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자기 시대의 수도사

중견작가 김영현씨가 신작소설을 냈다. <낯선 사람들>(실천문학사, 2006). 소설집이 아니라 전작 장편소설이다. 300쪽 남짓이니까 분량이 두툼한 건 아니지만. 특이한 건 노골적으로 러시아작가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베끼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작가들은 구원론적인 주제를 탐구하려면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걸 다뤄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몇 년전에 읽은 것으로 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주제를 다룬 정찬의 <그림자 영혼>(세계사, 2000)도 아주 실망스러웠다).

아래 인터뷰기사를 보면, 작가 자신이 '문학의 제2기'에 들어선 것 같다고 고백하는데, "당분간은 종교적 탐구를 계속해 보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멘트가 기대보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사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야말로 광신도적인 신앙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구원에 대한 회의를 끝까지 밀고간 작가가 아니었나(왜 우리 주변엔 인도로 가거나 수도원으로 가는 작가들만 있는 것인지? '당대적 현실'은 어디로 간 것인지?). 

한국일보(07. 01. 15) '낯선 사람들' 낸 소설가 김영현

소설가 김영현(52)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이렇다. 리얼리즘, 낭만, 서정, 민중문학, 민중운동, 학생시위, 긴급조치 위반, 구속, 고문…. 실천문학사 대표라는 현재 직함이나, 낭만적 색채 짙은 그의 리얼리즘이 민중문학의 발전이냐 퇴보냐를 놓고 뜨겁게 벌어졌던 1990년대 초의 ‘김영현 논쟁’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가 4년 만에 새 장편소설 <낯선 사람들>(실천문학사)을 펴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저 열거된 단어들의 어떤 기색도 찾아보기 어렵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표나게 원용한 그의 이 신작은 욕망과 원죄, 악령과 신성이라는 종교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를 탐구한, 말 그대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작품이다.

“이제야 비로소 김영현 문학의 제2기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패배감의 터널에서 빠져 나와 문학적으로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그는 말했다. 운동을 할 때는 그래도 내 삶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편안한 것 자체도 감수하기 힘겹다고. “우리처럼 오랫동안 운동권에 있었고, 아직도 몸 속에 그 많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2000년대로부터 조롱당하는 것 같은 참담함과 좌절감을 느껴왔죠. 지금의 세계는 좋게 말하자면 다원화한 노마디즘의 세계지만, 다른 면에선 일종의 무정부 상태예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내던져진 존재가 돼버린 거죠. 오지 여행도 많이 하고, 러시아 문학도 다시 읽고 하면서 이제야 내가 어떤 문학을 해야 할지 알게 됐습니다.”

피살된 아버지와 그의 아들들의 비밀을 추리소설 기법으로 파헤친 <낯선 사람들>은 이런 회의와 고통의 소산이다. 소설은 파렴치한 수전노 아버지와 그의 걸신들린 욕망이 낳은 배 다른 아들들의 갈등을 축으로 하는데, 이 소설에서 수도원 신학생인 차남 성연이 아버지의 진짜 범인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윤리적, 존재론적 갈등은 오롯이 작가 자신의 것과 겹친다.

“성연이 수도원을 떠나 첫 사랑 안나를 찾아나서는 결말을 통해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부대끼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숙명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수도사처럼 침묵 속에서 생을 완성해가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릴 때가 많아요. 하지만 얄궂은 운명 속에서 관계를 맺었다 해도 이 누추한 삶을 껴안고 살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게 의미 있는 삶 아니냐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인간과 함께 피의 역사가 시작됐지만 사랑의 역사도 시작됐고, 그게 우릴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김영현의 작품을 김영현적이라 하지 않고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고 말하는 게 미안하지만, 작가는 <낯선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해 체홉, 투르게네프 등 러시아 작가들의 방법론을 활용해보려는 거대한 구상의 첫 작품이라고 말한다. “소설을 쓰지 않는 동안 고전으로 다시 돌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침체된 우리 문학을 위해 고전적 주제와 품격, 구도를 가진 문학을 다시 재건해내야겠고 생각했어요. 박완서 이문열 같은 1세대 작가들과 유행에 휩쓸리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텅 빈 중간세대로서 제가 할 일은 이거다 싶었습니다.”

