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달린 셜록 홈즈 2 - 셜록 홈즈 회고록, 셜록 홈즈 탄생 150주년 기념판 ㅣ 주석 달린 셜록 홈즈 2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승영조 옮김, 아서 코난 도일 원작 / 현대문학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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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셜록 홈즈의 두 번째 권이다. 첫번째 책보다는 쪽수가 100여쪽 이상 줄었는데, 첫번째 책에서는 셜록 홈즈의 전집을 읽기 전 도입으로 머리말과 추천사, 홈즈 연보, 그리고 작가의 생애와 홈즈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수록된 탓에 더 두꺼워졌다. 실제로 실린 소설은 12편으로 편수는 동일하다. 셜록 홈즈의 모험도 12편의 단편을 모은 책이었고, 그 이후에 나온 셜록 홈즈 회고록도 12편의 단편을 모은 책이다. 흔히 애거서 크리스티는 장편에, 아서 코난 도일은 단편에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크리스티도 재기발랄한 단편을 많이 썼고, 코난 도일의 장편도 빼어나기는 하지만, 역시 작가마다의 강점은 각기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장편이면 등장 인물의 수도 많아지고, 배경이 복잡해진다. 단편이면 이야기가 압축되어 사건 자체에 대한 몰입도는 높아진다.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장편의 경우 독자의 관심을 끌어당길 수 있는 요소들을 여러 면에서 배치하기가 쉽다. 매력적인 등장 인물이 될 수도 있고, 특이한 장소나 시간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편의 경우, 한없이 이야기를 펼쳐나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길지 않은 내용에 촘촘하게 여러 요소들을 채워넣는 전략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런 면에서, 셜록 홈즈가 얼마나 문학사에서 매력적인 캐릭터인지 알 수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중 상당수가 밋밋한 경향이 있는 것은, 탐정이 덜 매력적이기 떄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편의 경우 작가 마음껏 수많은 인물들을 창조해낼 수 있지만, 단편의 경우 철저히 탐정의 개인적 매력에 기대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추종자들이 셜록 홈즈가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이 아니라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라고 여기며 작가와 무관하게, 홈즈 개인에 대한 연구를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셜록 홈즈야말로 전무후무한 캐릭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셜록 홈즈 회고록

『셜록 홈즈 회고록』 영국 초판은 조지 뉸스가 '스트랜드 라이브러리' 시리즈 세 권으로 1893년 12월 13일에 발행했다. 1만 부가 발행된 이 영국판에서는 「소포 상자」를 뺐고, 시드니 패짓의 삽화 90점이 포함되었다. 미국에서는 1894년 2월 2일 '하퍼 앤드 브러더스' 출판사가 「소포 상자」를 포함해서 초판을 발행했다.


  경주마 은점박이
    “……계산은 간단해”
    “다음 경주에서 내가 좀 딸 것……”

이것은 『회고록』시리즈 첫 사건으로, 『모험』시리즈가 막을 내린 지 5개월 만에 새로 연재가 시작되었다. 이번 이야기는 역대 스포츠 미스터리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탐정과 독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정보를 공개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입술이 뒤틀린 남자」에 이어 또 하나의 '페어플레이' 미스터리다. "밤중에 개한테 일어난 이상한 일"이라는 홈즈의 유명한 말은 많은 상황에서 널리 인용되면서 '부정추리'의 표어가 되었다. 말과 경마에 대한 세부 이야기가 정확하지 않다고 꼬집는 사람이 많지만, 이 무렵 홈즈의 능력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에 딴죽을 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기서 홈즈는 순식간에 기차 속도를 계산하는데, 그것이 정확한 계산이었다는 게 널리 증명되었다. 홈즈는 양들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뜻밖의 살인다를 밝혀낸다. 이번 이야기에 딱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그건 홈즈가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경마에 돈을 건 듯하다는 것이다.


  소포 상자

이것은 왓슨의 최고 걸작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눈부신 추리와 인간적인 강력한 드라마가 결합된 작품인데, 아마 전체 정전에서 가장 흉흉한 이야기일 것이다. 여기서 홈즈와 왓슨이 조사하는 사건은 섬뜩한 소포 상자가 배달되는 것으로 시작해서 간통과 살인을 밝히는 것으로 끝난다. 런던 경찰국의 레스트레이드 경위가 포착하지 못한 실낱같은 단서를 잡아 추적한 홈즈는 심각한 범죄를 발견하는데, 경찰은 이것을 짓궂은 장난쯤으로 본다. 범죄를 조사할 때에는 강심장인 홈즈조차도 자신이 알아낸 것을 두고 고민에 잠긴다. "왓슨,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불행과 폭력과 공포가 이렇게 되풀이되는 데에는 무슨 목적이 있는 걸까?" 사실 이 사건은 인간의 감정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려서, 아서 코난 도일은 이것이 청소년 독자에게 부적절하다고 보고 『회고록』초판에서 이 이야기를 빼버렸을 정도다. 그러면서 편집을 멋대로 해서 이 이야기의 앞부분을 잘라 「입주 환자」앞머리에 잔뜩 덧붙여놓았다. 이 책에서는 왓슨이 의도한 대로 《스트랜드 매거진》의 원래 판본을 제대로 복원해서 실었다.


  노란 얼굴

왓슨이 「노란 얼굴」을 왜 『회고록』에 포함시켰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연구자들이 종종 있다. 홈즈는 그랜트 먼로 씨의 문제에 헷갈려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상한 가설만 제시한다. 홈즈가 먼로의 아내에게 완전히 속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뼈저린 실패를 잊지 못한 홈즈는 자기가 잘난 척할 때마다 "노버리"라고 귓전에 속삭여달라고 왓슨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왓슨이 이번 사건을 기록한 것도 홈즈-완벽하지 못한 추리가-의 이런 생각을 선보이기 위해서가 아닐까?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 사건에 명백히 나타나는 인종차별 세태에 개탄한다. 이 사건으로 미뤄볼 때 당시 영국 사회는 국제결혼을 뜯어말린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왓슨은 인종 평등을 실천한 먼로 씨에게 갈채를 보내고 있다. 장난기 어린 주석에 의하면, 그랜트 먼로의 아내가 남편을 "잭"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갈채를 보낸다. 존 왓슨이 아내에게 "제임스"라고 불린 것도 역시 그럴 만했다는 증거를 잡았으니까!


  증권회사 직원

지난 100년 사이에 돈의 세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증권회사 직원」에서는 오늘날 왕왕 문제로 불거지는 '명의 도용'에 대한 섬뜩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홈즈와 왓슨은 대담무쌍한 강도 행각이 벌어지는 생소한 금융가와 증권회사 분야를 경험하게 된다. 왓슨은 젊은 홀 파이크로프트가 겪은 미스터리를 기록하며 런던 토박이의 속어를 적잖이 듣게 된다. 묘하게도「증권회사 직원」의 음모는 독자에게 어쩐지 낯익어 보인다. 「빨강머리연맹」의 음모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 사건이 1888년이나 1889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범인들은 「빨강머리연맹」을 읽어봤을 리가 없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모리아티 교수와 끈이 닿아 있다면 그 유사성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또 이번 이야기에서는 결혼한 후 의원을 꾸려가는 왓슨의 사생활을 살짝 엿볼 수 있다.


  글로리아스콧호

홈즈와 왓슨이 처음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1881년이다. 그 이전의 홈즈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글로리아스콧호」와 다음의 「머스그레이브 씨네 의식문」에 나오는 약간의 정보가 전부다. 「글로리아스콧호」는 홈즈가 왓슨에게 들려준 자신의 '최초의 사건' 이야기다. 이 사건은 홈즈가 친구라고 인정한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인 빅터 트레버의 아버지와 관련된 것인데, 그 아버지에 대해 홈즈는 몇가지 놀라운 추리를 해낸다. 바로 그 아버지가 홈즈를 자문탐정의 길로 이끈 사람이다. 홈즈는 빅터를 도와, 느닷없이 사망한 그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밝히지만 홈즈의 솜씨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홈즈는 간단한 암호를 해독해 비밀 전갈을 읽게 된다. 이번 이야기에서 왓슨은 주로 듣기만 한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왓슨이 아닌 홈즈가 화자로 나선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초기 경력에 대한 홈즈의 이야기에는 빈 구멍이 많다. 무엇보다 아리송한 것은 그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다. 이번 이야기와 다른 몇 가지 이야기 속의 단서는 수 세대에 걸쳐 수많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머스그레이브 씨네 의식문
    머스그레이브 씨네 의식문

이번 이야기는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보물 지도' 사건 가운데 하나다. T. S. 엘리엇은 『대성당의 살인』이라는 걸작 시극詩劇에서 이 이야기를 인용한다.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는 해마다 모임을 가질 때 바로 이 의식문을 낭송하는 의식을 치른다. 「글로리아스콧호」의 경우처럼 이 사건도 홈즈가 왓슨을 만나기 전에 일어난 것인데, 여기서도 홈즈는 다소 어수룩한 모습을 보인다. 한편 이번 이야기에서도 왓슨은 발표되지 않은 여러 사건을 들먹여서 우리를 감질나게 한다. 또 홈즈가 집 안에서 벽에 대고 총을 쏘아대곤 한다는 얄궂은 버릇을 폭로한다.


