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부부합산 연소득 6,000만원 미만의 국민들은 보시오!

우석훈 선생의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2006, 녹색평론)을 읽다가 요근자에 읽은 어떤 FTA관련 서적들에 비해 확실히 알기 쉽게 FTA를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읽다가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 함께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일일이 타이핑을 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부분적으로 본래 책의 원고와 틀린 부분은 내가 교정을 본(교열이 아니라) 부분이거나 아니면 타이핑 하다가 오타가 난 부분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부부합산으로 연소득 6,000만원 이하를" 벌어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노무현호 아니 현재 흐름대로라면 '대한민국호'에 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현재의 추세가 바뀌지 않는다면 부부합산으로 연소득 6,000만원 이하를 벌어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현재의 '노무현호'를 타고 미래로 갈 이유는 없다. 만약 '고향' 혹은 '우리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 이 특수한 상품 혹은 서비스를 소비하는데 매우 특별한 만족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체재'를 찾는 것이 절실한 순간이다. 어차피 학교에서도 이제는 '우리말'이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이 올 것인데, 우리 말을 사용하는 편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높다. <21쪽>

그리고 "7장. 그럼 도대체 정부가 아는 건 뭐야"라는 부분을 한참 신나서 읽고 났더니 몹시 슬픈 이야기였다. 원고 내용 중 밑줄 치고, 굵은 글씨 부분은 별도로 내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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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럼 도대체 정부가 아는 건 뭐야?

한미 FTA의 결과, 무역수지는 손해인데, 서비스업도 별로 밝아보이지 않고, 미국 시장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고, 한국 시장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럼 대체 정부가 아는 게 뭔가? 보통의 경우라면 정부가 모르는 것을 중심으로 논의를 하고 자료를 준비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나 지금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공직자들이 한 얘기를 빈틈없이 뒤집어보면 정부가 뭘 제대로 아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정부가 도대체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저렇게 용감하게 “최단 시일 내에 성공적 협상을 하겠다”며 질주하는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한번 정부가 알고 있는 걸 찾아보기로 하자.

가. 농업은 망한다
어쨌든 노무현 정부는 농업이 망한다는 정도는 아는 것 같다. 이건 새로운 미국과의 통상 관계 때문이 아니라 농업은 그만둔다는 정책 기조로 지난 3년간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이다. 졸저 <아픈 아이들의 세대>에 노무현 정부의 농업 정책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분석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 농업의 얘기를 접기로 하자. 현재 국민의 8% 정도인 농민이 4%대로 줄어들지, 아니면 정부의 목표대로 1%대로 내려앉을지가 문제일 뿐이다.

나. 월마트한테는 안 당한다
월마트와 까르푸가 국내 유통업계에서 철수하게 된 것이 금년(2006년) 초이다. 정부는 대형유통시장에서 한미FTA로 경쟁조건을 바꾸더라도 국내 업체에게 승산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계속 죽어나갈 것이다. 월마트가 다시 들어올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하여간 정부는 “월마트한테 안 당한다”는 정도는 안다.

다. 한국영화 안 본다고 죽는 거 아니다
정부가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면서 국내 영화산업은 일단 현재의 절반 정도로 축소될 것이다. 국내영화시장 규모가 어느 정도로 유지가 되어야 할리우드와 경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정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스크린쿼터 146일 규모에서 일종의 ‘규모의 경제’가 생겨서 몇 개의 경쟁력 있는 한국영화가 나온 것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이 규모가 73일이 되면 기계적으로 시장 규모가 반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규모의 경제에 미치지 못하는 그만그만한 영화가 나오게 되는 것이 현대 영화시장의 특징이다. 이것까지는 정부가 몰랐던 거다. 정부가 아는 것은 다만 “한국 영화 안 본다고 안 죽는다”는 점이다.
멕시코의 일류 감독들이 지금 CF감독으로 연명하면서 3~4년간 돈을 모아서 겨우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 한 편 만드는 상황을 보면서도, 정부는 미국에 일단 스크린쿼터를 내주고 협상을 시작하고 있다.

라. 병원 안 간다고 다 죽는 건 아니다
보건경제학 쪽에서 조금 더 자세한 분석이 나오려면 6개월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숫자를 정확하게 내기는 어렵지만 아마 국민의 30%에서 40%정도는 한미FTA 이후 5년이 지나면 의료비와 보험비가 비싸져서 병원에 가기 어려워지는 게 사실이다. 계산하기 어려운 것은 얼마나 되는 국민들이 병원에 갈 수 없을지 여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건 소득분배의 재구성 모델이 나와야 숫자가 정확히 나온다. 의료서비스의 가격이 비싸지는 것은 시나리오 형태로 추정할 수는 있는데, 단지 국민들이 “얼마나 가난해질지를 몰라서” 계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정부에서는 한 가지를 알고 있다. 병원에 안 간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물론 그렇기는 하다. 돈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것이 서럽기는 해도, 아프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다. 약초요법과 전통의학 등 ‘대체의학’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도 있다.

마. 공무원들한테는 별일 안 생긴다
사실 정부라는 것은 공무원들의 총합이기도 하다. 공무원들의 운명은 사실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FTA는 민간부문과 민영화되는 공공부문까지 영향을 크게 미칠 뿐, 공무원들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이 거의 없다. 국민들이 겪게 될 평균적인 변화와는 다른 미미한 변화만이 생길 뿐이다. 만약 공무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지금 같은 방식으로 한미FTA 추진이 가능했을까? 확실히 정부는 공무원들에게는 별일 안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정부 내에서 저항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물론 지금 정부가 조심스럽게 준비 중인 ‘행정민영화’ 프로그램이 진짜로 강도 높게 추진된다면, 원칙론적인 ‘희망’과는 달리 공무원 세계도 격랑에 휘말리게 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바. 국민들은 농민 편 안 들어준다
정부도 인정하는 것과 같이 사실 한미FTA로 가장 많은 타격을 받을 사람들은 농민들이다. 꼭 한미FTA에서 특별한 규정이 생기거나 쌀시장이 추가로 개방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상 쌀시장은 이미 다자관계인 WTO에서 개괄적인 틀로 결정된 상태다. FTA라는 틀에서 쌀시장을 다룰 이유가 별로 없다.
전략적으로는 미국이 약간 요구하는 척 하다가 양보할 것이고, 정부는 국민들에게 그래도 쌀시장을 지켰고, 그 대가로 다른 분야에서 좀 희생을 했다는 선전을 할 것이다. 정부가 양자관계에서 다룰 필요가 없고 다루지도 않는 ‘쌀시장’을 꼭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걸 보면서 이건 거의 ‘야바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한미FTA가 농민들에게 치명적인 것은 협상이 진행된다는 이유만으로 몇 년 후에 시행될 ‘농업죽이기’ 정책이 훨씬 빨리 진행될 것은 물론, 추곡수매가 사라진 다음 실질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던 보조금 정책 등을 ‘없던 얘기’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부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국민들이 농민들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확실하다. 한미FTA를 통해서 농민이 손해보고 그 대신 서비스업은 좋아질 것이라고 정부가 선전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위험해진 미장원 주인들조차 농업이 망하고 어려워진 만큼 그 이익이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농민들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대다수 국민들이 절대로 농민들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히 안다.