이제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소화력 강한 위장이 생긴 것 같다는 그는 “저도 제 자신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에는 한 달에 1주일은 집필실에 들어가있겠다고 선포까지 했다. “작가는 평생 삶의 화두를 찾아 떠도는 자기 시대의 수도사입니다. 저는 삶의 의미라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막막한 우주에 영혼이라는 이토록 정교한 장치들이 존재한다는 게 바로 그 증거일 겁니다. 그걸 기독교가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당분간은 종교적 탐구를 계속해 보고 싶네요.”(박선영 기자) 

07. 01. 15.

P.S. 미완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주인공 알료샤는 수도원을 나와 (창작 메모에 따르면) 나중에 테러리스트가 된다(구원은 그 다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시대의 수도사'가 아니라 '자기 시대의 테러리스트'가 아닐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삶의 의미 따위를 구걸하지 않겠다는 다부진 결의로 무장한. 러시아 작가들의 방법론의 '한국화'에 대해서 우려를 갖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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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님의 "알라딘에서 살기"

ㅋ 산책님의 글이 제가 지적한 부분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은데, 하나의 운동으로서 끌어가려 했던 것 같아요. 결국 조합주의 운동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겠죠. 이를 바탕으로 자본에게 요구하는 것. 결국 문제는 그렇게 강요/요구 할 수 있는 힘이 있을까의 문제. 그리고 무엇이 책-소비자/서평-생산자에게 '이득'이 되느냐는 순전 물질적 기반 문제로 논의가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고, 이제 논쟁이 뜸해졌지만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지금처럼 가다가는, 이것이 조합주의 같은 운동의 형태로 제출될지는 의문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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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자본론' 한국어판 20주년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하루종일 집에 붙어 있게 된 탓에 신문을 보지 못했다. 물론 인터넷으로 주요 기사들을 훑어보게 되지만 '신문지'를 읽는 것만큼 개운하지는 않다. 구닥다리 활자문화세대이면서, 신문지 세대여서 그런가 보다. 온라인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띈 기사를 옮겨놓는다. 아마도 내일자 지면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자본론>의 한국어판 출간 20주년에 관한 기사이다.

경향신문(07. 01. 15)  이보게, 마르크스 다시 얘기해보세…‘자본론’ 재조명 활발

직선제 헌법 20주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20주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20주년…. 올해는 유난히 ‘20주년’이 많다. 1987년 6월 민주화의 산물들이다. 또 하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한국어판 출간도 20주년이다. ‘무시무시한 금서’로 일본어판, 북한 번역본 등이 은밀히 떠돌던 자본론이 당당하게 일반인들 손에 쥐어질 수 있었던 것도 민주화의 세례 중 하나다.



당시 한국사회에 자본론을 공개적으로 처음 소개한 사람은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부 교수(53)와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65). 김교수 책이 더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빗장을 열어젖힌 것은 강교수의 ‘자본’(이론과실천)이다. “87년 농협중앙회 조사부 근무 시절이었어요. 이론과 실천의 김태경 사장이 와 뭔가 건넸는데 집에 와서 뜯어보니 ‘자본론’이더군요. 익명의 서울대생들이 초벌 번역한 것이었죠. 밤을 새워가며 다듬어 ‘익명의 역자들’로 해서 출간이 됐습니다. 당시 문화공보부에 납본(納本)하기까지 1주일간 책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어요. 난리가 났죠.”

