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조선근대문학' 시리즈

 

한겨레(07. 02. 13) “한국어 배우는 학생 많은데… 제대로 번역된 소설 없어 나섰어요”

한국 근대문학의 대표작들을 일본어로 옮기는 체계적인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오무라 마쓰오 와세다대 명예교수와 호테이 도시히로 와세다대 교수(국제교양학부)가 기획·편집을 맡은 ‘조선근대문학선집’ 시리즈가 그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중국 연변의 윤동주 묘를 처음으로 확인한 이로, 일본 내 한국문학 연구의 대부로 일컬어진다. 호테이 교수는 김윤식 교수의 방대한 저작 목록을 최초로 완벽하게 정리함으로써 국내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일화로 유명한 이다. 이달 하순 서울대 졸업식에서 <초기 북한 문단 성립 과정에 대한 연구 ­ 김사량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지난 2002년 호테이 교수의 제안으로 시작된 조선근대문학선집 시리즈에는 두 사람의 기획자를 포함해 일본 내 한국 현대문학 전공자 대다수가 참여한데다 일본 굴지의 출판사인 헤이본샤를 출판 파트너로 삼음으로써 명실공히 일어판 한국 문학 선집의 결정판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5년 11월 이광수의 <무정>(하타노 세츠코 니가타단기대학 교수 옮김)이 첫권으로 나온 데 이어 강경애의 <인간문제>(오무라 마쓰오 옮김)가 지난해 5월에, 그리고 합동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시라가와 유타카 규슈산업대 교수 등 옮김)이 9월에 나왔다. 호테이 교수가 번역을 맡은 채만식의 <태평천하>가 올해 5월에 나올 예정이며, 염상섭의 <삼대>, 이기영의 <고향>, 두 권으로 축약한 홍명희의 <임꺽정>, 그리고 김동인 단편집과 시선집 등을 포함해 모두 16권으로 2009년 말 완간될 예정이다.

“그동안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 작품은 주로 단편소설들이었습니다. 그나마 비전공자들이거나 일본어에 서툰 한국인들이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중역도 많았죠. 이광수의 <무정>조차 제대로 번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희는 장편소설들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일본어판 결정본을 만든다는 각오로 번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도쿄에서 만난 두 기획자의 말에서는 학자로서의 사명감과 아울러 자부심도 넘쳐났다. “꼭 한국문학 전공자는 아니더라도 한국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한국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데 소설 읽기는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제대로 된 일본어 텍스트가 많지 않아 애를 먹었지요. 이번 선집 발간은 학교에서 쓸 교재를 저희 스스로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즈음 한국에서 일본 소설들이 이상 열기를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극히 미미하다. 해방 이전 작품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사정을 반영하듯 이번 선집 출간은 번역자들 쪽에서 한 권당 200만엔씩의 제작비를 출판사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성사되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어느 일본 여성이 상당액을 희사해서 우선은 작업에 착수했지만, 16권이 모두 차질 없이 발행되기 위해서는 한국 쪽의 지원이 절실한 형편이다. 두 사람은 이에 따라 다음달께 한국문학번역원에 지원 신청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제가 근무하는 와세다대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모두 1700명이 넘는데 전임 교수는 달랑 저 한 사람입니다. 2년 임기인 한국인 객원교수가 두 사람 있고, 나머지는 시간강사들이죠. 한국 정부나 기업 쪽에서 교수 충원이나 한국문학과 개설을 위한 지원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와 함께 이들은 한국 쪽 연구자들과 출판사들이 한국문학의 정본 확정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가령 윤동주의 시집이 그동안 수십 수백 종이 나왔을 텐데 그 가운데 윤동주 자신이 남긴 육필 원고와 일일이 대조를 하고 낸 게 몇 권이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윤동주만이 아니죠. 번역을 걱정하기에 앞서 한국어로 된 정본을 확정하는 게 우선돼야 하지 않겠습니까.”(도쿄/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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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3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 한국문학 전공자로서,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네요. 현실적으로 '우리'가 돈을 대야지 번역이나 국문과 '자리'가 생긴다는 것이 그렇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민족주의적인 감상이라기 보다는, 파워 차이와 약소국이라는 권력관계가 문화관계에도 정확히 반영된다는 것.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 중 하나인 우리 작가들이 베트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이 증폭되고 반성되기를 바랍니다.
 
