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읽히고 논쟁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라고 볼 수 있다. 레닌이 글을 쓰던 시기는 짜르의 폭압적 전제정치가 힘을 발하며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및 민주주의 운동을 탄압하던 때였다. 아래로부터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중운동과 이에 대한 탄압, 혁명적 운동 조직의 영세성 및 수공업성이 레닌이 극복하고자 하던 대상이었다. 80년대의 우리나라 역시 군부 독재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극복하고, 모순의 증대에 따라 노동자 민중이 대중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시기로 레닌이 글을 쓰던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당시의 활동가들이 레닌의 테제들을 바로 받아들여 운동의 무기로 사용하려고 시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레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쟁점이 되었던 것은 ‘경제주의’라는 문제였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전제주의 타도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정세에서 노동자 대중의 즉자적이고 경제적인 요구에 운동을 묶어두려는 경제주의자들이 “혁명조직을 강고히 하고 정치 활동을 확대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는 대신에, 노동조합주의 투쟁만을 하라고, 뒤로 가라고 요구”(45)하는 한편 “전제주의 타도를 대중적 노동운동의 첫째 과제로 내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과제를 눈앞의 정치적 요구를 (대중운동의 이름으로) 얻어내기 위한 투쟁이라는 임무로 격하시켰다”(59)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레닌의 경제주의 비판은 군부 독재에 대한 투쟁이 전사회적이고 전계급적으로 요구되던 80년대 초에 대중의 요구를 강조하며 투쟁을 방기하고 조합주의적 투쟁에 제한하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서 우리나라의 현실에 적합하다고 받아들여졌으며, 소위 ‘사투(사상투쟁)’의 기본서로 활용되었다.
처음 소개되던 당시에는 공식 출판된 번역판이 아니라 노트에 수기로 번역한 복사판이 돌아다녔는데, 경제투쟁을 모두 경제주의로 오역하는 바람에 모든 경제투쟁 자체를 부정하는 일도 벌어졌다. 경제주의자들을 박멸한다고 경제투쟁이 벌어지는 곳에서 투쟁을 가로막고 논쟁을 벌이는 해프닝까지 있었던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다행히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독일어로 읽을 수 있었으며, 후배와 토론하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당시 돌아다니던 노트를 구해 대조하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씁쓸한 남한 현실... 결국 누가 '원문'을 읽었느냐로 결정된다. 레닌은 20세기 초 러시아의 정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구체적인 투쟁 대상과 함께 논쟁하며 쓴 책인 것을...) 사실 경제투쟁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투쟁이 전사회적인 차원의 정치적 계급적인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가로막고 개별 사업장 또는 지역적 투쟁에 머무르게 하려는 경제주의적 경향을 문제 삼아야 한다. 경제투쟁은 보다 상승된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는 싹으로서 더 성장해야하는 것으로, 경제투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그 싹을 밟고 뿌리를 뽑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요컨대 경제 ‘투쟁’이 아니라 경제 ‘주의’가 문제로,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경제적 요구‘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입장, 결과적으로는 노동자 민중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는 경향이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적 요구에 대한 경제 선동만을 중시해서는 안 된다. “경찰의 폭압과 전제주의의 광폭함이 드러나는 모든 현상들, 온갖 사례들이 그 같은 (대중의) ‘끌어들이기’를 위해 부족함 없이 ‘널리 활용될 수 있는’ 수단이다. 결코 경제 투쟁과 관련된 현상들만이 그런 ‘활용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76-77) “경제 투쟁을 바탕으로 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생활과 정치 생활의 전반적인 모든 현상을 바탕으로 이 같은 요구를 정부에 제기하는 것”(82)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계급의 문제에 개입하여야만 하며, 심지어는 ‘자유주의적’ 또는 ‘민주주의적’ 문제에도 노동자 계급 정치적 관점에서 개입해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레닌을 인용하자면, “노동자들이 전횡과 탄압, 폭력과 권력 남용이 행해지고 있는―그것이 어느 계급에 관계된 것이든―각종의 모든 사례들에 대응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다면……노동자들이 구체적인, 게다가 항상 절박한 (당면한) 정치적 사건과 사례들을 통해 다른 사회 계급들의 지적·도덕적·정치적 생활이 표출되는 모든 현상에 걸쳐 그것들 각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계급, 계층, 집단의 생활과 활동의 모든 측면에 대해 유물론적 분석과 유물론적 평가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계급의식이 될 수 없다”(91). 심지어는 노동자 계급에게만 시야를 제한하려는 경제주의적 입장은 반동적이라고 쓰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주의, 관찰력, 의식을 배타적으로,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우선적으로 노동자 계급에게로 돌리려는 자는 사회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의 자기 인식은…… 현대 사회의 모든 계급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충분하고도 명료한 이해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제 투쟁이 대중을 정치 운동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널리 적용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우리 ‘경제주의자들’의 설교는 그 실천적 중요성으로 볼 때 극히 유해하며, 극히 반동적이다”(91). 농노제 폐지, 지방 자치제 도입 요구, 자유주의자에 대한 탄압의 폭로 등 자유주의적 요구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개하여야 하는데, 이와 같은 자유주의적인 내용의 투쟁들을 하는 것을 “자유주의와 타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사회 민주주의 당을 ‘고용주와 정부에 대한 경제 투쟁’으로 끌어가고 있으며, 또한 ‘자유주의적인’ 문제에 매번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사회 민주주의적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하는 임무를 포기하고 자유주의 앞에 굴복하고 있기 때문”(123)이라는 것이다. 레닌은 나아가서 ‘모든’ 주민 계급 속으로 나아가는 과제야 말로 계급적 관점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노동조합주의 정치를 노동자 계급정치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 핵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07-114).