잠적했던 김태경 사장이 결국 잡혀 법정에 섰다. 민주화 물결 속에서 김사장의 부인이었던 당시 강금실 부산지법 판사, 김수행 한신대 교수 등의 탄원에 힘입어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다. 사실상 ‘해금’이었다. 강교수는 이어 자본론 2, 3권을 실명으로 번역해냈다.

“실명으로 책을 낼 때는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당시 학계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받아줄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민주화 이후 동아대에서도 학생회가 대학 당국에 ‘정치경제학’ 강의를 요구했죠. 그래서 박사논문 쓴 지 6개월도 안된 제가 임용됐어요.” 강교수는 절판된 자신의 번역본 출간 20주년을 맞아 주석까지 모두 담은 자본론의 독일어판 번역본을 새로 낼 예정이다.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비봉출판사)은 좀더 완결된 번역으로 89년 2월 출간돼 대중에게 파고들었다(*영역본을 옮긴 것으로 안다). 72년 외환은행 런던지점 근무 시절이던 자본론을 접하고 문화충격을 받았던 김교수는 80년대 초부터 이미 자본론 번역에 들어갔다. “서울대 교수가 출판하니 공안당국에서도 손을 댈 수 없었다고 봅니다. 당시 내 강의는 수강생이 1000명이 넘었어요. 다 수용하지 못해 후배 학자들을 동원해 강의를 맡겼을 정도였죠.”

주황색 표지에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그려진 ‘자본론’(1~3권) 완역본은 불온서 해금의 상징이 됐다.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책은 지금도 매년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로 제1권 상(上)편 기준으로 3만여권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나도 이 책만 갖고 있는 듯하다). 김교수는 “93년 한꺼번에 몰아 받은 인세로 산본의 아파트 분양대금을 치렀다”며 “마르크스가 나를 먹여살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생명은 짧았다. 소련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다. 많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고, 대신 그람시, 알튀세르 등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했다. ‘시차를 갖고’ 도입된 마르크스주의였지만 그나마도 대중화되기에 시간이 짧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론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다시 조명을 받게 됐다. 김수행 교수는 “경제적 불안정성, 공황의 반복과 실업 증가, 빈부격차의 증대 등 자본주의의 모든 문제가 드러났다”며 “자본론의 수요가 다시 생겨났고, 연구자들도 조금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강신준 교수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소수만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상황을 보며 지금이야말로 마르크스를 다시 얘기해볼 수 있는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마르크스주의는 자본론 번역 20년을 맞아 중흥을 꾀하고 있다. 김수행, 김세균, 이진경 교수 등이 문화사회연구소에서 마련한 ‘한국 마르크스주의 지형 연구’ 강좌를 진행 중이다. 또 한국사회경제사학회는 오는 4월 학회 설립 20주년을 맞아 ‘민주화 이후의 한국자본주의’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다루는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있는 학자들로 구성된 맑스코뮤날레 등도 마르크스주의를 주제로 한 문화제인 제4회 ‘맑스코뮤날레’를 열 계획이다.

이 외에 장상환, 정성진 교수가 주축이 돼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 연구를 주도해온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은 ‘마르크스주의 연구’ 6호를 냈다. 20년전 자본론 한국어판을 처음 내 옥고를 치른 이론과 실천 김태경 사장은 최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다시 펴내며 이렇게 밝혔다.



“‘수고’가 쓰였던 1844년에도, 출간됐던 1932년에도, 한국에 번역됐던 1987년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인간 사회 저 심연에 똬리 틀어 입 벌리고 있는 악의 본질이 존재하는 한, 그에 대항하기 위한 강력한 사유의 무기로 ‘경제학-철학 수고’는 아직 유효하다.”(손제민 기자)

07. 01. 25.

P.S. 국내 마르크스 학자들 간에도 의견/노선 차이가 심한 것으로 아는데, 그 중 한 축을 대표하는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가 작년말에 출간됐다. 564쪽이니까 두툼하다. 나로선 마르크스보다 트로츠키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한번 들춰볼 듯한데,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가 현재까지는 제로이군(최근에야 깔린 것인가?)...

