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 신분을 뛰어넘은 조선 최대의 스캔들
이수광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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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을 읽었다. 나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신기했다. 몇 년 전에 방송되었던 <다모>라는 드라마에서 비록 가상이지만 범죄를 수사하는 여자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고, 현재 시즌 10까지 나온 미드 <본즈>에 당시 꽤 빠져 있었기 때문에 더 그 책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는지도. 한때 법의학이라는 학문에 아주 살짝 열광했던 시절이 있었고 마침 그 책을 접한 시기가 그 때와 맞물렸기 때문에 더 설렜었는지도.

 

이 책은 동일한 작가가 쓰고 동일한 출판사에서 나오는 이른바 기획상품같은 것으로, 내가 본 책을 기준으로 하면 11쇄인 것을 보니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것 같기는 한데 나로서는 좀 실망스러웠다.

 

봉건시대를 뛰어넘은 남녀상열지사의 재발견

1장 _ 조선을 뒤흔든 왕조 스캔들
사랑에 미쳐 왕좌를 버리다 | 양녕대군 폐세자 사건
후궁의 죽음을 부른 한 통의 연애편지 | 왕의 여자가 사랑에 빠진 죄
질투의 화신, 현숙공주 독살 미수 사건 | 베일에 싸인 공주의 사생활
세종의 며느리 세자빈과 궁녀, 그들만의 사랑 | 궁궐 여성의 동성애

2장 _ 조선을 뒤흔든 남녀상열지사
목숨을 걸고 천민을 사랑한 처녀 | 신분을 초월한 용기 있는 사랑
기생과 사대부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 |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연애
자유연애를 꿈꾼 규방 부인 | 남편감을 직접 고른 여인
일부종사를 거부한 여성들, 감동과 어을우동 | 윤리보다 자유를 택한 두 팜므파탈

3장 _ 조선을 뒤흔든 연애기담
위험한 사랑이냐, 부도덕한 간통이냐 | 조선시대 근친상간이 일어난 이유
아버지의 연인을 빼앗은 사대부의 최후 | 어느 사대부의 일그러진 욕망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유린한 별종 | 양성을 넘나든 사방지 사건
일곱 살 아이가 아기를 낳은 사연 | 영조시대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
여인의 정조를 놓고 싸운 선비들 | 연애 스캔들을 둘러싼 조식과 이황의 대립

4장 _ 조선을 뒤흔든 불멸의 로맨스
삼의당 김씨 부부의 영원한 사랑 | 사랑의 시를 남긴 부부
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 심노숭 | 떠난 아내를 미치도록 그리워한 남자
첫사랑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다 | 기생이 열녀문을 하사받은 사연

 

일단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은데, 이 중 몇 가지 이야기는 다른 역사서를 통해서 접한 적이 있었고, 그 뒷이야기는 오히려 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었기에 이 책의 이야기는 좀 밋밋하기도. 하지만 역사를 깊이 알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벼운 읽을 거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꽤 괜찮은 책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여 책을 읽기보다는 잠깐의 휴식이 필요하지만, 전혀 머리를 쓰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더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죄책감이 들었을텐데, 이 책은 효과적인 처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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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1 (완전판) - 죽음과의 약속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연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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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2부에서야 살인사건이 일어나며, 1부에서는 보인턴 가족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초반에 사건이 벌어지고, 푸아로의 활약을 주로 서술하는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이 소설은 가족과 그 구성원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여기서 푸아로는 사건을 풀어나가는 주체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과,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비중이 가고 있다. 즉, 어쩌면 살인 사건 자체에 대한 해결이나 범인이 누구인지를 파헤치는 것 보다는, 어쩌면 살인 사건 자체는 그저 이야기에 집중시키기 위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고, 실제로 크리스티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마치 다른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방식은 사실 최근의 작가들이 많이 쓰고 있는 방식인데, 약간의 미스터리적 요소, 혹은 반전이 있는 결말 등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크리스티의 소설만으로 놓고 보자면, 나는 여러가지 면에서 <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가 떠올랐다.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가진 가장, 그가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가족 구성원들, 변화가 없어 보이는 견고함에 외부의 요소로 생기는 균열, 그리고 젊은이들의 로맨스. <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는 총 3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여기에서도 살인 사건은 소설이 꽤 진행되고 나서야 발생하고, 그 전까지 가족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물론, 재혼한 고고학자와의 여행 때문에 이야기가 서술되는 무대가 지금의 중동지역이라는 것도.

 

여러 사람의 심리에 집중한다는 점도 당연히 공통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크리스티의 거의 대부분의 소설의 특징이므로 패스.

 

소설끼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크리스티답게, 이 소설에서도 연결고리들이 등장한다. 푸아로가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계기는 레이스 대령이 카버리 대령에게 써 준 소개장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오랜 친구이자 정보부 동료로 설정되어 있으며, 레이스 대령은 <갈색 양복의 사나이>에 나왔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일 강의 죽음>에도 나왔다고. 그 외에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ABC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된다. 시간 순으로 그 이후에 이 작품이 쓰여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이 작품들이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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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알잖아? 그 여자는 죽어야 해."