 전출처 : 로쟈 >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

"좋은 지적 감사드리지만, 좀 악의적인 지적인듯 하네요. 먼저, 제임슨 원문의 해독 어려움이야 잘 아실테니, 제가 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지적하신 부분은 해독이 어려워야 저자의 뜻이 살아난다고 보고 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한 것입니다.(...) 그 밖에 지적해주신 오역 부분은 물론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본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만큼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좀 더 신중한 리뷰 부탁드립니다. 님의 말대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제대로 인정도 못받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의 서론을 읽고 문제가 되는 오역들을 '악의적'으로 지적한 페이퍼에 대해서 역자가 달아준 댓글이다. 역자로선 할말이 없지 않은 듯하지만 이후에 본격적인 반박을 아직 접한 바 없어서 그 '할말'이 무엇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주에 나는 서론과 1장을 읽고서 이 번역서가 겉모양새와는 다르게 '오역서'라 할 만큼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런 생각을 피력하는 페이퍼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을지 모르겠다(그럼 무고죄이다!). 문제는 내가 남 헐뜯기나 좋아하는 사악한 인간이어서 빚어지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이 어긋나서 2장부터는 아주 똑부러지게 번역을 해놓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2장까지도 읽었다. 책의 1/3이다. 하지만 책은 나로선 오역이라고밖에 판단할 수 없는 '일부러 두통만 나도록 한' 대목들이 수두룩했다(어느 출판사의 기준으로 하면 이 1/3의 오역/오타만으로도 전부 회수한 후에 개정판과 교환해 주어야 할 일이지만 기준이 다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이런 걸 지적한다고 해서 이 번역서의 가치가 떨어질 리는 없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한다. 오역이 좀 있다고 해서 책값이 떨어지는 경우를 나는 못봤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동네서점에서 사느라 12,500원의 책값을 다 치렀다. 누가 억울한 건가?

하지만 억울하다는데 또 어쩔 것인가? 그래서 맘을 고쳐먹기로 한다. 사실 제임슨의 소개서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웬만한 오역 정도는 알아서 고쳐 읽어도 된다(제임슨 소개서들이 다 그렇다). 해서 이 자리에서 다시 오역을 들먹이는 건 '터무니 없는 부당한 악평'으로 역자나 출판사에 위해를 가하고자 하려는 게 아니라 어떨결에 책을 구입한 독자들에게 '친절한 로쟈씨'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오물이 좀 묻었더라도 잘 씻어내면 또 먹을 수 있듯이 약간의 오역으로 범벅이 돼 있더라도 교정해가면서 읽으면 '본전'은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곁들여 나처럼 원서를 갖다 놓고 같이 읽으면 원서 독해력의 향상이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이 책을 구입한 몇 안되는 분들을 위한 나의 '친절'이다. 당초에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이란 제목을 이 페이퍼에 달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로 고쳐달았다. 그리고 카테고리도 '지겨운 책읽기'에서 '즐거운 책읽기'로 옮겼다. 그래도 잘 보여야 이 '오역의 감옥'에서 빨리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교정을 하며 읽고자 하는 게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란 2장이다, 라고 적어놓고 다시 보니까 1장 '마르크스주의자'를 먼저 읽어야 한다(젠장). 원제는 'Marxist Contexts'이다.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얘기하기 전에 워밍업부터 하자는 얘기겠다. 왜냐구? "제임슨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며, 그의 작업 역시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제임슨의 대표적인 저작이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마르크스주의와 형식>(1971)이다. 우리에겐 <변증법적 문학이론이 전개>(창비, 1984)라고 소개된 저작 말이다.