P.S. 생각난 김에 시 한 편도 옮겨둔다. '자본론' 하면 떠오르는 시가 내겐 황지우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이다. 나도 프로그레스출판사의 양장본 마르크스를 모스크바에서 잠시 찾은 적이 있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아내가 먼저 이 닦고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이빨 닦고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데워서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하악을 이빠이 벌려서
  눈이 흉하게 감기는 동물원 짐승처럼.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
  지겨운 食事.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想起, 그것에 의해
  요즘 나는 살아 있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아서 아침밥 먹고,
  물로 입 안을 헹구고, (이 사이에 낀 찌꺼기들을 양치질하듯
  볼을 움직여 물로 헹구는 요란한 소리를 아내는 싫어했다.
  내가 자꾸 비천해져 간다고 주의을 주었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소파!
  '소파'하면 나는 '비누' 생각이 났다가 또 쓸데없이
  '부드러움'이라는 형용사가 떠오르다가 '거품-의자'가 보인다.
  의자같이 생긴, 젖통이 무지무지하게 큰 舊石器時代의
  이 多産性 여인상은 사실은 비닐로 된 가짜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오우 소파, 나의 어머니!" 나는 속으로 이렇게
  영어식으로 말하면서, 그리고 양놈들이 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소파에 앉았던 거디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으면 거실이 飜譯劇 무대 같다.
  중앙에 가짜 가죽 소파 하나, 그 뒤엔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는
  괘종시계가 걸려 있고, 세잔風 정물화 한 점, TV세트,
  窓을 향한 幸運木 한 그루, 그리고 폼으로 갖다놓은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는 서투른 書架와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수족관;
  그렇지만 이 무대에서 번역될 만한 비극은 없다.
  다만 한 사나이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젊었을 적 사진으로는 못 알아보게 뚱뚱해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최근엔 입에서 나쁜 냄새가 난다고 아내에게 비난받은 바 있는
  이 사나이가 멍하니 소파에 앉아, 마치 동물원 짐승이 그렇게 하듯이,
  하품을 너무 길게 하고, 눈물이 난 눈을 두 번 깜, 빡, 깜, 빡하고 있을 때
  무대 왼편(주방)에서 그의 아내가 등장했으며, 그녀가 소파에 걸터앉아
  그의 턱을 쓰다듬어주면서 면도 좀 하라고 하자,
  그가 아내를 껴안으면서 "엄마!"라고 불렀을 뿐이다.
 
  하마터면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던 아내가 출장 레슨 나가기 전에
  그에게 와서 나를 어루만져줄 때가 나는 좋다.
  나는, 아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커트해 줄 때,
  낮잠 자고 있는 그에게 가만히 다가와 나의 발톱을 잘라줄 때,
  혹은 그를 자기 무릎에 눕혀놓고 내 귀지를 파줄 때, 좋다
  아침마다 그에게 녹즙을 갖다주고, 입가에 묻은 초록색을 닦아주자
  나는 그녀를 보면서 방그레 웃었다.
  나는, 아내가 그를 일으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주고
  똥도 받아주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남은 생을, 그녀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
  코로 쉼만 쉴 뿐, 꼼짝도 않고 똥그란 눈으로 뭔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그녀가 다 알아서 해주는 식물 인간이고 싶다.
  가끔 햇빛을 보고 싶어하므로 창문을 열어줄 필요만 있을 뿐.
  동정할 수는 있어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이 幸運木, 나는
  이 病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아서,
  아내가 나갔기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서 혼자 놀았다.
  비계 덩어리인 구석기 시대 어머니상에 푸욱 파묻혀서
  괘종시계가 내 여생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너무 많이 남아도는 나의 시간들이 누에 똥처럼 떨어졌지만
  나는 수락했다. 이것도 삶이며
  이제는 그것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걸.
  사람이 喜劇이 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까마는
  그러므로 무위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格이랄까,
  사람이 만화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비록 사나이 나이 사십 넘어서 "내가 헛, 살았다"는 깨달음이
  아무리 비참하고 수치스럽다 할지라도, 격조 있게,
  이 삶을 되물릴 길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것 인정하기 조금은 힘들지만
  세상에 조금이라도 복수심을 갖고 있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천함보다야
  無爲徒食輩가 낫지 않겠는가!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하루종일,
  격조 있게, 놀았다.
  탄식하는 시계가 분침과 시침을 벌려
  역광을 받는 공작새처럼 화사한 오후를 만들고,
  내가 손대지 않은 無垢한 시간을 뜯어먹은 누에가
  다른 종류의 생을 예비하는 동안
  수족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에
  橫으로 도열한 수마트라 두 마리, 열대어 화석처럼 박혀들어왔을 때
  나는 내가 담겨 있는 空氣族館을 느꼈다.
  거기서 나는 고기처럼 또 하품을 했고,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前해군참모총장이 검찰청 앞에서
  검은 라이방을 쓰고 사진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는 거디었다.
 
