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이근배 지음 / 문학세계사 / 2004년 3월
절판


다시 냉이꽃

하늘은 무슨 땡볕을
그리 달구어 내리쬐이던지
땅은 또 떡시루를 연 듯
뜨거운 입김을 뿜어 올리던
한여름 그 밭고랑에 나가 앉으시던
어머니, 바로 그맘때쯤인
신사년 윤유월 스무사흘 새벽
내몰라라 잘도 삭히셨던
가시방석보다 더 쓰리고 아픈
망백의 세월 훌훌 털어버리시고
언제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는
지아비를 찾아 당신은 떠나셨습니다
저 조선왕조를 한몸으로 지키려던
거유 면암*의 문하에서도
으뜸이던 장후재학사의 셋째딸로
타고난 복을 누렸을 만도 한데
어쩌다 나라 빼앗긴 세상을 만나
지아비 섬길 날도 모두 빼앗기고
한시도 마를 날 없는
슬픔의 긴 강을 건너오셨습니다
텃밭에서 이른봄부터 늦여름까지
당신의 손끝에 무수히 뽑히던 냉이꽃풀
그것들은 당신의 얼굴에서 내리던 것이
땀방울인 줄만 알았겠지요
이 못난 아들도 알아채지 못해쓰니까요
누군가 당신의 빈소에 와서
냉이꽃 할머니가 돌아가셨네요
짧은 한 마디에
당신은 고향집 텃밭에 앉아 계셨습니다

*면암: 최익현의 호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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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서울 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 24
오장환 지음 / 미래사 / 2003년 4월
품절


독초

썩어 문드러진 나무뿌리에서는 버섯들이 생겨난다. 썩은 나무뿌리의 냄새는 훗훗한 땅속에 묻히어 붉은 흙을 거멓게 살지워 놓는다. 버섯은 밤내어 이상한 빛깔을 내었다. 어두운 밤을 독한 색채는 성좌를 향하여 쏘아오른다. 혼란한 삿갓을 뒤집어쓴 가냘픈 버섯은 한자리에 무성히 솟아올라서 사념을 모르는 들쥐의 식욕을 쏘을게 한다. 진한 병균의 독기를 빨아들이어 자줏빛 빳빳하게 싸늘해지는 소동물들의 인광! 밤내어 밤내어 안개가 끼이고 찬이슬 내려올 때면, 독한 풀에서는 요기의 광채가 피직, 피직 다 타버리려는 기름불처럼 튀어나오고. 어둠 속에 시신만이 겅충 서 있는 썩은 나무는 이상한 내음새를 몹시는 풍기며, 딱다구리는, 딱다구리는, 불길한 까마귀처럼 밤눈을 밝혀가지고 병든 나무의 뇌수를 쪼읏고 있다. 쪼우고 있다.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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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슈퍼맨의 등장이다. 이 영화는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고독한 물음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본'은 홀로 다친 몸을 이끌고 걸어가며 카메라는 거대한 아파트를 비춘다. 인간소외, 군중, 익명성, 고독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이 말은 단지 직장을 가지고 가족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경제적, 성적 필요성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아는 관계를 통해,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주인공 '본'은 기억도 없고 혼자이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혼자이다.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직장 상사, 부하 마저도 없다. 그는 군중 속을 걸어가지만 그 곳은 무인도이다. 그에게는 그 마저도 없다.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물을 수 밖에 없다. 'who was I?' 현재의 관계를 통해서 확인 받지 못한다면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받아야만 한다. 아니면 '나'라는 것은 없다.

언제나 슈퍼 히로들은 고독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실제로 자기 자신인 슈퍼 히로인지를 숨기고 현실 생활에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을 '알아주는'이가 없고, 그들의 삶은 분열되어 있다. 그러기에 외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슈퍼 히로일 때의 삶에서의 위안과, 일상 생활에서의 즐거움을 동시에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본'은 그렇지 않다. 일상 생활이 없고, 관계도 없다. 그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였는가?'를 묻는다. 그에게 '지금'은 없음으로 그는 '과거'를 바탕으로 자신을 재구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에 킬러였다.