사. 한나라당은 꼼짝할 수가 없다
노무현 정부는 적어도 한미FTA에서만큼은 한나라당이 꼼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나라당에는 FTA가 실제로 어떠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어떤 부문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분석할 수 있는 실무전문가가 없다. 따라서 정부에 곤란한 질문을 하지 못할 것이다. 정부도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 한나라당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구조상 불가능하다. 상당수 한나라당 당원들은 일단 ‘자유무역’이란 말이 들어가면 무조건 찬성하는 경향이 있다.

아. 국민들은 벤츠를 좋아해
한국정부는 자동차 부문의 협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은 모양새다. 미국정부도 한국시장에서의 자동차 판매에 꽤나 공을 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자동차 조금 더 팔자고 3,000cc 이상의 대형자동차에게나 적용될 제도들을 없애고, 배기가스 배출기준을 없애고, 심지어는 수도권 대기관리대책까지 없애라고 하는 미국의 요구는 내정간섭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부가 이런 기본적인 환경정책의 틀 정도는 지킬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게 진짜 협상의 핵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부문의 변화가 워낙 크기 때문에 어차피 타는 수입자동차, 독일제를 타나 미제를 타나 국민경제에는 별가시적 변화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연소득 6,000만원 미만의 국민들에게는 어차피 해당사항 없는 일이기도 하다.
정부는 국민들이 미국자동차를 타지 않는 이유가 다른 복잡한 이유가 아니라 벤츠와 BMW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안다. 반면 미국 정부는 아직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독일제 자동차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나 보다.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캐딜락을 타고 싶다는 미국인들처럼 한국인들도 자신의 첫 번째 외제 승용차는 벤츠이기를 바란다. 물론 한국정부는 이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자. 국민들은 식품 안전에 관심이 없다
정부가 아는 또 한 가지 사실 중에서 가장 슬픈 일은 한국 국민이 식품안전에 사실상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사고가 터지면 벌떼처럼 떠들지만, 길어야 일주일이다. 광우병 의혹이 있는 미국산 축산물도 문제지만, 한미FTA로 정말 곤란하게 되는 것은 유기농산물의 기반이 무너지고,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안전한 식품공급시스템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붕괴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한국 국민들은 이런 근본적인 식품안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무엇보다도 OECD 국가 중에서는 유전자변형식품(GMO)에 대한 인식수준이 가장 낮은 국민이라는 점을 정부는 잘 알고 있다. WTO협상에서도 다른 선진국이 전부 만들어 넣은 학교급식 재료조달에 관한 예외규정을 하나도 만들지 않은 게 한국이다. 정말 한국정부는 다른 건 몰라도 국민들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차. 그래봐야 이민 갈 용기가 있는 국민은 별로 없다
다음 장의 결론을 미리 당겨서 말하자면, 현재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FTA체제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국민직접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국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보인다. 이러한 경우에 유일한 의사표시 방법은 많은 국민들이 이민을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그래봐야 이민 갈 정도로 용기 있는 국민이 별로 없다는 사실까지도 잘 알고 있다. 이미 붕괴된 교육시스템에 불만이 있어서 많은 학생들이 조기 유학을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뭔가 대책을 세우기보다는 “공부 못하는 애들 유학 보내봐야 인생만 망가진다”는 ‘조기유학 위험론’으로 협박을 일삼던 정부다. 가끔 소주 마시며 대통령을 씹어대긴 하지만, 사실 국민들이 미래를 불안하게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점을 노무현 정부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쉽게 정리해보면, 정부는 한미FTA와 관련해서 정부가 꼭 알아야 할 것들은 거의 모른다. 그런데 국민들과의 협상에서 이기는 방법은 너무 잘 안다. 진화적 게임이론으로 상황을 설명하자면 ‘노무현 시스템’은 외국이 아니라 국민들을 상대하는 감각기관이 기이하게 발달․진화한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정부’라고 뭉뚱그려 표현하지 말고 대체 어떤 시스템을 가진 정부인지 좀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문 126~133>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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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는 장봉군 화백의 만평이 실려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자동차를 끌고 과속질주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앞길에는 미국과의 FTA협상으로 국민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른 멕시코가 있다. 대통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협상 한 번 잘못했다고 나라 망하는 거 아니다."

아마도 우석훈 선생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협상 한 번 잘못했다고 나라 망하는 거 아니다. 대신에 이민도 갈 수 없고, 그렇다고 이 나라에서 이대로 살기도 어려운 국민들만 망하는 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FTA를 막을 길은 국민직접행동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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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전호인 > 네이버 도서평가단 "북꼼" 모집-펌

알라디너들에게 좋은 정보가 될 듯 싶어 올립니다.
많은 리뷰를 작성하고 계시는 님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올리긴 하지만
이곳과의 경쟁으로 인해 올려도 되는 것인 지는 사뭇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선정만 되신다면 매월 신간도서 2권을 받아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으니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 까 합니다.