참고로, 앨피출판사에서 나온 초기의 '크리티컬 씽커즈'와는 달리 이번에 나온 <제임슨>이나 <데리다>에는 참고문헌에 국내 번역서 목록이 다 빠졌다. 방침이 바뀐 모양이지만 국역본을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조 표시를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뭐 이런 건 내 알 바가 아닌지도).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이자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개념으로 꼽히는 것은 아마도 '총체성'일 것이다. 이 용어를 애용함으로써 '헤겔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다."(48쪽). 여기서 핵심 개념 하나 나왔다. 총체성. 이거 강조 표시다(미리 말해두자면, 제임슨에게서 또 다른 핵심개념 두 가지는 '소외'와 '사물화'이다. 이거면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 다 정리된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 애덤 로버츠가 강조하는 것은 '총체성'이란 말을 애용하는 덕분에 제임슨이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를 사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주의에도 그럼 종류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헤겔주의에 반대하는, 그러니까 목적론적인 '총체성'을 거부하는 알튀세르주의도 있다(번역서는 시종일관 '알튀세'라고 표기했지만 여기서는 '알튀세르'라고 해두겠다).이 '알튀세리앵'들은 "헤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체화 작용을 우리를 억압하는 힘으로 간주한다."

그런 배경하에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 "어쨌든 제임슨을, 알튀세적 접근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와 아도르노의 지적 유산을 물려받은, 전형적인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48쪽) 원문은 "It is worth noting, however, that Jameson is usually seen as a Hegelian Marxist, an inheritor of traditions of Lukacs and Adorno and more or less hostile to an Althusserian approach."(16쪽) 

보면 알겠지만, 원문 어디에도 '올바르지 않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제임슨이 일반적으론 알튀세르적 접근법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나 아드르노의 전통을 이어받은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된다는 점은 지적해두어야겠다."가 나의 번역이다. 물론 그런 일반적인 견해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으며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알튀세르 진영으로 많이 끌고가고자 하는 게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적해두어야겠다'를 '올바르지 않다'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게 아닐까? 뭐 아니면 말고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마르크스에 관한 기본 초식들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세계는 변혁되어야만 한다." 이거 길게 따라갈 필요 없겠다. 넘어간다. 다만,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인용한 대목(이거 방대한 분량의 정전이지만, 아직 우리에게 완역돼 있지 않다. <독일 이데올로기1>(청년사, 1998)이 전부이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적은 것도 아닌데 이런 번역은 왜 안 이루어지는지? 신만이 아실 거다. 나도 두꺼운 영역본만 갖고 있다). 번역문과 원문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생산과 유통의 모든 관계를 기초부터 전복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활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경제에 바탕한 조직이다."(52쪽)

"Communism differs from all previous movements in that it overturns the basis of all earlier relations of production and intercourse, and for the first time consciously treats all natural premises as the creatures of men... its organisation is, therefore essentially economic."(17쪽)

부분역이긴 하나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를 나도 갖고 있는 듯한데 여하튼 지금은 없다(영역본도 박스에나 들어가 있겠다). 해서 그냥 보면, 나는 아무래도 표시한 문장이 껄끄럽다. 물론 movements'를 '활동'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한 감각이라고 생각되지만, 'treat A as B'(A를 B로 간주하다)라는 구문이 어떻게 해서 'B를 A로 삼는다'가 되는지 이해불능이다. 독어본에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상식적 감각은 "공산주의는 처음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 자산을 인간의 생산물로 간주한다." 정도로 읽는다('premise'는 물론 '전제'란 뜻이지만 복수형일 경우 '토지'란 뜻도 갖는다).

하긴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도 좋은 말이긴 하니까 그냥 넘어가도 대차는 없겠다. 'esssntially'도 여기선 '본질적으로'란 뜻 같지만 '필수적으로'라고 옮긴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에잇,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몇 줄 내려가서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의 활동은 경제적 관계로 결정된다고 믿었다."에서도 '인간의 활동'이 'human life'의 번역이라는 게 좀 놀랍긴 하지만 뭐 의역이라는 게 있으니까.