  레이게이트의 지주들

홈즈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수마트라 회사"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후 과로로 쓰러진다. 왓슨은 그를 설득해서 같이 서리로 휴양을 떠난다. 왓슨이 군대 시절에 알게 된 헤이터 대령의 집에서 지냈는데, 이 대령은 정전에 나오는 대령들 가운데 유일하게 선한 인물이다. 홈즈의 휴양은 갑자기 막을 내리고, 강도 살인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피해자인 커닝엄 부자는 묘하게도 마지못해 홈즈의 조사를 받아들이고, 홈즈는 일견 무기력해 보인다. 손으로 슨 편지가 이 사건의 핵심 열쇠인데, 그 편지에서 23가지의 추리를 할 수 있다는 홈즈의 주장은 다소 허풍으로 들리지만, 당시 유럽 대륙에서는 홈즈가 아니라도 그 편지에서 중요한 정보를 끌어낼 수 있을 만큼 필적학이 발달했다. 하지만 아직 영국에서는 홈즈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이번 이야기에 언급되는 애니 모리슨이 누구인가의 수수께끼를 해결한 셜록 학자는 없다.


  등이 굽은 남자
    인도 폭동

왓슨이 「등이 굽은 남자」사건이라고 명명한 이번 '잠긴 방의 수수께끼'를 홈즈가 푸는 데에는 성경 지식도 한몫한다. 이 사건은 인도의 세포이 항쟁(영국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인도 용병들이 영국의 인도 지배에 맞서 싸운 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왓슨의 군 복무 경험과 군대 시절의 지인들 때문에 군대 관련 사건이 정전에 여러 차례 나오지만, 이번 사건은 왓슨과 무관한다. 이야기는 왓슨의 아내가 2층으로 자러 간 밤늦은 시간에 시작된다. 그처럼 고즈넉한 집 안 풍경은 곧이어 왓슨이 그린 다른 가정, 곧 제임스 바클레이 대령 부부의 험악한 가정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대령은 벽난로 가까이 죽어 있고, 문은 안에서 잠겨 있는데, 아내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 홈즈가 면밀한 관찰을 통해 미지의 방문객 두 명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는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를 동원해 그들의 뒤를 밟는다. 이야기는 자백으로 끝나는데, 홈즈가 그 자백에 속았다는 보는 사람도 있다.


  입주 환자
    「입주 환자」의 판본

『회고록』편집자들은 「소포 상자」를 단행본에서 뺐는데, 앞부분만 살려서 이 글에 덧붙여놓았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내용이 매우 혼란스러워졌으며, 여기서는 《스트랜드 매거진》에 실렸던 원래의 글을 복원해서 실었다. "입주 환자"(코난 도일이 한때 그랬듯이 의사가 자기 집에 입주시켜서 치료하는 환자)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트리빌리언 박사의 부탁을 받은 홈즈는 이 문제가 트리빌리언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홈즈가 '추리'했다고 할 만한 것은 많지 앟고, 대신 과거 범죄에 대한 막대한 지식과 미해결 범죄에 관한 엄청난 기억력에 기대어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 사건은 또 의사인 존 왓슨과 아서 코난 도일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 곧 젊은 의사가 개업을 하는 데 따르는 고충을 잘 반영하고 있어서, 그 덕분에 이 사건이 『회고록』에 포함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스인 통역사
    마이크로프트 홈즈

「그리스인 통역사」사건은 홈즈가 탄복할 만한 솜씨를 발휘한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마터면 의뢰인이 목숨을 잃을 뻔한 데다가, 무고한 사람이 살해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홈즈의 형 마이크로프트가 적극적인 역할을 한 두 사건 가운데 하나로(다른 하나는 물론 「브루스파팅턴호 설계도」다), 셜로키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읽을거리다. 셜록보다 일곱 살 위인 마이크로프트는 셜록보다 머리가 뛰어난데 실천력이 떨어진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태여 편안한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셜록보다 "더 크고 건장"하며, "뚱뚱"하고, 손이 물개 발 같은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정부 부서의 회계감사라는 신분으로 나온다. 그러나 「브루스파팅턴호 설계도」에서 셜록 홈즈는 "때로는 형이 곧 영국 정부"라고 왓슨에게 밝힌다. 마이크로프트를 빅토리아 시대의 비밀 요원, 곧 영국의 중앙정보국 국장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마이크로프트의 행동은 그리 논리적이지 않아서, 그가 모종의 음험한 비밀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해군 조약문

왓슨이 쓴 단편 가운데 가장 긴 「해군 조약문」은 예비학교 시절의 동창생이 왓슨에게 부탁한 사건이다. 별명이 "올챙이"였던 퍼시 펠프스는 외무부의 요직에 임명되었는데, 사무실에서 조약문을 도난 당했다. 그 일로 "뇌열병(수막염)"을 앓기까지 한 펠프스는 홈즈와 함께 방문해달라고 왓슨에게 부탁한다. 주로 범죄 현장을 잘 관찰함으로써 조약문을 찾아낸 홈즈는 잔인하면서도 극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성공 사실을 밝힌다. 그런데 조약문을 되찾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홈즈가 범죄 배후는 캐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어느 외국 정부가 어차피 돌려주려고 한 조약문 원본을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 그가 꼭두각시 구실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지막 문제
    「마지막 문제」에 관한 숱한 논란

왓슨이 표현을 빌려 쓰면, 《스트랜드 매거진》독자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이번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이번 이야기가 셜록 홈즈에 대한 왓슨의 "마지막 기록"이라니 말이다. 이걸 읽은 영국인들은 경악했고, 2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스트랜드 매거진》 정기 구독을 중단해버렸으며, 거리에는 팔뚝에 검은 완장을 찬 사람이 즐비했다. 왓슨은 「마지막 문제」를 발표한 후 무려 8년이나 침묵했다. 그러다 마침내 1901년에 또 다른 홈즈 회고록인 『바스커빌 씨네 사냥개』를 발표했다. 오늘날 독자들은 홈즈가 그때 죽은 게 아니고, 1894년에 런던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왓슨은 이번 이야기를 마치며 그가 죽었다고 믿은 게 확실하다. 1894년에 왓슨은 돌아온 홈즈를 만났지만, 홈즈는 왓슨에게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다 이윽고 1903년에 왓슨은 「마지막 문제」사건의 진짜 결말을 밝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돌아온 셜록 홈즈』의 첫 번째 이야기인 「빈집」을 발표하며 10년 만에 《스트랜드 매거진》에 새로 연재를 시작했다. 그러나 「마지막 문제」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 편의 멋진 드라마다. 윌리엄 질렛은 여기 나오는 홈즈와 모리아티 교수의 팽팽하고 짜릿한 대결을 <셜록 홈즈>라는 연극으로 각색해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 속속 수많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홈즈의 최대 숙적으로서 거의 전설적인 지위를 확보한 모리아티 교수는 「마지막 문제」와 「빈집」, 『공포의 계곡』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특히 이번 이야기에 나오는 그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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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셜록 홈즈 1 - 셜록 홈즈의 모험, 셜록 홈즈 탄생 150주년 기념판 ㅣ 주석 달린 셜록 홈즈 1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승영조 옮김, 아서 코난 도일 원작 / 현대문학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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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에서 나온 애거서 크리스티 완독을 얼마 전에 끝냈다. 수십 년 동안 수십 편의 책을 낸 작가의 모든 저작을 읽어나가는 과정 내내 황홀하고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방대한 양에 좌절하여 멈추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점점 남아 있는 전집의 가짓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다 읽고 난 지금은, 뿌듯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만의 스펙이 생긴 느낌. 마치 고등학교 때 조정래의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을 전부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추리 소설의 시조는 에드거 앨런 포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의 작품인 <검은 고양이>는 어린 시절 읽어서인지 그 잔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추리 소설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으며, 드라마와 영화 등 다른 매체로까지도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추리 소설의 황금기는 따로 있는 것 같다. 분명히 지금은 아니다. 요즘은 이른바 장르 문학이 당당히 대접받는 시대는 아닌 것 같고, 다른 소설에서 일종의 장르적 기법을 차용하는 경우는 엄청나게 늘어난 것 같다. 미스터리적 요소를 도입한다거나 주인공이 탐정이나 형사와 같은 직업에 종사한다거나 하는 설정이 꽤 많다.

