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짱꿀라 >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Ⅱ-2. 정치권력과 지식인 (上)

(2007. 5. 14. 경향신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Ⅱ-2 정치권력과 지식인(上) : 추종과 저항만 있다

-폴리페서(polifessor)의 내습-

‘폴리페서’라는 ‘망령’이 한국사회를 활보하고 있다. 이 망령은 1997년에는 어렴풋이, 2002년에는 조금 더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 폴리페서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다. 폴리페서란 ‘politics’와 ‘professor’의 합성어로, 대통령을 지망하는 정치인들 주변을 맴도는 ‘정치 지향의 교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5년 주기의 대통령 선거가 유지되는 한, 이 망령은 이후에도 5년 주기로 발작하는 유행병처럼 한국사회에 출몰할지도 모르겠다. 전문관료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와 달리 폴리페서는 대개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보여주는 용어로서 의미심장하다. 폴리페서라는 용어가 드러내고 있는 한국적 현실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한국의 지식인과 정치권력

이 용어는 우선 한국사회가 민주화된 이후 지식인의 정치 참여가 확대됐으며, 그 주도적인 역할을 교수 집단이 담당하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지식인의 정치 참여 자체를 두고 ‘옳다’ ‘그르다’는 가치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전문적 지식인의 정치 참여가 늘어나는 것은 더욱 복잡하게 분화해가는 각 분야의 전문 지식을 현실정치에 잘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다수를 교수 집단이 차지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긍정 일변도의 평가를 하기 어렵다. 압도적인 다수의 한국 지식인들은 대학이라는 제도만을 학문 활동의 현장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진입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학이 실제로 학문 활동을 위한 유일한 장이 되어야 하는가는 제쳐두고 현실이 그렇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대학내 지식인들이 다시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지향을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전문성이 결여돼 있고 학문적 자의식조차 갖추지 못한 한국 교수집단의 현재 상황을 폴리페서라는 용어가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한국의 교수들은 ‘줄을 잘 서서’ 대선에 참여함으로써 일거에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권력 지향의 화신인 것인가.
 


한편 폴리페서라는 용어는 지식인의 정치 참여를 필요로 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도 잘 대변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각 정당의 이합집산을 보노라면, 한국의 정당정치는 요원한 미래에나 제도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정당정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정치 참여를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정치인 충원구조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도 없다. 정당이 대통령 후보에게 대안적 정책을 제시할 수도 없고 정치인도 충원할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으므로, 이런 문제들은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개인이 해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정당정치의 미비라는 한국의 정치 현실이 지식인의 대규모 정치 참여를 필요로 하고, 상대적으로 전문성과 명망성을 가진 교수 집단이 충원의 1차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정치의 측면에서도 폴리페서라는 용어가 드러내는 한국적 현실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국가를 향한 자유, 국가로부터의 자유

헌법이 제정된 이래, 제2공화국 시기 잠깐을 제외하면, 한국 헌법은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삼아왔다. ‘대권’ 혹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개념을 두고도 잘 알 수 있듯, 대통령제는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에게 군주의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발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국에서 대통령제가 유지돼 온 것은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통령제가 상대적으로 적합하다는 일정한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대통령제에 대한 호의적 태도는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가졌던 국가, 권력에 대한 시각과도 관련 있다. 더 이상 소급할 필요 없이, 국가 부재의 식민지배기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근대국가에 대한 열망을 키워왔다. 이런 국가에 대한 열망은 해방 후 분단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됐다.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할 때까지는 현존 분단국가를 온전한 근대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발상은 이런 열망에 바탕한 것이다. 이를 두고 국가에 대한 저속한 숭배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현실의 (분단)국가를 무시하는 이런 발상이, 한국 지식인들의 국가론 부재를 초래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온전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 국가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지 못하게 만든 현실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국가는 개혁이나 통일을 위해 탈취해야 할 대상이 돼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에 대한 맹목은 좌·우파 모두에게 공통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사회과학의 오랜 주제이다. 국가는 정부 혹은 관료제 일반으로 간단히 치환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특히 근대국가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정확히 규정될 수 있다. 국가도구설의 입장에서 국가는 개인을 바탕으로 규정되는 권력이지만, 국가유기체설에서는 국가로부터 개인이 도출된다. 개인을 우선할 것이냐, 국가를 우선할 것이냐는 차이에 따라 국가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인데, 이는 국가론의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를 상부구조의 일환으로 간주하거나 탈취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면, 국가 자체에 대한 고민이나 사유는 시작되지 않는다. 나아가 국가가 권력으로서의 정통성을 갖게 되는 근거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없으며, 입법권을 경시하고 집행권을 우선하는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지식인들이 국가권력을 ‘부정’하거나 ‘추종’하는 양극단만 취해왔다는 비판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거리를 두고 국가를 바라보게 될 때, 국가 또는 권력과 지식인 사이에는 긴장이 유지될 수 있다. 이를 두고 ‘국가로부터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식인들이 취해온 국가에 대한 태도를 ‘국가를 향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진대, 이제 더욱 필요한 것은 ‘국가로부터의 자유’가 아닐까.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태도, 곧 ‘국가를 향한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입장을 입법자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국가로부터의 자유’, 곧 국가와의 긴장을 유지하고자 하는 입장을 해석자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입법자로부터 해석

한국 지식인들의 국가에 대한 열망이 국가론 부재로 이어지고, 이런 인식은 정당정치의 미비라는 한국의 정치 현실과 맞물려 지식인들의 대규모 정치 참여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가 바람직한 결과만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이제 지식인과 정치권 양쪽 모두 자기성찰이 필요한 때다.