겸사겸사 공부도 해야 하니까 정리성 멘트: :"요컨대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산층 부르주아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돈을 둘러싼 경쟁, 혹은 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부를 창출하는 근원인 공장과 자원 등의 생산수단을 둘러썬 경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53쪽)

 

 

 

 

이어지는 내용은 알튀세르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론과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을 어떻게 수정하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 등에 관한 내용들 역시 상식에 속하므로 넘어간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입장이 비평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이론은, 문학과 문학비평 분야의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1930년대 초반에 이미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문화 전체를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57쪽)

겉보기에는 아주 멀쩡한 문장들인데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이하의 원문은 이렇다: "Culture, says Jameson, is 'to be thought of as something more and other than... the false consciousness, that we associate with the word idelogy', and is instead something that possesses an 'uneasy existence, an uncertain status'."(21쪽)

일차적인 문제는 that이란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를 역자가 'false consciousness'가 아니라 'culture'로 잘못본 데 있다(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해서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를 다시 옮기면,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우리가 이데올로기라는 말에서 연상하게 되는 '허위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그걸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사고되어야 하며" 정도이다. 여기서 제임슨의 (허위의식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론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수용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인 것. 번역문의 뒷부분에서 '억압적인 힘'은 도대체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어서 마저 옮기면, "문화는 (그러한 허위의식) 대신에 '뭔가 불안한 존재성, 뭔가 불확실한 지위'를 갖는 어떤 것이다." 과연 어디에서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단선적인 인과적 관계로 이해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와 사회의 관계,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새로운 전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 루이 알튀세이다."(59쪽) 여기서 '새로운 전제'는 'newer development'의 번역이다. 사전적 의미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역자의 자유자재로움이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알튀세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분으로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정치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던 시기인 196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59쪽) 원문은 "Althusser started writing at a time, the early 1960s, when the excesses of Stalinist dictatorship in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 had done much to discredit Marxism as a political philosophy."(22쪽)

알튀세르의 커리어에 관한 대목인데,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을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목으로"라고 옮긴 건 아쉽다. "자칭 '공산주의' 국가라는 소련에서" 정도의 뜻이기에(국역본은 강조할 대목들을 상당수 누락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이면 탈스탈린화 바람이 불던 때이다.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린 시기는 20년대 후반부터(특히 3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이다. 여하튼 그 여파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가 이미 땅에 떨어졌던 시기에 알튀세르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얘기. 

"알튀세는 마르크스를 재검토한 뒤 총체성 개념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총체성은 전체적(*전체성) 혹은 전부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방식이다. 다양한 소논문과 비평집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적 유산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9쪽) 대신에 "알튀세에게 '역사는 (종결이나 목적을 의미하는) 텔로스 없는 과정이자 주체가 없는 과정이다.'"(70-1쪽)

하지만, 이러한 알튀세르의 기획(project; 국역본에서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가 헤겔의 정치사상(political ideas; 국역본에서는 '정치적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세계(materal world; 국역본에서는 '물질세계')에 적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당시로선 주류였기 때문에 잘 수용되지 않았다.

상식적이지만, 조금 내용을 챙겨두자면, "1965년에 쓴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는 비록 초기 마르크스는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후기 마르크스는 헤겔을 극복하여 총체성과 관련한 위험한 논의와 단절했다며 진정한 마르크스에게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알튀세르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마르크스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그의 이론 전개 과정에서 하나의 '단절'을 발견할 수 있다. 전기의 헤겔주의자 마르크스와, 초기 저작의 위험한 헤겔주의를 청산한 후기의 과학적 마르크스 사이의 단절이다."(63쪽)

"당연히 , 알튀세는 '사회질서'나 '전체 체계' 등의 용어를 동원하여 사회와 문화를 분석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알튀세는 사회가 단일하고 엄격한 구조라기보다는, 다양한 요소가 상호연관된 더 복합적인 체계, 다시 말해 탈중심적 구조임을 강조한다. '사회형식' 등 첨단용어를 사용하여, 알튀세는 총체성의 '해체'를 달성하고자 한다."(63-4쪽) 

알튀세르에 관한 ABC의 나열인데, 눈길을 끄는 건 '사회형식'이라는 첨단용어(!)이다. '첨단용어'라는 말 자체가 원문에는 없을 뿐더러 이게 'social formation'의 번역이다! '사회구성체' 말이다(이진경의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이 재출간된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바로 그 '사회구성체', 줄여서 '사구체' 말이다)! 내가 요즘 사회과학서적을 좀 등한히 했기에 그간에 '사회구성체론'이 '사회형식론'이라는 '첨단용어'로 옷을 갈아입었는지는 잘 모르겠다(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건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무지의 소치이다...  