[머니투데이 백진엽기자]
NHN(대표 최휘영)의 검색 포털 사이트 '네이버'(www.naver.com)는 16일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지식정보를 공유하고, 숨겨진 양서를 발굴해 추천하는 네이버 도서 평가단 '북꼼'을 모집한다고 밝혔다.

책과 커뮤니티를 조합해 ‘책 읽는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진 네이버 도서 평가단 ‘북꼼’은 네이버 책 서비스를 이용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용자라면 누구나 8월 28일까지 '네이버 책'(book.naver.com)을 통해 지원할 수 있다.

네이버 도서 평가단으로 선발된 이용자는 매월 2권의 신간도서에 대한 리뷰를 작성해다른 이용자에게 양서를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네이버가 매일 발표하는 ‘오늘의 책’ 선정에 참여하고, 네이버 책 서비스 전반에 대한 모니터링 및 제안활동을 담당하게 된다.

도서분야에 따라 ▲문학 ▲비즈니스, 자기계발 ▲유아, 어린이, 자녀교육 ▲실용, 취미 ▲인문, 사회, 예술, 과학 등 5개 영역에 걸쳐 총 300명을 도서 평가단을 선발할 계획이다. 모든 평가단원에게 리뷰 작성에 필요한 도서를 무료로 제공하고, 자사 및 제휴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책 관련행사에 우선적으로 초청하는 한편, 우수 이용자에게 네이버 책 쿠폰 등을 증정해 평가단의 활동을 지원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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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된장녀' 사회학

얼마전에 유행어가 된 '된장녀'에 대해서 사회학 논문 한편 정도는 씌어질 수 있다고 했는데, 논문 대신에 특집기사 거리가 먼저 되었다. 중앙일보의 기사이다(혹 논문 자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중앙일보(06. 08. 16) '된장녀' 사회학 

-"사진 찍는 걸 좋아할 뿐인데, 이젠 커피전문점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사진 찍으면 '된장녀'로 오해받을까봐 걱정되네요." 회사원 이모(27.여)씨는 요즘 인터넷을 달구는 '된장녀' 때문에 색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 '된장녀의 하루'라는 글의 내용과 유사한 행동을 할 경우 자칫 허영기 많고 속이 빈 된장녀로 '낙인' 찍힐 수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된장녀 문제가 오프라인으로 확대되고 있다. 허영에 물든 사회의 단면을 꼬집었다는 주장과 근거 없이 여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왜곡된 인터넷 문화라는 반박으로 이어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 "패밀리 레스토랑 가면 된장녀?"='자기 치장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명품 가방으로 치장하고, 테이크아웃 커피점과 패밀리 레스토랑을 즐겨 찾으며 뉴요커(뉴욕사람)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는 20대 여성'이 인터넷에 비춰진 이른바 된장녀의 모습이다.

-된장녀는 지난해부터 일부 인터넷 카페에서 20대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사용돼 오다 지난달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린 '된장녀의 하루'라는 글이 확산되면서 '허영에 찬 여성들'이란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어 한 아마추어 만화가가 인터넷에 '된장녀와 사귈 때 해야 되는 9가지'라는 단편만화를 게재하고, '된장녀 키우기'라는 플래시 게임까지 나오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온라인에만 떠돌던 된장녀는 최근 여성 연예인들을 통해 오프라인으로 진출했다. TV 오락프로에 출연한 한 여배우의 말이 발단이 됐다. "(처음 만난 남자가)할인카드를 사용하면 분위기를 깬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에 네티즌들이 일제히 '된장녀'로 지칭하며 비난을 쏟아부었다. 이후 일부 연예인의 소비행태를 비꼬며 된장녀로 폄하하는 사례가 늘었다.

-최근 일어난 '가짜 명품시계' 사건이 보도되자 "가짜 명품을 산 연예인은 된장녀다"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네티즌 '배짱으로'는 "된장녀 논란은 허영심 때문에 안 내도 될 돈을 내고 소비하는 여성들의 삐뚤어진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일반인도 '된장녀 공포'=최근엔 평범한 여성도 된장녀로 몰릴 수 있다는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을 정도로 문제가 커지고 있다. 회사원 고모(26.여)씨는 "나도 된장녀의 하루에 나오는 B원피스, L가방, I MP3 플레이어를 쓰고 있다"며 "남들이 된장녀라고 부를까봐 겁이 난다"고 하소연했다. 이는 중산층 여성의 생활습관이나 소비행태를 빗대 된장녀로 매도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중산층이 찾는 특정 제품과 상표를 마치 사치품처럼 부각시킴으로써 소비문화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숭실대 배영(정보사회학) 교수는 "취업 등으로 불만에 쌓인 젊은이들, 특히 남성들이 이를 표출할 수 있는 통로를 찾지 못해 된장녀와 같은 대상을 만들어낸 것"이라며 "자칫 우리 사회에 만연된 편 가르기 현상으로 이어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한애란. 권호 기자)

된장녀서 파생된 말들

-허영심 가득한 미혼여성을 일컫는 '된장녀'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면서 '고추장남'을 비롯해 '머슴남' '된장아줌마' 등 아류 용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이런 용어는 '~의 하루'라는 내용의 글로 인터넷에서 유포되고 있다.

-고추장남은 된장녀와는 정반대 개념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능력이 없고 자기관리를 못하는 남성을 말한다. 잘 씻지 않고 유행 지난 가방을 갖고 다니며, 돈이 아까워 편의점에서 점심을 때운다. 주위에 친구도 없어 온라인 게임이나 인터넷 글 올리기로 시간을 보낸다.

-머슴남은 된장녀인 여자친구의 마음에 들기 위해 마치 '머슴'처럼 행동하는 남성을 일컫는 말이다. '술에 절어 일어났음에도 오늘은 여자친구를 만나는 날이라 행복하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머슴남의 하루'라는 글은 모든 생활이 여자친구 중심인 남성을 표현하고 있다. '(술이 안 깨) 토끼같이 빨간 눈을 본 여친(여자친구)이 뭐라 할까 걱정' '음식이 나오자마자 디카로 사진을 찍어 여친을 기쁘게 했다'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는 처음이라 감히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등 그의 하루는 여자친구의 비위 맞추기에 집중돼 있다.