실제로 개별 사업장에서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재생산, 즉 자본관계의 재생산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재생산을 전제로 하고 있고,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재생산은 전 사회적 수준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지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개별 사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다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위한 투쟁은 물론 그것이 이윤과 자본의 축적조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서 자본을 약화시키는 의미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서는 자본주의적 관계 자체를 지양할 수 없다. 아무리 삶의 질이 상승한다고 해도 고작해야 ‘황금의 족쇄’를 차고 있는 노예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 정치 역시 사회의 모든 계급에 대해 또한 모든 사안에 대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경제주의에 대한 오해와 함께 레닌의 ‘비판의 자유’에 대한 부분도 흔히 레닌주의의 이름으로 비판을 억압할 때 잘못 이용되고 있다. 레닌은 당시 베른슈타인류의 기회주의자들이 ‘비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경향과 논쟁하였다. 레닌에 따르면 “베른슈타인은 매우 정연하게 합의된 ‘새로운’ 논거와 사고들로 완전 무장하여 이 같은 정치적 요구를 내세웠다. 사회주의에 과학적 근거를 부여하고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사회주의의 필연성과 불가피성을 입증할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점증하는 빈곤, 프롤레타리아트화, 자본주의적 모순의 심화 등의 사실은 부정되었다……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사상은……계급투쟁 이론은……부정되었다”(8). 요컨대 레닌은 여기에서 비판의 자유라는 겉포장 속에 숨어 있는 기회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비판 자체를 막는 것, 즉 하나의 올바른 입장이 전제되고, 그에 대한 비판을 ‘자유주의자’로 몰아가는 식으로 비판 자체를 부정하고 풍부한 토론을 막을 경우에 레닌이 원용되는 것은 레닌의 원래 의도가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맑스는 애초에 ‘비판적(kritisch)’이며 ‘혁명적(revolutionär)’일 것을 요구했다. ‘혁명적’ 맑스주의를 표방하던 당대의 이론가들은 각기 노동자의 투쟁을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단지 착취의 조건을 약간 개선하는 데에서 그치게 하려는 경향들, 즉 라쌀레나 베른슈타인, 카우츠키류의 개량주의와 투쟁하였으며, 이러한 점에서는 레닌도 맑스 엥겔스, 그리고 그람시는 말할 것도 없고, 로자를 포함한 대다수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혁명적 맑스주의의 큰 방향성을 공유한다면, 그리고 오직 하나의 올바른 입장이 완전한 형태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급적 정치적이고 전사회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지양을 위한 노동자 운동의 전략 전술과 관련된 이견은 충분히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토론되어야 한다. 레닌 스스로도 제국주의론, 국가와 혁명,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의 저작들을 통해 개량주의/기회주의자들에게는 적대적이었으나, 논쟁 관계에 있었던 당대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인 로자와 그람시, 나아가서는 멘셰비키였던 트로츠키와도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레닌을 절대화하고 독점한 후, 하나의 올바른 입장을 가지고 더 이상의 논의에 빗장을 지른 채 비판을 하지 못하게 하는 해석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중과 정치적 지도에 관해서도 레닌은 흔히 거꾸로 해석되고 있다. 올바른 정치적 지도와 이를 따르지 못하는 어리석고 환멸을 느끼게 하는 대중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거꾸로 모순이 첨예하게 발전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터져 나오는 대중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를 따라 잡지 못하는 운동의 지도부가 오히려 문제였다. 요컨대 대중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지도부가 바로 레닌의 고민의 대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에 따르면 “대중이 자생적으로 고양되면 될 수록, 운동이 더욱 널리 퍼져 나가면 나갈수록,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정치적, 조직적 활동에서의 더 많은 의식성에 대한 요구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급속히 커진다.”(68). 그러나 “혁명가들은 ‘이론’에서도, 활동에서도 이러한 대중의 고양에 뒤처졌으며, 전체 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중단되지 않고 계승되는 조직을 건설하지 못했다”(68)는 것이다. 요컨대, “대중의 혁명적 활동성을 과소평가”(102)한 채 “대중의 자생적 고양에 미치지 못하는 지도자들(‘이데올로그들’, 혁명가들,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후진성”(137)이야말로 레닌의 비판 대상이었다. 레닌이 대중의 자생성을 넘어서는 혁명적 의식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대중의 자생성을 무시한다든지, 잘못된 의식성을 정당화시키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 레닌주의 또는 정통의 이름으로 레닌의 의식성과 정치적 지도 구심에 대한 강조가 대중의 자생적 운동을 비판한 것으로 독해되어 오히려 대중 운동을 단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레닌이 마치 지도 중심과 의식성만을 강조하면서 대중의 자생성을 무시하는 듯이 해석되면서, 대중을 강조하는 입장을 대중 추수주의로 비난할 때 레닌의 경구가 활용되어온 것이다. 