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의 목표는 사회 현실의 생득적 변증법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은 종종 광범위하게 역사 내부의 자발적, 적극적 발전 경향 혹은 추세를 암시해 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거듭해서 사회적 발전 경향에 관한 이러한 잠재적 인식을 그것의 노골적이고 교훈적인 경향을 들어 참여 예술 art engagee과 구별한다. 후자는 일관된 이데올로기적 입장으로부터 착안되었다.. 리얼리즘은 그 근거에 흐르는 특별히 예술적인 인식으로 시종일관되고 혹은 뒤범벅된 개념들로부터 무질서하게 발생하지만, 그 사건의 흐름은 잠재적으로 비교훈적으로 제공된다. 경향적인 예술이 획득되어야 할 적극적인 목표를 갖고 있는 반면, 리얼리즘은 대부분 집중적이고 적극적인 열망을 결여한 당대의 사회적 소외에 대한 강력히 반대입장을 취함으로써 생겨난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다. 즉 브레히트의 "콤뮌의 나날들"(Days of the Commune)처럼 부분적으로는 리얼리즘의 성향을 매우 강력히 띠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규정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역사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예술은 단 하나의 세계관과 단 하나의 청중반응을 강조하든가 아니면 청중으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견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불안정하고 다의적인 예술적 리얼리즘을 강조하든가, 이 두 방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스테판 모라브스키, 마르크스 엥겔스 문학예술론, 한울, 198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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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버지니아 엘리펀트

 

프레시안(07. 04. 18) 콜럼바인, 버지니아텍을 미리 보여주다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사건이 일어난지 8년만에, 이번에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교내 총기사건이라 불릴만한 사건이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났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 수만 33명. 게다가 범인은 한국계로 밝혀졌다. 도대체 이러한 비극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총기를 난사해 그 많은 사람을 죽일 행동을 한 것인가? 왜 다른 나라 총기 소유 허가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선 그토록 빈번한 것일까? 혹은, 20세 이상의 남자 성인이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 사격술을 훈련 받아야 하고 비공식적인 밀수 총기가 퍼져있다고 하는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서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100% 만족할 만한 답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답변을 주는 영화 두 편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고, 또 하나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이다. 두 영화 모두 둘 다 1999년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는 영화들로, 다큐멘터리인 <볼링 포 콜럼바인>은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계기로 총기난사 사건을 '부추기는' 미국의 사회 시스템을 분석하고, 극영화인 <엘리펀트>는 외롭고 상처입은 두 10대 소년의 일상을 건조하게 응시한다.

<엘리펀트>에서 구스 반 산트 감독은 분노와 외로움, 상처로 가득찬 두 소년의 황량한 내면과, 표면적으로는 남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이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우리는 여전히, <엘리펀트>에서 그 평화롭고 따사롭던 오후에 두 주인공이 친구들을 향해 총질을 시작하는 명시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상처입은 사람들이 모두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대지는 않는다.
  
마이클 무어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듯, 미국은 개인의 총기 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면서도 이에 대한 관리와 규제에는 매우 허술하며 총기 소지가 매우 쉽다. 물론 마이클 무어가 조롱했던 것처럼 은행에 계좌만 개설하면 사은품으로 총기를 주는 수준은 아니지만(이것은 총기 구입이 그만큼 쉽다는 마이클 무어식 비아냥일 뿐, 사실은 아니다.), 버지니아공대 사건의 범인 역시 학교 근처 총기상에서 신분증 세 개를 보이는 것만으로 아주 쉽게 범행 무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사용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하거나 신고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단순히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해서 그만큼 총기 난사 사건도 빈번히 일어나는 것일까? 역시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보장된 캐나다에서 연간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미국에 비하면 훨씬 적다. 마이클 무어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면서 공격이 최선의 방어임을 설파하는 시스템이라고 분석한다. 빈부의 격차가 크고 양극화된 사회 현상과 이로 인한 사회적 불만과 불안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약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복지와 이로 인한 최소한의 생활 안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국 외부의 적을 규정하고 적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재생산함으로써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는 것, 그리하여 미국이라는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 자체를 공포와 분노에 두고 있다는 것, 이른바 '공포로 통치하는 사회'라는 사실이 이러한 비극을 계속 발생케 한다는 것이다.


