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늘빵 > 학문과 인생의 성취(김우창)

2007. 4. 26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4251747261&code=990311

[시대의 흐름에 서서] 학문과 인생의 성취
입력: 2007년 04월 25일 17:47:26

지난 16일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며, 우리는 사람 안에 숨어 있는 어둠의 심연에 전율을 느낀다. 그러나 희생자의 가족들이 살인자와 그 가족에게까지 슬픔의 뜻을 전한다는 보도는 이 심연 위로 걸쳐 놓는 사랑과 관용의 다리가 튼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일과는 별도로, 조승희군의 배경으로서 보도된 버지니아주 한국 교포들의 성실한 삶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이민을 모범 이민자라고 하는 평가를 다시 확인해 준다. 이들은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이민자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들의 명문 대학 집념은 가장 한국인적인 특징인 것 같다. 그곳에도 학원이 번창하고, 교포신문에는 소위 아이비대학 합격생들의 명단이 발표된다고 한다. 조군의 누나도 이 명단에 올랐었지만, 조군은 거기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 든다.

한국인이 전체적으로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교육-특히 명문대 입학에 집착하는 의도가, 학문을 닦음으로써 뜻있는 삶, 이웃에 봉사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한다는 교육의 참 목적 때문만은 아니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지적 능력의 계발을 삶의 한 중요한 부분으로 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사건을 그것에 관련시키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보도된 이야기들은 명문대 숭배가 성장하는 청소년의 마음에 지나친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승희군이 크고 허황한 것에 부쳐 자기를 정당화하려 한 것은 분명하다.

-명문대가 곧 성공은 아니건만-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보다 나은 삶의 길이 공부의 관문을 경유해야 한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잠깐만 돌아보면 인생의 성취가 명문 대학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것은 인생의 성취가 학문의 성취와 일치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최근 나는 나의 글들에서 언급한 유명한 학자들이 순탄한 공부 길을 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지난 번 이 칼럼에서 언급한 보드리야르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져 명문 앙리 4세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프랑스 최고의 명문 고등사법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는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도 짓고 미장일도 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해, 소르본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독문학 강사로서 직업 지식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길도 똑바른 하나의 길은 아니어서, 그는 다시 사회학으로 학위를 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온 것은 사회철학의 저술들이었다.

몇 달 전 이 칼럼에서 언급한 일이 있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학교와 학문의 길은 참으로 기구하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담배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공부를 시작했지만, 공부를 중단하고 2년 간 군에서 복무했다. 제대 후 그는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본격적인 공부는 6년 간 우체국에 재직하는 동안 (공부를 위하여 휴직도 해가면서) 파리대학에서 수학, 화학, 물리학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 공부도 1차 대전으로 중단되고 그는 3년을 넘게 군에 복무했다.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한 후 그는 고향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다가, 38살에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마흔 여섯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디종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쉰여섯에 소르본의 중요한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의 학문은 여러 일들에 종사하면서, 반은 자습으로 이룩해낸 업적이다. 그의 전공도 수학, 화학, 물리학에서 과학 철학과 과학사로 옮겨 갔다. 가장 중요한 저작들은 만년의 시적 상상력에 관한 연구에 관한 것이다.

얼마 전에 글을 한 편 쓰면서 참고한 저자에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있다. 대학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학문적 성취와 인정에 이르는 과정은 지극히 험난한 것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1차 대전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 고향 브레슬라우의 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철학, 심리학, 의학이었으나 의학 공부는 예비시험 합격 후 그만두었다. 브레슬라우대 재학 중에는 독일 대학의 관습에 따라 하이델베르크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도 공부했다. 우리의 학부과정에 해당하는 부분은 무사히 마쳤다고 하겠으나, 박사학위 공부와 취직은 참으로 많은 곡절을 거쳐야 했다. 대학 입학 5년째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그는 학업을 중단하교 아버지가 운영하던 철물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 2년 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수자격 획득을 위한 하빌리타치온은 결국 제대로 끝내지를 못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사회학자 알프레트 베버의 제자가 되었다가 다시 6년 후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칼 만하임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3년 후 논문을 완성하고 학위 취득 직전, 나치정권이 대학 사회과학연구소를 폐쇄하는 바람에 그것은 허사가 되고, 그는 유태인의 박해를 피해 1925년 파리로,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는 런던 경제학교에 와있던 만하임 교수의 조교가 되었다. 이 기간 중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그도 그의 독일 국적 때문에 8개월간 영국에서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954년 57세의 나이에야 레스터 대학에 정착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69년 ‘문명화 과정’이 영어로 출판된 다음이었다. 원저는 하빌리타치온의 논문에 기초한 것으로서 1939년에 스위스에서 출판된 것이었다.

