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 2판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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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별 다섯 개를 준 것은, 책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최근 들어 이렇게 나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유다.

 

김영하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처음 접한 김영하의 소설은 ‘오빠가 돌아왔다’였다. 가부장제의 파괴, 그 현실을 시종일관 냉소적으로, 하지만 궁극에는 일말의 따스함도 보여주었던 그 소설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땐 내가 대학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아무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등 김영하의 책(의 제목만)을 볼 때마다 한순간 서늘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늘 궁금하면서도 선뜻 읽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일지도. 일껏 가벼워 보이면서도 촐랑대면서도 늘 진지했고 때로는 섬뜩하기까지 했던 그의 소설에 대한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내 감상 때문일 수도 있다.

 

퀴즈쇼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좀 있다가 나왔다. (표지만) 하도 많이 보아서 새로 나온 표지의 책을 보았을 때 딴 책인지 알았더랬다. 둘 중 굳이 옛날 버전을 택한 것은 작가의 말, 그리고 해설 때문이었다. 그만큼 김영하의 소설은 마냥 재미로만 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꽤 깊게 있었나보다, 몇 년 동안.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스물일곱, 대학원을 졸업했다. 학점도 나쁘지 않고, 영어실력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취업 준비생이다. 고아에, 땡전 한 푼 없이 창도 없는 고시원 쪽방에 사는 그는 편의점 알바도 때려치운다.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인 그는 “토익점수는 세계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다.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독서량도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지만 그는 백수다. 실업자다.

 

미치겠다. 이거 바로 내 얘기 아닌가.

 

비록 나는 부모님도 계시고 부모님과 함께 부모님 집에서 살고 얘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이 책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건 전부 내가 늘 하던 이야기였다. ‘80년대에 태어나 컬러 TV와 프로야구를 벗 삼아 자랐고 풍요의 90년대에 학교를 다니고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2002년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는 걸 목격’한 나는, ‘역사상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타고난 코스모폴리탄으로 자랐’기에 ‘이전 세대에 비하자면 거의 슈퍼맨’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바로 내가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닌’ 것이다.

 

그런데 이걸 활자로 읽으면서 왜 내 스스로 어이가 없어지는 것일까.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역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맘을 이렇게 알아주니 고마운 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왜 주인공이 찌질해 보이는 걸까. 그리고 그 찌질한 주인공에 나를 겹쳐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걸까.

 

뭐지? 이 더러운 기분은? 차라리 현실에 패배해 목을 맸던 ‘옆방녀’가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면 눈물이 났을지도. 그런데 ‘이러니 저러니 멋진 말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기를 원하고, 자존심 조금 상한다고 돈도 안 받고 편의점은 제 발로 나오고 그 자존심 때문에 ‘옆방녀’에게 돈을 꾸며 “그깟 사 만원” “고작 십 만원” 이런 소리를 뱉고 있다. 누가 봐도 쥐뿔도 없으면서 눈만 높아 누가 조금이라도 자길 무시하면 못 견디는 요즘 아이 아닌가. 왜 같은 세대인 나에게조차도 비호감으로 보이는 이런 인물을 내세워 김영하는 뭘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젊은 세대에 대한 연민? 감상? 비판? 조롱? 기성세대임에 틀림없을, 해설을 쓴 교수도, 역시 80년생 주인공보다 정확히 12년 먼저 태어난 김영하도 어쩔 수 없이 ‘기성세대의 눈으로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도 아니면, 올해로 스물일곱인 내가, 이미 서른을 넘긴 80년생에게 공감을 못해서인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까지 끝끝내 희망은 한 건더기도 건져낼 수 없었다. 아무리 국자를 휘저어봐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간 물만 보일 뿐이다. 이제 서른셋이 되었을, 6년 전의 스물일곱 청년은 책 처음 시작에서 크게 변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어쩌라고? 주인공 너도 안 변하고, 그렇다고 사회에 대해 깊은 성찰이 담긴 것도 아니고, 나는 요 몇 달 동안 요렇게 조렇게 방황했느니, 이게 뭐 어쩌라는 소리인지? 그러니까 너는 그냥 너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잖아. 만약 네가 이 사회 구조에 어떻게든 너를 끼워 맞췄다면, 너는 ‘인생에는 더 높은 차원의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느니 ‘그냥 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싶’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시민으로 너의 처지에 안주하면 살았겠지.