  
  .
분열되고 파편화된 세상이 문제

만약 이번 사건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우리는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심리적 개연성이 없다며 비판할 것이고, 혹자들은 하필 범인을 한국인으로 상정한 것에 대해 감독이 혹시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이것은 영화에 불과하다"며, 더욱이 "바다 건너 먼 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며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란 이성과 논리에 근거에 행동하려 하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우리와는 다른 매우 특수한 사람,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의지가 아니라 악마가 들려서, 혹은 귀신이 씌여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라는 등등 수많은 바깥의 이유들을 찾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일지 모르며 내 자신조차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신과 공포, 불안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좀더 공포를 느끼지만 그것이 '총기 난사' 사건인 경우,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남의 나라 현실이라 믿으며 애써 무관심한 척할 수도 있다. 사실 총기가 엄격히 금지된 한국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미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낯설고 두려운,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범인이 한국계로 밝혀지고 범행동기가 (누구나 평생 무수히 겪는) 여자친구와의 불화 때문인 듯하다는 잠정 수사결과가 전해지면서, 우리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총기난사 사고'에 무관심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두 번씩은 자신이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탈의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죄책감 한두 가지씩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탈이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범죄'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들은 분명히 있다. 이런 비극은 분명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고, 그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러한 풍요는 모두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며, 물질의 풍요로움이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고 힘든, 분절되고 파편화된 세상, 각종 통신수단은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여전히 (혹은 오히려 더욱 심화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세상을 견디어나가고 있다.
  
이 고통을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탓으로 돌릴 때, 그리고 타인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사물'로 여겨질 때, 그 사회는 위험 수위로 가까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건에 정말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한국사회를 포함해 전세계 거의 모든 사회가 이미 이런 위험 수위에 다달은 현대사회라는 점을 우리가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생명을 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주변에 널려 있어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런 비극은 몇번이고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비극을 보며 지나치게 범인을 동정할 필요도, 그럼에도 그저 정신나간 특정인의 소행으로만 돌리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으로 치부하고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먼 나라에서 벌어진 일일지라도 우리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김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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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한국 언론의 오버: 우리는 왜 우리를 미국의 식민지이며, 그 국민으로 정의하는가?

* 오마이뉴스(2007. 4. 19)  / "범인은 한국인"... 한국 언론의 '오버'

[오마이뉴스 김종배 기자]
 
▲ 17일 오후 2시(현지시각)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열린 총격사건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한 학생들.
ⓒ2007 오마이뉴스 안홍기
애도를 표하고 위로의 말을 전하는 건 의무다.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억울한 피해자다. 아무 이유도 없이 총탄을 맞아 절명하거나 부상에 신음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진심으로 보듬어 안는 건 의무이기 이전에 도리다. 마땅히 가져야 하는 측은지심이다.

그렇다고 오버하지는 말자. 유독 한국이 석고대죄할 일은 아니다. 총기난사사건을 저지른 장본인이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 전체가 죄인이라도 된 냥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릴 이유는 없다.