전 지구화와 아울러 사회는 더욱 복잡하게 변화하고,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하면서 지식의 존재조건도 그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는 더욱 파편화하고 ‘의미공동체’의 분화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종말을 고한 것인가. 오히려 지식인은 전문성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그 전문성을 통하여 파편화된 의미공동체 사이를 매개하는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식인은 이제 무책임한 입법자로서의 행세를 그만두고 해석자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짊어지고 나가야 할 것이다. (윤해동|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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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63명 군사→문민정권 옮겨타
 
역대 정부에서 지식인 출신 장관 10명 중 3명이 평소 자신의 이념이나 노선과 상관없이 군사정부에 이어 문민정부에서도 계속 주요 공직을 맡은 것으로 조사됐다. 경향신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별취재팀이 13일 이승만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 입각한 862명 중 대학교수·강사, 연구원, 언론인 출신 182명의 인물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 
 


이 조사에 따르면 지식인 출신 장관 182명 중 63명(34.6%)이 군사정부(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에 이어 문민정부(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공직을 맡았다. 이 조사는 지식인의 정권참여가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펼칠 수 있는 정부에 참여하는 건강한 방식이 아니라 소신과 무관하게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정부에 자신의 지식을 파는 ‘지식상인형’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장관을 포함한 중앙행정부처 관료, 정부 자문·행정위원회 위원, 정부 관계 기관의 기관장 등 고위직을 연이어 맡은 사례를 보면,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친 이는 11명(6.0%)에 달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등 4개 정부에 걸쳐 공직을 맡은 이는 6명(3.3%),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 등 5개 정부에 걸쳐 공직에 있던 이는 4명(2.2%)이었다.

지식인 장관 182명 중 152명(83.5%)은 입각 전에 이미 공직을 맡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맡은 자리 수는 모두 486개다.

정부 자문·행정위원회 자리가 173개(35.6%), 정부 산하·소속기관, 공기업 등 정부 관계기관 간부·고위직이 141개(29.0%), 중앙행정부처 간부·고위직이 90개(18.5%), 청와대 대통령 비서·보좌관, 특보 자리가 35개(7.2%)였다. 지식인 장관들의 ‘낙하산 인사 및 회전문 현상’도 두드러졌다. 장관을 끝낸 182명 중 142명(78.0%)이 계속해서 327개의 공직을 가졌다. 이 가운데 정부 산하·소속기관, 공기업 등 ‘정부 관계기관(115개·35.2%)’의 고위직이 가장 많았다. 정부 자문 및 행정위원회 위원 자리가 102개(31.2%), 중앙행정부처 고위직이 78개(23.9%) 순이었다. 이 중 장관직은 31개, 국무총리직은 6개였다.

182명 중 가장 많은 137명(75.3%)이 장관직을 마친 뒤 교육계에 몸담았다. 이들이 맡은 자리 수는 214개로 대학총장직이 37개(17.3%)로 가장 많았다. 정교수직 35개(16.4%), 학원·학교재단 이사장직 34개(15.9%), 석좌교수직 23개(10.7%), 명예교수직 19개(8.9%)였다. 정계 진출도 두드러진다. 장관을 그만둔 뒤 정치권에 몸담은 이들은 73명(40.1%)이었다. 지식인 출신 장관 182명 가운데 58명(31.9%)이 입각 전 정치에 참여했다. 입각 전 58명, 장관직 이후에 44명이 각각 국회의원(유신정우회·국가보위입법의원·민의원 등 포함)을 지냈다. 지식인 장관 182명 중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모두 108명(59.3%)으로 조사됐다. 이 중 63명(58.3%)이 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 대학 박사 학위자는 27명(25.0%), 유럽 대학 12명(11.1%), 일본 대학 6명(5.6%)이다.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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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Ⅱ-2. 정치권력과 지식인 (上)
 
한승수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위원장. 그는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8월 상공부 무역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으며 정권과 연을 맺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던 때였다. 한위원장은 이듬해 5월 민정당 공천을 받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다음해 12월 제34대 상공부 장관에 취임했다. 노태우 정권 때다.
 


경향신문 취재팀이 지식인 출신 장관 182명의 경력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군사-민간’ 정권을 두루 거친 지식인들은 모두 63명(34.6%)이었다.
지식인 개인의 관점에서 국가권력에 참여할 때 자기정체성이 없었거나, 정체성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결과이다. 정부 참여가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국정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권력 획득과 기득권 진입을 위해 지식인으로서의 위상을 활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군사정권 때 획득한 ‘파워 엘리트’로서의 기득권이 민주화 이후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문민 또는 민주 정부가 인재 풀(Pool)의 취약성으로 인해 이전 군사정부의 인물로부터 수혈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좌파정권’이란 오해를 없애고 보수세력 껴안기를 위해 군사정권으로부터 ‘공인’된 이들을 의도적으로 임명했다는 평도 받고 있다. ‘군사-민간 정권’ 다음으로 46명(25.3%)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에 참여했다.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적 지식인이 탄생한 이 시기는 ‘어용 지식인’이란 말이 공공연해진 때이기도 하다.

지식인의 어용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실례는 박정희 정권 때의 유신정우회(유정회)다.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을 지낸 지식인 출신 장관만 8명이다. 유정회는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전국구 국회의원들이 구성한 원내교섭단체로 군사정권의 2중대란 비판을 받았다.

김기형 과기처장(정권 참여 당시 대구대 교수), 김동성 공보부장관(서울대 부교수), 신범식 공보부장관(경북대 조교수), 윤주영 문화부장관(조선일보 편집국장), 이승윤 재무부 장관(서강대 학장), 이자헌 체신부장관(서울신문 편집국장), 이진희 공보부장관(서울신문 정치부장), 최영철 체신부장관(동아일보 기자), 이해원 보건사회부장관(성균관대 교수) 등이 유정회 출신이다. 윤천주 전 문교부 장관은 고려대 정경대학 교수로 일하던 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위원으로 정권에 들어가 박정희 정권의 이론적 토대를 닦았다. 이 기획위원회는 ‘중정(중앙정보부) 정책연구실’이라 불리던 곳이다.