 

아마도 추리 소설의 황금기는 셜록 홈즈, 아르센 뤼팽,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바로 그 시대가 아닐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저 세 사람은 약 10년 정도 겹치는 시대를 공유하면서 차례 차례 등장하고, 또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셜록 홈즈를 창조한 아서 코난 도일과 아르센 뤼팽을 만들어낸 모리스 르블랑의 경우 캐릭터가 작가의 명성을 뛰어넘었는데, 애거서 크리스티는 온전히 작가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 이유는 에르퀼 푸아로, 제인 마플, 레이스 대령, 토미와 터펜스, 배틀 총경, 할리 퀸, 파커 파인, 아리아드네 올리버등 수많은 탐정을 창조했고, 앞의 두 작가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작품을 내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탐정 중 가장 상징적인 푸아로와 비교해봤을 때, 아니 크리스티의 탐정 전부를 다 합쳐 놓아도 셜록 홈즈 한 명의 아우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만큼, 셜록 홈즈는 소설 속 캐릭터 중 가장 인기있고 유명하며 영향력이 지대한 인물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완독을 마친 뒤, 느긋하게 쉬다가 문득, 추리 소설 특유의 쫄깃한 느낌이 그리워졌다. 그러고보면 여름이야말로 추리 소설 읽기에는 딱인데 말이다. 훗날의 즐거움을 위해 남겨놔야지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금방 없어지고,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 전집을 찾아보는 내가 있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압도적인 저서량에 비하면, 아르센 뤼팽의 활약담은 소박하게조차 느껴지지만, 그래도 분량은 셜록 홈즈의 두 배는 되보였다. 그렇다면, 셜록 홈즈를 먼저 보기로 하자.

 

이렇게 결정하고 나니 수많은 출판사 중 어느 출판사의 전집을 읽을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황금가지판으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읽은 이유는, 유일하게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과 공식적으로 계약을 맺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말은, 크리스티 생전의 모든 작품들이 전부 전집에 포함되어 있으며, 기존의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해적판으로 일부가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야 워낙 다작을 한 작가이기 떄문에 정식 계약을 맺은 출판사의 전집을 통해 완독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황금가지 판을 읽고 나니 일단 황금가지에서 나온 셜록 홈즈에 눈이 갔다. 아직 저작권이 크리스티 자손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번역에서 군데 군데 튀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식 계약을 맺고 크리스티 생전의 모든 작품을 번역한 황금가지 판은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셜록 홈즈의 경우, 이미 저작권이 만료된 상태인 데다가, 생전에 아서 코난 도일이 남긴 소설이 많지 않기 떄문에 수많은 출판사에서 전집을 내어놓은 상태였다.

 

어떤 출판사는 번역이 부실하고, 어떤 출판사는 삽화가 빠져있고, 어떤 출판사는 표지만 볼만하고... 수많은 블로거들의 평을 훑어보면서, 분량의 압박이 느껴지더라도 제대로 모든 작품과 삽화가 실려 있고, 각주와 해설이 충실하게 달린 현대문학 출판사의 전집으로 읽기로 결정했다.

 

딱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책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을 읽으면서, 당시의 시대상이 궁금해서 일일히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보거나, 아예 포기했던 부분들이 많았던 반면, 이 책은 미처 궁금해하기도 전에 책의 내용은 물론이고 책 바깥의 이야기들까지 전부 들려준다. 형사물에 빈번히 등장하는 버디 형식이 홈즈와 왓슨에서 출발했다는 것, 코난 도일의 다른 책 <잃어버린 세계>가 영화 <쥬라기 공원>에 영감을 주었다는 것 등등.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책이 2005년에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여태껏 수많은 셜록 홈즈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졌지만, 아무래도 그 중 최고는 2010년 BBC에서 만들어진 드라마 <셜록>이 아닌가 싶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연기파 조연 배우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버린 이 드라마로 인해, 또 한 번 셜로키언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이른바 베이비붐이 일어났다. 아마도 이 책이 좀 더 뒤에 나왔더라면,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반드시 포함되었을 것이다.

 

 

머리말
추천사
셜록 홈즈의 세계

셜록 홈즈의 모험

 

『셜록 홈즈의 모험』 초판은 조지뉸스 출판사에서 1892년 10월14일 1만 부를 발행했고, 시드니 패짓의 삽화 104점이 함께 실렸다. 미국 초판은 그 다음 날짜로 뉴욕의 하퍼 앤드 브러더스 출판사에서 4500부를 발행했다.

 

  보헤미아 왕실 스캔들

셜록 홈즈 이야기 가운데 《스트랜드 매거진》에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그 후 장편소설인 『주홍색 연구』와 『네 사람의 서명』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이 잡지에 연재되었다. 여성에 대한 홈즈의 태도가 잘 나타난 것으로 주목할 만한 이 단편은 홈즈가 사건 해결에 실패한 유일한 이야기다. 물론 홈즈는 이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며 '실패'를 즐거워했음 직하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오페라 가수인 아이린 애들러는 수 세대에 걸쳐 여성 셜로키언들을 매료시켜왔다. 그래서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에 가입하는 것이 금지된 여성들은 1965년에 '셜록 홈즈의 여성 모험가들'이라는 모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그 후 금지 규정은 개정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홈즈와 왓슨은 동료로서 처음으로 함께 행동한다. 이제 왓슨은 『주홍색 연구』와 『네 사람의 서명』에서처럼 단순히 이야기를 전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홈즈와 함께 나서서 사건 해결에 한몫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첫 이야기에서 괴이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셜록 홈즈에게 그녀는 항상 '그 여자'다"라는 첫 문장은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빨강머리연맹

『셜록 홈즈의 모험』단편집 열두 편 가운데 하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우스꽝스러운 제이비즈 윌슨 씨, 빨강 머리 남자들로 가득 찬 플리트 스트리트의 해괴한 풍경, 정전에 여러 차례 나오지만 이번에 첫선을 보이는 야간 원정, "런던에서 네 번째로 머리가 좋은 남자"인 존 클레이의 교묘한 계략등을 꼽을 수 있다. 이번에 거의 마법사처럼 잇달아 놀라운 추리를 쏟아내는 홈즈의 모습은 「푸른 석류석」에서 모자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모습과 쌍벽을 이룬다. 그리고 놀랍게도, 왓슨은 윌슨이 홈즈를 깎아내린 말을 그대로 기록해서 들려준다. "처음에는 엄청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별것도 아니구먼." 그것에 대해 왓슨은 평을 삼간다. 하지만 우리는 역으로 홈즈와 왓슨의 우정이 얼마나 견실한가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

 

  정체의 문제

「보헤미아 왕실 스캐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실제로 범죄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홈즈가 다룬 1000건 이상의 사건 가운데 왓슨이 엄선해서 글로 발표한 60건에 왜 이 사건을 포함시켰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학자들이 있다. 좀 어수룩한 메리 서덜런드 양, 언제나 소곤거리며 말하는 호스머 에인절, 귀에 거슬리는 소시를 하는 제임스 윈디뱅크는 왓슨의 무대에서 한 번 등장하고 사라지지만, 홈즈 시대에 독신 여성이 1년에 60파운드(700만원-옮긴이)로 아주 잘살 수 있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메리가 제 짝을 찾은 큰 규모의 사교 모임이었던 "가스 배관공들의 무도회"에 고무된 셜로키언들은 그와 비슷한 잔치판을 벌였다. 여기서 또 우리는 홈즈가 사악한 자에게 직접 벌을 내리려 하고, 자기가 알아낸 정보를 의뢰인에게 알리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하기도 하는 대범한 측면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보스콤밸리 사건

오스트레일리아는 독립운동이 무르익어가던 19세기 후반에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영국의 죄수나 반체제 인사들의 유형지였던 오스트레일리아는 아메리카의 서부 미개척지와 다를 게 없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일반 대중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다가 잉글랜드로 온 사람들이 걸핏하면 폭력 범죄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스콤밸리 사건」에 나오는 핵심 인물인 매카시나 터너 같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이것은 정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첫 번째 단편이다. 또한 레스트레이드 경위가 등장하는 첫 번째 단편이기도 하다. 레스트레이드가 홈즈와 같이 처음 등장하는 초기의 장편, 곧 『주홍색 연구』에서 홈즈는 레스트레이드와 그의 동료 그레그슨 경위를 "형편없는 패거리 가운데서 그나마 발군"이라고 말한다. 레스트레이드는 여기서도 그보다 나을 게 없는 대우를 받는다. 즉 홈즈는 그를 "백치"라고 일컫는다. 「정체의 문제」에서처럼, 여기서도 홈즈는 '정규군regulars'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기 않고, 스스로 배심원이자 판사로서 판결을 내린다.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1887년에 일어난 이 사건의 의뢰인에게 셜록 홈즈는 자기가 평생 네 차례 실패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이번 사건에서 홈즈는 의뢰인을 보호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홈즈가 또다시 실패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번 사건은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왓슨은 패러돌 체임버 사건, 그라이스 패터슨 씨네의 우파 섬 사건, 아마추어탁발협회 사건 등을 비롯해서 정리하지 않은 사건들이 많다고 독자를 감질나게 하는 말을 한다. 그리고 『주홍색 연구』에서 선보인 자기만의 방식으로, 흥미진진한 사건 하나를 예리하게 엄선해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미국 비밀 테러 조직의 복수를 소재로 한 이사건에서, 홈즈는 살인자를 추적해서 직접 복수하려고 한다. 이때 홈즈는 과연 정의를 추구한 것일까, 아니면 상처 입은 자존심을 달래려고 그런 것일까?