-삶의 길에 대한 관념의 전환을-

이러한 사례들은 학문의 길이 명문을 지나서 탄탄대로를 가는 일만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그러한 큰 길을 가지 않고도 그들이 생각하는 학문과 삶의 길을 갔다. 그들의 많은 곡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삶과 학문에 대한 물음을 자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장해물이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삶의 굽이에서 물음이 그들을 학문이 아니라 다른 길로 이끄는 것이었더라면, 그들은 그 쪽으로 가고 또 그에 대하여 별 후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주는 영광의 훈장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물음이 중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학문이란 바로 물음으로써 인생을 거쳐 간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학문과 삶의 역정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사회가 공부하고 쉬고 일하고 다시 공부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사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번만 그리고 한 곳으로만 가는 기차를 놓치면 다시는 기차를 탈수 없게 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좋은 사회란, 여러 시간에 여러 길로 가는 기차가 있고 어디로 가는 기차나 큰 고생이 되지 않은 마련을 가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몇 년 간 대학 입시 논의가 계속 있었다. 한 때의 우열 경쟁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좋은 일일까? 대학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문제에서도 거창하게 그리고 한 달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은 갈래로 일들을 풀어나가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여기에서 하려는 말과 같은 뜻에서 한 말은 아니지만,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지적 역정을, “역사라는 초월적 세계에서 일상적 삶이라는 내재적 차원으로 하강한 것”이라는 말로 설명한 일이 있다. 우리가 필요한 전환도 이러한 것일지 모른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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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생각의 탄생

* 한겨레(2007. 4. 27)  / ‘머릿속 실험실’ 상상력이 세상 창조
테네시 윌리엄스, 레닌, 아인슈타인…
모든 창조자들은 놀라운 상상력의 소유자
형상화·감정이입 등 13가지 생각도구로
독창적인 생각의 불꽃 발화하는 순간 포착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생각의 탄생> 로버트 루트번스타인·미셸 루트번스타인 지음.박종성 옮김. 에코의서재 펴냄·2만5000원
“나는 젊음의 막바지에 이른 한 여인을 떠올렸다. 그 여인은 창문 옆 의자에 고적하게 앉아 있다. 달빛이 흘러들어와 그 여인의 쓸쓸한 얼굴을 비춘다. 여인 옆에는 결혼할 남자가 서 있다.”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쓰기 전 이런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모든 것은 이 최초의 이미지에서 태어났다. 화려한 삶을 꿈꾸었지만 비참과 퇴락만 남은 여인 블랑슈는 자기가 만든 환상 세계 속으로 들어가 현실이 허락하지 않은 주목받는 삶을 산다. 이 환상 세계가 깨지면 현실의 삶도 깨질 것이다.

스위스에 망명중이던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1917년 러시아에서 ‘2월혁명’이 터지자 고국으로 돌아가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이 지침에서 그는 붕괴한 차르 체제 대신 들어선 ‘임시정부’를 거부하고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 같은 온건파 사회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레닌을 따르던 볼셰비키도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던 터였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사회발전 법칙을 신봉하던 이 혁명가들은 러시아가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 있으며 자본주의 발전을 거쳐 사회주의에 이르러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레닌당’안에서조차 혼자였다. 그는 열정과 확신을 품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했고 여섯 달 뒤 혁명권력을 거머쥐었다. 남들이 역사법칙에 매달리는 동안 그는 혁명을 창조했다.

느낀 상상 직관을 ‘학습’하라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사고실험’의 대가였다. 사고실험이란 ‘어떤 물리학적인 상황을 구체적인 형체가 있는 것처럼 보고 느끼고 조작하고 관찰하되, 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상상 속에서 자신을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광자’(빛알갱이)라고 생각했다. 광자인 그가 보고 느낀 것을 원자료로 삼아 그는 새로운 물리학 원리를 찾아냈다. 복잡한 수식과 논리가 동원됐을 것 같지만 그에게 수학공식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는 머릿속 실험실에서 먼저 통찰했고, 후에 그것을 수식으로 설명했을 뿐이다. 자신을 광자로 만들어낼 정도로 강력한 상상력이야말로 이 탁월한 물리학자가 꽃피운 독창성의 바탕이었다. 상상력은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만큼이나 과학자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의 두뇌는 증명한다.

과학자든 혁명가든 예술가든 모든 뛰어난 창조자는 보통 사람은 따라잡기 어려운 놀라운 상상력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의 사고는 특별한 데가 있다. 계시와도 같은 통찰이 난데없는 복병처럼 머리를 급습하기도 하고, 오랜 생각 끝에 하나의 그림이 새벽 지평선의 태양처럼 천천히 떠오르기도 한다. 미국의 생리학자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역사학자 미셸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함께 쓴 <생각의 탄생>은 창조의 순간을 포착해 그 비밀을 알려주려는 책이다. 두 사람이 주목하는 것은 논리나 공식이나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느낌, 상상, 직관이다. 이것들을 찬찬히 살피면 독창적인 생각의 불꽃이 발화하는 순간을 간파할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창조의 계기와 과정을 이해하면 그 능력을 학습을 통해 단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들은 가정한다.