젠장,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즐거운 책읽기'를 계속하고 싶지만 내게도 '현실원칙'이란 게 있다. 먹고 살아야 한다. 1장에 남아있는 몇 페이지는 건너뛰고 대충 마무리하도록 한다(2장은 들어가지도 못했군). "거칠게 말해서, 예술을 결정하는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요소들은 해체되어야 하지만, 알튀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또한 그것을 재구축해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재구축이 여전히 모순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본인이 행하는 작업의 분명한 경제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75쪽)

이 결론부분은 잘 나가다가 삼천포이다. 아무리 자유자재로운 정신의 번역이라손 치더라도 'political sense'를 '경제적 의미'로 번역할 수 있나? 정치, 그거 따지고 보면 다 경제야, 란 계산이 깔린 거라면, 거의 대붕의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나로선 이렇게 덧붙일 밖에: "번역자라면 본인이 행하는 작업의 분명한 윤리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나 같은 참새 머리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로고...

07. 0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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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2-12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ritical Thinkers 시리즈 중에서 <지금, 스튜어트 홀> 본 이후로는 몇권 사놓았었는데.... 요번에는 두권 중에서 자크데리다만 질렀습니다만...; 심한 오역이 있다면... 그냥 원서를 읽는 편이 이득이겠군요.-_-;(라고는 해도 그럴 능력이 없지만;)

기인 2007-02-12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손유경 선배님이 번역하신 <지금, 스튜어트 홀>이요? 정작 저는 손도 못(안?)되고 있습니다. 좋은 책인가요? 워낙 좋은 선배가 번역한 것이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런저런 핑계로 읽지도 못하고 있네요;;

기인 2007-02-12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보관함에 쟁겨둡니다. 손유경 선배님께 왠지 죄송스러운 마음이네요 ^^; 손유경 선배님-선생님께서는 이번에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전출처 : 바라 > 노동착취·단속 풀리지 않는 ‘굴레’

노동착취·단속 풀리지 않는 ‘굴레’



전남 여수시 화장동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3층 화재 현장에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던 수용자의 손톱과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직도 수많은 외국인 근로자에게 ‘코리안 드림’은 ‘꿈’일 뿐이다. 수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희망을 안고 한국을 찾지만 상당수는 사업주의 착취와 사회적 냉대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불법체류자가 되거나 ‘노예 같은 삶’을 피하기 어렵다.

한국에 오는 길도 결코 순탄치 않다. 한국행 티켓을 사기 위해 거금을 브로커에게 건네지만 사기를 당해 날리거나, 밀입국 과정에서 변을 당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11월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을 찾은 스리랑카인 라싱하는 현재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있다. 라싱하는 경기 화성의 ㄷ사에서 연수를 시작했고 성실히 일을 했다. 하지만 ㄷ사 사장은 업무가 많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라싱하의 산업연수신청을 차일피일 미뤘다. ㄷ사는 결국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의 불시 점검에 의해 외국인 노동자 불법 고용이 적발됐다. 라싱하 역시 불법체류자가 되어 쫓겨날 날만 기다리고 있다. 라싱하의 비자 만료 기간은 2년6개월이나 남아있다. 합법적으로 일하던 선량한 외국인 노동자가 사업주의 태만으로 불법 체류자 딱지를 안게 된 사례다.

경기 안산의 중국어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던 중국인 ㅎ씨는 학원장으로부터 욕설과 폭행을 당한 뒤 근무지에서 쫓겨났다. ㅎ씨는 관할 노동청에 원장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진정을 냈다. 하지만 ㅎ씨 역시 강제출국 위기에 처했다. ㅎ씨는 어학강사용 비자인 E-2비자를 G-1 비자(특별체류비자)로 전환했지만 G-1 비자로는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용주의 부당행위가 인정되어 사업장이 변경되더라도 G-1에서 E-2 비자로의 재변경이 되지 않는다.