 

 



 

-된장아줌마는 결혼한 여성이 주요 타깃이다. 가정은 등한시한 채 주름을 펴 주는 보톡스 주사를 맞아 탱탱한 피부를 자랑하고, 옆 동네 임대아파트 때문에 집값이 떨어질까 걱정하며, 자신보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주부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미국 시트콤 '섹스&시티' '위기의 주부들'등에 등장하는 30대 중반 이상 여성의 삶을 빗대 한국 주부들을 폄하하는 내용이다.(권호 기자)

06. 08. 16.

P.S. 그밖에 관련기사(내가 이 논란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사회의 실재로서의 '사회적 적대'가 어떻게 표출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래 기사는 성적 적대 관계/의식으로 이 문제를 해석한다. 

데일리안(06. 08. 11) 된장녀 논쟁은 남자의 질투심

-탤런트 김옥빈이 일명 ´흔들녀´에서 ´된장녀´로 불리며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검색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유명세를 떨치는 이유는 바로 ´된장녀´ 때문이다. 요새 인터넷 키워드로 떠오른 ´된장녀´ . 된장녀 키우기라고 해서 게임도 등장해 인기를 얻고 있는데, 제일 처음으로 된장녀가 알려진 계기는 ‘된장녀와 사귈 때 해야 될 9가지’를 만든 누리꾼 ‘번개돌이’ 임아무개(20) 씨의 작품이다. 이 만화가 인기를 끌면서 된장녀가 핫 이슈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된장녀의 정의는 설왕설래, 나름의 해석들이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여자들’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 욕설 ‘젠장’이 인터넷상에서 ‘된장’으로 변용되면서 ‘젠장녀→된장녀’로 바뀌었다는 설, 서양 문화·서양 남자에 무분별하게 열광하지만 근본은 결국 토종을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들을 비하해 일컫는 말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인터넷상에서 정의되고 있는 된장녀는 ‘전통적인 관습 중 여성에게 이로운 점은 당연시 여기고, 불리한 점은 불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을 말한다. 신데렐라 드라마에 빠져 명품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극단적 페미니즘을 신봉하여 남성을 혐오하면서도 남자들에 붙어 이득을 챙기려는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단순히 ‘개념 없는 여성들’을 지칭하면서 ‘X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된장녀 하면 허영심이 많은 여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언뜻 도화선이 된 만화를 보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으로 볼 때, 대체적으로 된장녀는 허영심이 많은 여자들인데, 할 일 없이 스타벅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거나, 매일 스타벅스에서 아침을 맞이 하는 여성들, 그리고 섹스 앤 시티에 열광하는 여자들이 된장녀들의 표본으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을 여성지나, 패션지에서는 유행을 선도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갖춘 여성들도 추앙하고 있다는 점이 된장녀의 논쟁을 근본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패션지는 이들을 ‘뉴요커를 꿈꾸는 여성들’ ‘코스모폴리탄을 꿈꾸는 여성들’이라 부르며, 유행이나 트렌드를 선도하는 집단으로 정의 내린다. 이 정의 마저 네티즌들은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된장녀의 논쟁에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섹스 앤 시티에 열광하는 여자들이 된장녀? 섹스 앤 시티에 주인공들은 된장녀? 라고 매도한다면 그것은 여성을 비하하고 깎아 내리는 것이다. 미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로,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섹스 앤 시티의 주인공 삶은 한 번쯤 여성이라면 꿈꿀 만한 삶이기 때문이다. 캐리, 사만다, 미란다, 샬롯은 어엿한 커리 우먼들이다. 각자 자신들의 일을 하며 사랑과 연애를 찾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가꿔나가는 뉴요커들이다.

-그러기에 이들을 꿈꾸는 여성들을 모두 된장녀로 치부한다면 곤란하다. 물론 드라마상에서 그녀들은 쇼핑과 연애 중동에 빠진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또한 일부 우리나라 여성들이 겉모습을 따라하는 풍조가 일고는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그녀들은 자신들이 직접 일선에 나가 돈을 벌어 그것에 대해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고, 인간에게 있어 빠질 수 없는 사랑, 남자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것을 누구도 욕할 수는 없다. 물론 캐리는 워커홀릭으로 캐리는 워커홀릭으로 너무나 비싼 구두를 사, 세를 내지 못해 쫒겨날 처지에 이르긴 한다. 또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남자 문제로 서로 전화를 붙들고 밤을 지새기도 하고, 이른 아침부터 비싼 아침식사를 하며, 남자 이야기에 열을 올리곤 한다. 문제는 그것은 어디까지느 드라마이고, 그 드라마에 주제에 맞춰서 스토리 전개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실제 인물이라면 커리우먼으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고, 각자 자신들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부분을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리는 칼럼니스트, 미란다는 변호사, 샬롯(결혼으로 일을 그만 두기는 했지만) 큐레이터, 샤만다는 홍보대행사 사장으로 어엿한 직업을 가진 커리우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녀들을 무작정 된장녀의 대표주자로 보는 것은 어쩐지 억울하다.

-캐리의 경우 자신의 돈을 모아서 구두에 소비를 하고, 샤만다는 당당하게 섹스를 좋아하는 여성으로서 남자들에게 절대적으로 뒤지지 않은 모습이다. 오히려 그녀들은 당당한 뉴요커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할 수있다. 그렇기에 이쯤에서 된장녀의 실체를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그것의 실체를 믿고 안 믿고는 성별의 차이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된장녀라 불리는 여성들은 자신들을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된장녀를 주장하는 데 목소리를 드높이는 사람은 남성들이다. 그러한 여성들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은근한 질투심에 불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성들이 주장하는 된장녀는 소비와 허영을 말하는데, 소비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섹스 앤 시티의 주인공들을 된장녀의 표본으로 본다면 더욱더 소비는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를 즐기고, 구두에 빠져있는 여성들이 아무때나 거금을 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특정인 부분에서만 소비하고 있기에 누구보다노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 설사 쫄쫄 굶어가며 그러한 것들에 매달린다고 해도 각자 개인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된장녀의 논쟁이 계속 된다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대립일 뿐이다. 아주 소모적이면서도 불필요한 논쟁일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돈을 벌어 저축을 한 나머지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돈을 소비한다는 것은 건전한 소비이다. 오히려 지지부지한게 돈을 알게 모르고 쓰는 비계획적인 소비가 지양되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이러한 된장녀의 논쟁은 남성들의 질투심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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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1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읽다가 회사원 '고모'씨 (26)세 때문에 웃었고 (생각해보니 '이모'씨는 더 흔하군요 ^^;; )
샬롯은 어엿한 '커리 우먼'에 웃었습니다. 커리(curry)우먼 ^^;
어쨌든, 이것을 잘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잘 이용해야 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분노, 적대의 방향을 잘 틀어서 말이죠. 만국의 pt여 단결하라, 이렇게 끌고 가기는 역시 어렵겠죠?
 