사건의 본질적인 원인은 미 총기보유정책

엄밀히 규정하자. 총기난사사건은 단순사건이다. 한 개인이 치정에 얽혀 저지른 '묻지마' 살인극이다. 조승희씨가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는지 안 했는지는 핵심문제가 아니다. 범행의 동기와 전개과정이 개인적이고 단순하다는 점, 이게 중요하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조씨는 여덟 살에 이민을 가 미국 교육과 문화에 편입된, 사실상의 미국 시민이라는 점을 놓칠 수 없다. 그래도 법률상으로는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하더라도 민족을 부각시킬 이유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누구라도 저지를 수 있는 사건이란 점을 주목해야 한다.
미국 헌법은 누구나 자유롭게 총기를 보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이 헌법 조항 때문에 미국 가정이나 개인이 보유한 총기가 2002년 기준으로 2억 5000만 정을 헤아린다. 이 2억 5000만 정의 총구가 언제 어디서 불을 뿜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사례는 수두룩하다.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사건만 있었던 게 아니다. 10대의 소년 소녀가 퇴학당했다는 이유로, 시험에 낙방했다는 이유로, 심지어 "월요일이 싫다"는 이유로 총기를 무차별 난사한 예도 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동양계든 유럽계든, 소년이든 성인이든 누구라도 총기를 난사할 가능성이 널려있는 게 미국 사회다.

미국도 이 점을 인정한다. <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미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할 가장 큰 위험으로 "마음만 먹으면 너무도 쉽게 무장할 수 있는 국내 살인자들"을 꼽았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다르다. 모든 한국 언론이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사건의 범인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톱뉴스로 뽑았다. 한국 교민사회가 보복을 당할까봐 떨고 있다는 소식, 사건이 한미 양국의 마찰요인이 될까봐 외교통상부가 긴장하고 있다는 소식도 상세히 전했다.

'한국계가 범인'... 헤드라인이 간과한 사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사건의 본질이 뭐든 일단 새로 밝혀진 사실이 충격적이다. 주요뉴스로 뽑는 건 당연하다. 이게 언론의 생리다. 교민의 안전을 살피는 것도 자연스럽다. 국적 언론의 의무이기도 하다.

문제는 균형감각이다. 사실의 표면에서 헤엄만 칠 게 아니라 잠수를 해서 바닥을 함께 봐야 한다. 이건 언론의 원리다. 그 뿐만이 아니다. 대단히 긴요하고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미국 사회에 논란이 불붙고 있다. 대선주자들이 제각각 총기규제 방안을 거론하고 나섰다. 응당 나올 법하고, 마땅히 나와야 하는 문제제기이지만 그 뒤가 걱정스럽다. 문제제기가 거세질수록 대응수위가 올라갈 수 있다.

미국 총기협회가 총기 자유소지를 제한하려는 시도를 번번이 무산시킨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험칙에 따르면 이번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미국 총기협회 입장에서 관건이 되는 건 여론이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로비를 한다 해도 대중의 관심을 다른 데 돌리지 않고선 수월하지가 않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물타기다. 칼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칼을 식칼이 아니라 흉기로 사용하는 사람이 무섭다는 주장을 인종주의에 얹으면 여론 물길을 돌릴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미국 사회에서 실제로 나타날 경우 한국은 어떻게 대처할 건가? 혹여 미 당국이 총기소유 논란을 피하고 미국 여론을 달래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다면 어떻게 대응할 건가? 그 때도 "같은 민족으로서 부끄럽다"를 되뇔 건가? 그건 아니다.

한국언론보다 이성적인 미국언론

ABC방송이 보도했다. "용의자가 한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다"고 했다.

아이러니라고 말해도 될까? 한국 언론보다 미국 언론이 더 냉정하게 진단하고 합리적인 대처를 주문하고 있다고 평해도 될까? 한국 언론의 보도태도는 '과공비례(過恭非禮)'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해도 될까?

한 미국 언론의 한 마디를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시사하는 바가 적잖은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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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의 정치사회학