» 몸의 기하학적 마술사라고 불리는 필로볼러스 현대무용단. 정형화된 틀에 갇히지 않고 인체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포착한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사진 에코의서재 제공
학문간 장벽 넘어 ‘통합사고’

이 책은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연장으로 쓰는 ‘생각의 도구’가 있다고 말한다. 지은이들은 ‘생각의 도구’를 유형별로 나눠 모두 열세 가지를 제시한다.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갑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이 그것들이다. 말하자면 이것들은 상상력을 구성하는 여러 측면들이다. 지은이들은 과학자, 수학자, 예술가, 사상가들을 끌어들여 이 측면들을 차례로 찬찬히 살핀다. 예를 들어, 형상화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형상화와 관련된 소설가 도로시 캔필드 피셔의 고백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어떤 장면을 강렬한 이미지로 만들어낸다. 만일 그 장면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이미지로 형상화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감정이입’은 단순히 감정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타자가 돼 보는 것을 말한다. “문제 속으로 들어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야말로 감정이입이다. 그 문제가 사람일수도 있지만 동물일수도 있다. 배우는 극중 인물 속으로 들어가 그 인물이 돼 인생을 자신의 인생으로 만들어야 한다. 소설가는 소설 안에 단순히 인물을 배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을 삶을 그대로 반복해 살아야 한다. 동물학자 제인 구달은 침팬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침팬지의 삶을 산 사람이다. 또다른 동물학자 데스먼드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동물을 연구할 때마다 그 동물이 됐다. 그 동물처럼 생각하고 또 느끼려 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문제는 곧 내 문제가 됐다.” 심지어 식물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학자도 있다. 옥수수를 연구한 유전학자 베버리 매클린턱은 이렇게 말한다. “옥수수를 연구할 때 나는 그것들의 외부에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안에서 그 체계의 일부로 존재했다. 나는 염색체 내부도 볼 수 있었다.”

이 책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통합적 사고’다. 오늘날의 교육이 학문 간 장벽에 따라 나뉘어 파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창조적 사고의 발육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수학자가 오직 수식 안에서만 생각하고 음악가가 음표 안에서만 생각하고 소설가가 단어 안에서만 생각한다면 진정한 창조는 있을 수 없다. 프랑스 물리학자 아르망 트루소의 말은 이 책의 요약이라고 할 만하다. “모든 과학은 예술에 닿아 있다. 모든 예술에는 과학적 측면이 있다.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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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만규는 왜 폭력에 빠졌는가

매향리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평화마을 추진하던 그가 인질범이 된 까닭은
 

▣ 화성= 남종영 기자
▣ 사진 박승화 기자
▣ 사진 류우종 기자

 

대추리 전에 매향리가 있었다. 대추리 싸움은 패배로 끝났지만, 매향리 싸움은 승리로 끝났다. 미군 폭격기들은 매향리 갯벌에 서 있는 농섬에 로켓포를 쏟아부었고, 기총 사격을 했다. 포탄은 때로 가정집 지붕 위로 날아들었고, 갯벌 일을 하는 주민은 부상당했다.

전만규(51)씨는 매향리 싸움을 승리로 이끈 당사자다. 그가 1988년부터 벌인 싸움 끝에 2005년 8월 미군 폭격장이 결국 폐쇄됐기 때문이다. 대법원도 2004년 국가가 매향리 주민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 느닷없이 터진 전만규씨 사건은 매향리의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전씨에게는 폭력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매향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매향리 미군 폭격장 폐쇄 주민대책위원장’인 전만규씨는 ‘매향리 평화마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새로 달았다. 매향리 평화마을은 폭격장 폐쇄 투쟁을 기억하는 기념관을 짓는 등 매향리를 관광과 생태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재탄생시킬 계획이다. 이제 매향리에 남은 건 평화를 일궈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가 4월12일 언론에 ‘아내가 경찰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아내를 위협한 인질범’으로 등장했다.

 

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범행 현장에 있었다. 평화마을을 취재하기 위해 이날 오후 2시께 박승화 기자와 매향리에 도착해, 미 공군의 옛 폭격장인 농섬에 함께 가려고 전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범행 현장

하지만 약속 시간이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몇 번의 전화 끝에 통화가 이뤄졌고, 그는 황급한 목소리로 “5분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20분이 지난 뒤, 그는 하얀색 옵티마 승용차를 끌고 나타났다. 그리고 “갯벌이 물에 잠겨 배를 타고 농섬에 가야 한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그는 경찰 출장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출항 허가를 해달라며 출장소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까지 모든 게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전씨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흉기를 꺼내 직원의 왼쪽 허벅지를 찔렀을 때,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이 변해 있었다.

 

그리고 인질극이 벌어졌다. 전씨는 자신의 아내 박미숙(가명)씨를 자동차에 태우고 데려왔다. 박씨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손은 플라스틱 노끈으로 묶여 있고 입은 청테이프로 감겨 있었다. 박씨의 얼굴은 세게 얻어맞은 듯 퉁퉁 부어 있었다. 전씨는 1t 화물차 위로 아내를 끌고 가 “다른 건 참아도 나를 감시하는 경찰과 바람 피우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 수사를 하도록 하겠다. 방송을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소방차와 경찰이 출동했고, 전씨는 흉기로 아내의 목을 겨냥했다. 문화방송 취재진이 달려와 전씨와 인터뷰를 했다. ‘평화마을’을 취재 왔다가 졸지에 인질극을 목격한 기자도 휴대전화로 기사를 전했다.