박정희 정권 때 유정회가 있다면 전두환 정권 때는 국가보위입법의원들이 있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80년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어 5공화국 출범을 위한 정치적·법적 틀을 만들었다. 대통령 선출을 간선으로, 임기를 7년 단임으로 바꾼 게 대표적이다. 김만제 재무부장관(서강대 교수), 권이혁 문교부장관(서울대 교수), 이종률 정무제1장관(외교안보연구소 부교수), 김상협 문교부장관(고려대 교수), 박일경 문교부장관(서울대 조교수) 등이 대표적인 지식인 출신 입법의원들이다.



이승만 정권 때 지식인 출신 장관은 16명(8.8%),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연속해 몸담았던 지식인 출신은 17명(9.3%)이다. 이 시기 정권에 참여한 지식인 출신 장관 중에는 친일파들이 눈에 띈다. 이승만 정권 때 공보처장을 지낸 갈홍기(연희전문·숙명여대 교수) 및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문교부 장관을 지낸 백낙준(연희대학 총장), 박정희 정권 당시 문교부 장관을 지낸 고광만(서울사범대 학장), 이병도(서울대 대학원 원장) 등이 대표적이다.

지식인 출신 장관들이 군사·민간 정권에서 두루 요직을 거치는 ‘회전문’ 현상에는 장관별로 일정한 흐름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교육부(문교부 포함) 장관이다. 지식인 출신 장관 182명 중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가 38명(17.7%)으로 가장 많다. 교육부 장관들은 ‘교육부 자문위원→교육부 장관→대학 총장 및 재단 이사(장), 혹은 명예·석좌교수’의 패턴을 보이고 있다. 교육부 자문위원을 지낸 이들은 19명, 장관 퇴직 이후 대학 총장이나 재단 이사(장)를 지낸 이들은 19명이다.

‘자문위원→장관→총장·이사(장)’에 딱 맞아떨어지는 이는 12명.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85년 교육개혁심의회 교육발전분과위원장을 맡은 뒤 88년 문교부 장관을 지냈고, 95년 서울대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브니엘학원 이사장, 계원학원 이사장도 지냈다. 문교부 국정교과서 편찬위원(73년), 문교부 교육정책심의위원(78년)으로 일한 김덕중 전 교육부 장관은 2000년 장관에 발탁되고, 장관에서 물러나면서 바로 아주대 총장을 맡았다. 2003년에는 서강대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술원, 대한교원공제회 등 정부 산하 기관의 기관장·고위직도 주요 순환 코스다. 재정경제부(재무부·경제기획원 등 포함) 장관들은 입각 전 ‘재무부·경제기획원 자문·행정 위원회, 한국은행’ 등을 거쳐 장관 퇴직 이후에는 주로 국책은행, 공기업의 기관장을 맡았다. 민간 기업의 사외이사, 전경련 등 이익단체의 고문도 주요 코스다.

80년 재무부 장관, 91년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이승윤 전 장관의 경우 입각 전인 71년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96년 금호그룹 고문, 98년 전경련 자문위원직을 맡았다. 지식인 출신 장관 41명은 장관 퇴직 뒤 민간 영역에 진출해 총 80개 자리를 차지했는데, 기업 대표 41개(51.3%), 사외이사 17개(21.3%), 기업고문 13개(16.3%)였다.

공보부 장관 21명 중 11명은 언론인 출신이었다. 이들은 ‘대통령 비서실 공보수석, 해외대사 공보관, 언론사 임원’을 거쳐 장관에 임명되었다. 장관 퇴직 이후에는 정부 소유 언론사, 한국언론인기금, 언론재단, 간행물윤리위원회, 한국신문협회 등에서 기관장을 맡았다. 동양통신 정치부장 출신인 김성진 전 공보부 장관은 71년 대통령 비서실 공보수석을 지낸 뒤 75년 장관을 거쳐 80년 동양통신 사장, 81년 서울언론재단 이사장, 99년 성곡언론재단 이사를 지냈다.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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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어떻게 했나 
 
경향신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별취재팀은 지난달 말 이승만 정권~노무현 정권에 입각한 장관 862명을 대상으로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장관 명단은 행정자치부, 한국행정학회 홈페이지 등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구했다. 전체 장관 중에서 ‘지식인 출신’ 분류 기준은 교수, 강사, 연구원, 언론인 등이었다. 인물연감, 인터넷 사이트, 한국언론재단 데이터베이스(KINDS), 경향신문 정보자료실 자료 등을 참고해 입각 전, 퇴임 후 경력, 특이사항 등을 조사했다. 인물 정보의 기재 미비, 자료 부족으로 일부 누락된 사항이 있을 수도 있다. 검색한 자료를 분류하는 작업은 엑셀(EXCEL)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공직 참여’ 분류를 할 때 정부 자문·행정위원, 대통령 자문위원회, 중앙행정부처, 정부 출연·투자·소속·협력기관, 공기업 등 정부 관계기관에서 일했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공직 및 민간 영역에서 구한 일자리는 원칙적으로 조사된 것들을 모두 기재했다. 정권별 참여를 나눌 때 대선 이듬해 3월 인사에서 교체된 이들은 제외했다. ‘명예 박사’는 국적별·대학별 박사 학위 소지자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해외 대학 연수’ ‘대학원 수료’ 등도 학력에서 제외했다. 입각 전, 퇴임 뒤 공직 진출 현황, 교육계 진출 현황, 민간 기업 진출 현황 등을 분석할 때는 지식인 장관이 맡은 자리를 기준으로 했다. 취재팀은 이번 지식인 출신 장관 분석 과정에서 2003년 발표된 ‘우리나라 역대 정부의 장관 임용 실태 분석(이시원 경상대 정치행정학부 교수)’ 논문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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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보혁 아우른 변혁적 중도 필요”'
 
