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혜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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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내 구두에 버클을 달아라.

고급 스타킹을 신은 단정한 발목에 거칠지 않은 발, 하지만 구두는 별로였다. 번쩍이는 버클이 달린 최신식 에나멜가죽 구두에서 푸아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세련되지 않아, 너무 촌스러워!

그 숙녀가 택시에서 내리는 와중에 다른 쪽 발이 택시 문에 걸리면서 구두 버클이 떨어져나갔다. 버클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보도에 떨어졌다. 푸아로는 당당하게 앞으로 뛰어나가 버클을 집어 들고 후후 불어 먼지를 털어냈다.

셋, 넷, 문을 닫아라.

"엠버라이어티스 씨요? 죄송합니다만, 그분은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아하, 난 만날 수 있소."

재프가 험악하게 대꾸했다. 그는 푸아로를 옆으로 밀치고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프런트 직원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엠버라이어티스 씨는 30분 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에르퀼 푸아로에게 그것은 마치 어떤 문이 천천히, 그러나 굳게 닫히는 것과도 같았다.

다섯, 여섯, 막대기를 집어 들어

"그러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환자의 잇몸에 과도한 양을 주사하는 일 말이에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간혹 환자들이 부작용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환자들이 생리적으로 정상이지 않아서 그래요....... 심장 활동이 정상이 아닐 경우 말이죠. 하지만 과잉 투여는 없다고 볼 수 있어요. 의사들은 기계적으로 적당한 양을 투여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들이에요. 거의 자동적으로 정확한 양을 투여하지요."

푸아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맞아요."

"너무나도 표준화되어 있으니까요. 매번 양을 다르게 조제해와서, 자기도 모르게 실수로 많은 양을 조제하는 약사들과는 다르지요. 처방전을 너무나도 많이 쓰는 의사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치과의사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달라요."

일곱, 여덟, 그것들을 똑바로 세워라.

그 다음 날 석간 신문이 나오면서 세상이 온통 떠들썩해졌다. 배터시 아파트에서 발견되어 세인즈버리 실 양의 것으로 여겨졌던 시신이 앨버트 채프먼 부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퀸 샬럿 가 58번지의 레더런 씨는 시신의 치아와 턱, 몰리 씨의 진료 차트에 기록된 모든 상세한 내용을 증거로 그 시신이 채프먼 부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발표했다.

세인즈버리 실 양의 옷이 시신에게 입혀져 있었으며 세인즈버리 실 양의 핸드백도 시신과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막상 세인즈버리 실 양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홉, 열, 튼실하게 살찐 암탉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두 문장이 지난밤 전화 수화기를 통해 들었던 것과 거의 흡사했다. 그리고 그는 그 목소리가 어쨰서 희미하게 낯이 익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햇살로 걸어 나오면서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올리베라 부인?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수화기 너머로 말을 한 사람이 올리베라 부인일 리가 없었다!

이기적이고 머리도 나쁘고, 욕심 많고 자기중심적인 그 지각없는 귀부인이? 그 자신이 방금 그녀를 어떻게 불렀던가?

"저 튼실하게 살이 찐 암탉? 쎄리디퀼르(말도 안 돼)."

에르퀼 푸아로가 말했다.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열하나, 열둘, 밝혀 내야 한다.

주마등처럼 모든 것이 지나갔다....... 구두의 버클, 25센티미터 스타킹, 훼손된 얼굴, 급사인 앨프리드의 저속한 문학 취향, 엠버라이어티스 씨의 활동, 그리고 죽은 몰리 씨의 역할.

열셋, 열넷, 하녀들이 사랑을 호소하다.

"그래, 이제 시작하지. 토요일에 프랭크 카터가 블런트를 쏘려고 했던 권총은 몰리를 죽인 권총과 똑같은 총이야!"

푸아로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니 이건 정말 훌륭한 성과로군!"

"그래, 프랭크 도사로서는 도리어 오점이지."

"확증이 아니로군."

"그래, 그렇지만 자살 판결을 재고하게 만들 만큼 충분해. 그 총은 외제이고 또 흔치 않거든."

에르퀼 푸아로는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썹이 초승달 같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프랭크 카터라고? 아냐....... 확실히 아냐!"

열다섯, 열여섯, 부엌의 하녀들

"이건 사실이에요. 맹세컨대 사실이에요....... 그는 이미 죽어 있었어요. 내 말을 믿어줘요!"

푸아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을 꺼내는 그의 목소리는 지치고 서글프게 들렸다.

"난 당신을 믿소."

그는 문을 향해 움직엿다.

프랭크 카터가 소리쳤다.

"저들이 날 교수형에 처할 거예요....... 내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면 분명 교수형에 처할 거라고요!"

푸아로가 말했다.

"당신은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교수형에서 스스로를 구한 것이오."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저들 말로는......."

푸아로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의 얘기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주었어요. 이제 나한테 맡겨요."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열일곱, 열여덟, 시중드는 하녀들

"아니, 난 잘못 생각하고 있지 않소. 당신은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며, 한 번 탈선을 했을 뿐 외견상 그것이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요. 당신은 공적으로 여전히 한결같았고 고결했으며, 진실했고 정직했소. 하지만 마음속에선 사랑의 힘이 저항할 수 없는 절정을 향해 커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네 사람의 목숨을 희생하고 돌아보지 않았던 거지요."

"온 나라의 안전과 행복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걸 모르시오, 푸아로?"

"내게 중요한 것은 나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뺴앗기지 않을 권리가 있는 개인의 목숨입니다."

푸아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것이 당신의 대답이군요."

앨리스테어 블런트가 말했다.

에르퀼 푸아로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고, 그것이 내 대답이오......."

그는 일어서서는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두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열아홉, 스물, 내 접시가 비었다네.

"내가 앨버트 채프먼이오. 그래서 꽤나 관심이 있었던 겁니다. 마누라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는 킬킬 웃으며 황급히 사라졌다.

