지사들이 전공과 무관해 보이는 역사·철학 등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 인문학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이동국 학예사도 지난 겨울 추사 학술강좌에 참여한 수강생들의 열기에서 인문학의 힘을 느꼈다고 전했다. 1월부터 두 달간 주말에 열린 특별 강좌에는 매번 200명 가까이가 몰렸다. 연 인원이 1000명에 달했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 등 모두 21개 강좌가 개설됐는데, 토요일 1시부터 7시까지 진행된 강좌를 빠짐없이 들은 사람도 상당수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 학예사는 “전시장에서 구체적인 작품을 놓고 강의한 게 관객들에게 어필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인문학이 꽃피고 있다. ‘인문학 위기 선언’이 나온 지가 불과 몇달 전인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이다. 만개하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개화할 조짐은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물론 대학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곳의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이다. 문학, 역사학, 철학 관련 학과들은 학생수를 채우지 못해 폐과 대상 1순위이다. 서울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들이 대학원 중심 대학을 외치지만, 정작 진학자가 없어 공허한 울림이 되고 있다.



반면 캠퍼스 밖의 인문학 공부의 열기는 뜨겁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안 연구공동체를 표방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이다. 이곳은 그간 단기적으로 운영해온 강좌를 올해부터 학기제로 바꿔 장기 강좌 중심으로 꾸렸다. 철학, 고전강독, 문화예술, 글쓰기를 강의한다. 수강료가 과목당 35만원씩 하는데도 접수를 받기 시작한 지 1주일도 안돼 정원을 다 채웠다. 강좌뿐 아니라 회원들의 공동 연구에도 힘을 쏟고 있는 ‘수유+너머’는 지난주 ‘모더니티의 지층들’이라는 묵직한 사회학 개설서를 펴내 주목을 받고 있다.

부산의 ‘인디고서원’은 이제 꽤 이름을 얻었다. 인디고서원은 서점이다. 그러나 인디고는 책 판매에 그치지 않고 독서 프로그램 운영, 명사 초청 강연 등을 통해 청소년 대상의 인문학 교육장이 되고 있다. 이밖에 철학아카데미,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디지털문화예술아카데미 등에서 다양한 인문학 강좌를 열고 있다.

주목할 점은 최근의 인문학 교육이 서민과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공회 노숙인다시서기 지원센터는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을 개설하고, 광명시는 ‘광명시민대학’에 인문학 과정을 포함시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또 ‘경기광역 자활후견센터’와 ‘관악일터나눔 자활후견기관’ ‘노원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도 각각 지역민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다.



지난주에는 의정부교도소에서 국내 처음으로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가 열렸다. ‘빈자(貧者)의 인문학’을 내건 얼 쇼리스가 창안한 클레멘토 코스를 한국에 적용한 것이다. 10년 전 뉴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철학, 예술 등을 가르쳤던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 가난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정당한 힘을 갖게 해 준다”고 믿고 있다. 인문학(humanitas)을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학문’이라 한다면, 쇼리스의 ‘빈자의 인문학’은 인문학의 본령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쇼리스의 인문학 강좌는 이제 캐나다, 호주, 멕시코 등 4개 대륙으로 수출돼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의 인문학 위기는 학문 또는 인문학자의 위기라기보다는 인문적 지적 풍토의 허약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측면에서 교양을 쌓고, 자신을 성찰하며, 삶을 바꿔나가는 ‘장외의 인문학’ 열기는 분명 주목할 일이다.

교육부와 학술진흥재단은 올해 인문학 위기 타개를 위해 200억원을 투입할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위기에 처한 대학’을 지원하기 위해 쓰여질 터이지만, 대학 밖의 인문학 활동에 대해서도 지원 방안이 검토돼야 하지 않을까(*국가에서 지원하는 인문학은 여전히 '대학 밖'의 인문학일까?). 그간 많은 학술지원사업이 내실보다는 외형에 치우쳤다는 비난이 많았다. 이제는 인문학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는 공부와 연구 활동에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진정한 대학은 넓은 캠퍼스가 아니라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지는’(‘大學’) 곳이기 때문이다.(조운찬 문화1부장)

07. 0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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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0 0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3-20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ㅁ님/ 헉;;; 저는 진짜인 줄 알았는데; 역시 책이름이랑 잘 안 맞기는 했어요.. 인용된 문장이 여우님 글 패러딘줄 알았는데, 이걸 책으로 내셨나 했죠 ㅋ 역시 어떤 카테고리인지 잘 살펴봐야겠어요 ㅎㅎ 고맙습니다. ^^;
 