예루살렘에 도착한 첫 날 밤 탐정 에르퀼 푸아로는 우연히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을 엿듣게 된 것이다.

"내가 가는 곳마다 어김없이 범죄의 냄새가 풍기는군."

푸아로는 입속말을 중얼거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소설가 앤터니 트롤럽의 일화를 떠올렸다. 트롤럽은 대서양을 건너던 도중 승객 두 사람이 그의 시리즈 소설 중 최근작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 하지만 그 진절머리 나는 노파는 좀 죽여 주면 좋겠어."

한 남자가 선언하듯 말했다.

소설가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신사분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당장 가서 그 노파를 죽여 버리겠습니다."

 

새라는 겨우 얼마 전에야 힘든 감정적 위기를 헤체고 나올  수 있었다. 한 달 전 4년 선배인 젊은 의사와 파혼했던 것이다. 서로 많이 좋아했지만 기질적으로 너무 많이 비슷했다. 당연히 의견충돌과 말다툼이 잦았다. 흔들림 없고 독단적인 그의 주장을 잠자코 받아주기에는 새라 자신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 새라 자시의 성격도 한때는 힘을 숭상했다. 다스림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다스릴 수 있는 남자가 나타나자 그 사실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던 것이다! 파혼은 상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새라는 현명하게도 단순히 서로 이끌린다는 사실이 평생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앗다. 그래서 단지 진지하게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기억들을 털어 버리려고 일부러 신나는 휴가를 계획했던 것이다.

 

그때 노부인의 시선이 느닷없이 그를 향했다. 순간 제라르는 숨을 들이켰다. 이글거리는 작고 검은 눈이 그를 쏘아 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서 뭔가 힘 같은 것이, 그것도 아주 강하고 고약한 적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제라르는 그 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버릇없는 응석받이 폭군들이 부리는 터무니없고 시시한 변덕이 아니었다. 노부인의 힘은 강력햇다. 적의로 번득이는 그 눈빛은 코브라가 뿜어내는 눈빛과 몹시 닮아 있었다. 늙고 쇠약하고 질병의 먹이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보인턴 노부인은 결코 무력하지 않았다. 노부인의 힘의 의미를 아는 여자, 평생 힘을 휘두르며 살았고 한 번도 자신의 힘을 의심해 본 적 없는 여자였다. 제라르는 언젠가 호랑이들을 부리며 굉장히 위험하고 화려한 쇼를 펼치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위대한 야수들은 느릿느릿 자기 자리로 기어가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묘기를 부렸다. 호랑이들의 눈빛과 낮은 울부짖음은 분명 광포하고 비통한 증오를 표출하고 있었지만 고분고분 여자의 말에 복종하고 있엇다. 그 여자는 젊고 오만했으며 어두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엇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노부인과 똑같았다.

'동퇴즈(조련사).'

 

"그래서 마음 편히 전 재산을 그 부인에게 물려 주고 자식을 맡겨 버린 거군요. 우리 프랑스에서는 그런 일이 법적으로 불가능하지요."

"미국인들은 절대적인 자유를 믿습니다."

코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라르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프의 말이 특별히 인상적이랄 건 없었다.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서도 그와 같은 말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유가 어떤 특정 국민의 특권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현명한 제라르는 어떤 종족도, 어떤 국가도, 어떤 개인도 자유롭다고 일컬어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정도는 다르지만 어디나 구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사실이 횡포의 원인이었다는 건가요? 예전 직업에서 비롯한 습관이라는 거군요."

제라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각도로 보는 건 잘못이에요. 마음 깊이 자리 잡은 강박증의 관점에서 봐야 해요. 간수였기 때문에 횡포 부리는 걸 좋아하게 된 게 아니에요. 그보다는 횡포 부리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간수가 되었다고 하는 게 옳겠군요. 내 말은 노부인이 그 직업을 택하게 된 건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은밀한 욕망 때문이라는 거예요."

제라르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인간의 잠재의식에는 그처럼 기묘한 것들이 숨어 있어요. 권력에 대한 욕망, 잔인함에 대한 욕망, 찢고 부스고 싶은 욕망.......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유산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전부 그대로예요. 잔인성도 야만성도 욕망도...... 거부하고 의식적으로 피하려 한들 그런 것들의 위력은 때로 너무나 강하지요."

새라가 몸을 떨었다.

"저도 알아요."

제라르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늘날에도 그런 모습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어요. 정치 강령에도, 국가의 운영에도 보입니다. 이건 인도주의, 연민, 동포애적 선의의 반작용이에요. 정치 강령은 이따금 지혜로운 체제, 유익한 정권 등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 역시 잔인성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권력에 의해 강제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폭력의 사도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이유로 케케묵은 야만성과 잔인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아, 정말 어려운 문제이지요. 인간이란 조금만 건드려도 균형감을 잃어 버리는 동물이니까요. 인간은 원초적인 욕구를 갖고 있어요. 바로 생존의 욕구지요. 너무 앞서 가는 것은 뒤처지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인 일입니다. 생존해야 하니까요! 어쩌면 그 때문에 케케묵은 야만성을 유지하려는 거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숭배하는 것만은 절대 안 됩니다!"

