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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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에 대한 책'은 굉장히 많다. 최소한 그런 책들은 어떤 의미에서 확실히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일단 요즘 같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서도 고집스럽게 책을 읽는 사람들은 존재하며, 책에 관련한 팟캐스트도 인기가 높고, 온라인 서점은 여전히 성행하며, 감명 깊게 읽은 책을 개인 블로그에 올리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이런 책들을 한 번은 꼭 읽어볼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책을 몇 번 읽었었는데, <서재 결혼시키기>도 좋았고, <책여행책>도 재미있었던 것 같다. 전자는 작가가 소녀 시절부터 어떻게 애서가의 기질을 보였으며, 역시 나중에 애서가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 평생 책을 사랑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 따뜻한 문체로 쓴 책이며, 후자는 '책여행'과 '여행책'이라는 두 파트로 나누어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을 바탕으로 여행하고, 여행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만든, 기발하고 멋진 책이다.

 

책에 대한 책이 사실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위에 언급한 두 책도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최근에 읽은 <베스트셀러의 역사>라는 책은, '베스트셀러'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 상 베스트셀러가 어떤 것들이 있고, 그 뒷이야기는 어떤 것인지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수많은 명사들이 추천하고 싶은, 혹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미친 책에 대한 글을 모은 책도 꽤 많으며, 거꾸로 한 작가가 여러 책에 대한 글을 쓴 책도 있다.

 

이 책 <장서의 괴로움>은 일본 작가의 책인데,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면 국어교사로 근무했다가 책에 대한 라디오방송을 하기도 했고, 현재는 신문에 책 서평 기사를 쓰고 있다고 한다. 일본 문학에 대한 책도 여러 권 낸 것 같다. 이 책은 무엇보다 표지가 정말 압권인데, 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은 물론이거니와 바닥과 소파 위에 어지럽게 책이 널려 있는 가운데 발 디딜 틈이 없어 책을 밟고 서 있는 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다. 그 역시 손에는 책을 들고 있는데, 색이 칠해진 부분은 그림에서 오로지 책을 제외한 부분, 그러니까 아마도 작가 자신일 중년 남자와, 고양이와, 소파와, 높은 곳에서 책을 꺼낼 수 있게 놓여져 있는 사다리 뿐으로, 바탕색인 황토색이 그대로 책 색이라서 그런지 이 어지러운 광경 속에서도 왠지 눈이 편안해지는, 묘한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또 재생종이를 써서 그런지, 본문을 읽으면서도 하얀색으로 번들거리는 책들과 다르게 온화하게 느껴진다. 매 장마다 끝에 붙어 있는 교훈도 그렇고, 각주도 그렇고, 글자체도 그렇고, 왠지 구수한 느낌이 나기도 한다.

 

독서가와 장서가는 미묘하게 다를 수 있는데, 단어 그대로 독서가는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일 것이고, 장서가는 많은 양의 책을 보유한 사람일 것이다. 얼마 전까지 SNS에 돌아다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칼 라커펠트의 서재. 그는 독서가이면서 장서가인데 사진 속에 보이는 엄청난 책의 양에 압도당한 적이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그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질 정도였으니까.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 명품을 즐기는 사람 중 상당수가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명품을 만들어내는 사람 또한 책을 별로 읽지 않는 사람일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는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모두가 갈망하는 브랜드를 만들어낼 정도의 사람이라면, 엄청난 독서로 키워진 지성과 감성이 그를 뒷받침했을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발상인데 말이다.

 

한편으로 어릴 때 나의 꿈도 이런 서재를 갖는 것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아씨들> 속에서 작가가 되고 싶어하던 조가 로리의 집에 찾아가 서재에 감명받는 장면은 아직까지 생생하고, 어릴 때 보았던 디즈니 만화 영화 <미녀와 야수>의 벨이 책이 빽뺵한 서점에서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책을 고르고 노래를 부르던 그 장면도 떠올랐다.