“올해 대통령 선거는 ‘87년 체제’ 극복에 결정적인 분기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민주개혁정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간주하는 보수세력과 급진적 진보세력의 대립이 계속된다면 우리 사회의 교착상태는 계속될 것입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현재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가치로 ‘변혁적 중도주의’를 강조하고 나섰다. 지난 12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UCLA 한국학연구소, 민화협 미주한인협의회 공동 주최로 미 LA에서 열린 ‘6월항쟁 20주년기념 국제심포지엄’의 기조연설에서 그는 “무조건 87년 체제의 극복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87년 체제의 구체적인 성격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면서 “87년 이후 20년간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확대된 건 사실이지만 분단체제 극복에서도 중요한 성과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분단체제 극복을 논의하는 것이 현 단계의 중요한 과제”이라고 밝혔다. 이 기조연설문은 곧 발간되는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도 실릴 예정이다. 백교수는 “87년 이후 20년을 민주주의의 모양새만 얻고 알맹이는 놓친 좌절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일면적인 해석”이라면서 “민주화의 내용을 ‘형식’과 ‘실질’로 가르는 것은 편의상의 구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때 한꺼번에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민주화 자체가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고비고비마다 조금씩 확장돼 왔거니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는 실질적 민주화 역시 87년 당시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진전했다는 것이다. 그는 “87년 6월 항쟁 이후의 정치적 민주화가 신자유주의의 득세를 수반하는 실질적 민주화 실패의 역사라고 보는 관점은 지난 20년간의 한국사회를 80년대 초반에 시작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신자유주의 국면 중심으로만 파악하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87년 체제를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시각으로만 볼 게 아니라 한반도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97년의 경제위기에서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폭로됐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이지만 그럼에도 87년은 남한민주화의 결정적 전환점이며 분단체제 동요기의 시작”이며 “87년 체제의 긍정적 동력이 완전히 소진되었다는 진단은 지나친 단순화”라는 것이다. 백교수는 “뉴라이트 논객들이나 야당내 수구인사들이 ‘87년 이래 방황의 시간을 극복하고 새로운 선진화 체계를 출범시키겠다’고 말하지만 87년 이래의 정치적 민주화 과정을 근본적으로 돌려놓거나 6·15공동선언을 폐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진보세력에 대해서도 “분단체제 변혁이라는 목표를 확실히 간직하면서 그 실현을 위해 다양한 세력들의 문제의식을 수렴하는 중도적 노선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이와 관련 그는 북미 당국자의 입장과 이익에 휘둘리지 않는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제3당사자인 시민사회, 나아가 해외동포의 적극적인 역할론을 강조했다. 백교수는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은 한미FTA 협상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꽤나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했지만 결국 타결을 저지하지 못했다”면서 이는 “운동 자체가 각기 속내가 다른 세력들의 다분히 전술적인 연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을 설득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기쇄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보수야당과 단순한 양적 확대에 만족하는 급진 정파들의 대립은 87년 체제의 내리막길을 더욱 가파르게 한다“면서 “FTA협정의 국회비준을 막는 과정에서야말로 단순한 전술적 연대를 넘어 87년 체제에 대한 통찰과 실질적인 극복방안을 갖고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한윤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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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이명박 전 서울 시장의 노조비하 발언 물의

* 한겨레(2007. 5. 13)  / 이명박 노조비하 발언 물의

[한겨레]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최근 한 초청강연에서 노동자와 노조를 헐뜯는 발언을 여과 없이 쏟아낸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정치권과 노동계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 전 시장은 지난 7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서울파이낸스포럼의 초청강연에서 “(지난달 인도의 소프트웨어업체 ‘위프로’를 방문해 보니) 소위 대학 출신 종업원들이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다’며 평시에 오버타임(초과근무)을 해도 수당을 안 받는다고 하더라”며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조도 만들지 않는다던데, 만들 수 없어서 못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 수 있는데도 스스로 프라이드(자부심)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대학 교수들의 노조를 만들기 위한 법안이 국회 상임위의 소위원회를 통과했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전 시장은 또 “서울시 오케스트라가 민주노총에 가입돼 있다. 아니, 음악하는 사람들이 민주노총에 가 있는데, 그것도 전에는 금속노조에 가 있었다”며 “아마 바이올린 줄이 금속이라서 그랬나 보다”라며 좌중의 웃음을 유도했다.



이런 발언을 뒤늦게 접한 민주노총은 지난 11일 성명을 내어 “이 전 시장이 ‘자부심이 없는 사람들이나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르고 노조를 만든다’는 망발을 했다”며 “이런 노조 비하 발언은 스스로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천박한 노동관을 보여준 데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대선후보 자격을 박탈하는 이명박 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나가겠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 김형탁 대변인은 같은날 논평을 내 “초과근무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도록 돼 있는 근로기준법 등 현행법을 아예 무시하자는 것이냐”며 “노동자를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의식을 가진 이 전 시장의 대선출마 선언은 결국 재벌을 대신해 권력을 잡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9일 논평을 내 “이 전 시장의 발언은 ‘무노조’를 칭송하고 나선 것이며, 개발독재 시대의 빈곤한 노동철학을 그대로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 소속 전국공공서비스노조는 10일 “(이 전 시장이) 예술하는 사람들이 무슨 노조냐는 식의 비하 발언을 했다”며 “오케스트라노조는 금속노조에 가입한 적도 없어 사실까지 왜곡했다”고 말했다. 공공서비스노조 산하에는 서울시향 직원노조인 세종문화회관지부가 있으나, 서울시향이 2005년 독립법인으로 출범하면서 세종문화회관지부 소속 오케스트라지회 조합원들이 모두 노조를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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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마이클 부라보이와 공공사회학