* 한겨레(2007. 4. 18) “미국인은 한국책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한겨레]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참사로 미국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 더군다나 최악의 총기참사의 범인이 한국국적의 이민자인 재미동포 조승희임이 밝혀진 뒤 미국내 한국동포와 유학생들은 또 한번의 충격과 대혼돈에 빠졌다. 한국의 언론은 자국인이 최악의 총기참사의 범인으로 드러나자 대대적인 보도를 하고 있고, 미국의 매체들도 “범인은 한국인”이라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에 이민 가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한 1.5세 한국인이 기고를 보내왔다. 16살에 이민을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미국에서 졸업한 33살의 시드니 손 변호사는 이 기고에서 “이번 일은 한국인으로서 저지른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인이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일이 아니다”라며 “조씨에게 심어주지 못한 정체성, 주체성과 소속감에 미안해 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드니 손 변호사가 보내온 기고를 소개한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미국에 살고 있는 1.5세 한국인으로서 언론과 각종 매체에 올라 있는 기사 및 댓글을 보고 이 글을 씁니다. 우선 이번 사건은 안타깝고 슬픈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너무 민감해진 언론과 몇몇 여론은 저를 더욱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선 미국에선 언론 이외에는 가해자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에 대해 이슈화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시민들과 거주인들은 이 일이 한국정부에 또는 한국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일이 일어난 후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이 아시안계와 한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을 수도 있으나 그런 일로 한국인들이 창피하거나 수치심을 느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가해자의 국적 이슈화 없어…민감한 언론이 더 슬퍼

우린 세계 어느 곳에서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고 있는 데 이런 일이 우리가 어깨를 다시 움추리고 또 한국인임을 감춰야 하는 이유가 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마치 주인집에 얹혀 사는 객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국인은 마치 화장실도 안가고 화도 않내고 또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로만 인식이 되길 바라는 태도는 우리에 관한 인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의 우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막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과 한국인은 모든 문화권에 사회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다면성과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다채로운 인격의 집합체임을 세계가 인정할 때 우린 비로소 객이 아닌 한 주인으로서의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이상 수학에 능하고 또 고분고분한 아시아인들중 의 하나인 나라가 아닌 뛰어난 예술가와 운동선수뿐만 아닌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들도 존재하는 나라로 인식될 때 우린 비로소 세계와 동등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주인집에 얹혀 사는 객이라는 생각에서 비롯

또한 이 일로 인해 한국사람들과 한국 정부가 미안해 할 일도 사죄할 일도 없고 또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난 나라가 한국이라고 해서 또 영주권자라 해서 그가 저지른 행동이 우리에게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는 계기가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마치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체적으로 관할한다는 착각에 빠진 생각입니다. 그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번 사건은 한국정부도 또 한국인도 주동한 일이 아니라 단순히 개인이 개인적인 이유로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누구와도 의논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으며 또 한국정부와 한국인을 대표해서 이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나라간 일이 무슨 아이들의 소꼽장난인 것처럼 비화

그런데도 우린 이 일에 관해 정부적인 차원에서 사과를 해야 한다느니 또 국민 개개인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버젓이 언론에 옳은 말인양 유포되고 있습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일로 한미관계 와 FTA체결에 문제가 될 수 있지 않느냐는 소위 전문인들의 의견들입니다. 나라간의 일이 무슨 아이들의 소꼽장난인 것처럼 비유되고 비화되는 말들을 들으며 저는 큰 실망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일이 반대로 우리에게 일어났을 경우 정부에서 보복적인 차원에서 나라일을 결정할 수도 있음을 가정하는 것 같아 우리의 언론에서 모시고 있는 이런 소위 전문가분들의 자질과 인성이 의심스럽습니다.

미 장갑차 사건과 달라…미군이 공무중 일으킨 사고

이 일을 또 미군 장갑차 사건과 비유해 사죄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일은 아주 다른 상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미군장갑차 사건은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국을 대표하는 미군이 부주의로 공무집행 중 일으킨 사고입니다. 개인적으로 일으킨 사고가 아니라 미국의 공무집행 중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므로 당연히 미국정부와 미군은 정식으로 한국에 사과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조씨가 저지른 일들은 그의 개인으로서 삶과 결정에 의해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슬퍼하고 안타까워 해야 하는 이유는 정작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미안함이 아니라 그가 이런 결정에까지 이르게 한 사회적인 고립과 주체성에 대한 상실에 있어야 합니다.

