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으로 줄임)*주1)이 나온 지 올해로 151년이 된다. ■선언■은 아마도 성경 다음으로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주2) 19세기에 나온 정치팜플렛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맑스의 저작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저작인 만큼 이 소책자의 탄생 150돌을 기리는 일은 쉽게 있을 법한 일이었다. 국내에서는 소책자의 형태로 ■선언■이 출간되고 외국 논문들이 번역되어 모음집으로 묶인 것*주3)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만한 행사나 기획이 없었지만, 외국에서는 자못 활발하여 한 잡지의 편집자는 심지어 “맑스의 복귀”를 운위할 정도였다. 좌파 진영의 지식인들이나 운동권만이 아니라 ‘주류의’ 보수적인 언론까지도 맑스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는 것이다.*주4)
*주1) ■■번역본의 우리말 제목이 책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박종철출판사에서 펴낸 맑스와 엥겔스의 6권 짜리 ■저작선집■의 제1권에는 ■공산주의당 선언■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150주년 기념판이라는 소책자로 펴낸 것은 ■공산주의 선언■이라고 되어 있다. 필자는 일반적인 관례를 따라 ■공산당선언■으로 하기로 했다. 이러한 차이는 기실 ■선언■의 저자들의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애초 그것을 ■공산주의당 선언■이라고 불렀으나 1872년의 독일어판에서는 ■공산주의 선언■으로 개칭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선언■(김태호 역, 박종철출판사, 1998)의 해제, 127~134쪽 참조. 필자는 주로 이 번역본을 대본으로 이용하나 표현상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선집1■의 것도 참조하였다.■■
*주2) ■■홉스봄에 의하면 1917년의 러시아혁명 이전에 ■선언■은 이미 30여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비유럽계 언어로는 중국어와 일본어 번역이 있었고, 우리말 번역은 아직 나오기 이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100여개에 달하는 신생국이 탄생했음에 비추어 ■선언■은 현재 적어도 10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으나 정확한 통계는 없는 실정이다. Eric Hobsbawm, “Introduction,”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A Modern Edition (London: Verso, 1998), p. 7; “The Fortunes of Marx's and Engels' Writings,” The History of Marxism, vol. 1, Eric J. Hobsbawm ed., Marxism in Marx's Day (Bloomington: Indiana Univ. Press, 1982), pp. 327~344.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의 김인걸 교수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선언■의 최초의 우리말 번역본이 나타나는 것은 1921년의 일이다. 특이하게도 3개의 번역본이 국내외에서 개별적으로 거의 동시에 출현하였다. 하나는 여운형 선생이 상해의 ‘한인공산당’을 위해 적어도 1921년 5월 이전에 영어본에서 중역한 것으로서 3,000부를 발행하였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9월에 서울의 ‘조선공산당’(중립파)이 일어본에서 중역한 것으로서 85부를 발행하였다. 마지막의 것은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같은 해에 모스크바의 ‘한인공산당’이 아마도 노어본에서 중역한 것으로서 1,000부를 발행하였다. 세 번역본의 출간 사실은 여러 문헌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되나 실물의 존재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이 안되고 있다. 해방 이후에 남북한에서 동시에 ■선언■이 출간되었으나 ■선언■을 포함하여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의 출간 실태에 관한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실정이다. 이는 그간 공산주의운동 연구가 조직과 활동 중심으로 진행된 결과이며, 일반적으로 맑스 저작의 번역이 각국에서 사회과학의 탄생과 궤를 같이 하는 만큼 그 연구는 우리의 지성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다. 최근의 번역본들은 따라서 이전의 그것들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나온 것이다.■■
*주3) ■■■선언 150년 이후■ (카피레프트 옮김, 이후, 1998). 이것은 1998년 5월 13~16일에 파리에서 열린 ‘■선언■150주년기념 파리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일부의 논문들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주4) ■■John Rees, “The Return of Marx?,” International Socialism 79 (Summer 1998), pp. 3~11. 미국에서만 Verso판 ■선언■에 대한 서평을 실은 일간지가 무려 125개지에 달했다.■■
맑스의 복귀와 ■선언■
사실상 ■선언■ 150주년은 맑스 재평가의 기회로 작용한 듯 하다. 지난 1980년대이래, 국내에서는 특히 90년대에 들어서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심지어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호소력을 갖게 되면서 맑스 내지 맑스주의가 현대세계의 이해를 위한 주요한 지적 준거로서의 위치를 상실하는 듯 했다. 포스트맑스주의, 탈구조주의, 해체주의, 생태주의 등의 다양한 사조들은 “역사에서 경제적 요인의 우위와 규정성을 선험적이라고 폐기하고 맑스주의를 경제와 계급에 특권적 위치를 부여하는 사상이라고 단정”하고는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전체 역사과정에 대한 단일하고 통일된 이해를 가정한 역사 형이상학, 계급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이다.*주1) 이러한 반맑스주의적 분위기에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 “맑스주의자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데리다(Jacques Derrida)이다. 그는 “맑스 없이는, 맑스의 기억과 유산 없이는 미래는 없다”고 단언하고 “맑스의 정신”, 즉 “급진적 비판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역설하였다. 그는 “지구와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 불평등, 배척, 기아, 경제적 탄압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괴롭힌 적은 결코 없었다”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시장”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암울한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항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제안하였다.*주2)
*주1) ■■유재건, ■마르크스주의■, 김영한 편, ■서양의 지적 운동 II■ (지식산업사, 1998), 450~451쪽.■■
*주2) ■■디디에 에리봉, ■21세기의 사상가 맑스: 자크 데리다가 ■자본■의 저자를 복권시키다■, 송기형 역, ■이론■ 7호 (1993년 겨울), 363~372쪽. 인용은 368~371쪽임. 데리다는 당시 ■맑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 (Paris: Galilée, 1993)을 막 출간한 뒤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난 ‘맑스로의 복귀’에는 데리다가 토로하고 있듯이 세계자본주의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이후 ‘역사의 종언’을 축성하기보다는 내적 모순을 드러내어 정치적, 경제적 혼돈을 부채질하고 있는 세기말적 현실이 크게 작용하였다. 걸프만과 뒤 이어 중동, 발칸반도, 소말리아와 루안다 등지에서의 ‘새로운 세계질서’의 실패, 동남 아시아의 경제위기, 유럽, 한국, 브라질, 미국 등지의 파업의 물결, 유럽연합 대부분 회원국에서의 좌파정당의 집권 등이 구체적인 예이다. 이러한 징후들이 오히려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동력과 파괴적인 힘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소로스나 갤브레이스와 같은 자본주의의 대표자들이 발하는 경고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체제가 위기국면에 진입하고 있음을 웅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의 복귀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이뤄진 것이다.
문제는 맑스의 복권이 환영할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주1) 첫째, 그의 복귀는 부분적이고 선택적이다.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분석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이는 주류 경제학자들도 대부분 인정하는 바이지만,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데리다는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좌파 인사들에 의해서도 부정되고 있다. 둘째, 맑스로의 복귀가 곧 맑스주의의 복권으로 연결되고 있지 못하다. 그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게 해주는 탁월한 지적 원천으로 심지어는 고전으로 간주될 뿐, 그를 혁명적인 맑스주의 전통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맑스의 복권이 러시아혁명이나 레닌의 그것으로 이어지고 있지 못한데서 잘 드러난다.*주2) 마지막으로 맑스에 대한 관심의 부활이 노동자대중의 급진적인 분위기와의 직접적인 연결을 확보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 노동자들의 계급투쟁과의 유기적인 결합이야말로 맑스의 복귀가 단순한 지적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고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기본조건인 것이다.