마이클 부라보이라는 미국의 거물급 사회학자가 방한했다고 한다. '공공사회학'을 주창한 학자라는데, 요즘 사회학 책들을 별로 안 읽은 탓인지 '공공사회학'이란 말 자체가 생소하다(저자는 <생산의 정치>(박종철출판사, 1999)로 이미 오래전에 소개됐다). 설명에는 '전문(professional) 사회학’과 대비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강단사회학의 두 조류가 되는 것인가?(뒤집어 생각해보면, 공공사회학은 가장 실제적/실천적인 학문이어야 할 '사회학'이 그간에 얼마나 폐쇄적으로 전문화되었던가에 대한 반증이자 반성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공공사회학보다는 그가 러시아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데 두어진다. 그 방면의 책들이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건 차베스에 대한 평가이다. 말발만 앞세운 사회학자들과는 좀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한겨레(07. 05. 12) 사회학자여, 강단을 넘어 대중과 만나라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마이클 부라보이는 ‘공공사회학(public sociology)의 전도사’로 불린다.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사회학자인 그는 사회학이 사회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믿는다. 사회학이 지향하는 가치가 강단을 넘어 대중과 직접 만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학자는 강단에서 학문적 엄밀성만 추구할 게 아니라 그들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직접 대중과 만나고 토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우리 학계에 널리 퍼졌던 실천적 경향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 사회학회 회장(2003~2004년) 시절 공공사회학을 주제로 미국사회학회 연례회의를 주재했으며, 지금도 각국을 돌며 공공사회학의 이념 전파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전 헝가리 철강 공장에 직접 취업해 노동과정을 연구하는 등 현장 체험에 바탕을 둔 실증적인 노동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지난 3일 중앙대·연세대 두뇌한국(BK)21 사업단 초청으로 한국을 첫 방문한 부라보이 교수를 4일 연세대 사회학과 원재연 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사회학자들이 왜 대중과 직접 만나야 하나.

=시민들이 그들의 존립에 물질적 지원을 하고 있다.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학자들이 봉급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시민사회에 뭔가를 돌려줘야 한다. 사회를 위한 의무다. 사회 역시 사회학자들의 가치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 자본과 국가로부터 시민사회를 지켜내는 데 학자들이 적극 기여해야 한다.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공공사회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공공사회학은 사회 문제에 직접 관여해 이슈들을 토론하는 것을 강조한다. 지향해야 하는 가치에 대한 단일한 정의는 없다. 다양한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공공사회학계에서는 사회정의와 평등의 가치가 점차 중요성을 얻고 있다. 내게는 ‘사회정의’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 가치를 어떻게 대중들에게 전달할 것인지 궁금하다.

=제도권 언론들이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모두 단일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미디어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치가 혼재한다. 예컨대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과 같은 유력지에서도 진보적 칼럼을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선 ‘공공 라디오’들이 훨씬 개방적이다. 사회학계 주최의 여러 행사에 언론인들을 초청해 교육시키는 데도 비중을 두고 있다. 중간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대중과 직접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노조와 각종 시민·지역 단체 회원들과 수시로 만나 토론한다.

-한국 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강단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영향이 크다. 미국의 사회학은 과도한 전문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아울러 시민사회의 조직화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학문적 지배권을 가진 미국의 이런 경향을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 중심의 국제학술지 논문 게재가 갈수록 강단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주요한 이유다.

-일각에선 세계화가 정점에 도달했다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어디를 가도 세계화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것을 본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전기·수도 등 공공서비스가 민영화되고 있고, 중국과 인도 농민들은 각종 토목 공사 때문에 땅에서 쫓겨나고 있다.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시장화는 그 반대세력을 키우고 있다.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 브라질 우루과이 등 남미에서 이런 기류가 확연하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세계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나.

=그가 세계에서 미국 지배권에 도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석유다. 그는 너무나 많은 ‘오일머니’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이유가 없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타협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대토지 소유자로부터 땅을 사버린다. 그들을 추방하지 않는다. 금융과 은행 제도와도 타협하고 있다. 너무 돈이 많아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게 가능하다. 나는 그를 ‘민족적 대중주의자(national populist)’로 본다. 그가 도시 변두리 주민들의 빈곤을 개선하기 위해 일종의 재분배를 한 것은 인정한다.

-세계화 흐름 이후 양극화 경향이 거세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최근의 사회운동은 일종의 수세적인 방어 운동이다. 공공영역의 민영화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의 미래에 대해선 비관적이다. 하지만 남미를 비롯해 세계화에 저항하는 많은 대안 찾기가 시도되고 있다. 시장화에 반대하는 조직화가 여러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대안은 이런 사회운동에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행로에 대해 어떻게 보나.

=1991년 이후 러시아 경제는 하강했으나 중국은 반대로 상승하고 있다. 러시아는 조직적으로 국가 전복을 시도했다. 혁명적인 방식으로 시장자본주의로 이행했다. 충격요법을 썼지만 치유책은 내놓지 못했다. 중국은 국가의 후원 아래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가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가치로서 언제든 의미가 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매우 다층적이고 비동질적인 사유체계이다. 자본주의에 대항한 사회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구실을 할 것이다.

-미국에서도 ‘인문학의 위기’를 체감하는지.

=내가 재직 중인 대학의 사회학과는 지금까지 계속 그 규모가 늘어나고 있다. 학문의 인기는 일자리의 수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의 물질적 매력에 기반한 지배력이 학문의 세계에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한 영향이다. 미국의 힘은 자신들의 교육 체계나 지식·이데올로기에 권위를 부여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남미가 저항 아이디어로 맞서듯, 유럽 등 다른 대륙도 미국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공공사회학 = 학문이 강단을 넘어 대중과 만나 지향하는 가치를 전파하고 토론해야 한다고 믿는 사회학의 한 분야. 1988년 미국에서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동료 전문 학자들과 이론적 논의에 그치는 강단사회학인 ‘전문(professional) 사회학’과 대비되는 개념이다.(강성만 기자) 

07. 05. 13.