 

"그렇지요. 코프 씨는 선량하고 정직하고 다정다감하고 평범한, 미국인다운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이에요. 악이 아니라 선을 믿지요. 보인턴 가족의 분위기가 뭔가 아주 잘못됐다는 걸 알지만 노부인의 행동을 악한 행동이라기보다는 삐뚤어진 헌신이라고 생각하더군요."

"그걸 보면서 노부인은 즐거워하는 거고요."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새라가 이내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걸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텐데요."

제라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들은 그럴 수가 없어요. 혹시 수탉을 가지고 실험 하는 걸 본 적 있나요? 오래된 실험인데 바닥에 분필로 선을 그은 뒤 수탉의 부리를 거기에 대어 주고 못 움직이게 하면 수탉은 자기가 거기에 묶였다고 믿어 버려요. 그래서 머리를 쳐들지도 못하지요. 이 가엾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노부인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지배가 정신적인 것이었다는 점도요. 노부인은 그들에게 최면을 걸어 자기를 거역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무시하겠지만 새라라 씨와 나는 잘 알고 있잖아요. 노부인은 자기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믿게 만들었어요. 그들은 감옥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기 때문에 문이 열려 있어도 그걸 보지 못하게 된 겁니다. 적어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은 더 이상 자유를 바라지도 않는 것 같더군요. 게다가 그들은 전부 자유를 두려워하게 되었고요."

 

"나는 적어도 크리스천 신앙의 핵심 교의 중 하나는 믿고 있어요. '작은 일에도 만족할 줄 알아리.'라는 것이지요. 나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야망이, 그리고 성공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해악을 알고 있어요. 그런 욕망의 실현은 오만과 폭력, 그리고 결국 채워지지 않는 탐욕으로 이어질 뿐이에요. 그 욕망이 거부당하게 되면...... 아! 그렇게 되면 정신병원은 증가할 것이고 광인들은 자기 이야기만 늘어 놓겠지요! 정신병원에는 평범하고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을 참아 낼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그곳에서 현실 도피의 수단을 찾아 내어 현실과는 평생 담을 쌓아 버릴 거예요."

새라가 불쑥 말했다.

"보인턴 노부인이 정신병원에 있지 않은 것이 유감이네요."

제라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노부인의 자리는 실패자들 틈이 아니에요.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이지요. 성공했으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룬 겁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 시도해야 한다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에요. 개입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막대한 해를 끼칠 수도 있어요. 그 문제에 대해 명확한 판정을 내리는 건 불가능해요. 어떤 사람들은 개입에 있어서 천재성을 보입니다. 아주 훌륭히 수행해 내지요! 그러나 서투르게 개입해서 내버려 둔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는 사람도 있어요! 또 나이라는 문제도 고려해야 해요.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과 확신에 대해 용기가 있어요. 실제보다 이론에 더 가치를 둡니다. 하지만 사실 이론과 실체는 모순적일 수도 있잖아요? 그들은 그걸 아직 경험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일이 정당하다는 신념만 있다면 그러한 모순이 있음에도 굉장히 가치 있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지요. 부수적으로 상당한 정도의 해로움을 끼치는 경우도 많지만! 반면 중년에 이르면 경험이 쌓이기 때문에 해로움도 이로움만큼 크다는 사실을,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현명하게도 개입하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공평해요. 진지한 젊은이는 해로움과 이로움을 모두 끼칠 수 있는 반면, 신중한 중년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니까요."

 

"코프 씨, 나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상심리들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에요. 인생의 아름다운 면만 보는 것은 좋지 않아요. 일상의 체면치레와 관례 이면에는 이상심리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예를 들어 잔인함 그 자체를 즐기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더 깊이 잠재된 무언가가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다는 깊고도 측은한 욕망이지요. 그것이 방해를 받으면, 즉 자신의 불쾌한 인간성으로도 필요로 하는 반응을 얻지 못하면 다른 방법으로 돌아서게 되는데, 그 자신이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의미 있게 여겨져야 하기 때문에 갖가지 이상하고도 도착적인 방법들에 귀착하게 되는 거죠. 다른 습성과 마찬가지로 잔인성도 길러질 수 있고 제어할 수 있는......"

 

"푸아로 씨, 제가 듣기론 오리엔트 특급열차 사건에서 공식 평결을 받아들이셨다고 들었는데요?"

푸아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까?"

"그게 사실인가요?"

푸아로가 천천히 말했다.

"그 경우는 달라요."

"아니요. 전혀 다르지 않아요! 그때 살해를 당한 사람은 악마였어요."

 

"그렇다면 코프 씨는 감상주의자로군요."

푸아로가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사람이 가진 이상은 사실 천성적으로 깊이 뿌리박힌 게으름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인간성을 최고로 보고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기는 것은 분명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결과적으로 제퍼슨 코프 씨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에 대해 최소한의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거예요."

"떄로는 그런 태도가 위험할 수도 있겠네요."

푸아로가 말했다.

제라르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보인턴 일가의 상황'이라고 일컫는 그 상황을 그는 잘못된 헌신의 경우라고 계속해서 말하더군요. 잠재된 증오, 반역, 굴종과 비참함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아주 미미했어요."