 

물론 대학 입학 후 이 젊은이가 7년간 어떻게 변화해 왔을지가 생략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이런 비판은 가혹할지도 모른다. 패기 넘치고 자신만만했던 스무 살이 패배주의로 압사된 것 같은 스물일곱이 되기에 7년이라는 세월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래도, 올해 스물일곱이 된 나는 이런 소설은 더 읽고 싶지가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에 공감한다는 것은 끔찍하다. 싫다. 거부하고 싶다. 몰라, 나도 몰랐던 나의 속물적이고 이면적인 모습을 책을 통해 주인공으로부터 발견하고 거북했을 수도 있고, 누가 뭐래도 난 진짜 노력하고 있다고, 얘처럼 이렇게 나약하게 자포자기하는 애의 푸념과 나의 호소를 한 범주에 묶지 말라는 애원일 수도 있고.

 

제일 짜증나는 건 자기 서재와 침실이 별개의 방으로 구분된, 미국 동부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개인 배를 몇 채 가지고 있으며 딸에게 승마용 말을 선물해 주는 아버지를 둘 정도의 여자아이가 너는 ‘부모가 없어도 지금 이렇게 멋진 사람’이라고 속삭이며 ‘서로의 영혼으로 떠나는 이런 모험마저 없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무의미하지 않을까?’라는 문장을 쓴 너는 ‘속물이 아니라’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맑은 눈을 가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이런 플롯, 어디서 봤더라? 김영하 또래의 여성 작가가 쓴 일인칭 여자 주인공 시점에서 주인공 여자는 꼭 초반부에 이른바 속물적이고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남자와 헤어지고 이렇게도 몽상적이며 순수하고 영혼을 읽어주는 남자를 만나더라. 한결같이 그 남자는 부자에 나름의 아픔이 있으며 망설이는 여자 주인공에게 오히려 적극적이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기도 한다. 어쩜 남녀만 뒤바뀌었을 뿐 이 구도는 그대로이니. 아무리 젊고 그렇기에 사랑이 중하다지만 너네는 너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 꼭 너네에게 “잘 될 거야. 다 잘 될 거야”라고 이야기해 주는 누군가가 없다면 너네는 혼자서 결심도 못하고 힘도 못 내니? 아니면 거꾸로 내가 그 구원자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거야? 한심한 내가, 나보다 더 비루한 누군가에게 살고 싶어지고 살게 하는 무언가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거야? 아님 이 정도로 나약한, 상처받기 쉬운 젊음을 김영하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뭔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까. 놓친 게 있는 걸까.

 

차라리 주인공이 부자 여자를 작정하고 잡을 작정으로 덤볐다면, 흔한 막장 드라마가 되었을지언정 오히려 속 시원하고 통쾌했을 거다. 일체의 물질적인 것, 거부하겠다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도, 차라리 그 체제에 편입해버리겠다는 발악도, 고차원적인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넌 그냥 너가 싫은 거고, 그저 편한 게 좋은 거고, 차마 맞설 용기도 없는 거고, 그냥 너 자신을 그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거짓말처럼 짠 하고 나타나기를 바라는 거 아니니, 너보다 훨씬 더 우월한, 너를 거기에서 건져내 줄 수도 있고 같이 있는 동안은 최소한 품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유희를 할 수 있는. 이건 대체 남자 신데렐라 콤플렉스니 아니면 온달 콤플렉스니. 아니면 도저히 있는 그대로 소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꼬인 거야? 정말 김영하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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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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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내가 약한 것을 알고 와락 쳐들어왔어.

눈길 가는 곳 어디에나 사랑이었어.

빈자리가 없었어.”

 

사람이란 건 참 이상한 것이어서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죽으면 어떻게 하지, 안 돼 살아야 해, 하고 마음속으로 온갖 기도를 하고 내려갔는데 막상 자기 집에 누워 사람들의 간호를 받고 있는 그를 보자 미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입술이 다 터지고 까맣게 타들어간 그의 얼굴을 보자 정말 “사랑이란 게 뭘까?”하는 유명한 화두가 머릿속을 웅웅거렸다.

 

“그냥 내버려 둬. 죽으면 자기 팔자지. 수경 스님, 문 신부님 저렇게 무릎 아프고 힘드신데 무슨 사랑 타령이야, 이 나이에.”

내가 화를 내자 버시인이 정색을 하고 내게 말했다.

