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시간 ㅣ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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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9년에 나온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의 후속 시리즈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책에는 한국의 영화감독 6명을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인터뷰한 내용이 실렸는데, 홍상수, 봉준호, 류승완, 유하, 임순례, 김태용 등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는 감독들이었다. ‘부메랑 인터뷰’는 그 형식이 상당히 독특한데, 인터뷰하는 그 감독의 영화 속 대사들에서 끌어낸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중 “이름이 뭐예요?”라는 대사를 빌려 홍상수 감독에게 영화 속 인물들의 작명 방식을 묻는 식이다.

 

내가 이동진의 첫번째 인터뷰집을 본 것이 올해이다.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2015년에 와서야 2009년 당시의 인터뷰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 사이의 5년 동안, 6명의 감독들은 어떻게 변모하였나를 따지면서 읽게 되었다는 것. 영화를 잘 보지 않는 나이지만, 그 사이에 각 감독들의 궤적을 살펴보면 여섯 명의 감독들이 모두 그 사이에 나름대로 진화를 하였다는 점. 다작으로 유명한 홍상수 감독의 경우, 그동안 내가 본 작품으로만 한정해도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 <우리 선희>, <자유의 언덕> 등 네 작품이나 되고, 봉준호 감독은 900만 관객을 돌파한 <설국열차>를 세상에 내놓았다. 류승완 감독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부당거래>를 선보였고, 다시 그의 필로그래피 사상 최다 관객을 동원한 <베를린>으로 700만명 고지를 밟았다. 유하 감독은 <하울링>과 <강남 1970>을 선보였고, 임순례 감독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과 <제보자> 등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 사이를 오가며 꾸준한 작업으로 단연 여성 영화인 중 단연 최고의 활약을 보였다. 김태용 감독은 바로 그 영화, <만추>로 평단의 호평과 함께 평생의 동반자까지 얻었다. 

 

그 사이에 모든 감독이 새롭게 영화를 찍었다. 누군가는 감독 경력 최고의 작품성을 평가받는 영화를 그 기간에 내놓기도 했고, 누군가는 감독 경력 최다관객작을 얻기도 했다. 향후 이 감독들이 또 어떻게 진화되어 있을지 생각하면 흐뭇할 일이다.

 

후속 시리즈인 이 책에서는 총 세 명의 한국 감독이 등장한다. 박찬욱, 최동훈, 이명세. 756쪽이었던 첫번째 책보다 100여쪽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다루는 감독의 수도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감독 한 명에게 해당된 페이지는 더 늘어난 셈이다. 두번째 인터뷰집인 이 책도 2년 반 전에 나온 책과 동일한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상대편에 앉아 있는 바로 그 감독이 만든 영화의 대사에서 질문을 가지고 온다. 감독들의 모든 작품을 순서대로 다시 보고 질문을 한다. 평균 10여 시간 동안 대답을 나눈다. 신작뿐만 아니라 데뷔작, 문제작 등 전작을 다루며 감독들의 삶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

 

인기리에 방송중인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동진은 초대 손님으로 작가가 나올 경우, 그의 소설 속 문장을 그대로 따와서 작가에게 질문을 한다. '적문직답'이라는 코너인데, 예를 들면 소설가 은희경에게 <태연한 인생>에서 나온 문장을 약간 변형하여 최근 젊은 작가들 중 쓸 내용이 고갈되면 여행을 다녀와서 거기에 대한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식이다. 아마도 순서상으로 이 책의 첫번째 시리즈가 나온 게 <빨간책방> 전일 테니까, 그 영향으로 만든 코너가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최동훈 감독을 좋아하고, 또 그의 모든 작품을 다 보았기 때문에 이 책이 좀 더 좋았던 이유는 있지만, 내용이 워낙 방대하여 중간에 종종 길을 잃고 멍해지곤 했다. 또한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터뷰하고 글을 쓰는 작가 본인이 지치지 않기 위하여, 영화 대사에서 질문을 따왔다는 방식은, 독자 입장에서는 중간에 갑자기 뚝뚝 맥이 끊기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번째 인터뷰집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첫번째 책을 보면서 작가에게 느꼈던 그 경외심이, 이 책에서는 더 증폭된다고 할까. 일회적인 일로 그치지 않고, 그 지난한 과정을 다시 기획하고 실행하여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첫번째 책과 두번째 책 사이에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첫번째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 2009년 6월 25일. 이 책의 초판 1쇄 발행날짜가 2013년 1월 10일. 초판 1쇄 인쇄가 2013년 12월 25일. 발행과 인쇄 사이에 1년 가까이 시간이 있었다는 것도 좀 의아한데 프롤로그에 작가가 밝힌 2년 6개월이라는 시간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이 추세라면 세번째 인터뷰 책은 2017년 쯤에야 나올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기에는 다룰만한 감독의 수가 적어서 성사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온다면 나는 당연히, 반드시 그 압도적인 양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읽을 테지만. 