사실 주위에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 보는 친구들이 별반 없습니다. (사실 친구가 별로 없습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는 나름 인기남이었지만 ㅋㅋ;; 대학원에 오고 하니 만나는 사람이 정말 친한 고딩, 학부 친구 아니면 대학원 사람들, 아니면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 뿐이니 그럴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1년에 2~3번 만나는 것이니.. 그냥 홀로 살고 있습니다 ㅜㅠ (애인이랑은 거진 맨날 봅니다. 요즘은 애인이 체코에 있어서 정말 혼자 삽니다)

그런데 친한 고딩 친구들도 영화나 드라마를 별로 안 보는데 (저는 완전히 본 드라마는 없고, 주몽도 한 회도 못 봤습니다. tv가 없으니;;) 영화는 일년에 2~3편 정도는 그래도 봅니다. (최근에 본 영화는 괴물이랑 수면의 과학.. 보고 싶어서 본다기 보다는 애인이 영화보는것을 싫어하지 않아서;;; ) 

왜 저와 제 친구들이 영화보다는 오락, 오락보다는 창작에 더 관심이 많을지 생각해 봤는데.아무래도 영화는 텍스트를 강요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짜여진 텍스트 (에코 말마따나, 효과까지 치밀히 계산되어 만들어진)을 중간에 쉬기도 모하고, 정해진 시간 동안에 나름 집중해서 그 화면을 따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고, 큰 결심을 해야 됩니다. 시트콤이나 코메디 프로도 컴퓨터로 다운해서 보기 때문에 재미없는 부분 같은 것은 '돌려서' 볼 수 있는 선택권이라도 있지요 ㅋ;;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보고 라는 것 자체의 답답함이랄까.. 영화를 '다운'해서도 안 보는 이유는 아마 그것일 겁니다. 단편소설이나 시 또한 '한번에' 보도록 만들어진 텍스트이지만 보다 자유롭게 독자가 중간에 쉰다던지, 더 '열려져'있다는 느낌때문일지 더 자유롭게 읽어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단편소설보다는 시를 더 좋아하는 것도 이런 느낌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굳이 '누가'다 짜놓은 텍스트를 왜 읽어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식민지 시기 소설은 '연구'의 일환으로는 읽지만, 현대 소설은 거진 '의무'로만 읽어나갑니다. 반면에 시를 읽으면, 보다 자유롭고 즐겁습니다.)

이보다 더 괜찮지만, 요즘들어서 시들어진 것은 게임인데, 게임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가장 '자유도'가 낮은 일인칭 액션 게임이나 RPG라 해도, 영화보다는 더 interactive 합니다. 그래도 이 또한 일종의 홈 파인 공간을 열심히 따라가는 것 뿐인데,

이것이 사람 vs 사람으로 넘어가면, (즉 일종의 장기나 체스와 같이) 게임을 매개로 상당히 interactive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 같은 경우는 아예 가상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보다는 제한되고 안정된 선택을 통해서, 플레이어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하는데서 오는 쾌락을 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게임'자체도 관심히 시들하고, (왠지 '논다'라는 것에 대한 금욕주의적인 생각 때문일까요..) 역시 가장 유쾌하고 자유도가 높은 쾌락은 '창작'입니다. 시나 소설을 쓰거나, TRPG를 하는 일! 나름의 장에서 정해진 규칙이 있지만 (인생 또한 그러하지요; ) 자신의 상상이 직접 반영되는 능동성! '내가 만들어간다'는 것. 그것의 재미. (사실 이렇게 게시판에 글쓰기 자체도 저한테는 큰 유희입니다 ㅎㅎ) 어찌보면 드라마를 사람들이 즐겨보는 이유도, 이를 같이 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재미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글쓰는게 큰 재미인만큼, 말하는 것도 큰 재미잖아요. 드라마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사람들이 이야기하면서 즐거워하고 재미있어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저는 만나서 드라마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니까, 드라마를 안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애인이랑 매일만나서 할 이야기를 마련(?)하기 위해, 저희는 세미나 같은 것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그것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싸우고 그러는 게 재미죠.

