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비80 > '시각의 세계'는 '시각의 장'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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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마음 ㅣ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5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사유의 깊이와 폭이 깊고 넓기로 유명한 김우창 선생의 글을 읽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는 경탄과 찬사가 그칠 줄을 몰랐다. 지난 2006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 나간 우리 책 100권 중 1번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 책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올려 놓는다.
어떤 이는 김우창의 사유를 한국어의 체계가 따라잡지 못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김우창은 이제 한국어를 새롭게 창조하고 만들어가는 수준에 도달한 듯 싶다. 또 이 책이 그림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인지 어느 인터넷 서점에서는 이 책을 미술사로 분류해놓고 저자를 '김우창 화백'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해 크게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하긴 미술 철학으로만 읽어도 손색이 없다.
물론 이 책이 그림을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미술을 넘어서는 언어와 사유의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김우창의 '풍경'이라는 개념을 통해 많이 논의되고 있는 상상된 것, 고안된 것, 도착된 것으로서의 '근대'와 '민족'과 '국가'가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이론의 체계가 정교하다.>
1. 감각과 세계
어떤 경우에나 사람의 시각 체험은 일정하게 조직화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림은 자체로 독립된 대상물이고 세계지만 그림 밖의 외부세계와 분명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그림이라는 시각 체험을 통해 발견하는 내용은 자신의 생존 전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림 뿐 아니라 모든 시각의 장에서 시각 체험의 조직 원리나 특징은 삶의 원리에서 연역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듯 자신이 경험한 감각적 증표들로 현실 세계를 구축한다.
모든 그림은 사실 세계에 대한 공명(共鳴)을 나타낸다. 단순한 묘사로 보이는 경우에도 그것은 인간의 우주론적 ․ 도덕적 ․ 사회적 위치에 대한 서사를 포함한다. 곰브리치가 『예술과 환영』에서 말한 “미술은 관습에 의존한다”는 명제 역시 그림이 실재 세계를 표상한다는 것으로 판독된다. 이렇듯 그림의 사실성의 판단 기준은 사실 세계 그 자체이다.
제임스 J. 깁슨은 “3차원인 실재 세계(시각의 세계-visual world)를 2차원의 그림(시각의 장-visual field)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라며 인위적 회화의 전통을 비판한다. 이를 곰브리치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을 3차원의 공간으로 인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멀리 있는 것(하늘, 별 등)은 2차원적인 평면에 배열된 것으로 환각한다”고 수정한다. 실제로 먼 것은 보는 자의 공간 내의 정위[orientation]를 위해서 필요하다. 가까운 것은 생물학적인 삶의 조건을 위해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 필요하고 먼 것을 그릴 때는 자신의 위치를 지정하기 위해 그리는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동양과 서양 그림의 차이는 이러한 먼 것을 어떻게 그리느냐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의 풍경(중간 지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대한 차이에 있다. 중경은 시각의 오리엔테이션을 요하는 공간적으로 이해해야 할 삶의 환경이다. 서양은 원근법(perspective)을 이용해 원경과 근경을 중경에 통합하지만 동양의 그림에서는 원근법을 찾아 볼 수 없다.
서양은 사물의 실감을 표현하기 위해 원근법을 이용한다. 그러나 화이트가 지적한 대로 “중국의 그림은 평면이 기하학적 공간이나 입체적 장애물에 의해 교란되기 직전에 멈추어 선”다. 원근법 없이 세밀한 필치만으로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기법은 신비로움과 종교적인 기운을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 안에서 체험한 내용을 반영한 것이라는 게 중요하다. 이렇듯 동양화는 정신뿐 아니라 사람의 지각 체험을 표현하고 있다.
