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속의 산책 - [할인행사]
알폰소 아라우 감독, 키아누 리브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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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군인 폴 서튼은 이상주의자이자 낙천주의자이다. 금요일에 만난 여자와 토요일에 결혼하고, 월요일에 전장으로 떠나 4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을 때 세상은 그가 생각하고 그리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변해 있었다.

 

폴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전에 했었던 초콜릿 장사를 다시 나가게 된다. 장사를 위해 집을 떠난 폴은 기차 안에서 아름다운 빅토리아를 만난다. 유학 중 미혼모가 되었고 엄격한 아버지를 두려워한 나머지 집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딱한 사정에 폴은 하루만 남편 노릇을 해주기로 하고 함께 빅토리아의 집으로 향한다.

부모의 승낙 없이 결혼한 딸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고, 하루만 남편 노릇을 하려던 폴은 가여운 빅토리아를 두고 떠날 수 없게 된다. 거기에 빅토리아 할아버지의 만류까지 더해져 하루하루 출발을 미루게 된다.

멕시코계 미국인인 빅토리아의 집은 대가족이 어울려 사는 전형적인 멕시코 가정으로 포도농장을 하고 있었다. 1년 중 가장 바쁜 포도 수확철에 빅토리아의 가족과 함께 농장 일에 참여하면서 폴은 서서히 다른 식구들에게 가족으로 인정받게 된다.

고아인 자신을 마음으로 품어주는 빅토리아의 가족들과 아름답고 풍요로운 포도농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폴은 차츰 빅토리아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이미 결혼한 몸, 죄책감으로 빅토리아와 그녀의 가족을 떠나 아내에게 돌아간다.

아내에게 돌아왔지만 아내는 벌써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 상태로 폴에게 결혼을 무효로 하자고 제안한다. 성급하고 경솔했던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난 폴은 다시 빅토리아를 찾아 포도 농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남편도 없이 임신한 딸의 거짓말을 알게 되고 시름에 젖어있던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폴을 보고 화를 내다 램프를 농장에 던져 버리고, 화재가 발생하여 농장은 전부 불타버리고 만다.

망연자실한 가족들.

이때 폴은 조상들이 가져온 포도나무의 자손들이 간직된 곳에서 속이 타지 않은 포도나무를 발견하게 되고, 다시 가족들은 희망을 품게 된다.

 

당시 참전을 앞둔 군인들은 급하게 만난 여자와 결혼하고 바로 전장으로 나가는 게 일종의 대세였던 모양인가? 단순히 바람을 피웠다고 폴의 아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많은 것을 겪고 생각하면서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한 폴이, 매일같이 자신의 경험과 느낌, 생각들을 편지로 써서 아내에게 보냈지만 아내는 편지를 읽고도 감동하지 않는다. “정원이 있는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강아지와 노는” 가정을 꿈꾼다는 폴의 말을 빅토리아는 인상 깊게 듣지만 폴의 아내는 “나는 강아지를 싫어한다”고 대꾸할 뿐이다. 이 정도라면 폴의 편지를 매번 읽는 것도 아내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절대 결혼하지 않았을 두 사람이다. 그건 폴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다시 집에 돌아갔을 때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도 조금도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그저 어안이 벙벙해하다가 빅토리아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고 미소 짓는 걸 보니. 고아로 자란 폴에게 가족이란 그의 이상이고, 희망이고, 목표이고, 꿈이 아니었을까. 그 이상향에 억지로 한 여자를 끌어다 놓았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그 소망에 관심도 없는 여자를. 철없던 시절에.

 

아마 빅토리아도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임신 이후의 모습만 나오지만 이전에는 막연히 가족을 벗어나고 싶고, 단순히 고향을 떠나고 싶고, 부잣집 아가씨 특유의 발랄하지만 구김이 없는 아가씨였겠지. 자신이 곧 엄마가 된다는 자각을 하면서 서서히 강인해졌을 것이고 눈빛도 깊어졌겠지만.

 

곤경에 처한 여자, 순전히 선의로 그를 도와주려는 남자, 위장결혼, 그리고 진짜 사랑. 1995년 할리우드에서뿐만 아니라 2011년의 한국 안방에서까지 되풀이되는 이 스토리가 평범하지 않게 보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아마도 외모의 출중함이 가장 절정이었을 시기의 키아누 리브스의 개인적인 매력, 남미 출신 특유의 생명력과 발랄함을 발산하는 여주인공, 그리고 등장 시간으로는 분명히 조연이지만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명배우 안소니 퀸의 연기. 무엇보다도 영화감독이나 제작자 등 영화 스태프 상당수가 남미 출신이라서 그런지 정말 ‘구름’속을 걷는 듯한 멕시코 이민자들의 포도농장 풍경도, 인접한 미국보다는 오히려 멀리 떨어진 한국과 훨씬 비슷한 대가족의 분위기도 여타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고아의 폴이 빅토리아,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남동생, 아버지에게 차례차례 호감을 느끼고 그들도 서서히 폴에게 다가와 ‘뿌리’를 만들어주는 과정은 마음을 찡하게 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남녀 주인공의 모습이 아니라, 꼭 구름이 펼쳐진 것 같은 포도농장의 모습, 그리고 술에 취한 안소니 퀸이 Amore란 사랑 노래를 가르쳐주며 역시 술에 취한 키아누 리브스를 손자처럼 쓰다듬고 끌어안는 장면인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가을이라서 그런지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너무 보고 싶다. 최근 극장가에 걸린 영화들은 다들 내용과 구성은 호평을 받고, 컴퓨터 그래픽과 화면은 혁신적이며,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다. 이렇게 좋은 영화들이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쏟아져 나오기도 힘들 것 같은데 이상하게 선뜻 보기가 망설여졌다. 계절 탓인가, 비록 살짝 현실과 어긋나도 남녀주인공이 여러 오해와 편견을 딛고 결국 해피엔딩을 맞는 그 뻔한 영화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이 영화는 그런 나에게 딱 맞는 영화였다.

 

현실에서는 과연 이런 해피엔딩이 가능할까. 나에게는 어떨까.

A man in search.

A woman in need.

A story of fate.

A walk in the clouds.

영화 포스터의 카피대로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상대가 간절히 찾고 있는 그 순간, 운명을 만날 수 있을지. 평생 그런 순간이 언젠가는 오는지. 곧 만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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