외톨이로 선천적 정신분열증 있는 사람으로 간주

전 16살 때 가족의 결정으로 미국에 이민와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이젠 Korean-American 변호사로 살아가고 있는 33세 남성입니다. 그래서 전 조씨의 소식을 듣고 제 주변에 있는 많은 친구들과 동생들을 떠 올렸습니다. 미국과 한국언론에서는 “loner” 와 외톨이, 왕따라는 표현을 써가며 조씨가 혼자 고립된 생활을 즐기고 선천적 정신분열증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조씨가 저를 포함해 어린나이에 미국에 온 제 친구, 동생들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며 살아왔음을 알기에 더욱 가슴아프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미국인들 텃새나 차별 탓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이질감

제 주변에도 조씨와 같이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와 주체성과 소속감의 결핍으로 고뇌하고 방황하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대체적으로 자기가 주체적이면서도 사회에 소속되어 있길 바랍니다. 특히 어린 나이에는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을 경우 방황하고 또 고민하게 됩니다. 저 또한 한국인으로서 여기가 어색하고 또 소외감을 느끼며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꼭 미국인들의 텃세나 차별 탓이 아니라, 내가 완전한 한국인도, 또 미국인도 아니라는 자신에 대한 이질감에서 오는 번뇌입니다. 하지만 저는 주변사람들과 가족의 사랑과 관심으로 큰 방황 없이 살아왔습니다.

한인모임은 유학생이나 2세들이 주도…1.5세는 어색

그런데 한국언론에서는 그가 한인모임에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도하며 마치 한인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그토록 고립된 생활을 즐기는 비정상 적인 사람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름니다. 대학에 존재하는 한인모임들은 한국에서 온 한국 유학생들이 주도하는 모임이거나, 혹은 2세들이 주동해 만든 모임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정체성과 주체성이 결핍된 1.5세들은 이런 모임에서도 어색하게 느끼며 또 관심 밖의 인물로 취급받기 쉽습니다. 그러니 조씨도 이런 모임에 참여하는 것 차체가 어색하고 불편했을 겁니다. 미국인들은 그를 한국인으로, 또 한국인들은 그를 미국인으로 보는 눈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이질감으로 혼자 있게 되고, 또 그러면서도 누군가에 관심을 바랬을 겁니다. 그러다 관심을 보이는 한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고 또 그로 인해 배신감을 느꼈을 때 세상에 대한 분노와 상실감에 빠졌을 겁니다.

혼자이다 관심 보이는 사람에 집착…배신감 느끼면 세상에 분노

또 미국에 일찍 이민 오신 대부분의 가족이 그렇듯 부모님들은 생계에 전념하시느라 어린아이들에게 특별히 교감과 정체성에 대한 토론을 나눌 기회가 없는 게 사실입니다. 또 어린 아이들과 그런 대화를 나누는 방법이 막막하신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대부분 영어만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더더욱 이런 대화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를 어렵게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고립되길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색함 때문에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되는 것입니다. 조씨가 행한 일은 정말 끔직하고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씨에게 손가락질하고 수치스러워 하기 전에 우리가 조씨에게 심어주지 못한 정체성, 주체성과 소속감에 미안해 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조씨 손가락질 말고 정체성과 주체성 못 심어준 것 반성해야

한국인은 긍지와 자주성, 민족성이 강한 민족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너무 성공과 목적에 집착하여 그것을 이룬 이들만이 우리의 민족이며 대표라 생각합니다. 또 미국에서 한국인들은 마치 얹혀 사는 것처럼, 오직 ‘주류사회’를 외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 살든 우리가 사회의 일부로 존재하는 곳에는 우리도 주류라는 것을 알고 또 우리의 후손들에게 인식시켜야 합니다. 이젠 미국에 살고있는 동포들은 객지 생활을 하는 손님이 아니라 미국의 주인이며 주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조씨가 저지른 사건은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미국인들과 미국정부에게 사과해야 하고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의 한국인들에게 심어주어야 할 주체성, 소속감, 정체성에 관한 큰 숙제를 남긴 일로 보아야 합니다.