“우리가 어렸던 1980년대에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 하지만 수경 스님이 삼보일배하는 것도 L선배가 섬진강가에서 헤매는 것도 다 사랑이야. 네가 보기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하나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실내에서 하는 운동과 달리 산행이 몸에 좋은 까닭은 평소에는 전혀 쓰지 않는 근육을 쓸 수밖에 없는 자연의 불규칙성에 있다고 했던가. 산이 예찬 받는 이유 또한 그 불가해성이 삶과 닮아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멀리서 파도치듯 이리로 다가서는 산들은 생명으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기 양의 배에서 새로 돋는 것처럼 보드랍게 초록빛 털들이 몽실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생명의 고갱이 속을 걸어가며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는 이제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랑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우리가 중학교 때 다 배웠고 L선배마저 이 지리산 자락에서 늦은 사춘기를 마쳤으니까 말이다.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中

 

 

원래 청춘의 특징이라는 게 자기가 청춘인 줄 모르는 것에 있기도 하니 하는 수 없기는 하다.

 

그 여자네 반짝이는 옷가게 中

 

 

읽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내가, 내가, 많이 고갈되어 있었나 보다. 읽는 내내 나도 이런 친구 있었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살라고 하면 못 살 것 같지만. 왠지 지리산에 가기만 하면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고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내가 많이 지친 까닭일까. 이런 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공지영은 독자의 마음을 흔들고 공감하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쿨한 척, 시크한 척, 현실을 관조하고 거리를 두는 방식은 역시 나와 맞지 않는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 공지영은 단연 열정이다. 때론 흥분하고, 때론 성급하더라도 공지영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글 속의 장소로 데려가서, 공지영과 등장인물들과의 대화에 참여하게 하고, 사진으로만 나와 있는 음식을 맛보게 하고, 같이 지리산자락을 거닐게 한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지리산 사람들과 이미 친해진 것 같다. 힘들 때, 지쳤을 때, 바닥까지 고갈되었을 때, 어떠한 가식이나 거추장스러운 예의도 벗어놓고 달려가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기댈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아니 그러한 장소가 이곳 서울, 단 한 평이라도 있다면, 그런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퍽퍽한 세상 살기가 얼마나 편안해질까. 거칠었던 호흡도, 불규칙했던 맥박도, 고르고 느긋해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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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다는 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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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지. 겉장이 참 예뻐서 서점에서 한 눈에 들어왔던 책이다. 흰 구름이 떠 있는 푸른 하늘. 내가 너무 좋아하는 광경. (바뀐 책의 표지도 세련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전의 표지가 더 좋다.)



하지만 서점에서 ‘꽂힌’ 이후 다시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 나서 작가에 대한 인상이 이미 형성된 후이다.








#2. KISS & TELL. 이 책의 원제. 유명인물과 맺었던 밀월관계를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한다. 원제는 역설적으로, 또 날카롭게 상대를 해부해가는 내용을 잘 반영했다고 생각된다. 한글 제목은 책을 읽기 전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지라도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참 잘 붙였다는 생각이 든다. 키스하기 전에, 즉 키스에 ‘이르기’ 전에-여기서 ‘키스에 이르기 전’이라는 말은 개인적 경험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리라고 본다-우리가 얼마나 상대에게 수많은 말들을 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책 전체의 내용을 따스하게 포용한다는 느낌을 준다. (바뀐 제목은 너를 사랑한다는 건... 과연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라고 탐구하는 책의 내용을 온전히 더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함축적이고 독자의 경험에 따라 개인적이고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했던 예전 제목이 그립다.)