 

  입술이 뒤틀린 남자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범죄로 얼룩진 런던 이스트엔드 아편굴에서 사건이 전개된다. 이 아편굴은 빅토리아 시대의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다. 왓슨의 이번 이야기는 '페어플레이' 추리소설(탐정과 독자에게 모든 정보가 동시에 공개되는 추리소설)의 초기 사례 가운데 하나다. 홈즈는 독자도 가능한 방법으로, 즉 순전히 생각만으로 수수께끼를 푼다. 왓슨은 여기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홈즈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실내복 차림으로 베개에 파묻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파이프를 빨며 수수께끼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홈즈와 사랑스러운 네빌 세인트클레어 부인 사이의 낭만적인 막간극이 감질나게 암시되지만, 왓슨이 느닷없이 등장함으로써 그녀의 갈망은 충족되지 못하고 만 듯하다. 왓슨은 「보헤미아 왕실 스캔들」도입부에서 홈즈의 냉소적인 여성관을 꼬집은 적이 있지만, 이번 이야기에서 볼 때 홈즈의 여성관이정말 냉소적인지 좀 미심쩍다.

 

  푸른 석류석
    거위의 모이주머니?

존경받는 홈즈 학자이자 작가인 크리스토퍼 몰리는 「푸른 석류석」을 "군더더기 없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라고 평했다. 이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는 독자들도 많다. 이것은 정전에서 유일하게 명절을 무대로 하는 이야기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전통에 뿌리를 둔 이야기인 것이다. 프랭크 캐프라 감독의 걸작 영화인 <멋진 인생>처럼, 보석 도난에 얽힌 이 이야기는 정의에 대한 연민의 승리를 노래한다. 이 이야기에는 진짜 보석이 담겨 있다. 헨리 베이커의 누추한 모자에 대한 홈즈의 빛나는 추리, 브레킨리지를 다루는 홈즈의 교묘한 솜씨, 범인이 푸른 석류석을 킬번까지 운반하기 위해 짜낸 기발한 방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해마다 이 이야기를 들춰보게 되는 것은 홈즈와 왓슨의 따스한 우정 때문이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꼬박꼬박 "명절 인사차" 독신인 친구를 찾아가는 그런 우정 말이다. 셜록 홈즈 또한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추론가"로서의 차가운 모습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홈즈는 말한다. "지금은 용서의 계절"이라고.

 

  얼룩 띠
    “늪살모사야! 인도에서 가장 치명적인 뱀”
    셜록 홈즈와 존 H. 왓슨 박사의 총

학자들은 「얼룩 띠」를 속속들이 파헤치며 즐거워했다. 과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얼룩 띠"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로일럿 박사가 죽은 것은 홈즈가 또다시 임의로 심판한 것인가, 아니면 우연한 사고인가? 치타와 개코원숭이는 원래 어디서 살던 동물인가? 왓슨의 이 이야기에 탄복한 코난 도일은 이것을 연극으로 각색해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인기 순위를 말하자면 「빨강머리연맹」에 버금간다. 「얼룩 띠」는 독자를 전율케 하는 괴기소설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라임스비 로일럿 박사와 셜록 홈즈의 대결은 자못 멜로드라마 같으면서도 박진감이 넘친다.

 

  기술자의 엄지손가락

이것은 발표된 이야기 가운데 왓슨이 직접 홈즈에게 의뢰한 유일한 사건이다. 엄지손가락을 잃은 환자가 아침 일찍 찾아오자, 왓슨은 사려 깊게도(의사로서는 좀 미흡했지만) 환자를 신속하게 홈즈에게 데려간다. 여기서는 기묘한 독일인 화폐 위조범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는 정전에 곧잘 등장하는 여러 타락한 대령 가운데 첫 번째 인물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는 사실상 탐정 활동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홈즈는 악당을 잡는 데 그리 열의를 보이지도 않는다. 엄지손가락이 절단된 사연에 대한 빅터 해설리의 설명은 실제 상처와 일치하지 않아서, 그가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독신 귀족
여기서 홈즈는 로버트 세인트사이먼 경이라는 상류층 인사를 만난다. 세인트사이먼은 제법 멋쟁이인데, 영국의 중산층 독자들은 홈즈가 이 젊은 귀족의 품위를 구겨놓은 것에 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영국 여성들은 미국의 젊은 부자 여성들이 '침략'해오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잉글랜드의 가난한 귀족을 남편으로 가로채 가는 것 말이다. 여기서 홈즈는 사라진 미국인 신부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는 정확하게 실마리를 포착해서 그녀를 찾아낸다.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그녀를! 아름다운 이 여주인공이 범죄를 저지른 셈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홈즈는 그녀를 흔쾌히 용서한다. 하지만 홈즈는 신세계와 구세계의 사람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하는 외교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여기 나오는 쾌활하고 민주적인 홈즈의 태도, 영어권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홈즈의 믿음은, 배질 래스본과 나이절 브루스가 주연한 유니버설 영화사의 <셜록 홈즈>(정전과 전혀 무관한 영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녹주석 코로닛

윌키 콜린스의 걸작 추리소설 『월장석』에서도 여기와 마찬가지로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을 아주 소홀히 보관한다 그런 면에서 『월장석』을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에서는 익명의 귀족이 은행가에게 담보물로 맡긴 국보가 도난 당해 홈즈가 찾아 나선다[익명의 귀족은 빅토리아 여왕의 맏아들로, 대중적인 인기가 있엇지만 곧잘 구설수에 오른 웨일스 공 앨버트 에드워드(즉위 후에는 에드워드 7세)라고 믿고 싶어하는 독자가 많다]. 런던 교외를 무대로 한 「녹주석 코로닛」에서 홈즈는 런던 범죄계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는 한편, 은행 잔고가 두둑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너도밤나무 저택
홈즈의 의뢰인 가운데는 어려움에 처한 여성, 특히 여성 가정 교사가 많다. 코난 도일의 누이 하나도 가정교사였다. 가정교사는 당시 신흥 계층인 일하는 여성이 선망하던 일자리엿다. 홈즈는 자신의 탐정 일이 "잃어버린 연필이나 찾아주고, 기숙학교를 나온 젊은 아가씩에게 조언이나 해주는 역할"로 전락한 것에 대해 자조의 웃음을 흘리면서도, 이번 바이올렛 헌터 양(그가 만나는 네 명의 바이올렛 가운데 첫 번째 여성)의 사건은 예외로 친다. 『셜록 홈즈의 모험』으로 엮인 연작 이야기의 마지막 편인 「너도밤나무의 저택」에서, 주근깨투성이인 헌터 양은 거액의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이고 홈즈에게 "지원"을 요청하러 온다. 왓슨은 헌터 양이 "제 몸 하나는 잘 간수"할 수 있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만, 홈즈는 그답지 않게 우려를 하며, "내 누이라면" 헌터 양 같은 그런 일자리에 취직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중얼거린다. 이런 말로 홈즈의 가족 배경을 추리하려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헌터 씨네 바이올렛'이 어쩌면 왓슨의 부추김을 받아 홈즈에게 구애를 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고 추리한 학자들도 있다. 이야기의 막을 내리는 왓슨의 어조에는 은근한 슬픔(홈즈가 헌터 양의 매력에 무관심한데 대한 탄식)이 어려 있다.

 

옮긴이 후기
셜록 홈즈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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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노래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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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구매하기로 결정한 책.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표지와 삽화에 부록까지. 어쩌면 이렇게나 깜찍하게 마음에 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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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 까칠한 글쟁이의 달콤쌉싸름한 여행기 ㅣ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김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으로 시작한 빌 브라이슨 책 읽기. 선풍적인 인기로 그 이후에 나오는 책들은 줄줄이 '발칙한~'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데, 원제와 심히 관련이 없어서 볼 때마다 헷갈리곤 한다. 그래서 여기서 정리해보는 빌 브라이슨의 저서들.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였다.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일단 이 사람이 책을 여러 권 썼고, 일부는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어 있지 않으며, 번역된 책들도 순서대로 번역되지 않고 순서가 바뀐 경우가 많은 데다가, 판이 바뀌면서 제목도 바뀐 경우가 많다. 그 제목도 영어로는 멋스러울지 모르나 우리말로 직역하면 다소 눈길을 끌기에 부족하거나 어색해져 버려서 출판사에서는 우리 식으로 번역을 해 놓았는데, 그것이 또 바뀐 경우는 대체 이 책을 내가 전에 읽었었나 헷갈릴 정도이다. 게다가 빌 브라이슨의 특징이 어느 곳을 여행하더라도 자기 스타일대로 해석하기 떄문에 장소가 겹치는 경우 더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특히 미국 소도시를 여행한 기록과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 기록, 그리고 영국에서 거주했다가 다시 미국에 돌아오면서 겪은 미국 생활에 대한 세 권은 제목이 계속 헷갈린다.