평범한 사람이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드라마틱한 상황에 휩쓸리게 된 것 자체가 비슷해요. 저는 제가 영화 일을 하게 된 것부터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모진 실패의 세월을 보내게 된 것도 저로서는 참 이상한 일이라고 느꼈죠. 전 무난하게 살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다가 또 큰 성공도 했죠. 참으로 진폭이 큰 삶을 살게 됐는데, 이건 어렸을 때 예상했던 제 인생과 너무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상황 속에서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느끼는 혼란이 있는 거죠. 뭔가 자꾸 주저하거나 회피하려고 하고, 어떤 일이 닥치면 그냥 자연스럽게 상황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데,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으로 스스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러다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으로 나중에 판명이 나면 합리화를 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궤변에 가까운 논리를 끌어들여서까지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상현과 저의 공통점이죠. 실제 제 모습과 상현이 가장 비슷하다고 느꼈던 장면은 화장실에서 상반된 이야기로 하나의 결론을 끌어내려고 궤변을 늘어놓을 때예요.

저 역시 오랜 세월 고생했던 시절이 있었죠. 단지 흥행이 잘 안 되거나 작품에 대한 비평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영화 자체를 찍지 못하는 세월을 보내왔으니까요. 앞으로도 언제 또 그런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르고요. 언젠가 그런 상황이 오긴 올 텐데 말이죠. 과거에 대한 그런 기억과 미래에 대한 그런 전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분야 종사자로서 뜻이 맞고 일해본 경험에 의해 우정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더 친하고 그들과만 교유하고 그러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싶어요. 안 하려고 해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듯하구요. 그게 영화나 쇼 비즈니스 세계의 특성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일단은 서로가 워낙 까다로운 사람들이라서 맘에 맞는 상대를 만나 친해질 기회 자체가 적어요. 그러다 보니 맘에 맞고 유능하기까지한 사람을 만나면 오래도록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작동하는 듯해요. 그렇게 하면 이 좋은 시절이 오래갈 것 같은 마음이라고 할까요. 어떤 불안 같은 것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이 사람들 말고 다른 그룹에서 내가 통할까, 환영받을 수 있을까, 새로운 사람과 만나면 여태까지 이루어진 것들이 무너지지 않을까 싶은 불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위대한 영화의 경우에는 보면서 배우기도 하고 영감도 얻을 수 있는 반면, 보는 사람을 너무 위축시키고 좌절케 하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서적으로 꼭 좋지만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요즘도 저는 서울아트시네마에 자주 다니는데, 예를 들어 회고전에서 파졸리니의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같은 놈은 뭐 하러 영화 만드나` 싶어집니다. `저런 영화들이 이미 있었는데 뭘 더 하겠다고 고생하고 있나` 싶은 거죠. 그런데도 자꾸 또 보게 됩니다. 그건 한 명의 창작자로서 충전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한 명의 관객으로서 좋은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이동진_재능 없는 예술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박찬욱_아뇨, 그렇지 않아요.
이동진_그러면 재능이 없어도 충분히 직업적인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박찬욱_네, 그래요.
이동진_예술이 가장 평번한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라면, 영화라는 예술품을 만드실 때 감독님은 어떤 자세로 출발하십니까.
박찬욱_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직업인으로서의 자세입니다. 스스로가 예술가라는 생각보다는 영화감독을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면서 촬영 현장이 직장인 만큼 업무 환경을 쾌적하게 만들고 내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보는 거죠. 종종 실패하긴 하지만, 어쨌든 영화에 투자한 사람이 후회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해요. 남의 돈을 받아서 영화를 만들고, 또 돈을 받고 관객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자로서의 초소한의 직업윤리를 늘 생각합니다. 또한 제 사적인 생활이 이 직업과 너무 섞이지 않도록 조심하죠.