#3. 번역. 이상하게 전에 읽은 책으로 인해 형성되었던 보통에 대한 느낌과는 다소 어긋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는 보통은 감탄할 만한 촌철살인과 놀랄 만한 관찰력(관찰력은 말 그대로 관찰력이다. 통찰력과는 완전히 다르다.)의 소유자였는데 역시 번역이 문제였나 보다. 많은 보통의 팬들이 리뷰에서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4. 책을 덮으면서 드는 의문 하나. 사랑하는 사람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다 알고 싶어 하는 마음 평범한 여성으로서 백번 공감하고, 이 사람에 대해 내가 책을 쓰고 싶다, 그러기 위해 인터뷰를 해 보고 싶다, 라는 마음 또한 작가라는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과연 이게 진짜 사랑인 걸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여자인 나는 이렇게까지 하는 남자를 이해 못 한다. 아니 견딜 수 없다, 절대로! 사랑은 이해 대상이 아니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도 나의 일부가 아니라 사실은 타인임을 중년 여성들은 어느 순간 알게 된다. 하물며 20년이 넘는 세월을 서로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이사벨에 대한 한권의 책. 아마 작가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분석하라고 해도 이 정도까지 하기에는 버거울지 모른다. 보통은 그녀에 대한 전기를 썼지만 결국 그녀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초반부에 비판한 다른 전기 작가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5. 그냥 날 조용히 봐주면 안 되는 걸까? ‘왜’를 분석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게 ‘무엇’이든 따지지 말고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걸까? 내가 당신의 ‘누구’가 되었다면 ‘언제’, ‘어디서’든, ‘어떻게’하든지에 관계없이 늘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는 차마 견디기 힘든 걸까? 좀이 쑤셔서 못 견디는 걸까? 꼭 선후와 인과를 따져서 결론이 나와야만 속이 시원한 걸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보통은 후련해졌을지는 몰라도 결국 그녀는 떠나고 말았는데 말이다. 연애 후 남자는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전과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버렸다. 이제 완전히 남이 되어버린 그녀에 대해 한 권의 백과사전만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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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속의 산책 - [할인행사]
알폰소 아라우 감독, 키아누 리브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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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군인 폴 서튼은 이상주의자이자 낙천주의자이다. 금요일에 만난 여자와 토요일에 결혼하고, 월요일에 전장으로 떠나 4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을 때 세상은 그가 생각하고 그리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변해 있었다.

 

폴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전에 했었던 초콜릿 장사를 다시 나가게 된다. 장사를 위해 집을 떠난 폴은 기차 안에서 아름다운 빅토리아를 만난다. 유학 중 미혼모가 되었고 엄격한 아버지를 두려워한 나머지 집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딱한 사정에 폴은 하루만 남편 노릇을 해주기로 하고 함께 빅토리아의 집으로 향한다.

부모의 승낙 없이 결혼한 딸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고, 하루만 남편 노릇을 하려던 폴은 가여운 빅토리아를 두고 떠날 수 없게 된다. 거기에 빅토리아 할아버지의 만류까지 더해져 하루하루 출발을 미루게 된다.

멕시코계 미국인인 빅토리아의 집은 대가족이 어울려 사는 전형적인 멕시코 가정으로 포도농장을 하고 있었다. 1년 중 가장 바쁜 포도 수확철에 빅토리아의 가족과 함께 농장 일에 참여하면서 폴은 서서히 다른 식구들에게 가족으로 인정받게 된다.

고아인 자신을 마음으로 품어주는 빅토리아의 가족들과 아름답고 풍요로운 포도농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폴은 차츰 빅토리아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이미 결혼한 몸, 죄책감으로 빅토리아와 그녀의 가족을 떠나 아내에게 돌아간다.

아내에게 돌아왔지만 아내는 벌써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 상태로 폴에게 결혼을 무효로 하자고 제안한다. 성급하고 경솔했던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난 폴은 다시 빅토리아를 찾아 포도 농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남편도 없이 임신한 딸의 거짓말을 알게 되고 시름에 젖어있던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폴을 보고 화를 내다 램프를 농장에 던져 버리고, 화재가 발생하여 농장은 전부 불타버리고 만다.

망연자실한 가족들.

이때 폴은 조상들이 가져온 포도나무의 자손들이 간직된 곳에서 속이 타지 않은 포도나무를 발견하게 되고, 다시 가족들은 희망을 품게 된다.

 

당시 참전을 앞둔 군인들은 급하게 만난 여자와 결혼하고 바로 전장으로 나가는 게 일종의 대세였던 모양인가? 단순히 바람을 피웠다고 폴의 아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많은 것을 겪고 생각하면서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한 폴이, 매일같이 자신의 경험과 느낌, 생각들을 편지로 써서 아내에게 보냈지만 아내는 편지를 읽고도 감동하지 않는다. “정원이 있는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강아지와 노는” 가정을 꿈꾼다는 폴의 말을 빅토리아는 인상 깊게 듣지만 폴의 아내는 “나는 강아지를 싫어한다”고 대꾸할 뿐이다. 이 정도라면 폴의 편지를 매번 읽는 것도 아내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절대 결혼하지 않았을 두 사람이다. 그건 폴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다시 집에 돌아갔을 때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도 조금도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그저 어안이 벙벙해하다가 빅토리아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고 미소 짓는 걸 보니. 고아로 자란 폴에게 가족이란 그의 이상이고, 희망이고, 목표이고, 꿈이 아니었을까. 그 이상향에 억지로 한 여자를 끌어다 놓았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그 소망에 관심도 없는 여자를. 철없던 시절에.