 

 

여행/회고 (9/8)

 

The Palace Under the Alps and Over 200 Other Unusual, Unspoiled, and Infrequently Visited Spots in 16 European Countries (1985)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횡단기(2009), 권상미 역 ISBN 89-509-2084-0
The Lost Continent: Travels in Small-Town America (1989)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2008), 권상미 역 ISBN 89-509-1361-5
Neither Here Nor There: Travels in Europe (1991)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2009), 김지현 역 ISBN 89-509-1926-5
Notes from a Small Island (1995)

 

나를 부르는 숲(2008), 홍은택 역 ISBN 89-7090-556-1
A Walk in the Woods: Rediscovering America on the Appalachian Trail (1998)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2009), 박상은 역 ISBN 89-509-1736-X (미국인의 미국적응기)
Notes from a Big Country (UK) (1998) / I'm a Stranger Here Myself (US) (1999)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 이미숙 역
Down Under (UK) / In a Sunburned Country (US) (2000) (호주 여행기)

 

빌 브라이슨의 아프리카 다이어리(2008), 김소정 역 ISBN 89-509-1553-7
Bill Bryson's African Diary (2002)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산책(2011) /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2008), 강주헌 역 ISBN 89-92355-28-9
The 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2006)

 

 

언어/문학 (7/2)

 

The Penguin Dictionary of Troublesome Words (1984)

 

Bryson's Dictionary of Troublesome Words (2002)

 

The Mother Tongue: English and How it Got That Way (1990)

 

Journeys in English (2004) (모국어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북)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2009), 정경옥 역 ISBN 89-522-1106-5
Made in America: An Informal History of the English Language in the United States (1994)

 

빌 브라이슨의 세익스피어 순례(2009), 황의방 역, ISBN 89-7291-468-1
Shakespeare: The World as Stage (2007)

 

Bryson's Dictionary for Writers and Editors (2008)

 

 

과학/역사 (4/4)

 

거의 모든 것의 역사(2003), 이덕환 역 ISBN 89-7291-364-2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 (2003)

 

그림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2009), 이덕환 역
A Really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 (2008)

 

거인들의 생각과 힘(2010), 이덕환 역
On the Shoulders of Giants (editor - 2009)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2011), 박중서 역
At Home: A Short History of Private Life (2010) Doubleday. ISBN 978-0-385-60827-5

 

 

 

(출판된 책/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책)으로 구분하였으며, ISBN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남겨놓은 것은 혹시라도 나중에 또 책이 계속 판형이 나와 이름이 바뀔 경우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총 14권의 책 중 9권 정도 읽은 것 같은데, 계속 읽다 보면 사실 그 책이 그 책 같다는 생각도 든다. 여행기 중 유럽을 다녀온 책은 읽으면서 계속 웃을 수 있었고 (물론 여행 정보는 전혀 얻은 것이 없었지만) 아프리카를 다녀온 책은 CARE라는 국제구호단체와의 동행이었으며, 호주를 다녀온 책은 단 한 권으로 호주의 '거의 모든' 것을 훑어 본 느낌이었다. 애팔래치아 기행을 다룬 숲 기행도 재기 발랄했고, 셰익스피어를 다룬 책은 내가 읽은 위인을 다룬 모든 책 중 열 손가락안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거의 모든 과학에 대한 책도 지식이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었고, 어린 시절을 다루었던 썬더볼트 키드의 생애도, 그로부터 수십 년 후 돌아온 미국 생활에 대한 좌충우돌 적응기도 다 재미있었다. 저렇게 묶으면 단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어서 간단해 보이지만, 빌 브라이슨의 모든 책들은 각각 개성이 넘친다. 어떤 책에서는 날카로운 면이 부각되고, 어떤 책에서는 책 읽는 내내 따뜻하다. 어떤 책은 읽고 나면 세계사나 세계지리에 대한 공부를 좋은 선생님을 통해 가르침을 받은 느낌이고, 어떤 책은 마치 코미디 프로를 보는 것처럼 가볍게 웃으면서 읽어나갈 수 있다. 이렇게나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거기에 딱 맞는 방식으로 책을 쓸 수 있다니. 그는 진정한 글쟁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빌 브라이슨은 청년기에 영국으로 건너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여기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데, 그 직장은 계속 바뀔지언정 글을 쓰는 직업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그 동안 여행을 다니고 취재를 하면서 글을 쓰고 책을 낸다. 그리고나서 다시 미국으로 오기로 결정하고, 그 전에 영국을 한 번 일주하기로 마음먹는다. 이 책은 바로 그 책이다.

 

영국 전역을 다니면서, 처음으로 영국에 왔을 때를 떠올리기도 하고, 아내를 처음 만나 결혼식을 올렸던 곳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추억에 젖기도 하고, 또 최근과 비교해 어떻게 바뀌었는지 어떤 점은 여전한지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여전히 재치 넘치는 글들은 여전하지만,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보다는 온화하다. 다 읽고 나면 사실 강하게 인상에 남는 문장은 없지만, 예전에 유럽 베낭 여행을 갔을 때 런던과 케임브리지만 찍고 왔던 경험을 생각해보면, 영국의 다른 면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영국에 가고 싶다는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를 읽으면서는 꼭 호주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관광객으로서 호주를 보고 남긴 기록과 수십년간 살아온 나라에 대한 기록은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고, 두 나라의 특징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글은 정말 재미있고, 영국의 수많은 곳에 대한 설명도 유용하다고 생각했지만, 소장하고 싶다거나 두세번 반복해서 읽고 싶은 정도까지는 아니었었다. 다만, 빌 브라이슨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그런 면에서 재미있었다.

 

 

1. 다시 영국, 그리고 23년 전 _ 도버를 바라보며
나는 영국을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보고 싶었다. 20년간 나의 보금자리였던 이 친절한 녹색 섬에 대한 고별여행이랄까 뭐 그런 걸 하고 싶었던 거다.

2. 첫 기억 속으로 출발하다 _ 칼레에서 도버로
많은 세월이 흐른 뒤라 어서 다시 도버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수년 전 하룻밤을 지새운 버스 정류장을 찾아내고는 은밀히 기쁨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3. 런던 찬양 _ 런던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런던이야말로 파리보다 더 아름답고 흥미진진하며, 뉴욕 다음으로 가장 활기찬 곳이라고 말할 것이다.

4. 그때는 잘 몰랐던 도시, 와핑 _ 런던 옆 와핑
“상태 나쁜 게 겨우 이 정도란 말이지? 어디 그럼 내가 솜씨 한번 발휘해 최악이란 어떤 건지 보여주지!”

5. 왕의 나라 영국 _ 런던에서 윈저로
본능에 가까운 타인을 배려하는 이런 태도는 늘 감탄스럽다. 특히 영국에서는 이런 상황이 일상이어서 주목받지 못한다는 점은 더욱 감동스럽다.

6. 가족을 만들다 _ 버지니아 워터, 그리고 에그햄
‘저 사람이야말로 내게 필요한 이다.’
그로부터 여섯 달 후 우리는 근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7. 단점을 중얼거리며 산책하다 _ 본머스에서 크라이스트처치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계속 이어지는 겨울비를 생각해봐. BBC방송국에서 <캐그니와 레이시>라는 드라마만 줄곧 틀어대는 걸 봐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봐. 생각해보라고….”

8. 모든 것이 너무 많은 나라 _ 솔즈베리
장담하건데 스톤헨지의 배후인물은 아마도 사람들을 부추겨 일을 시키는 데 타고난 재주를 지닌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9. 지도만 들고 간다는 것_ 도싯 해안도로
적어도 이번 여행에서 나는 가장 어려운 대목을 해냈다. 이제 나는 문명세계로 돌아간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생길 것이다.

10. 걷기 여행 _ 룰워스, 그리고 웨이머스를 지나
항상 하는 말이지만 성공적인 도보여행의 비결은 언제 멈춰야만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데 있다.

11.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다_ 엑서터, 그리고 반스테이플
다른 방에 있으면서도 방금 만든 케이크의 크림을 한 번 찍어먹어 보려는 걸 귀신같이 알아내는 여자들의 재주는 도대체 어디서 난 거란 말인가?

12. 비오는 날의 날벼락 _ 웨스턴 슈퍼메어에서 몬머스, 그리고 시몬스 야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는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영국에서라면 방문객의 흔적은 단연 낙서나 먹다 버린 맥주캔이 뒹굴어 다니는 것이다.

13.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_ 옥스퍼드
“1264년 이후로 이 고장에는 근사한 건물들만 들어서왔어. 그러니 이번에는 기분전환 삼아 못난이 건물도 세워보지, 뭐.”

 

영국인이거나 나보다 연장자이거나 아니면 이 둘 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특별히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스키플 음악(블루스나 포크송 따위에서 나온 1920년대의 재즈음악), 구멍이 하나만 있는 소금그릇, 마마이트(공업용 윤활유처러머 생긴 먹을 수 있는 이스트 농축액), '샐리'라는 노래를 부른 그레이시 필즈, 만능 연예인 조지 폼비, 바자회 등에서 싸게 파는 잡동사니, 직접 자른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 진짜 우유가 들어간 홍차, 삶은 양배추, 집안 전기 배선 공사야말로 재미있는 대화 소재라는 믿음, 증기기관차, 가스레인지 아래 달린 그릴에서 만든 토스트, 배우자와 벽지를 고르러가는 일이 즐거운 외출이라는 생각,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로 만든 술, 난방을 하지 않은 침실과 욕실, 해변에서 바람막이를 치는 일(바람막이를 치려면 뭐하러 해변에는 나가는지!), 그리고 크리켓 경기. 그외에도 당장 떠오르지는 않지만 뭔가 한두 개가 더 있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한 것들이 따분하다거나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저런 것들의 진정한 가치와 매력을 아직은 내가 알지 못한 다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위의 목록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옥스퍼드 대학교를 꼽을 수 있다.

