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탄생 10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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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 있던 의사는 혹시 의사가 필요할 경우 자기가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다시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두 손만 가지고는 의사 노릇을 할 수가 없었다. 의사는 약이라는 화학적 합성물을 이렇게 저렇게 섞어서 치료를 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런 물질은 흔적도 찾을 수 없고,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없었다. 게다가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병적으로 창백해진 모습을 눈치챌 수도 없고, 핏줄이 붉어지는 것을 관찰할 수도 없었다. 자세한 진찰을 해보지 않아도, 이런 외적인 징후가 병력에 대한 기록만큼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점액이나 피부의 색깔만 가지고도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따라서 이렇게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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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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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표지의 윌리엄 골딩의 사진이 정말 인상적이다. 담배를 물고 있는 옆얼굴. 흑백이라서 머리색을 정확히 알 수 없기에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이제 약간 희끗해지기 시작한 상태가 아닌가 싶다. 세상에 대한 냉소적이면서도 반항적인 모습. 이 책과 정말 잘 어울린다. 사진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서 찾아보니 동일한 출판살에서 나왔던 구판에서는 다른 사진을 썼더라. 노년의 골딩의 모습인데 개정판을 내면서 왜 이 사진을 바꿨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설령 그 이유를 모른다 하더라도 직관적으로 이 사진이 여러 모로 강한 인상을 준다는 것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워낙에 유명한 책이라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읽는 내내 빨리 읽어버리는 게 아쉽고, 또 빨리 읽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다 읽고 난 지금은 언젠가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으면서도 당분간 읽고 싶지 않기도 하다. 지식인으로서 2차 대전에 참전하고 난 후 발표한 첫 소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문명의 발달과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만 놓고 봐도 그럴 것이다. 어릴 때 집에 있는 소년소녀전집이었나? 아무튼 세계문학전집에 15소년 표류기가 있었던 게 기억나는데. 재미있게도 읽었고. 세상이 그저 밝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 그 책과 이 책의 간극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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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모자의 비밀 동서 미스터리 북스 66
엘러리 퀸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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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여흥에서 우리가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혐의 과잉과 사실 빈곤이라는 것입니다."

치우침이 없는 추리소설이자 흠잡을데 없는 데뷔작이다. 피살된 사람과 용의자들, 범인, 퀸 부자와 그 주변 인물들까지 캐릭터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까지 고스란히 전달되는 서술도 탁월하다. 이 작품으로부터 이어지는 퀸의 국명 시리즈는 트릭에 있어서는 데뷔작보다 발전했어도 인물에 대한 묘사는 생동감을 잃은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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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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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이 첫 문장은 참 인상적이다. 이스라엘 작가의 책은 거의 읽어 본 것 같지 않은데, 영미권의 이름들이 사실 성경에서 온 이름들이 많아서 등장인물의 이름은 낯설지가 않고 익숙한데, 지명이나 분위기는 또 생경해서 그 사이에서 오는 재미가 있었다.

 

책을 죽 읽어보니 작가의 경우 이 책을 출간하고 나서 두 가지 반응을 다 겪은 것 같다. 하나는 남자 작가로서 여자 화자를 내세워서 소설을 쓴 것이 의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반응, 하나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반응. 아마 그 두 가지 사이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는 이에 대해 어떠한 변명이나 미화도 없이 어느 순간 한나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썼다고 하는데 우리가 살다 보면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까, 특히 나와 생활을 같이 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판단할까 라는 궁금증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화자는 한나이지만, 주인공은 미카엘이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제목도 나의 미카엘이고, 과장하면 한나의 모든 안테나의 끝은 미카엘에게로 향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굉장히 섬세하면서도 우아하고 슬프면서도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소설.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한나가 겪는 마음의 변화에 몸의 변화는 상당 부분 누락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엄청난 신체의 변화와, 그러한 신체의 변화의 급격함 때문에 당연히 수반될 수밖에 없는 정신적 변화에 대한 부분은 빠져 있다는 아쉬움. 이것은 남자 작가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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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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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는 예전부터 많이 들어보았으나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다. 책의 소개를 보면 출판 이후 이른바 니나 신드롬까지 불었다는데, 그 시대라면 모를까 요즘 시대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낡아 보이는 주인공이지 않을까 싶다. 너무 평가가 박한가? 그만큼 내가 더 나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굳이 태클을 걸어보자면, 중년 남성의 삶의 의미란 딸만큼이나 어린 여성과의 사랑이 아니면 찾아낼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삐딱한 의문이 들기도 하고. 과연 이것이 사랑이 맞는지, 그저 지나가버린 자신의 젊은 날을 붙잡고 싶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평탄하게 살아온 니나의 언니가 니나를 부러워하듯이. 정작 젊은 시절 열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온 니나는 언니의 그 안정을 부러워하고 있는데. 슈타인이 실제 니나를 사랑했는지 아리송하다. 열정적이고 불완전한 젊음 그 자체를 붙잡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젊은 여성과 결혼을 하는 남성이 오히려 털털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것도 사랑일 수 있다. 숨이 막히는 사랑이겠지만.

슈타인은 그렇다치고 니나는 어떠한지. 학교 수업을 거부할 정도로 안락사를 반대하면서 정작 남편의 조력 자살에 협조하는 모순. 그 모순 또한 인간의 한 부분인 것은 맞는데, 한 인간 안에서의 변화에 대한 통찰 수준까지 소설이 가지는 않는 것 같다.

전후 세대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성숙한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 감정에만 몰두하는 니나는 그저 자기 파괴적인 본능에서 성숙해진 것 같지는 않고, 소설 자체로만 보면 매력적인 소설은 맞는데, 인물이 매력적인 것은 모르겠다. 신드롬까지는....... 정말 모르겠다. 분명히 니나는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 인물일텐데 작가에 대해 찾아보다가 한때 나치주의자였다는 경력이 드러났다고 한다. 스스로를 반나치 인물로 열심히 포장하며 살았다는 것인데, 한 때 이 소설과 니나를 열렬히 마음에 품었던 사람들에게는 아픈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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