*주1) ■■Rees, ibid., pp. 7~9.}}
*주2) ■■예컨대 Mike Haynes, “Social History and the Russian Revolution,” John Rees (ed.), Essays on Historical Materialism (London: Bookmarks, 1998), pp. 57~80 참조.■■
오늘날 ■선언■을 읽는다는 것은 맑스로의 복귀와 접근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그것은 거시적인 역사적 안목과 실천적인 행동강령을 결합시킨 매우 드문 본보기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즉 그것은 우리가 현재 어디에 와 있으며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지시해준다. 따라서 ■선언■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150여년 전에 맑스가 구상했던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정신이다. 맑스가 아무리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가 계속적으로 발전하여 노동계급운동의 성장을 가로막을 지도 모를 여러 문제들을 모두 예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우리에게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통해 실천운동을 끊임없이 재조직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에게 역동적인 역사인식과 자본주의 분석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역사적 유물론이며, 그는 ■선언■의 집필에 앞서 이미 ■독일 이데올로기■(1846)에서 그러한 역사관에 도달해 있었다.
■선언■은 장문의 본격적인 학문적인 저작은 아니며 2월혁명 직전의 정치적 격동기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쓰여진 정치적 강령, 즉 하나의 선언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치선언을 하나의 선언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고도의 역사적인 문헌, 경제적‧정치적인 분석서, 심지어는 예언서로 간주한다. 놀라운 것은 수십 쪽에 불과한 ■선언■이 세월의 시련을 견뎌내어 1세기 반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현실성을 상실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달빛에 바래 기억의 창고 속에 안치되어야 할 신화이기는커녕 매우 엄격하고 포괄적인 기대수준을 아직도 만족시켜주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지적했듯이 “■선언■에 개진되어 있는 일반적 원칙들은 대체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완전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60].*주) ■선언■이 이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현실세계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역사세계와 우리의 삶이 기본적으로 동일한 시공간의 계열에 속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주) ■■[ ]에 들어있는 숫자는 ■공산주의 선언■(김태호 역)의 쪽수를 가리킴.■■
따라서 우리는 ■선언■에서 15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쉽게 느끼지 못한다. 서양의 시간대에 이미 익숙해진 우리에게 ■선언■은 그 거리를 뛰어넘는 동시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유럽의 2월혁명 전야가 아니라 우리의 19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엄청난 역사의 벽을 실감한다. 당시는 세도정치가 한창이고 마침 풍양 조씨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헌정조 말년이었고 양반문화의 마지막 절정이던 추사 김정희가 아직 생존해 있던 시기였다. ‘이양선’들이 해안에 출몰하고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만 국가권력의 기반이 급속히 축소되면서 지배층의 주체적인 국가경영의 경험이 퇴행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바로 이 전통의 단절과 ■선언■의 시간대의 틈입, 즉 상이한 시간성의 충돌과 교체 아래에서 우리의 고통스런 근대가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맑스가 “부르주아지의 값싼 상품 가격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만리 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완고하기 그지없는 증오를 굴복시키는 중포(重砲)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국민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 방식을 취하라고 강요하며, 이른바 문명을 자국에 도입하라고, 다시 말해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9]라고 냉엄하게 갈파했을 때, 그는 과연 만리장성조차 갖추지 못했던 조선이라는 “야만인들”이 겪을 비극적 운명을 예감조차 할 수 있었을 것인가? 게다가 우리가 지금 과연 “부르주아가 됐는가” 하는 문제도 깊이 따져봐야 할 바이지만, “문명”의 충격 속에서 아직도 “하나의 국민,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률, 하나의 전국적 계급이해, 하나의 관세구역”[10, 강조는 원문의 것임]을 이룩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오랜 민주화투쟁과 활기찬 노동운동을 벌여오기는 했지만, 계급정당은 고사하고 변변찮은 진보정당 하나라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따라서 21세기의 길목에서 ■선언■을 읽은 우리의 감회는 남다르다. ■선언■에 개진되어 있는 역사발전관을 보편적인 공리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의 지난 경험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고, 자본주의의 높은 생산력을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치룬 대가가 너무도 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형성, 부르주아지 지배의 전복,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전취”를 “당면 목적”[24]으로 내걸기에는 우리의 힘이 너무도 벅차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언■을 구미의 이론가들*주)과는 다소간 다르게 읽을 수밖에 없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 ■■영어가 ‘세계어’로 기능하고 있는 덕택에 오늘날 영어로 글 쓸 수 있는 이는 일종의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과 진보적 학술연구의 오랜 전통을 겸비한 영국의 이론가들은 이런 기회를 잘 활용하여 소설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만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선언■ 150주년을 맞이하여 주로 이 독립적인 좌파 이론가들을 중심으로 International Socialism 79 (Summer 1998), Monthly Review 50 (May 1998), Socialist Register 1999 (Leo Panitch and Colin Leys eds., “The Communist Manifesto Now,” London, The Merlin Press, 1998) 등이 특집호를 발행했고, 기타 Mark Cowling (ed.), The Communist Manifesto: New Interpretations (Edinburgh: Edinburgh Univ. Press, 1998)이 출간되었다.■■
■선언■의 역사적 맥락
이제 ■선언■이 어떠한 맥락에서 쓰여지고 그 특정한 역사적 조건이 어떻게 내용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19세기 중엽에 쓰여진 ■선언■은 우리가 흔히 ‘이중혁명’이라고 부르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충격을 강하게 받고 있다. 19세기 유럽의 모든 사상체계가 그 영향을 받기는 매한가지지만, 맑스는 그것을 남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프랑스혁명에서 본 것은 전체사회를 인간들의 주체적 의지(이것이 근대적 의미의 ‘정치’이다)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주) 그는 프랑스혁명으로 말미암아 ‘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정상상태’가 되었음을 감지하고 그 변화를 추동하여 프랑스혁명의 성과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혁명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따라서 그가 프랑스혁명에서 구하려고 했던 것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실천과 전략이었고, 당연하게도 ‘자코뱅의 독재’에 주목하여 박사학위를 마치고 파리로 가기 이전에 한때 ‘국민공회의 역사’를 쓰려고 마음먹기도 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에게서 차례차례 모든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들을 국가의 수중에, 다시 말해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력들의 덩치를 키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들에 대한 전제적 침해를 통해서만 ‧‧‧ 일어날 수 있다”[35]. 정치를 통한 사회변혁, ‘근대성’에 친숙해 있는 우리는 이 혁명관이 당시 얼마나 신선한 것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바뵈프, 부오나로티, 블랑키로 이어지는 무장봉기와 ‘소수의 독재’의 혁명학은 분명 실천적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변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통제하려는 정치의지의 산물이었다. 맑스 역시 근대사회의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의 물꼬를 “공산주의혁명”[35]으로 향하게 하고자 했고, 그리하여 ‘영구혁명’의 명제를 제안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의를 주로 독일에 돌리는 것은 독일이 부르주아혁명의 전야에 있기 때문이며, 또 독일은 유럽문명 일반의 더 진보한 조건들 밑에서, 그리고 17세기의 영국이나 18세기의 프랑스보다 훨씬 더 발전한 프롤레타리아트를 갖고서 이 변혁을 성취할 것이므로 독일의 부르주아혁명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직접적 서곡일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57~58]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맑스의 궁극적인 목표가 “사적 소유의 폐지”[25]를 이룩하는 공산주의혁명이기는 하지만 ■선언■이 겨냥하는 직접적인 목표는 독일의 부르주아혁명, 즉 ‘제2의 프랑스혁명’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당시 독일의 자유주의 세력에게 제휴의 몸짓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르주아혁명이 달성한 과업을 꼭 완수해야 할 역사적 과제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주) ■■이매뉴얼 월러스틴,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창작과비평사, 1994), 제1장 ‘세계사적 사건으로서의 프랑스혁명’, 15~34쪽; 최갑수, ■마르크스와 프랑스혁명■, ■이론■ 2호 (1992년 가을), 42~60쪽; 최갑수, ■사회주의■, 김영한 외 편, ■서양의 지적 운동■ (지식산업사, 1994), 126~132쪽.■■
■선언■의 배경을 이루는 또 다른 역사적 계기는 산업혁명이다. 서구에서 산업자본주의의 대두와 근대적인 산업노동계급의 등장,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사회주의운동의 출현이 그것이다. ■선언■ 당시 맑스는 이미 근대경제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 도달해 있었다. ■철학의 빈곤■(1847)은 비록 노동력과 잉여가치의 개념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노동가치설을 이해하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가능성을 두루 인식하였다.*주) 산업혁명의 성과에 대한 평가에서도 ■선언■은 이중적이다. 주지하듯이 우선 ■선언■은 자본주의의 비효율과 무질서를 고발하고 그것이 자기파괴의 무덤을 팔 것임을 확신하고 예언한다. “현대 부르주아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내었던 저승의 힘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선집1■, 405]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무기들을 벼려냈을 뿐만이 아니라, 이 무기들을 쓸 될 사람들도 낳았다. 현대 노동자들, 프롤레타리아들을 낳았다.”[12; ■선집1■, 406. 강조는 원문의 것임]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매장인을 만들어낸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불가피하다”[22; ■선집1■, 412].