충격을 받은 푸아로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이 커지고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푸아로가 혼자 중얼거렸다.

"열아홉, 스물, 내 접시가 비었다네......."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마더 구스의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영어권 국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종의 동요나 자장가 같은 것으로 어린 아이들이 쉽게 단어를 익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는 종종 마더 구스의 노래를 소설에 인용하는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쥐덫>, <다섯 마리 아기 돼지>등이다. 아마도 이 소설 또한 비슷한 것 같은데, 아예 노래 전체를 그대로 목차로 삼았다. 이 소설들에서는 노래와 소설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소설의 모든 단서와 결말까지 제시한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이 소설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억지로 노래에 내용을 짜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가 서술되면서 어떻게든 각 장에서 작은 요소라도 노래와 연결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뺐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설정,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부분에 대한 과한 묘사 때문에 오히려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은 1940년에 나온 소설이다. 제2차세계대전 중이었고, 영국 사회는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의 충돌이 왕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분과 당위성을 앞세울 경우 개인은 얼마나 쉽게 희생될 수 있는가. 크리스티는 푸아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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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모험 (완전판) - 헤라클레스의 모험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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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흥미롭다.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라? 무슨 뜻일까? 현대판 영웅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신화 속 이야기? 알고 보니 헤라클레스란 푸아로의 이름 에르퀼을 말하는 것으로, 동일한 철자이지만 프랑스어에서 H가 발음되지 않기 때문에 에르퀼로 읽히는 것이었다. 현재 유럽의 역사는 그리스로마신화와 성경 양 쪽이 바탕이 된 문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의 상당수는 성경의 성인이거나, 신화의 영웅 이름이다. 영국의 고 다이애나비의 이름은 로마 신화 속 사냥의 여신이며,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이름은 바오로 성인,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이름도 성인 이름 그대로다.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소설 속 앤은 성경 속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이며, 노르웨이 소설가 요슈타인 가아더가 쓴 여주인공 소피는 성녀 소피아에서 가져온 이름일 것이다. 영국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 무지개의 여신이었고, 프랑스 여배우 레아 세이두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 대지의 여신이다. 그리고 헤라클레스! 그리스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인간 여인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의 아내였던 헤라의 저주를 받고, 총 12개의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1. 네메아의 사자를 퇴치할 것

화살로도 칼로도 죽지 않는 사자를 몽둥이로 때려 지치게 한 다음 맨 몸으로 덤벼 목 졸라 죽였다. 이때 얻은 전리품인 사자 가죽을 헬멧처럼 머리에 쓰고 다녔다.

 

2. 레르나의 독사 히드라를 퇴치할 것

목 하나가 잘려나가면 두 개가 솟아나 100개까지 목이 늘어난 히드라의 결코 죽지 않는 진짜 머리를 베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했다.

 

3. 케리네이아의 암사슴을 생포할 것

1년 동안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녀 사슴을 지치게 만든 후 피가 나지 않도록 사슴의 뒷다리 뼈와 근육 사이에 독이 묻지 않은 화살을 쏘아 잡은 후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용서를 구하며 원래 있던 곳에 데려다 놓겠다 약속하였다. 과업 완수 후 헤라클레스는 사슴을 원래 있던 곳에 돌려 놓았고 여신은 그를 용서하였다.

 

4.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를 생포할 것

1년간 추격한 끝에 눈 속으로 몰아세워서 지치게 한 다음 생포했다.

 

5.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청소할 것

30년 동안 치우지 않았던 아우게이아스 왕의 3천 마리 황소 우리를 알페이오스와 페네이오스 강물을 끌어들여 단 하루 만에 청소한다.

 

6. 스팀팔로스의 새를 퇴치할 것

처음에 화살로 새를 쏘았으나, 수가 너무 많자 청동방패를 두들겨 더 큰 소음을 내서 새들끼리 서로 부딪치게 해 혼란스럽게 만들어 추락사시켰다.

 

7. 크레타의 황소를 생포할 것

크레타의 들판에서 황소와의 씨름 끝에 사로잡았다.

 

8. 디오메데스의 야생마를 생포할 것

트라키아의 디오메데스 왕은 자신이 기르는 말에게 인육을 먹였다. 여행객을 가장하고 트라키아로 간 헤라클레스는 디오메데스와의 씨름에서 승리를 거둔 디, 왕 자신을 말에게 먹여 버렸다. 그리스로 가져온 이 말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시대에까지 종마로서 혈통을 이어갔다 한다.

 

9.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훔칠 것

아마존 족의 여왕 히폴리테와 동침한 뒤 선물로 허리띠를 받는다.

 

10. 게리온의 황소떼를 데려올 것

게리온은 메두사의 아들인 크뤼사오르의 아들로 몸과 머리가 세 개이며 소리는 사람 1만 명이 내는 소리와 맞먹는다. 그가 소유한 많은 소떼를 비밀리에 몰고 가던 중 게리온이 추격해오자 독이 묻은 화살로 처치한다.

 

11.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를 따올 것

헤라클레스는 네레우스를 통해 프로메테우스에게 가고, 그로부터 아틀라스를 통해 사과를 따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틀라스가 황금 사과를 따는 동안 그를 대신해서 하늘을 받치기로 하지만, 막상 사과를 가져온 아틀라스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계속 헤라클레스에게 하늘을 떠받치라고 한다. 헤라클레스는 동의하는 척하다가, 다만 지금 자세가 불편하니 하늘을 짊어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하고 아틀라스가 넘겨받는 순간, 헤라클레스는 사과를 챙겨 도피한다.

 

12. 하데스의 수문장 케르베로스를 생포할 것

지옥의 신 하데스의 수문장인 케르베로스는 머리가 셋 달린 개로, 헤라클레스는 완력을 사용하여 한쪽 목을 졸라 놓고 지상으로 잠시 끌고 온다.

