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드팀전 > 민주노총..민노당

이석행 민노총 위원장 “올 대선에 민노총 독자후보 낼 것”
입력: 2007년 05월 01일 17:56:01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의 행보엔 ‘파격’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그는 올해 1월 민주노총 위원장에 당선된 이후 정부 각 부처 장관을 잇따라 만나는가 하면 적대적 파트너였던 재벌기업과의 대화 물꼬도 트고 있다. 투쟁과 선명성으로 투영되던 이전 민노총 위원장의 이미지와는 다른 방식이다.

노동절을 맞아 현장 대장정에 나선 이위원장을 지난달 24일 대구에서 만났다.

그는 행보 못지않게 발언도 파격적이었다.

그의 첫마디는 “올해 대선에서 민주노총 독자적으로 후보를 낼 것”이었다. 민주노총 독자 대선후보론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이위원장은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3월11일 전당대회에서 민주노동당이 당원뿐 아니라 일반인도 대선후보 선출에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선출 방식’에 관한 당규약 개정을 놓고 투표를 벌인 결과 3분의 2 찬성을 얻지 못해 부결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당대회를 재소집, 대선후보 경선에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지 않으면 조합원 동의를 얻어 진보진영내 후보를 물색, 독자적으로 후보를 선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노당 압박용인가, 아니면 진짜 후보를 낼 것인가.

이위원장은 “올해 대선과 내년 총선 등 선거를 통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운동의) 핵심”이라며 “민노당이 질과 외연의 확장을 스스로 포기한다면 독자후보를 낼 의지도 있고, 실제 내부적으로도 논의 중”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3월말부터 인천을 시작으로 전국 노동현장을 돌고 있다. 1930년대 중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의 1만㎞ 대장정을 연상케하는, 이른바 ‘현장대장정’이다. 하루 14시간 동안 평균 600여명을 만나는 강행군이다. 하루 일정을 마치면 지역의 농성장을 찾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노조원의 고충을 나눈다. 부족한 잠은 차에서 이동하는 중간 중간 토막잠으로 해결한다고 한다. 이위원장은 ‘현장대장정’의 취지를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끊임없는 이윤 축적에 있습니다. 세계화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윤 축적이 한계에 도달했고 노동자의 인건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자본의 위기를 노동의 위기로 전가시키는 실정입니다.”

이위원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노동계급이 분화하고, 이에 따른 내부 갈등이 노동운동의 위기로 변모했다”고 진단했다. 노조의 힘은 단결력. 하지만 법과 제도 등 현실은 노조의 단결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해결책으로 ‘산별노조’를 제시했다.

“정규직, 비정규직이 힘을 합쳐 산별의 틀속에서 사용자와 맞서야만 노동자 권리를 지켜내고 사회제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위원장은 “올해 산별교섭에 목을 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파업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이위원장은 “한번도 (파업을) 포기한 적이 없지만 함부로 사용하는 우(愚)를 범하지도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노조운동은 현장의 조합원과 더불어 하는 것”이라며 “집행부는 그동안 조합원을 주체로 생각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데만 골몰했다는 사실을 반성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위원장은 “촛불집회 하나라도 80만 조합원이 함께할 수 있도록 열심히 칼을 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반대, 비정규직법 시행령 재개정을 위해 6월말까지 단계별로 투쟁의 수위를 높여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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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이 독자 대선후보를 낼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보이지는 않는다.(그냥 내 생각에..)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가족과도 같다.대외적으로 비춰지는데 목적을 둔 근대적인 '화목한 가족'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어떤 가족은 남보다 못하기도 하다.이 둘은 서로 힘이 되기도 하지만 또 발목을 잡기도 한다.일부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대중정당으로 발전하려면 민주노총과의 관계를 좀 희석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민주노동당이 창당될 때 민주노총이 큰 역할을 했지만 내부/외부적인 비판도 많았다.더 왼쪽에선 비판자들 사이에서는 민주노동당을 '진보 우파'라고 말하기도 했다..'노동자 민중운동'을 강조하는 측에서는 '국민21'에서 ' 민주노동당'으로의 이어지는 과정이  '의회중심 정치세력화'로의 전환으로 보였다.민주노총은 이 단계에서 '민주노동당' 창당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반면 '비의회주의'를 내세운 측은 '노동자연대'등을 거쳐 '사회당'쪽으로 세를 모았다.