*주) ■■David McLellan, “The Materialistic Concept of History,” Eric J. Hobsbawm (ed.), Marxism in Marx's Day, pp. 29~46.}}
하지만 맑스는 근대 자본주의가, 모든 계급의 차이들을 사라지게 하는 새로운 사회의 물질적 조건을 창출하고 있음을 아울러 강조하였다. “부르주아지는 백 년도 채 안 되는 자신들의 계급지배기간 동안, 과거의 모든 세대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들을 창조하였다. 자연력들의 정복, 기계장치, 공업과 농경에 대한 화학의 응용, 기선 항해, 철도, 전신, 전 대륙의 개간, 하천의 운하화, 땅 밑에서 솟아난 듯한 인구 전체.”[10]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자본주의의 성과에 입각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 해방”[51]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37]는 생산력이 그것을 가능케 할 정도의 수준에 도달할 때만 이룩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새로운 사회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생산방식 전체의 변혁”[35])가 자본주의가 빚어낸 생산력의 토대 위에 둥지를 틀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혁명의 과제란 자본주의의 생산력은 유지한 채 그 생산관계만을 변혁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한 연구자는 “때로 그가 자본주의사회를 묘사할 때 혹시 사회주의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가끔 생각되곤”*주1) 한다고 토로할 수 있었다. 사실상 맑스 역시 “공산주의를 남김없이 설명하는 것은 소유 일반의 철폐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철폐”[24~25]라고 하여 ‘사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주2)를 구분하고 “자본이 사회의 모든 성원들에 속하는 공동의 소유로 변한다고 해도 개인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선집1■, 414]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공산주의는 사회적 생산물들을 취득할 힘을 그 누구로부터도 빼앗지 않으며, 다만 이러한 취득을 통해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힘을 빼앗을 뿐이다”[28]. 자본주의가 미증유의 물질적 부를 만들어내면서도 각 개인에게 그것을 향유하게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기회를 차단하고 있음을 맑스가 명확히 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이중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지님과 함께 그 역동성과 높은 생산력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즉 그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여 그것이 갖는 풍요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부르주아사회에서는 산 노동은 축적된 노동을 증식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공산주의사회에서는 축적된 노동은 노동자들의 생활과정을 확장시키고 풍요롭게 하며 장려하는 수단일 뿐이다”[27].
*주1) ■■유재건, 위의 글, 437쪽.■■
*주2) ■■■선언■은 “일신상의 소유”[26]로 옮기고 있으나 적절치 못한 듯 하여 ■선집1■의 용어를 택하였음.■■
‘이중혁명’이 ■선언■의 원경을 이룬다면, 1840년대의 국제사회주의운동은 ■선언■의 특정한 구조를 설명해주는 직접적인 배경을 이룬다. ■선언■의 제3장이 보여주는 자못 논쟁적이고 경멸조의 분위기는 사회주의운동진영에 자신의 정체성을 부과하려는 맑스의 의지를 보여주며, 그가 ■선언■에 포괄적인 ‘사회주의’ 대신에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택한 것도 여타 진영들로부터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주1) 맑스와 엥겔스가 공동집필자로 되어 있지만 공동작업의 과정은 조금 복잡하다. 독일 망명운동가들의 모임인 ‘공산주의자동맹’은 1947년 11월 29일부터 12월 8일까지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총회에서 규약을 개정하고 그것에 걸맞은 강령의 최종본의 작성을 맑스에게 의뢰하였다. 그는 엥겔스가 이미 작성해 놓은 ■공산주의의 원칙들■[■선집1■, 319~339]과 ‘연맹’이 준 여러 자료에 입각하여 ■선언■을 완성하고 1848년 아마도 2월 중순경에 런던에서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선언■은 당시 대부분의 같은 종류의 문건과는 달리 문답식을 과감히 탈피하고 강건하면서도 자못 문학적인 수사를 동원하는 새로운 유형의 문체를 확립하였다.*주2)
*주1) ■■후에 엥겔스가 “1847년에는 사회주의는 중간계급의 운동이었고, 공산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이었다. 사회주의는 적어도 대륙에서는 ‘품위 있는 것’이었고, 공산주의는 바로 그 반대의 것이었다”[72]고 양자의 차이를 강조했지만 이는 다소간 지나친 구분법이다. 20세기의 구분법은 당시의 그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2월혁명 이전에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를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었고, ‘공산주의자’로 간주되던 Cabet, Dézamy, Blanqui 등의 면면을 보더라도 ‘공산주의’가 상대적으로 보다 전투적이고 민주적일 뿐 양자간에 질적인 차이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기에 맑스가 제3장의 제목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이라고 하면서도 모두 당시의 용례로 ‘사회주의자들’만을 다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 자신의 계보로 끌어들이고 싶은 생시몽, 푸리에, 오웬에게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라는 복합어를 부여했던 것이다. 실제로 ■선언■의 주 논적은 독일의 ‘진정한 사회주의였다. Raymond Williams, Keywords (London: Fontana, 1976)의 해당 항목과 Claude Willard, Socialisme et communisme français (Paris: Armand Colin, 1978), pp. 21~37 참조.■■
*주2) ■■■선언■의 작성과정에 관한 가장 훌륭한 자료는 Bert Andréas, Documents constitutifs de la Ligue des Communistes 1847: Edition bilingue (Paris: Aubier Montaigne, 1972)이며, 기타 엥겔스, ■공산주의자 동맹의 역사에 관하여■, ■선집■ 제6권, 214~235쪽;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 ■마르크스■ (김대웅 외 역, 두레, 1989), 161~231쪽; Rob Beamish, "The Making of the Manifesto", Socialist Register 1999, pp. 218~239 참조.■■
바로 이 때는 유럽에 거대한 혁명의 물결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이었다. 프랑스의 파리에서 터져 적어도 10여개국이 넘는 지역으로 번져가 라틴 아메리카까지 파급이 미친 이 ‘유럽혁명’은 불과 수주일 만에 여러 나라에서 정권을 무너뜨리고 보수반동의 아성인 ‘메테르니히체제’를 해체시켰다. 대부분의 혁명은 단명했으나, 그것이 불러일으킨 국제혁명의 기대와 공포는 참으로 거대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혹자는 그것을 ‘세계혁명’으로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주1) ■선언■은 이 혁명의 발발 직전에 쓰여졌다. 그것은 혁명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늦게 출현하였던 반면에, 당시의 특정한 혁명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선언■은 이 사실로 말미암아 독특한 색조를 부여받았으며 강한 설득력을 가짐과 함께 모종의 역사적 오해를 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주2)