P.S. 부라보이 교수의 홈피(http://sociology.berkeley.edu/faculty/burawoy/workingpapers.htm)에는 그의 '워킹 페이퍼'들이 링크돼 있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논문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론 편저인 <세계화와 새로운 정체성들>(2007)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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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서구 유럽에서 개인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진행중)
개인의 발견 - 어떻게 개인을 찾아가는가 1500 - 1800
리햐르트 반 뒬멘 지음, 최윤영 옮김 / 현실문화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1. 이 책의 목적

     이 책의 저자 리하르트 반 뒬멘(1937~2004)는 독일의 역사학자로서 독일 근대사, 그중 근세사가 주요 연구분야로 삼으며 특히 문화사 연구에 큰 역할을 하였다. 책 소개 페이지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나치시대의 일상사>의 저자 알프 뤼트케와 함께 일상사 연구자들과 독일의 '문화사 지향의 새로운 역사학'을 이끌어가는 학술지 <역사인류학>을 창간한 다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고 되어있다. 주요저서들도 주로 근대초기에 대한 일상사, 문화사적 관점을 통한 역사연구분석서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역사인류학에 대한 개론서적 성격의 <역사인류학이란 무엇인가>가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의 목적은 "근대적 개인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개인들이 자신의 사적 목표와 소망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또 개인들이 자신의 길을 발견하려고 어떤 시도를 했는지, 그런 가운데 어떻게 전통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기 위함이다."(9) 저자는 이러한 목적에 대한 잠정적(사실 이 책 전체의 결론도 이와 같다)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린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인'이라는 정의는 근대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말한 대로 개인과 개인성을 근대의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적어도 근대적 개인이 시민사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생각과 결별해야 한다. 개인주의적 행동은 근대초기에도 있었고, 전통주의적 행동은 19세기의 시민사회에도 존재했다."(16) 저자의 이러한 잠정적 결론은 위해 '근대적 개인'(근대적 개인이기보다는 보편적 개인의 특수적 표현으로서의 '개인')의 출현이 16세기에서부터 시작되어 19세기까지에 이르러 완성되기까지 시대와 사회구조의 변동 맥락에 따라 어떠한 관계를 주고 받으면서 형성되었는지를 탐색한다. 결국 이 책에서 저자는 "자아-발견, 사회변천 과정에서의 자아-발견의 전개, 그리고 개인적 사유 영역과 행동 영역의 발전을 부각시키고 있다."(17)

  2. 책의 본문 내용에 대하여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자기자신을 하나의 양식으로 정립한다는 것, 그를 통해 개인주의적 시대의 특유성들을 고안해 냈다는 것은 16세기에 있어 하나의 화두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주로 종교적, 미학적, 문학적 측면을 통해 증명한다. 이는 서구 역사 전체를 통틀어 규정될 수 있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근대적 개인주의 이전의 고대시대, 중세시대,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존재했었던)와는 확연히 분절되는 '특수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의 발견의 모태가 되는 16세기적 사회역사적 조건을 탐색하는 것으로 구체화 된다. 2장에서는 교회, 국가, 학교 등의 제도적 조건들이 어떻게 근대적 개인(주의)을 형성하는가를 탐색한다. 여기서 저자는 자기통제, 자기인식, 자기분석의 과정을 통해 개인의 형성 메커니즘은 이 세 가지 외부적 요인으로서의 제도의 힘에 의해 구성됨을 밝혀낸다. 저자는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사회라는 개인의 외부의 압력과 힘에 의해서, 즉 사회적 교육화에 의해서 개인화의 과정이 파생된 것임을 증명한다. 3장에서 저자는 인간 개인이 형성되는 조건들을 포획하는 지식적/담론적 구성의 역사적/사회적 과정들을 분석한다. 여기에는 크게 인간 개인의 육체, 영혼, 타자에 대한 인식, 야만, 문명, 동물과의 관계 등의 언표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크게 18세기의 '인류학'이라는 광범위한 학문적 범주의 틀 안에서 사유되었다(이는 다시 다섯 가지 핵심적 범주와 주제로 분류되는데 1) 인간과 동물의 관계 2)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과 자연존재로서의 인간의 관계 3) 육체와 영혼의 관계 4) 이성과 충동(본능)의 관계 5) 문명과 야만의 갈등 등이 그것이다).이는 다시 '주체와 타자'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재분류 될 수 있는데 여기엔 '몸',  '마음'. '인종'의 문제들이 개입된다. 각각 '골상학', '심리학', '인류학'과 같은 세부적 분과 학문 영역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포함된다. 저자의 이런 주장을 보다 면밀히 독해한다면 서구에서의 서구적 개인의 역사적 구성에 대한 학적 탐구(인간, 인간 본성, 인간의 역사,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탐구)는 서구 이외의 타자에 대한 바깥에 대한 탐사로 전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장에서는 근대적 개인의 형성과 그것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주로 개인의 내밀성의 형식을 표지하는 수단들(편지, 일기, 자서전)의 흔적들을 통해 탐색한다. 이는 개인의 자기 동일성의 현존적 표지(表紙)가 어떻게 양식화되는가를 밝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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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쟈그 아탈리와 미래의 물결: 신유토피아-하이퍼 민주주의?

* 한겨레(2007. 5. 11)  / [블로그] 21세기 신유토피아 - 하이퍼 민주주의를 말하다
자크 아탈리의 <미래의 물결>
블로그
인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 미래를 알 수 있을까? 미래는 꿈과 희망과 동경의 대상인가? 아니면 절망과 불안과 공포의 대상인가?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늘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은근한 동경이나 왠지 모를 불안이 모두 미래를 운명처럼 다가오는 어떤 객관적 실체로 여기는 삶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떨까? 나아가 미래가 결코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영역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로부터 예견되거나 결정지어지는 우리의 인식 영역 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일반화된 신유목주의(노마디즘) 시대의 예견을 통해 일약 최고의 미래학자로 명망을 얻고 우리 시대에 가장 왕성한 지적 사유를 펼치고 있는 자크 아탈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선택이 앞으로 다가올 50년 후의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선언하면서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미래란 예측 가능한 영역이며, 나아가 현재가 그 미래를 준비하며 결정한다. 이처럼 예측 가능한 미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현재는 미래를 결정하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에 현재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측 가능한 미래의 역사”라는 이 당당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아탈리의 확신은 과거에 대한 이해와 현재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되고 있다.