 전출처 : balmas > 나는 왜 '헤겔 평전'을 번역했나? - 프레시안

 

'88학번 물리학도'가 만난 '88학번 헤겔'

 

[기고] 나는 왜 '헤겔 평전'을 번역했나?

 

2006-08-14 오후 6:04:38

 

  인문학 연구를 업으로 택하는 이들을 찾기 힘들어진 지 오래다. 더불어 각종 실용서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출판시장에서 고급 인문학 서적은 점점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최근 출간되는 인문학 서적들은 대체로 독자들의 교양 욕구를 겨냥한 가벼운 읽을거리로 기획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아니면 최신의 이론적 조류만을 반영한 책이 보통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경향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책이 나와 주목된다. 미국의 철학자 테리 핀카드가 쓴 헤겔 평전〈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 그것이다.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헤겔의 삶과 철학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
  
  새로운 것 혹은 쉬운 것이 존중받는 최근 출판가의 경향을 고려한다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름의 철학자, 그러나 왠지 어려운 느낌을 주는 철학자를 방대한 분량으로 다룬 것은 상당한 용기를 요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용기만으로도 이 책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이런 책을 시장에 내놓은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용기를 내게 된 것일까?
  
  이 책의 공동번역자 중 한 사람인 전대호 씨가 자신이 헤겔의 평전을 번역하게 된 동기를 담은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전 씨는 이 글에서 1980년대의 혼란을 체험한 자신이 왜 대중과 시장이 외면하는 학문인 철학을 공부하게 됐는지, 그리고 이 시대에 독일 고전철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와 함께 전 씨는 헤겔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몇 가지 오해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전 씨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몇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다음은 전 씨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1980년대 말, 강의실의 고요는 우리를 안정시킬 수 없었다
  
  먼저 내가 처음으로 헤겔을 만나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1980년대 말이었고, 나는 물리학을 전공하는 문학청년이었다.
  
  이 땅의 초중등학교는 이를테면 무균실 같았다. 적어도 현실이나 정치나 사회와 관련해서는 철저히 소독된 곳이었고, 그곳에서 하루 24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며 우린 자랐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면역력인 비판의 능력을 키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계몽은 다름 아니라 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갖는 것이라고 칸트는 말했다. 그 말이 옳다면, 학교는 우리를 계몽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길로 인도했던 것이다.
  

▲ ⓒ프레시안

  그렇게 자라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때인 1980년대 말, 우린 모두 꿈이 컸고 불안했다. 나는 아인슈타인이나 퀴리부인의 이야기를 읽고 감동을 먹은 적은 없었지만,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국력에 큰 보탬이 되자는 각오도 가진 바 없었지만, 물리학도가 되어 있었다. 권력에 좌우되지 않는 진리, 누구나 이해하기만 하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명백한 진리, 추상적이기에 일의적이고 형식적이기에 단순한 기호들이 지배하는 진리, 그런 수학적인 자연과학의 진리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세상이 내가 꿈꾼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희고 고운 동안으로 물리학 전공과목을 들으면서 나는 그토록 신비로운 우주의 비밀들과 정교한 공식들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강의실을 왜소하게 고립된 공간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유예된 공간 안의 고요는 우릴 안정시킬 수 없었다. 만약 우리가 성장기에 합리적인 비판의 힘을 키웠더라면, 또 그에 걸맞게 이 세상도 조금만 더 합리적이고 관용적이었더라면, 우린 더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삶이 밖에서 물결치며 우릴 불렀다. 때로는 몸부림치고 피 흘리며 불렀다. 우린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의 '가치관의 정립' 장에서 이미 확립한 가치관을 고수하면서 지혜롭게 '아노미 상태'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때 우리의 잦은 구토가 꼭 술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노력하는 동안 인간은 헤매게 마련이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취미생활로 시작한 시 쓰기가 점점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자기 이름이 붙은 법칙을 남겨 과학사에 길이 남겠다는 욕심이 물러난 자리에 이 시대의 문제와 아픔과 비굴을 말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욕심은 두려움을 동반했다. 누구인들 자신이 속한 세상을 찬양하고 싶지 않겠는가. 정말 진지하게, 나는 불행하다고, 우린 다 틀려먹었다고, 부조리가 지배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녕 두려운 일이다. 원형극장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직시하는 것과 내 삶 전체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비극을 직시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한참 후에 나는 "노력하는 동안 인간은 헤매게 마련이다"라는 괴테의 문장을 알게 되었다. 또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사람들이 진리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차례대로 예외 없이 무너지는 과정을, 그 쓰라린 비극의 역사를 읽었다. "우린 모두 비극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어"하고 헤겔이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쓰라린 붕괴의 역사가 진리야"라는 그의 말이 덧붙여졌을 때, 나는 빛이 나를 휘감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길 위에 있는 자에게 주는 위안의 말, 영원히 안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불안에 떠는 자에게 주는 진정한 위로의 말, 위로를 의도하지 않고 다만 냉정하게 진실을 일러주는 말 - 넌 끝없이 쓰러지고 일어서고 또 쓰러질 거야.
  