  내가 "오우 소파, 마마이야!" 외치면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아내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대 오른쪽에서 등장했다.
  슈퍼마켓에 들렀는지 식료품 봉다리를 들고.)
  나는 오늘, 밥 먹고 TV 보고 잤다.
  자기 전에 아내가 이 닦고 자라고 해서 이빨도 닦았다.
  화장실 앞에서 前해군참모총장처럼 포즈를 취했더니
  아내가 쓸쓸하게 웃었다는 것도 적어야겠다.
  아 참,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았고 서울과 중부 지방 낮 28도였다.
  내가 안방 문을 열면 무대, 불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나이가 외친다; "지금, 옥수수밭에 바람 지나가는
  소리, 들리지?" 저 15층 아래 강;
  밤에는 강이 긴 비닐띠처럼 스스로 광채를 낸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가련한 空氣族들이여, 안녕, 빠이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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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칼 마르크스 외 지음,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 / 박종철출판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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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실천으로부터 고립된-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185-189 쪽

6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용해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다.
이러한 현실적 본질의 비판 속으로 파고들지 않는 포이에르바하는 따라서:
1. 역사적 과정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성을 그 자체로서 고정시키고 하나의 추상적-고립된-인간 개체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2. 따라서 그 본질은 '유類'로서만, 내적이고 침묵하는, 많은 개체들을 오직 자연적으로 묶고 있는 일반성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7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성'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임을, 그리고 그가 분석하고 있는 추상적 개체가 하나의 특정한 사회 형태에 속함을 알지 못한다.

8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Mystizism[us]로 이끌고 가는 모든 신비들은 인간의 실천에서 그리고 이 실천의 개념적 파악Begreifen에서 그 합리적인 해결을 얻는다.

9
관조[직관]하는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서 개념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하는 정점은 각각의 개체들 및 시민 사회의 관조[혹은 직관]이다.

10
낡은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 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혹은 사회적 인류이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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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조선인 > 중복 리뷰로 인한 나와 알라딘의 피해?

<위서가님의 주장>
- 주장1:서평에 대한 '당첨제도'가 존재하는 마당에 중복서평을 올리면 멋드러진 서평을 쓰는 사람으로 인해 타인이 서평을 통해 대가를 받을 기회와 서평이 읽힐 기회가 줄어든다. 나아가 일부 인간이 서평을 독과점하게 되면서 이 사람의 발언에 따라 판매량이 좌지우지될 수도 있는 권력이 생긴다.
- 주장2: 쓸데없는 정보를 중복시킬 수 있다.
- 주장3: 개인의 금전적 이익, 명예, 인기욕 충족의 수단이며, 그렇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 주장4: 인터넷 서점 간의 서평 차별화가 없으며, 독자적인 서평을 육성하려는 노력을 인터넷 서점이 안 하게 된다. 혹은 인터넷 서점은 고유한 주의, 주장이 있어야 한다. 서평의
차별화가 없을 경우 남는 것은 가격의 차별화인데, 이는 출판계와 알라딘에 타격을 준다.
- 주장5: 자본이나 마케팅 술수, 특정 개인의 선호에 휘말리게 함으로써(?) 서평을 보고 책 구매를 결정하는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며, 상대적으로 덜 팔리는 출판사에게도 피해를 준다.