 

상황은 4시40분께 종료됐다. 주민들의 설득으로 전씨는 흉기를 내려놓았다. 박씨는 119구조대에 실려갔고, 전씨는 경찰차량에 실려갔다. 온라인판에 기사를 실은 <한겨레>는 이날 저녁 기사를 뺐다. ‘불륜’을 확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씨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날 밤 9시 문화방송 뉴스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기르던 고양이를 죽여도 죄의식 없어”


△ 전만규씨는 매향리 미국 폭격장을 폐쇄시킨 한국 평화운동의 상징이었다. 2000년 화성시가 주민대책위 사무실 출입을 막자 창문으로 드나들며 일할 정도(위·사진/한겨레)로 헌신적이던 그는, 싸움이 끝나자 매향리 평화마을을 만들기 위해 활동했다.

1990년대 시민단체를 거쳐간 사람들, 학생운동의 전선에 섰던 사람들, 현장을 누볐던 사회부 기자들 가운데 전만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매향리는 환경투쟁의 전장이었고, 반미투쟁의 성지였다. 전만규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했다. 그들은 기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며, 대답을 듣고 당혹해했다. 심리적 충격을 채 추스르지 못한 기자에게도 역시 수수께끼가 남아 있었다. 그는 왜 폭력에 빠졌을까.

 

그러던 중 기자는 2000년 전만규씨의 법정 진술문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해 6월 매향리 폭격장 사격 개시 깃발을 찢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우연히 읽게 된 그의 글을 보고 전율했다.

 

“제가 매향리 미 공군 폭격장 문제로 고민하게 된 것은 1978년 방위병으로 마을 무기고에서 근무할 때입니다. 당시 정기구독하던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에 저의 시선이 멈췄습니다.

 

내용인즉 미국 모 대학에서 항공기 소음에 관해 조사한 결과,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인근 지역 주민들이 한적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보다도 성격이 포악해지고 자살률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저는 아하! 우리 마을 사람들이 걸핏하면 자살하고, 툭하면 흉기를 들고 싸우는 것의 원인이 폭격 소음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소름 끼치는 전율 속에, 제가 집에서 정성스럽게 기르던 고양이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방문 앞에 와서 ‘야옹’ 소리를 내며 잠을 깨웠다고 해서 다리를 올무에 씌워 마을 앞산으로 끌고 가서 생매장하고, 다음날 그 새끼들조차 바윗돌에 쳐서 죽이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저 자신의 포악성을 뒤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0여 년 전부터 마을 교회에 나가 성경 말씀을 통하여 내 포악한 성격의 장애를 교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만, 지속되는 폭격 소음 때문에 정신적 장애 요인은 잘 순화가 되질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폭력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다가 또다시 끓어오르는 폭력의 열기를 억누르지 못한 것일까. 도대체 이렇게 당혹스럽게 다가온 폭력의 기원은 무엇일까.

기자는 4월17일 경기 오산에 있는 화성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그를 찾아갔다. 그사이 그는 폭력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돼 있었다. 전만규씨는 기자를 보자,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철창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전씨의 눈매와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불과 닷새 전,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그가 운을 뗐다.

 

“마귀에 씌었었나 봐요. 마치 악몽을 꾼 것처럼… 원래 내 성격이 어떤 일이 일어나면 확 폭발되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치밀어 올라가지고….”

 

“스트레스에 의한 폭력 행동일 수도”

사실 전씨는 여러 자리에서 자신의 문제를 고백한 적이 있었다. ‘고양이 사건’만이 아니었다. 그는 2000년 5월23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기자) 아버님도 자살을 했다고 들었는데.

=(전만규) 그렇다. 아버님뿐 아니라 이웃 주민 수십 명이 자살했다. 매향1리가 170가구인데 1960년대 이후 체크된 자살자 수가 32명이다. 그중 죽은 사람이 28명이고 4명은 미수에 그쳤다. 80년 12월12일에 아버지가 목을 매서 자살을 하셨다. 나도 할복자살을 기도했지만 미수로 그쳤다. 그때 난 자살을 해야겠다는 의지보다는 ‘욱’하는 마음이 있었다.

 


△ 매향리 폭격장은 폐쇄됐지만, 환경오염 치유를 위해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2005년 8월 농섬에 진입하는 미군을 막고 있는 주민들과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전씨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선 기자 앞에서 셔츠를 올렸다. 배에는 20cm 정도의 두꺼운 칼자국이 나 있었다. “1998년 마을에서 하는 일이 잘 안 돼서 시도한 할복자살의 흔적”이라고 했다. 생명을 던져버릴 정도로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4시간 동안 대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아버지의 죽음은 전씨가 폭격장 폐쇄 운동에 뛰어든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1980년 중동 쿠웨이트에 건설 노동자로 나갔다. 월급 명세서에 620시간이 찍힐 정도로 미친 듯이 일했다. 하지만 그가 목돈을 들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버지가 석 달 전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전만규씨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은 평소 전씨가 자신의 폭력 성향을 의식해온 점을 주목했다. 서 국장이 말했다. “그냥 형사사건 다루듯 해선 안 된다. 전만규는 정신과적인 정밀진단을 받아야 한다. 수사 과정에서 스트레스에 의한 폭력 행동인지 검사해봐야 한다.”

