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에서 김윤식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계시군요 ^^ 저는 공익 복무 때문에 시간이 안 되서 못 들었답니다 ㅜㅠ 대신 애인이 가서 열심히 듣고 있지요. 애인에게도 정확한 맥락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봤는데, 김윤식 선생님께서 별로 자세히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고 하네요 ^^;

자명한 산책님: 지난 번에 기인님이 요즘 문학 전공자들이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하셨는데, 김윤식 교수의 강의를 듣다가 얼핏 하시는 말씀이(자세한 말씀은 없으셨는데) 포스트식민주의의 문제제기가 성립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그런 것까지도 다 포괄하고 있는 것인데, 이제 와서 포스트식민주의의 명제가 학적으로 성립이 가능한 것인지 자신은 의문이다.~는...... 얘기의 맥락을 좀 더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제가 철학 전공자가 아니고,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 콜러니얼리즘)을 공부는 했지만, 저도 포스트 식민주의의 문제제기나 실효성에 상당히 비판적이라서 탈식민주의 입장에서의 대답이 될 지는 모르겠네요. 국문과 동료 중에 탈식민주의 전문가가 있으니 제가 글을 쓴 이후에 또 물어보도록 할께요 ^^ 사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책을 한 권 쓸수 있을정도로 전문적인 것일 터이고, 저는 그러한 전문성이 없지요 물론. ㅋ 그러니 저도 그냥 자명한 산책님과 함께 고민해본다는 의미로, 앞으로 더 공부할 방향 같은 것이나 전체 맥락만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이것도 어려울 것 같네요 ^^;

지금은 집에 와서 제 옆에 장씨 아저씨의 헤겔 정신현상학 연구가 없지만 ^^;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어떻게 탈식민주의 (그냥 이 용어로 통용하도록 할께요. 포스트 콜러니얼리즘, 포스트 식민주의, 탈식민주의. '포스트 식민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포스트 식민주의' 답기는 하지만 ^^ ㅋ)의 문제제기와 연결이 되나 부터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 제가 철학전공도, 더군다나 헤겔 -_-; 전공은 아니라서 대충 약술 합니다. ㅎ)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자기 의식이 또 다른 자기 의식에 대하여 인정 투쟁을 통해 성립합니다. 하나의 '자기 의식'은 자신이 '본질'임을 확신하기 위하여 다른 독립적인 본질(다른 '자기 의식' 즉 타자)을 지양합니다. 이러한 인정 투쟁에서 승리한자가 바로 '주인' 즉 인정받는 자이고, 패배한 자가 바로 '노예' 즉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주인에 '의해서' 노동하는 노예는 노동함으로서 사물에서 주인으로서 정립되고 반면에 주인은 노예의 노동 산물에 예속됨으로서 사태가 역전하는 것.

이것이 주인-노예 변증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탈식민주의적 문제제기와 주인-노예 변증법은 어떠한 맥락에서 연결되는 것일까요. 탈식민주의는 용어 자체가 함축하고 있듯이, 식민주체-식민지의 정치, 경제, 문화적 관계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이 중 문화적 관계에 대한 전복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요.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요약하자면, 결국 '식민주체'의 것을 전유하는 것을 통한 저항으로서의 식민지 문화의 모방성. 또는 전후관계나 주체적 입장을 달리해서 말해보면. 식민지 문화의 모방성은 식민주체의 것을 전유하는 것을 통한 저항이라는 것. 또는 이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궁극적으로 탈식민주의 문화/문학 이론의 기본 전제이자 목표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김윤식 선생님의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이 이를 포괄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결국 두 자기 의식에서 패배한 '노예'로서의 식민지가 주인을 극복 지양하는 것. 이라는 일차적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순수 의식의 측면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살펴보면, 마찬가지로 노예과 주인을 극복할 때 노예는 주인 속에서 주인을 본질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함으로서 '대상의식'이 아니라 '자기 의식'으로서 정립합니다. 결국 자기의식은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립 기반을 찾는 것이라 할 때, 궁극적으로 '주인-노예'관계는 평등한 두 상호주관으로 정립해야 합니다. (이는 사실 당위론적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탈식민주의에서 말하는 '식민주체' '식민지'의 이자적인(물론 상호작용도 존재합니다만)  영향-피영향, 주체-모방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김윤식 선생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인류 차원/인류사'의 전개라는 것도 결국 일국 일문화 민족주의적인 경계를 벗어나서 생각한다면, 식민주체-식민지라는 차원도 자기의식이 또 다른 자기의식 속에서 자신의 존립 기반을 찾아나서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굳이 '탈식민주의'라는 문제제기조차 별 의미 없다는 것이 된다는 것. 문제는 '탈식민'이 아니라 노예의 '자기의식'화일 뿐이라는 것.

 

저는 헤겔이나 탈식민주의를 공부하려고만 몇번 하다가, 금세 흥미를 잃은 이유 중 하나는 너무 '관념적'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아직도 '토대-상부구조'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환원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 변수 중 하나가 토대임은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충분한 분석이나 공부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탈식민주의에 대한 논의나 공부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현 제국적/제국주의적 토대의 작동방식에 대한 나름의 이론적 틀이 있는 경우나, 토대라는 변수의 중요성을 괄호에 넣고 사유할 수 있고 제반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요.