*주1) ■■이매뉴얼 월러스틴 외, ■반체제운동■ (송철순 외 역, 창작과비평사, 1994). 1848년의 혁명에 관한 연구로는 Sir Lewis Namier, 1848: The Revolution of the Intellectuals (Oxford: Oxford Univ. Press, 1944)이 여전히 고전적인 가치가 있으며 이하에서 필자는 특히 Arnošt Klíma, “The bourgeois revolution of 1848~9 in Central Europe,” Roy Porter and Mikuláš Teich (eds.), Revolution in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86), pp. 74~100 참조.■■
*주2) ■■이 점에 대해서는 Ellen Meiksins Wood, The Pristine Culture of Capitalism: A Historical Essay on Old Regimes and Modern States (London: Verso, 1991), pp. 1~19; “The ‘Communist Manifesto’ after 150 years,” Monthly Review 50 (May 1998), pp. 14~35를 참조.■■
1848년의 혁명은 프랑스나 라인란트와 같은 비교적 선진화된 지역으로부터 남부 이탈리아나 트랜실바니아와 같은 후진지역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지닌 지역에서 일어났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혁명이 일어난 곳 어디에서나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영국은 1840년대에 민중의 소요와 그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륙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혁명적 상황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48년의 여러 혁명들의 공통되는 정치강령이 있었다면, 그것은 결코 자본주의체제의 전복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1789년의 프랑스혁명이 고무했던 시민적 평등에 입각한 자유입헌체제의 확립이었고, 헝가리와 이탈리아에서는 그것이 민족자결권의 요구와 결합되어 있었다.
1848년의 혁명이 사회주의적이거나 반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렇다고 전적으로 일반적인 의미의 ‘부르주아혁명’, 즉 자본주의를 봉건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혁명도 아니었다. 혁명적 ‘부르주아지’는 결코 단일한 자본가계급이 아니었고 그 가운데는 오히려 관리, 전문직업인, 지식인이 우세하였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가장 앞섰던 프랑스에서조차 산업부르주아지는 소수이고 미약하여, 상이한 이해관계를 지닌 민중세력의 지원을 받지 않고서는 홀로 지배엘리트에 맞설 수 없었다. 또한 혁명을 ‘부르주아공화국’이나 자유주의체제라는 정치적 목표를 넘어 보다 광범위한 사회변혁으로 이끌었던, 도로에서 싸우다 죽어간 민중들은 근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독립적인 장인층과 소상점주, 일부 지역(이탈리아와 일부의 독일지역)에서 농민층, 도시의 실업자나 불완전 고용인 등이 다수였다. 혁명 유럽의 그 어느 곳에도 영국에 이미 존재했던 규모의 임금노동자층은 부재했다. 특히 프랑스와 일부의 독일에서 신생 프롤레타리아들이 수에 비해서 훨씬 큰 역할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아직 혁명의 성공을 위한 굳건한 사회적 기반을 제공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바로 이런 까닭으로 해서 심지어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조차도 이룰 수 없었다.
혁명운동이란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부군에 맞설 수 있는 일정한 물리력을 필요로 하며, 1848년의 상황에서는 대중동원이 거의 유일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일단 민중이 대거 정치무대에 돌입하자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나 급진파는 곧 그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도처에서 민주주의나 심지어 자유주의로부터 후퇴하여 엄격한 계서제, 질서, 반동을 내세우는 전통적인 세력에 합류해 버렸다. 사실상 어떤 단일한 계급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안정된 체제를 유지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이 터져나왔고 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선언■을 집필할 당시, 그들은 사회주의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임박했다고는 결코 믿지 않았다. 그들의 희망은 1848년의 혁명과 그 실패가 보다 장기적인 발전, 즉 부르주아 공화국을 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게 하는 ‘영구혁명’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맑스는 ■선언■을 쓸 때 독일이 혁명 전야에 있음을 또렷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하기야 유럽에 거대한 폭풍우가 밀어닥칠 것임을 맑스와는 매우 다른 처지에 있던 토크빌이나 기타 여러 사람들이 사전에 알아챘으니, 딱히 그만이 통찰력이 뛰어났다는 찬사는 접어두자. 문제는 그가 그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선언■이 개진하고 있는 부르주아혁명관을 요약하면 이렇다: 부르주아혁명이란 “이미 발전한 생산력”에 “족쇄”가 된 “봉건적 소유관계”[10]를 분쇄하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한다. 따라서 주 혁명전선은 새로운 생산력의 담지자인 부르주아지와 구 생산관계의 담당자인 봉건세력 사이에 이뤄지며, “부르주아지가 자기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운동”[15]시켜 이들이 보조자로 혁명무대에 개입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걸맞게 행동하며 그리하여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하였다”[6]. 하지만 1848년의 경험은 이러한 혁명관의 기대를 저버렸다. 혁명과정에서 부르주아지가 추구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이며, 그 부르주아지는 대부분 자본가가 아니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대중의 소수에 불과했고, 더욱 중요하게도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망각하고 끝내 혁명을 배신했던 것이다.
독일의 현실과 이중혁명관
이러한 괴리가 맑스의 판단착오에서 비롯하였을까? 그것은 사실상 ■선언■의 특히 제1장이 개진하고 있는 역사적 분석의 배경이, 발전한 자본주의사회가 아니라 당시의 독일과 유사한 전자본주의적인 사회구성인 데서 비롯하였다.*주) 이는 ■선언■이 20세기말이 아니라 19세기 중엽에 쓰여졌다거나 맑스가 경험한 자본주의가 오늘날보다 훨씬 초기 단계의 것임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당시의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사회조차 제1장의 직접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사실상 그것은 자본주의적인 사회관계보다는 오히려 전자본주의적인 역사현실과 더욱 관련이 깊은 사회세력의 역학관계와 투쟁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혁명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임금노동자 대 자본가(고용주)의 대립이 아니라 비특권계급 대 특권계급, 부르주아들을 포함하는 평민 대 귀족, 국민 대 군주제, 농민 대 지주, 심지어 농노 대 주인, 빈자 대 부자 등의 대립이 사회적 갈등의 기본축을 이루었다.