  하지만 그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내가 이 세상과 나 사이의 불화를, 나의 정처 없음을 글로 옮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할 당시에 나는 헤겔도 괴테도 몰랐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토록 근본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고 모순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걸까?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나는 어리석어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불화에 대한 두려움, 전면적인 따돌림에 대한 두려움은 지금도 항상 나와 함께 있다는 얘기다. 헤겔은 철학을 하려면 이성과 '진리를 향할 용기'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경우처럼 용기와 두려움이 동전의 양면인 듯 함께 있는 것은 지극히 헤겔적인 구도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아름답고 정갈한 물리학을 포기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번역된 전문용어들이 난무하는 인문학의 어스름 속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가슴속엔 오직 하나의 다짐이 있었다. 무균실 밖으로 나가 치우치지 않은 삶을 살리라. 이 파편화와 분업의 시대에도 누군가는 설령 아무 것도 제대로 모르는 얼치기가 될 위험이 있다 해도 편협한 명쾌함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전체를 몽땅 붙든 채 흔들려야 하리라.
  
  자유에 대한 열망은 철학으로 향하게 하는 힘
  
  "모래 알갱이에서 우주를, 꽃 한 송이에서 영원을"이라는 유명한 시구가 있다. 이 시구가 표현하는 움직임이, 그 무한을 향한 움직임이 우리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도한 주장일까? 사람은 무엇을 보건 그 너머를 함께 보고, 어느 시스템에 속해 있건 또한 동시에 그 시스템 밖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 사실이 바로 독일 고전 철학자들이 자유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자유만이 전체와 어울릴 수 있다. 아직 삼류 철학자에 불과한 나이지만 헤겔의 어투를 흉내 내어 선언하자면, 자유로운 것만이 전체일 수 있고, 전체인 것만이 자유롭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롭다는 확고한 사실을 헌법의 첫 문장처럼, 공리체계의 첫 공리처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시작하는 학문이 바로 철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시각이 매우 독일적인 것으로, 더 나아가 지극히 헤겔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칸트가 입버릇처럼 붙이던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이라는 단서가 헤겔에 이르러 "적어도 우리 근대인에게는"으로 바뀐 이래로 자유에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지식체계는 결코 시대를 이끄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생계에 대한 불안…철학자는 작가가 되어야
  
  소크라테스가 과거의 자연철학자들과 달리 다시 지상으로 눈을 돌려 사람을 화두로 삼았듯이 나도 이 살벌한 세상에서 이리 깨지고 저리 무너지며 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인문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을 때, 내 눈에 철학이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자유에 대한 확신과 어울리는 학문은 철학뿐이라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치우치지 않고 전체를 말하려면 철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철학을 선택하려면 또 한 번 용기가 필요했다.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에도 아주 자세히 나오지만, '영원한 철학의 거장' 헤겔도 밥벌이를 제대로 못해 무던히 애를 먹었다. 철학을 해서 돈을 벌 길은 철학교수가 되는 것밖에 없는데, 그게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라는 것을 어린 나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상태였으므로 멀어져가는 밥그릇의 뒷모습을 그냥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젊은 동료 철학자들에게 '당신은 작가야'라고 말하곤 한다. 그들이 왕성하게 글을 쓰는 작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삶이 난해하다면 학문도 난해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헤겔을 공부하기로 한 것도 과감한 선택이었다. 헤겔은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게다가 아주 보수적이고 국가지상주의자이며 과학에 대해서는 무식이 철철 넘친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마르크스주의라는 '불온한' 사상과 맥이 닿아 있다고 했다. 자유를 제일 우선으로 두려는 나로서는 도처에서 들려오는 헤겔철학의 교조적 성격에 대한 경고가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헤겔을 전공해 보겠다는 나를 말렸다. 그러나 나는 꿈이 컸고 내 삶의 불안을 인정하기로 한 상태였으므로 두려움을 동반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삶이 난해하고 복잡한 것이라면, 우리가 하는 학문도 난해하고 복잡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물리학을 했으니 과학철학을 하면 무난하지 않겠느냐는 조언은 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헤겔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헤겔 자신이 누누이 한다. 그래도 나는 "참된 것은 전부이다"라는 헤겔의 문장과 그가 가장 중시하는 개념인 "'아니라'고 하는 힘(부정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는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고 전부를 알고 싶었다. 또 막연하게나마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항상 심하게 흔들리고 수시로 멀미에 시달리더라도 헤겔처럼 해보기로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헤겔의 보수성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지금도 나는 독자들에게 가깝고 민감한 정치사회적 사안들에 대한 헤겔의 생각에 처음부터 다가가지 말고 헤겔이 근본으로 삼은 멀고 추상적인듯한 원리들에 먼저 다가가라고 권하고 싶다.
  
  "너 헤겔처럼 말한다?"
  
  헤겔에게 가는 길은 지뢰밭이다. 수많은 오해가 마치 지뢰처럼 깔려 있다. 나는 크게 두 가지 오해를 언급하려 한다.
  
  한편으로 헤겔은 도무지 알아먹기 힘든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사람으로 찍혀 있다. 영어권 지식인들은 종종 "너 헤겔처럼 말한다(You sound like Hegel)"라는 표현을 쓴다. 뭔가 아주 고차원적인 얘기를 하는 듯한데, 안개가 자욱하게 낀 듯이 도통 불명확하고 공허하다는 뜻이다.
  
  헤겔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자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유한한 개인 앞에 무한으로 다가오는 이 삶을 정말 통째로 풀어헤치는 작업을 누군가 했다면, 그의 글이 난해한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헤겔은 이른바 낭만주의의 시대에 활동했다. 계몽주의가 내세운 이성의 과도한 자신감이 분명한 폐해를 드러내면서 근본적인 반성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할 때 그가 나타났다. 그런 그가 남긴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는, 진실은 결국 불명확한 흔들림일 수 있다는 생각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 이 교훈 때문에 그는 200년 전의 철학자답지 않게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적이다. 이 글에서 소개할 책의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현대의 어느 프랑스 철학자는 모든 현대 철학자들의 가장 큰 불안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많은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하더라도 그 길들은 결국 끝이 막혀 있는데, 그 끝에는 항상 헤겔이 미소 지으며 기다리고 있다."
  
  나는 요새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있는 스피노자나 니체나 들뢰즈보다 헤겔이 더 어렵다는 말은 잘 이해가 안 된다. 원리적으로 글의 난해성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정말 난해한 것을 충실하게 다루기 때문에 생기는 난해성이고, 다른 하나는 쉬운 것인데도 불충분하게 다루기 때문에 생기는 난해성이다. 헤겔의 난해성은 전자에 해당한다.
  