탈식민주의나 헤겔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보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말이 많았네요. 김윤식 선생님 수업 못 들은게 아쉽네요. ^^;

탈식민주의와 헤겔 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사실 제일 좋은 것은, 이를 공부하는 것이겠죠 ^^ 원전을 읽어가며 극복 '지양'하는 것.

제 공익 생활 동안의 목표는, 맑스를 열심히 공부해서 '기초'를 튼튼히 해 두는 것과, 소설이나 시를 써서 등단하는 것입니다. 아, 그리고 그 동안 안 굶어죽기 위해서 돈도 벌어야 하겠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 지난번에 산책님께 문학도들은 무엇을 공부하냐 라고 물으셨을 때, 보통 요즘은 '탈식민주의'하더라 라고 대답했는데. 사실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는 것.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것. 자기의 세계관이나 취향(?)에 맞는 것. 을 공부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

知之不如好之오 好之不如樂之니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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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1-1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읽고 생각해볼게요^^
 
 전출처 : 로쟈 > 조지 이거스의 20세기 사학사

필요한 책들이 있어서 여덟 권을 한꺼번에 주문했는데, 그 중 하나는 역사학자 조지 이거스(1926- )의 <20세기 사학사>(푸른역사, 1999)이다. 지난 2005년에 내한한 바 있는 이 저명한 역사학자는 사학사의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국내에는 그의 3부작이 모두 번역/소개돼 있다(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20세기 사학사>뿐이지만). 독일 태생이어서 '게오르그 이거스'라고 표기되기도 하지만, 유태계 독일인으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이후 미국의 대학에서 오래 봉직했다면 '조지 이거스'라고 불리는 것도 타당하다(그는 독어와 영어로 책을 쓴다). 지난 2002년 신년초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新질서 新문명' 코너에서 다루어진 인터뷰 기사와 소개기사를 자료로 옮겨놓는다(기사가 올려진 게 마침 오늘 날짜이다).

동아일보(02. 01. 11) 뉴욕주립대 명예교수 조지 G 이거스

조지 G 이거스 미국 뉴욕주립대 명예교수(76)는 역사를 바라보는 학자들의 시각을 한 발 뒤에서 관조하는 세계적인 사학사(史學史)학자로 유명하다.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급변하는 세계 질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보았다(*아래는 조지와 윌마 이거스 부처. 조지는 <20세기 사학사>를 아내 '윌마'에게 바치고 있다).

-세계질서의 변동이 진행되고 있는 21세기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20세기역사의 연장선상에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20세기 역사의 중요한 흐름은 어떤 것이 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소련 붕괴 이래 지난 10년 동안 세계 질서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고 이와 함께 역사 인식도 변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20세기에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1945년 이후 형식적인 의미에서 식민주의시대는 끝이 났고, 이전의 식민 지배국가들 대부분이 1945∼1960년 사이에 피지배국들의 독립을 받아들였습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계속 장악하려 했고, 프랑스와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수치스런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침공도 마찬가지였지요. 인종차별 제도도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1990년대에 무너졌습니다. 백인우월주의는 이전의 식민지에서뿐 아니라, 1960년대부터는 서구 국가 내에서도 광범위하게 도전을 받았지요.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가치도 여성 운동의 부상과 함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런 역사의 변화는 역사 인식과 역사 서술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습니까?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역사 서술에는 두 개의 매우 다른 흐름이 있습니다. 이 두 흐름은 공식 문서에만 매달리며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을무시하는 국가 중심적 역사의 오래된 패러다임을 대치했습니다. 한편에서는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성과와 함께 컴퓨터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됨에 따라 고도로 계량화된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가 일어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을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접근이 시도됐습니다. 사회과학적 역사는 비(非)개인적인 구조와 과정에 초점을 맞췄지만, 매일의 일상에 주목하는 이 새로운 역사는 생생한 인간들과 그들의 느낌들을 양적 측면보다는 질적 측면에서 잡아내고자 했습니다.”