 

네모난방에 네모난 현대 가구들....... 진열되어 있는 조각 작품조차 하나의 정육면체 위에 또 하나의 정육면체가 올라 있고, 그 위에는 구리줄로 기하학적인 배치가 되어 있는 현대적인 작품이었다. 이렇게 훌륭하고 질서정연한 방의 한 가운데 에르퀼 푸아로는 서 있엇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앗다. 그가 바로 현대판 헤라클레스였다....... 물론 울퉁불퉁한 근육질에 방망이를 휘두르는 불쾌한 벌거숭이와는 전혀 달랐다. 그와 반대로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콧수염(헤라클레스라면 그렇게 기를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을)에 단정하고 세련된 차림을 한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였다.

하지만 에르퀼 푸아로와 고전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에게는 한 가지 닮은 점이 있었다. 둘 다 이 세상의 악을 없애는 데 일조했다는 점이다....... 둘 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공헌을 했다고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버튼 박사가 어젯밤 떠나면서 뭐라고 말했던가.

"자네가 하는 일은 헤라클레스의 모험이 아닐세......."

아, 그 친구가 틀렸다. 다시 한 번 헤라클레스의 모험이 부활할 것이다....... 현대판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라니 정말 기발하고 즐거운 착상이 아닌가! 은퇴를 하기 전에 열두 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열두 개의 사건만을 맡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열두 개의 사건은 고대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모험과 유사점이 있는 것으로만 선별하는 것이다. 그래, 이건 재미있을 뿐 아니라 예술적이고, 영적인 모험이 될 것이다.

 

네메아의 사자

"물론이에요, 푸아로 씨. 전설에 따르면 페키니즈는 한때 사자였대요. 그리고 아직도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답니다!"

"오거스터스는 레이디 하팅필드께서 마드무아젤께 남겨주신 개이고, 마드무아젤께서는 이 개가 죽었다고 신고하셨죠? 오거스터스가 혼자서 도로를 지나 집으로 오는 게 걱정되지는 않으셨습니까?"

"오, 아니에요, 푸아로 씨. 오거스터스는 아주 영리해요. 그리고 제가 아주 신경 써서 훈련시켰어요. 일방통행로가 어떤 건지도 알고 있는 걸요."

"그렇다면 대부분의 인간들보다 더 뛰어나군요!"


레르네의 히드라

"처음에는 그랬죠. 마치 옛날 신화에 나오는 레르네의 히드라 같지 않습니까. 매번 머리 하나를 잘라낼 떄마다 그 자리에서 머리 두 개가 솟아나오니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문도 점차 자라나서 배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저와 이름이 같은 헤라클레스를 본받아 첫 번째 머리, 즉 본래의 머리를 자르고자 했습니다. 누가 이 소문을 가장 먼저 퍼뜨리기 시작했느냐 이거죠."


아르카디아의 사슴

"총에 맞은 사슴......."

그녀의 목소리는 희망이라곤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테드 윌리엄슨의 설명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무언가가 마음이 걸렸어요....... 경쾌한 갈색 발을 하고 숲을 뛰어다니던 당신의 모습말입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마드무아젤? 마드무아젤께서 그래스론에 내려갔을 떄는 하녀가 없으셨을 겁니다. 비앙카 발레타가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아직 새 하녀를 구하지 못해서 마입니다. 그떄도 이미 병세가 나빠지고 있다는 걸 느끼셨을 테고요."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야생 멧돼지....... 르망퇴이유는 살인자를 이렇게 표현했다. 정말이지 이상한 우연의 일치였다. 푸아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헤라클레스의 네 번쨰 모험.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

"저는 먼저 헤라클레스처럼 강줄기를 옮기기 위해 진흙에 손을 집어넣어 댐을 쌓았습니다. 기자로 일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받았죠. 그 친구가 덴마크에서 대역을 할 만한 적당한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접근해서 의도적으로 《엑스레이 뉴스》라는 이름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걸 기억했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진흙....... 엄청난 진흙이 쏟아졌죠! '시저의 아내'는 진흙으로 범벅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정치 스캔들보다 훨씬 더 많으 관심을 가졌고요. 그리고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아, 효과가 대단했죠! 고결함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습니다! 여인의 도덕성이 다시 한 번 증명된 거지요! 뜬소문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스팀팔로스의 새

"청동 목걸이를 이용했죠. 현대적인 언어로 얘기하자면 쇠줄이 움직이게 만든 겁니다....... 즉, 저는 전보를 쳤습니다! 무슈, 당신의 스팀팔로스 새들은 당분간 사기 행각을 벌일 수 없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경찰들이 수배하고 있는 용의자였다는 건가요? 경찰에 체포된 겁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크레타의 황소

"정말 이해가 안 되십니까? 육체적으로 저는 건강합니다. 황소만큼이나 튼튼하죠. 저는 오래 살 겁니다. 오랫동안....... 감옥 같은 방에 갇혀 살게 되겠죠! 저는 그걸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모두 끝내버리는 게 나을 겁니다....... 방법이 있을 겁니다. '총기 사고'나 뭐 그런 것들이요. 다이애나는 이해할겁니다....... 차라리 스스로 끝내는 게 나아요!"


디오메데스의 말

소녀의 눈꺼풀이 움찔하는 가 싶더니, 곧 눈을 뜨고 놀라고 겁먹은 눈길로 푸아로를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엉클어진 풍성한 암청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려고 고개를 흔들면서도 푸아로를 향한 눈길은 그대로였다. 마치 겁먹은 망아지 같았다....... 낯선 사람이 주는 먹이를 의심하는 야생동물처럼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히폴리테의 띠

크랜체스터 다리는 마치 마법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풍부하고 부드러운 색채의 고전적인 풍경 그림이 있었다.

푸아로는 상냥하게 말했다.