*주) ■■Wood(1998), op. cit.}}
우리는 여기에서 ■선언■에 엿보이는 미묘한 긴장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저자들이 ■선언■에 세 가지 성격을 부여하려고 했던 결과였다. ■선언■은 말 그대로 공산주의의 선언서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선언서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언■에서 주목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불온시했던 것은 바로 이 측면 때문이다. 그것은 아울러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하고 예언자적인 분석이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분석으로 여전히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어 요즈음에 특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면모이다. 그러나 ■선언■의 직접적인 정치적 착상은, 그것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와는 매우 다른 세계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선언■은 특정 혁명에 대한 분석을 통해 얻어낸 부르주아혁명관을 다가올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원형으로 삼음으로써 앞서 말한 괴리를 야기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선언■은 세 가지, 어찌 보면 네 가지 각기 다른 차원의 시간성을 갖고 있다. ‘먼 미래’(프롤레타리아 혁명)와 ‘근접 미래’(독일의 자본주의적 미래) 그리고 ‘전자본주의적인 과거’(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로의 이행)가 ■선언■의 ‘현재’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괴리의 근본적인 원인은 맑스의 거시적인 역사관의 핵심인 이중혁명관 자체에 있다*주). 주지하다시피 영국은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그의 분석의 본보기였다. 영국은 당시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국가였고 그는 영국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를 보았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상(像)을 그가 얻어낸 곳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그는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성과를 겹쳐놓음으로써 부르주아지와 자본가계급을 동일시하고 혁명적 부르주아지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주) ■■이중혁명관에 입각한 대표적인 역사서술로는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박현채 외 역, 한길사, 1984)가 있으며, 이에 관한 역사사회학적 분석으로는 Colin Mooers, The Making of Bourgeois Europe (London: Verso, 1991)이 참고할 만하다.■■
■선언■의 역사서술는 부르주아지를 “각각의 발전단계”에서 반동세력에 맞서 투쟁하는 진보적인 계급으로 그리고 있다. 그것은 봉건적인 특권계급에 대항하는 “피억압자 신분”에서 출발하여 오랜 계급투쟁을 통해 “마침내 대공업과 세계시장이 갖추어진 이래로는 현대 대의제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였다”[5~6]. “이 모든 투쟁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그들의 도움을 청하며, 그리하여 그들을 정치운동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부르주아지 자신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지 자신의 교양 요소들을,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 자신에게 대항하는 무기들을 제공한다”[17~18]. 이러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부르주아지 상은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이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의 혁명투쟁사에서 빌어온 것이었다.
문제는 고전적인 부르주아혁명이라는 프랑스혁명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는 점이다. 혁명적 부르주아지의 핵심은 자본가 내지는 심지어 전자본주의적인 상인층이 아니라 관리와 자유전문직업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의 혁명적 목표는 자본주의를 봉건적인 족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평등과 관직 등에 대한 기회의 균등, 즉 ‘재능에 따른 출세’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부르주아들의 이러한 목표는 부의 축적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자본주의사회의 그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관직이 경제적 잉여에 접근할 수 있는 주요한 통로이고 야심 있는 많은 부르주아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출세길이던 사회에 어울리는 것이었다.*주)
*주) ■■조르쥬 르페브르, ■프랑스혁명 - 1789년■ (민석홍 역, 을유문화사, 1976); Alfred Cobban, The Social Interpretation of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64); 프랑스혁명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는 민석홍 편, ■프랑스혁명사론■ (까치, 1988) 참조.■■
다른 한편 영국의 자본주의는 부르주아지만의 작품이 아니었다. 영국의 토지특권계급은 도시의 시민층 못지 않게 농업자본주의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였다. 또한 영국에서 자본주의는 반동적인 특권계급에 대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부르주아들의 투쟁의 결과로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17세기초에 국왕들이 절대군주제의 경향을 강화함에 따라 많은 대농장소유주들이 국왕에 대항하여 싸우고 민중을 혁명에 동원했음은 사실이다. 그 투쟁에서 그들은 대의제와 제한정부의 원칙을 천명했고 그들이 부추겼던 (그러나 곧 탄압했지만) 민중세력은 당시 가장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념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청교도혁명은 토지특권계급과 대두하는 부르주아지나 자본가 사이의 계급투쟁은 결코 아니었다.*주)
*주) ■■Christopher Hill, The Century of Revolution 1603~1714 (London: Sphere Books, 1973); "A Bourgeois Revolution," J. G. A. Pocock (ed.), Three British Revolution, 1641, 1688, 1796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80) 참조.■■
영국의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위하여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적어도 농업자본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다. 토지계급과 산업계급 사이에 충돌이 나타났던 19세기에서조차 그것은 기본적으로 두 종류의 자본간의 대립이었다. 만약 영국의 자본주의가 정치적‧경제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계급투쟁을 필요로 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층민을 겨냥한 것이었다. 소농들의 소유권과 그들의 이상을 대변하는 급진사상이 자본축적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국의 자본가들이 맑스에게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부르주아지 상의 본보기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속성이 미약했던 프랑스혁명기의 ‘혁명적 부르주아지’였다. 사실상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지가 특권계급에 대항하여 민중계급과 결합하고 그 투쟁을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차원에까지 이끌었던 거의 유일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혁명의 진행과정을 목도하고 그것이 민중혁명을 야기할 수 있음을 알게된 대륙의 부르주아들은 지배세력에 맞서 민중을 정치무대에 끌어들이면서도 새로운 사회혁명의 가능성에 전전긍긍하였고 끝내는 언제나 혁명대열에서 이탈하였다. 즉 단 한 차례의 1789년의 혁명을 제외하고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걸맞은 부르주아혁명조차 철저하게 수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예외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1789~93년의 ‘혁명적 부르주아지’에 맑스는 매료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부르주아지 일반을 역사상 최초의 보편계급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새로운 제2의 보편계급으로서 그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부르주아지를 본보기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선언■의 자본주의관 역시 ‘혁명적 부르주아지’ 상의 영향을 받아 자못 긍정적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언제나 ‘밑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한 혁명적 과정을 수반하는 지는 불명확하다. 독일이나 일본 또는 우리의 경험은 오히려 그 반대임을 잘 보여준다. 맑스는 영국과 프랑스의 경험을 웅장한 규모로 결합시켜 근대사회를 가져온 기본동력으로서 이중혁명관을 제시하는 가운데 부르주아지를 자본가와 등치시키고 자본주의의 적극적인 측면을 상대적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송가(頌歌)로서의 ■선언■
■선언■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선언■에 대해 듣던 바와는 달리 오히려 특히 그 앞부분에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찬송가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충격을 받을 것이다. “부르주아지야말로 인간의 활동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가를 증명하였다. 부르주아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수로, 고딕식 성당 따위와는 완전히 다른 기적을 성취하였으며, 민족대이동과 십자군원정과는 전혀 다른 원정을 수행하였다”[7].
■선언■은 부르주아지의 위대성을 여러 측면에서 조감한다. 우선 ■선언■은 부르주아지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이 역동성은 혁명적 존재로서 부르주아지의 심원한 충동과 욕구에서 비롯하며 단지 물질생산의 측면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포괄한다.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들에, 따라서 생산관계들에, 따라서 사회관계들 전체에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과 격동 등이 부르주아 시대를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해준다. 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래되고 존귀한 표상들 및 의견들과 함께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정착되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신분적인 것과 정체적인 것은 모두 증발해 버리고*주), 신성한 것은 모두 모독당하며, 그래서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의 생활상의 지위와 상호 연관들을 깨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7~8].
*주) ■■영어본에는 “신분적인 것과 정체적인 것”이 “견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영어로 표현하면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라는 유명한 문구이다.■■
맑스를 ‘근대주의자’로 파악하려는 일단의 연구들이 집중적으로 인용하여 이제는 ■선언■의 맨 첫 구절과 맨 마지막 구절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명문’이다.*주) 마치 인상파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사물의 고정된 실체성이란 부재하며 오직 광선에 투과된 색채의 부단한 흐름만이 화폭을 메운다는 서정성을 느끼게 해준다. 사실 이 구절로 말미암아 맑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으로부터 자본주의의 희생자들을 배신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그의 변증법적인 사고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맑스의 진정한 의도는 부르주아지의 존재성에서 비롯한 이 혁명적 역동성이 끝내는 바로 그들을 겨냥할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다만 자본주의의 괴력(그 모순까지 포함하여)과 끈질긴 생존능력을 지켜본 우리로서 맑스의 통찰력을 공유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부르주아지와 자본주의의 자기변신의 역량을 확인해주는 듯 보이는 것이다.