-20세기말에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은 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하는 역사 서술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프랑스와 리오타르, 헤이든 화이트 같은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1960년대에 이미, 계몽주의 이래로 역사 서술의 원천이 됐던 서구의 ‘거대 담론’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역사는 목적도 방향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에게는 진실한 과거란 없었고, 따라서 과학적 또는 학문적 객관성의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각각 짜맞춰지거나 혹은 더 낫게 이른바 ‘창안된’, 검증 가능성 없는 많은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역사와 문학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이거스 교수님께서는 미시사적 접근을 비판하고 거시사적 역사 서술 방법을 주장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미시사는 거시사에서 간과하기 쉬운 인간 일상의 삶을 드러내 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대담론의 퇴조와 함께 한국에서도 미시사적 접근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의 ‘거시사’는 ‘미시사’로 대치되곤 했습니다. 이런 새로운 접근들은 실제로 과거에는 하찮게 여겨져 왔던 삶의 많은 측면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미시사가들은 이런 일상의 삶들이 일어난 큰 맥락을 다루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20세기를 장식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처절한 잔혹 행위들을 충분히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일어난 9·11 테러와 그에 뒤이은 ‘테러와의 전쟁’ 역시 그런 맥락일 겁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세계질서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큰 영향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2001년 9월 11일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역사와 역사 서술의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수천 명 죽인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지만, 이는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이 겨냥한 것은 바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중심과 미국군사력의 심장부였습니다. 역사가들이 생각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이 이런 공격을 유발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한 것은 작은 테러리스트 조직일 수 있겠지만, 이들의 반(反)서구적, 특히 반미(反美)적 증오 뒤에는 무슬림이라는 훨씬 넓은 여론층이 있고, 나아가 이런 생각은 전에식민지배를 받았던 지역에 상당히 널리 퍼져있습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성공 스토리를 담은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와 소수자들의 경험적 삶에 주목하는 미시사는 모두 이 문제를 놓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분명히 자본주의의 힘에 의한 비서구사회의 식민지화를 탐구하는 거시사적 접근이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식민지화에 대한 것이라면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방식이 많이 사용돼 오지 않았습니까?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자본주의적 팽창의 역동성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착취를 탐구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의부자와 가난한 자,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그러나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문화와 종교에 뿌리를 둔 비경제적 요소들을 충분히 설명해 내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사회과학적 분석들을 효과적으로 종합하는 데는 반드시 역사의질적 측면을 고려하는 문화인류학적 개념과 방법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9·11테러는 이런 역사 인식 방법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현재 상황에서 비극적인 문제는 전쟁의 상대인 테러리스트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맹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현 정부와 그 동맹국들은 그들의 정책과 오만함으로 인해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삶이 거의 모든 측면에서 피해와 상처를 입고 있다는 점을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 서방의 적들은 ‘서구’도 ‘비서구’도 모두 획일적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서구세계에도 고삐풀린 전지구화의 위험을 아는 넓은 여론층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근대 서구의 유산 중에는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필수적 긍정적 요소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과거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전세계의 많은 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가난과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유산에 주목해야 합니다.”(이메일인터뷰〓김형찬기자)

Picture of Georg G. Iggers

 

 

 

 

 

◇조지 G 이거스는 누구인가=미국 뉴욕주립대(버팔로) 명예교수인 조지G 이거스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사학사(史學史)가이다. 192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소년기에 나치를 경험한 그는 나치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망명자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를 공공연히 지지했고, 베트남 참전을 반대하는 반전운동 및 민권운동에 적극 가담해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프랑스사에서 독일사로, 지성사에서 역사이론으로 확대되며 역사 연구와 역사 서술의 역사를 국제적 수준에서 조망할 수 있는 우리시대의 유일한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 역사학계에서 그의 중요성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미 모두 우리말로 번역된 ‘독일 역사주의’(박문각), ‘유럽 역사학의 신경향’(전예원), ‘20세기 사학사’(푸른역사)라는 그의 사학사 3부작이 나오지 않았다면, 사학사라는 분야는 역사학내에서 불필요한 분야로 고사 당했을지 모른다. 사학사란 하나의 역사서술이 나타나는 역사적 맥락, 즉 사회문화적 토대를 연구하는 분야로서 일종의 지성사다. 이거스 교수의 3부작은 바로 레오폴드 폰 랑케 이래 오늘날까지 역사학의역사가 어떤 흐름으로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대작이다.

둘째, 역사학을 보는 그의 시야는 그야말로 전지구적이다. 독일 역사주의를 기점으로 해서 성립한 근대 역사학은 역사를 ‘국민국가의 역사’ 곧 국사(國史)로 축소하는 전통을 낳았다. 이런 역사의 ‘국사화’는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역사학을 발전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지만,다른 한편으로는 역사학을 정치의 시녀로 전락시킴으로써 역사학의 위기를 초래했다.

오늘날 역사학 위기의 근본원인은, 역사의 중요한 문제들은 전지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서 발생하는데 비해 전문 역사학자들은 그 문제에 대한 연구를 국사의 차원으로만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역사학의 위기에 직면해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역사학 분야는 역사학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진단하는 사학사다. 이같은 맥락에서 이거스 교수는 사학사적 관점에서 9·11 테러 이후 앞으로의 역사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한다.

1960년대이래 서구 지성계의 가장 큰 흐름은 진보를 위한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나타난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이 미시사이다. 이거스 교수는 역사학의 이런 미시사적 경향이 대두하는 배경과 문제의식에 대해서는깊이 공감하지만, 그것이 역사학의 지배담론이 되는 데는 명백히 반대한다. 그는 9·11 테러가 일어난 역사의 거대한 맥락이 미시사적 역사 연구를 통해 해명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9·11 테러의 근본 원인은 분명 미국 패권주의 혹은 서구 자본주의와 같은 역사의 거대한 구조다. 그러나 어떻게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인물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미시사적 연구를 통해서는 이런 역사의 거대한 구조가 해명될 수 없는 것일까?

이거스 교수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학사적인 메시지는 ‘거시사 대 미시사’라는 이원론적 구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둘 사이의 새로운 접합을 통해 ‘서구’와 ‘비서구’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해방과 자유의 역사라는 세계사의 보편적 과정 속에서 한국사의 특수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김기봉/경기대 교수·서양사학)

07. 01. 11.