그러나 그의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과 그 여인이 죽는 것으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이 여인과 그녀와의 관계가 '본'의 핵심이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 CIA 관찰관이 그의 과거를 말해주려고 할때, 그가 거부 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는 이제 'who I was'를 묻지 않는다. 그는 분명 킬러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를 극복한다. 그녀는 죽기 직전 그에게 그가 킬러'였음'과 상관없이 그는 지금 '그'임일 수 있음을 말한다. 그 당시 그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간절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 대답이 있다. 그는 이제 그녀가 사랑하는,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나'로서 위치를 규정할 수 있고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그녀의 간절한 눈빛은 한발의 총성과 함께 흐려진다.
'적'들에게 '본'은 아직도 킬러이다. '본'은 다시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를 물으러 나선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즉 '마리'가 그것을 원치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그녀는 '그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즉 영화는 본과 마리의 모습과 대화를 통해 매우 처음에 이미 '본'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준비해 놓았고, '본'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해답을 자기화하게 된다.

그에게 그가 킬러였음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의 정체성은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서 보장되었다. '본'은 스스로를 그녀와 사랑을 했던 '본'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본 영화는 더욱 쓸쓸해지고, 우리의 슈퍼 히로는 더욱 불쌍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었고, 그 이후에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녀를 사랑한 '본'으로 규정짓기 시작하였으며 '킬러'를 바라는 CIA와 대립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이제 그 여자를 사랑했던, 그리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갔던 그 '본'이다. (영화의 처음에 그는 분명히 말한다. 내가 떠오르는 추억 중 아름다운 것은 그녀와의 관계뿐이라고) 스스로 그렇게 인지하며 그는 더 이상 킬러이기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그를 킬러라고 생각하는 CIA와 러시아의 비밀요원은 아직도 그를 찾고 있다.

그러면 이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선택의 폭은 적다. 그가 그임이 그녀와의 관계와 그 추억에 의해서 확인되었지만, 그 기억은 점점 옅어질 것이다. 그는 타인과의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그 관계 속에 '내'가 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자신의 기억을 부정한채, '일반인'으로의 위장 잠입의 형태로 될 것인가. 이는 기존의 슈퍼 히로의 이중현실과 마찬가지의 패턴이 될 것이다. 그들은 두 현재를 살지만, 본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단절로.

아니면, 다시 본은 어떠한 경로로든 자신의 '적성'과 '과거'를 살려 킬러가 될 것인가. 그러나 이는 애써 정립했던 그녀의 애인으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녀와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떨쳐내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이든 쉽지 않은 행로이다. 이제 그 대답을 하게 될, 3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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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눅빌 스토리
유재현 지음 / 창비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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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소설집이다. 이제 80년대 뜨거웠던 리얼리스트 소설가들이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80년대 이른바 '공장소설'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인도 하에 노자의 착취관계와 투쟁의 '아름다운 새벽'을 그리기에 힘썼다면, 근래에 보여주는 리얼리스트 소설가들은 한국의 외부로 시선을 둔다.
 
90년대 이른바 '내면'과 '여성'의 발견은 충분히 유의미한 일이었지만, '역사의 종언'을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자본은 전지구적 제국의 비호아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고, 아직도 기층 민중은 신음하며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은 OECD 국가의 일원으로, '당당히'(!) 선진 자본국의 대열에 들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 하에 우리는 이제 준주변부에서 중심부로 가기 일보 직전인 것. 신자유주의를 부르짖으며 중심부가 눈 앞이라고 조금만 더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선동에서 시선을 돌리면, 주변부 민중을 착취하는 '우리'의 모습이 이이 오래전부터 민감한 시각의 리얼리스트들은 주목해 왔다.
 
이주 노동자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소설가 방현석이 베트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언제나 '국사'시간에 배우는 우리'민족'은 선량한 '피해자'라는 '사실'은, 베트남 전쟁에서 부정되었다. '우리' 또한 일제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민중을 '국익'을 위해 학살했던 것이다. 여기서 더 시선을 외부로 준 것이 바로 유재현의 이 소설이다. 방현석은 비록 장소가 '베트남'이라는 '외부'였지만, 주인공은 한국인이었다. 어찌보면 이는 주변부에 대한 '우리'의 착취를 보다 잘 고발하기 위해 필수적인 장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유재현은 '캄보디아'라는 우리 소설문학에 있어서 생경한 공간을 캄보디아인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캄보디아라는 공간은 우리에게 한없는 피해자로 인식되었던 베트남을 가해자로 인식하는 공간으로서, 역사공간에서 일방적인 피해자 국가와 가해자 국가라는 것의 허구를 다시금 일깨워 준다. 결국 문제는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대로 코스모폴리탄적인 '공공성'(public)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일테다. 그런 의미에서 유재현의 이 소설은 '외부'를 통해서 '내부'를 고발해왔던 시선과는 달리, 담담하게 '우리' 중의 하나인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유재현의 시선에 포착된 캄보디아 민중은 80년대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순수한 투쟁의 화신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기도 하고, 작은 일에 웃고 울고, 또 일상에서 후회를 느끼지만 변화하는 것은 힘들어하는 일반인들이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소설에서 보이는 따뜻한 시선은, 낙관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역사와 민중을 보는 긍정적 기운을 노출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사나이'라는 단편이다. 얼마전 유행했던 운동권의 소위  '후일담 계' 소설과 맞닿아있으면서도 다르다. 기존 '후일담계' 소설들이 순수한 운동권과 변절한 운동권이 벌이는 내적 갈등과 토론, 그리고 회의주의와 낙관주의를 적당히 버무린 엉성한 봉합이었다면, 유재현은 북한의 '순진하고 투철한' 사회주의자이자 군인을 내세워 그가 현실과 부닥치며 절망을 겪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와 같은 유재현의 특별한 차이들은, 어쩌면 리얼리스트 소설가들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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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쾨르 해석학의 전후: 실존과 그 의미를 찾아서