 

반미 투쟁과 폭력성 관계는 부인해

인질극 사건 뒤, 전씨의 아내 박미숙씨는 화성 발안면에 있는 종합병원의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전씨가 휘두른 주먹과 흉기 때문에 박씨의 몸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박씨의 다리는 인대 파열이 우려될 정도였고, 눈은 치료하지 못할 만큼 크게 부었다. 박씨는 최근에야 상황이 호전돼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박씨를 여러 차례 면회한 이정원(47) 매향2리 이장은 “무엇보다 박씨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크다”고 전했다.

 

전만규씨는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을 행사했을까. 매향리의 한 주민은 “1년에 한두 번 부부가 싸우는 걸 봤다”며 “서로 때리지는 않더라도 목소리 높이며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전씨에게 평소 아내를 때리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평소에 욕설을 하긴 하지만 그런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다. 오히려 같이 싸우는 편이다. 내가 한 번 때리면 두 번 세 번 날아오니까…”라고 말했다.

 

전씨가 이날 벌인 행동은 모든 사람들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했다. 평화운동가에게서 돌출한 폭력은 마치 원시적인 소설을 보는 듯하다. 그는 왜 아내에게 흉기를 들었을까. 전통적인 가부장적 유산과 사유구조를 그가 그대로 이어받았을 수 있고, 20년의 거친 반미투쟁 속에서 폭력성을 키워왔을 수 있다. 하지만 전씨는 후자의 이유에 대해선 “오히려 투쟁 속에서 많은 걸 발견했고 배웠다”고 말했다.

 


△ 농섬은 공사판의 모래사장처럼 폐허로 서 있다. ‘농섬’이란 이름은 수목이 울창하다는 뜻이었다. (사진/ 한겨레 장철규 기자)

그럼에도 검증해야 할 부분은 미군 폭격장 소음과 그의 행동 사이의 인과관계다. 전씨는 자신의 억누를 수 없는 감정과 행동이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소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전씨는 “이참에 정신감정도 신청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매향리는 한국 평화운동의 아이콘이 돼왔다. 전만규씨는 한국 평화운동 최초의 승리를 이끈 인물이다.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은 “일본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일본의 시민운동 활동가들은 전만규를 안다”고 말했다. 전씨는 외부 단체의 의식화나 조직화 없이도 주민들을 조직해 미군기지를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역시 미군기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일본 활동가들에게 그는 모범이었던 것이다.

 

“매향리엔 ‘욱’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 전만규씨는 “(미군 폭격장 폐쇄의) 일등공신이라고 하는 사람이 끔찍한 일을 저질러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치장에서 성경을 읽고 있다”며 “죽어도 죗값을 치르고 죽겠다”고 말했다. 기자는 전씨와의 짧은 ‘철창 인터뷰’를 마쳤다.

 

4월19일 이정원 매향2리 이장은 흥미로운 말을 해주었다. 올해 초 매향리 주민 한 명이 특별한 이유 없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60대 아주머니인 김미정(가명)씨는 18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수발하고 있었다. 김씨는 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술을 먹다가 눈물을 흘리더니, 조용히 1층에 내려가 제초제를 마시고 숨졌다. “평소에도 약주를 드시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게 자살할 사람은 아니”라고 이정원 이장이 말했다. 그는 “매향리엔 이렇게 ‘욱’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소음과 주민 스트레스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향리 평화마을 건립추진위원회는 조만간 10개 마을 대표 등이 참석한 이사회를 열어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할 예정이다. 이정원 이장은 “평화마을은 예정대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해배상소송 승소로 얻은 위자료의 일부로 이미 기금을 적립했고, 평화마을을 만들기 위한 영농법인도 설립했다.

 

폭격 소음이 걷힌 매향리에 평화가 찾아왔음에도 주민들은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 4월17일 다시 매향리에 찾아가니, 바다 너머로 농섬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수목이 울창해서 ‘농섬’이라 불렸던 이 섬은 공사판의 모래사장처럼 폐허로 서 있었다. 언제야 농섬은 푸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언제야 매향리 사람들은 평안을 얻을 것인가.

 


매향리의 끝나지 않은 설움

폭격 피해는 끝났지만 정부 차원의 주민 건강조사는 이뤄지지 않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매향리에서 1.6km 떨어진 농섬을 표적으로 미국 공군 전투기의 사격과 폭탄 투하 연습이 시작됐다. 1954년 미군이 매향리에 주둔하기 시작했고, 1968년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이 발표되면서부터 이곳은 공식적인 폭격장으로 이용됐다.