P.S. 국역본의 대본은 독어본 'Geschichtswissenschaft im 20.Jahrhundert'(괴팅겐, 1993)으로 돼 있는데, 목차로 보아 그 증보판인 영어본 'Historiography in the Twentieth Century'(Wesleyan University Press, 1997)도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영어본과 독어본은 많이 '다르다'. 3년 동안 저자가 책도 더 읽었고 또 염두에 둔 독자층도 각기 다르기 때문). 동료 역사학자인 피터 버크의 추천사가 붙어 있는 영어본은 나대로 의미가 있는 책이다. 러시아에서 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애를 써서 구한 것도 아니고 매일 같이 들르던 구내 헌책방에서 어느날인가 못보던 영어책이 눈에 띄었는데 아주 새책이었다. '이거스'란 저자의 이름도 눈에 익어서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국내에 번역본이 있는 듯했다. 게다가 가격은 50루블(2,000원). 그게 지금 책장에서 빼와 만지작거리고 있는 영어본이다. 내일은 그 국역본을 손에 넣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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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2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결국 결론-결말에 가서 이 책의 집필(구성) 의도가 드러난다고 했을 때, 독자로 하여금 ‘파리 꼬뮌’이라는 시공간은 도대체 어떠했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심어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집필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파리의 1848년 2월 혁명부터 1871년 파리 코뮌까지의 시기에 파리의 공간적 구조의 변모에 따른 산업 구조, 노동 방식, 거주민들의 (근본적/구조적)변모를 상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근대성’을 함축한다.

하지만 하비가 진짜 묻는 것은 1848혁명으로 인해 집권한 부르주아와 이의 반동적 선택으로서의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제정의 근대화는 왜 또 다시 ‘파리 꼬뮌’이라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발발하게 했는가, 또 왜 ‘그런 모습’으로 발발하게 되었는가이다. 여타 역사학자들과 다른 면모라면 ‘지정학적’인 중심틀과 문화-상징적 텍스트들에 대한 관심으로 미시사적인 접근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패퇴하던 프랑스의 국제 정치적 상황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와 대규모 봉기로 이어지자, 부르주아들은 “내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에 프로이센에게 항복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 와중에 시민에게 발포하려던 프랑스의 군대 장군에게 거부하던 병사들과 함께 프랑스 시민은 그 장군을 총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꼬뮌의 탄생이다. 이에 대해 당시 프랑스 대통령 티에르는 파리에서 군대와 정부 요원들을 완전히 철수시키며 파리의 침공과 탈환을 준비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파리를 진압하는데 필요한 프랑스 군대의 재조직을 허락하고, 대규모 프로이센 군대를 파리 주위에 주둔시킨다. 그들은 파리 코뮌과 프랑스 군대의 자국민 학살을 침묵 속에서 바라본다.

파리 시민들은 철수된 행정 기관을 모두 접수하고 빠르게 이를 다시 운영하며 3월 26일 선거를 치르고, 3월 28일 파리 코뮌을 선언한다. 부르주아들은 당혹해 했고, 상당수가 파리를 ‘탈출’했다. 파리는 프랑스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며 2만에서 3만 명 사이의 코뮌 가담자들이 그 과정에서 죽고 또 처형당했다.

이러한 ‘파리 꼬뮌’에 대해서 정작 하비는 많은 장을 할애하지 않고,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결말 부분에 한 장을 에피소드 식으로 배치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비가 말했듯, ‘배치’가 의미를 결정한다. (하비의 ‘지정학적’ 관심과 통한다!) 결국 1848-1871년까지의 ‘공간관계, 화폐, 신용, 금융, 임대료와 부동산 이권, 국가, 추상적 구체적 노동,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 여성의 여건, 노동력의 재생산, 소비자중심주의, 스펙터클, 여가, 공동체와 계급, 자연적 관계, 과학과 감정, 근대성과 전통, 수사법과 표현, 도시 변형의 지정학’을 다룬 것은 총체적으로 어떠한 변모들이 이 시기에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것이 어떻게 ‘파리 꼬뮌’이라는 ‘사태’로 이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인 것이다. 이는 ‘맑시스트’라는 그의 꼬리표(?)가 보여주듯, 결국 역사의 과정에 있어 혁명은 왜 일어나고, 또 어떻게 일어나고, 또 이의 과정에서는 어떠한 위험성들이 있는가를 보이는 것이 궁극적인 이 책의 목표다.

이 책을 읽으며 2007년에 한국의 한 독자로서 역사는 끊임없이 차이와 함께 반복된다는 것을 새삼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인식 주체의 한계 때문에 '반복‘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행위 주체들의 공통점들도 간과할 수는 없다. 19세기 중반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은 1970년대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게 했고, 오스망과 그의 ’근대화‘는 박정희와 현대건설로 상징되는 이명박을 바로 연결시킨다. 또 파리 꼬뮌은 1980년 우리의 ’광주‘를 상기시킨다. 파리 꼬뮌에 대한 연구는 은연중에 프랑스 학계에서 배척당하고, 파리 꼬뮌을 연구주제로 선택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그렇게 진보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프랑스 학계에서 조차!)하비 또한 이 때문에 책의 말미에 이렇게 적어놓은 것이 아닐까.