처음에는 감독이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어요. 감독이 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고, 제 성격 자체가 카리스마가 없어서 감독에 어울리는 성품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요. 그 대신 시나리오 작가가 되려고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체호프의 작품을 포함해서 단편 희곡들을 선택해 한국식으로 각색하려고 했죠. 그때부터 시나리오 공모전이 있을 때마다 도전했는데 전부 다 떨어졌어요. 어쨌든 당시에는 되든 안 되든 두 달에 한 편씩 장편 시나리오를 썼어요. 이후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간 것은 수업료가 공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도 확신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범죄의 재구성>을 만들기 4년 전, <눈물>에서 임상수 감독님 연출부 생활을 하게 된 거죠.

이동진_삶에 대해 <범죄의 재구성>에서 창호가 말한 것처럼 생각하십니까.
최동훈_그 대사가 표면적으로 의미하는 바와는 오히려 반대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저는 사람이란 살면서 일희일비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어쩌면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견해는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몰라요. 제가 제 인생에서 처음 배웠던 사자성어가 `새옹지마塞翁之馬`였는데, 그 말은 결국 인생이 무섭다는 걸 알라는 거잖아요? 그럴 때 저는 오히려 인생이 무서우니 좋아할 때라도 좋아하면서 그렇게 감정을 쏟아내고 살자는 거죠. 그래야 좀더 평탄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창호의 그 대사는 사실 일희일비하자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 평탄하게 살고 싶다는 거니까요.

이동진_지금까지 만드신 네 편이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동원한 관객 수를 합치면 모두 28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감을 느끼실 때가 있습니까.
최동훈_그럼요. 항상 느껴요. 위기감이 저의 근본적인 힘이거든요. 저는 위기감과 불안감 없이 어떻게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저 자신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 제 삶의 원동력이 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성격은 아주 활달하고 긍정주의자에 가깝지만 말입니다.
이동진_무엇이 가장 불안하신가요.
최동훈_역사가 화무십일홍이花無十日紅 라는 진리를 알려주잖아요.
이동진_달도 차면 기운다는 건가요?
최동훈_그런 거죠. 내가 이제까지 했던 것보다 더 재미있는 걸 쓸 수 있는 작가인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요. 저는 유럽영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확실히 할리우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거든요. 감독으로서 저는 제 취향이 들어간 재미있는 장르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계속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해 불안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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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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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총 아홉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황정은의 특징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리듬감이 느껴지고, 다음 이야기가 자꾸 궁금해지는 매력이 있어서 읽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다만 끝나고 나서 사유하는 시간이 오히려 길었던 것 같다.

 

재미있다. 이것은 확실하다. 재미있고, 이 작가는 묘사를 잘 한다. 하지만 서사는 부족하다. 기대되는 작가다. 묘사가 관찰에서 비롯된다면, 그래서 어떻게 관찰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대상이라도 묘사는 달라지는 것이라면, 확실한 것은 황정은은 관찰하기 위해 서 있는 자리의 위치가, 서 있는 모습이, 관찰하는 도구가, 많은 작가들과는 좀 다르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읽으면서 다소 불편하다고 느꼈다면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익숙하지 않지만, 상투적이지 않기에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다만, 소설 속에서 그리는 그 이미지라는 것들이, 여러 군데에서 중첩되는 느낌이 든다. 다른 책이기는 하지만, '낙하하다'의 몇 년째 낙하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구멍에서 한동안 낙하하여 지구 밖으로 뚫고 나간 앨리스가 떠오르고, 자연스레 그녀의 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떠오른다. '양산 펴기'에서의 양산은, 바로 뒤의 소설인 '디디의 우산'의 우산과 시각적인 이미지가 연결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황정은은 단편보다 장편이 더 좋은 것 같다. 여기 단편집의 이야기들 중에서도 장편으로 발전시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몇 몇 있었다.