영화에서 오락으로, 오락에서 창작으로 ㅋ 어찌보면 헤겔식으로 자유 증진의 역사 비슷한 데요. 그렇다고 제가 TRPG나 창작에 그리 큰 시간을 쏟는 것도 아닙니다. (일주일에 4~5시간?) 그것보다는 밥먹을때 다운받아서 보는 하이킥 시트콤이나, 화장실에서 읽는 무협지에 투자하는 시간이 더 크겠죠. 오히려 지난달까지 매일2시간씩 피아노를 치고, 1시간씩 탁구를 쳤던 것이 제 '문화생활'에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역시.. '대중문화'에 대한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시선 때문일까요... 대중문화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동조하는 것이라는 에코의 말이 귀에 선하네요. (귀에 선하다?)

역사와 현재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대중문화와는 거리를 두는 것, 이것이 바로 눈가리고 아웅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른 의미의 '대중'또는 '대중문화' 속에 있고, 이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열심히 글이나 읽고 쓰고, TRPG하고, 오락도 하면서 살다 보면, 무언가 '대중'이라는 것의 의미도 잡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massmedia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대중문화란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해보면. 사실 저도 거의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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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성실한 반론의 운명.
논쟁과 상처 - 우리 시대 문학의 주요 논쟁에 대한 탐사!
권성우 지음 /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알게 된 경로: 미디어몹 정문금추님의 추천.
입수경로: 회사 도서관 신청 후 대출.
향후 구입여부: 빌려본게 찝찝하다. 저자 생각하면 '제 돈 주고 사야'하는데.

매너놈의 기억력이 정확하다면 현재 5%할인에 쿠폰까지 끼워주는 이 책은 한달 전까지만해도 할인 0%의 희귀종이었다. 지금 다른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니 여전히 0%인 곳이 몇 군데 있는 걸 보면 이 기억이 맞지 싶다. 할인 0% 책의 판매지수는 얼마나 될까. 0%의 할인지수와 판매지수는 곧, 성실한 반론이 이곳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보여준다.

김정란의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으로 촉발된 문학권력 논쟁을 누가 기억하는가. 세기말, 그리고 몇 년 뒤의 문학판을 뒤흔들었던 문학권력 논쟁에 있어서 김정란, 강준만, 권성우, 이명원 등의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선 사람들에게 지적받았던 집단은 냉소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중 2001년 남진우로 대표되는 문학동네의 필진들이 대단히 불성실하고 지저분한 반론으로 논쟁의 질을 크게 떨어뜨리자, 결국 이 논쟁은 언론과 일반 독자들에 의해 '진흙탕 싸움'으로 낙인찍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만다. 그 뒤 권성우와 이명원, 강준만의 성실하고 세밀한 반론은 흙탕물 속에 그대로 가라앉아버렸다.

수준 이하에 면박과 모멸에 대한 성실한 반론과 질의. 이 책을 한문장으로 요약하면 그렇다. 남진우를 비롯한 문학동네 필진들의 분탕질에 엉망진창으로 몸이 더럽혀져도, 권성우는 몸에 묻은 진흙 툭 툭 털어내고 한 자 한 자 꾹꾹 연필을 눌러 성실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적어도 글의 타당성과 완결성에 있어서, 권성우의 성실함과 꼼꼼함은 문학동네 필진들을 압도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하나. 욕설에 가까운 수준 이하의 반론이 전체 논쟁의 수준을 끌어내렸다. 한 번 진흙탕에 빠진 논쟁은 그 이후에 잘 다듬어진 정갈한 글이 나오더라도 그 빛을 잃고 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남진우와 문학동네 필진들은 이를 계산하고 그 수준에서 논쟁을 마감하기 위해 수준 이하의 글을 써서 진흙탕을 만든 게 아닐까. 남진우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이 없는 상태에서, 한 번 끌어내려진 수준으로 모든 반론이 도맷금지어지는 걸 노렸던 게 아닐까. 이를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문학권력 논쟁을 진흙탕 싸움으로 끌어내린 책임은 벗어나기 힘들지 않을까.

둘. 권성우의 반론은 글 내적으로는 흠잡을데 없다. 하지만 간과되었거나 가볍게 넘어간 부분이 있다. 문학권력에 대한 논쟁을 회피함으로서, 혹은 적극적으로 제기함으로서 얻어지는 각 진영간 의견의 대차대조표 말이다. 물론 철저히 글의 내적 일관성과 논리정연함으로 매듭지으려 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남진우의 '권성우에 답함'같은 수준 이하의 욕설과 비난에 10년 전 서평까지 끌어와 일관된 논리를 요구할 요량이라면, 남진우의 반론이 무엇을 은폐하는지, 그 은폐로 '문학권력'집단에 얻어지는 이득은 무엇인지 상세히 밝히는 게 그 진영의 저열함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그정도 대차대조표까지 꺼내는 건 문학판의 공멸 행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더 나아가, 비판 진영의 대차대조표까지 제시했더라면 어땠을까.