시드니 손(Sidney S. 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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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기초적 맑스이론에 대한 소고(2)

 

제1부 맑스주의 이론 개설


1.철 학

  맑스주의 철학은 유물론, 변증법, 유물사관을 통일적 체계로서 포괄하는 것이며, 자연․사회․인식에서 운동과 발전을 비로소 수미일관한 유물론적 세계관에 의해 이론적으로 기초 짓는 것이다. 현재와의 관련에서 말한다면 현대사회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는 계급사회인 이상, 계급간의 이데올로기투쟁은 피할 수 없으며, 철학적으로는 특히 무엇보다도 그 세계관에서 유물론 혹은 관념론이라는 명료한 대립이 되어 나타난다.


(1)유물론

  유물론은 고대 그리스철학 이래 존재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 최고(最高)의 발전형태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검토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2천년에 걸친 철학의 발전사를 관통하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최고의 산물이다. 특히 시인 하이네가 말한 것처럼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되는 독일철학 혁명의 성과를 남김없이 흡수한 것으로, 직접적으로는 독일관념론 철학의 집대성자 헤겔 및 중간자 역할을 한 포이어바흐로부터 각각의 변증법과 유물론을 비판적으로 섭취하고, 당대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적용한 것에 의해 성립한 것이 맑스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맑스주의 철학이 형성되고 확립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서이며,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의 부정적 상태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 되었다.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하여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철학, 특히 근세철학의 큰 근본문제는 사고와 존재와의 관계문제이다.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하는가에 따라서 철학자들은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했다. 자연에 대한 정신의 본원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결국 어떤 종류의 세계창조를 인정한 사람들은 관념론의 진영으로, 자연을 본원적인 것으로 본 사람들은 유물론의 여러 학파에 속한다”(『포이어바흐론』)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즉 정신(의식)의 발생 이전에 이 지구라고 하는 자연(물질)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지금은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주관적 관념론자는 세계가 자신의 주관, 감각에 의해 구성된다고 하고, 객관적 관념론자는 세계는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절대정신이 외화(外化)한 것이라고 하며, 신비주의자, 종교인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여 그들이 관념론의 진영을 형성한다.


  유물론은 이것에 대해 자연의 근원성을 자연과학의 발전에 의해 직접적으로 확증했다. 물질과 의식의 이 대립은 철학의 근본문제인 세계관의 대립으로서 절대적이지만, 이것은 물질이든 의식이든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립에서 벗어나면 의식도 또한 물질에 의존하고 양자의 대립은 이 한도에서 상대적이다. 물질이 제1차적이라는 것은 유물론에 대한 편견에서 볼 수 있는 물질이 중요하며 정신이 하찮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물질이 본원적인 것에 의해 세계의 통일성도 또한 그 근거를 물질에서 발견하고 있다.


   “세계의 현실 통일은 그것의 물질성에 있다. 그리고 이 물질성은 두 세 개의 기이한 문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학과 자연과학의 아주 긴 발전에 의해 증명될 뿐이다”(엥겔스, 『반듀링론』)


  세계의 통일성을 어떤 정신이나 신에 귀착시키는 관념론철학과는 달리 유물론철학에 의해 비로소 자연, 사회, 인식의 대상에 유기적 연관과 현실적 기반이 부여된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뇌수라는 물질 자체가 아니며 물질의 최고형태로서의 뇌수의 작용인 것이며, 관념이라는 것도 타고나면서 갖추어진 것이 아닌 자연, 사회의 객관적 대상이 인간에 의해 과학, 산업, 사회적 실천을 통해 인간의 의식에 반영되는 것이라는 것, 의식의 심화와 관념의 발달도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삼라만상이라고 하는 이 세계의 통일은 확실히 물질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면 물질이란 무엇인가. 유물론의 물질관념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레닌에 의해 가장 완전하게 정의되었다.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부여된 것으로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면서 우리의 감각에 의해 모사되고 촬영되며 반영된 객관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유물론과 경험 비판론』)


  유물론의 원칙을 정리해 보자. 첫째, 물질이란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라는 것에 의해 관념을 과장하는 주관적 관념론과 대립한다. 둘째, 물질이 감각을 통해서 부여되는 것에 의해 이성만을 중시하는 객관적 관념론에 대립한다. 셋째, 물질이 감각에 의해 모사되는 것에 의해 인식의 불가능성을 설파하는 불가지론에 대립한다.