 

야행(夜行)
대니 드비토
낙하하다
옹기전(甕器傳)
묘씨생(猫氏生)
양산 펴기
디디의 우산
뼈 도둑
파씨의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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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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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보게 되면 제목 때문에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은 앨리시어. 물론 책을 읽어나가면서 왜 앨리스라는 이름을 가져왔는지, 우리가 앨리스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이 책에서 변주했는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책 속에서 작가가 깔아놓은 이야기 말고도, 나름의 이야기로 유추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다만, 이 책의 제목은 떡밥이다. 주인공은 전혀 야만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앨리시어라는 한 여장 부랑자로부터 시작된다. 왜 여자일까, 왜 부랑자일까,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이 소설은 작가가 오사카 여행 당시 한신 백화점 근처에서 여자 부랑자를 보고 나서 구상하였다고 한다. 작가라면 그 기괴한 모습을 보면 당연히 저 사람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궁금했을 것이고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었을 봄직하다. 그것에 대한 설명으로, 작가는 가정폭력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왔다.

 

이 책의 주된 소재는 가정 폭력이다. 특이한 것은, 가정 폭력의 주체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가정 폭력의 형태는 때리는 아버지, 매맞는 어머니 혹은 묵인하는 어머니일 것이다. 여기에서 앨리시어와 동생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어머니이며, 아버지는 이를 묵인한다.

 

책은 장편이라고 하기에는 좀 짧은데, 그렇다고 가볍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리듬감이 있고, 특히나 대화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며, 중간 중간 등장하는 삽화들(아버지가 예전에 머슴으로 모셨던, 지금은 음식점을 하고 있는 옛 주인집에 가는 장면 등), 그리고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네꼬와 여우의 이야기 등)이 그 부분만 따로 뗴어 놓고 보아도 재미있다.

 

다만, 이야기의 방향이 명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문스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앨리시어는 자신이 어머니보다 커지고, 힘도 세졌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머니에게 대들거나 폭력을 중지시키기 위한 어떤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전처 자식들과는 달리, 집을 떠나 버리겠다는 의지도 없으며, 여러가지 시도는 번번히 중간에 스러지고 만다. 동생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슬픔이 진짜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큰 뜻으로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어머니마저도 끌어안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를 긍정까지는 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역시 어린 시절에 외조부모로부터 폭력을 당했던 어머니의 일화를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설 마지막에 가서야, 동생이 죽고 나서야, 앨리시어는 집을 떠나는데, 그 모습 또한 이리저리 떠돌며 여장을 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아도 단순히 현실의 도피이며, 가정폭력의 대물림에서 의지적으로 그 고리를 끊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에, 소설의 마지막은 희망이 아니라, 어쩌면 앨리시어 또한 그 대물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황정은의 소설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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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돼지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 대원DVD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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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1992년작. 붉은 돼지. 마법. 과거 비행사. 공중 도적. 현상금. 친구 아내. 라이벌. 격투. 사랑. 항공 활극. 여성 정비사. 마초. 이탈리아 공군. 냉소. 인간성 회복. 아드리아 해. 전우. 추억. 연정. 임시 정부. 왕당파. 용병. 불경기. 아지트. 구름 평원. 숙맥. 공중전. 육탄전. 낭만.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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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탄생 -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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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을 학습하는 13가지 생각도구
창조를 이끄는 13가지 생각도구가 있다. 읽다 보면 역시 천재는 다르구나 하고 오히려 자포자기(?)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런 13가지 도구들을 일상 생활에서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 소설가 김중혁은 이 13가지 단계가 소설의 창작과정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4단계까지가 창작 전단계라면, 5단계부터 실제 창작 단계라는 것이다.
생각의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각종 기업의 추천도서이자, 자기 계발서의 대표 주자로 이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기업의 입장에서 사원들의 재능을 최대한 뽑아내기 위해서, 라고 생각한다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세계적인 창조자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그들의 산물을 읽어나가는 과정을 보기만 해도 참 흥미롭다. 굳이 이 책을 달달 외워서 나에게 적용해야 겠다는 의무감으로 책장을 열 필요까지는 없다고. 정작 이 책을 쓴 부부 작가는 책을 읽는 이들을 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기는 했지만,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그저 읽어나가기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 물론, 이 책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기 계발을 하겠다는 태도도 나쁘지는 않겠다.

 

이 책의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이것이다. 통합교육의 중요성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전문가가 아니라 전인이 되라는 것. 일과 취미를 조화시키는 창조적인 인물이 되라는 것.

 

워낙 사례가 많은 책이라, 읽으면서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였다. 책의 구절, 그리고 읽으면서 참고했던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 방송 내용. 그리고 나의 경험까지. 이런 식의 책읽기도 참 오랜만인데 나쁘지 않았다.