 

아마 빅토리아도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임신 이후의 모습만 나오지만 이전에는 막연히 가족을 벗어나고 싶고, 단순히 고향을 떠나고 싶고, 부잣집 아가씨 특유의 발랄하지만 구김이 없는 아가씨였겠지. 자신이 곧 엄마가 된다는 자각을 하면서 서서히 강인해졌을 것이고 눈빛도 깊어졌겠지만.

 

곤경에 처한 여자, 순전히 선의로 그를 도와주려는 남자, 위장결혼, 그리고 진짜 사랑. 1995년 할리우드에서뿐만 아니라 2011년의 한국 안방에서까지 되풀이되는 이 스토리가 평범하지 않게 보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아마도 외모의 출중함이 가장 절정이었을 시기의 키아누 리브스의 개인적인 매력, 남미 출신 특유의 생명력과 발랄함을 발산하는 여주인공, 그리고 등장 시간으로는 분명히 조연이지만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명배우 안소니 퀸의 연기. 무엇보다도 영화감독이나 제작자 등 영화 스태프 상당수가 남미 출신이라서 그런지 정말 ‘구름’속을 걷는 듯한 멕시코 이민자들의 포도농장 풍경도, 인접한 미국보다는 오히려 멀리 떨어진 한국과 훨씬 비슷한 대가족의 분위기도 여타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고아의 폴이 빅토리아,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남동생, 아버지에게 차례차례 호감을 느끼고 그들도 서서히 폴에게 다가와 ‘뿌리’를 만들어주는 과정은 마음을 찡하게 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남녀 주인공의 모습이 아니라, 꼭 구름이 펼쳐진 것 같은 포도농장의 모습, 그리고 술에 취한 안소니 퀸이 Amore란 사랑 노래를 가르쳐주며 역시 술에 취한 키아누 리브스를 손자처럼 쓰다듬고 끌어안는 장면인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가을이라서 그런지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너무 보고 싶다. 최근 극장가에 걸린 영화들은 다들 내용과 구성은 호평을 받고, 컴퓨터 그래픽과 화면은 혁신적이며,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다. 이렇게 좋은 영화들이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쏟아져 나오기도 힘들 것 같은데 이상하게 선뜻 보기가 망설여졌다. 계절 탓인가, 비록 살짝 현실과 어긋나도 남녀주인공이 여러 오해와 편견을 딛고 결국 해피엔딩을 맞는 그 뻔한 영화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이 영화는 그런 나에게 딱 맞는 영화였다.

 

현실에서는 과연 이런 해피엔딩이 가능할까. 나에게는 어떨까.

A man in search.

A woman in need.

A story of fate.

A walk in the clouds.

영화 포스터의 카피대로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상대가 간절히 찾고 있는 그 순간, 운명을 만날 수 있을지. 평생 그런 순간이 언젠가는 오는지. 곧 만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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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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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비밀>, <백야행>, <용의자 X의 헌신>등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미스터리 소설의 대가입니다. 저는 <백야행>은 이름만 들어봤고, <비밀>은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영화만 알고 있고, <용의자 X의 헌신>은 읽어봤습니다. (사실 그의 소설 중 읽어 본 것은 이것 밖에는 없네요.^^;;)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용의자 X의 헌신>은 처음부터 범인과, 범인이 아닌 사람을 분명하게 노출시킨 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수많은 용의자 중 알리바이와 동기를 바탕으로 점점 범인을 좁혀나가는 것이 추리 소설의 핵심이라고 볼 때,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이기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최소한 그런 노력을 한) 소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당시 읽으면서 중반을 넘어서고 나서 살짝 지겨워진 부분도 있었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전개와 작가의 필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6년 나오키 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아마도 작가에게는 도전이고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자신감 없이는 함부로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명탐정의 규칙>은 1996년 출간되어 일본 추리 소설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합니다. <용의자...>보다 무려 10년 전에 스스로 몸담고 있는 분야를 낱낱이 까발렸던 거죠. 아마도 이 때 이미 작가는 각오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추리 소설을 아예 쓰지 않던가, 아니면 신선한 소재, 새로운 전개의 추리 소설을 쓰던가... 이 소설은 독자에게 쓰는 일종의 고해 성사이자, 반성문이며, 다시는 이 소설을 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작가 마음속의 배수진이기도 합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제목만 보고도 끌릴 듯합니다. ‘명탐정의 규칙’이라... 정확히 이 책의 ‘추리 소설의 규칙’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명석하지만 치기 어린 명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 지방 경찰 본부 수사과에 근무하는 닳고 닳은 경감 오가와라 반조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총 12개의 장이 있는데, 각각의 장은 추리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패턴, 이른바 ‘법칙’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밀실 선언 ― 트릭의 제왕