  헤겔이 교조적인 전체주의자라고?
  
  다른 한편으로 헤겔은 세상사 전체에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을 강압적이고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삶의 풍요를 제거해버린 교조적인 철학자로 찍혀 있다. 이 오해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우리가 일본을 통해 헤겔을 수입했다는 역사적인 우연 때문에 오해가 강화되었을 것이다. 헤겔 하면 정/반/합의 도식을 떠올리고, 절대정신의 절대적 지배를 떠올리는 것이 우리에겐 자명한 정석이다. 헤겔은 모든 각각의 것에 불분명하게 들어 있는 모순이 자신을 명백히 드러내는 과정들을 정말 다채롭게 서술했고, 그의 절대정신은 종교와 예술과 철학의 형태로 존재하는 앎이다. 도대체 어디에 기계적인 도식이 있고, 어디에 절대적인 국가권력 따위가 있는가?
  
  "참된 것은 전체이다"라고 선언한 전체주의자 헤겔과 그의 뒤를 이은 마르크스에 대한, 시위대가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고 불사르듯이 헤겔과 마르크스의 인형을 세워놓고 하는 이상한 비판은 이 나라의 국민윤리 교과서가 제공하는 철학의 단골 메뉴였다.
  
  그러나 귀 있는 독자여, 헤겔의 말을 들어보라. 그가 표현하고자 한 전체, 그가 내세운 정신은 이러하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움츠러들고 환란 중에 순수하게 숨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참고 환란 중에 자기 자신을 얻는 삶이 정신의 삶이다. 만신창이로 찢어진 조각들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만 정신은 자신의 진실에 이른다."
  
  국가의 책임 회피를 비판하는 게 헤겔의 메시지
  
▲ ⓒ프레시안

  숱한 비판에서 국가에 대한 헤겔의 태도를 문제 삼으니 국가를 예로 들어 해설해보자. 만신창이로 찢어진 조각들처럼 파편화된 개인들 각각에서 국가 자신을 발견할 수 없는 국가는 진정한 국가가 아니라고 헤겔은 분명히 말했다.
  
  개인이 각자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덕목이 부각된 근대 이후 국가는 개인들 각각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어렵게 되었다. 국가에게 환란이, 심지어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국가가 움츠러들어 책임을 회피하거나 순수하게 숨어 행정편의적인 제도로만 존속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헤겔의 메시지다. 우리 각자가 국가 안에서 나 자신을, 국가가 우리 각자 안에서 국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누가 반기를 들 수 있을까? 또 귀 기울여 들어보라. 헤겔은 애초부터 만신창이가 된 적도, 될 생각도 없는 기계적인 국가, 전체주의적인 국가를 진정한 국가로 옹호하고 있는가? "만신창이로 찢어진 조각들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만 정신은 자신의 진실에 이른다." 헤겔은 오히려 국가는 먼저 만신창이로 찢어져야 하고, 하지만 결코 그 단계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사람이다.
  
  헤겔의 정신, 헤겔의 체계, 헤겔의 전체는 애초부터 정해져 있어 부분들을 옭아매는 틀이 절대로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피도 눈물도 없는 논리의 철학자요 지독한 전체주의자라는 오해가 막강한 위세를 떨치는 모습을 보면 황당함을 느낀다.
  
  나는 헤겔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정신' 따위는 잊고 헤겔에게 다가가라고 권하곤 한다. 아니 어떻게 그걸 빼고 헤겔을 논하느냐고 그들은 반문한다. 나는 그걸 빼야 헤겔의 목소리가 들릴 거라고 장담하곤 한다.
  
  헤겔을 담배 가게 아저씨처럼 편하게 느껴보자
  
  헤겔은 70년생 88학번(헤겔은 177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나 1788년 뒤빙겐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이다. 역시 88학번인 내가 이렇게 학번과 생년을 들어 그를 소개하면, 사람들은 해맑게 웃곤 한다. 워낙 위대한 철학자로 인정하다 보니 그 흔한 88학번 친구로 소개하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철학자를 그렇게 우리 동네 담배 가게 아저씨처럼 대해야 함께 철학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참된 무한은 제 안에 유한을 거두어 품기 마련이다. 헤겔이 진정으로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라면, 마땅히 담배 가게 아저씨처럼 편하게 느껴져야 옳다.
  
  과연 어떻게 하면 그 겁나게 난해한 헤겔을 담배 가게 아저씨처럼 편하게 대할 수 있을까? 이제 드디어 최근에 나와 태경섭 형의 공동번역으로 출판된 헤겔의 평전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을 소개할 차례가 된 것 같다.
  
  강압적으로 맞이한 근대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헤겔 철학
  
  영어권에서 손꼽히는 헤겔 전문가인 테리 핀카드 교수가 쓴 이 책은 우선 헤겔의 삶을 놀랍도록 자세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이 책이 1000쪽 이상의 분량으로 불어난 첫 번째 주요 이유다. 게다가 '찾아보기'에 나오는 인명들만 훑어봐도 알겠지만, 이 책은 헤겔의 삶을 그 삶이 놓였던 시대에 초점을 맞추면서 서술한다. 핀카드는 헤겔이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시대에 살았던 최초의 근대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헤겔은 근대를 환영하는 동시에 진지하게 고민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는 우리의 학계와 문화계에서 '근대성'에 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 논의에 철학의 기여가 미미한 것 같아 부끄럽다. 철학이 영원한 것에 관한 학문이어서 '근대성'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이 땅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근대성을 논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논의에 철학자가 귀를 기울일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의의는 각별하다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래 세력(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강압적으로 근대를 맞이한 독일의 상황과 당대 지식인들의 대응을 정말 상세하게 서술한 책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지역적 전통과 특수성을 고수하는 고향 마을의 특수주의와 인간 보편의 가치를 내세우는 근대 국가의 보편주의 사이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대립하는 그 두 입장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핀카드는 설명한다.
  