(파리 꼬뮌 당시 정부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선) 건물은 무덤 같은 침묵으로 그 비밀을 숨기고 있다. 오직 산 자, 이 역사를 알고 있는 자, 그 지점에 빛을 더하기 위해 혹은 그에 반대하여 투쟁한 이들의 원칙을 이해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그곳에 매장된 신비를 캐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무덤의 죽음 같은 침묵에서 풍부한 경험을 구해내고, 그것을 시끌벅적하게 시작하는 요람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484)

시끌벅적하게 시작하는 요람으로, 파리 꼬뮌으로의 초대. 이 책은 혁명으로의 초대장에 다름이 아니다.

ps. 번역은 읽을 만하지만, 답답한 부분이 분명 있어 원서와 함께 읽는 것이 요구된다. 아주 매끄러운 번역은 아니고, 3~40페이지 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나와서 원서를 참고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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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한국 출판계의 고질병

출판계의 고질적인 관행/병폐를 짚어보는 기사를 옮겨온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 종합/정리한다는 의미는 있겠다. '2007년 한국 출판의 현단계'라고 보아도 좋겠고. 올 연말에는 출판계가 얼마나 달라질 것인지 기대해보면서 짚을 건 짚고 넘어가도록 해보자.  

 
뉴스메이커(07. 01. 09) 출판계의 고질병 ‘스타마케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과 ‘마시멜로 이야기’(한국경제신문). 두 책의 공통점은 2006년 서점가를 강타한 베스트셀러라는 점이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12월말 현재까지 70만 부가 팔려 2007년 하반기 100만 부 돌파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자기계발서 ‘마시멜로 이야기’는 2006년 8월 이미 100만부 판매 기록을 세웠다.

베스트셀러라는 점 외에도 두 책의 공통점은 공지영과 정지영이라는 ‘스타’가 각각 저자와 번역자라는 점이다. 물론 ‘마시멜로 이야기’는 정지영이 아닌 제3의 인물이 대리번역한 사실이 뒤늦게 폭로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마시멜로 이야기’가 밀리언셀러로 등극하는데 가장 큰 공로자는 10대, 20대에 인기가 높은 정지영이라는 TV스타였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정지영은 프리랜서로 독립하기 전까지 ‘SBS 뉴스퍼레이드’ ‘접속 무비월드’ ‘출발 모닝와이드’ ‘TV문화지대-낭독의 발견’ 등을 진행하며 지적인 아나운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출판사는 이 점에 착안, 책 광고모델로도 정지영을 내세웠고 수차례에 걸쳐 팬사인회도 열었다.

공지영 소설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역시 그가 지닌 스타성과 무관치 않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뿐 아니라 일본작가 쓰지 히토나리와 함께 펴낸 ‘사랑 후에 오는 것들’(소담출판사)도 2006년 28만 부가 판매됐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문학성 외에도 대중이 공지영이라는 스타작가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그의 책 판매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공지영은 2006년 5월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황금나침반)를 출간했다. 이 산문집에서 공지영은 늘 왕따였던 어린시절 이야기와 세 번 결혼해 세 번 이혼했고 성이 다른 세 아이를 낳은 사연 등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기호 소장은 “이 산문집에 실린 공지영의 인생역정 등도 대중이 공지영이라는 스타작가를 한결 인간적으로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다.

정지영의 대리번역 파문에 이어 최근 출판계를 발칵 뒤집은 또 다른 사건은 대필 논란이다. 유명 화가 겸 방송인 한젬마의 최근작 ‘화가의 집을 찾아서’와 ‘그 산을 넘고 싶다’(샘터)가 거의 전적으로 대필작가에 의해 완성됐다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 논란은 출판계에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대필작가, 일명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그림자작가 또는 유령작가)에 대한 환기를 불러 일으켰다. 고스트라이터는 수려한 문장력과 적절한 비유로 책을 완성도 높게 만들지만 책 판권정보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필자이기 때문에 그림자작가 또는 유령작가로 통한다.
 

 

 

이들의 역할은 저자가 쓴 원고를 좀더 매끄럽게 손보는 윤색 수준부터 완전 대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의 도움을 얻어 책 판권정보에 이름을 올린 저자는 명예와 인세(보통 판매수입의 8~10%)를 챙기는 반면 대필작가는 대부분 인세 대신 원고지 장당 얼마씩 계산하는 식의 수고비를 받는다. 한성출판기획 박영욱 대표는 “가령 대필자에게 원고료로 500만 원을 지불하기로 계약했고 책의 정가가 1만 원이라고 하면 초판을 5000부 찍어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대필자에게 주고 재판부터 발생하는 모든 인세는 저자로 이름을 올린 이에게 준다”고 설명했다.

대필은 주로 자서전 위주로 이루어져왔다. 작가지망생들이나 배고픈 문인들이 부업으로 정치인이나 재벌총수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는 것으로 이는 가장 흔한 대필의 형태이다. 출판계 풍문에 따르면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국내 최고의 드라마작가로 손꼽히는 A씨가 2억 원을 받고 대필했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도 대필자가 따로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문인 중 대필작가 시절을 한번쯤 거치지 않은 이는 드물다. 그러나 자서전을 대필하는 것에 딴죽을 거는 이는 없다.