"히폴리테의 띠입니다. 히폴리테가 자신의 띠를 헤라클레스에게 주는 장면이죠....... 루벤스가 그린 작품, 위대한 예술 작품이고요....... 투 드 멤(그래도), 마드무아젤의 방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중략)

푸아로가 학교를 나서는 순간 공습이 시작됐다. 푸아로는 뚱뚱한 소녀, 마른 소녀, 까무잡잡한 소녀, 하얀 소녀 등 한 무리의 소녀들에게 둘러싸였다.

"몽 디유(하느님 맙소사)!"

푸아로는 중얼거렸다.

"이거야 말로 아마존 전사들의 공격이군!"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 소녀가 외쳤다.

"소문은 들었어요!"

소녀들은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혀왔다. 에르퀼 푸아로는 소녀들에게 온통 둘러싸였다. 푸아로는 극성스러운 어린 소녀들의 물결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스물 다섯 명의 소녀들은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외쳤다.

"무슈 푸아로, 제 책에 사인 좀 해 주시겠어요......?"

 
게리온의 무리들

"에버릿 양은 궤양으로 죽었고, 의사도 미심쩍은 구석은 전혀없었다고 확신했네. 로이드 부인은 기관지 폐렴으로 죽었고, 레이디 웨스턴은 결핵으로 죽었는데 이 작자를 만나기 오래전부터 앓아 왔어. 리 부인은 영국 북부 어딘가에서 먹은 샐러드 때문에 장티푸스로 죽엇다네. 이 중 세 명은 병에 걸려 자신의 집에서 죽엇고, 로이드 부인은 프랑스 남부의 호텔에서 죽었다지. 이 사람들의 죽음만 놓고 본다면 위대한 목자, 아니 앤더슨 박사와의 연관서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어. 그저 우연인 게지. 한마디로 말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거야."

에르퀼 푸아로는 한숨을 쉬었다.

"몽 셰르(이봐), 하지만 난 이번 사건이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모험이고, 앤더슨 박사가 내가 없애야 할 게리온의 괴물이라는 느낌이 들어."

재프는 걱정스럽게 푸아로를 바라보았다.

"이봐, 푸아로, 자네 최근에 무슨 이상한 책이라도 읽었나?"

 
헤스페리데스의 사과

"잔을 만든 장인의 솜씨가 빼어나죠. 이 잔을 만든 장인이 벤베누토 첼리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잔에는 뱀이 또아리를 트고 있는 모습이 보석으로, 나무 위의 능금들은 아주 아름다운 에메랄드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푸알는 갑자기 구미가 당긴 듯 중얼거렸다.

"능금이요?"

(중략)

이제 둘은 수녀원의 담장에 도달했다.아틀라스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할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아틀라스는 낮고 다급한 목소리로 찌그러지겠다며 신음을 내뱉었다!

에르퀼 푸아로는 엄한 목소리로 그를 나무랬다.

"조용히 하게. 자네가 떠받치고 있는 건 지구가 아니야....... 이 에르퀼 푸아로뿐이라고."


케르베로스를 잡아라

작달막하고 깐깐한 남자가 커다랗고 화려한 여자를 동경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푸아로는 자신을 사로잡은 백작 부인의 치명적인 매력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백작 부인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20년도 더 전의 일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예전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푸아로가 동경하는 여성 베라 코샤코프 부인은 『빅 포(1927)』, 『푸아로의 초기 사건집(1974)』에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옮긴이)

(중략)

'지옥이요.'

백작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푸아로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백작 부인이 정말 그렇게 말했던 걸까? 하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중략)

에르퀼 푸아로는 문구들을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세 비엥 이마지네 싸(그것 참 기발하네)!"

푸아로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의 끝에는 자줏빛 백합이 꽂힌 인공 연못이 있었다. 연못 위에는 보트 모양의 다리가 놓여 있어 푸아로는 그 다리를 건넜다.

왼쪽에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동굴이 보였다. 그 안에는 그가 여태껏 본 중 가장 추하고 사악하게 생긴 개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개는 아주 꼿꼿하게 앉아 으스스한 모습으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푸아로는 그 개가진짜 살아 있는 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그러길 바랐다!) 하지만 그 순간 개가 새카만 몸에서 흉악한 고개를 들어오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그떄 작고 둥근 강아지용 비스킷이 들어 있는 바구니가 푸아로의 눈에 띄었다. 바구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케르베로스에게 뇌물을!'

 

 

은퇴하고 호박을 키우며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푸아로. 마치 프리마돈나의 고별무대처럼 딱 12개의 사건만 맡기로 결심한다. 기준은 그와 같은 이름의 고대 신화 속 인물인 헤라클레스의 12 모험과의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마치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국 드라마 '셜록'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셜록 홈즈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그 드라마는 탁월한 연기력을 갖추었지만 영국 밖에서는 유명하지 않았던 배우를 세계적인 톱스타로 만들었다. 잘 알려진 이야기를 가지고 현시점에 맞추어 이야기하는 것. 1947년에 나온 이 작품을 계기로 푸아로가 은퇴했느냐고? 물론 아니다. 어쩌면 마지막 장면, 예상치도 못했던 로맨스의 힘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일주일 뒤, 레몬 양은 자신의 고용주에게 계산서 한 장을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무슈 푸아로. 제계 이 계산서를 처리하라는 말씀이신가요? 플로리스트 레오노라에게서 붉은 장미꽃 구입, 11파운드 8실링 6펜스, 받는 사람은 엔드 가 13번지 WC1, '지옥'의 베라 로샤코프 백작 부인 앞으로 되어 있네요."

푸아로의 얼굴이 빨간 장밋빛으로 물들었고, 곧 귀까지 벌게졌다.

"계산서는 정확하네요, 레몬 양. 그건 특별한 일에 대한 조그만...... 선물이오. 백작 부인의 아드님이 철강 업계의 거물급 회사 사장 딸과....... 곧 미국에서 약혼식을 올린다고 하네요. 붉은 장미꽃은, 내가 기억하기로....... 백작 부인께서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

"그렇군요."

레몬 양이 말했다.