민주노총이 물론 '비의회주의'를 선언하지는 않는다.단지 '민주노동당'의 성과에 대해 그리고 '민주노동당'내의 헤게모니에 대해 외부세력으로의 비판을 본격화하는 것처럼 보인다.'민노당의 원내진입' 결과가 선전효과만큼 크지 못했다는 평가로 보여진다.(실제 그랬다.민노당이 애는 써봤지만)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과의 상호협조/비판적 관계 속에서 시민사회 속에서 외연을 확대해야한다고 본다.'변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80년대식 노동자 중심성' 역시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그렇지만 민주노총 위원장이 말한 '산별노조' 양성을 통한 '조합적인 사회민주주의' 역시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싶은 방향이다.정치적으로 구분하면  차이가 있다.그러나 이 둘의 지향이 상호배타적이진 않는다고 생각한다.현실 정치에 있어서 (정치적인) 나의 좌표는 그 어느 선에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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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3)

 

시마다 : 이 10년은 냉전구조에 의해 은폐되었던 것이 일순간에 노정되는 경험을 했는데, 그것은 미국이 자본의 영구운동을 전세계적으로 추진한 10년이었다. 나는 코뮤니즘 문제를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야마시로씨가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말하면 『끝없는 세계』 속에서 「세계자본주의란 코뮤니즘이다」라는 가라타니씨의 발언은 그 시점에서는 대단히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그 후의 세계의 전개를 보면 바른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탈린주의적인 국가사회주의와는 별개로 자본의 운동에 충실한 코뮤니즘을 생각할 경우, 그것은 미국이 중심이 되어 추진해 가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운동으로서 전개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련붕괴 후의 러시아도 더욱 더 아시아제국(諸國)을 포함해서 전개하고 있다. 이 글로벌리제이션은 국가나 정부가 그 시스템을 지도하는, 혹은 그것과 필적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운동 자체는 시장원리에 기초한 자유로운 경제활동이라기보다는 국가적인 계획경제를 합리적으로 진행시켜 간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이 주식회사화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확실히 자유주의경제에 편입되었지만, 그럼으로써 오히려 혼란이 극에 달했다. 아시아제국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미국경제의 국가적 전략에 완전히 말려들어 통화위기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형태로 상징되는 경제의 구조 자체는 잘 모르겠지만,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반미주의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바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경우 경제원칙을 벗어나 반미주의를 말한다 해도 이시하라 신타로오(石原愼太郞)같이 되면 안 된다. 지금 가장 나쁜듯한 반미주의에 오히려 무엇인가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경제 지역주의인가 혹은 그것과 일체가 된 내셔널리즘인가 하는 것이 현상이다. 만약 거기에 이라크나 유고와 같은 파시즘적인 저항과는 별개의 윤리적인 글로벌리제이션에 대한 지역적인 저항운동의 가능성이 있다면 새로운 코뮤니즘이 되고 새로운 경제시스템이 되며 나아가 그것들에 연결되는 문화운동의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라타니씨가 『트랜스크리틱』에서 말하고 있는 윤리적인 동기를 기초로 한 코뮤니즘의 가능성에는 흥미를 갖고 있는데, 불매운동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떠한 움직임으로서 전개되어야 하는가, 혹은 그러한 현상이 현실적으로 지금 관찰되고 있는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가라타니 : 사실을 말하면 그러한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 8월경부터였습니다. 그러한 것을 쓰지 않는다면 『트랜스크리틱』은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파는 입장」과 「사는 입장」의 비대칭성에 대하여는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것은 『탐구Ⅰ』의 단계에서는 자본운동의 위험함, 혹은 「신용」의 문제로서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노동자의 대항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돌연 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새로운 생각인지는 알지 못했다. 왜 이런 단순한 것을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것인가, 내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입니다. 그 때에 마침 야마시로씨가 그 무렵 후쿠모토 이즈무(福本和夫)를 읽고 나와 비슷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초고단계의 맑스론을 야마시로씨에게 보이고 의견을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후쿠모토의 협동조합론에 대하여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그것은 확실히 1950년대의 것입니다.


  야마시로 : 네. 후쿠모토는 전후 농지개혁과 연계하여 50년대의 농업문제나 임업문제를 실지연구(實地硏究)하는 가운데 생산협동조합에 착안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55년에 『전후 일본의 농림업문제』로 정리되었습니다. 그리고 60년대에 들어서면 후쿠모토가 주최하는 『맑스주의 공론』이라는 잡지에서 이론적인 면에서 생산협동조합이라는 관점에 서서 소련형의 사회주의에 대해 스탈린 비판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레닌, 나아가 엥겔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일련의 사회주의관을 다시 검토하는 논문의 연재를 합니다. 이것은 그 후 1967년에 『자주성, 인간성의 회복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됩니다.