사실 우리가 작품을 읽고, 그것으로부터 받는 감동과 충격--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한다--은 사실 심정적이거나 정서상의 변화라고만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읽기 이전의 나의 세계, 즉 나의 존재 가능성들이 모색된 기존의 세계가 텍스트의 세계, 즉 나에게 제안되는 새로운 존재 가능성들의 세계와 격돌하고 충돌하는 데서 온 효과나 결과일 것이다. (윤성우, <<폴 리쾨르의 철학>>, 철학과현실사, 2004, 52~53 이하 면수만 표시)

 

결국 텍스트의 세계에 열려 있고, 이에 개방적인 읽는 주체인 독자는 그 스스로가 세계와 그 의미의 지배자이고 하는 자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자기 파악이나 자기 인식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주체다. 자기 이해는 텍스트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자기에 대한 해석을 통하는 다른 길 말고는 없다고 고백하는 주체다. 이런 점에서 신체를 배제한 데카르트적인 코기토만큼이나 "생각함(사유함. penser)"의 의미를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우리 자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함"으로 언명한 <<철학의 원리>>(1부, 원리 9)의 데카르트에 대해 리쾨르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내 자신에 의해서만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자각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쩌면 리쾨르가 프로이트와 공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신념인지도 모른다. 이는 또한 리쾨르 해석학의 근본적인 이념을 부정문을 사용해서 정식화한 것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정식화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간 주체의 외화된 언어적 표현물들(상징 텍스트 등)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만 주체의 자기 이해와 자기 파악이 가능하다. (54)

 

 

리쾨르와 주체물음

자기(soi)라는 것이 각종 동사 원형(부정법)들의 목적(보오)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철학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자기(soi)를 획득 또는 형성하는 것이 인간의 다양한 활동들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자기(soi)를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제 행위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행위를 통해 나(자신 혹은 스스로)를 내 행위의 행위자로 인식하며, 나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나(자신을 또는 스스로)를 내 이야기의 화자로서 알게 되며, 나는 (나의 행위에 대한) 가치 평가를 통해서 나(자신을 또 스스로)를 윤리적 주체로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쾨르 해석학의 근본 이념, 즉 직접적인 자기 인식이나 자기 이해는 없다는 점에서는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속에서의 이 자기의 해석학은 그의 이전의 해석학과 연속선상에 있지만, 텍스트나 기호를 통한 매개적 이해뿐만 아니라 인간 행위의 다양한 영역들--그 저작에서 보자면 언어적 실천적 이야기적 윤리-도덕적--을 통해 매개적 자기 해석과 이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불연속적이다. 이런 점에서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지니는 "종합적" 성격은 그의 이전 철학적 작업들의 단순한 총합이나 합산이 아니라 새로움이 깃든 일종의 재조명이다. 결국 "자기의 해석학"은 이런 인간 활동의 다양한 영역을 통해 자기(soi)를 해석함을 말하며, 이 해석학이 이런 제 영역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탐구의 결과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앞서 말한 "해석학적 변형"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78~79면)

 