네팔인 ㄴ씨는 한국에 와서 일한 지 1년 만에 회사가 부도나 사장이 잠적해 버렸다. 반년간 수소문 해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1년 동안 일한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갔다. 대전의 한 금속공장에서 일을 하던 인도인 ㅅ씨는 일 하던 중 손가락이 잘렸으나 산재처리를 받지 못했다. 사장은 도리어 “손가락 잘린 네가 어떻게 제대로 일을 하겠냐”며 해고했다. 불법 체류자인 그는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못한 채 피눈물을 쏟으며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밀입국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6월15일 부산 영도구 남외항에 정박 중인 495t급 제91태백호에서 인도네시아 선원 9명 등 외국인 선원 14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육상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던 중 9명은 해경에 검거됐으나 5명은 행방이 확인되지 않아 익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앞서 지난해 5월에도 같은 곳에서 원양어선에 타고 있던 베트남인 선원 4명이 해상을 통해 밀입국을 시도하다 1명은 구조됐으나 나머지 3명은 실종됐다. 2000년 1월27일 밀폐공간인 냉동탑차에 남자 25명 등 모두 48명의 밀입국자가 빼곡히 앉아 제주~목포간 여객선에 실렸다가 1명이 산소 부족으로 사망하고, 1명은 호흡곤란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일도 있었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류성환 사무국장은 “외국인 노동자 정책이 고용주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어 외국인 노동자의 불법체류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배명재·김준일·임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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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최강폼뿌...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경향신문 <책읽기 365>에 실린 옥타비오 파스의 산문집이다.문정희 시인의 폼뿌가 대단하다.

이 책이 시론집이어서 한번 멈칫하지만 계속 눈길이 간다. 

 

책읽기 365]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입력: 2007년 02월 11일 18:31:21
 
‘활과 리라’

옥타비오 파스의 산문집 ‘활과 리라’(솔)는 눈부신 문학의 피라미드이다. 그가 노벨상에 빛나는 시인이고, 이 작품이 20세기 스페인어로 쓰인 가장 위대한 산문이라서가 아니다. 이 책은 인간과 시에 깊이 천착한 한 거장의 사색의 절정으로 인간의 존재를 깊이 느낄 수 있다.

“시는 앎이고 구원이고 힘이고 포기이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이다.”

어디를 펼쳐도 가슴을 치는 문구들이 튀어나온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도 이만큼 감동과 부러움과 질투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아니 질투라기보다 무력감과 자괴감이다. 이 책을 보며 비로소 한국문학이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지 보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시인이다. 그가 내리친 도끼로 정수리를 얻어맞으며 나는 내내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으로 태어나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행복한 일이다.

나는 그가 살던 멕시코를 세 번 방문했고, 그때마다 아즈텍과 태양의 돌이 나의 피 속에서도 분출하는 착각을 느꼈다. 그는 우리에게 문학을 말한 것이 아니다. 시대와, 인생의 본질을, 생명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스페인어를 살과 뼈로 녹여 빼어난 한국어로 되돌려놓은 두 역자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문정희 시인·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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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

"좋은 지적 감사드리지만, 좀 악의적인 지적인듯 하네요. 먼저, 제임슨 원문의 해독 어려움이야 잘 아실테니, 제가 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지적하신 부분은 해독이 어려워야 저자의 뜻이 살아난다고 보고 일부러'두통만 나도록' 번역한 것입니다.(...) 그 밖에 지적해주신 오역 부분은 물론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본 번역서의 가치를 떨어뜨릴만큼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좀 더 신중한 리뷰 부탁드립니다. 님의 말대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제대로 인정도 못받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의 서론을 읽고 문제가 되는 오역들을 '악의적'으로 지적한 페이퍼에 대해서 역자가 달아준 댓글이다. 역자로선 할말이 없지 않은 듯하지만 이후에 본격적인 반박을 아직 접한 바 없어서 그 '할말'이 무엇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주에 나는 서론과 1장을 읽고서 이 번역서가 겉모양새와는 다르게 '오역서'라 할 만큼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런 생각을 피력하는 페이퍼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을지 모르겠다(그럼 무고죄이다!). 문제는 내가 남 헐뜯기나 좋아하는 사악한 인간이어서 빚어지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이 어긋나서 2장부터는 아주 똑부러지게 번역을 해놓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2장까지도 읽었다. 책의 1/3이다. 하지만 책은 나로선 오역이라고밖에 판단할 수 없는 '일부러 두통만 나도록 한' 대목들이 수두룩했다(어느 출판사의 기준으로 하면 이 1/3의 오역/오타만으로도 전부 회수한 후에 개정판과 교환해 주어야 할 일이지만 기준이 다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이런 걸 지적한다고 해서 이 번역서의 가치가 떨어질 리는 없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확신한다. 오역이 좀 있다고 해서 책값이 떨어지는 경우를 나는 못봤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동네서점에서 사느라 12,500원의 책값을 다 치렀다. 누가 억울한 건가?