*주) ■■대표적인 연구로는 문제의 구절을 책의 제목으로 삼은 Marshall Berman,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 (New York: Penguin Books, 1982)가 있다.■■
■선언■이 찬양하는 또 다른 면모는 부르주아지가 근대 자본주의에 ‘전지구적(global)’ 차원과 ‘범세계적(cosmopolitan)’ 구조를 부여하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세계화를 하나의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시대로서 파악하려는 일반적 경향에 맞서 ■선언■은 그것이 불연속적인 역사 속의 한 단계가 아니라 애초부터 자본주의체제의 운동원리 속에 뿌리박고 있는 변화의 한 과정임을 역설한다.*주)
*주) ■■엘렌 메익신즈 우드, ■세계화, 포스트모더니티, 또 한 번의 새 시대■, ■선언 150년 이후■, 333쪽.■■
자신의 생산물의 판로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는 부르주아지를 전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둥지를 틀어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하여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맺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의 개발을 통하여 모든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 부르주아지는 공업의 발 밑에서 그 국민적 기반을 빼내가 버렸다. 오래 된 국민적 공업들은 파멸되었고, 또 나날이 파멸돼 가고 있다. 이 공업들은, 그 도입이 모든 문명 국민들에게 사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공업들에 의해, 즉 더 이상 본토의 원료를 가공하지 않고 아주 멀리 떨어진 지방의 원료를 가공하는, 그리고 그 제품이 자국 안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대륙에서도 동시에 소비되는 공업들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들의 급속한 개선과 한없이 편리해진 교통을 통해 모든 국민들을, 가장 미개한 국민들까지도 문명 속으로 끌어들인다 ...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8~9; ■선집1■, 404].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형성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해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부르주아들의 야심은 평범하고 천박하기조차 하다. 하지만 이윤의 극대화를 향한 그들의 부단한 노력은 고갈되지 않는 추진력과 무한한 전망과 지평을 열어준다. 그들은 오직 한가지만을 생각하지만, 그들의 좁은 시야는 광대한 연계를 이끌고, 그들의 얄팍한 계산은 가장 심원한 변혁을 야기하고, 그들의 평화로운 경제활동은 마치 폭탄처럼 가장 원시적인 부족에서 막강한 소련에 이르는 전 인류사회를 휩쓴다. 맑스는 자본주의 발전이 야기한 인간의 고통과 희생에 전율했지만 그것이 열어준 전지구적 전망은 사회주의가 딛고서야 할 위대한 성취라고 언제나 믿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형성과 모순 그리고 해체가 세계사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미래에 대한 그의 구상도 국민국가의 발전이 아니라 세계문명의 큰 흐름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요즈음 특히 우리 학계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월러스틴 류의 자본주의에 대한 세계체제론적 시각이 맑스로부터 지나치게 나아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주)
*주) ■■유재건, ■마르크스와 월러스틴■, 한국서양사학회 편, ■근대 세계체제론의 역사적 이해■ (까치, 1996), 13~40쪽 참조.■■
마지막으로 흥미롭게도 ■선언■은 부르주아 세계의 천박성을 신랄하게 규탄하면서도 그 문화적 규준의 보편주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였다. 대중매체가 이제 막 탄생하던 시기의 맑스는 그것을 “세계문학”의 형성이라고 불렀다. 21세기의 문턱에 선 우리는 과감하게 그것을 “세계문화의 도래”라고 보고 싶다.*주) ■선언■은, 격렬한 정치혁명을 꿈꾸는 이 정치적 문건이 세계문화가 어떻게 세계시장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지를 천연덕스럽게 설명한다.
*주) ■■Marshall Berman, “Book Review about The Communist Manifesto: A Modern Edition with Introduction by Eric Hobsbawm,” The Nation, vol. 266, n. 17, pp. 4~14 참조.■■
국산품에 의해 충족되었던 낡은 욕구들 대신에 새로운 욕구들이 등장하는데, 이 새로운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먼 나라와 토양의 생산물들이 필요하다. 낡은 지방적, 국민적 자급자족과 고립 대신에 국민들 상호간의 전면적 교류, 전면적 의존이 들어선다. 그리고 이는 물질적 생산에서 그렇듯 정신적 생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별 국민들의 정신적 창작물은 공동재산이 된다. 국민적 일면성과 제한성은 더욱 더 불가능하게 되고, 많은 국민적, 지방적 문학들로부터 세계문학이 형성된다[8~9]
이러한 세계문화의 전망은 정보통신혁명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중감정을 갖게 한다. 세계시장은 인간의 욕구를 무한정으로 확대시키고 심지어 전 인류의 ‘공동재산’으로서 문화의 개념을 완성하였다. 세계문화라는 표현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라면, 전 인류에게 공통의 언어를 제공해주는 ‘보편성’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선언■은 이를 구체적으로 “부르주아지 자신의 교양 요소들”[17]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곧 계몽사상의 문화를 뜻하는 것으로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의 가장 진보적인 부분과 “역사 운동 전체의 이론적 이해에 힘겹게 도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일부”[18]를 노동계급에게 자신에게 대항하는 무기로서 제공해준다.
물론 ■선언■은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다음의 구절은 베버(Max Weber)라면 합리화과정이요 ‘탈신비화/탈신성화’라고 불렀을 것을 ■선언■이 얼마나 냉혹하게 보고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선언■의 웅혼한 문체가 약여(躍如)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얻은 곳에서,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였다. 부르주아지는 타고난 상전들에 사람을 묶어 놓고 있던 잡다한 색깔의 봉건적 끈들을 무자비하게 끊어 버렸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노골적인 이해관계, 냉혹한 ‘현금 계산’말고는 아무런 끈도 남겨 놓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신앙심 깊은 광신, 기사의 열광, 속물적 감상 같은 성스러운 외경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빠뜨려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문서로 보장되고 정당하게 얻어진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인정사정 없는 상업의 자유로 바꾸어 놓았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 때문에 은폐되어 있던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꾸어 놓았다 ...... 부르주아지는 가족관계로부터 심금을 울리는 감상적인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그것을 순전한 금전관계로 돌려놓았다[6~7; ■선집1■, 402~403. 강조는 원문의 것임].
근대 초만 하더라도 ‘물욕(物慾)’은 다른 ‘정욕’과 마찬가지로 억제되어야 할 도덕적 ‘죄악’에 불과했지만 부르주아지의 영역이 확대되고 경제행위에 대한 적극적 인식이 생겨나면서 ‘이해관계(interest)’라는 보다 중립적인 용어로 대체되었다.*주) ■선언■은 ‘이해관계’라는 용어의 문명적 의미, 즉 그것이 인간을,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들마저도 얼마나 비참하고 비정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타락상은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구조의 밑바닥에서 비롯한 것이다. ■선언■에는 자본주의문명에 대한 저자들의 도덕적 모멸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주) ■■Albert O. Hirschman, 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 Political Arguments for Capitalism before Its Triumph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77) 참조.■■
■선언■을 읽은 우리의 감상은 오히려 저자들의 그것보다도 훨씬 착잡하고 복합적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근대에 ■선언■이 규정하는 부르주아혁명의 시도조차, 그렇게 진보적인 부르주아지의 일부조차 있었는가 하는 물음과 연결된다. 세기말의 전환에서 차라리 우리는 한국의 부르주아들에게 ‘제2의’ 송가를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그렇지만’의 단서와 유보조항에 숨어 역사의 퇴행을 꿈꾸지 말고, 미국이라는 ‘대형(大兄)’에 의존하여 ‘호가호위(狐假虎威)’하지 말고 ‘차디찬 이해관계’에 충실하여 진정한 주체를 확립했으면 한다. 마치 150여년 전에 맑스가 자신의 조국에 부르주아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듯이 우리 역시 ‘새로운’ 부르주아혁명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의 부르주아지는, 만약에 그렇게 부를 사회적 존재가 있다면, “하나의 국민도, 하나의 전국적 계급이해”도 형성하지 못한 채 지난 150년간의 역사의 무게를 왜 느끼지 못하는가?