나는 그 대학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품고 있으며 800여 년의 쉼 없는 지식노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그 대학이 왜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영국인들은 라틴어로 빈정거리기를 좋아하는 식민지 통치자를 육성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곳에서 후기칸트학파의 미학이나 라이프니츠와클라크의 논쟁 같은 심도 깊은 학문 활동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대단히 인상 깊은 일이군.하지만 실업자가 300만에 육박하고 가장 최근 발명분이 제트기엔진이라는 나라에서 조금 한가한 소리 아닌가?' 바로 전날 나이트뉴스에서 아나운서가 기쁜 낯으로 말하기를 삼성에서 타인사이드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라 밝혔다. 그 공장으로 인해 800명의 일자리가 생길 것이다. 그 800명의 사람들은 기꺼이 오렌지색 작업복을 입고 매일 아침 30분간 태권도를 하게 될 것이다. 낡은 사상을 고수하는 속물이라 손가락질 받더라도 내가 볼 때는, 그러니까 영국을 친근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떄는, 영국의 산업기술이 너무 뒤떨어지다보니 미래의 경제안보마저 한국기업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이제는 교육의 우선순위를 재검토해서 2010년 즈음에는 식탁에 뭔가 먹을 거리를 올려줄 학문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몇 년 전인가 <대학의 도전>이라는 특별방송을 본 적이 있다. 미국에는 <대학 경기장>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되었다. 미국 대학생들과 영국 대학생들이 팀을 이루어 겨루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영국팀이 싱거울 정도로 쉽게 이겨서 전체 프로그램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영국 학생들은 거의 기계적으로 정답을 연속해서 맞혔다. 반면 미국 학생들은 인상을 찡그린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생각은 이랬다.(그 눈을 보면 정말 이렇게 생각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도대체 윤회가 무슨 말이야?' 최종 점수는 12000대 2정도였다. 이런 점수는 영국인들을 불쾌하게 했을 것이다. 영국인들은 뭔가를 너무나 잘해 도드라지는 걸 내심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생각해야 할 문제는 다른 차원이다. 한 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건데 당시 게임에 참여했던 대학생들을 추적해서 그 이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본다면, 미국 대학생들은 모두 채권거래나 기업운영으로 연간 85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는 반면 영국 대학생들은 폴란드 남서지역 슐레지엔에서 구멍 난 스웨터를 입고 16세기 합창곡의 음질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옥스퍼드 대학교는 중세 이후로 발군의 재능을 뽐내어 왔으니, '(소니 영국법인의 하나인)옥스퍼드 대학교 주식회사'가 되어도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꼭 집어 해주고 싶은 말은 대학이 보다 상업적인 사고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내가 갔을 당시에는 3억 4천만 파운드의 기금을 5년 안에 조성하자는 운동이 성공리에 완수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깊은 인상을 주는 일이었다. 적어도 기업의 후원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학교 안내서를 찬찬히 훑어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들을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다. 완전히 새로워진 슈레이드 위트 시리얼(무설탕, 무가염)과 함께하는 동양 철학 강좌, 매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는 와이페이모어의 해리 카펫이 후원하는 경영전문대학원.

요 근래 이런 식의 기업 후원이 영국인들의 삶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고, 이제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캐논배 축구대회' '코카콜라컵 축구대회' '에너자이저 경주대회' '앰버시 담배 후원 세계스누커 당구 챔피언십' 같은 대회도 열린다. 머지않아 '켈로그 후원 왕세자비' '미쓰비시가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리젠트 공원' '삼성 시티(예전에는 뉴캐슬이라 불렸다)'도 보게 될 것 같다. 

14. 그림책에나 나올 법한 풍경들 _ 코츠월드 구릉지, 그리고 솔트웨이
영국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게 꾸며져 마치 공원 같은 전원 풍경을 누리고 살고 있다. 그런데도 분통이 터지도록 그 사실에 대해 잘 모른다.

15. 영국인의 천재적 작명센스 _ 밀턴케이스에서 런던, 캠브리지
매우 매력적인 여운이 남는 그곳의 이름은 ‘악마의 제방’이었다. 한 번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장소였지만, 왠지 뭔가 있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16. ‘귀족탐구’ 여행을 떠나다_ 렛퍼드와 워크솝
포틀랜드 공작 5세인 스코트 벤팅크는 오랫동안 내 마음속의 영웅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년의 벤팅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은둔자다.

17. 이것은 시네마라다_ 링컨과 브레드포드
브레드포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브레드포드와 비교해보면 세상에 안 좋은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18. 집에 들르다 _ 솔테어와 빙리, 해러게이트
산맥 너머에는 우리 집과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가슴이 저리도록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예정했던 여행을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면 부정행위를 한 듯한 느낌이 든다.

19. 판타지 속으로 _ 맨체스터에서 위건
이 책에서 수십 페이지에 걸쳐 내가 이야기한 것들을 딱 이루어놓은 셈이다. 영국 전체를 돌며 유일하게 본 것인데 그게 찢어지게 가난한 위건이라는 점도 기뻤다.

20. 과음의 규칙_ 리버풀에서 랜디드노까지
가보니 쓰레기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아이스크림 포장지, 담뱃값, 비닐봉지로 다른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주변 자연환경을 꾸미고 있었다.

21. 훌륭한 게스트하우스를 선택하는 법_ 랜디드노, 블라이나이 페스티니오그, 포스마독
내가 선택한 게스트하우스는 십중팔구 담배를 입에 물고 걸걸한 기침을 해대서 가래침을 좀 뱉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탐욕스러운 남자가 주인일 게 분명하다.

22. 영국에서 기차를 탄다는 것 _ 포스마독에서 루드로우, 다시 맨체스터
포스마독을 출발한 지 무려 14시간 만에 블랙풀에 도착했다. 지치고 배고프고 수염도 다듬지 못했다. 고통과 비탄에 잠긴 상태로 각별히 가보고 싶지도 않았던 곳에 와버렸다.

23. 해변이 하나도 없는 리조트 _ 블랙풀, 모어캠블
넓은 나라에서 살다 영국에 오면 가장 적응하기 힘든 일 중에 하나가 이곳에서는 문밖으로 나가면 좀처럼 혼자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24. 작은 나라 영국 _ 보우니스, 윈더미어 호수
지형이 작은 게 좋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섬나라에서 조촐하고 아담하면서 동시에 근사하고 멋진 모습을 간직해서 좋다는 것이다.

25. 탄광촌의 기적 _ 더럼과 애싱턴
한 때 애싱턴에는 1년 내내 강연회와 콘서트가 열렸고, 특강 형식의 철학회, 오페라회, 연극회 등등 비스무레한 모임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동시에 그게 영국의 매력이었다. 친근하고 아담한 나라지만 흥미로운 사건사고를 잔뜩 품고 있는 나라였다. 이점에 대해 늘 감탄하고 놀라워했다. 옥스퍼드에서 불과 몇 백 야드 떨어진 장소에는 크리스토퍼 랜의 집이 있고 핼리가 혜성을 발견했고 보일이 자신의 법칙을 처음으로 생각한 건물이 있으며, 로저 배니스터가 마의 4분이라던 1마일(약 1.6km) 코스를 세계 최초로 깬 거리가 있고 루이스 캐럴이 엘리스 아가씨와 산책을 했던 초원이 있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닫자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랬다. 윈저의 스노우힐에 서서 윈저성, 이튼의 운동장, 그레이가 그 유명한 《엘레지》를 썼던 교회경내,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이 초연되었던 장소를 한눈에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수세기밖에 안된 짧은 기간에 걸쳐 부지런히 이뤄낸 풍부한 업적의 결과를 한가득 품고 있는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26. 스코틀랜드와 사랑에 빠지다 _ 애든버러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참기 힘든 곳이 될지! 스코틀랜드 인들이여 고맙다. 그리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일 따위는 신경 쓰지 마시라.

27. 어딜 가나 그곳은 영국이다_ 애버딘을 거쳐 인버네스로
진짜 문제는 애버딘이라기보다는 현대 영국의 특성에 있었다. 영국의 도시는 한 벌의 트럼프카드 같다. 같은 카드인데 순서만 달라지는 것이다.

28. 북단을 가다 _ 인버네스, 서소, 존 오그로츠
집에서 멀어져 장기간 여행을 해왔던 나에게 드디어 올 것이 와버렸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순간이었다. 혼잣말로 대답도 못할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대고 있었다.