  후쿠모토는 1925년 전후에 이른바 후쿠모토주의라 불리는 분리결합론을 전개합니다. 결론이 나지 않는 것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것은 잘 알겠지만, 그 단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초기의 저서를 읽어도 잘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로부터의 단절도, 다이쇼(大正)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도 아니다. 후쿠모토는 한편으로 1940년대 옥중에서 호쿠사이(北齋)를 조사한다거나, 전후 『일본 르네상스사론』과 같은 문화사적인 작업을 했는데, 이러한 것과 생산협동조합론이 어떤 관계를 갖는가는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생산협동조합론에 착안해 가는 과정은 레닌주의적인 분리결합론에 대한 자기비판이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후쿠모토는 분리결합론을 평생 버리지 않았습니다. 비판하는 것은 잘라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잘라내 버려도 남는 것을 보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협동조합론을 가져와서 비판해도 분리결합론에는 남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마 그것은 레닌주의와도, 후쿠모토주의와도 관계가 없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는 분리결합론에 대한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후쿠모토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하는 관심에서 생산협동조합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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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구판절판


비정성시(悲情聖市) - 그대들과 나란한 무덤일 수 없으므로 여기 내 죽음의 규범을 기록해둔다-146-147쪽

모든 사진 속에는 그 사람이 살던 시절의 공기가 고여있다 따뜻한 말 속에 따뜻한 곰팡이가 피어 있듯이 모든 영정 속에 흐르는 표정은 그 사람이 지금 숨쉬고 있는 공기다 영정을 보면서 무엇인가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면 내가 그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곳을 느끼고,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쪽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나의 영정엔 어떤 공기가 흐를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붉은 공기가 된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 사진 밖의 나를 보면 어지럽다.
시차(時差) 때문이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너무 많은 죽음이 필요했기에 당신조차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으로 나는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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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비80 > '시각의 세계'는 '시각의 장'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풍경과 마음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5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사유의 깊이와 폭이 깊고 넓기로 유명한 김우창 선생의 글을 읽는 동안 내 마음 속에서는 경탄과 찬사가 그칠 줄을 몰랐다. 지난 2006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 나간 우리 책 100권 중 1번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 책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올려 놓는다.

어떤 이는 김우창의 사유를 한국어의 체계가 따라잡지 못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김우창은 이제 한국어를 새롭게 창조하고 만들어가는 수준에 도달한 듯 싶다. 또 이 책이 그림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인지 어느 인터넷 서점에서는 이 책을 미술사로 분류해놓고 저자를 '김우창 화백'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해 크게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하긴 미술 철학으로만 읽어도 손색이 없다.

물론 이 책이 그림을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미술을 넘어서는 언어와 사유의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김우창의 '풍경'이라는 개념을 통해 많이 논의되고 있는 상상된 것, 고안된 것, 도착된 것으로서의 '근대'와 '민족'과 '국가'가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이론의 체계가 정교하다.>

1. 감각과 세계

  어떤 경우에나 사람의 시각 체험은 일정하게 조직화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림은 자체로 독립된 대상물이고 세계지만 그림 밖의 외부세계와 분명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그림이라는 시각 체험을 통해 발견하는 내용은 자신의 생존 전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림 뿐 아니라 모든 시각의 장에서 시각 체험의 조직 원리나 특징은 삶의 원리에서 연역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듯 자신이 경험한 감각적 증표들로 현실 세계를 구축한다.

  모든 그림은 사실 세계에 대한 공명(共鳴)을 나타낸다. 단순한 묘사로 보이는 경우에도 그것은 인간의 우주론적 ․ 도덕적 ․ 사회적 위치에 대한 서사를 포함한다. 곰브리치가 『예술과 환영』에서 말한 “미술은 관습에 의존한다”는 명제 역시 그림이 실재 세계를 표상한다는 것으로 판독된다. 이렇듯 그림의 사실성의 판단 기준은 사실 세계 그 자체이다.

