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처음 상담을 시작한 것은 이 근처 아이들과의 말장난 때문이었지요. 나미야라는 우리 잡화점 이름을 짖궂게 '나야미, 나야미'하면서 놀리더라고요. 간판에 '상품 주문 가능. 상담해드립니다'라고 써 있는데, 아이들이 그럼 나야미(고민) 상담도 해주느냐고 자꾸 묻는 거예요. 그래서 그야 물론이다, 어떤 것이든 다 받아주겠다, 라고 했더니 정말로 아이들이 고민을 상담하겠다고 찾아오더군요. 우스갯소리처럼 시작된 일이라서 그런지 처음에는 장난기 가득한 상담만 들어왔어요. 공부는 하기 싫은데 성적표에는 모두 '수'를 받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라는 식이예요. 하지만 나도 고집이 있는지라 그런 상담에도 진지하게 답을 써서 벽에 붙여줬죠. 그랬더니 차츰 진지한 내용이 많아지더군요. 아버지 어머니가 자꾸 싸워서 힘들다든가, 하는 것이었어요. 나중에는 상담 내용을 가게 앞 셔터의 우편함에 넣도록 했습니다. 답장은 가게 뒤쪽 출입문에 달린 목제 우유 상자에 넣어줍니다. 그러면 익명으로 상담하려는 사람들도 마음 편히 편지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랬더니 언제부터인지 어른들도 고민거리를 편지로 써서 넣어주더라고요. 나 같은 평범한 노인네한테서 상담을 해봤자 무슨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만, 어떻든 내 나름대로 열심히 궁리해서 답장을 써드리고 있어요."

 

"해코지가 됐든 못된 장난질이 됐든 나미야 잡화점에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다른 상담자들과 근본적으로는 똑같아.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뚫렸고 거기서 중요한 뭔가가 쏟아져 나온 거야. 증거를 대볼까? 그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반드시 답장을 받으러 찾아와. 우유 상자 안을 들여다보러 온단 말이야. 자신이 보낸 편지에 나미야 영감이 어떤 답장을 해줄지 너무 궁금한 거야. 생각 좀 해봐라. 설령 엉터리 같은 내용이라도 서른 통이나 이 궁리 저 궁리 해가며 편지를 써 보낼 때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니. 그런 수고를 하고서도 답장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없어. 그래서 내가 답장을 써주려는 거야. 물론 착실히 답을 내려줘야지. 인간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

 

하지만 영상에서 감지되는 것은 있었다. 마음이 뿔뿔히 흩어졌다는 것이다. 아무도 직접 타투거나 하지는 않는다. 연주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일단 네 사람은 눈앞에 떨어진 과제를 해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거기서 아무것도 창조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모두들 이미 알고 있다.......

이게 뭔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도 다르다. 멤버들끼리 제대로 토론이 이루어지는 일도 없고 대화는 번번이 어긋난다. 그들의 입에서는 불만과 미움, 그리고 차가운 미소가 흘러나올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끊기는 것은 뭔가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아니,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이미 단절된 뒤에 생겨난 것, 나중에 억지로 갖다 붙인 변명 같은 게 아닐까. 마음이 이어져 있다면 인연이 끊길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어떻게든 회복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인연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몰하는 배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네 명의 멤버들은 비틀스를 구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잔을 내려놓고 고스케는 화면을 응시했다. 그의 인생을 바꿔버린 영화였다. 그것을 보고 인간의 마음을 이어주는 끈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를 통감했었다.

하지만.......

비디오 영상 속의 비틀스는 고스케의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옛날에 영화관에서 봤을 때는 그들의 마음이 뿔뿔히 흩어져 있고 연주도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 것처럼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바라보니 그때와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네 명의 멤버는 열정적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설령 해체를 앞두고 있더라도 넷이서 연주할 때만은 예전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관에서 봤을 때 지독한 연주라고 느꼈던 것은 고스케의 마음 상태가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작품을 쓸 때, 어린 시절에 책 읽기를 싫어했던 나 자신을 독자로 상정하고, 그런 내가 중간에 내던지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한다.'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소설, 그러면서도 삶의 심오한 기척 또한 놓치지 않는 작품은 세상 모든 소설가의 꿈이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꿈을 상당 부분 이루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02-23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휴 마지막인 어제 지인이 보내온 미술관 티켓. 린다 메카트니 사진전.
비틀즈의 멤버 폴 메카트니, 그의 부인입니다.패밀리 라이프 라는 주제를 시작으로 해서 1층부터 4층에 이르기까지
물론. 그녀의 사진만 있는건 아니었지만 확실한건 린다의 사진은 정확한 포커스를 가지고 뭘 바라봐야하는지..아주 정밀하게 세심한 시선으로 가족과 그의 동료들을 바라봐주었다.라는것.
저도 딸과 엄마와양부 와 함께 사진전을 관람했어요.
가슴 밑에서
뭔가 차갑기도하고 따듯한 것 같기도 한
그런게 찰랑 찰랑 차오르는 그런 걸 느꼈어요.
흔한 사진전 일 거라 생각한...오판.
다시 한번 더 보러 가자고 딸과 약속 했어요.
대림 미술관 인데 재관람이 가능하거든요.
역시나...나미야ㅡ의..기적은..계속 되는 지도 몰라요.
 