정갈하고 성실한 반론을 읽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글이 나온 이유가 수준 이하의 저열한 비난이라는 건 찝찝한 일이다. 여기에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일게고, 그나마 이미 접힌 논쟁을 복기하며 제대로 배운 게 아주 생뚱맞게도, 어떠한 논쟁에 있어서 반론과 재반론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듣는 것 보다 더욱 해당 논쟁을 제대로 이해하는 법은, 각 진영이 주장하는 함의에 따라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그 주장으로서 어떠한 이득이 어느 편에 떨어지는지를 따져보고 그 타당성을 따져보는 게 낫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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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여기의 ‘대중문화’는 에코가 이 글을 썼던 64년과 어떻게 다른가? 73년 포디즘 체제 붕괴 이후의 물적 토대의 변화(유연적 축적체제?)와 68이후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문화현상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지도 20여년이 지난 지금-여기와, 40년 전의 ‘대중문화’의 물적 토대와 현상은 분명 다르다. (지금-여기의 한미 FTA문제 또한 이러한 물적 토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 터이다.)

에코가 염두에 두고 있는 ‘대중문화(mass culture)’는 매스‘미디어’mass media에 의해 중개되는 것이고, 이 매스미디어는 지배계급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적인 문화 모델을 자신들의 자율적인 문화의 표현으로 오인한 채 그대로 소비하게 만드는 대중문화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스누피󰡕, 49면) 일괄적이고 똑같이 ‘생산’되어 ‘소비’되는 대중문화. 이에 대해 에코는 이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는 메시지의 생산 문제보다는 수용, 즉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스누피󰡕, 20면) 포디즘-케인주의의 가장 큰 특성인 ‘획일성’을 ‘다르게’ 전유한다는 것. 모든 텍스트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특히 ‘대중문화’라는 텍스트에 적용하기는 기피했던(에코 시대에는) 것을 반박하고 있는 셈이고, 이 책은 이러한 반박문들이다.

그런데, 지금-여기에서의 ‘대중문화’로 눈길을 돌려보자. ‘대중’이라는 물신화된 개념을 ‘전체’로 인식하고, ‘문화’라는 것을 생활방식으로 바꾸어서 생각해볼 수 있다면1), 지금-여기의 문화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중개되었지만, 미디어에 의존하지만은 않은 움직임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에코가 “대중문화는 대중을 위해 생산하고, 대중교육을 계획하는데 너무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공개적이든 은밀하게든 주체성과 주체의 파괴를 가져온다” (󰡔스누피󰡕, 39면)고 함에도 한편으로는 이를 극복하는 ‘다르게 읽기’ 즉 ‘주체적 읽기’를 강조했지만, 지금-여기에서의 ‘대중문화’에서 널리 알려진 현상들을 되돌아보면, 40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대중’들이 ‘대중문화’의 생산자로, 또는 ‘다르게 읽기’의 주체로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Blog들의 발전, 개인방송(일인방송)들, TRPG, 코스프레, 팬픽2), 고딩들이 쓰는 무협지와 연애소설, 패러디 사진들 등. 기존 ‘미디어’를 전유하고, 자신의 분야를 점차 확장시켜 나가는. 이것이 물론 자본에 의해, 산업에 의해, 다시 이용되는 측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주체성’이라는 것이 40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일 터이다. 물론 이것이 어떻게 ‘혁명적’이냐, 혹은 어떻게 자본에 ‘거스르게’ 작동하느냐는 질문은 가능할 것이지만, 이 또한 모두 ‘자본’의 지배하에 작동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러한 지금-여기의 ‘대중문화’를 물을 때, 우리는 40년전 에코가 물었던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어떻게 유효하게 변형시켜야 할까? “메시지의 구조에 대한 분석(메시지의 형태와 메시지 전송의 객관적 조건), 대중의 다양한 수용 방식, 대중들의 메시지에 대한 만족도와 이에 대한 문화적 개입의 가능성과 기본조건” (󰡔스누피󰡕, 53면 참고) 이러한 질문들은 뚜렷하게 ‘문화생산자’(미디어의 매개)-> 대중(문화수용자)라는 이분법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외부 ‘주체’로서의 연구자도. 문화적 ‘개입’은 ‘대중문화’ 밖에서만 올 수 있다.) 그러한 이분법이 지금-여기의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데 적절한 인식틀일까? 아니면 현재의 대중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인식틀은 다양한 피드백과 피드백 자체도 그 개념 속에 포괄하는 생물학적인 ‘재귀-조직’으로서 바라보아야 할까? 혹은, 그 전에 ‘대중문화’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인식틀이 도출 되는 것일까..