2. Who done it ― 의외의 범인

3. 폐쇄된 산장의 비밀 ―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

4. 최후의 한마디 ― 다잉(Dying) 메시지

5. 알리바이 선언 ― 시간표의 트릭

6. 여사원 온천 살인 사건 ― 두 시간 드라마의 미학

7. 절단의 이유 ― 토막살인

8. 사라진 범인 ― 트릭의 정체

9.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 동요 살인

10. 내가 그를 죽였다 ― 불공정 미스터리

11. 목 없는 시체 ― 해서는 안 될 말

12. 흉기 이야기 ― 살인의 도구

 

얼핏 보면 전형적인 추리 소설 같습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서 앞의 두 개의 단계까지는 실제로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반전이 등장하며 여태껏 나온 추리 소설의 상투성과 부자연스러움이 얼마나 억지스러운지 두 주인공의 입을 빌려 조목조목 비판해내며, 결말에서는 처음에 제시된 그 ‘법칙’을 뒤집어 때로는 어이없고, 때로는 허탈하고, 때로는 기발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프롤로그: 오와기리 반조는 유능한 경감이지만 덴카이치 시리즈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삽질하는 자신의 캐릭터를 싫어함.

"명탐정 소설에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펴는 형사가 반드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빈번히 등장한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진범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않아도 되고, 사건 해결의 열쇠를 놓쳐도 아무 문제없으며, ……하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힘든 배역도 없다. 우선 범인을 알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는 절대로 범인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진범을 밝혀내는 것은 주인공인 덴카이치 탐정의 역할이므로, 그가 멋지게 피날레를 장식하기 전에 내가 사건을 해결해 버리면 주인공은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만다. 무엇보다, 탐정 소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사건 해결의 핵심이 되는 열쇠를 번번이 놓쳐야 한다. 용의자를 적당히 의심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운 좋게, 혹은 우연이라도 ‘제대로 된’ 의심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1. 밀실선언 - 트릭의 제왕: 트릭의 제왕인 만큼 그만 좀 하라는 식의 불만 토로.

폐쇄된 방에서 일어나는 정통파 살인사건에서 무인도를 무대로 한 사건, 우주공간에서의 사건 (아직 그런 사건을 접한 일은 없지만) 등 다양한 패턴이 있을 수 있다.이들은 모두 "밀실"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그런 종류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명탐정은 '밀실선언'을 하고 우리 조연들은 놀라는 시늉을 한다.실은 전혀 놀랍지 않은데도 말이다.똑같은 마술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보는 기분이다.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마술의 속임수를 공개하는 방식 정도랄까.하지만 공개방식이 아무리 달라도 감동은 받지 않는다.미녀를 공중에 띄우는 마술은 비록 속이는 데 사용된 기술이 다를지라도 거듭되면 관중이 지루해한다.그런데도 밀실은 반성도 없이 나오고 또 나온다. 도대체 왜 그럴까.독자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다."여러분, 정말로 밀실 살인 사건이 재미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밀실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눈이었던 것입니다. 눈의 무게로 집이 휘어지고 그 결과 현관문이 열리지 않게 됐습니다. 범인은 그 점을 계산해 뒀던 것입니다.그리고 마치 막대기가 문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막대기를 문 안쪽에 놓아두었습니다. 이것이, 이것이 이번 밀실사건의 진상입니다."나는 과소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 이번에도 자네에게 깨끗이 졌어."나는 순경 할아버지를 팔꿈치로 건드렸다.당신도 말을 좀 하라는 신호였다."저..쉽게 말해 집이 뒤틀려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말이지요?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해서는 안 될, 금기의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요?"