생각도구 1 - 관찰
수동적인 ‘보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관찰’

다시 보기, 새롭게 보기

see나 look이 아니라 observe의 개념

여행을 할 떄는 사진을 찍지 말고 그림을 그리는 편이 대상을 더 잘 관찰하게 한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에게 비둘기 발을 계속해서 그리게 했다.

영화 스모크에서 똑같은 대상을 계속해서 찍는다. 빠르게 훑어보는 사람에게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고, 천천히 보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관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헬로우 블랙잭이라는 일본만화에서, 의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주인공에게 선배 의사가 계속해서 심전도를 보고 잘못된 점을 잡아내라고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은 집중해서 심전도를 며칠 동안 보지만 어떤 환자인지 알아내지 못한다. 결국 선배에게 모르겠다고 하는 주인공. 선배는 말한다. 그 심전도는 정상이라고.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같지만 몇 날 며칠 동안 단 하나의 정상 심전도를 집중해서 본 결과, 주인공은 다른 심전도를 보았을 때 어디가 이상이 있는지를 그 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 책에도 비슷한 일화들이 많이 나온다.


생각도구 2 - 형상화
imaging. 머리로 그릴 수 있는 능력.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미술을 배운 적이 있는데 그때 하루는 음악을 듣고 머릿속에 떠올리는 장면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그 클래식 음악은 지금도 멜로디가 생각난다. 제목은 얼마 전에 알았지만 잊어버렸는데. 나는 녹색이 떠올랐고, 잎사귀에 이슬이 맺혀 있는 숲 속, 아침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그때 같이 수업을 듣던 아이들이 모두 다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때는 똑같은 음악을 듣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랄 만한 나이였다. 더 커서 알게 될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윌리엄스는 이 작품을 쓸 때 한 여인과 그녀의 남편이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마치 그림처럼 머리에 떠올렸다고. 실제로 이 장면이 연극에서도, 영화에서도 등장한다고.


생각도구 3 - 추상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너무 추상적이야, 라는 말은 구체적이지 못하다라는 말과 등가로 쓰이는 경우가 많으니까.

추상화의 본질은 한 가지 특징만 잡아내는 것. 한자어로 추상이란 상을 뽑아낸다는 뜻이다.

에드워드 E. 커밍스의 시. 이 단순한 시에 이렇게 수많은 의미가 들어 있다니.

추상화는 중대하고 놀라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 사랑, 진실, 진리와 같은 개념들은 눈으로 볼 수 없고, 큰 범위의 개념들이다. 영화도, 소설도, 어떤 예술도 삶을 추상화하는 것이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리처드 파인만은 말했다. 현상은 복잡하고 법칙은 단순한데 무엇을 버릴 것인가?

생각도구 4 - 패턴인식
체스 고수들은 패턴인식의 귀재들. 치밀한 논리가 아니라 직관으로 패턴을 인식한다.

1부터 100까지 더하는 식에서 패턴을 발견한 가우스의 정리. 오성 이항복의 어린 시절, 쌀 한 말이 몇 톨인지 알기 위해 그가 생각해냈던 방법.

생각도구 5 - 패턴형성
가장 단순한 요소들의 결합이 복잡한 것을 생성한다. 

우주 안에 수억개의 화학 물질들은 전부 100개 미만의 기본 물질의 합성으로 이루어진다.

결합 요소의 복잡성이 아니라 결합 방식의 교묘함이나 의외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패턴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나가수 첫 회에서 패턴이 꺠지자 시청자들의 반대가 극렬했던 경우가 있다. 우리가 눈을 뜨고 그 이후의 일과들이 정형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아름다움이 느껴지기도.

생각도구 6 - 유추 
헬렌 켈러가 보거나 듣지 못하는 세계를 이해했던 것은 유추가 탁월했기 때문
유추와 닮음은 다르다

표면적으로 닮은 것이 유사라면 내적 기능이나 속성의 연관성이 유추이다.

내 배가 남산만하다는 표현이 유사라면 내 마음이 호수라는 표현은 유추이다.
낙하하는 사과를 보고 지구와 사과의 관계에서, 지구와 달의 관계로까지 유추하여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멜더스의 인구론에서 진화론을 유츄해낸 다윈.
유추할 수 없다면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유추를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 지성의 핵심.