위서가님의 주장 중 내가 공감하는 것은 "주장4"이다.
알라딘이 컨텐츠 확보에 투자하는 비용은 한달에 5,726,450원 (2006년 12월 기준)
이주의 마이리뷰 6편 x 5만원 x 4주 = 120만원
이주의 화장품리뷰 7편 x 1만원 = 7만원
이주의 TTB리뷰 3편 x 5만원 = 15만원
Thanks to 마일리지 = 3,926,450원
주간 서재의 달인 = 30명 x 5천원 x 4주 = 60만원 

반면 예스24가 컨텐츠 확보에 투자하는 비용은 일단 파악이 불가하다.
이주의 마이리뷰 10편 x 3만원 x 4주 = 120만원
채널예스 필진 원고료 ???

예스24가 컨텐츠 확보를 전문 필진에게 좀 더 의존한다면
알라딘은 전적으로 고객에게 의존한다는 의미이다.
설령 예스24가 채널 필진에게 투자하는 비용이 알라딘보다 많다 하더라도,
알라딘이 어차피 마케팅 비용으로 쓸 돈을 가지고 고객에게 생색을 낸다 하더라도,
고객 입장에선 마케팅 비용을 푼돈이나마 고객에게 환원하는 알라딘을 더 선호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고객이 알라딘에 쓴 리뷰를 예스24에도 올린다면
알라딘 입장에선 손해요, 예스24로선 이득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위서가님에게 공감하는 대목.
하지만 위서가님이 주목하는 중복서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장 1인 듯 싶다.
클리오님에게 단 댓글.

중복서평에 대해서 문제삼는 이유는 간단히 말하면
서평의 순기능을 앗아가는데 대단히 일조하고 있어서이지요.
**과 **가 당당하다면 그동안 적립금이나 당첨금 타먹은 걸 공개하면 되죠.
전 그들이 많이 타먹는 걸 수년 째 보았으니까요. 그럴만한 실력은 되겠죠.
그런데 왜 다른 곳까지 중복서평을 올려서, 다른 곳의 주민들이 탈 기회까지
앗아가느냐 하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지더군요.

'실력'이 되는 사람이 여러 사이트에서 금전적 이익을 올린 건 사실이다.
그게 왜 나쁜가라는 것에 대해 위서가님은 인터넷서점의 국경을 허물고
(실력자와 비실력자간의) 부당경쟁과 (경쟁자의 수를 늘리는) 과다경쟁을 촉발하므로
실력이 없는 사람, 한 사이트에만 계속 서평을 올리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 자체는 틀린 건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주장 1에따라 '중복리뷰가 나쁜 것이다'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전제1: 책을 구매하는 사람은 거의 독자리뷰에 의거하여 책을 고른다. (서평권력의 집중)
전제2: 리뷰를 보는 사람은 책에 달린 모든 서평을 보지 않고, 위에 달린 서평, 즐겨찾는 서평만 본다. (서평 읽힐 기회의 감소)
전제3: 인터넷 서점은 순전히 리뷰의 우수성만 보고 우수리뷰를 선정한다.
전제4: 독자는 우수리뷰가 있는 사이트에서 책을 구매한다.

전제1과 관련하여 마침 알라딘 마을지기가 투표를 진행한 바 있다.