 

2. Who done it - 의외의 범인: 어처구니없는 범인을 내세우다 보면 독자에게 몰매예약.

 

3. 폐쇄된 산장의 비밀 -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 장소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민망함을 벗어날 수 없음.

“아무래도 이번 사건은 그 패턴이 될 것 같네요.”

“그럴 거야. 이 작가는 그 패턴을 꽤나 좋아하지. 하지만 말이야……”

나는 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지 않나?”

“그건 문제없을 겁니다. 모두가 이곳에 묵는 건 아닐 테니까요. 아마 대부분 돌아가고 일고여덟 명 정도 남겠지요.”

“그렇다면 괜찮지만.”

“틀림없어요. 이 작가의 능력을 감안할 때 등장인물이 그 이상 되면 인물 설정을 제대로 못해 내거든요.”

“맞아, 맞아.”

 

미스터리 세계에서 외딴섬이나 폐쇄된 산장에서의 살인 사건은 그리 드문 패턴이 아니다. 그것은 이런 패턴을 환영하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입장에서는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좀 더 연구하고 더 고민해서 쓰면 안 될까?“

산장은 언제나 폭설로 고립되고, 외딴섬의 별장도 폭풍우로 늘 고립된다. 이런 식이라면 독자들도 곧 질려버릴 것이 뻔하다. 등장인물 역시 진절머리 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립시키면 용의자를 소수로 한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내 독백을 옆에서 들었는지 덴카이치가 끼어들었다.

“외부인의 범행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 불가능한 범죄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선명히 어필할 수 있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고립이라는 패턴은 작가 편의에 의해 자주 채택되는 거지요.”

 

"이번 소설은 집 자체에 조작이 있었다는 패턴이었군..하지만....""뭡니까!"덴카이치가 따지듯 물었다."아니 그게..."이렇게 살인 한 건 하려고 거금을 처발라 가며 케이블카로 움직이는 저택을 만드는 것보다는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지만은 그건 이런 본격 추리 소설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4. 최후의 한 마디 - 다잉(Dying) 메시지: 죽는 순간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죽다니 어이없음.

“경감님, 이번에는 그거 같네요.”

“그래. 그거야. 흔히 말하는 ‘다잉(Dying) 메시지’라고.”

“골치 아프지요. 그 패턴은.”

“그렇지 뭐.”

나도 얼굴을 찌푸린 채 동의했다.

“작가 입장에서는 아주 쉽게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고, 서스펜스를 높여주는 효과도 있으니 편리하겠지.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스토리 전개가 부자연스러워져.”

“당연히 부자연스럽죠. 도대체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메시지 따위를 남길 여유가 있겠어요?”

“자, 자, 우린 그저 참고 또 참으며 인내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어. 현실 세계에서도 죽기 직전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리려는 피해자가 한두 명 정도는 있을 수 있잖아.”

“그런 것까지는 봐줄 수 있어요. 하지만 왜 죽기 직전에 남기는 메시지가 암호여야 하지요? 범인의 이름을 정확히 써 놓으면 안 되나요?”

 

덴카이치가 쓴 것은 왕척직심이란 네 글자였다."오타쿠씨는 여기서 왕척까지 썼을때 공격을 받았습니다.즉 휴, 왕이라고 쓴것이 아니라, 왕의 왼쪽 옆에 카나카나의 이를 택이라고 쓴 것이 아니라 척의 왼쪽 옆에 카타카나의 시를 써 버린 것입니다.""그렇다면 오타쿠씨가 남긴 메시지는...""색지에 적힌 글자와 깔개의 글자를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죽음을 눈앞에 둔 겐이치로의 마지막 메시지였던 것입니다."'의사불러'

 

5. 알리바이 선언 - 시간표 트릭: 밝힐 수 없는 알리바이 법칙은 애써서 밝힐 필요 없음.

 

6. 여사원 온천 살인 사건 - 두 시간 드라마의 미학: 주부의 시선을 잡기위해 주인공의 성별이 바꿔 버림.

"아니 모르세요? 두 시간짜리 드라마는 대개 주인공이 여자예요. 시청자 대부분이 주부여서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면 시청률이 오르질 않아요."

"사실 경감님은 이번엔 그저 그런 조연이 아니에요. 주인공인 여자 대탐정, 즉 이 덴카이치 아리사와 연인관계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설정이에요. 그래서 tv를 보는 주부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진진해한답니다."