생각도구 7 - 몸으로 생각하기
헬렌 켈러가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에게 도약이 뭐냐고 물었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허리에 손을 얹게 한 후 점프하였다.
몸으로 ‘느껴야’ 하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몸의 일부가 사라진 뒤에도 감각은 남아 있다. 환상통, 환상지.

생각도구 8 - 감정이입
감정이입의 본질은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것

소설가들이 소설을 쓸 때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역사가들은 타인의 눈으로 보기 위해 ‘시대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사냥에 성공하려면 사냥감처럼 생각하라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내 안에서 그것이 자라나게 하라
가장 완벽한 이해는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이 될 때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광자라면 우주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고 생각했고, 리처드 파인만은 자신이 원자라고 가정하였다.

생각도구 9 - 차원적 사고
3차원 물체를 2차원 평면에 그리는 원근법의 발명

지도는 3차원을 2차원으로 치환한 대표적 예이다.

생각도구 10 - 모형 만들기
modeling. 모형으로 만들어 전체를 축약

모형은 본질을 구현한다
완성된 그림의 모형이 된 쇠라의 스케치
전염병 확산을 막은 공중위생 모형
모형의 수학화로 순수한 모형을 얻을 수 있다
세계를 이해하려면 모형을 만들라

생각도구 11 - 놀이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일 가지고 놀기

일이 정말 하기 싫을 때, 그 일에서 나름의 놀이적 요소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동진이 인터뷰집을 펴낼 때, 모든 질문을 상대 영화 감독이 만든 영화의 대사로 시작한 것은 수많은 양의 글을 쓸 때 스스로 지치지 않게 하려고 나름의 재미를 부여한 것.

플레밍의 페니실린, 흔들리는 접시를 보고 전자궤도를 연구한 리처드 파인먼
콜더의 서커스 놀이와 움직이는 조각
현실을 가지고 놀았던 루이스 캐럴과 모리츠 에셔
젓가락 행진곡은 어떻게 탄생했나
창조적인 통찰은 놀이에서 나온다

생각도구 12 - 변형
라에톨리 발자국의 발견과 해석

아프리카 탄자니아 사막에서 인류 조상의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사고의 변형에서 출발한 스트로브 발명
변형적 사고가 서로 다른 분야를 연결한다
언어로 표현된 문제는 방정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미시건 주립대학에서 행한 ‘음악적’ 소변분석
바흐의 다성음악을 이미지로 변형한 파울 클레
 
생각도구 13 - 통합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세계를 생각하라.

감각과 의식이 교차하는 ‘우주적 동시성’의 세계
파란색은 첼로, 검은색은 베이스
생각의 본질은 감각의 지평을 넓히는 것
듣지 못하는 연주자 이블린 글레니의 공감각적 사고
상상하면서 분석하고, 화가인 동시에 과학자가 되라
느끼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로
‘모든 것’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물리학자 아르망 트루소

실제로 생각과 감정, 느낌 사이의 연관성은 <데카르트의 오류>라는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마음(생각)과 몸(존재 혹은 감각)의 분리를 말한 철학자(데카르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갑작스러운 사고나 뇌졸중, 종양으로 정서적 감응구조가 총체적으로 바뀐 신경질환자들은 합리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정서적으로 몰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느낌과 직관은 `합리적 사고`의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 사고의 원천이자 기반이다. 다마지오에게 있어서 몸과 마음, 감정과 지력은 불가분의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과학자들은 느낌으로 논리적 개념에 이른다. 그리고 모든 학문분야에서 창조적 사고와 표현은 직관과 감정에서 비롯된다.

신경해부학자 산티아고 라몬이카할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 연구가 자연사와 관련된 대상을 다루는 것이라면 관찰에는 스케치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 어떤 것을 묘사하는 일은 주의력을 훈련시키고 강화시키며 현상 전체를 보게 만든다." 해부학자 프랜시스 세이모어 헤이든도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당시의 화가들이 필수적으로 해부학을 공부했던 것처럼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학생들에게 미술을 공부하도록 시켰다. 그래야만 관찰능력과 손기술이 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환자의 얼굴에 나타나는 질병의 상태를 얼마나 빨리 눈으로 파악하고 그것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하느냐, 또 그러기 위해 손을 얼마나 잘 훈련시키느냐는 정밀하고 안전하게 집도하는 능력과 직결된다"라고 썼다.