사회주의의 전망과 경험
■선언■은 물론 부르주아지와 자본주의의 활기찬 ‘근접미래’만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미증유의 물질적 생산력을 만들어내어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마련하며, 사회주의는 이 생산력의 기반에 입각하지만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의 논리를 극복하여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37]를 이룩할 것이었다.
■선언■은 부르주아지의 선의나 계급화해, 또는 역사의 도약을 믿었던 당대의 여타 사회주의와는 달리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계급투쟁을 통해서만이 사적 소유의 철폐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공업의 진보는 경쟁을 통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에 연합체를 통한 노동자들의 혁명적 단결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부르주아지가 생산하며 생산물들을 취득하는 기초 자체가 부르주아지의 발 밑에서 무너져 간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매장인을 만들어낸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불가피하다”[22; ■선집1■, 412].
많은 논자들이 ■선언■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심지어 홉스봄은 다음과 같이 실토한다. “천년기의 말에 우리가 대규모로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당시에는 먼 미래에 대한 ■선언■의 날카로운 전망에 감동 받을 것이 틀림없겠지만, 다른 예언의 실패 역시 마찬가지로 두드러진다.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매장인을 만들어내지’ 않았음은 이제 분명하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똑같이 불가피함’은 입증되지 않았다.”*주) 자본주의가 대규모의 노동계급을 창출하고 노동계급운동이 종종 승리를 거두고 일부의 나라들이 한때 혁명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린 적이 있었음이 사실이지만, 노동계급은 ■선언■의 저자들이 기대했던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를 이룩하지 못했다. 오늘날 심지어 많은 사회주의자들조차 새로운 사회의 전망에 대해 회의적이다.
*주) ■■Op. cit., p. 18.}}
돌이켜 보면 ■선언■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발전에 대해 낙관적이었음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이거나 단선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선언■은 노동계급을 결합시킴과 아울러 분열시키는 힘이 존재하며 그것이 효과적인 정치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조직적 노력과 교육이 필요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언■은 현실적 행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정치적 선언’으로서 이러한 장애물의 존재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선언■은 “다른 계급들은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쇠퇴하고 몰락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대공업의 가장 고유한 산물이”라고 하여 계급의 양극화가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대세라고 천명하고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항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가운데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18]라고 기탄 없이 선언하였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근접과거’의 혁명적 부르주아지 상을 자본주의적 미래에 투영한 결과이며, “프롤레타리아는 사적 소유 일반을 폐지함에 의해서만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주1)는 원리 역시 “관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추론의 결과이다.”*주2) 이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신화임을 뜻하며, ■선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힘이 되어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고양하고 유지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주1) ■■엥겔스, ■공산주의의 원칙들■, ■선집1■, 324쪽.■■
*주2) ■■Leszek Kolakowski, Main Currents of Marxism, vol. 1, The Founders (Oxford: oxford Univ. Press, 1978), p. 130: 홉스봄, 위의 글, 22~23쪽에서 재인용.■■
문제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신뢰가 맑스주의의 핵심적인 교의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기본적인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이론적 인식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해방을 통한 자본주의의 야만성의 극복이야말로 맑스 가르침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오늘날 맑스의 교리를, 사회적 총체의 상이한 수준을 하나의 틀로 묶는 전체사의 전망과 계급적 구분을 사회를 이해하는 유일한 준거로 보는 인식틀로 파악하여 하나의 학문방법론 내지 현실인식론으로 축소시키거나(물론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여전히 대단한 성취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의 분석을 위한 정치경제학으로 국한시키는 ‘강단 맑스주의’의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데, 이는 혁명적 실천운동의 약화로 말미암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선언■의 정신을 훼손하는 처사이다. 이 점에서 노동자 계급정치와 사회운동의 결합을 통한 ■선언■의 정치적 유산의 복원이야말로 맑스주의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 시급한, 아마도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하겠다.*주)
*주) ■■콜린 레이즈‧레오 파니치, ■‘공산주의당 선언’의 정치적 유산■, ■선언 150년 이후■, 26~68쪽.■■
사회주의의 도래에 관한 ■선언■의 낙관론은 또한 ‘현실 사회주의’의 경험과 붕괴로 말미암아 타격을 입었다.*주) 사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맑스의 예언을 시험하는 이상적인 자리는 아니었다. 당시 러시아는 맑스가 사회주의혁명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했던 높은 수준의 생산력과 대규모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니지 못했다. 일부 지역이 꽤 발전한 산업과 매우 전투적인 산업노동자층을 거느리기는 했지만,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고 많은 산업노동자들의 뿌리는 여전히 촌락공동체에 있었다. 러시아는 심지어 19세기 중엽의 영국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맑스가 말하는 ‘발전한 자본주의사회’에 미치지 못했고,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전제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지 못했다.
*주) ■■이채욱,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한울, 1992), 449~485쪽; ■소련의 체제구축과정(1917~1941) - 그 양면성에 대한 일고찰■, ■서양사연구■ 14 (1993), 231~260쪽 참조.■■
더욱이 소련체제는 ■선언■이 말하는 “민주주의 쟁취”[35]와는 거리가 멀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20세기의 공산주의는 ■선언■의 저자들이 공산주의에 부여했던 의미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심지어 맑스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대했을 때조차 진정한 사회주의혁명은 발달한 생산력과 성숙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닌 영국이나 미국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겼다. 선진적인 자본주의사회에서 발생하는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보조를 맞출 때만이 러시아에서의 혁명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맑스가 자본의 축적과 높은 수준의 생산력이 인간들의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요구하게 마련이어서 차라리 자본주의체제를 통해 효과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그는 그런 종류의 발전이 민주주의적이나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룩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 고통스런 과정은 사회주의의 과제가 아니라 그 전제조건인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현존 사회주의’는 아마도 맑스가 예상했을 수준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문제는 이것이 그가 사회주의의 핵심이라고 보았던 민주적인 생산조직으로는 도저히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적 자본축적’을 위해 소농민들과 노동자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유사한 결과를 얻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련에 스탈린식 정당이 아니라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주의정당이 들어섰다면, 스탈린주의의 잔혹성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자본의 축적은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그 정당이 만약 사회주의의 존립을 위해 일정한 수준의 축적을 기해야 했다면 얼마 안되어 자신의 세력기반인 노동계급과 어려운 긴장관계에 빠져들었을 것이었다.
맑스는 러시아와 같은 저개발국가에서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혁명이 나타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더욱이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스탈린주의의 죄악이 저질러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사회주의혁명이 발달한 자본주의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이 점에서 러시아혁명의 궁극적인 실패는 그의 예언을 입증한 것이라고 논증할 수 있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가 맑스가 오류를 범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본주의에 대한 생존 가능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의 호소력을 크게 약화시켰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전망의 부재야말로 세기말의 혼란을 부채질하는 핵심적인 요인인 것이다.