하지만 억울하다는데 또 어쩔 것인가? 그래서 맘을 고쳐먹기로 한다. 사실 제임슨의 소개서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웬만한 오역 정도는 알아서 고쳐 읽어도 된다(제임슨 소개서들이 다 그렇다). 해서 이 자리에서 다시 오역을 들먹이는 건 '터무니 없는 부당한 악평'으로 역자나 출판사에 위해를 가하고자 하려는 게 아니라 어떨결에 책을 구입한 독자들에게 '친절한 로쟈씨'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오물이 좀 묻었더라도 잘 씻어내면 또 먹을 수 있듯이 약간의 오역으로 범벅이 돼 있더라도 교정해가면서 읽으면 '본전'은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곁들여 나처럼 원서를 갖다 놓고 같이 읽으면 원서 독해력의 향상이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이 책을 구입한 몇 안되는 분들을 위한 나의 '친절'이다. 당초에 '터무니없는 부당한 악평'이란 제목을 이 페이퍼에 달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로 고쳐달았다. 그리고 카테고리도 '지겨운 책읽기'에서 '즐거운 책읽기'로 옮겼다. 그래도 잘 보여야 이 '오역의 감옥'에서 빨리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교정을 하며 읽고자 하는 게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란 2장이다, 라고 적어놓고 다시 보니까 1장 '마르크스주의자'를 먼저 읽어야 한다(젠장). 원제는 'Marxist Contexts'이다.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얘기하기 전에 워밍업부터 하자는 얘기겠다. 왜냐구? "제임슨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며, 그의 작업 역시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제임슨의 대표적인 저작이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마르크스주의와 형식>(1971)이다. 우리에겐 <변증법적 문학이론이 전개>(창비, 1984)라고 소개된 저작 말이다.

참고로, 앨피출판사에서 나온 초기의 '크리티컬 씽커즈'와는 달리 이번에 나온 <제임슨>이나 <데리다>에는 참고문헌에 국내 번역서 목록이 다 빠졌다. 방침이 바뀐 모양이지만 국역본을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조 표시를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뭐 이런 건 내 알 바가 아닌지도).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이자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개념으로 꼽히는 것은 아마도 '총체성'일 것이다. 이 용어를 애용함으로써 '헤겔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다."(48쪽). 여기서 핵심 개념 하나 나왔다. 총체성. 이거 강조 표시다(미리 말해두자면, 제임슨에게서 또 다른 핵심개념 두 가지는 '소외'와 '사물화'이다. 이거면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 다 정리된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 애덤 로버츠가 강조하는 것은 '총체성'이란 말을 애용하는 덕분에 제임슨이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를 사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주의에도 그럼 종류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헤겔주의에 반대하는, 그러니까 목적론적인 '총체성'을 거부하는 알튀세르주의도 있다(번역서는 시종일관 '알튀세'라고 표기했지만 여기서는 '알튀세르'라고 해두겠다).이 '알튀세리앵'들은 "헤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체화 작용을 우리를 억압하는 힘으로 간주한다."

그런 배경하에 주의해서 읽어야 할 대목: "어쨌든 제임슨을, 알튀세적 접근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와 아도르노의 지적 유산을 물려받은, 전형적인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48쪽) 원문은 "It is worth noting, however, that Jameson is usually seen as a Hegelian Marxist, an inheritor of traditions of Lukacs and Adorno and more or less hostile to an Althusserian approach."(16쪽) 

