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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 2판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별 다섯 개를 준 것은, 책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최근 들어 이렇게 나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유다.
김영하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처음 접한 김영하의 소설은 ‘오빠가 돌아왔다’였다. 가부장제의 파괴, 그 현실을 시종일관 냉소적으로, 하지만 궁극에는 일말의 따스함도 보여주었던 그 소설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땐 내가 대학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아무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등 김영하의 책(의 제목만)을 볼 때마다 한순간 서늘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늘 궁금하면서도 선뜻 읽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일지도. 일껏 가벼워 보이면서도 촐랑대면서도 늘 진지했고 때로는 섬뜩하기까지 했던 그의 소설에 대한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내 감상 때문일 수도 있다.
퀴즈쇼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좀 있다가 나왔다. (표지만) 하도 많이 보아서 새로 나온 표지의 책을 보았을 때 딴 책인지 알았더랬다. 둘 중 굳이 옛날 버전을 택한 것은 작가의 말, 그리고 해설 때문이었다. 그만큼 김영하의 소설은 마냥 재미로만 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꽤 깊게 있었나보다, 몇 년 동안.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스물일곱, 대학원을 졸업했다. 학점도 나쁘지 않고, 영어실력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취업 준비생이다. 고아에, 땡전 한 푼 없이 창도 없는 고시원 쪽방에 사는 그는 편의점 알바도 때려치운다.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인 그는 “토익점수는 세계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다.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독서량도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지만 그는 백수다. 실업자다.
미치겠다. 이거 바로 내 얘기 아닌가.
비록 나는 부모님도 계시고 부모님과 함께 부모님 집에서 살고 얘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이 책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건 전부 내가 늘 하던 이야기였다. ‘80년대에 태어나 컬러 TV와 프로야구를 벗 삼아 자랐고 풍요의 90년대에 학교를 다니고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2002년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는 걸 목격’한 나는, ‘역사상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타고난 코스모폴리탄으로 자랐’기에 ‘이전 세대에 비하자면 거의 슈퍼맨’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바로 내가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닌’ 것이다.
그런데 이걸 활자로 읽으면서 왜 내 스스로 어이가 없어지는 것일까.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역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맘을 이렇게 알아주니 고마운 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왜 주인공이 찌질해 보이는 걸까. 그리고 그 찌질한 주인공에 나를 겹쳐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걸까.
뭐지? 이 더러운 기분은? 차라리 현실에 패배해 목을 맸던 ‘옆방녀’가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면 눈물이 났을지도. 그런데 ‘이러니 저러니 멋진 말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기를 원하고, 자존심 조금 상한다고 돈도 안 받고 편의점은 제 발로 나오고 그 자존심 때문에 ‘옆방녀’에게 돈을 꾸며 “그깟 사 만원” “고작 십 만원” 이런 소리를 뱉고 있다. 누가 봐도 쥐뿔도 없으면서 눈만 높아 누가 조금이라도 자길 무시하면 못 견디는 요즘 아이 아닌가. 왜 같은 세대인 나에게조차도 비호감으로 보이는 이런 인물을 내세워 김영하는 뭘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젊은 세대에 대한 연민? 감상? 비판? 조롱? 기성세대임에 틀림없을, 해설을 쓴 교수도, 역시 80년생 주인공보다 정확히 12년 먼저 태어난 김영하도 어쩔 수 없이 ‘기성세대의 눈으로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도 아니면, 올해로 스물일곱인 내가, 이미 서른을 넘긴 80년생에게 공감을 못해서인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까지 끝끝내 희망은 한 건더기도 건져낼 수 없었다. 아무리 국자를 휘저어봐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간 물만 보일 뿐이다. 이제 서른셋이 되었을, 6년 전의 스물일곱 청년은 책 처음 시작에서 크게 변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어쩌라고? 주인공 너도 안 변하고, 그렇다고 사회에 대해 깊은 성찰이 담긴 것도 아니고, 나는 요 몇 달 동안 요렇게 조렇게 방황했느니, 이게 뭐 어쩌라는 소리인지? 그러니까 너는 그냥 너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잖아. 만약 네가 이 사회 구조에 어떻게든 너를 끼워 맞췄다면, 너는 ‘인생에는 더 높은 차원의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느니 ‘그냥 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싶’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시민으로 너의 처지에 안주하면 살았겠지.