  제임스 J. 깁슨은 “3차원인 실재 세계(시각의 세계-visual world)를 2차원의 그림(시각의 장-visual field)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인위적”인 것이라며 인위적 회화의 전통을 비판한다. 이를 곰브리치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을 3차원의 공간으로 인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멀리 있는 것(하늘, 별 등)은 2차원적인 평면에 배열된 것으로 환각한다”고 수정한다. 실제로 먼 것은 보는 자의 공간 내의 정위[orientation]를 위해서 필요하다. 가까운 것은 생물학적인 삶의 조건을 위해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 필요하고 먼 것을 그릴 때는 자신의 위치를 지정하기 위해 그리는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동양과 서양 그림의 차이는 이러한 먼 것을 어떻게 그리느냐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의 풍경(중간 지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대한 차이에 있다. 중경은 시각의 오리엔테이션을 요하는 공간적으로 이해해야 할 삶의 환경이다. 서양은 원근법(perspective)을 이용해 원경과 근경을 중경에 통합하지만 동양의 그림에서는 원근법을 찾아 볼 수 없다.  

  서양은 사물의 실감을 표현하기 위해 원근법을 이용한다. 그러나 화이트가 지적한 대로 “중국의 그림은 평면이 기하학적 공간이나 입체적 장애물에 의해 교란되기 직전에 멈추어 선”다. 원근법 없이 세밀한 필치만으로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기법은 신비로움과 종교적인 기운을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 안에서 체험한 내용을 반영한 것이라는 게 중요하다. 이렇듯 동양화는 정신뿐 아니라 사람의 지각 체험을 표현하고 있다.

  지적한 대로 서양회화의 가장 핵심적인 기법이 원근법인데 이것이 그림에서 발견되고 그렇지 않고는 인식의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에피스테메의 문제다. 원근법은 과학의 대두와 개인의 등장이라는 르네상스시대의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별적 ․ 독자적 주체인 화가의 시선으로 대상을 보고 그것을 화폭에 옮길 때 원근법이 출현한 것이다. 동시에 원근법은 수학적 질서다. 공간은 시점의 각도에 의거해 기하학적 질서로 인식된다. 근대 서양회화의 그림은 이 기하학적 공간에 사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따른다. 그러니까 기하학적 공간을 회화의 공간을 만드는 보이지 않는 선험적 공간인 셈이다. 반면에 동양의 그림에는 이런 기하학적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원근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아시아 그림의 장르의 서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수화이다. 산수화의 표현 방식은 동양의 실재 지형 경험을 반영한다. 이러한 산수화의 지형 반영은 풍수사상과 닮아 있다. 이는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것이 아니라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구체의 과학’인 것이다. 산수화나 풍수사상에 담긴 삶의 지혜는 구체적인 체험의 전형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양 사실주의 회화는 주체가 객관적인 대상을 얼마나 정밀하게 재현하는 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과학적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시각의 장에서 주체가 객관적 대상을 질서화 하는 행위는 역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주관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서구 주체의 개념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와서 흔들리고 있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주체와 대상 사이가 ‘공생이나 갈등’의 관계에 있기 전에 그것들이 일단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산수화에도 작용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장소에 자리하고 있는 주체이다. 장소의 주체는 생활 공간에서 작용한다. 이렇듯 산수화의 원리는 시각 체험의 원리이고 다른 사람의 활동에도 그대로 작용하는 원리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곧 주체는 그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풍경의 일부이다. 그 풍경 안에서 산수의 신비감과 숭고미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는 푸코가 생각한 에피스테메(episteme)의 체제-담론과 표상 그리고 실재를 만들어내는 생성 문법의 총체적 체제-를 떠오르게 한다. 인간의 시각 체험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하늘과 땅에 대한 총체적인 관찰에 기초해 있으면서 윤리 규범과 사회조직의 원리로 확대하는 사유와 현실 체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 풍경과 선험적 구성

  조선의 토지에 대한 생각이야 말로 푸코의 에피스테메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지점이다. 조선조의 이상향(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이 토지에 습합하여 풍수사상을 낳았다. 실제 공간과 유토피아의 공간은 에피스테메로 인해 하나로 일치한다. 유토피아의 계획과 지형의 현실적 조건이 타협하면서 이 둘은 겹쳐지고 그것은 그림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산수화와 풍수사상은 한국인의 의식의 원형-또는 전근대의 에피스테메를 탐색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풍수사상에서 말하는 명당의 조건은 방어나 안전, 경제 등 삶의 이익에 쉽게 관계된다. 이는 풍수설이 일반적으로 동물의 영토적 감각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더해 인간의 영토적 감각은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내용을 동시에 포함한다.