문제는 이처럼 자서전 위주로 이루어지던 출판계의 관행이 이제는 자기계발서나 수필, 동화에까지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출판관계자는 “소설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발간되는 서적의 50% 이상은 고스트라이터의 손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자서전과 자기계발서는 100%, 베스트셀러 중 6~7권은 대필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젬마의 두 책이 문제가 된 것도 이 지점이다. 맨 처음 한젬마의 두 책에 의혹을 제기한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한젬마가 자신이 직접 쓴 초고라며 구성작가에게 준 것은 메모와 자료 더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출판 직후 각종 인터뷰에서 대필작가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경험인 양 이야기했다고 보도했다. 한성출판기획 박영욱 대표는 “한젬마씨는 자료라도 줬으니 그나마 나은 편”이라며 “심한 경우 대필작가가 취재와 집필을 다하고, 책 판권정보에 저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마지막 교정지만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출판계의 대필관행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출판사의 도를 넘는 대필관행이 ‘스타’를 내세워 판매부수를 높이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는 점이다. 한젬마의 경우 1999년 ‘그림 읽어주는 여자’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명진출판)를 내며 스타덤에 올랐다. 출판계에서 명진출판은 기획출판을 통해 스타 저자를 많이 배출한 출판사로 이름이 높다. 1999년 당시 한젬마를 출판사에 소개한 출판전문가 김영수씨(김&정 기획실장)는 “한젬마씨는 서울대 미대 출신에 예쁘장한 외모여서 스타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명진출판이 한젬마의 이와 같은 스타성을 더욱 부각시켰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명진출판이 내놓은 두 책과 이번에 문제가 된 샘터사의 두 책의 표지사진은 모두 스튜디오에서 공들여 촬영한 한젬마의 모습이다.

 


김영수씨는 “요즘엔 작가도 이미지가 따라주지 않으면 책이 안 팔린다”며 “이는 소설부문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책 판매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글이 50%이고 나머지는 작가의 외모나 경력, 사생활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때 출판사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신문 등 인쇄매체와 TV 등 영상매체다. 신문이나 TV를 통해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면 쉽게 유명인이 되고 이는 곧 책 판매와 직결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출판사는 책 출간과 동시에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기본이고 책 성향에 따라 방송 프로그램을 섭외해 저자를 직접 출연시키면서 스타 만들기에 힘을 쏟는다. 김영수씨는 “1990년대 중반부터 출판사들은 기획을 통해 스타 만들기가 가능한 사람에게 자전적 에세이를 의뢰하는 경우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아예 연예인 등 스타를 내세운 에세이도 줄을 이었다. 1998년 박원숙의 ‘열흘 운 년이 보름은 못 울어?’(중앙M&B)부터 1999년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2004년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오래된미래) 등 많은 책이 나왔다. 이 중 서갑숙의 ‘나도 때론…’은 100만부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다.

그러나 정지영과 한젬마를 둘러싼 파문에서 보듯 부작용도 적잖다. 글솜씨는 물론 너무 바빠 원고를 직접 쓸 시간조차 없는 스타들을 내세우면서 대리번역, 대필문제가 대두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글솜씨가 없는 전문가가 글솜씨가 있는 이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전문지식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마담으로 이름과 얼굴만 빌려주고 책의 내용 대부분이 대필자의 창작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출판을 통해 스타가 된 이가 심각한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는 일도 있다. 1995년 베스트셀러가 된 ‘나는 언제나 한국인’(대원미디어 출간)의 주인공 에리카 김(한국명 김미혜)이 한 사례다. 문제는 그의 동생인 김경준씨가 일으켰다. 김씨는 2001년 크게 회자된 ‘옵셔널벤처스 금융사기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이 전 시장은 2000년 김경준씨와 함께 서로의 머리글자를 딴 ‘LK이뱅크’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김씨는 2001년 당시 코스닥 기업이던 옵셔널벤처스코리아를 운영하다 거액의 회사 자금을 유용하고 미국으로 도망쳤다. 인터폴의 수배를 받던 김씨는 2004년 5월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돼 현재 LA 메트로폴리탄 디텐션 센터에 수감돼 있다. 1990년대 후반 당시 이 전 시장에게 김씨를 소개한 이는 다름아닌 베스트셀러 저자로 명성을 높인 에리카 김이었다.

출판계에서는 정지영과 한젬마를 둘러싼 파문을 ‘출판계의 황우석 사태’라며 자조한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유영준 팀장은 “국민을 상대로 한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사기극은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과학계 전체가 욕을 먹고 위축되지 않았느냐”며 “마찬가지로 자기가 쓰지 않은 책을 자신이 썼다며 명예와 인세 등 달콤한 과실만 먹은 이는 비난받아야 하지만 잇따른 이 두 번의 파문에 의해 출판계 전체가 위축될 수 있어 염려스럽다”고 토로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나 출판사들이 두 번에 걸친 파동으로 보조작가가 필요한 서적마저 출간을 꺼릴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대리번역과 대필, 사재기 등 출판계의 도덕성 시비가 당분간 봇물 터지듯 터질 것”이라며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출판계 스스로 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주례사비평이 한국문학 죽였다”

 


출판계의 ‘스타 마케팅’은 비단 요즈음의 일만은 아니다. 국내 소설이 한창 대중적 사랑을 받던 시절, 즉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소설가를 ‘스타’로 띄우기 위한 출판사들의 노력이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책의 판매부수를 높이기 위해서다.