"어리석군요."

푸아로가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가족을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도록 만들어 놓고 왜 이런 해외여행을 감행했느냐 하는 겁니다. 외부와 접촉할 위험과 자신의 권위가 약해질 위험이 분명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제라르가 이렇게 말하자 제라르가 흥분한 표정으로 몸을 숙였다.

"하지만 몽 비외(오랜 친구), 그건 이런 겁니다! 노부인들은 지구상 어디나 똑같아요. 싫증이 나는 겁니다! 그들의 특기가 인내라 해도 인내에 너무 익숙해지면 싫증이 나는 법입니다. 그러면 분명 새로운 인내가 필요하죠. 인간을 지배하고 고문하는 것이 취미인 노부인도 좀 어처구니없게 들릴 수 있지만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노부인을 동퇴즈(조련사)로 생각해 본다면 호랑이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거예요. 자식들이 사춘기를 지날 때까지는 상당한 희열과 흥분을 느꼈을 겁니다. 레녹스와 네이딘의 결혼은 흥미진진한 모험이었겠지요. 하지만 갑자기 그 모든 게 시들해진 겁니다. 레녹스는 지나치게 울적함에 빠져 버린 나머지 상처를 주는 것도, 고통을 가하는 것도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졌어요. 레이먼드와 캐럴은 반항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지네브라는 아! 포브르(불싸한) 지네브라, 그 아가씨는 노부인의 눈으로 보자면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없는 사냥감이에요. 그 아가씨는 스스로 탈출구를 찾았으니까요! 현실에서 공상의 세계로 탈출한 거예요. 어머니가 못되게 굴면 굴수록 핍박받는 여주인공이 되는 은밀한 전율에 빠져든 겁니다! 보인턴 노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부 지긋지긋한 거예요.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처럼 새롭게 정복할 신세계가 필요했던 거요 해외 여행을 계획한 겁니다. 길들여 놓은 야수들이 반항할 위험은 있지만 새로운 고통을 줄 기회도 생기거든요.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새로운 긴장과 전율이 필요한 거였습니다."

 

"연기라고요?"

"예,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있어요. 지네브라는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또 반드시 성공해야 해요! 근본적으로 지네브라는 어머니와 성격이 많이 닮았거든요."

"아니에요!"

새라가 발끈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일부 본성은 똑같아요. 두 사람 다 중심이 되고 싶어하는 강한 욕망을 타고 났어요. 두 사람 다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 가엾은 아가씨는 번번이 위협과 억눌림을 당했지요. 강렬한 야망과 인생에 대한 사랑, 발랄하고 로맨틱한 기질을 표출할 출구가 어디에도 없었던 거예요."

 

"끔찍했어요.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아래로 내려와 천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군가를 불렀어야 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잡지책만 뒤적이며 기다리다가......."

그가 말을 멈추었다.

"믿지 못하겠지요? 그럴 거예요.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았냐고요? 네이딘에게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나도 모르겠어요."

제라르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건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보인턴 씨. 당신은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한 상태였어요. 순식간에 몰아친 두 번의 큰 충격 때문에 그런 심리 상태가 된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바이젠홀테르 반응이라고 하는데, 창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새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겠군요. 창문에 머리를 부딪친 새는 회복이 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다른 행동을 삼가게 됩니다. 신경중추에 적응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지요. 영어로는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이런 겁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결단을 내려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심리적 마비 상태였으니까요."

 

"보인턴 노부인의 성격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노부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더군요. 늙은 포악한 조련사다. 심리적 사디스트다. 사악함의 화신이다. 미쳤다........ 이것 중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내 생각에는 새라 킹이 예루살렘에서 순간적으로 떠올렸다는 '완전한 구제불능'이라는 말이 제일 근접할 것 같군요. 구제불능일 뿐 아니라 무익한 존재였지요!

자, 그렇다면 노부인의 심리 상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봅시다. 노부인은 거대한 야망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힘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승화시키지도, 그것을 다스릴 방법도 찾지 못했어요. 물론 그 여자는 그 욕망을 즐기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잘 들으세요, 결국에는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유력한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광범위한 영역에서는 두려움과 미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어요! 고작해야 고립된 한 가족의 보잘 것 없는 폭군에 불과했지요! 제라르 박사의 말로는 보인턴 노부인도 다른 노부인들처럼 그런 자신의 취미에 싫증을 느껴서 활동 범위를 넓히고 지배력을 위험에 빠뜨림으로써 희열을 느끼려했다는군요! 해외에 나가자 노부인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 처음올 깨닫게 된 겁니다!"