"하지만 매년 이맘때쯤이면 꽃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아세요?"

에르퀼 푸아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떄로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할 떄가 있소."

푸아로는 나지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볍고 아주 활기차 보였다.

레몬 양은 푸아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류 정리법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오로지 여자의 직감만이 떠올랐다.

"오, 맙소사!"

레몬 양은 중얼거렸다.

"세상에....... 설마 저 나이에? 아닐 거야.......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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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또는 M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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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와 터펜스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때는 1940년 봄. 이제 마흔 여섯 살이 된 토미는 예전과 같은 일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에게 일자리를 주려는 사람은 없다. 부인 터펜스도 마찬가지. 그들 사이에는 데보라와 데릭이라는 쌍둥이 남매가 있으며, 둘 다 전쟁 중 자국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예전에 그들에게 일을 주었던 이스트햄턴 경, 즉, '카터 씨' 또한 은퇴하여 스코틀랜드에서 낚시나 하고 있는 상황. 그러던 중 이스트햄턴 경의 소개로 방문한 그랜트라는 사람이 방문하여 토미에게 영국 내에 있는 나치 스파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줄 것을 의뢰한다.

 

<비밀 결사>, <부부 탐정>에 이은, 토미와 터펜스 커플이 등장하는 세 번째 소설이다. 1922년, 제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만날 수 있었던 두 사람이 종전 후 겪게 되는 좌충우돌 모험 이후 1929년, 이미 부부가 된 두 사람이 사무소를 차리고 함께 활동을 벌이다 제2차세계대전 가운데의 1941년 두 아이의 부모가 되어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비밀 결사>와 <부부 탐정> 사이에는 책의 출판 기준으로는 7년의 차이가 있지만 책 속에서는 6년인 것으로 나오고, 역시 <비밀 결사>와 이 책 사이에는 출판 기준으로는 19년이고 <부부 탐정>과는 12년이지만 이 책의 본문에서 20년도 더 지났다는 문장이 있다. 이래 저래 숫자가 좀 맞지 않기는 하는데, 사실 크리스티의 다른 탐정인 푸아로의 경우, 계산해 보면 나이가 100살이 넘는다는 글도 본 적이 있다. 크리스티가 그런 쪽으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몇십년간 수십 편의 소설을 써 낸 작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소설에서 명시하고 있는 시기는 1940년으로, 제2차세계대전중인 상황. 암호명 N과 M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모험이다.

 

토미와 터펜스가 등장하는 소설이 다 그렇긴하지만, 열정은 넘치고 눈썰미는 다소 모자라기 때문에 늘 죽음의 위기를 넘기곤 한다. 덕분에 소설이 좀 헐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크리스티의 후기 소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범인의 정체를 빨리 눈치챌 수 있어서 좀 김이 빠지기도 했다. 이들의 모험은 늘 거국적으로 느껴지지만, 그 규모에 비해 두 명의 프로 정신은 좀 부족한 것 같아 진지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젊었던 <비밀 결사>와 <부부 탐정>에서는 그런 점도 매력이었지만, 장성한 자녀를 둔 중년의 부부가 되어서도 전혀 달라진 점이 없어서 좀 황당하기도 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후함이 엿보이면 더 좋았을텐데. 아직도 이들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명분보다는 재미에 좀 더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40년이고, 출판된 것은 1941년. 크리스티는 한참 전쟁 중에 이 소설을 구상하고 써냈다는 것인데 1939년에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 전쟁의 참혹함이 덜했던 시기여서일까? 아니면, 이미 제1차세계대전에 20대로 전쟁을 겪었던 크리스티 입장에서 좀 더 대범하게 전쟁을 보았고, 비슷한 연배인 토미와 터펜스 부부에게 감정을 주입했던 것일까?

 

이래 저래 아쉬움이 좀 남긴 하지만, 비교적 분량이 많지 않아서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읽을만한 책이다. 너무 단순해서 머리를 쓰는 즐거움이 없긴 하지만.

 

"B 말이에요, 바보같긴. 베레스퍼드도 B, 블렌켄솝도 B. 제 내의에는 B가 수놓아져 있단 말이에요. 패트리샤 블렌켄솝. 프루던스 베레스퍼드와 머리글자가 같죠. 그런데 당신은 왜 메도즈에요? 바보 같은 이름이네요."

"우선 말이야,"

토미가 대답했다.

"나는 내 바지에 B자가 수놓아져 있지도 않고 말이지. 게다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그렇게 지시를 받았지. 메도즈 씨는 제법 훌륭한 삶을 살아온 신사라고. 난 그 내용 전부를 외워야 했어."

"좋아요. 당신은 기혼이에요, 미혼이에요?"

터펜스가 말했다.

"상처했지."

토미가 품위있게 말했다.

"10년 전 부인이 싱가폴에서 죽었대."

"왜 하필 싱가폴이에요?"

"어디선가는 죽었어야 하잖아. 싱가폴이 어때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제일 좋은 장소일 수도 있죠. 저도 미망인이에요."

"남편은 어디서 죽은 거야?"

"그게 상관있나요? 아마도 요양원에서 죽었을걸요. 간경변으로 죽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어요."

"그렇군. 가슴 아픈 이야기야. 그럼 아들 더글라스는?"

"더글러스는 해군이에요."

"어제 저녁에 들었어."

"그리고 제겐 아들이 둘이나 더 있어요. 레이먼드는 공군이고, 막내인 시릴은 지방수비군이지요."

"그런데 누군가 그 상상의 블렌켄솝 일가를 조사하려고 하면?"

"아이들은 블렌켄솝이 아니에요. 블렌켄솝은 제 두 번째 남편이거든요. 내 첫 남편은 힐이에요. 전화번호부에는 힐이라는 이름이 세 페이지나 되죠. 그 모든 힐을 다 찾아 볼 수는 없어요."

토미가 한숨을 쉬었다.