 

몇 차례의 땅 징발을 통해 매향리는 38만 평의 육상 사격장과 500만 평의 해상 폭격장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갯벌에서 굴을 캐다가 폭탄 파편에 맞아도, 집 안 마당에 포탄이 떨어져도 군사독재 시절 주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요된 침묵의 연대에 균열이 난 건 1988년. 전만규씨가 당시 김포공항 소음 피해에 맞서던 김포 고강동 주민들을 만나고 난 뒤였다. 그 뒤 그는 매향리 대책위를 꾸렸고, 주민들과 함께 긴 싸움을 시작했다.

 

주민들이 미군과 가장 날 서게 대립한 건 2000년 5월이었다. 미군의 오폭 사고로 집들이 금이 가는 등 피해가 발생하자, 주민들은 곡괭이와 낫을 들고 미군 관제탑에 진입해 군사시설을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 뒤로 매향리는 전세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4년 3월 매향리 주민들은 승리했다. 대법원이 매향리 주민 1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음피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원고승소 확정판결을 내린 것이다. 원고는 각각 1천만원 남짓의 위자료를 받았다. 그리고 2005년 8월, 미군은 매향리 폭격장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20년 가까운 투쟁 속에서 정부 차원의 정밀한 주민 건강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시민단체가 2000년 약식조사를 벌인 정도뿐이었다.

 

경기 평택시가 2005~2006년 벌인 건강조사는 매향리에 시사적이다. 평택시는 평택 미군 공군기지 주변 주민과 이에 대한 대조군을 설정해 1500여 명을 대상으로 소음 피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군기지 주변 아이들은 전투기와 헬기 소음 때문에 공군기지에서 5km 떨어진 인근 지역 아이들보다 우울증, 산만행동, 자폐증 등이 1.5~2배 정도 더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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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 시공 로고스 총서 30 시공 로고스 총서 30
게오르그 리히트하임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맑스주의 문예이론이 많이 비난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문예의 정치에의 복속 때문이었다. 이것만을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우선 제쳐놓고, 레닌 이후 60년대까지 맑스주의 문예이론이 정치에 복속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레닌 이후 60년대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문예이론가인 루카치는, 정치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고, 또 후에는 다시 번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다른 맑스주의 문예이론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루카치 사상을 통시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 당대 정치적,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리히트하임의 이 얇은 책은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유려한 번역으로 놀라게 하는 이종인 선생의 번역과 긴요한 역주도 좋다. 다만 이렇게 얇은 책이니만큼, 루카치 '사상' 그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루카치 사상의 정치적 배경을 이해한다는 의도로 읽는다면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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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한국을 바꾼 지식인

경향신문의 기획기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을 그만 옮겨올 생각이었지만 내일자 조간에 실리는 내용은 그런 생각을 접어두게 한다. 무엇보다도 설문조사에 근거한 데이터이기에 '한국을 바꾼 지식인'이란 타이틀만큼이나 흥미를 끌고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저술들의 목록도 일별해 볼 만하다. 지난 2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군...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3. 한국을 바꾼 지식인

지식인들 사이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 지식인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세 사람이다.

경향신문이 최근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을 위해 각계 지식인 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복수응답) 조사 결과, 24명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백교수를 뽑았다. 이어 21명이 리전교수, 17명이 최교수, 10명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를 꼽았다. 여기에 ‘대중적 글쓰기’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깨는 도전적 작업을 해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90년대 이후 등장한 지식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77)는 지난해 9월 “지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상의 은사’로 기억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시대의 흐름을 이끈 70~80년대 학번들의 이념적·사상적 출발점”(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이나 “한국사회에 보기 드문 보편주의, 국제주의자로 ‘지적 거인과 같은 존재’”(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왜 아직도 리영희인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는 “87년 민주화의 분수령 이후 한국사회는 새 변화를 추동할 세력을 창출하지 못했다”며 “이것이 리영희 선생의 주 활동기가 87년 이전인데도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리영희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지방 말단직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혼자 서울의 공업학교로 유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방된 사회에서 동창생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만사에 불편하였다”고 되뇌곤 했던 그는 평생 누구와 무리지어 세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은 리영희 서재에 걸려 있는 백범의 휘호로 리영희의 꼿꼿함을 설명한다.

“踏雪夜中去 / 不須胡亂行 / 今日我行跡 / 遂作後人程 (눈길을 걸을 때 /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 내가 걷는 발자국이 /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중국전문가로서의 리영희는 외신부 기자생활을 하며 단련됐다. 합동통신·조선일보에서 해·복직을 거듭하면서도 굵직한 특종들을 남겼다. 특히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함과 중국 사회주의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서구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 방식으로 반공주의에 맞섰다. 리영희는 기자직과 교수직에 있는 동안 다섯 차례 구속되고 모두 1012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독재의 시대에 그의 글들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몽롱한 의식에 끼얹는 찬물 한 바가지”(강준만)였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는 힘은 사회적 발언의 중단을 선언할 만큼 스스로 자신의 육체적, 지적 한계를 인정할 때까지 그가 의미있는 비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한국사회를 ‘시장맹(盲)’ ‘북한맹(盲)’으로 만들었다”고 리영희를 본격 비판한 것은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계간 ‘비평’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윤평중은 이번 경향신문 설문에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리영희를 꼽았다. 그는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화운동 시기의 젊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그 여파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보수진영이나 우파에서는 그 특유의 이론적 빈곤이나 도덕적 결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전혀 부재하다.”