 

"5분 뒤 웨스트홀름 부인이 미스 피어스를 다시 찾아가 방금 본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뒤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각인시킵니다. 그런 다음 산책을 나가면서 암벽선반 밑에 잠시 멈추고 서서는 노부인을 올려다보며 소시를 지릅니다. 노부인한테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을 거예요.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웨스트홀름 부인은 미스 피어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콧방귀를 끼다니 아주 무례하군요." 미스 피어스는 노부인이 실제로 그랬다고 여깁니다. 노부인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것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지요. 필요하다면 실제로 들엇다고 진지하게 맹세라도 할 거예요. 웨스트홀름 부인은 회의를 할 때 미스 피어스와 같은 유형의 여자들으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자신의 명성과 지배근성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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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0 (완전판) - 구름 속의 죽음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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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죽음'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구름 속의 산책>을 떠올렸다. 1995년 개봉작인 그 영화에서 키아누 리브스의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영화의 배경이 되는 포도밭의 풍경이 아름다워 지금까지도 몇 몇 장면은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영화다. 전혀 연관이 없는 데도 '구름 속의'로 시작하는 구절만 보아도 그 영화가 자동 재생될 정도이니 내가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영화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끝까지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내내 로맨틱한 기운에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물론, 크리스티의 상당수 소설처럼 이 소설에도 로맨스는 나온다. 하지만 왠지 사족처럼 느껴지던 멜로 부분이 이 책에서만큼은 왜 그렇게 흐뭇한지 모를 일이다.

 

비슷한 제목의 영화와 소설. 영화 제목에서의 구름은 실제 구름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 책 제목에서의 구름은 좀 더 사실적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살인은 비행기 안에서, 그러니까 지상에서 한참 위인 장소에서 비행 중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는 기차, <나일 강의 죽음>에서는 배, <구름 속의 살인>에서는 비행기. 그야말로 육해공 모든 교통 수단이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살인 사건의 장소로 등장하는데, 승객들의 수가 많고, 여행 기간이 길기 때문에 사건 해결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기차나 배에 비해서 비행기라는 장소는 자칫하면 사건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크리스티가 누군가. 역시 추리 소설의 여왕답게 일견 단순해 보이는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고, 예상치 못하게 전개하며, 마지막에 의외의 반전까지 선사한다. 각각 1934년, 1937년, 1935년에 쓰인 이 작품들은 다들 비슷한 시기의 이야기지만,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대중에 다가온 것이 1910년경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행기는 당시로서는 굉장한 신문물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티는 요즘으로 치면 얼리어답터의 기질이 상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고아원 원장인 안젤리크 수녀와 통화를 했소.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사람과 통화하는 건 정말 낭만적인 일이지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이렇게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이런 문장을 보면 신기술에 대한 크리스티의 관심이나 애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후기의 크리스티 작품에 급변하는 영국 사회에 대한 쓸쓸함과 크리스티의 대표적인 두 인물인 마플 양과 푸아로의 노년을 묘사하는 부분이 애잔한 것을 비교하면 흥미롭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는 크리스티의 유머가 돋보이는 부분이 많다. 스스로 여유가 있을 때 유머가 나오는 편인데 집필 당시 크리스티가 개인적으로 행복한 때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쪽은 파리 경시청에서 나온 무슈 푸르니에라고 하네. 우리와 함께 이번 사건을 수사할 거야."

"몇 년 전에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무슈 푸아로."

푸르니에가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무슈 지로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푸아로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로(그는 지로를 '인간 사냥개'라고 부르곤 했다.)가 자신에 대해 뭐라고 했을지 익히 짐작이 가는 터라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무슈 푸르니에도, 무슈 지로도 왠지 낯익은 이름이다. 아니면 그냥 단순한 착시 현상일까? 특히 무슈 지로는 분명히 다른 소설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크리스티는 이런 주변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소설 간의 연결 고리를 만들고는 한다. 아마도 이 전집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한번 더 정주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랜시가 대통을 구입했다고 했지? 빌어먹을 추리소설 작가들 같으니....... 항상 경찰을 무슨 바보 취급이나 하고, 우리 수사 방식도 엉터리로 적어 놓는단 말이야. 그 자식들 소설에서 경감이 총경에게 말하는 투로 내가 상관을 대한다면 내일 당장 모가지가 달아날걸. 아무것도 모르는 삼류 작가들. 이거야말로 쓰레기 같은 삼류 작가들이 생각해 낼 만한 머저리 같은 살인 사건이야!"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용의자 중 한 명이 바로 추리소설 작가인데, 그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상은 썩 좋지 않다는 점이다. 크리스티 자신이 추리소설 작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학 개그 같기도 하다.

 

"그것도 간교한 술수인 게 틀림없어. 오늘 법정에 가져온 대통만 해도 그래. 그게 이 사람이 2년 전에 산 건지 어떻게 알겠나? 내가 보기엔 모든 게 수상쩍네. 범죄나 추리소설 따위에 묻혀 사는 사람이 정상일 리가 없어. 그런 걸 읽다 보니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만 들어차게 된 거야."

"작가라면 그런 생각만 하는 게 당연하지."

푸아로가 말했다.

 

추리소설 작가를 희화화하는 대목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크리스티는 왜 이런 장면을 의도적으로 넣었던 것일까?

 

"작가인 당신은 엄청난 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슈. 당신은 글로 감정을 분출할 수 있지요. 적들에게 펜의 위력이라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푸아로가 말했다.

클랜시는 의자를 앞뒤로 조용히 흔들었다.

"난 이번 살인 사건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떄 있었던 일을 그대로 소설로 쓰고 있거든요. 물론 가공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목은 '항공우편 미스터리'라고 붙일 생각입니다. 승객들도 그대로 묘사할 거고요. 제때 끝낼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릴 겁니다."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설의 힘을 빌어 크리스티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이런 부분도 있다.