"터펜스, 그게 당신의 고질병이야. 당신은 항상 너무 과해. 남편이 둘에, 아들이 셋이라고. 그건 너무 지나쳐. 세부적인 사항으로 들어가면 결국 스스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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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딩턴발 4시 50분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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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이젠 옛날처럼 젊지 않으니까......."

마플 양은 마치 전투 작전을 세우는 장군처럼, 사업 내역을 평가하는 회계사처럼 앞으로 뛰어들 모험에 유리한 사실과 불리한 사실들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가늠해 보았다. 그녀에게 도움이 될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삶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나의 길고 풍부한 경험.

2. 헨리 클리서링 경과 그의 대자. 지금 런던 경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들었음. 리틀 패덕스 사건(『살인을 예고합니다』에 나오는 사건을 지칭하는 것임-옮긴이) 때 참 잘해 주었음.

3. 철도청에 근무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조카 레이먼드의 둘째아들 데이비드.

4. 지도에 대해 매우 풍부한 지식을 지닌 그리젤다의 아들 레너드.

 

마플 양은 이러한 이점들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고는 흡족해했다. 모두 그녀에게 불리한 사항, 특히 그녀의 신체적인 약점을 보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마플 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젠 내가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캐묻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지.'

사실이었다. 마플 양에게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나이와 신체적 나약함이었다. 나이에 비해 건강은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이 많은 노인이었다.

 

1957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마플 양이 처음으로 등장했던 <목사관의 살인>보다 27년이 흘렀다. 1930년에 첫 등장, 그리고 1932년에 <열세 가지 수수께끼>라는 단편집에서 열세 번 사건을 해결하였다. 그 이후로 잠잠하다 1942년이 되어서야 <서재의 시체>, <움직이는 손가락>에서 활약하는 마플 양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1950년에 <살인을 예고합니다>, 1952년 <마술 살인>, 1953년 <주머니 속의 호밀>, 그 다음에 나온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크리스티의 소설 속 탐정 중 푸아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마플 양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 문제이지만, 상대적으로 마플 양이 비중이 적은 것이 좀 아쉬운 면이 있다.

 

첫 등장 이후 27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녀도 나이를 먹었지만 그녀 주변 사람들도 나이를 먹었다. 항목 3의 조카 레이먼드는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서 등장했던 인물로, 화요일 밤마다 함께 모이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화가 조이스와 결혼한다. 그 단편집에서는 암시만 나오고, 다른 소설 속에서 확실하게 결혼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아마도 <서재의 시체>, <움직이는 손가락>, <살인을 예고합니다> 중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나왔으니까. 젊은 청년이었던 레이먼드의 아들이 이제 성인이 되어 철도청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보는 순간, 몇십 년의 세월이 소설 안에서 소설 밖과 똑같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에 뭉클해졌다. 항목 4의 그리젤다는 <목사관의 살인>에서 나왔던 인물로, 갓 결혼한 젊고 아름다운 목사 부인이었다. <서재의 시체>에서 역시 잠깐 등장했던 그녀는, 어느 새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목사관에서 아이와 놀고 있었다. 항목 2의 헨리 경은 역시 <열세 가지 수수께끼>에 나왔던 인물로, 그의 대자가 <살인을 예고합니다>에 나왔던 더못 크래독 경감으로, 이 소설 속에서도 마플 양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한다.

 

패딩턴에서 출발하는 4시 30분 기차. 마플 양과 절친한 노부인은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창 밖으로 지나가는 다른 기차의 객실에서 한 남자가 여자의 목을 졸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남자의 얼굴은 보지 못했고, 순식간에 두 열차의 간격은 멀어져버린다. 그녀는 마플 양을 만나고, 마플 양은 나름대로 사건을 조사해보지만, 정작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실종 신고가 들어온 것도 없다. 마플은 직접 열차를 타보는 열성까지 보이며 이 열차가 한 저택 근처에서 급커브를 그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조력자를 그 저택으로 보낸다. 든든하고 영리한 조력자는 저택 근처에서 시신이 기차에서 떨어진 것 같은 흔적을 발견하고, 마침내 저택 주변에서 시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 여자의 정체를 모르는 상황. 아마도 그 저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해 보는 과정에서, 저택 주인의 장남이 전사하기 전,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혼할 것이라고 했던 한 여자가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 저택을 찾아올 뜻을 전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우리가 살인범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의 남자라는 것뿐입니다. 이건 부인 친구 분의 증언이고, 그분이 아시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러더퍼드 저택에는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의 남자가 셋이나 있지요. 검시 심리가 있던 날, 저는 그 삼형제가 자동차를 타기 위해 인도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세 명 모두 제게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두꺼운 오버코트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놀랍도록 꼭 닮았더군요. 세 명이 다 키가 크고 검은 머리의 남자였던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세 사람은 완전히 대조적인 타입이죠."

 

이 저택의 주인은 그의 부친의 유언에 따라 어마어마한 재산을 직접 처분할 수는 없다. 신탁된 재산의 이자만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 또한 적지 않은 금액이기는 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건드릴 수도 없는 엄청난 부친의 재산이 자신이 죽으면 자식들에게 상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다. 어차피 내가 못 쓸 재산, 자식들 좋은 일은 시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오래오래 자식들을 괴롭히며 장수할 생각이다. 장남은 이미 사망했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미혼의 장녀, 그리고 차남, 삼남, 사남. 여기에 죽은 차녀의 남편과 아이까지 노인이 죽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을 수 있지만, 죽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쪼들림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 죽은 장남의 아이가 있다면 나머지 자손들이 받는 유산은 줄어든다. 이러는 와중에 노인이 독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또 누가 죽지 않겠느냐고요? 오, 부디 그렇지 않길 바랄 뿐이랍니다. 하지만 그건 모를 일이죠, 안 그래요? 정말로 사악한 사람이 있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난 이 사건에 엄청난 사악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답니다."

"아니면 광기라든가요."