"드라마가 절반 정도 지났어요. 아홉시부터 시작하는 드라마니까 열 시쯤이면 채널을 돌릴 시간이에요. 제 목욕장면으로 시청자들을 잡아야 해요!"시청자 대부분이 여자라면서 이런 야한 장면을 내보내다니...정말로 tv업계는 의혹투성이다. "왜, 아 도대체 왜, 왜 이런 곳에 잠수함이 있는 거야."바다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처음에는 자동차에 치여 는 설정이었어요. 하지만 자동차는 안 된다며 내용을 바꿔버렸지요."이 두 시간짜리 드라마의 스폰서가 자동차업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바다를 향해 합장했다.

 

7. 절단의 이유 - 토막살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결말.

 

8. 사라진 범인 - 트릭의 정체: 눈 가리고 야웅~ 누구게.?!

그런 덴카이치를 보며 나는 본격 추리소설의 탐정도 참 고생이 많다는 걸 절감했다.이런 경우에서조차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만약 기베 야아치로가 나에게 "변장한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한마디로 끝내 줬을 것이다."어떻게 알았냐고? 그거야 변장한 당신 모습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지,ㅡ 이 바보야!"밥맛 떨어지게 여장을 한 중년 남자에게 너무도 진지하게 논리적인 설명을 계속하는덴카이치를 바라보면서 나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9.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 동요 살인: 쉽게 누군가를 죽일 수 없음. 의미 따윈 필요 없다.

괴로운 사람은 역시 덴카이치일 것이다. 명탐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지만, 피해자가 여덟 명이 될 때까지 사건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아직 사건을 해결해서는 안 될 시점에 있다. 도중에 범인을 잡았다가는 작가가 가사를 10절까지 준비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동요 살인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연쇄 살인을 다룬 본격 추리 소설에서도 곧잘 있는 일이다. 너무 빨리 해결해 버리면 스토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10. 내가 그를 죽였다 - 불공정 미스터리: 어떤 이도 범인이 될 수 있음을 명심 할 것.

“마침내 해 버리고 말았어. ‘내’가 범인이라는 흔하디흔한 패턴. 아무나 만들 수 있는 의외성. 멋도 없고 기교도 없는.”

 

11. 목 없는 시체 - 해서는 안 될 말: 작위적 설정의 최고봉 !!

 

12. 흉기 이야기 - 살인의 도구: 하나의 시체. 세 개의 살인도구

 

에필로그: 탐정 시리즈의 정석. 몇 명의 탐정이 지인의 모임에 초대되고 한 명씩 탐정들이 죽는다. 과연 그는 남을 것인가?

 

명탐정의 최후 - 마지막 선택

 

앞서 소개된 목차에 새롭게 설명을 달아봤습니다. 감이 잡히시는지...? 기존의 추리 소설에 대한 통렬한 야유, 상투적 사건해결 패턴의 비틀기, 잔인하다 싶을 만큼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에게 마지막까지 칼을 꽂는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명탐정의 최후’를 읽고 나면 작가의 이미지는 숨을 끊어 놓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칼을 휘두르는 백정이나 망나니의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맨 뒤 작가 해설에서 이 작품이 작가 자신에게 전환점이 되었듯이, 다른 추리 소설 작가들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사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습니다. 장르 자체의 대중화, 범죄-해결사-범인 등 도식화될 수밖에 없는 추리 소설에서 ‘그나마’ ‘달라지기 위해’ 몸부림칠 많은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어찌되었든 많은 독자들은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니까요. 특히 이 책을 선택할 정도라면 나름대로 꽤나 추리 소설을 읽어봤다고 자부하는 독자들일 텐데 우리 입장에서도 추리 소설을 ‘진지하게’ 접근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대목에서만큼은 깔깔거릴 수 있어도 아래 부분만큼은 독자도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힌트만으로는 결코 진실을 밝힐 수 없는 것이 이번 소설의 구조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처럼 논리적으로 범인을 찾아내려는 독자란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대부분 직감과 경험으로 범인을 간파해 낸다. 때로는 “나, 소설을 중간쯤 읽다가 범인이 누군지 알아 버렸어.”라고 말하는 독자가 있다. 하지만 추리를 통해서 알아낸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녀석이야!’라고 적당히 꿰맞췄는데 결과적으로 들어맞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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