과거, 역사의 흐름의 법칙을 기록한 미래에 대한 안내서

과거의 역사는 아탈리에게 있어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하나의 일관된 법칙을 발견하게 해주는 교과서이었다. 그는 인류가 기록해 놓은 짧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역사가 어떤 법칙 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를 읽어냄으로써 앞으로의 짧은 미래에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를 예언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었다. 에드워드 기본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를 왕조 쇠망사 정도로 인식하게 될 경우 인류의 역사는 단지 왕조의 흥망성쇠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순환하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에 역사란 순환의 역사가 되고 만다. 이런 역사관으로는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나 희망을 전망할 수 없다. 아탈리는 이런 순환론적 역사관 대신에 역사가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한다는 선적 역사관에 입각해 인류의 역사를 다시 분석하였다. 그런 역사관에 따라서 그가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견해 낸 역사의 의미가 바로 그가 말한 <자본주의史>였다.

 

<짧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아탈리는 인류의 역사가 상업적 체제에 있어서 9개의 거점을 중심으로 단계적인 혁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러 왔음을 밝혔다. 그 상업적 체제의 혁명은 12세기 말 플랑드르 지방과 토스카니 지방을 배후로 한 브루게로부터 시작해서 베네치아, 앤트워프, 제노바, 암스테르담, 런던, 보스턴, 뉴욕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생산과 제조와 유통과 기술과 인적 자원과 금융을 지배하는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이동해 왔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일정한 법칙을 담고 있으며, 그 법칙에 따라서 미래의 변화를 예측함으로써 아탈리는 미래의 물결을 과감하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각 시대의 상업적 체제를 이끈 거점이 西에서 東으로 이동하는 일관된 법칙을 놓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으로, 그리고 태평양으로 그 거점이 이동되면서 오늘날 태평양 시대를 낳았다. 이런 경제적 거점 이동 현상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설명되었던 부분들이다. 자크 아탈리는 그러한 설명을 역사적 서술들을 통해 확정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여러 미래 사회학자들의 문명 중심 이론들을 들어왔다. 지난 참여정부 이래로 한국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림랜드 이론(rimland theory)였다. 과거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는 대륙을 지배하던 나라들로부터 해양을 지배하는 나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는 해양과 대륙을 연결시켜주는 림랜드(rimland)에 속하는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미국의 지정학자(地正學者)인 스파이크맨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이 이론은 유라시아 지방에서도 특별히 한국이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해석에 기반해 정치가들로 하여금 동북아중심권을 주창하도록 해 주었다. 아탈리의 상업적 체제의 “거점론”은 이런 림랜드 이론보다 더 역사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미래를 예견하는데 있어서 훨씬 더 신뢰할만한 이론적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이제 인류는 로스앤젤레스 넘어서 태평양의 신흥 경제 도시로 그 거점이 넘어올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런 거점의 이동에 대한 유추를 통해 우리는 향후 50년 앞의 역사를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西에서 東으로의 거점 이동이라는 법칙 외에 거점이 되는 도시의 조건에 있어서도 일관된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에 따르면 각 거점은 거대한 농업과 제조업 배후지를 가져야 하며, 상품과 인적 자원들의 이동과 교류가 원활한 입지적인 조건들, 즉 항만과 공항 등의 시설을 갖추어야 하며,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교류가 보장되는 자유시장 체제 및 개인의 자유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문화적 풍토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새로운 10번째 혁명을 이끌어갈 거점 도시는 어디가 될까? 저자는 이 혁명의 진원지를 여전히 멕시코와 남미, 그리고 태평양에 연접한 캘리포니아 남부의 도시로 지목하고 있지만 결국 가까운 미래에 미국은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세력의 지배하는 세계가 펼쳐질 것을 예견한다. 이른바 “일레븐”이 그것이다.

미국의 종말과 “일레븐”의 등장, 그리고 한국

아탈리에 의하면 미국은 궁극적으로 세계 대제국으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말 것이란다. 이미 등장하고 있는 수많은 국가 내적인 문제들을 방치한 채 국제적 혁명을 이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이제 자국 내 이익과 관리에 몰두하게 될 것이며, 국제적 지위는 다른 세력들에게 내주게 될 것이다. 물론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미국의 패권은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될 것이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서 결국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세력으로 부상하는 <일레븐> 국가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 것이다. 자크 아탈리가 제시한 그 일레븐에 속하는 국가들은 일본, 중국, 인도, 러시아, 인도네시아,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질, 멕시코이다.

이 <일레븐>은 현재 경제적, 정치적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국가들이다. 현재까지 이 국가들이 미국을 밀어내고 세계의 패권을 지배하면서 새로운 상업적 주체가 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만일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해 내고 현재의 잠재력을 잘 살려내기만 한다면 저들은 분명히 미래 사회를 이끌 주체들이 될 것이라는 게 아탈리의 예견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아탈리는 한국의 높은 경제 잠재력과 기술력을 <일레븐>에 들 수 있는 요건으로 보고 있지만 몇 가지 문화적, 정치적 상황이 극복되어야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한국은 고질적인 관료체제, 해양산업의 소홀, 창조적 계급 양성 및 관리 실패,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 등 거점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몇 가지 결정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잘 극복하기만 한다면 오늘날 한국의 신기술 및 지정학적인 위치상의 이점 등으로 인해서 <일레븐>의 지위를 가지고 세계 거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나 비록 나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가능성이 상당히 요원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탈리의 한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눈여겨볼만하다.

그러나 미래의 물결은 결코 미국이나 <일레븐>과 같은 거점 도시 혹은 국가들의 패권으로만 이끌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 책에서 아탈리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논리이다. 그는 이런 거점 중심의 상업적 체제의 혁명을 넘어서 미래의 물결은 새로운 현상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전에 인류 사회의 흐름을 노마디즘으로 예견하여 신유목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놀라게 했던 것처럼 이제 그는 우리의 후손들을 놀라게 할 새로운 미래의 물결을 예견하고 있다. 바야흐로 하이퍼의 물결이 그것이다.