루시가 말했다.

"요즘에는 그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게 현대적이라고 하더군요. 나 자신은 동의하지 않지만."

 

대체 범인은 누구이며, 동기는 무엇일까? 아니, 살해당한 여자는 또 누구일까? 마플 양과 그녀의 조력자 루시를 비롯하여,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추리에 들어가지만 사건은 계속 오리무중이다. 시신이 발견된 시기가 이미 살인 사건이 일어난지 3주 정도 지난 데다가, 여자는 프랑스 국적이라서 피살자가 누구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단서가 희미해져 수사는 힘들어진다. 이 경우 보통 크리스티는 희생자와 범인의 심리에 주목한다.

 

"심리학이란 심리학자에게 맡겼을 때나 정확하지요. 문제는 요즘엔 누구나 다 아마추어 심리학자라는 거죠. 요즘 내 환자들은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자기가 무슨 콤플렉스에 무슨 노이로제를 앓고 있다고 정확하게 설명한다니까요. 고마워요, 에마. 한 잔 더 주겠습니까? 오늘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었거든요."

"난 늘 의사들이 고귀하고 자기 희생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마플 양이 말했다.

"의사들을 많이 안 만나보셨나 보군요."

큄퍼 박사가 말했다.

"많은 의사가 거머리 취급을 당한답니다. 사실 실제로 그런 의사들도 많고요. 어쩄든 이젠 우리도 정부의 관리를 받으며 돈을 번답니다. 더 이상 알지도 못하는 의사한테 청구서가 날아올 일도 없어요. 문제는 덕분에 모든 환자가 '정부'에서 최대한 많은 걸 받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거죠. 그 결과 꼬마 제니가 밤에 기침을 두 번 했다고 해서, 아니면 꼬마 지미가 사과 몇 알을 집어 먹었다는 이유로 불쌍한 의사가 한밤중에 달려가야 한다는 겁니다."

 

해결 가능성이 도저히 보이지 않던 사건은 마플 양의 기지로 멋지게 해결된다. 물론, 여기에도 특유의 로맨스는 빠지지 않는다. 아마 크리스티도 그런 지적을 많이 받았던 탓일까. 스스로 인정하는 듯한 문장도 있다.

 

"하지만 큄퍼 박사는 마흔을 많이 넘기진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가정 생활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고요. 에마 크랙켄소프는 아직 마흔이 안 되었으니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에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에요. 큄퍼 박사의 부인은 젊었을 때 아이를 낳다가 일찍 죽었다면서요?"

"아마 그럴 거예요. 에마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든요."

"큄퍼 박사는 틀림없이 외로운 처지일 거예요. 열심히 바쁘게 일하는 의사에게는 아내가 필요하죠.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너무 젊지 않은 그런 여자 말이에요."

"저기요, 우리 지금 범죄 사건을 조사하는 건가요, 아니면 중매를 서고 있는 건가요?"

루시의 말에 마플 양이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난 너무 낭만적인가 봐요. 나이 많은 할머니가 돼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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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을 타고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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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1944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에르퀼 푸아로를 찾아온 것은 1946년 봄이었다.

 

내가 대충 읽은 것이 아니라면, 크리스티의 소설 속에서 명확하게 시간이 나온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추리 소설로서의 의무 때문에, 날짜와 시간, 계절등은 명확하게 제시되지만, 연도까지 세세하게 알려준 적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저 문장을 집어넣은 이유는? 크리스티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문장이라는 점에서 꼭 저 문장을 써서 강조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잇다. 1944년 가을, 제 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 그리고 1946년 봄, 전쟁이 끝난 직후.

 

1890년 영국에서 출생한 크리스티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약제사와 간호사로 근무했다. 이때 그녀는 20대였다. 그녀의 첫 소설은 1920년에 나왔고,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0대. 이 소설은 1948년에 나왔다.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을 일생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겪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0대였던 첫번째 전쟁 당시 그녀는 부상자를 돌보는 병원에서 일을 하였고, 50대였던 두번째 전쟁 당시 그녀는 한참 소설을 정력적으로 쓰고 있던 유명한 작가였다. 한창의 나이에 젊음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했을 것이며, 친척과 지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비록 승전국이었지만 전쟁 후 경제 위기와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자국민에 대해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소설가에게 전쟁과도 같은 참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의 소설가들이 전쟁 그 자체와 남북분단을 겪으며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녹아 있는 귀한 소설들을 썼다. 전세계적으로는 더하다. '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도, '무기여 잘 있거라'를 쓴 헤밍웨이처럼 직접적인 언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쟁 그 이후의 삶을 다룬 소설들 중 빼어난 명작은 정말 많다. 이런 고전들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벼운 소설을 쓰는 대중 소설가인 크리스티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녀 작품의 주인공의 상당수가 군인이며, 대표적인 인물인 푸아로의 친구 아서 헤이스팅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부상으로 제대한 인물로 나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린도 여자해군부대에서 근무했다가 종전과 함께 제대한 것으로 나온다.

 