노트북
닉 카사베츠 감독, 라이언 고슬링 외 출연, 니콜라스 스파크스 / 워너브라더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첫 눈에 반한 사랑, 신분 차로 인한 결별, 긴 시간 동안 서로를 향한 그리움, 오해와 엇갈림, 그리고 돌고 돌아 결국엔 재회, 죽을 때까지 해피 엔딩.

 

진부할려고 해도 이렇게 진부할 수 밖에 없는 소재가 이토록 인기를 끈 것은

 

약간의 비틀림으로 인한 반전 아닌 반전, 그리고 영화 촬영 당시에만 하더라도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주인공 배우들의 호연과 매력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집중해서 보게 되고,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잔상이 남는다거나, 계속 반복해서 보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영화는 절대 아니다.

 

이런 저런 생각 없이 가볍게 보고 싶을 때.

 

주말 밤, 시간은 있는데 갑자기 문득 외롭다거나, 미래에 대한 실체 모를 불안에 휩싸이거나

뭐가 문제인지도 모를 문제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거나, 한 잠 자고 일어나면 싹 사라질 걱정 때문에 고민이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펑펑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을 때, 볼 만한 영화.

 

 

덧붙임.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동을 증폭시키는 뒷이야기는,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니콜라스 스팍스의 장인, 장모의 이야기라고 한다. 분명히 있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희박한 이야기, 누구나 마음 속으로는 꿈꾸지만, 그저 가슴에 묻어두고 가끔 꺼내 볼 경우가 훨씬 많은 그런 사랑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 남녀간의 사랑만큼 변하기 쉬운 게 어디 있을까. 살다 보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이렇게 평생을 살다간 사람들이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위로받고 싶고 격려받고 싶고 응원받고 싶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감동받는 것이 아닐까.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 ㅣ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이동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동진이라는 사람은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꼼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열심히 자기 분야에 매진하며 즉각적인 성공을 의식하지 말고 꾸준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경지에 오를 것이라는, 이 단순해보이지만 결코 평범해보이지 않는 사실을, 갈수록 믿기 어려웠는데 이동진을 보다 보면 그게 가능하기는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70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인간 이동진에 대한 존경심이 제일 크다고 할까. 한 명의 감독과 인터뷰하기 위해 그의 모든 작품을 전부 찾아본 것은 물론이고 모든 질문을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하는 그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연구했을지 노력이 감이 잡히지 않는다.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큰 회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부터 참신하고 깊이 있는 영화 기사로 유명했었고, 조직에 있을 때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가치를 올려 지금은 프리랜서 방송인이자 평론가, 작가로 자기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냈다.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경영학이나 자기 계발서에서 충분히 예시로 들 만한 사례인 것 같다.

 

감독과 문화부 기자 출신 평론가의 영화 대담이지만, 어려운 단어나 이해 안 가는 문장이 없이 잘 읽힌다. 그리고 인터뷰어의 정성에 감동한 탓인지, 감독들 또한 여타 인터뷰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속내를 많이 보여준다. 대중을 상대로 한 책이, 이렇게 깊이가 있고 전문적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여러모로 소장이 아깝지 않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오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떠올린 시이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전혀 사소하지 않고 간절한 당신에 대한 마음이 압축된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약력을 살펴보니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다. 아마도 황동규 시인의 이 시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직 나는 '끌림'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병률의 이름 석 자는 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읽지 않았던 것은, 일종의 반발심리랄까. 모두가 열광할 때 시류에 편승하기보다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떄까지 기다리겠다는 마음? '끌림'이 이병률 시인의 첫번째 여행기라면, 이 책은 두번째 여행기라 할 수 있겠다. 지금의 작가를 있게 한 첫번쨰 여행기가 어떤 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은 확실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모습을, 마치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일상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 누군가에 대한 그 마음이 정말 간절하지만 사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수많은 나라, 다양한 문화 속에서 먹고, 자고, 글을 썼던 시간들을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다루는 데에서 이 여행기가 특징이 있다. 어느 곳에는 어떤 명소가 있고, 거기를 가려면 어떤 교통편을 이용해야 경제적이며, 어떤 맛집과 어떤 문화 유적에 대한 구구절절한 소개가 아니라, 그저 잠시 일상을 떠나 몸도 마음도 가벼운 상태, 그 상태를 위한 최적의 방법으로 여행을 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지구 반대편,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야만 가능한 나라에서의 일들이 흥분되는 모험이라기보다는 편안한 주말 같은 느낌을 준다.