  독일어 연습시간으로 전락한 철학 세미나…헤겔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다
  
  각종 자료와 정보의 충실성에 있어서 가히 필적할 경쟁서가 없어 보이는 이 책은 전문적인 학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즐거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까? 나는 앞에서 담배 가게 아저씨처럼 친근한 헤겔을 언급한 바 있다. 나는 평전의 형태를 띤 이 책이 헤겔을 그렇게 친근한 인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일반인들에게도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헤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헤겔을 공부하기로 해놓고도 언어의 장벽에 막혀 답보하다가 독일로 떠날 때, 정말이지 나는 헤겔을 읽으면서 그의 목소리를 한 번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독일어라는 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수도 없이 절망해야 했던 날들이 내 안에 헤겔의 목소리를 향한 열망을 키워놓았다. 진리의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여 대학원에 들어온 초롱초롱한 눈들이 열 개 쯤 자발적으로 모여 칸트를 읽었는데, 대부분의 시간이 독일어 문법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채워졌다. 안타깝게도 번역서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진지하게 인정하고 고민해야 할 장벽이었는데, 그 때는 그냥 별 것 아닌 놈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독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제발 독일어 문법 안 따지면서 철학책 한 번 읽어보자는 생각이 나를 움직였다.
  
  헤겔을 알려면 물론 헤겔을 직접 읽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10년 전에 내가 그랬고 지금도 적잖이 그렇듯이 이 나라의 학생 대부분은 그 최선의 길을 갈 수가 없다. 잘 이해가 안 되는 한국어나 영어 번역판을 앞에 놓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노라면 복장이 터진다. 차라리 원서가 낫다는 말 절로 나오고, 초롱초롱한 눈들의 철학 세미나는 다시 독일어 연습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철학자 칸트나 헤겔의 목소리는? 철학을 해본 독자는 알 것이다. 전혀 안 들린다. 그들이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들이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을 구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아 왜 그랬을까, 전혀 안 들었다.
  
  평전을 통해 '인간 헤겔'을 느껴보자
  
  그래서 나는 평전이라는 장르에 큰 매력을 느낀다. 사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원한 철학의 거장' 헤겔은 꼭 200년 전에 <정신현상학>의 원고를 완성하여 불멸의 지위에 올랐다. 그런데 바로 그 해(1806년)에 그는 사생아 아들의 출생을 참담한 심정으로 기다리며 수입이 보장된 일자리를 찾아 백방으로 헤매고 있었다. 그의 인생이 바닥에 이르러 삽질을 하던 때였던 것이다.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에는 원서에는 없지만 옮긴이들의 주장으로 덧붙여진 부록이 있다. 헤겔이 쓴 <정신현상학>의 서문이 그것이다. 나는 헤겔을 사람으로 보게 된 일반 독자들에게 그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나는 번역가로서 그 <정신현상학> 서문의 번역에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일단 죽어 상품이 된 다음, 시장에서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준엄한 정언명령인 것 같다. 판에 박힌 논술 공식들이 길잡이별로 높이 떠 철학을 원하는 젊은 정신들을 인도하는 이 시대에, 자꾸자꾸 얕아지기만 하는 출판시장의 악다구니 속에서, 우선 가격과 두께에서부터 소비자를 겁주는 이 책이 당당히 부활할 수 있다면, 그건 그냥 그 자체로 '희망'이라 불러도 좋은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정녕 그럴 수 있다면, 이 책은 기꺼이 여름용 베개라도 되고 싶다.
   
 
  전대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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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16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다음 부분에서 눈이 크게 떠졌습니다. :)
어떤 면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래 세력(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강압적으로 근대를 맞이한 독일의 상황과 당대 지식인들의 대응을 정말 상세하게 서술한 책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지역적 전통과 특수성을 고수하는 고향 마을의 특수주의와 인간 보편의 가치를 내세우는 근대 국가의 보편주의 사이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대립하는 그 두 입장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핀카드는 설명한다.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연 1행의 신새벽 뒷골목은 2연을 참고하면 민주주의가 탄압을 받는 공간이라는 의미와 곧 ‘아침’ 즉 민주주의가 도래할 시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화자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이름’을 쓴다는 의미는 이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의미,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을 화자는 머리로도 발길로도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되었다. 다만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그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화자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남 몰래’ 쓰게하는 힘이 된다. 민주주의라는 사상을 ‘남 몰래’ 써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1연의 ‘신새벽 뒷골목’은 2연의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이다. 여기서는 쫓고 쫓기는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곧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가 난다.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긴박한 상황이 ‘소리’들의 점층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소리들 속에 그리고 화자의 가슴팍 속에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깊이 새겨져 있다. 이는 지금의 상황이 비민주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비명소리’는 민주주의가 가슴팍에 깊이깊이 새겨지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외로운 눈부심’으로 표현된다. 고통에 빠진 모든 이들이 바라는 이름임으로 ‘눈부심’에 가득차 있지만, 누구도 진정 이와 함께하지 못하고 있기에 이는 ‘외로운 눈부심’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외로운 눈부심’은 삶의 아픔, 추억으로만 남은 푸르른 자유,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을 화자에게 떠올리게 한다. 이에 분노하는 화자는 떨리는 손과 가슴으로 백묵으로 나무판자에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너무도 강하기에, 민주주의를 배반하고 사람들을 탄압하는 현 상황, 죽어간 벗들에 대한 기억들이 그를 분노하게 하면서도, 너무도 슬프게 하기에, 또 ‘남 몰래’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쓰는 상황 자체가 비참하기에 그는 ‘숨즉여 흐느끼며’ ‘남 몰래’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적는다.

 

*배고파서 글도 대충 썼다~~~ ㅜㅠ 오늘 분량 2개 더 써야하는데 힘이 없다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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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와 연우 2006-08-1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골목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로 조용조용 따라부르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김지하라는 이름이 아득합니다. 좀 난감하기도 하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저 시를 가르쳐야 할 입장이라면 뭐라고 설명할까, 하고...^^

기인 2006-08-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쩝. 글이 아니라 '말'로 한다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인데요. 분량 제한과 배고픔(?) 때문에 그냥저냥 '정답' 비스무리한 이야기만 쓰고 말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