 

장서가는 어떤 괴로움을 가지고 있을까. 최소한 이 책의 장서가들은 권 수로는 1만권은 다 넘는 것 같고, 책장으로는 모자라 온 집안을 책으로 다 뒤덮어 결국 같이 사는 가족의 원성을 듣거나, 혹은 책 무게 떄문에 집이 내려앉는 경험도 해 본 사람들이다. 하도 책이 많아 이 책이 자기에게 있는지도 모르고 또 사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극적인 것은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이 때 온 집안의 책들이 전부 와르르 무너지고, 망가진 경험이 기점이 되어 책을 처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나는 독서광이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그래도 책을 많이 읽는 편이라고 자부할수 있는데 장서가는 아니다. 학생 신분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아직 책 한 권을 살 때 상당한 고민을 하는 편이고, 내 거주지 근처의 도서관이 워낙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에게 어떤 책이 있는지도 몰라서 똑같은 책을 또 살 정도라면 좀 병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떄도 있다. 사놓고 읽지 않을 정도로 책을 많이 사는 사람이라면, 그의 어마어마한 장서 또한 일종의 과시욕이 아닐까 싶은, 약간의 삐딱한 마음도 드는게 사실이다. 이 책의 11장은 '남자는 수집하는 동물'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책을 수집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은 목표가 눈앞에 보이면 도전한다. 끝없는 수집은 대개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을 수집하려는 사람은 없다. 장르나 특정 작가 혹은 짧은 기간에 활약한 출판사나 시리즈물 등 제한 영역 안에서 목표를 세운다.

 

자신에게 분명히 그 책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결국 찾지 못해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이나, 끝끝내 전자책을 거부하며 기꺼이 '장서의 괴로움'을 감내하려는 저자의 태도는 나로서는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지향하고 싶은 삶도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데에 돈을 쓰는 것보다는 한결 친근감이 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4장에서 결국 저자는 자신의 장서 중 일부를 처분하기로 하는데 이른바 '오카자키 다케시 1인 헌책시장'으로, 헌책방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이 장소도 빌리고, 홍보도 하여 3천 권 정도의 책을 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던 책의 10퍼센트도 줄지 않았지만. 후기에서 저자는 말한다.

 

한 인터넷 리서치 회사의 2007년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이 한 달에 읽거나 사들이는 책의 양은 이렇다. 한 달 독서량은 잡지를 포함해 "한 권에서 두 권"이 40.42퍼센트, "세 권에서 다섯 권"이 28.39퍼센트다. 이런 마당에 '장서의 괴로움'으로 책 한 권을 쓰다니 속세와 거리가 먼 이야기긴 하다. 하지만 시대의 정중앙을 돌파해가는 이들은 언제나 '소수파'다. 나는 앞으로 억지를 부려서라도 내 신념을 밀고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로 '괴로워'하며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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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2015-05-2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쓰시네요! 감탄했습니다. 눈여겨보던 책인데 읽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어요^^

마고할미 2015-05-23 23: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이 워낙 좋은 책이라 리뷰도 잘 써졌나 봅니다. 한번 읽어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잘 모르는 일본 작가들이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몰라도 크게 문제는 없는 것 같거든요. 내용이 집중을 해야 할 만큼 어려운 내용이 아니고, 장서가인 작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필처럼 쓴 글이어서 가볍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인은 쉽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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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부인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어. 내가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무사히 빠져나간다는 게 어렵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녀는 내가 틀렸다고 하더군. 살인을 하기는 아주 쉽다는 거야......."

 

