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늘빵 > 학문과 인생의 성취(김우창)

2007. 4. 26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4251747261&code=990311

[시대의 흐름에 서서] 학문과 인생의 성취
입력: 2007년 04월 25일 17:47:26

지난 16일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며, 우리는 사람 안에 숨어 있는 어둠의 심연에 전율을 느낀다. 그러나 희생자의 가족들이 살인자와 그 가족에게까지 슬픔의 뜻을 전한다는 보도는 이 심연 위로 걸쳐 놓는 사랑과 관용의 다리가 튼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일과는 별도로, 조승희군의 배경으로서 보도된 버지니아주 한국 교포들의 성실한 삶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이민을 모범 이민자라고 하는 평가를 다시 확인해 준다. 이들은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이민자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들의 명문 대학 집념은 가장 한국인적인 특징인 것 같다. 그곳에도 학원이 번창하고, 교포신문에는 소위 아이비대학 합격생들의 명단이 발표된다고 한다. 조군의 누나도 이 명단에 올랐었지만, 조군은 거기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 든다.

한국인이 전체적으로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교육-특히 명문대 입학에 집착하는 의도가, 학문을 닦음으로써 뜻있는 삶, 이웃에 봉사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한다는 교육의 참 목적 때문만은 아니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지적 능력의 계발을 삶의 한 중요한 부분으로 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사건을 그것에 관련시키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보도된 이야기들은 명문대 숭배가 성장하는 청소년의 마음에 지나친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승희군이 크고 허황한 것에 부쳐 자기를 정당화하려 한 것은 분명하다.

-명문대가 곧 성공은 아니건만-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보다 나은 삶의 길이 공부의 관문을 경유해야 한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잠깐만 돌아보면 인생의 성취가 명문 대학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것은 인생의 성취가 학문의 성취와 일치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최근 나는 나의 글들에서 언급한 유명한 학자들이 순탄한 공부 길을 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지난 번 이 칼럼에서 언급한 보드리야르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져 명문 앙리 4세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프랑스 최고의 명문 고등사법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는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도 짓고 미장일도 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해, 소르본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독문학 강사로서 직업 지식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길도 똑바른 하나의 길은 아니어서, 그는 다시 사회학으로 학위를 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온 것은 사회철학의 저술들이었다.

몇 달 전 이 칼럼에서 언급한 일이 있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학교와 학문의 길은 참으로 기구하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담배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공부를 시작했지만, 공부를 중단하고 2년 간 군에서 복무했다. 제대 후 그는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본격적인 공부는 6년 간 우체국에 재직하는 동안 (공부를 위하여 휴직도 해가면서) 파리대학에서 수학, 화학, 물리학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 공부도 1차 대전으로 중단되고 그는 3년을 넘게 군에 복무했다.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한 후 그는 고향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다가, 38살에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마흔 여섯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디종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쉰여섯에 소르본의 중요한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의 학문은 여러 일들에 종사하면서, 반은 자습으로 이룩해낸 업적이다. 그의 전공도 수학, 화학, 물리학에서 과학 철학과 과학사로 옮겨 갔다. 가장 중요한 저작들은 만년의 시적 상상력에 관한 연구에 관한 것이다.

얼마 전에 글을 한 편 쓰면서 참고한 저자에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있다. 대학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학문적 성취와 인정에 이르는 과정은 지극히 험난한 것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1차 대전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 고향 브레슬라우의 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철학, 심리학, 의학이었으나 의학 공부는 예비시험 합격 후 그만두었다. 브레슬라우대 재학 중에는 독일 대학의 관습에 따라 하이델베르크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도 공부했다. 우리의 학부과정에 해당하는 부분은 무사히 마쳤다고 하겠으나, 박사학위 공부와 취직은 참으로 많은 곡절을 거쳐야 했다. 대학 입학 5년째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그는 학업을 중단하교 아버지가 운영하던 철물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 2년 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수자격 획득을 위한 하빌리타치온은 결국 제대로 끝내지를 못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사회학자 알프레트 베버의 제자가 되었다가 다시 6년 후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칼 만하임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3년 후 논문을 완성하고 학위 취득 직전, 나치정권이 대학 사회과학연구소를 폐쇄하는 바람에 그것은 허사가 되고, 그는 유태인의 박해를 피해 1925년 파리로,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는 런던 경제학교에 와있던 만하임 교수의 조교가 되었다. 이 기간 중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그도 그의 독일 국적 때문에 8개월간 영국에서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954년 57세의 나이에야 레스터 대학에 정착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69년 ‘문명화 과정’이 영어로 출판된 다음이었다. 원저는 하빌리타치온의 논문에 기초한 것으로서 1939년에 스위스에서 출판된 것이었다.

-삶의 길에 대한 관념의 전환을-

이러한 사례들은 학문의 길이 명문을 지나서 탄탄대로를 가는 일만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그러한 큰 길을 가지 않고도 그들이 생각하는 학문과 삶의 길을 갔다. 그들의 많은 곡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삶과 학문에 대한 물음을 자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장해물이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삶의 굽이에서 물음이 그들을 학문이 아니라 다른 길로 이끄는 것이었더라면, 그들은 그 쪽으로 가고 또 그에 대하여 별 후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주는 영광의 훈장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물음이 중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학문이란 바로 물음으로써 인생을 거쳐 간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학문과 삶의 역정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사회가 공부하고 쉬고 일하고 다시 공부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사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번만 그리고 한 곳으로만 가는 기차를 놓치면 다시는 기차를 탈수 없게 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좋은 사회란, 여러 시간에 여러 길로 가는 기차가 있고 어디로 가는 기차나 큰 고생이 되지 않은 마련을 가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몇 년 간 대학 입시 논의가 계속 있었다. 한 때의 우열 경쟁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좋은 일일까? 대학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문제에서도 거창하게 그리고 한 달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은 갈래로 일들을 풀어나가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여기에서 하려는 말과 같은 뜻에서 한 말은 아니지만,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지적 역정을, “역사라는 초월적 세계에서 일상적 삶이라는 내재적 차원으로 하강한 것”이라는 말로 설명한 일이 있다. 우리가 필요한 전환도 이러한 것일지 모른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