의지 활동에 대한 기술적 분석을 통해서 육화된 주체의 발견이 있었고 인간의 언어적 표현물에 대한 해석을 통해 세계와 자신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움을 받는 주체가 제시되었고, 타자와 사회의 개입과 참여를 본래적으로 요구하고 자기(soi)로서의 주체 등이 새롭게 등장했었다. 이런 인간 실존 해명이 지평이자 무대가 되었던 신체 언어 그리고 타자 및 제도는 결국 주체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부정문을 사용해서 답한다면 신체 언어 타자 및 제도는 단순한 하나의 동질적이고 독립된 대상만은 아니다. 인간 신체가 한때 데카르트에 의해 기하학의 대상으로서 하나의 연장(res extensa)으로 취급되었고, 과학적 심리학 또는 경험과학에 의해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언어 역시 소쉬르의 기호언어학에 의해 한때 경험과학의 기술 대상으로 자기 폐쇄적인 하나의 대상이었다. 타자 또한 주체에 의해 완전히 구성될 수만은 없는 것이고, 사회나 제도 역시 사회(과)하의 연구 대상으로 국한되고, 고정된 실체로서 변화하지 않는 연구 대상만은 아니다. 긍정적으로 말해본다면 그것들--신체 언어 그리고 타자 및 사회--은 주체에게서는 아주 적극적인 매개체 같은 것이다. 좀더 강한 의미로는 조건과도 같은 것이다.

신체란 주체에게 이를 통해 자신의 기획과 결정이 세계 속에서 실현되게 하는 것이며, 세계로 자신이 열리게 하는 "유기적 매개체"다. 리쾨르에 따르면, 나의 나 될 바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할 바에 달려 있으며, 나의 존재-능력(존재-가능)은 나의 행위-능력(행위-가능)에 의존한다고 한다. 이 나의 행함의 능력--즉, 이것이 나의 존재-가능이나 존재-능력을 결정짓는 것이다--이 세계 속에서 실현될 때 전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신체라는 유기적 매개체인 것이다. 또 이 신체 없이는 세계 속에서 인간 의도(의지)의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주체 그 스스로가 그의 신체를 생성할 수 없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다.

언어 역시 하나의 탁월한 매개체인데, 나와 타자 사이에서 소통을 가능케 하고, 나와 세계 사이에서 지시를 가능케 하고, 나와 나 자신 사이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그런 매개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언어 속에서 해결된다거나 모든 것이 언어 속에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언어가 이르지 못하는, 즉 언어의 의미 분절에 저항하는 불투명한, 비의미론적 계기들의 세계 속에 있기 대문이다.(1) 하지만 인간 경험이 언어로 다가올 근본적 가능성이 없다면, 그 경험은 혼란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며 참다운 소통의 상태에 들어가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언어 없이는 인간이 의미의 장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언어 사용의 주체 이전에 하나의 제도로서 이미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언어는 하나의 조건이다.

타자 및 제도도 신체나 언어 못지 않게 주체에 하나의 매개체이자 조건이다. 언어 사용에서 뿐만 아니라 해우이 여역에서, 책임이 문제시되는 윤리-도덕 영역에서 타자는 이미 주체의 자기 규정 및 자기 이해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타자 없이는 주체는 참된 의미에서 말하고, 행위하고, 이야기하고, 책임지는 존재로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사회 역시 인간 주체의 개별적 역량과 소질을 실현시킬 수 있고, 타인과ㅡ이 관계가 일시적이지 않고 영속화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탁월한 매개체이자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신체 언어 그리고 타자 및 사회가 주체에게 지니는 "조건"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 주체의 창조적 주도권을 무화시키는 "구속이나 강제"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를 위해 리쾨르의 "의존적인 비의존성"이라는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 주체는 자신이 지닌 의존적, 즉 비독립적 상황 속에서도 나름의 상대적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신체의 조건 소겡서 이유와 동기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세계 속에서 의도를 가지고 의미 있게 행위할 수 있고, 분별력을 가지고 신체적 제약들에 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미 선재한 언어라는 조건 속에서 우리는 언어 사용자로서 새로운 의미의 생성과 이를 통한 자기 이해의 길을 마련할 수 있으며, 타자와 사회도 소외적이거나 불균형한 관계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타자와 연대하며 사회 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주체에게서 신체-언어-타자 및 제도가 그것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차원이라든가 타당한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새로운 의미 있는 차원의 발견이 앞으로 열려 있다는 점에서 "자기해석학"은 결코 완결될 수 없으며, 조기에 종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쾨르가 자신의 몇 권의 해석학적 저작들의 제목이나 부제에 붙인 용어들--즉, <<해석에 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시론>>, <<해석들간의 갈등: 해석학 시론>>, <<텍스트에서 행위로: 해석학 시론II>>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그래서 주체는 적어도 리쾨르에게서 계속되는 해석의 결과나 산물로서 재발견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82~85)

 

(1) 리쾨르는 이를 두고 상징화된 것, 즉 종교 경험에서의 성스러움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욕망의 정신분석적 경험에서 충동의 비표상적 부분인 감정(affect)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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