지적한 대로 서양회화의 가장 핵심적인 기법이 원근법인데 이것이 그림에서 발견되고 그렇지 않고는 인식의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에피스테메의 문제다. 원근법은 과학의 대두와 개인의 등장이라는 르네상스시대의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별적 ․ 독자적 주체인 화가의 시선으로 대상을 보고 그것을 화폭에 옮길 때 원근법이 출현한 것이다. 동시에 원근법은 수학적 질서다. 공간은 시점의 각도에 의거해 기하학적 질서로 인식된다. 근대 서양회화의 그림은 이 기하학적 공간에 사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따른다. 그러니까 기하학적 공간을 회화의 공간을 만드는 보이지 않는 선험적 공간인 셈이다. 반면에 동양의 그림에는 이런 기하학적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원근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아시아 그림의 장르의 서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수화이다. 산수화의 표현 방식은 동양의 실재 지형 경험을 반영한다. 이러한 산수화의 지형 반영은 풍수사상과 닮아 있다. 이는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것이 아니라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구체의 과학’인 것이다. 산수화나 풍수사상에 담긴 삶의 지혜는 구체적인 체험의 전형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양 사실주의 회화는 주체가 객관적인 대상을 얼마나 정밀하게 재현하는 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과학적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시각의 장에서 주체가 객관적 대상을 질서화 하는 행위는 역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주관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서구 주체의 개념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와서 흔들리고 있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주체와 대상 사이가 ‘공생이나 갈등’의 관계에 있기 전에 그것들이 일단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산수화에도 작용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장소에 자리하고 있는 주체이다. 장소의 주체는 생활 공간에서 작용한다. 이렇듯 산수화의 원리는 시각 체험의 원리이고 다른 사람의 활동에도 그대로 작용하는 원리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곧 주체는 그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풍경의 일부이다. 그 풍경 안에서 산수의 신비감과 숭고미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는 푸코가 생각한 에피스테메(episteme)의 체제-담론과 표상 그리고 실재를 만들어내는 생성 문법의 총체적 체제-를 떠오르게 한다. 인간의 시각 체험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하늘과 땅에 대한 총체적인 관찰에 기초해 있으면서 윤리 규범과 사회조직의 원리로 확대하는 사유와 현실 체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 풍경과 선험적 구성
조선의 토지에 대한 생각이야 말로 푸코의 에피스테메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지점이다. 조선조의 이상향(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이 토지에 습합하여 풍수사상을 낳았다. 실제 공간과 유토피아의 공간은 에피스테메로 인해 하나로 일치한다. 유토피아의 계획과 지형의 현실적 조건이 타협하면서 이 둘은 겹쳐지고 그것은 그림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산수화와 풍수사상은 한국인의 의식의 원형-또는 전근대의 에피스테메를 탐색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풍수사상에서 말하는 명당의 조건은 방어나 안전, 경제 등 삶의 이익에 쉽게 관계된다. 이는 풍수설이 일반적으로 동물의 영토적 감각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더해 인간의 영토적 감각은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내용을 동시에 포함한다.
명당의 배치(조산과 주산, 현무와 주작, 청룡과 백호, 도로)는 철저하게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에 기반을 두고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풍수사상은 조선과 중국의 정치 사회적 위계를 보다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풍수사상에는 어니스트 G. 샥텔이 『변용』에서 말한 ‘안주의 원리’와 ‘초월의 원리’가 동시에 작용한다. 풍수적 지형 구도는 조선 사람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는 모순되면서 상호 보완적인 충동(중국에 안주하고자 하는 원칙과 중국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낭만주의자들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숭고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이러한 숭고의 아름다움이 현실 체험의 감각과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적인 토지는 미적인 요소와 경제적인 요소가 중첩되어야 하는데 실제 거주지는 경제적인 요소에 강박됨으로 산수화를 통해 도달 불가능한 미적 요소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정철의「관동별곡」은 인간 체험과 우주적 신비가 조화와 타협을 이룬 대표적인 예이고 정선의 <금강전도> 역시 감각과 관념을 합쳐서 풍경의 생활체험을 나타낸 극단적인 사례이다. <금강전도>는 풍경의 생활체험에 충실하면서 이 생활체험 자체가 관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진경산수’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진경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시점에서 관찰한 금강산을 마음에 품은 채로 그 산의 숭고미와 신비감을 극단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그렇게 그린 이유를 지은이는 회화의 기법을 근본적으로 규정한 세계관에서 찾는다. 풍수사상이 보여주는 대로 땅은 사람이 깃들어 사는 곳이자 무한을 향해 초월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표상한다. 그 땅의 세계와의 일체감이 중요했기 때문에, 동양의 산수화는 풍경을 대상화하기보다는 그 안에 들어가 체험하는 공간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처럼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닌 현상의 경험이다. 산수화는 경험의 현실성에 입각해 있으면서 동시에 내면적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인간의 공간체험은 ‘두루뭉수리한 바탕’, ‘막연한 펑퍼짐한 느낌’인데 이 두루뭉수리의 바탕이야말로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감각적 인상과 기억과 욕망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은 역사적 매체와 매체의 사용에 대한 전통의 제약을 받으면서 기법과 소재를 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소산이다. 또한 문화는 인식과 지각의 근본 기구인 에피스테메에 원천적으로 간여한다. 서양 회화와 동양의 산수화는 동·서양을 각각 특징짓는 에피스테메, 그러니까 담론과 표상의 보이지 않는 어떤 문법적 질서를, 우리의 삶과 세계의 존재양태를 객관화해 보여주는 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