미래의 물결: 하이퍼 제국, 하이퍼 분쟁, 하이퍼 민주주의

자크 아탈리는 미국이든 <일레븐>이든 짧은 미래의 다중심 경제 주체로서 세계를 이끌어갈 국가 혹은 제국은 점차 해체되어 갈 것이며, 그 대신에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하이퍼 제국이 도래하게 될 것을 예견하면서 이를 미래의 첫 번째 물결로 예견하고 있다. 즉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첫 번째 현상은 하이퍼 제국의 도래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이미 유엔의 역할이라든지 보험회사의 발전, 다국적 기업의 거대화 등을 통해서 예견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국가의 기능이 축소되더라도 유목적 주체로서 인류는 하이퍼 제국의 통제 하에서 새로운 사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굳이 그의 통찰력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구현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참고로 하이퍼란 3차원을 넘어선 새로운 어떤 것을 지칭하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국가를 유기체로서 이해하던 플라톤 식의 국가론은 이미 근대의 사회계약이론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우리는 그 사회계약적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한 제국주의적 국가의 멸망과 철저한 사회계약에 입각한 하이버 제국의 등장을 가능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퍼 제국의 등장은 인식 가능하다. 그러나 그 하이퍼 제국이 인류의 삶에 긍정적인 것으로의 변화인가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아탈리의 예견대로 하이퍼 제국은 미래의 두 번째 물결인 하이퍼 분쟁으로 이끌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이퍼 제국의 기능과 역할이 결코 인류의 삶의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하이퍼 제국의 등장으로 인한 수많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세계 긍정, 인생 긍정의 문화를 실현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하이퍼 제국의 주체자들과 희생자들이 극명하게 이원화되면서 하이퍼 제국은 하이퍼 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아탈리는 이런 부정적인 미래의 요인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빨리 찾아내는 길만이 인류의 미래가 희망으로 가는 길임을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미래의 세 번째 물결인 하이퍼 민주주의의 도래라는 것이다.

신 유토피아, 하이퍼 민주주의

여기에서 우리는 21세기의 유토피아를 읽게 된다. 그는 500년 전 토머스 모어가 그렸던 유토피아의 현대판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토머스 모어의 꿈은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소망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버려질 수 없는 꿈이었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 자크 아탈리에 의해서 하이퍼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는 미래의 물결이 결국에는 하이퍼 민주주의라는 신 유토피아로 갈 것이라고, 아니 그렇게 가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항상 희망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절대 명제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하이퍼 민주주의란 하이퍼 제국의 도래와 그에 따른 하이퍼 분쟁을 긍정적으로 해결하여 인류의 희망이 궁극적으로 실현된 사회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하이퍼 민주주의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전위부대 역할을 할 트랜스휴먼(trans human)에 의해서 성취될 것이다. 트랜스휴먼은 노마드이며, 창조적 계급이고, 이타적인 마인드를 구축한 신 민주주의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선을 대표한 사람들을 그 정신적 조상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저자는 빌 게이츠의 부인인 멜리나 게이츠와 테레사 수녀 등을 이러한 트랜스휴먼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들의 이타적이고 창조적인 역할로 인해 인류는 하이퍼 분쟁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미래의 세 번째 물결인 하이퍼 민주주의를 이끌어 낼 것이다.

하이퍼 민주주의는 이러한 트랜스휴먼들의 역할과 하이퍼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 일관된 노력을 추진하는 범지구적 기구들로 인해 이끌려지게 됨으로써 안정적 사회 운영을 구축할 것이다. 마치 19세기 계몽주의자들이 합리적 이성으로 사회적 유토피아의 도래를 예견했던 것처럼 이제 아탈리는 트랜스휴먼과 범지구적 기구들에 의한 21세기의 유토피아로서 하이퍼 민주주의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퍼 민주주의는 공동의 재산을 개발할 것이며, 집단 지능, 나아가 하이퍼 지능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삶을 존귀하게 하는 본질적인 재산, 즉 가치를 창출하도록 모든 사회적 역량을 구축할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지식, 주거공간, 음식, 의료, 일거리, 물, 공기, 치안, 자유, 평등, 존엄성, 네트워크, 유소년기를 누릴 권리, 인간의 존엄성, 이동의 권리, 연민과 고독을 느낄 권리, 사랑의 권리...” 등을 개인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야 말로 인류가 꿈꿔온 사회적 유토피아가 아닌가?

낭만주의의 부활인가? 이성적 사유의 결과인가?

정말 이런 사회가 짧은 미래의 역사에서 도래하게 될 것인가? 그의 이론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언뜻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지난 세기에 우리는 이미 계몽주의의 꿈이 무너진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인류 역시 계몽주의적 가르침에 의해 그같은 유토피아를 꿈꿨다. 그러나 그 때 인류는 합리적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시킴으로써 1,2차세계대전의 참화를 겪고 무수한 근대주의의 폐해 속에 신음했다. 그러자 포트스모더니즘이 등장해 인류의 유토피아적 꿈을 낭만주의로 치부한 채 희망 없이 그날그날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생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세대에 하이퍼 민주주의를 들고 또 다시 유토피아를 역설하고 있으니 자크 아탈리의 말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설사 또 다시 유토피아를 부정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할지라도 지금 이 현실에서는 그것을 꿈꿔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류가 사회에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테니까... 하이퍼 민주주의의 도래가 낭만적 사회주의자의 장밋빛 비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당위에 대해서까지 부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미래가 하이퍼 제국과 하이퍼 분쟁의 시대를 거쳐 하이퍼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이라는 아탈리의 모든 이론적 디테일을 우리가 다 검토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이론적 체계로 볼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는 그의 노력은 분명 이성적 사유의 과정임에 틀림없다. 그의 낭만주의적 견해는 그가 낭만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모두의 꿈이자 희망이기 때문에 나타난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닐까? 암튼 우리는 그의 책을 통해서 인류가 가까운 미래에 어떤 세계를 창출해야만 하는 지 그 분명한 목표 정도는 동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렸다는 그의 권면도 간과해서는 안 될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결국 그와 같이 낭만적 유토피아의 꿈을 다시 한 번 꿔도 괜찮지 않을까? 어쩜 우리는 지금 그 꿈을 잃어버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도 하이퍼 민주주의를 말해야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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