 

"무슈 푸아로,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소설을 쓸 때는 누구를 범인으로 만들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을 제 마음대로 다룰 수는 없지요. 난 진짜 탐정만큼 능력이 뛰어나지 못하거든요."

 

이런 장면을 쓰면서 크리스티가 얼마나 즐거워했을지 조금은 상상이 가기도 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또 있다.

 

"지금까지 결론은 이렇습니다. 제인 그레이, 가망성 희박, 가능성 거의 없음. 게일, 가망성 희박, 가능성 역시 거의 없음. 커 양, 가망성 거의 없음, 가능성 의심스러움. 레이디 호버리, 가망성 많음, 가능성 전혀 없음. 무슈 푸아로, 범인이 거의 분명함, 탑승객들 가운데 유일하게 심리적 순간을 조장할 수 있는 인물."

재프는 자기가 한 농담에 큰 소리로 웃었고, 푸아로도 관대한 미소를 지었으며, 푸르니에는 약간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후반부에서 전부 밝혀지지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살인자는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과 승무원으로 범위가 좁혀지는 데다가, 아무도 살해 당시를 목격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초반부터 어려워진다. 우스운 것이, 밝혀진 정황과 발견된 단서만 놓고 보면 가장 유력한 사람은 바로 푸아로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배심원들에게도 의심을 받게 되는데, <오리엔트 특급 살인> 때 범인이 입은 것으로 보이는 차장 유니폼이 푸아로의 짐에서 발견된 정황과는 다르게, 이 경우는 푸아로에 대한 도전도 피치 못할 절박함도 아닌 그냥 우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 밝혀지는 일이지만, 이 사건의 묘미는 중요해 보이는 사항들이 사실은 약간 바뀌어도 크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아니며, 사소하게 보이는 부분들이 알고 보면 큰 힌트가 된다는 점이다.

 

"기적이든 기적이 아니든, 어쨌든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겐 의학적 증거가 있고 살인에 쓰인 도구도 있어요. 만약 일주일 전에 누군가가 내게 뱀독이 묻은 독침으로 여자가 살해된 사건을 수사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난 그 인간 면전에 대고 큰 소리로 웃어 주었을 거요. 모욕을 당한 셈이니까!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이 그렇단 말입니다. 이건 모욕적인 사건입니다."

재프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푸아로가 싱긋 웃었다.

"어쩌면 조금 비틀린 유머 감각을 가진 자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살인 사건을 수사할 때는 범인의 심리를 파악하는 게 필수죠."

  

당시로서는 첨단 기계였던 비행기, 그러나 살인 도구는 원시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뱀독. 그 어떤 목격자도 없는 사건. 피살자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크리스티의 소설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캐릭터인데다가 다른 소설에서도 딱히 본 적은 없는 캐릭터여서 흥미로웠다. 적이 많을 것 같은 여인이라서 수많은 용의자가 떠오르겠구나, 생각했는데 여기에서도 반전이 한 번 더 등장한다.

 

"경감님, 이번 사건에 관해 듣자마자, 그러니까 런던 경시청으로부터 전화를 받자마자 전 곧장 그녀의 집으로 갔습니다. 서류는 금고에 들어 있었는데, 모두 태워 버린 후더군요."

프랑스 인이 말했다.

"태워 버렸다고요? 누가? 왜요?"

"마담 지젤에게는 아주 충직한 하녀가 있습니다. 엘리즈라고 하는데, 엘리즈는 만일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금고를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모두 태워 버리라는 지시를 받았답니다. 그녀는 금고 번호를 알고 있었거든요."

"뭐라고요? 그거 정말 놀라운 소식이군요!"

재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시다시피 마담 지젤은 자기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의를 지키는 사람에게는 신의로 보답했어요. 마담 지젤은 고객들에게 양심적이고 공정하게 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무자비하긴 했지만 약속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

 

아직 젊고 팔팔하기 때문일까. 이 소설 속의 푸아로는 활기차게 돌아다니기도 하고, 타인의 삶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하며, 자신의 입으로 수사방식과 사건 해결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 미진했던 부분이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는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내가 한마디 할까요, 마드무아젤 그랑디에? 직업상 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적어도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은 절대 믿지 않지요. 나는 먼저 이 사람을 의심했다가 다음에는 저 사람을 의심하는 식으로 일하지 않아요. 난 모든 사람을 의심합니다. 범죄와 연관된 사람이라면 결백하다는 게 밝혀질 때까지 모든 사람을 용의자로 간주하지요."

 

이것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푸아로가 기본적으로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습니다. 아가씨는 최근 들어서야 살인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지요. 이번 사건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아주 오랫동안 범죄를 다뤄왔고, 그래서 사건을 바라보는 나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죠. 살인 사건을 해결할 떄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범인을 찾는 거죠."

제인이 말했다.

"정의입니다."

노먼 게일이 말했다.

푸아로는 고개를 저었다.