물론 당시의 마케팅은 대리번역, 대필, 사재기 등으로 얼룩진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와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의 작품을 언론을 통해 띄우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등 많은 독자의 아낌을 받았던 작가들이 이때 등장하여 주목을 받았다. 스타를 만들어낸 주역은 출판사와 평론가, 주류 언론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특정 스타 작가의 작품이라면 완성도와 상관없이 한국 최고의 문학작품인 양 소개하는 주례사 비평이 평론가와 언론의 입을 통해 잇따랐다”며 “궁극적으로 이런 문화가 한국문학을 절벽으로 내몬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례사비평이란 비평가적 양심보다 출판사, 학연·지연 등 특정한 이해관계에 얽혀 마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듯 작품과 작가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풀어놓는 비평행위를 말한다. 2002년에는 이런 잘못된 비평행위를 정면으로 비판한 ‘주례사비평을 넘어서’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 책의 표지에는 ‘비판 없는 비평이 몰고 온 비평의 타락과 문학의 위기’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다. 이 책에서 김명인, 고명철, 이명원, 홍기돈, 김진석, 신철하, 하상일, 진중권 등은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김형중 등 스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한기호 소장은 “평론가와 언론은 주례사비평을 일삼고 스타 작가들은 작품을 공들일 여유조차 없이 비슷한 성향의 작품을 연달아 성급하게 생산하면서 현재 한국문학의 자멸을 초래한 것”이라며 “요즘은 팩션이나 일본소설을 제외하면 공지영과 김훈 외에 초판 3000부 이상 팔리는 책조차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한국문학이 침체를 면치 못하자 지난해부터 문화예술위원회(옛 문예진흥원)는 ‘힘내라, 한국문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문학회생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수십억 원의 복권기금을 이용해 우수문학도서 구입과 배포,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원고료 지원, 우수 문예지 구입과 배포 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학회생프로그램이 오히려 한국문학을 한층 더 고사시킬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작가에게 원고료를 지원하고 한국문학을 출판한 출판사의 해당 책을 사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근원적 해결방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는 정도의 미봉책’이라는 시각도 적잖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국가에서 한국문학의 침체를 손놓고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자세는 좋으나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 것”이라며 “작가나 출판사에 대한 지원이 궁극적으로 한국문학을 회생시키는 방안이라기보다는 미봉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박주연 기자)

 

07.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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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볼프강 몸젠과 1848년 체제

독일의 역사학자 볼프강 몸젠의 <원치 않은 혁명, 1848>(푸른역사, 2006)이 출간됐다. 작년말이다. '몸젠'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아서 찾아보니까 내가 들어본 몸젠은 다른 '몸젠들'이었다. 그의 조부는 고대 로마사연구로 노벨상까지 수상한 테어도어 몸젠이고, 아버지 역시 <비스마르크>(한길사, 1997) 등의 저서를 갖고 있는 저명한 역사학자 빌헬름 몸젠이다. 내가 이 볼프캉과 혼동했던 역사학자 한스 몸젠은 그의 쌍둥이 형제였다. 이 만한 가계면 적어도 역사학계의 다윈가나 헉슬리가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소개에 따르면 볼프강 몸젠은 "1968년부터 1996년 은퇴할 때까지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교에서 근세사 부문 정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전공은 제국주의 시대이지만, 그가 관심을 가졌던 시기는 자유주의에서부터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막스 베버에 관한 전문가로서 베버 전집 간행 작업을 총괄했으며, 1988년부터 4년간 독일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 간략한 이력에 출생과 작고 년도는 빠졌는데, 1930년 11월 5일에 태어나서 2004년 8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형제 한스는 아직 생존해 있다.

일단 독일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의 저작이란 점에서 눈길을 끌지만, 책은 부제대로 '1830년부터 1849년까지 유럽의 혁명운동'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끈다. 러시아 지성사에서 사실 1789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가 바로 1848년이기 때문이다(얼마전에 관련 기사를 옮겨온 적이 있는 알렉산드르 게르첸 같은 경우도 1848년 혁명에 환멸을 느껴서 서구파에서 중도적인 슬라브파로 '전향'하게 된다). 그간에 이 시기는 홉스봄의 책들 정도로 카바하고 있었는데, 몸젠의 책이 '본진'의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책소개에 붙어 있는 역자의 말을 참조해보면 이렇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강조했던 것처럼, 19세기 서양의 역사는 "혁명의 시대"로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부터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그리고 1871년 파리 코뮌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역사는 정치적 소용돌이와 휴지기가 연속적으로 교차하면서 진행되었다. 이 모든 사건들 가운데서도 역사가들이 1848년 혁명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새로운 산업사회의 주축을 이루게 된 노동자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면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때라는 점이다. 둘째, 1848년을 계기로 유럽이라는 거대한 수레를 움직여 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양대 바퀴가 엄청난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충돌은 그 후에 닥쳐올 수많은 파란과 비극의 시원이 되었다.

문득 드는 생각은 그 '파란과 비극'의 구도 안에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는 1987년 체제이면서도 세계사적으로는 1848년 체제에 속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987년 체제 전환을 위한 개헌논의가 한창 벌이질 듯한데 거기에 덧붙여 좀 거시적으로 1848년 체제에 대한 성찰도 시도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래는 몸젠의 타계 이후에 나온 가디언지의 추모기사이다. 저자에 대한 유익한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옮겨놓는다.  