이 책의 원제는 <Murder is easy> 혹은 <Easy to kill> 이다. 사실 어느 쪽으로 해도 뜻은 똑같은데, 왜 이런 식으로 구분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각각 소설이 따로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위키피디아에 들어가보니 같은 소설로 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는 바로 같은 해인 1939년에 출판된 장편 소설도 비슷한데 <Ten Little Niggers> 혹은 <And then there were none> 혹은 <Ten Little Indians> 이렇게 3가지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이름이 여러 개인 이유는, 처음에 소설이 나왔을 때, 'Niggers'나 'Indians'라는 단어들이 인종차별적이기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 소설은 왜 이름이 두 가지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목록을 죽 살펴보면, 꽤 여러 편의 소설들이 이처럼 여러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저작권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절, 작가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책 제목을 바꿔서 출판된 경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발표 이후 사람들이 원래 책 제목이 아니라 다르게 부르면서 재판을 찍을 때 작가의 동의를 얻어 자연스럽게 제목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경우도, 첫번째 책은 원래 <해리포터와 철학자의 돌>이었지만, 미국에서 출판되면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 경우는 마케팅 때문이었는데, 아마 크리스티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루크라는 남자가 있다. 말레이 해협에서 오랫동안 있다가 영국에 귀국한 전직 경찰로, 몀예 퇴직해서 연금과 소소하게 들어오는 수입으로 한가롭게 살아가는 신사이다. 기차에서 만난 한 노부인으로부터 위치우드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여러 건의 의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런던의 친구 집에 도착한 주인공은 신문을 통해 런던 경시청으로 가던 그녀가 차에 치여 숨졌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1주일 후, 또다시 신문에서 그녀가 다음 희생자로 생각된다고 했던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고, 사망한 그 사람의 장소와 직업이 당시 그녀의 말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위치우드로 직접 내려가 사건을 조사한다.

 

"살아가면서 직시해야 하는 가장 불쾌한 진실 중 하나는 모든 죽음에는 그 죽음으로 인해 득을 보는 사람이 있다고 느낄 때입니다. 단순히 돈 문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침 루크의 친구 지미의 사촌 브리짓이 이 마을에 살고 있기에, 지미가 브리짓에게 잘 말해주어 루크는 지미의 촌으로 그 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미신과 관습에 대해 인터뷰를 한다는 명목으로 머무르게 된다.

 

"사람들은 타고난 성정이 그래서가 아니라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게 잔호간 짓을 할 때도 있어요. 어린아이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성인이 미치광이 같은 교활함과 야만성을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면모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일어나는 모든 잔혹하고 어리석은 일의 근원에는 바로 그런 성숙 문제가 있다고 봐요. 그런 유치한 것들을 없애야죠."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손을 폈다.

브리짓이 갑자기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목사님 말씀이 옳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요. 어른인데 아이 같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죠......."

루크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누군가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위필드 경이 어떤 면에서 지독히 유치하기는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사람이 위필드 경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위필드 경은 조금 우스꽝스럽기는 했지만 확실히 무서운 인물은 아니었다. 루크 피츠윌리엄은 브리짓이 누구를 생각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루크가 기차에서 만난 핀커튼 부인은 헤어지기 전 자신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그런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말을 근거로 삼아 루크는 살인자는 최소한 핀커튼 부인과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심되는 사람 중 먼저 의사인 토머스 박사를 찾아간다. 그는 패혈증으로 사망한 험블비 박사와 종종 의학적인 견해가 충돌하였고, 험블비 박사는 자신의 딸에 대한 토머스 박사의 구애를 무시했다. 또한 공식적으로 사인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희생자에게 약물 처방을 할 수 있는 의사이기도 하다.

 

"꽤 쉬워요."

"뭐가요?"

"무사히 빠져나가는 거 말입니다."

그는 다시 매력적이고 소년 같은 미소를 띠었다.

"조심한다면 말이죠. 조심하기만 하면 됩니다! 영리한 사람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죠. 그게 바로 비결입니다."

그는 미소를 짓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루크는 서서 계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의사의 미소에는 짐짓 겸손한 체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루크는 자신을 성숙한 어른으로, 토머스 박사는 젊고 순진한 젊은이로 보고 있었다.

한순간 그는 그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의사의 그 미소는 어른이 똑똑한 아이에게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아마도 런던에서 핀커튼 부인을 차로 친 사람은 살인자일 것이다. 따라서 그 날 위치우드를 비웠던 사람이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그러던 도중 한 명이 더 살해되고, 모든 정황상 단 한 명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막판에 가서 또 한번 역전된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루크는 사랑하는 브리짓의 생명을 구하지만, 기존의 탐정들과는 다르게 추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나가던 험블비 박사의 부인의 조언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비껴간다. 마지막에 배틀 총경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는 사건을 정리할 뿐이다. 굉장히 복잡한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가능했던 이유는 구식 수법이었기 떄문이다. 즉, 살해 방법이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했기 떄문인데, 단 하나 그 사람이 의심받지 않았던 이유는 첫번째는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고, 두번쨰는 눈에 보이는 동기가 없었기 때문에.