■선언■과 21세기의 우리
흔히 ■선언■을 평가할 때 일반적인 방식은 그의 예언이 잘못되었다던가, 이런 점들은 보지 못했다던가, 또는 그것을 해체하여 거기에서 옥석을 가린다던가 하는 따위이다. 예컨대 ■선언■이 제기한 절대빈곤설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성은 과학적 근거를 결여하였으며, 또 그것은 유럽중심주의에 매몰되고 민족문제와 민족주의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자연 및 환경문제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선언■의 제1장과 제2장을 분리시켜 전자는 여전히 살아있는데 후자는 이미 죽었다는 식이다.*주) 이는 ■선언■이 특정 맥락의 산물이고, 분리시키기 어려운 하나의 유기적 총체이며, 이후의 역사과정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도외시한 결과이다. 그 비판들에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들은 ■선언■과 그 저자들에게 어떤 신통력을 부여하려는 혐의가 짙다. ■선언■에 어떤 망령을 뒤집어씌우기보다는 그 현실적 적실성을 살리는 일이 21세기를 코앞에 두고 그것에 접근하는 올바른 길이 아닐까 한다.
*주) ■■Wal Suchting, “What is Living and What is Dead in the Communist Manifesto?,” Mark Cowling (ed.), The Communist Manifesto: New Interpretations, pp. 157~165; Michael Lowy and Shane H. Mage, “Globalization and internationalism: how up-to-date is the ‘Communist’ Manifesto?,” Monthly Review 50/6 (Nov. 1998), pp. 1~16 참조.■■
■선언■ 가운데 세기말의 현실을 이해하는데 특히 도움이 된다고 많은 논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팽창에 관한 대목이다. ■선언■이 자본주의의 생명력을 과소평가한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는 ‘세계화’에 관한 묘사 가운데 150여년 전에 쓰여진 ■선언■보다 더 나은 것을 찾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다. 그것은 ‘세계화’가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빚어내는 자본주의화요 부르주아화인 동시에 유럽문명이 비유럽세계를 장악하는 서구화의 과정임을 잘 보여준다.
맑스의 생존시 ‘세계화’는 미증유의 사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초기 단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적 자본주의’는 지구 전체를 뒤덮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자본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인 승리라고 단정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동남아시아의 외환위기는 승리주의를 공허하게 만들고 있으며,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위기’를 말하고 일부는 해체와 붕괴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팽창을 심원하게 모순적인 과정으로 보는 맑스의 분석은 승리주의의 담론에 비해 훨씬 큰 설득력을 갖는다. 아울러 ■선언■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원하는 구제책조차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고 진단한다. 심지어 ■선언■은 IMF사태 직후의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예감하고 있었던 듯 싶다.
... 현대 부르주아사회는, 주문을 외어 불러내었던 저승의 힘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 ... 주기적으로 재발하며 점점 더 위협적으로 부르주아사회 전체의 존재를 문제삼는 상업공황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공황 때에는,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어불성설로 보였을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한다. 과잉생산이라는 전염병이 그것이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 부르주아지는 무엇을 통해 이 공황들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대량의 생산력을 부득이 절멸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획득하고 옛 시장을 더욱 철저하게 착취함으로써.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라고? 더 전면적이고 더 강력한 공황들을 준비하고, 그 공황들을 예방할 수단을 감소시킴으로써[11~12; ■선집1■, 405~406].
자본주의는 흔히 내적 위기를 새로운 시장과 식민지를 개척하여 극복하곤 했다. 오늘날 명실상부한 세계체제가 된 자본주의는 위기를 해소시켜줄 수 있는 여지가 급속히 축소되면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모순을 경험하고 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높은 이윤율의 확보가 어렵게된 자본은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의 도움을 받아 국내외적인 양 차원에서 단순히 부의 불균등분배와 불평등의 확대에 의지하고 있다. 그것이 선진경제에서는 빈부의 양극화와 복지체제에 대한 공격으로, 세계적으로는 남북의 양극화와 절대적 빈곤의 심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선언■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적 팽창’은 이제 주기적인 위기가 아니라 정상상태로 자리잡은 듯 보인다.*주)

* 출전: Roberto P. Korzeniewicz and Timothy P. Moran, “World Economic Trends in the Distribution of Income, 1965~1992,”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102/4 (Jan. 1997): Harry Magdoff, “A note on the ‘Communist Manifesto’,” Monthly Review 50/1 (May 1998), p. 12에서 재인용.
위의 표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 빈곤설이 일국적인 차원에서는 지탱되기 어려울지 몰라도 세계적인 수준에서는 여전히 타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19세기의 이래의 통계를 재구성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보편화됨에 따라 남북의 격차가 오히려 더욱 확대되었음을 입증해 줄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나종일 외 역, 창작과비평사, 1993), 119~147쪽 참조.■■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정치적 발전의 관계에 대해 맑스가 말한 것이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해준다. ■선언■이 다소간 낙관적으로 예측하기는 했지만, 노동계급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전략적으로 자본주의의 핵심에 위치한 노동계급이야말로 ■선언■이 역설했듯이 자본주의를 변혁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회세력인 것이다. 아울러 세계경제는 계급형성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여러 요인들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 또한 계급정치의 복원을 훨씬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작지 않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자본과 특히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사회복지제도를 공격하고 긴축재정을 실시하고, 우리의 경우는 사회적 안전망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실업을 야기하였다. ‘세계화’는 역설적이게도 국가와 자본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고 투명하게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복지국가로부터의 퇴행인 동시에 통합된 세계시장에서 자본의 이윤율을 유지하고 높이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개입인 것이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자본의 요청이 증대함에 따라 국가가 다시금 계급투쟁의 주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국가가 계급착취에 눈에 띠게 관여함에 따라 노동계급이 내적 분열을 넘어 조직화와 의식화를 진전시키고 계급투쟁이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선언■은 “가장 진보한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정치적 강령으로서 크게 10가지를 나열하였다[36~37].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현실화되어 있다. 아동노동의 폐지, 공공무상교육, 누진세 등은 일반화되었고, 일부의 수송제도는 공공부문이 되었으며, 상당수의 국가는 국립은행제를 채택하였다. ■선언■은 이러한 조치들이 “생산방식 전체의 변혁을 위해 불가피한 수단”[35]이 된다고 보았으나, 기실 그러한 강령이 구체화되었다고 해서 자본주의체제에 어떤 균열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노동계급운동이 오랫동안 치열한 투쟁을 통해 획득한 사회보장제와 국유화조치는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자기파괴의 경향으로부터 구제해 주었다.*주) 그간 국유화나 공공부문의 관리는 ■선언■이 천명했던 “직접생산자에 의한 직접 통제”와 거의 관련이 없이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여 왔거니와,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제 대대적인 민영화를 추진하고 시장논리에 내맡길 수 없는 사회보장제와 같은 공공부문조차 사기업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본주의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자기파괴로부터 보호해 주었던 제도와 장치들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주) ■■최갑수,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사회평론■ 창간호 (1991년 5월), 54~63쪽.■■
이러한 변화가 자본주의를 또 다른 ‘1929년’으로 몰고 갈는지 누구도 속단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자본축적의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세계화된 ‘20대 80’의 양극화의 압력을 지탱할 수 있을는지 더욱 의문시되고 있다. 이러한 세기말의 혼돈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이 점에서 자본주의의 내부로부터 해체력을 발견해야 한다는 ■선언■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계급투쟁이야말로 변혁을 위한 주된 지렛대인 것이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