2. 에코도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다. “현재 막연히 매스미디어로만 알려져 있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를 산업 사회가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있다면, 이러한 매스미디어로 하여금 문화적 가치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문화적 가치’, ‘산업 사회가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있는 ‘매스미디어로만 알려져 있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라는 것이 의미는 모호하다. 앞서도 문제제기했듯이, 포디즘-케인즈주의가 40년전의 산업 사회를 의미했다면, 유연적 축적 체제 하에서의 ‘서비스’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매스미디어’라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는 변화되었다. 매스(mass=대중)와 mass media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media 즉 medium의 복수는 ‘매개’물이다. 무엇을 ‘mass’에게 매개하는가는 알 수 없다. 이는 정태적으로 mass가 있고, mass media가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mass는 mass media 때문에 mass로 형성된다고 보아야 한다. 즉 mass media에 의해 매개되어 형성된 존재로서의 mass. 그래서, 지금-여기에서 ‘대중’을 mass라고 보지 않을 수 있는 실마리가 존재한다. 大衆, 즉 큰무리와 mass사이의 간격. 지금-여기와 40년전 사이의 간격. (물론 지금-여기에서도 인식의 차가 존재한다. 2002월드컵과 ‘대중’. 동원되었지만, 또 자발적으로 조직된. 미디어가 모았지만, 미디어가 놀라버린.. 여기에서 야기되는 문제는 ‘대중’mass 또는 여러 다른 이름들, 민중, 인민, 시민, pt, 하위주체, 다중, 개중 등으로 이름붙여진 ‘주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적어도 이를 지금-여기의 대중문화와 연결시켜 볼 때 이것을 꼭 ‘매스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문화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존재로는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조금 미루어 두어야 한다. 호미바바나 스피박 등을 통과하고 참조만 하면서, 결국에는 그러한 할아버지 할머니들과는 전혀 다른 물적 토대 위에 세워진 전혀 다른 ‘대중문화’를 우리는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40년전 에코가 말하는 대중문화는 mass culture의 의미이고 이는 mass media에 의해 매개된 문화를 의미한다. “대부분 아주 복잡하고 전문적인 문화 기술에 문외한인 무작위적인 소비자 대중에게 호소하는 문화 산업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효과를 판매하는 동시에 그러한 제품의 사용 조건을 미리 규정하며, 또 메시지와 함께 그러한 메시지가 환기해야 하는 반응도 미리 처방해준다.” (󰡔스누피󰡕, 103면)

이러한 다시금 오래된 구조와 주체의 문제를 야기하게끔 하는 ‘대중문화’와 ‘대중’이라는 개념틀을 에코는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 “출판 산업에는 ”문화 상품을 생산해내는 사람들“ 이외에도 특정 시기의 출판 산업 체계를 뛰어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러한 체계를 활용하는 ”문화의 생산자들“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누피󰡕, 76-77) ‘대중문화’라는 구조 밖에서 ‘개입’할 수 있는 주체 또는 주체효과의 존재. 때문에 연구하는 것이니까. (이러한 연구자는 마치 「공산당 선언」에서의 pt=문화 소비자와 자본의 생산양식=출판 산업 체계를 뛰어넘는 ‘공산주의자’와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일종의 ‘비판적-건설적 개입’이라고 주장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 과학자들이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란 오늘날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연구하는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반론적인 숙고의 차원에서 진행되던 논의는 실천적인 결정이라는 차원으로, 즉 한편으로는 협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건설적인 분석이라는 이중적인 형태 속에서 수행되는 개입의 차원으로 이전된다.” (󰡔스누피󰡕, 80) 이러한 에코의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그가 보고 있던 40년전과 지금 우리가 보는 현상은 분명 다르다. “특출한 재능을 가졌고 또 공동체의 해석자 역할을 떠맡게 되는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형태의 ”집단 창작“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관계를 온정주의적 관계에서 변증법적인 관계로 전환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자가 후자의 요구와 요청을 해석하는 관계로 말이다.” (󰡔스누피󰡕, 81) 이것이 산업사회의 최대치였을 것이다. 근대-산업사회에서 문화라는 것이 ‘미디어’를 통해 이제 비로소 일반 대중이 소비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교양요소들을 갖추게 되었다면, 이제 오늘날 생산수단이 ‘우리’에게 있다. 인터넷이 접속된 컴퓨터. 생산수단과 문화 노동자의 결합? (문화) 생산양식의 변화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삶의 양식이 ‘우리’가 바라던 것과는 거리가 분명 있다. (앞서 「공산당 선언」과의 비유를 계속해본다면, 이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서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점유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이라는 ‘권위적’이면서 또 ‘권력적’인 주체가 존속하는 것과 비교해볼 수 있다. 전자는 pt를 대변하는 당이 존재함으로서, pt가 구조에 종속된 것으로 남는 것이다. 이제 지금-여기의 문화현상은 ‘일부’ 문화 노동자들이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지만, 실제 그들의 삶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작동한다. 전자가 ‘집단 주체’를 가장한 당에 의해 개인이 소외된 것이라면, 후자는 ‘문화’라는 공간에 앙상히 남은 ‘주체’가 해방의 가능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 이제 다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에코의 위의 질문을 제시하고 이를 변형해보자.