물론 대학 입학 후 이 젊은이가 7년간 어떻게 변화해 왔을지가 생략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이런 비판은 가혹할지도 모른다. 패기 넘치고 자신만만했던 스무 살이 패배주의로 압사된 것 같은 스물일곱이 되기에 7년이라는 세월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래도, 올해 스물일곱이 된 나는 이런 소설은 더 읽고 싶지가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에 공감한다는 것은 끔찍하다. 싫다. 거부하고 싶다. 몰라, 나도 몰랐던 나의 속물적이고 이면적인 모습을 책을 통해 주인공으로부터 발견하고 거북했을 수도 있고, 누가 뭐래도 난 진짜 노력하고 있다고, 얘처럼 이렇게 나약하게 자포자기하는 애의 푸념과 나의 호소를 한 범주에 묶지 말라는 애원일 수도 있고.
제일 짜증나는 건 자기 서재와 침실이 별개의 방으로 구분된, 미국 동부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개인 배를 몇 채 가지고 있으며 딸에게 승마용 말을 선물해 주는 아버지를 둘 정도의 여자아이가 너는 ‘부모가 없어도 지금 이렇게 멋진 사람’이라고 속삭이며 ‘서로의 영혼으로 떠나는 이런 모험마저 없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무의미하지 않을까?’라는 문장을 쓴 너는 ‘속물이 아니라’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맑은 눈을 가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이런 플롯, 어디서 봤더라? 김영하 또래의 여성 작가가 쓴 일인칭 여자 주인공 시점에서 주인공 여자는 꼭 초반부에 이른바 속물적이고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남자와 헤어지고 이렇게도 몽상적이며 순수하고 영혼을 읽어주는 남자를 만나더라. 한결같이 그 남자는 부자에 나름의 아픔이 있으며 망설이는 여자 주인공에게 오히려 적극적이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기도 한다. 어쩜 남녀만 뒤바뀌었을 뿐 이 구도는 그대로이니. 아무리 젊고 그렇기에 사랑이 중하다지만 너네는 너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 꼭 너네에게 “잘 될 거야. 다 잘 될 거야”라고 이야기해 주는 누군가가 없다면 너네는 혼자서 결심도 못하고 힘도 못 내니? 아니면 거꾸로 내가 그 구원자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거야? 한심한 내가, 나보다 더 비루한 누군가에게 살고 싶어지고 살게 하는 무언가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거야? 아님 이 정도로 나약한, 상처받기 쉬운 젊음을 김영하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뭔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까. 놓친 게 있는 걸까.
차라리 주인공이 부자 여자를 작정하고 잡을 작정으로 덤볐다면, 흔한 막장 드라마가 되었을지언정 오히려 속 시원하고 통쾌했을 거다. 일체의 물질적인 것, 거부하겠다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도, 차라리 그 체제에 편입해버리겠다는 발악도, 고차원적인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넌 그냥 너가 싫은 거고, 그저 편한 게 좋은 거고, 차마 맞설 용기도 없는 거고, 그냥 너 자신을 그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거짓말처럼 짠 하고 나타나기를 바라는 거 아니니, 너보다 훨씬 더 우월한, 너를 거기에서 건져내 줄 수도 있고 같이 있는 동안은 최소한 품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유희를 할 수 있는. 이건 대체 남자 신데렐라 콤플렉스니 아니면 온달 콤플렉스니. 아니면 도저히 있는 그대로 소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꼬인 거야? 정말 김영하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