자신들이 지도 중심을 자처하면서 경제주의를 뛰어 넘지 못한 의식성을 가지고, “후위의 이론과 실천에다 ‘전위’라는 이름표를 달아매는 것”(117)만으로 오히려 대중운동의 혁명적 역동성을 재단할 때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빚을 수 있다. (*그럼에도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레닌에게서 뜨거운 감자인,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의식성의 문제. 논자는 이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논란거리이다. 당대 러시아의 대중과 현대 남한의 대중 간의 격차. '대중'이란 무엇인가 등등...)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의 경제주의 비판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제적인 것을 넘어서 계급적, 정치적인 운동이 요구된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레닌의 경제주의 비판은 예나 지금이나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레닌의 경우에 짜르의 ‘전제주의적 폭압 정치의 종식’이라는 정치적인 과제를 전면에 제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면에서는 러시아적 특수성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 스스로 여러 곳에서 노동운동이 성숙하였고 민주주의가 발전한 독일과 같은 나라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레닌의 테제들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전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러시아의 특수성 속에서 레닌의 테제를 이해하는 사적 유물론적인 독해는 자생성/의식성, 나아가서는 대중/정치적 지도와 관련된 논의로 연장될 수 있다. 경제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관계와 관련된 문제라면 자생성/의식성의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이고, 대중/정치적 지도의 문제는 조직론적인 문제이지만 경제주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관계 속에 있다.
레닌과 논쟁 관계에 있었던 당대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입장들 역시 우리는 그들이 활동하던 각 나라의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람시는 시민사회에서의 헤게모니적인 정치 전략을 강조하면서 서구 유럽의 특수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람시의 구상은 ‘현대의 군주’로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정치정당의 의식적인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는 달리 당시 파시즘이 정치적인 억압 보다는 시민사회 영역에서 문화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 전략을 구사하면서 동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을 보면서, 이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서 기동전보다는 진지전을 강조하는 시민사회적인 헤게모니 전략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로자는 레닌이나 그람시가 정치정당의 지도, 즉 의식성을 강조한 것과 달리 대중 투쟁의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비대하게 성장하여 관료화된 노동자 정당이 오히려 대중 투쟁의 역동성을 억누르고, 정치적 지도의 이름 아래 조율하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 주가 되고 있다. 잘못된 정치적 지도에 의해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진출이 억압되는 것을 돌파하기 위해 정치적 대중 파업이 주된 전술로서 제기된다. 이들은 각기 나라마다 형태를 달리 하며 존재하였던 노동조합주의 및 경제주의/기회주의와의 투쟁을 전개하면서,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노동자 운동과 자본주의의 지양을 위한 전략 전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올바른 전략 전술이 어떤 것인지를 논하기에 앞서, 여기서는 일단 사적 유물론적인 독해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서 그치고자 한다. 그러할 때, 그람시안, 정통 레닌주의, 로자주의 등 하나의 입장이 절대화되면서 다른 입장들을 적대시하는 식의 비생산적인 논쟁은 불식되고, 각각의 입장들은 새로운 전략 전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풍부한 재료로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의 문제의식을 러시아적 특수성 속에서 독해하여 개량주의 비판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적용하려고 한다면, 최소한 변화된 지형 속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가 처한 현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 전술을 발전시켜내지 못하고, 개량주의에 대한 비판이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끝날 때 개량주의 비판은 현실성을 상실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민주화가 진행된 이후 변화된 지형 속에서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레닌의 정치적 쟁점에 대한 개입은 전제 군주인 짜르의 폭압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레닌 스스로 서구와 달리 의회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하고 언론의 자유가 없으며 전국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의 활동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러시아에서는 비밀리에 움직이는 철의 조직이 전국적 정치 신문을 매개로 비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비합법활동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발전한 조건 아래에서는 다른 전술이 구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합법 