보면 알겠지만, 원문 어디에도 '올바르지 않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제임슨이 일반적으론 알튀세르적 접근법에 다소 적대적인 루카치나 아드르노의 전통을 이어받은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된다는 점은 지적해두어야겠다."가 나의 번역이다. 물론 그런 일반적인 견해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으며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를 알튀세르 진영으로 많이 끌고가고자 하는 게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적해두어야겠다'를 '올바르지 않다'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게 아닐까? 뭐 아니면 말고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마르크스에 관한 기본 초식들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세계는 변혁되어야만 한다." 이거 길게 따라갈 필요 없겠다. 넘어간다. 다만,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인용한 대목(이거 방대한 분량의 정전이지만, 아직 우리에게 완역돼 있지 않다. <독일 이데올로기1>(청년사, 1998)이 전부이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적은 것도 아닌데 이런 번역은 왜 안 이루어지는지? 신만이 아실 거다. 나도 두꺼운 영역본만 갖고 있다). 번역문과 원문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생산과 유통의 모든 관계를 기초부터 전복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활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경제에 바탕한 조직이다."(52쪽)

"Communism differs from all previous movements in that it overturns the basis of all earlier relations of production and intercourse, and for the first time consciously treats all natural premises as the creatures of men... its organisation is, therefore essentially economic."(17쪽)

부분역이긴 하나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를 나도 갖고 있는 듯한데 여하튼 지금은 없다(영역본도 박스에나 들어가 있겠다). 해서 그냥 보면, 나는 아무래도 표시한 문장이 껄끄럽다. 물론 movements'를 '활동'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한 감각이라고 생각되지만, 'treat A as B'(A를 B로 간주하다)라는 구문이 어떻게 해서 'B를 A로 삼는다'가 되는지 이해불능이다. 독어본에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상식적 감각은 "공산주의는 처음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 자산을 인간의 생산물로 간주한다." 정도로 읽는다('premise'는 물론 '전제'란 뜻이지만 복수형일 경우 '토지'란 뜻도 갖는다).

하긴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도 좋은 말이긴 하니까 그냥 넘어가도 대차는 없겠다. 'esssntially'도 여기선 '본질적으로'란 뜻 같지만 '필수적으로'라고 옮긴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에잇,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몇 줄 내려가서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의 활동은 경제적 관계로 결정된다고 믿었다."에서도 '인간의 활동'이 'human life'의 번역이라는 게 좀 놀랍긴 하지만 뭐 의역이라는 게 있으니까.

겸사겸사 공부도 해야 하니까 정리성 멘트: :"요컨대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산층 부르주아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돈을 둘러싼 경쟁, 혹은 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부를 창출하는 근원인 공장과 자원 등의 생산수단을 둘러썬 경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53쪽)

 

 

 

 

이어지는 내용은 알튀세르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론과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을 어떻게 수정하였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 등에 관한 내용들 역시 상식에 속하므로 넘어간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입장이 비평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이론은, 문학과 문학비평 분야의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1930년대 초반에 이미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문화 전체를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57쪽)

겉보기에는 아주 멀쩡한 문장들인데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다. '제임슨이 지적했듯' 이하의 원문은 이렇다: "Culture, says Jameson, is 'to be thought of as something more and otner than... the false consciousness, that we associate with the word idelogy', and is instead something that possesses an 'uneasy existence, an uncertain status'."(21쪽)

일차적인 문제는 that이란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를 역자가 'false consciousness'가 아니라 'culture'로 잘못본 데 있다(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해서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단순한 오인' 이상의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라는 말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를 다시 옮기면,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는 우리가 이데올로기라는 말에서 연상하게 되는 '허위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그걸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사고되어야 하며" 정도이다. 여기서 제임슨의 (허위의식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론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수용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인 것. 번역문의 뒷부분에서 '억압적인 힘'은 도대체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어서 마저 옮기면, "문화는 (그러한 허위의식) 대신에 '뭔가 불안한 존재성, 뭔가 불확실한 지위'를 갖는 어떤 것이다." 과연 어디에서 "'불안정한 존재와 불확실한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억압적 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단선적인 인과적 관계로 이해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와 사회의 관계,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새로운 전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 루이 알튀세이다."(59쪽) 여기서 '새로운 전제'는 'newer development'의 번역이다. 사전적 의미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역자의 자유자재로움이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알튀세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연합이라는 명분으로 스탈린적 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정치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던 시기인 196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59쪽) 원문은 "Althusser started writing at a time, the early 1960s, when the excesses of Stalinist dictatorship in the nominally 'communist' Soviet Union had done much to discredit Marxism as a political philosophy."(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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