  명당의 배치(조산과 주산, 현무와 주작, 청룡과 백호, 도로)는 철저하게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에 기반을 두고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풍수사상은 조선과 중국의 정치 사회적 위계를 보다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풍수사상에는 어니스트 G. 샥텔이 『변용』에서 말한 ‘안주의 원리’와 ‘초월의 원리’가 동시에 작용한다. 풍수적 지형 구도는 조선 사람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는 모순되면서 상호 보완적인 충동(중국에 안주하고자 하는 원칙과 중국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낭만주의자들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숭고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이러한 숭고의 아름다움이 현실 체험의 감각과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적인 토지는 미적인 요소와 경제적인 요소가 중첩되어야 하는데 실제 거주지는 경제적인 요소에 강박됨으로 산수화를 통해 도달 불가능한 미적 요소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정철의「관동별곡」은 인간 체험과 우주적 신비가 조화와 타협을 이룬 대표적인 예이고 정선의 <금강전도> 역시 감각과 관념을 합쳐서 풍경의 생활체험을 나타낸 극단적인 사례이다. <금강전도>는 풍경의 생활체험에 충실하면서 이 생활체험 자체가 관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진경산수’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진경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시점에서 관찰한 금강산을 마음에 품은 채로 그 산의 숭고미와 신비감을 극단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그렇게 그린 이유를 지은이는 회화의 기법을 근본적으로 규정한 세계관에서 찾는다. 풍수사상이 보여주는 대로 땅은 사람이 깃들어 사는 곳이자 무한을 향해 초월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표상한다. 그 땅의 세계와의 일체감이 중요했기 때문에, 동양의 산수화는 풍경을 대상화하기보다는 그 안에 들어가 체험하는 공간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처럼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닌 현상의 경험이다. 산수화는 경험의 현실성에 입각해 있으면서 동시에 내면적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인간의 공간체험은 ‘두루뭉수리한 바탕’, ‘막연한 펑퍼짐한 느낌’인데 이 두루뭉수리의 바탕이야말로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감각적 인상과 기억과 욕망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은 역사적 매체와 매체의 사용에 대한 전통의 제약을 받으면서 기법과 소재를 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소산이다. 또한 문화는 인식과 지각의 근본 기구인 에피스테메에 원천적으로 간여한다. 서양 회화와 동양의 산수화는 동·서양을 각각 특징짓는 에피스테메, 그러니까 담론과 표상의 보이지 않는 어떤 문법적 질서를, 우리의 삶과 세계의 존재양태를 객관화해 보여주는 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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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학문과 인생의 성취(김우창)

2007. 4. 26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4251747261&code=990311

[시대의 흐름에 서서] 학문과 인생의 성취
입력: 2007년 04월 25일 17:47:26

지난 16일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며, 우리는 사람 안에 숨어 있는 어둠의 심연에 전율을 느낀다. 그러나 희생자의 가족들이 살인자와 그 가족에게까지 슬픔의 뜻을 전한다는 보도는 이 심연 위로 걸쳐 놓는 사랑과 관용의 다리가 튼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일과는 별도로, 조승희군의 배경으로서 보도된 버지니아주 한국 교포들의 성실한 삶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이민을 모범 이민자라고 하는 평가를 다시 확인해 준다. 이들은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이민자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들의 명문 대학 집념은 가장 한국인적인 특징인 것 같다. 그곳에도 학원이 번창하고, 교포신문에는 소위 아이비대학 합격생들의 명단이 발표된다고 한다. 조군의 누나도 이 명단에 올랐었지만, 조군은 거기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 든다.

한국인이 전체적으로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교육-특히 명문대 입학에 집착하는 의도가, 학문을 닦음으로써 뜻있는 삶, 이웃에 봉사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한다는 교육의 참 목적 때문만은 아니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지적 능력의 계발을 삶의 한 중요한 부분으로 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사건을 그것에 관련시키는 것은 잘못이겠지만, 보도된 이야기들은 명문대 숭배가 성장하는 청소년의 마음에 지나친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승희군이 크고 허황한 것에 부쳐 자기를 정당화하려 한 것은 분명하다.