1번
베스트셀러
  25%

2번
추천도서
  4%

3번
주변 사람들
  6%

4번
광고
  2%

5번
문학상 수상작
  2%

6번
서평
  58%

위서가님의 주장대로 서평을 보고 책을 고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이 때의 서평 기준은 신문·TV 프로그램의 서평을 포함한 것이므로,
독자리뷰가 가장 영향력 있다고 보긴 힘들다.
기회가 되면 누군가 관련 연구를 진행했으면 좋겠지만
현재로서는 나의 구매행태에 기반하여 독자리뷰의 영향력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자 한다.



확실히 독자리뷰의 기여도가 높긴 하지만, 다른 요인의 합이 70%이므로 절대적이라고 볼 수 없다.
게다가 독자리뷰로 산 책은 거의 전적으로 아이 그림책으로,
반딧불님, 아영엄마님, 울보님, 진/우맘님, 책읽는나무님, 바람돌이님 등 
우리 아이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분들이 쓴 것으로 잘 쓴 독자리뷰라기 보다
내가 믿는 지인 추천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으며
(즐겨찾기를 하고 있고, 오프라인 교류도 하는 분들이다),
더 정확하게는 노랑이, 파랑이, 아영이, 혜영이, 류, 예진, 연우, 성민, 예린, 해아의 추천도서인 것이다.
즉 리뷰 잘 쓰는 사람으로 인한 부당경쟁의 논리는 일단 나의 사례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어떤 책을 살지 정하지 않고 일단 사이트에 접속한 뒤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작이나 최근 마이리뷰 리스트를 확인한 뒤 리뷰를 참조하여 살 책을 고를까?
아니면 즐겨찾는 브리핑 내의 리뷰를 참조하여 책을 고를까?
내가 세우는 가설은 아무리 리뷰를 잘 쓰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범위는 그 사람을 즐겨찾는 사람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내 가설의 근거는 아래 기사에 의거한다.
참조기사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2241.html
알라딘의 김현주씨가 밝혔듯이  리뷰어의 권력은 인문서의 경우 초반 판매량을 좌우할 정도의 권력으로,
리뷰가 훌륭해 안 팔릴 책도 팔린 게 아니라,
범람하는 책의 홍수 속에 묻힐 수도 있는 좋은 책을 가려내는 검증장치 혹은,
이런 좋은 책이 나왔는데 넌 알고 있니? 하고 알려주는 소식 알람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전제1은 절대적으로 참인 명제가 될 수 없다.

다음으로 전제2.
리뷰를 보는 사람이 모든 책의 리뷰를 보는 대신 즐겨찾는 리뷰의 책만 보는 건 진실일게다.
하루 종일 올라오는 모든 리뷰를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 듯.
하지만 앞에 달린 리뷰만 본다는 건 꼭 진실일까?
이 책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람이라면 그 책에 달린 리뷰는 모두 보지 않을까?
게다가 앞에 달린 리뷰만 본다가 참명제라면 글 잘 쓰는 사람이 서평권력을 독점한다는 전제1과 상충된다.
따라서 중복리뷰를 올리는 사람에 의해 다른 사람의 리뷰 읽힐 기회가 감소한다는 위서가의 우려 역시
단지 중복리뷰를 올리는 사람이 아니라 글 잘 쓰는 사람이 중복리뷰를 올리고,
그 사람의 중복리뷰가 훌륭하여 그 사람을 즐찾하여 오로지 그 사람의 리뷰만 보는 사람에 한해 참이다.