29.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다 _ 글래스고
이게 바로 글래스고다. 근래에 들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어 세련되게 변했지만, 그 한쪽 끝에는 늘 공갈과 협박이 남아 있다.

30. 나는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_ 집으로
갑자기, 순식간에, 영국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좋던 나쁘던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내리막길을 반절쯤 갔을 때 아내에게 목초지 입구에 차를 세우게 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전경이 거기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기서는 맬햄데일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녹음이 우거진 아늑하고 포근한 마을이 당당한 구릉지 아래 자리 잡고 있다. 고지식한 자연석 담벼락이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인근의 마을 세 개도 다 보이고 작지만 아름다운 교실 두 개짜리 학교도 보이고 낡은 교회도 보였다.(그 교회는 1490년에 지어졌는데 그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출항하기 2년 전의 일이다. 나는 우리 집에 찾아온 미국인들에게 언제나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 다들 매우 인상 깊은 일이라 좋아들 했다.) 그리고 우리 동네 선술집도 보였다. 그 한가운데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돌집 하나가 있었다. 나의 조국 보다 훨씬 더 오래된 우리 집이었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하지만 이 매혹적인 작은 나라에는 이곳 못지않은 장소가 너무도 많다. 갑자기, 순식간에, 영국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좋든 나쁘든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오래된 교회도, 시골길도, "불평하지 마"라고 말하는 사람도, "정말 죄송한데요"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내가 모르고 팔꿈치로 툭 쳤는데도 먼저 사과하는 사람도, 병우유도, 토스트에 들어간 콩도, 6월에 건초를 만드는 일도, 바닷가 부두도, 왕립지도제작원에서 만든 지도도, 차와 핫케이크도, 여름 소나기도, 안개 자욱한 겨울날도 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모두 사랑했다.

영국은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장소다. 물론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도 조금은 숭배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어떤 나라가 투팅 비(방귀 뀌는 벌)와 팔레이 월롭(팔레이를 흠씬 두들겨 패다) 같은 이름을 지명으로 사용할 생각을 하겠는가? 크리켓 같은 스포츠를 고안해 낸 나라가 이곳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입헌군주제 방식의 정부조직을 갖고 있으면서도 성문헌법은 없는 데가 또 있을까? 사립학교를 공립학교라 부르고, 판사들의 머리에 마대자루 같은 걸 올려놓고도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상원의원의 최고 책임자를 양모자루라고 불리는 것 위에 앉히고, 하디라는 이름의 동료에게 키스를 받는 것이 최후의 소원이었던 전쟁 영웅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라가 여기 말고 또 있을까?("하디, 제발 입술에다 해줘. 혓바닥은 살짝만 집어넣고.") 이 나라가 아니었다면 윌리엄 셰익스피어, 위가 납작한 중절모,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윈저 대공원, 솔즈베리 성당, 2층 버스, 다이제스티브 비스킷을 어디서 만났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근사한 전망을 어디서 또 구경할 수 있을까? 단연코 이런 곳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생각들이 한참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에도 말했고 앞으로도 다시 말할 이야기지만 나는 영국이 좋다. 말로 다 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한다. 드디어 나는 목초지 입구에서 등을 돌리고 자동차로 올라탔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을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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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일단 책소개부터 옮겨놓고 싶다. 

 

20세기 가장 사랑받는 작가이자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애서가 헤르만 헤세. 그가 쓴 3천여 편의 서평에서 가려 뽑은 가장 빼어난 73편의 글. J. D 샐린저, 카프카, 토마스 만 등 세계문학의 고전들부터 공자, 노자, 붓다,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 등 동양의 걸작들에 이르기까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르만 헤세가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작품들을 가려내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헤르만 헤세는 평생에 걸쳐 독서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 스물한 살인 1898년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들>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00년 스위스 일간지 「알게마이네 스위스 신문」에 처음으로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 명문 마울브론 신학교에서 도망친 후, 서점에서 조수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헤세는 서점에서 일하며 신문 문화면에 서평을 기고하던 처음 몇 해 동안이 "가장 최신의 문헌 속에서 헤엄치기, 거기 파묻히는 일이 술에 취한 것과 비슷한 쾌감"이 되었다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독서체험은 물론 자신의 모든 체험을 글로 표현하고 탐색하던 헤세에게 신문 지면은 그런 글을 위한 중요한 통로였다. 오히려 이런 작업이 그의 책들보다 더 알려져 사회생활을 하는 데 상당한 뒷받침이 되어주었다.

당시 그는 서점 직원으로 얼마 되지 않는 임금을 받는 것 말고는 이런 문필작업의 고료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스물세 살인 1900년부터 죽음에 이른 1962년까지 평생에 걸친 헤세의 서평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책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은 그가 쓴 3천여 편의 서평과 에세이 가운데 가장 빼어난 글을 가려 뽑은 것이다.

 

중학교 시절 읽었던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와 같은 소설 덕분에 헤르만 헤세의 이름은 나에게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멋모르던 사춘기 시절조차도, 독일인 특유의 절제된 태도와 담담한 서술, 그리고 나와 비슷한 또래들이 겪는 질풍노도를 읽어나가면서 저절로 느껴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들. 내 기억에 헤세는 지적이고 차분한 작가였다.

 

순전히 이 책은 제목을 보고 골랐다. 고르고 나서, 엮은이의 말을 보고서야, 내가 헤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작가보다도 당대에는 서평으로 유명했으며, 사실상 그의 대부분의 수입이 그가 읽은 책에 대한 평가를 신문에 싣는 행위에 바탕했다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신문사 문화면 기자인 셈인데, 이미 소설을 냈으나 그 소설은 크게 인기가 없고 북 리뷰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상상하면 되겠다.

 

요즘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은 많다. 책에 대한 방송도, 책에 대한 책도 많다. 나 또한 그런 방송의 애청자이자, 그런 책의 애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헤르만 헤세라는 계급장을 떼어 놓고서도 온전히 이 책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옮긴이의 글_ 피로 쓰고 피로 읽다

PART 1. 그토록 가지고 싶은 책들
|스러지지 않는 종류의 것들_ 《안데르센 동화집》
|위안 없는 세계의 아이_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꿈 세계의 구조물_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신이 우리를 찾아낼 수 있기를_ 프란츠 카프카의 《성》
|낯선 공간들, 낯선 운명들_ 프란츠 카프카의 《아메리카》
|그 목소리, 그 호흡의 긴 여운_ 막스 브로트의 《프란츠 카프카》
|천의 예술가_ 토마스 만의 《트리스탄》
|아주 오랜 삶의 수수께끼_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저 은밀한 러시아의 목소리_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미성년》
|카오스로 되돌아가는 사유_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유럽의 몰락_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통찰을 삶으로_ 레프 톨스토이의 《일기》
|러시아 문학이 내놓은 가장 아름다운 것들_ 레프 톨스토이의 《유년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
|가시 혹은 낙원의 유혹_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사랑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_ 로맹 롤랑의 《톨스토이의 생애》
|백 개의 매혹적인 이야기_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세계문학의 확장_ 셀마 라겔뢰프의 《그리스도의 전설》
|영혼의 탐구들_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리카 에발트의 사랑》
|켈트 문학, 정열적인 신음의 언어_ 피오나 매클라우드의 《바람과 파도》
|인간 영혼의 이야기 한 조각_ 켈트 전설 《마비노기의 나뭇가지 네 편》
|종교개혁 시대의 협잡꾼 문필가_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의 《모든 기술과 학문의 허영과 불확실
함에 대하여. 즉 이 모든 것이 인류에게 이롭기보다는 해롭다는 것에 대하여》
|가장 사랑받는 독일 민요집_ 아힘 폰 아르님과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소년의 요술 뿔피리》
|내가 사랑한 작가_ 크누트 함순의 《시대의 자식들》
|떠돌이 악당과 제겔포스 세계_ 크누트 함순의 《시간이 지난 뒤에》
|미래의 학문_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입문》
|내 작은 비밀_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니체를 기억함_ 헤르만 헤세의 《차라투스트라의 귀환》
|치유할 길 없는 시대의 광증_ 쇠렌 키르케고르의 《선민의 개념》
|근대철학의 안내자_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의 《모름의 앎에 대하여》
|부드러운 시인의 영혼_ 프랑시스 잠의 《다리를 저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
|이 소설은 하나의 세계다_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그의 인생관은 전혀 낡지 않았다_ E. T. A.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르의 인생관》
|아름답고 두렵고 위험한 책_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이토록 지적이고 이토록 문학적인_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투명한 세계의 온기_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제2권
|3세대의 연대기_ 펄 벅의 《아들들》
|잃어버린 것을 향한 사랑_ 카렐 차페크의 《호르두발》
|깊이와 악마성_ 조셉 콘래드의 《서양인의 눈으로》
|열대 동양의 뜨거운 대기_ 조셉 콘래드의 《올메이어의 어리석음》
|인적도 사랑도 없는 삶_ 엘리아스 카네티의 《현혹》
|무장해제시키는 천진한 이야기_ 제임스 힐턴의 《굿바이 미스터 칩스》