"범인을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정의는 물론 좋은 말이긴 합니다만, 때로는 무엇이 정의인지 확실히 판단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결백한 사람들의 무죄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사건 해결시 푸아로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이상해 보이는 이 사건을 풀어가면서, 푸아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심리에 집중한다. 심리는 크게 두 가지. 첫번째는 살인 현장에 있던, 살인자와 피해자를 재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심리.

 

푸아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왜 아무도 그 살인자를 보지 못했는지, 거기에 심리적 이유가 있으리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당신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이번 사건의 경우, 나는 겉으로 드러난 것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눈을 감아 보시오, 친구. 그리고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세요. 자그마한 뇌세포를 작동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될 겁니다."

 

두 번째는 당연히 살인자의 심리.

 

"사실은 아주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사람들이 직접 털어놓게 하는 거지요."

제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이 말을 안 하려고 하면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그건 그래요."

제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돌팔이 의사들이 그런 식으로 돈을 번답니다. 환자가 찾아오면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하게 만들죠. 두 살 때 유모차에서 떨어졌다느니, 어머니가 배를 먹다가 자기가 입고 있던 주황색 드레스에 과즙을 흘렸다느니, 그리고 한 살 때 아버지의 턱수염을 잡아당겼다느니 등등. 그런 다음 환자들에게 더 이상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고 치료비로 2기니를 챙기는 겁니다. 그러면 환자들은 흡족해하며 자리를 뜨죠. 그리고 아마도 환자들은 실제로 잠을 잘 자게 될 겁니다."

"정말 엉터리예요."

제인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엉터리는 아니랍니다. 사실 그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기반을 두고 있거든요. 말하고 싶은 욕구,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 말입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드무아젤. 당신은 어린 시절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나요? 어머니나 아버지에 관한 추억 같은 것 말입니다."

 

멋지게 해결이 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면 통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그 어떤 소설보다 인간의 '심리'에 집중하고자 했던 소설. 평생 인간의 심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크리스티의 소설은 가장 심리적인 부분이 뛰어난 추리 소설로 평가를 받는 게 아닌가 싶다. 단순히 사건의 트릭, 범인의 정체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죽 따라가다 보면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울 떄가 많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 전체에서 개인적으로 뜨끔했던 부분을 덧붙인다. 비록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지라도, 이런 요소들 떄문에 이 소설이 빛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진짜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말과는 달리 자기가 은밀히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지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 본 적 있을 겁니다. '난 아무도 모르는 먼 나라에 가서 탐험을 해보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는 그런 내용의 소설을 좋아할 뿐, 실제로는 편안하고 안전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추리 소설의 틀에 걸맞는 탄탄한 구성,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낭만적인 분위기, 재치넘치고 매력적인 등장 인물, 곳곳에서 드러나는 유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크리스티의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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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시대 - 1920년대 초반의 문화와 유행
권보드래 지음 / 현실문화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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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만 훑어보아도 흥미롭다.

 

머리말
서론|연애라는 말

기생과 여학생
구여성과 신여성
연애와 독서
연애 편지의 세계상
육체와 사랑
연애의 죽음과 생

결론|연애의 시대 또는 개조의 시대
보론 1 연애 이전의 연애 : 1900년대식 열정과 자유 결혼론
보론 2 연애 바깥의 연애 : 연애열의 시대와 한용운의 '님'

주
인용 소설 목록
그림 목록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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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을 6개의 주제로 나누었고, 각각의 주제 또한 흥미로워서 꼭꼭 씹어먹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 결론과 보론 1, 보론 2, 그리고 '주'에 해당하는 부분만 30쪽이 넘어서 전체적으로 훌륭한 논문을 읽은 느낌이다. 논문이라면 어려울텐데, 이 책의 내용의 핵심이 '연애'라서 머리를 쥐어뜯거나 중간중간 멈춰야 할 만한 주제는 아니다. 마치, 달콤한 케이크의 꼼꼼한 레시피, 혹은 초콜릿의 역사나 아이스크림 일대기 등을 보는 느낌이랄까. 물론, 케이크나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그것에 대한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 책의 두께는 전부 300쪽이 되지 않는 데다가 사진 자료가 많아서 글자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냥 쉬운 책은 아니다. 다만, 고등학교 때 선택 과목으로 근현대사를 공부했었는데, 당시에 어렴풋이 느끼기에도 근현대사 교과서는 다른 과목의 교과서와는 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진 자료가 많고, 상대적으로 가까운 과거인데다가, 급변하는 시기라서 흥미로웠다. 이 책을 보면서 오랜만에 그 당시 생각이 많이 나기도 했고, 고등학생들이 한번쯤 읽어보면 당장 성적에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충분한 지적 유희는 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 당시 읽었더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는 생각도 있었고. 연애를 다루지만, 책은 다소 건조하고 딱딱한 편인데, 교과서에 비하면 훨씬 말랑말랑하지만 이 시대를 다룬 수많은 책과 다양한 영상물들에 비하면 좀 뻑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왠지 나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에라도 눈을 돌리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고교 시절 이 책을 읽었더라면 훨씬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대학에 온 후 이 시대를 다양한 경로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책에 실린 내용들이 큰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렸던 것은 <경성스캔들>이라는 드라마. 조선의 마지막 여자라는 별명을 가진 한지민, 기생이었던 한고은, 조선 총독부 관리인 류진, 모던 보이 강지환이 등장하는 드라마로, 극단적인 윤리관이 충돌하고 극단적인 역사인식의 차이가 공존했던 시기를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와, 경쾌하고 발랄한 청춘 로맨스의 두가지로 그려냈는데 서로 다른 요소들이 붕 뜨지 않고 서로서로 잘 융합되어 유쾌하면서도 애잔한, 참 좋은 드라마였다고 기억한다. 바로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그 시대, 그리고 똑같은 주제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연애란, 일종의 수입품이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연애라는 개념도 함께 유입되었고, 이른바 '글로 익힌' 연애가 한국적 상황에 이식되어 가는 과정의 첫단계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상적 아내, 이상적 남편, 그리고 둘이 꾸민 스위트홈은 전근대의 가족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경치도 좋고 깨끗한 집에 피아노 놓고 바이올린 걸고 선형과 같이 살 것이다. 늘 사랑하면서 늘 즐겁게......"(『무정』)라는 풍경 속에 수직적 질서의 자리는 이미 없다. 1910년대 이후 새로 개발된 `행복`이라는 가치는 1920년대에 일반화된 `스위트홈`의 이상 속에서 현실태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연애는 한편으로 비극과 열정을 상기시켰지만, 다른 한편 안락한 이국풍 생활을 설계하게 했다. 이층 양옥에 부부가 단란하게 피아노 놓고 살면서 때로 노래 부르고 때로 함께 시를 읽는 생활이 바로, 1920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꿈꾼 생활이었다. 게급이 발견되고 민족적 현실이 역설되면서도 이 무국적의 동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애정이 충만한 젊은 부부만의 생활-신여성은 그 풍경의 중심이어야 했다. 중등 이상의 교육이라든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패션은 신세계에의 진입을 약속하는 기회에 불과했다.