제1차세계대전보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한 영국의 피해는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규모로도 그렇고, 기간으로도 그렇다. 그녀의 초창기 소설에서 전쟁이라는 소재는 다소 낭만적으로 댜루어지고 있는 반면에, 이 소설 속의 전쟁은 좀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종전 직후, 당시 영국 국민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척박한 삶을 버텨야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린은 언제나 결심히 확고하고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았다.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생활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 바로 그거였다.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기분! 아무 목적도 계획도 없이 살아가는 것. 군을 제대하고 집에 돌아온 이후 린은 줄곧 그런 기분이었다. 전장에 나가 있던 시절에는 향수병에 젖어 살았다. 그때는 정해진 의무가 명확하게 있었고, 삶에는 계획과 질서가 잡혀 있었다.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압박에서 벗어나 있던 시기였다. 이런 생각을 하나하나 하고 있자니 린은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도처에서 모두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결국 전쟁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인가? 바닷속 어뢰,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 사막을 건널 때면 똑똑히 들려오던 '탕'하는 총탄 소리처럼 눈에 보이는 위험이 무서운 게 아니다. 생각을 멈추면 사는 게 훨씬 쉬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런 정신 상태가 무서운 것이다. 린 마치몬트는 더 이상 입대할 때처럼 단순하고 결단력 있고 똑똑한 여자가 아니었다. 전에는 특정한 분야에서 이미 정해진 경로를 따라 머리를 쓰면 되었다. 이제 다시 한 번 삶의 주인이 되었지만, 문제와 맞서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을 보고 린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평범한 '가정주부'들이야말로 전쟁을 통해 진정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라고 하면 정말 이상하겠지. 이들에게는 수많은 '금기 사항'이 족쇄처럼 붙어 다니기는 하지만 따라야 할 명확한 '의무' 같은 건 전혀 없다. 이들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사고해 그떄그때 상황에 맞게 방편을 마련할 수 있어야 했다. 모든 재능을 짜내야 했고, 심지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재능까지 계발해야 했다. 지금 린은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똑바로 서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책임질 수 있는 건 그들뿐이라고 생각했다. 훌륭한 교육을 받고 똑똑하며 우수한 지능과 철저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을 무사히 마친 린 마치몬트 자신은 정작 방향도 결의도 잃어버린 상태였다. 입에 올리기 싫지만 표류하고 있다는 게 딱 맞는 말이었다.

'고향에 죽 머물렀던 롤리 같은 사람들은 어땠을까.'

 

전쟁 직후 집으로 돌아온 린. 변함없다고 생각했던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은 스스로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을 비롯해 온 일가 친척을 돌보아주던 든든한 외삼촌은 딸 뻘인 여자와 결혼하자마자 유언장도 없이 사망하였고, 전재산이 미망인에게로 넘어가버려 그녀를 비롯한 친척들은 생계조차 어려운 현실. 그 와중에 새롭게 시선을 끄는 남자는 외삼촌과 재혼한 그 젊은 여자, 자신을 비롯해서 온 친척을 경제적 곤궁에 빠지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여자의 오빠다. 그 여자는 외삼촌과의 결혼이 두번째로, 첫번째 결혼 후 남편은 아프리카에서 사망하였고 그곳에 묻혔다. 그러던 중 마을에 의문의 남자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고, 죽은 남자의 친구는 그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진 첫번째 남편이라고 법정에서 증언한다. 끝까지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젊은 여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황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그녀의 오빠가 체포된어 재판을 받게 된다. 만약 죽은 남자가 첫번째 남편이 맞다면, 두번째 결혼은 중혼이 되므로 무효가 되어 버리며, 그녀가 상속받은 남편의 거대한 재산은 다시 몰수되어 가까운 친척들에게 분배되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횡재를 하게 된 동생 덕분에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던 오빠에게는 살인 동기도 있고, 기회도 있었다.

 

"물론 전 형사사건에는 경험이 전무합니다. 하지만 의학적 증거란 것이 일반인이나 소설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틀릴 수 있어요. 의학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진단이란 게 뭡니까? 빈약한 지식을 근거로 추측하는 거 아닙니까. 애매한 단서는 한 가지 방향만 제시하지 않지요. 전 홍역을 진단하는 데는 꽤 자신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의사로 활동하면서 홍역에 걸린 사례를 수백번이나 보았고 수없이 다양하게 변형된 징후와 증상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역설적이지만 선생이 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홍역에 걸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의사로 살면서 전 별별 일을 다 보았습니다. 한 여자는 맹장염인 줄 알고 수술대까지 갔다가 수술 직전에 파라티푸스 진단을 받았지요. 또 열성적이고 성실한 한 젊은 의사는 피부병에 걸린 아이를 보고 심각한 비타민 결핍이라고 진단했지만, 그 동네 수의사가 엄마한테 와서는 아이가 안고 있던 고양이가 백선에 걸려 아이에게 옮은 거라고 설명해 주었지요.

선입관에 피해를 입기는 우리 의사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살해당한 것이 분명한 한 남자의 시신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피가 얼룩진 부젓가락이 놓여 있고요. 그가 다른 물건으로 가격당했다고 하면 터무니없어 보이겠지요. 물론 두부 골절을 치료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드리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저는 뭔가 다른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표면이 그렇게 매끄럽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은 물건 말입니다. 아, 뭐라고 해야 하나. 모서리가 있는 물건, 벽돌 같은 것 말입니다."

 

죽은 남자의 뒤를 이어, 증언했던 사람이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고, 뒤이어 젊은 미망인마저 자살한다. 세 사람이 죽었고, 스펜스 총경은 살인이 한 건, 자살이 두 건이라고 정리하며 푸아로는 자살이 한 건, 사고가 한 건, 살인이 한 건이라고 단언한다.  

 

"맞습니다, 이번 사건은 영락없이 셰익스피어 작품 같습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요. 셰익스피어라면 그 모든 질투며 증오, 열정에서 나온 도발적인 행동들을 엮어서 멋들어지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겁니다. 또 이 사건에는 기회에 성공적으로 편승한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인간사에도 파도처럼 흐름이 있나니, 밀물을 타면 행운을 만나리.......' 총경님, 바로 이걸 따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회를 잡아서 자기 나름의 목적에 맞게 변용한 사람 말입니다."

 

여기에서 제목의 의도가 드러난다. 푸아로가 인용한 저 문장은 셰익스피어 작 「줄리어스 시저」 제 3장 중 브루투스의 대사이다. 기가 막힌 타이밍, 그로 인해 행운을 거머쥐었던 범인. 범인의 정체보다도 세 명의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게 되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 더,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덧붙인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종전 후 피폐해진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절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문장.

 

화창한 아침이었다. 꼭 여름 같은 봄날의 이런 아침에는 정작 여름에는 맛볼 수 없는 상쾌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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