PART 1.5 작가들에 대한 기억
|사랑의 이상_ 스탕달
|이 죽음을 죽고, 이 지옥을 밟고 나서야_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삶의 모든 단계에 대하여_ 오노레 드 발자크
|고통스럽고 달콤한 어두움_ 클레멘스 브렌타노
|투쟁과 사랑_ D. H. 로렌스
|거대한 야누스의 사유_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예감을 지닌 사람_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PART 2. 동양을 향하는 눈길
|두 세계의 종합 가능성_ 공자의 《대화》
|붓다와 그리스도 사이_ 노자의 《최고 본질과 최고선의 책, 도덕경》 1
|인류의 목적에 어울리는 사유_ 노자의 《최고 본질과 최고선의 책, 도덕경》 2
|낱말을 넘어 본질로_ 노자의 《최고 본질과 최고선의 책, 도덕경》 3
|뮌헨의 중국문헌에 대하여
|고대 중국의 섬세한 정신_ 열자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참된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화책_ 포송령의 《중국의 유령 이야기, 사랑 이야기》1
|낮과 밤, 꿈과 환상_ 포송령의 《중국의 유령 이야기, 사랑 이야기》2
|인도의 지혜_ 《지혜의 마지막 결론》과 《바가바드기타》
|태곳적 시의 울림_ 《바가바드기타》
|자아 속의 참나를 찾아서_ 알프레트 힐레브란트의 《브라흐마나스와 우파니샤드》
|동양 문학의 걸작들_ 《메스네비》, 《중국 단편소설집》, 《수카삽타티》
|사유와 본질의 원천_ 《중국의 민속동화》
|인도의 동화_ 소마데바의 《동화 강들의 바다》
|태양 숭배의 찬가들_ 귄터 뢰더의 《고대 이집트인의 종교에 대하여》
|강력한 죽음의 노래_ 《길가메시》
|인간 영혼의 구조는 동일하다_ 《남아메리카 인디언 동화집》과 《코카서스 동화집》
|인도 정신의 파도_ 카를 오이겐 노이만의 《붓다의 말씀》
|과거의 종교, 미래의 종교_ 헤르만 올덴베르크의 《붓다의 말씀》
|유럽에 대한 경각심_ 오카쿠라 텐신의 《동양의 이상》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인도_ 헬무트 폰 글라제나프의 《힌두교. 현대 인도의 종교와 사회》 1
|진리는 모습에 있지 않다_ 헬무트 폰 글라제나프의 《힌두교. 현대 인도의 종교와 사회》 2
|영혼으로 인도를 여행한 사람에게_ 《순다. 수마트라 여행》과 《실론. 인도 문화 여행》
|혼인의 성립에 대하여_ 《얼음심장과 귀한 옥, 또는 어느 다행스런 혼인 이야기》
|18세기 중국의 얼굴_ 조설근의 《붉은 방의 꿈》

 

한 때 나의 꿈은 신문 기자, 그것도 문화면 기자였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책을 보고, 그 책에 대한 내 느낌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소박한 소망에 기초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한참 힘들 무렵에는, 도서관 사서가 가장 부러웠다. 늘 책에 가까이 있고, 여유로워 보이며, 남는 시간에 열심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아 보여서. 지금은, 좀 더 다른 꿈을 꾼다. 물론 책도 좋지만, 책 말고도 좋은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는 책만을 바라보는 외바라기 삶은 힘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열심히 일하고, 틈틈이 책을 읽는 것. 아니 억지로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꼭 책을 읽는 것.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그냥. 그냥 읽는 시간들을 놓치지 않는 것.

방금 깨어난 근원충동에 새로운 방향을 주어보라,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가치평가를 주어보라. 그러면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질서, 새로운 도덕을 위한 뿌리가 이미 주어진 것이다. 모든 문화란 바로 이렇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짐승인 근원충동을 죽이지는 못한다. 그것들을 죽이면 우리 자신도 죽을 것이기에. 하지만 우리는 이런 근원충동들을 어느 정도 유도하고 어느 정도 다스리고, `좋은 것[선]`을 위해 일하게 할 수 있다. 성질 난폭한 말을 좋은 수레 앞에 묶어 수레를 끌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다만 이따금 이 `좋은 것`이 낡고 시들면, 충동들이 더는 선을 믿지 않으면, 그것들은 더는 거기 묶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문화는 붕괴된다. 대개는 아주 느리게, 우리가 `고대`라 부르는 문화가 수백 년에 걸쳐 죽어갔듯이 말이다.-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오래 기다려온 이 책은 실제로 기대했던 그대로이다. 곧 프로이트 이론을 체계적으로 쓴 것으로, 무의식의 심리학과 분석 기술을 서술했다. 그동안 제자와 추종자들이 내놓은 몇몇 작은 시도들과는 달리 프로이트 자신이 강한 책임감을 품고 내놓은 책으로,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고 개척한 사람의 진지함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정신이 지닌 온갖 장점들이 이 책에 드러나 있다. 그의 명료함, 참을성 있는 결합의 재능, 정교한 표현력 그리고 위트까지도.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 각기 오류, 꿈, 노이로제 이론을 다룬다. 오류와 꿈에 대해서는 프로이트가 이미 《일상의 정신병리학Psychopathologie des Alltags》과 《꿈의 해석Traumdetung》에서 체계적으로 서술한 내용이지만, 그 자신이 쓴 완결된 형식의 전반적인 노이로제 이론은 아직까지 없었다. 그래서 특히 이 부분이 관심을 끄는데, 과연 뛰어난 가치를 지닌 역작임을 보여준다. 프로이트가 엄밀함과 조심성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 결론을 이끌어내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발견을 통해 표현의 확실성을 구하는 것을 관찰하는 일은 즐거움이다. 아직 추측과 더듬기, 탐색 단계의 영역에서 보이는 조심성과 겸손함이 여기 있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특히 의사들에게 정신분석의 기원, 목적, 기술 등을 제대로 안내해준다.

정신분석학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은 여전히 뜨겁지만, 조용한 가운데 이미 이 학문은 소년기를 벗어나 미래의 학문이 되고 있다. 이로써 정신분석학은 학문으로서의 토대를 놓았고, 심리적인 사건들의 법칙에 대한 최초의 중요한 통찰이 이미 이루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학문의 변두리에 좋여 있던 이 영역에서 최초의 진지한 탐색이 시작된 셈이다. 심리적 사건의 확실함, 인과법칙의 적용, 그로써 심리학 영역에서 학문적 탐구의 가능성이 오늘날에는 이미 자명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불과 얼만 전까지만 해도 많은 위원회에서 놀람과 조롱을 만들어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학자들과 일반인들은 어린아이에게 성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 이런 투쟁은 이미 이루어졌고, 정신분석의 기본적 진실은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아직도 논란을 만들어내고는 있어도 더는 뒤집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확장되고 더욱 깊어진 새로운 세계관의 기반으로서 정신분석학의 위상은 전혀 다르다. 무의식의 심리학이 그런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로 보인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제자들 중 상당수가 스승과 갈라선 지점을 보게 된다. 프로이트 자신은 철저히 신체를 다루는 의학자로 남아 심리적 과정의 기계적 측면들을 탐색하면서, 이것을 세계관과 연관시키려 하지 않고 온갖 형이상학적 주장을 조심스럽게 피한다. 다른 여러 방향으로 나아간 제자들은 이와는 다르다. 일부는 매우 딜레탕트 방식으로나마 정신분석을 일종의 종교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했다. 실제로 이런 노력들 중 일부는 아주 천박해서 그런 제자들에 대한 프로이트의 거부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취리히에서 활동하는 융Carl Gustav Jung은 정신분석의 관점을 의학을 넘어 철학의 기반으로 만들려는 극히 주목할 만한 최초의 시도를 했다. 물론 구체적인 표현은 아직 없지만.

정신분석학의 원래 창시자를 거부하면서 프로이트 심리학의 온화하게 중개하는 관점만 받아들인다면 부당한 일이다. 이 학문의 창시자는 분명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개별적인 점에서 그를 비판하거나 수정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거대한 업적을 (특이하게도 어둠 속에 남은 브로이어 Josef Breuer와 나란히) 마침내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비보스 보코>, 베른과 라이프치히, 1920년 6월

삶이 견디기 힘든 시절에는 추상적인 사상의 문제보다 더 나은 피난처가 없다. 거기서는 그 어떤 싸구려 위안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시대를 초월한 가치들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 생각하는 젊은이에게는 그런 시간에 이 책 《모름의 앎에 대하여》의 번역본을 탐색해보라고 친절하게 충고한다. 플로티노스Plotinos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수학을 공부한 위대한 쿠사누스는 이 책(그의 가장 초기 작품의 하나)의 제목에서 짐작되는 바처럼 우리를 체념적인 회의주의로 안내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고의 사실성이 깃듯 사유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쿠사누스가 자기 시대에, 온갖 종교의 신앙들 사이에서 평화로운 화해를 최종 목적으로 삼고 여러모로 노력했다는 사실은 그를 우리 시대로 더한층 가까이 데려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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