"애인을 위하여 살고 애인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 이 욕망은 1920년대 초부터 `연애`가 감추어 두고 있던 욕망이고 했다. 죽음에 직결되어 있는 열정만큼 개인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없었다. 1920년대 이후 각기 고유한 개성과 천재, 그 근거로서의 정과 내면이 강조되면서부터 생겨난 사랑에의 갈구가 죽음이라는 새로운 유로를 찾았을 때 등장한 결과가 연애 자살이요 정사였다. 열정이 개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죽음이 단독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낭만화되기 시작했을 때 등장한 독특한 결합이 자살과 정사였던 것이다. 외국 소설의 독서를 통해 이 독특한 고안에 친숙해져 있었다는 사정 또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다눈치오의 『프란체스카』나 『사의 승리』는 모두 정사라는 파국을 묘사하였고 아리시마 다케오의 단편 「선언」 역시 폐병으로 함께 죽어가는 연인을 제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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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스캔들
박은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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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책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역사를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인 관점의 두 가지로 나누어 바라볼 수 있을 때, 예전에 거시적인 관점이 지배했던 시절로부터 서서히 미시적인 관심으로 옮겨오다가 지금은 전세가 역전된 것 같다.

 

몇 년 전에 읽은 책 중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이 있다. 책 자체가 굉장히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전의 다른 역사서로는 접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일화들이 많아서 조선 시대의 새로운 면모를 본 것 같아서 인상깊었다. 그 책의 저자인 이수광 작가는 역사 소설을 많이 썼는데, 소설을 쓰면서 수없이 했을 자료 조사로 인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수십 년 동안 다져진 필력으로 마치 조선시대 판 <경찰청 사람들>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 외에도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과 같은 시리즈가 다산 초당에서 연이어 나오고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저자의 책들의 제목을 훓어보면 <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 선비들>, <신라를 뒤흔든 16인의 화랑>,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중국을 뒤흔든 27인의 지략가>, <조선을 뒤흔든 21가지 재판 사건>, <조선을 뒤흔든 21가지 비극 애사>등이다. 대략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 책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겠거니 했는데, 저자는 물론이고 출판사도 다르다. 아마도 이수광 작가의 히트작들에 어느 정도 묻어가려는 의도가 보이며, 실제로 이 책이 나온 것이 드라마 <선덕여왕> 방영 3개월 후라고 하니 출판사 쪽에서 상당히 기획해서 내놓은 책이다. 상당히 기획을 했다는 것은, 노력과 시간을 많이 들였다는 것이 절대 아니고 딱맞는 타이밍에 출판하여, 책 자체보다 주변의 이런 저런 상황에 절묘하게 탑승하여 간다는 것이다. 즉, 이수광 작가의 책들의 기본적인 퀄리티를 이 책에서 기대하면 안 된다는 말도 된다.

 

물론 고대사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던 까닭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만의 특별한 미덕이 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책이다. 이미 드라마를 통해, 또 이전에 출판되었던 다른 수많은 책들을 통해 한번쯤은 반복되었던 내용을 여기서는 효과적으로 편집하였을 뿐이다.

 

이 쪽 분야에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겠고, 책은 정말 읽고 싶은데 이런 저런 이유로 무거운 책에는 손이 안 가는 상황이라면 후딱 읽어볼 만한 책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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