리영희는 민주화 이후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계속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왜일까. 그 대답은 백낙청, 최장집 등 후배지식인들의 왕성한 지적, 실천적 활동이 요구되는 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말해준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69)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1위로 꼽힌 것은 40년 창비 역사와 함께 해온 그의 실천적 글쓰기 덕분이다. 차병직(법무법인 한결 변호사)은 “한반도 특유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민족 문제를 고려하면서 지속적으로 분석해 왔으며 현재와 미래의 대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이라고 했고, 박명림(연세대 교수)은 “언제나 시대정신에 맞는 화두를 잘 던지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맛깔나는 문체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고 말했다.



백낙청은 55년 경기고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인제대 백병원을 세운 백인제·백붕제가 각각 그의 백부·친부이고, 현 인제대 이사장인 백낙환이 형이다. 스스로 ‘변칙적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말한 바 있는 백낙청은 28세 때인 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며 한국 사회의 분단현실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데 투신했다. 창비는 정간, 폐간, 판금 처분을 반복하면서도 “지난 40년간 비판적 연구자-문인-저술가 그룹을 한데 묶은 ‘비판지성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지해오며”(조효제) 백낙청의 실천적 지성 활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백낙청의 담론 주도력 뒤에는 “유일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비판적 지식인 미디어인 창비”(류준필 성균관대 연구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에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문학론’을 펴온 백낙청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최근 그 이름에서 ‘민족’을 떼느냐 마느냐 문제로 논란을 벌일 때 민족의 삭제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뿌리는 여전히 민족과 통일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최근 이명원(문학평론가)과의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2825).


“상당수의 진보적 학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수 논객이나 학자보다 분단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마치 이 사회가 분단과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고, 분단이라는 것이 하나의 부수적인 사실로 있는 것처럼 전제를 깔고, 분단 안된 사회의 척도로 진보 보수를 따지는 경향이 많아요. 최장집 교수도 그런 예의 하나이고, 손호철 교수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요.”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학문적, 실천적 역량을 쏟았다는 점에서 최장집(고려대 교수·63)은 백낙청에 비견된다. 최장집은 강릉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고려대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한 4·19 세대다. 그는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1년여 일하기도 했으며 잡지 ‘세대’에서 기자생활을 거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만개했던 각종 변혁이론들이 91년 소련 붕괴로 몇 년 못가 시들해졌을 때 최장집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1983년 40세 늦깎이 박사를 받고 돌아온 최장집은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80년대 초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제3세대 학자군’을 이끌며 그람시류의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소개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서구의 눈을 빌려오되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왔던 흐름을 꿰뚫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교수 정치학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최장집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 민주주의 이론’(1993) 때부터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하다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휘말려 1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 뒤로 그의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이 책 제목이 하나의 관용어로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학문적 천착보다는 사회적 활동으로 유명해진 학자도 아니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에 갇혀 있는 교수도 아닌, 이 둘을 아우르는 이론적 실천가라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 리영희

1929년 12월 평북 운산 출신. ‘삭주 대관국민학교 개교 이래 몇 천재 중 하나’였다. 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학비면제, 숙식·제복 국가부담’에 이끌려 한국해양대를 다녔다. 외신부 기자생활을 거쳐 72년부터 한양대 신방과 교수를 지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최근 저작 활동을 접었다.

◇ 백낙청
1938년 1월 대구 출신. 남들보다 2년 일찍 학교에 다녔다.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에서 영문학 학사,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고 귀국했다. 66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뒤 72년 미국작가 DH 로렌스 연구로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 최장집

1943년 5월 강릉에서 태어나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청와대 공보비서실과 잡지사 ‘세대’에 잠시 몸 담았으며 이후 미국 시카고대에 유학했다. DJ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가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때문에 물러났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90년대 강준만 등장

전통적 지식인이랄 수 있는 세 지식인의 틈새에서 90년대에 등장한 전북대 교수 강준만(51)의 약진은 변화된 지식인 지형의 일면을 보여준다. 10명의 응답자가 그를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았으며 그가 글을 쓰는 잡지 ‘인물과 사상’은 6명이 영향력 있는 저술로 꼽았다.



강준만은 ‘지역주의 비판’ ‘서울대 망국론’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등의 민감 이슈를 도발적인 문체로 제기한 ‘게릴라 지식인’이었다. 모든 ‘금기와 성역에 도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인물과 사상’은 강준만 1인이 글을 쓰고 출판하는 독특한 체제도 관심을 끌었지만, 거침없이 실명을 거론하는 전방위적 비판으로 이른바 ‘강준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박상훈(후마니타스 주간)은 “다작의 교양도서 작가로서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화 이후 기성체제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날카로운 시각과 직설적 논쟁화법으로 비판해 ‘강준만식 글쓰기’ 양식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강교수가 남긴 사회문화적 영향은 매우 컸다”고 강조했다.