 

책을 읽다 보면 밑줄 치고 싶은 구절도 있고,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속된 말로 오글거린다고 느껴지는 구절도 있다. 아마도 한참 내가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 이 책을 읽으면 눈물날 정도로 반가웠으리라. 그 당시, 이런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위로를 받았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격언처럼, 그 시간 또한 지나가니, 외로움을 다룬 책을 절절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덤덤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슬플 때는 슬픈 음악을 듣고, 못 견디게 외로울 때는 외로움을 다룬 시를 읽으면 오히려 위로가 되듯이, 이 책 또한 그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또 슬픈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것 또한 바이오리듬처럼 시기를 타는 때라, 언제 읽느냐에 따라서 이 책으로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진폭이 차이가 날 수 있겠다. 몇 년 전의 나라면 별 다섯개를 줬겠지. 책도 사람도 타이밍이 있는 모양이다.

 

--------------------------------------------------------------------------

 

시간을 럭셔리하게 쓰는자,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나에게도 여행은 시간을 버리거나 투자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여행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게 있어 여행은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도착은 우리를 100년 전으로, 100년 후로 안내한다. 그러니까 나의 사치는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감히 시간을 사겠다는 모험인 것이다.

일상에서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게 시간이지만 여행을 떠나서의 시간은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준다. 사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 우리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 쪽이질 않은가.

 

여행의 많은 순간순간들을 극한 지경으로 몰다보면 그 안에서 선명한 쾌감을 만난다. 막막히 갈 곳도 없고 깊은 밤이 되어 눈 붙일 데가 마땅하지 않아도 그 상황 속에서 서성이다보면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그 무엇에 대한 애착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거지가 아니라 여행자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이미 멀리 떠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세상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태에 깊숙이 빠져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그 친구에게 사람들은 물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바꾸어놓았느냐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단지 세상의 조각에 불과했어. 나하고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겨우 그 사실을 알았고 그건 충격이었지. 다른 기후 속에서 생각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꿈을 살고 있었지. 나의 정반대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시간에 깨어나서 치열하게 뭔가를 붙들고 있었거든. 난 가능한한 세상의 모든 경우들을 만나볼 거야."

 

역시 축구의 왕국이라 그런지 어딜 가나 축구들을 하고 있다. 지갑 들고 다니듯 어디든 공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 같다. 땀을 식히려고 공터 나무 밑에 앉았는데 저기 건너편에서도 청년들이 열정적으로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경사가 너무 심해서 한쪽 편이 심하게 불리해 보인다. 저건 뭐지? 저래가지고 무슨 축구야?

한쪽 편은 속도를 줄일 수 없었고 또다른 편은 속도를 낼 수도 없는 데다 공조차도 사람 말을 듣지 않았다 경사진 공터에서의 축구는 아무리 봐도 엉터리였다. 헌데,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양편이 서로 방향을 바꿔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쩔쩔매던 상대가 이번에는 훨훨 날고 있었다.

전반과 후반, 경사진 길과 평평한 길.

우리 인생도 그 둘로 나뉘어져 있다.

 

빵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는 유난히 빵집에 집착한다. 지내는 동안 빵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데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곳일 때 빵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로인가. 흐린 날의 빵 굽는 향은 멀리 간다. 그 향을 맡은 공사장의 인부들도, 성당의 신부님도 하는 일 없이 기뻐지거나 괜히 빗방울이라도 후두둑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빵이 너무 커서 가슴팍에 안고 먹어야 하는 그루지아의 화덕 빵이나, 빵 굽는 냄새가 맡아지면 킁킁대며 빵집을 찾아야 하는 시리아의 골목 빵집, 맛이 얼마나 좋으면 한입을 베어 물고 걷다가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 먹을 수 없는 양의 크루아상을 사게 되는 파리의 빵가게. 세상의 빵 냄새에 홀려 동물이 되는 것이 나는 좋다. 사실 빵이야 여행지에서 이렇게도 먹고 저렇게도 먹는 거라서, 빵에 눈을 많이 얹어서 먹은 기억이나 말라비틀어진 방을 석탄기차 난로에 구워서 먹은 기억까지 합하자면 빵에 대한 내 취향은 동물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행기나 여행지의 숙소에서 작은 잼이나 버터가 나오면 하나씩 주머니에 넣어두는 끈적한 버릇까지 생겼다.