그리고 전제3.
2006년 12월 우수리뷰 23편 중 2006년 신간이 18권이요, 그중에서도 11~12월 출간도서가 11권이다.
나머지 5권 역시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으로 2003년 1권, 2004년 3권, 2005년 1권이며,
각기 다른 출판사(청림출판, 푸른책들, 민음사, 바람의 아이들, 창비)의 책이고,
<유진과 유진> 이외의 책은 최근 몇 달간 리뷰가 뜸한 책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이는 인터넷 서점이 우수리뷰를 선정할 때 '실력'도 보지만 '안배'도 한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2006년 하반기에 중복리뷰어가 2차례 당선된 사례가 1건 있긴 하지만
(다행히도 이 분은 위서가님의 공격대상이 아니었는데,
리뷰만 올릴 뿐 블로그를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주장3의 인기, 명예욕과 일치하지 않는 사례이기 때문일까?)
아무리 '실력'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수시로 당선시키지 않게 '안배'가 작용하는 듯하다.
즉 인터넷서점의 안배가 존재하는 한 '실력'있는 중복리뷰어에 의한 피해는 크지 않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전제4.
내 생각엔 중복리뷰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알라딘이다.
마케팅 비용의 태반을 독자리뷰를 확보하는데 투자하는데,
타사이트에 있는 것과 동일한 리뷰에 불과하다니 참 맥빠질 일이다.
하지만 독자리뷰가 우수한 사이트에서 책을 구매한다는 것은 나에겐 참이지만,
모든 이에게 참은 아니다.
위서가님은 인터넷서점의 가격이나 배송엔 차이가 없으며, 오로지 컨텐츠의 차이만 있었다고 말하지만,
둥지는 알라딘에 틀고 있으면서도 배송에 대한 불만 때문에
 타사이트에서 구매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즉 전제 1,2,3,4가 모두 참일 때만 중복리뷰가 알라딘의 경영손실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그 정도가 미약하고, 미미하다 할 지라도,
위서가님이 말하는  리뷰어 개인의 피해(?)가 존재하고, 권력이 존재하고, 금전적 이익이 존재한다.
이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말이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권력 없는 곳이 있던가?
권력 자체가 불공정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최소한 나 개인은 중복리뷰어에 의해 우수리뷰어로 당선될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실보다
중복리뷰어 덕분에 좋은 책의 출판 소식을 빨리 알게 되고,
옥석을 가릴 수 있는 검증장치로 얻는 실이 크다고 생각한다.
즉, 한미FTA를 반대하는 것이 한국민중의 이익에 반하는 것과 달리
중복리뷰는 나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다.

또한 액수가 작더라도 뇌물과 동급이라는 주장 역시 동의할 수 없다.
컨텐츠의 경우 얼마든지 one source multi use가 가능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이하 매너리스트님의 사례.

사례1_작가 ㄱ씨는 1000자 분량의 칼럼을 써서 ㄱ일보에서 원고료 10만원을 받았다. 똑같은 글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주간지 ㅎ한국에 실어 원고료 8만원을 수령했다.

사례2_도시교통을 전공한 ㅎ교수는 TRB part II에 실은 논문을 제목과 내용을 그대로 영국 학회지에 실었으며, 이로 인해 얻은 연구 점수는 해당 학교의 고과에 반영되었다.

사례1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신문사가 타 신문사와의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해
동일 칼럼을 다른 회사에 싣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ㄱ신문사가 작가ㄱ을 제소할 때 문제이며,
인터넷 서점 이용 약관상 중복리뷰는 허용된다.

사례2의 경우 연구고과를 산정할 때 동일한 논문을 2번 게재한 것은
별개의 실적으로 고과반영을 할 수 없게 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지,
만약 어떤 논문이 우수해서 여기저기 인용되거나 여기저기 게재된 것도 고과로 따지겠다고 기준을 세우면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례로 중복리뷰와 별개의 문제이다.

이하 나의 반박 사례.
사례3. 모바일게임업체 ㄱ이 LGT에 컨텐츠 공급계약을 하면서, SKT에 공급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았다.
사례4. 영화 <괴물>은 2006년 대한민국 영화제와 청룡영화제에서 모두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사례3의 경우 공정거래위원회에서 LGT의 부당계약에 대해 정정지시를 내린 바 있으며,
사례4의 경우 우수콘텐츠가 얼마든지 중복수상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하아,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다 읽을 사람은 없겠지만, 자기 만족으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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