강준만은 “진의가 왜곡되기 쉽다”며 기자들의 전화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팩스 또는 e메일로만 외부와 소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회적 개입은 책 쓰고 신문에 기고하는 것으로만 한정된다. 강준만은 언젠가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하는 등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만큼 스스로의 행동에 조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강준만의 칼날 화법은 어느 순간 많이 순화된 것이 사실이다. 1인 출판으로서의 인물과 사상은 지난 2005년 막을 내리고 지금은 다수 필자가 참여하는 잡지로 성격이 바뀌었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강준만으로 대표되는 게릴라 지식인들은 몇 년 못가서 초기의 기개와 전의를 크게 상실했는데 이는 기존 제도권 지식인 사회의 무응답과 외면에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보수 지식인으로는 송복(연세대 명예교수)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박세일(서울대 교수) 김대중(조선일보 고문) 복거일(소설가) 이문열(소설가) 등이 이름을 올렸다. 자연과학자로는 임지순(서울대 교수)과 황우석(전 서울대 교수)이 거명됐으며 김대중(전 대통령), 기업인 황창규(삼성전자 사장)를 선택한 이도 있었다. 영향을 준 지식인을 국내·외 구분 없이 물었기 때문에 해외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카를 마르크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새뮤얼 헌팅턴,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 꼽혔다.(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 국내서적

지식인들이 뽑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저술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른바 ‘금서목록’에 올랐던 책들이 주류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23명)과 ‘자본론’(18명), ‘전환시대의 논리’(15명)는 대표적인 금서였으며 ‘태백산맥’(10명)은 불과 2년 전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계류돼 있었다. 79년 10·26 사태를 열흘 앞두고 한길사에서 출간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였다.

송건호·오익환·백기완·진덕규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대학시절 지하 이념서클의 의식화 교재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 책 내용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발간 당시는 상식이 불온하던 시절이었다.

김언호(한길사 사장)는 “애초 송건호 선생과 책을 기획할 때는 ‘한 5000권 나가려나’ 예상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40여만권이 나간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실린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였어요. 진덕규, 임종국 같은 필자들도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는 분들이었죠. 그런 책인데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1차적으로 독자들이, 즉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말 대단했어요. 10·26이 터져 책이 판금될 때까지 열흘 만에 4000권이 나갔으니…. 판금됐다고 그 책을 안 읽었겠어요. 판금시키면 오히려 복사본이 더 많이 나돌던 때였죠.”



해전사가 한국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줬다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깨우쳐 준 책이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난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한 본질을 폭로하고,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았던 대학생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으로 하여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줬으며 김세균(서울대 교수)이 “밤 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의 ‘우상과 이성’(2명)과 함께 “사회과학도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 고마운 책”(신광영 중앙대 교수)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광영은 “이 저술로 인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능함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조정래(소설가)의 ‘태백산맥’에 대해 이광일(성공회대 교수)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책은 태백산맥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족쇄를 깨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소련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항한 우파-전통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솔제니친이 있다면, 한국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한 좌파-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조정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복거일(소설가·미래문화포럼 대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태백산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0년대에 나온 책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3명), 임지현·권혁범·박노자·임은실 등이 함께 쓴 ‘우리 안의 파시즘’(2명)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서적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 저술로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꼽은 ‘자본론’(18명)은 1980년대 후반 과학적인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첫 한글 번역본이 나온 87~89년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본 등의 형태로 은밀하게 유통됐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진 것은 87년과 89년 강신준(동아대 교수)과 김수행(서울대 교수)이 잇달아 번역본을 내면서부터이다. 고병권(수유+너머 대표)은 “87년 이후 첫 10년간이 지식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후 10년간은 마르크스주의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전환시키려 시도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 직후 서울대 교수 김수행을 통해 자본론 1~3권을 번역해낸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자본론은 지금도 해마다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라며 “다만 책의 결론에만 줄 치는 운동권식 독법보다는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를 따라가는 자본론 읽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81년 미국에서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은 번역도 되기 전에 널리 읽히며 냉전체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우리를 옥죄어 온 냉전체제를 뒤집어보게 해 준 의미를 높이 살만하다”고 했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냉전적 시각,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한국현대사 해석을 하던 한국학계에 ‘지적인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은 98년 서울대 교수인 한상진·박찬욱에 의해 번역돼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와 ‘중도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얘기되며 대안적 진보이념을 갈구하던 시점에 소개돼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진영은 공개적으로는 기든스를 비판하면서, 자기 방에서는 몰래 정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이 소개된 90년대 후반을 거쳐 최근 와서 대안적 진보이념으로 사회국가, 사회투자 국가, 사회서비스 국가, 사회연대 국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거의 모두 기든스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일종의 ‘거명되지 않는 영향력, ‘스텔스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효제는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저술은 권력과 담론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줬다”면서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한국적 문제의식의 지형에 맞지 않았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대중 서적들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대중사회 수준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소설, 성공학 번역서들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전영평(대구대 교수)은 “지식인 집단보다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한다면 해리포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라고 말했다.(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07.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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