 

평범이란 말보다 큰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범한 것처럼 남에게 폐가 되지 않고 들썩이지 않고 점잖으며 순하고 착한 무엇이 또 있을까.

 

나는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그를 불러 내 앞에 앉혔다.

오늘 떠난다고, 여기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리투아니아의 '십자가 무덤'으로 기도를 하러 갈 거라 했다. 기도를 담은 어떤 물건이라도 좋으니 '십자가의 무덤'에, 너의 기도와 함께 내려놓고 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기도를 하면 어떤 식으로든 응답이 온다고 믿으면서 살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나무든, 철사든, 종이든 십자가를 만들면 어떨까? 작아도 되고, 뭐 커도 되고......."

두시가 되었다.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배웅을 하러 나온 수사님께 청년을 보고 가야 한다고 했더니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사람 말을 듣는 아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혹시 많은 돈을 준다면 모르지. 십자가를 만들어서 나왔을지도."

내가 느릿느릿 그 마을을 떠날 때가지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 불편한 게 아니라, 그와 어울리지 않는 나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그의 존재를 훼손시켰다는 기분이 들어 며칠이 괴로웠다.

 

당신이 맘에 든다. 내가 누군가를 맘에 들어한다는 것은 푸른 바다 밑, 심연 속으로 당신을 끌어내리고 싶어한다는 것. 그러면 당신은 눈을 뜨고 나를 보는지 아니면 두려움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마는지 실험하고 싶은것. 그러니까 다시 말해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내면서 옆자리에 앉은 당신에게 키스를 하고자 했을 때 당신이 나를 따라 눈을 감는지 아니면 두려워 정면을 보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다.

(아... 이 부분은 책 전체에서 가장 오글거리는 부분이었다. 감정의 과잉 때문에 읽는 내가 감당하기가 힘든?)

 

몸이 안 좋아 목욕을 하다가 졸도한 노인과, 직접 내 손으로 입히면서 속사정까지 알게 된 그의 남루한 옷가지들과, 대저택의 장미정원. 이 셋의 서늘한 하모니 가운데 어느 하나도 커지거나 작아지면 안 됩니다. 옷이 깨끗해도 안 되고, 장미 정원이 작아도 안 되고, 또 몸이 건강한 노인이어도 안 됩니다. 아마도 그 가운데 하나라도 내가 본 그대로가 아니었다면 나에게 이토록 강렬한 불꽃처럼 기억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완벽히 혼자인 노인에게 그토록 완벽한 장미정원이 있으니 다행입니다.

 

나이만 있고, 나이 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라스트베가스
존 터틀타웁 감독, 마이클 더글라스 외 출연 / UEK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두 번 볼 영화는 아니지만,

 

한 번 볼 때 평타 이상의 즐거움은 확실히 주는 영화.

 

잔잔한 재미, 훈훈한 반전, 유쾌한 감동.

 

 

출연진은 화려하다. 마이클 더글라스, 로버트 드니로, 모건 프리먼, 케빈 클라인. 대체 이 대단한 배우들을 데리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까 궁금했는데 오히려 시나리오가 힘을 쏙 빼서 그저 편안하게 웃을 수 있는 영화다. 네 할배들이 대체 이게 연기인지 실제인지 헷갈릴 정도로 연기가 편안하고 여유가 넘쳐서 보는 내내 미소 머금고 봤다. 누군가는 뻔한 영화라면 볼멘소리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뻔하고 예측 가능한 스토리를 가지고 지루할 틈을 주지 않다니 역시 명배우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 보고 난 후에 든 의문점. 10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듯이, 어느 한 분야에 오랜 시간 공을 들이면 일정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알겠다. 몇십 년 동안 연기를 했던 저들처럼, 나이가 들면 어느 한 분야에서 자연히 저 위치까지 갈 수 있을까. 아, 물론 꾸준히 그 분야에서 젊은 시절부터 노력한다는 가정 하에. 아니면 그것조차도,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