비록 오늘날 과학자나 의사들에게 드로잉을 가르치는 강의는 과거에 비하면 드물어졌지만 내과의사인 에드먼드 펠레그리노의 말에 따르면 그 유용성만큼은 아직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임상의의 기술은 그의 필수적인 진단기구인 눈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임상의와 화가는 둘 다 특별한 시각적 감지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둘 다 본다. 그러나 보긴 보되, 겉으로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것을 봐야 한다. 화가인 파울 클레는 `미술은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임상의 역시 눈앞에 드러난 증상의 표층을 뚫고 들어가, 그 아래에서 무슨 질병이 환자를 괴롭히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에 의하면 "지속적인, 그러나 무의식적인 감각의 흐름이 우리 몸의 동작부위에서 나온다"라고 한다. 이 감각의 흐름이란 우리가 `제6감` 혹은 `비밀의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는 자신의 근육을 살피고, 위치나 긴장상태, 움직임을 끊임없이 재조정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숨어 있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그 과정은 색스의 말처럼 대개는 숨어 있다. 우리가 생소한 기능, 이를테면 자전거 타기나 야구하기, 망치나 드라이버 다루기, 새 악기 연주하기, 스웨터 드기, 유리 불기 같은 일을 처음 배울 때는 대단히 의식적이된다. 이런 기능에 숙달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의식적으로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그러다 자전거 타기나 피아노 치기 같은 동작이 완전히 몸에 익으면 점차 의식하지 않고도 그 일들을 할 수 있다. 공을 어떻게 맞힐까를 궁리하지 않고도 테니스를 즐길 수 있으며, 손가락을 어디에 어떻게 대야 하는지 기억해낼 필요도 없이 곡을 연주할 수 있다.

시인으로 잘 알려진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의사이기도 했는데,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환자들의 복잡다단한 마음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내가 그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게 누구이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로부터 떨어져나왔을 때, 나는 잠에서 다시 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많은 의학교육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환자가 되어 보는` 능력의 유무는 뛰어난 임상의와 그렇지 않은 의사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감정이입이야말로 자신이 도움을 주는 관계를 움직여나가는데 있어서 중심이 되는 기술이다"라고 펜실베이니아 주립의대 교수인 E.A. 바스티안은 말한다. 감정이입을 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은 생소한 검사나 절차 앞에서 환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크나큰 동정심을 가지고 환자들을 대할 때 환자들이 기꺼이 낯선 자신들에게 증상과 비밀을 털어놓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야만 듣고 싶지 않는 진단결과거나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는 절차에도 협력하려 하고, 숨기고 싶은 몸과 마음을 기꺼이 열어보인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정신과 의사 로버트 코울즈는 하버드 의대생들에게 조지 엘리어트의 <미들마치>나 워커 퍼시의 <영화광>을 읽어볼 것을 적극 권유한다. 교과서와는 달리 이 소설들은 의사들이 봉착하는 윤리적인 문제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심장의학자인 에모리 의대 교수 존 스톤은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추천하는데, 이 소설들이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보르헤스의 <죽지 않는 사람들>을 생체공학적인 장기이식과 인공사지가 불러일으키는 심리적인 효과에 대한 고찰을 다룬 소설로 본다. 스톤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은 젊은 의사들이 적절한 감수성을 갖도록 해주고,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단어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심지어는 자신이 환자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해줄 수도 있다."

이는 3차원 물체를 2차원으로 표현한 것과 같다. 이런 표식들은 많은 직업에서 큰 중요성을 갖는다. 고고학자나 법의학자들은 발자국이나 기타 흔적을 가지고 그 주인의 크니, 무게, 신장 등을 재구성해야 한다. 군대의 정보분석가들은 정찰기나 정탐위성이 촬영한 2차원 사진을 가지고 3차원적 추리를 해야 한다. 내과의사들은 X-레이 사진이나 CATcomputerized axial tomography, MRI를 판독해야 하는데, 그들은 움직임 없는 환자들 몸의 조각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환치해 놓고 해석해야 한다. 요즘 의학계 문헌들을 보면 근시교정에서 안면성형에 이르는 기술들을 놓고 3차원, 4차원, 5차원, 심지어는 6차원으로 분석하는 논문들이 눈에 많이 띈다. 음향기록장치sonogram나 양전자방사 단층촬영술PET은 인체나 인체의 기능을 공간상으로뿐만 아니라 시간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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