“현재 막연히 매스미디어로만 알려져 있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를 산업 사회가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있다면, 이러한 매스미디어로 하여금 문화적 가치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화적 가치’의 의미. ‘커뮤니케이션 관계’를 ‘재귀-조직’으로의 변화.

“지금 당장 과학자들이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란 오늘날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연구하는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반론적인 숙고의 차원에서 진행되던 논의는 실천적인 결정이라는 차원으로, 즉 한편으로는 협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건설적인 분석이라는 이중적인 형태 속에서 수행되는 개입의 차원으로 이전된다.”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판적-건설적인 분석이라는 개입’이 되는가? 이 또한 ‘대중문화’의 하나로서? 그러면 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다른가? 아니면 결국 그 이야기인가?

3. 또 흥미로운 지점은, 어떻게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적-건설적 분석’이 개량주의적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문화의 영역에서는 개량주의에 의한 현상의 고착화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이 영역에서는 일단 자신을 묶어 놓았던 족쇄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점진적인 의식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매스커뮤니케이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어야 한다. 침묵은 결코 항의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공범 관계를 맺을 뿐이다.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자세 또한 마찬가지다.” (󰡔스누피󰡕, 79) 침묵이 공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비판적-건설적 분석’의 이데올로기성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이것 또한 ‘개량주의적’으로 취급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개량주의자들의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적-건설적 분석’은 어떻게 비개량주의적이 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비판적-건설적 분석’이라는 것은 이 자체로 형용모순인가? 그러니까 그 ‘비판성’과 ‘건설성’의 특징이 무엇인가? 이것은 효과로 사후적으로 판정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매스미디어에 대한 ‘개입’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된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다. 그 개입은 물론 매스미디어에 의해서 생산된 ‘문화산업’의 내적인 측면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놓여있는 산업적 틀 또한 마땅히 비판의 대상에 올려야 할 것이고, 대중문화 연구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될 성질의 것이 아닐까...

1) 왜 이렇게 인식해야 할까. 대중mass이 mass media에 의해 매개되어 생성된 존재들이라 할 때, mass media에 의해 중개되고 생산된 mass culture에 대한 분석이라는 인식틀이 40년 전 물적 토대에 부합하는 방식이었고, 이를 통해 大衆의 삶의 방식-즉 문화-를 탐구할 수 있었다면, 지금-여기에서의 大衆의 삶의 방식은 꼭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어 mass로 형성되는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大衆’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이다. 이를 나이브하게 ‘전체’로 파악하게 된다면 사실 ‘대중’과 ‘대중문화’라는 개념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는 단지 사람과 문화로 환원가능하기 때문이다. mass와 mass media, mass culture라는 개념은 그 작동방식과 연구대상의 구체성 때문에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여기에서는 이미 상당부분 ‘大衆’의 현실 삶과는 유리된 인식틀이라고 판단된다. 아니면 노동자, pt 또는 subaltern만을 문제삼는 정치적 전제가 강하게 깔린 인식틀도 가능하다. (2번 문제제기 참고)

2) 국문학도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끄는 존재가 아니지만, 대중문화이론가나 특히 여성학 전공자들의 관심은 엄청나다. 팬들의 관심은 차치하고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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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서재지기 > [이벤트] 편애는 나의 힘! 내 맘대로 작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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