공간에서의 공개적인 활동과 함께 선거주의 또는 기회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선거에 대한 대응이 가능한 전술이 제출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가 위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역시 항상 위기적이며 다시 파시즘적인 정치가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부르주아 정치의 부드러운 외피 속에는 고양이 발톱 같은 폭력성이 항시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네오콘, 네오 나찌, 신보수 우익의 등장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주의가 군사화하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민주화에 따른 새로운 전략 전술의 개발뿐만 아니라 폭압적인 형태의 정치에 대한 대비 역시 언제라도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의 지구화와 신자유주의 지배전략의 세계화에 따라 개별 국가를 막론하고 노동자 민중의 쥐어짜기가 진행되고, 노동시장 유연화의 결과 비정규직이 증대되는 지금, 경제주의의 문제를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것’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에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의 중요성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반대전선만이 강조되고, 정치적 전략의 부재 속에 여타의 정치적, 계급적 투쟁이 방기되는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전의 레닌주의자들이 경제주의를 잘못 해석하여 정치주의적 경향 속에 모든 경제투쟁을 부정하고 당물신주의에 빠졌었다면, 요즈음에는 거꾸로 노동자의 눈앞의 이해관계만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만을 강조하면서 여타의 정치적 사안에 대한 대응을 도외시하는 경제주의적 경향을 볼 수 있다. 경제주의는 정치주의의 반대물로서 두 가지 경우 모두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시기의 지구화는 전방위적이어서 노동만이 아니라 환경, 교육, 의료, 복지 등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이 맹목적인 자본 축적 욕구 아래 직접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지배전략 중의 하나에 불과해서 신자유주의 반대 그 자체 만으로서는 사회 안전망 확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자유주의적 해법, 또는 케인즈주의적 분배전략을 중심으로 한 사민주의적 해법으로 귀결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이 또 다른 하나의 자본의 지배 전략으로의 변화만을 끌어낼 뿐 자본 자체의 지양으로 발전해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우리가 교훈을 끌어낸다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반신자유주의 전선이 경제주의적 투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지양 전략 속에 배치되어 전사회적이고 지구적인 관점에서 정치적 계급적 투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계급 정치적 전망이 부재할 경우 결국 투쟁의 흐름은 경제주의적 투쟁을 넘어서지 못한 채, 정치적 맥락에서는 무능함을 보이거나 결국은 선거주의 정당에 귀의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의 한미 FTA 반대 투쟁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미 FTA는 지금의 형태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무역주의에 기초하여 노동 환경 규제 등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 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미국과 한국 둘 다의 초국적 자본의 이해만을 반영하고 있으며, 굴욕적이고 투명하지 않은 졸속 협상에도 불구하고 자본 측에서는 한미 FTA를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협상 과정에서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폭로는 의미가 있으며, 한미 FTA 반대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반자본적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미 FTA는 반대하면서 미국이 아닌 중국 또는 인도 등 우리나라가 불리하지 않은 나라들과의 자유무역 협정은 지지한다든지, 또는 자유무역을 반대하고 보호주의로 가는 것이 해법은 아닐 것이다. 한미 FTA는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세계지배전략의 경제적 측면으로서,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는 평택으로의 미군기지 확장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서 우리나라는 미국 패권주의의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전진기지이다. 한편 NAFTA 10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NAFTA의 수혜자는 각국의 (그중에서도 미국의) 자본이며, 피해자는 미국, 멕시코, 캐나다의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한미 FTA 반대는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정치 군사적 측면까지 고려한 전방위적인 대응을 요구하며, 지구적인 수준에서의 연대를 바탕으로 한 자본/제국주의 모순의 지양이라는 관점에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조금은 논자의 입장에 의해 선별된, 특히 대중의 문제에 있어서, 글이고, FTA문제에 대해서는 뻔한 대답만이 도출되었다. 구체적인 '사회구성체'에 대한 분석이 다시 시작되거나, 다른 용어로라도, 현재 남한사회, 나아가 세계사회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없으면 공허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만 도출될 뿐이다... 그래도 레닌에 대해 개설적으로 읽기에는 괜찮은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