-명문대가 곧 성공은 아니건만-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보다 나은 삶의 길이 공부의 관문을 경유해야 한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잠깐만 돌아보면 인생의 성취가 명문 대학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것은 인생의 성취가 학문의 성취와 일치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최근 나는 나의 글들에서 언급한 유명한 학자들이 순탄한 공부 길을 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지난 번 이 칼럼에서 언급한 보드리야르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져 명문 앙리 4세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프랑스 최고의 명문 고등사법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는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도 짓고 미장일도 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해, 소르본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독문학 강사로서 직업 지식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길도 똑바른 하나의 길은 아니어서, 그는 다시 사회학으로 학위를 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온 것은 사회철학의 저술들이었다.

몇 달 전 이 칼럼에서 언급한 일이 있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학교와 학문의 길은 참으로 기구하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담배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공부를 시작했지만, 공부를 중단하고 2년 간 군에서 복무했다. 제대 후 그는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본격적인 공부는 6년 간 우체국에 재직하는 동안 (공부를 위하여 휴직도 해가면서) 파리대학에서 수학, 화학, 물리학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 공부도 1차 대전으로 중단되고 그는 3년을 넘게 군에 복무했다. 무공훈장을 받고 제대한 후 그는 고향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다가, 38살에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마흔 여섯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디종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쉰여섯에 소르본의 중요한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의 학문은 여러 일들에 종사하면서, 반은 자습으로 이룩해낸 업적이다. 그의 전공도 수학, 화학, 물리학에서 과학 철학과 과학사로 옮겨 갔다. 가장 중요한 저작들은 만년의 시적 상상력에 관한 연구에 관한 것이다.

얼마 전에 글을 한 편 쓰면서 참고한 저자에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있다. 대학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학문적 성취와 인정에 이르는 과정은 지극히 험난한 것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1차 대전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 고향 브레슬라우의 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철학, 심리학, 의학이었으나 의학 공부는 예비시험 합격 후 그만두었다. 브레슬라우대 재학 중에는 독일 대학의 관습에 따라 하이델베르크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도 공부했다. 우리의 학부과정에 해당하는 부분은 무사히 마쳤다고 하겠으나, 박사학위 공부와 취직은 참으로 많은 곡절을 거쳐야 했다. 대학 입학 5년째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그는 학업을 중단하교 아버지가 운영하던 철물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 2년 후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수자격 획득을 위한 하빌리타치온은 결국 제대로 끝내지를 못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사회학자 알프레트 베버의 제자가 되었다가 다시 6년 후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칼 만하임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3년 후 논문을 완성하고 학위 취득 직전, 나치정권이 대학 사회과학연구소를 폐쇄하는 바람에 그것은 허사가 되고, 그는 유태인의 박해를 피해 1925년 파리로,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는 런던 경제학교에 와있던 만하임 교수의 조교가 되었다. 이 기간 중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그도 그의 독일 국적 때문에 8개월간 영국에서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954년 57세의 나이에야 레스터 대학에 정착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69년 ‘문명화 과정’이 영어로 출판된 다음이었다. 원저는 하빌리타치온의 논문에 기초한 것으로서 1939년에 스위스에서 출판된 것이었다.

-삶의 길에 대한 관념의 전환을-

이러한 사례들은 학문의 길이 명문을 지나서 탄탄대로를 가는 일만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그러한 큰 길을 가지 않고도 그들이 생각하는 학문과 삶의 길을 갔다. 그들의 많은 곡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삶과 학문에 대한 물음을 자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장해물이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삶의 굽이에서 물음이 그들을 학문이 아니라 다른 길로 이끄는 것이었더라면, 그들은 그 쪽으로 가고 또 그에 대하여 별 후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주는 영광의 훈장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물음이 중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학문이란 바로 물음으로써 인생을 거쳐 간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학문과 삶의 역정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사회가 공부하고 쉬고 일하고 다시 공부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사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번만 그리고 한 곳으로만 가는 기차를 놓치면 다시는 기차를 탈수 없게 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좋은 사회란, 여러 시간에 여러 길로 가는 기차가 있고 어디로 가는 기차나 큰 고생이 되지 않은 마련을 가진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몇 년 간 대학 입시 논의가 계속 있었다. 한 때의 우열 경쟁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좋은 일일까? 대학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문제에서도 거창하게 그리고 한 달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은 갈래로 일들을 풀어나가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여기에서 하려는 말과 같은 뜻에서 한 말은 아니지만,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지적 역정을, “역사라는 초월적 세계에서 일상적 삶이라는 내재적 차원으로 하강한 것”이라는 말로 설명한 일이 있다. 우리가 필요한 전환도 이러한 것일지 모른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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