Wolfgang Mommsen

A leading German historian, he brought academics together to further the understanding of his country's past

Richard J Evans
Tuesday August 17, 2004

The historian Wolfgang Mommsen, who has died of a heart attack while bathing in the Baltic Sea at the age of 73, was a leading member of a remarkable generation of liberal and left-leaning historians who championed a more critical attitude to the German past from the 1960s onwards.

He came from a famous family of scholars: his great-grandfather was Theodor Mommsen, a leading late 19th-century liberal and winner of the Nobel Prize for Literature for his trilogy on the history of ancient Rome. Visitors to Wolfgang's family home in Düsseldorf, overlooking the Rhine, could not escape noticing the large gallery of photographs of the many eminent professors whom he numbered among his ancestors and relatives. His father, Wilhelm Mommsen, was also a historian.

So, too, was Wolfgang's identical twin brother Hans, whose career matched his with uncanny precision. After studying in Marburg, Wolfgang obtained his doctorate in Cologne in 1958, in the same year as his brother was awarded his PhD in Tübingen. Both were appointed to chairs in the same year, 1968: Hans in Bochum, Wolfgang a stone's throw away in Düsseldorf.

To attend a German historical conference where both were present was an uncanny experience, as each, in true professorial style, flitted from one parallel session to the next, making participants who did not know them wonder why the same historian had to make two different contributions to the same discussion within the space of a few minutes. Hans smoked and drank, while Wolfgang did not; and seeing them together was like seeing the effects of 40 years of alcohol and tobacco on the same body: Wolfgang was undoubtedly the leaner and fitter of the two, though even he perhaps was throwing caution to the winds when he plunged fatally into the cold waters of the Baltic.

While Hans eventually became an important historian of Nazi Germany, Wolfgang specialised in the Imperial period, from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to the end of the first world war. His dissertation, on Max Weber and German politics, published in English in 1984, must surely be one of the most brilliant debuts a historian has ever made: it revolutionised our understanding of the 20th century's most influential sociologist by setting him firmly in the context of his times, and showing him to be a liberal nationalist and imperialist, much to the horror of many of his admirers. He went on to demonstrate that a knowledge of Weber's political thought and action was essential if we were to grasp accurately his theory of power. This was an outstanding achievement, and Wolfgang followed it up by playing a leading role in editing a new, comprehensive edition of Weber's works; his dynamism was essential in pushing on towards its completion.

The Mommsens were related to Weber by marriage, so there was something particularly iconoclastic in Wolfgang's book, which caused a huge storm when it first appeared. Building on this, he went on to produce a wide range of studies on German liberalism and on imperialism. But in the central period of his career, it was as an academic politician and administrator that he made his mark. A spell as a British Council scholar in Leeds at the end of the 1950s had made him into something of an Anglophile: it was a mark of his acculturation that the best gift one could take him on a visit to Germany was a packet of plain English tea - Liptons, PG Tips or Brooke Bond, not the fancy concoctions that are all one can obtain in German grocery stores. So it seemed natural that he should take over as director of the recently founded German Historical Institute in London in 1977.

Wolfgang's energy quickly made the institute into the most important centre for British historians working on Germany. He raised large sums of money, building up a well-stocked library and moving the institute into spacious and elegant new premises on the corner of Great Russell Street and Bloomsbury Square. He attracted a brilliant generation of young German historians as research fellows. And above all, perhaps, he organised a string of important conferences, of which the most influential was held in 1979, on state and society in Nazi Germany. The vehemence of the clashes between those who argued that it all came down to Hitler, and those who argued for the primacy of structural forces, took many observers aback, and still reverberates today.

In such a setting, Wolfgang was in his element. His love of controversy found another outlet in his cogent contributions to the debate that raged in Germany in the mid-1980s over whether the time had come to draw a line under the Nazi past: Wolfgang was sharply critical of those, such as the rightwing historian Ernst Nolte, who thought it had. All of this was too much for the conservative government led by Helmut Kohl that came to power in West Germany in 1982, however, and Wolfgang was effectively forced to return to his chair in Düsseldorf in 1985, leaving the institute in less energetic hands.

Wolfgang quickly found another role as president of the Association of German Historians from 1988 to 1992, and in this capacity took a lead in arguing against those who saw German reunification as the opportunity for a more nationalist view of the German past. In the mid-1990s he produced his masterwork, a huge, two-volume history of Germany from 1850 to 1918, elegantly written, comprehensive, and full of stimulating insights and material scarcely known even to specialists. On their simultaneous retirement in 1996, the Mommsen twins spoke jointly at a seminars in London and Cambridge: their mutual competitiveness had not diminished with time, and it was almost impossible for other participants to get a word in edgeways as each launched into a string of criticisms of the other's paper.

Wolfgang was not always an easy character to work with; he could seem arrogant and self-important, though those who knew him well could see through these traditional social attributes of the German professor to the real man underneath. He was particularly kind to younger British historians, and made those of us who knew him feel that we were making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explaining his country's past, whether we really were or not. His infectious, braying laughter enlivened many an academic occasion and revealed a lighter side to his nature.

His perpetual restlessness and youthful energy led him, in his 60s, after his children had grown up and left home, to leave his wife for a graduate student. However, the relationship did not last, and Wolfgang spent his final years in a bachelor apartment in Berlin, continuing to work on the Weber edition and to publish books, the most notable of which was a study of Germany's part in the origins of the first world war. He is survived by his wife Sabine and their four children. 

07.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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