 특히 세 번째 원리의 반영모사론(反映模写論)은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불가지론자(흄, 칸트) 또는 현실의 합리적 인식으로 진전하지 않으려는 니힐리즘, 실존주의 철학을 비판하는 측면에서는 중요한 것이 된다. 엥겔스는 불가지론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천, 즉 실험과 산업”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면 붉은 풀의 색소 아리자닌을 들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금은 이미 자연에서 구하지 않고 코르타르로부터 훨씬 싸고 간단하게 제조한다. 아리자닌이라는 물자체는 우리에 대하여 물이 되었다”(『포이어바흐론』)


 인식의 원동력은 실천이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산업이 진전하는 것에 의해 미지의 분야는 우리의 공유인식이 된다. 지금은 지구 이외의 다른 천체에 대해서도 인식은 확대되고 있다. 인식이 무한하게 확대되고 완전하게 되어가는 것은 절대적 진리이며 그 인식이 시대의 제약을 받는 것에 의해 그것은 상대적 진리인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레닌의 물질에 대한 인식론적 범주는 물질의 여러 가지의 구조, 성격을 규정하는 자연과학적 범주와는 별개의 것이다. 물질의 자연과학적 카테고리는 과학의 진보에 수반하는 인식의 심화에 의해 점차 다면적이고 고도의 것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물질은 이런 것이라고 하는 인식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물질이 발견될 때마다 ‘물질은 소멸했다’고 하는 마흐주의자가 물질의 철학적 개념과 자연과학적 개념을 구별하지 않고 혼동한 것을 보아도 이 구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음으로 물질의 존재양식과 속성에 대해서인데 물질은 어떤 특정의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며 끊임없는 자기운동의 과정이다. 유물론의 물질관은 형이상학과 같은 절대적이고 도식적인 고정관념 및 주관적 관념과 같은 자의적이고 신비적 관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듀링은 공간과 시간을, 운동과 물질을 형이상학적으로 잘라내고 절대적인 항상 불변의 상태에 있는 신비적인 세계 매개물질을 고안하는 것에 의해 물질의 변증법적 운동을 부정했다. 엥겔스는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총괄하고 있다.

 

   “공간과 시간은 모든 존재의 기본형식으로 시간의 밖에 있는 존재라는 것은 공간의 밖에 있는 존재라는 것과 같은 것으로 대단히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운동은 물질의 존재양태이다. 운동이 없는 물질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물질이 없는 운동이 생각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운동은 물질 자체와 같은 것으로 창조할 수도 소멸할 수도 없는 것이다” (『반듀링론』)


  마지막으로 유물론의 역사를 보자. 1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 즉 프랑스유물론은 확실히 변증법적 발전관의 결여 등 기계적이었지만, 자연과학을 중시하고 실증적 견지에서 물질의 구명을 향한 위대한 성과를 남겼다. 그런데 19세기의 속류 유물론은 그 이름대로, 예를 들면 의식을 뇌수의 분비물로서 생리학적으로 파악하려 하여, 유물론을 비속화한 수준 이하의 유물론이었다. 19세기에 활약한 헤겔좌파인 포이어바흐가 ‘하반신은 유물론자, 상반신은 관념론자였다’고 말한 것도 포이어바흐 자신의 결함(사적 유물론에 그쳤다) 뿐만 아니라, 당시 뒤처진 독일사회의 제약과 당시의 속류 유물론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유물론을 변증법적으로 기초짓고 자연뿐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물질대사에 의존하는 인간사회 및 그 반영으로서의 의식에 적용한 것이 새로운 유물론, 맑스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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