 

추리 소설에서 사실 살인광이 등장하면 재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확실한 동기가 있는 사람들이 용의자가 되고, 숨겨졌던 뒷이야기가 밝혀지며, 알리바이가 전복되어야 추리의 재미가 있다. 이 소설에서는 자신이 평생동안 원한을 품었던 한 사람에게 혐의를 씌우기 위한 이유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살인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복수라는 동기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직접 그 대상에게 하는 복수가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을 죽이면서 복수한다는 것은 사실 맞지 않는다. 그보다도 살인 자체에 대한 즐거움, 스스로의 영리함에 대한 만족, 그러면서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에게 혐의를 덮어씌우는 쾌감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것일 것이다. 즉, 이 경우 살인의 동기는 그저 살인자의 감정인 것이다. 이 경우 의외의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지면서 오는 즐거움은 있지만, 이후에 동기를 알고 나면 다소 김이 빠지기도 한다.

 

살해 수법도 정교하지 않고 즉흥적인 것이 많았으며, 어쩌면 시골 마을, 그것도 아직까지 민간전승이 남아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살인의 몇몇 경우는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많았고, 어떤 면에서 범죄자의 운이 좋았기 떄문에. 하지만 소설의 구성 면에서는 마지막까지 사건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던 주인공에게는 딱 맞는 상대라고 생각한다. 초반의 기차 장면도 좋았고, 제목과 완벽히 상응하는 내용이며, 군데 군데 복선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시 떠올리게 할 만큼 알찬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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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5 (완전판) - 푸아로 사건집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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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에 나온 이 단편집에는 푸와로의 활약 11편이 실려 있다. 모든 이야기에는 그의 충실한 벗, 아서 헤이스팅스가 함께 한다. 1920년의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1923년 <골프장 살인 사건>에 이은 소설로, 이미 <골프장 살인 사건>에서 헤이스팅스는 결혼하여 남아메리카로 떠났지만, 내용상으로 보았을 때 아직 런던에서 푸아로의 곁에 머물렀던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 틈틈이 써 놓았던 단편들을 모아 1924년에 출간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결혼하기 전, 푸아로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고 다니던 이 때의 이야기들은 꼭 셜록 홈즈와 왓슨을 보는 것 같아 즐겁다.

 

'서방의 별'의 모험

동방의 별과 서방의 별, 두 개의 보석을 훔치겠다는 편지가 도착하고, 각각의 주인인 귀부인은 푸아로를 찾아온다. '서방'이라고 하면 당연히 '동방'을 연상하게 되지만, 만약 원래 보석이 하나뿐이어다면?

 

마스던 장원의 비극

보험회사의 의뢰를 받은 푸아로. 이때만 하더라도 사건을 가려 받을 처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의문의 죽음, 젊고 아름다운 아내, 사인은 내출혈. 진실은 무엇일까?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하나의 의문. 입청장에 대고 쏴서 총알이 뇌에 박혔기 때무에 의사들을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는데, 입 안에 분명이 총상의 흔적이 있었을텐데.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닐까?

 

싸구려 아파트의 모험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아파트에서 거주하게 된 로빈슨 부부. 과연 이 뒤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

까? 로빈슨이라는, 흔하디 흔한 영어권 이름에 착안할 때, 꼭 그 이름이었어야 가능했던 이유. 

 

사냥꾼 오두막의 미스터리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살해당한 사람의 조카가 찾아온다. 조카의 알리바이는 확실한 상황. 조카의 부인은 가정부에 의해 알리바이가 입증되고, 가정부는 곧 실종된다. 크리스티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 곧 힌트가 된다. 가정부와 조카의 부인은 동시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

 

백만 달러 채권 도난 사건

런던에서 뉴욕으로 보내던 백만 달러 상당의 자유공채가 올림피아 호 선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도착하자마자 모든 승객들의 몸수색을 했으나 공채는 발견되지 않았고, 배가 도착한 후 30분 이내에 그 채권이 매각되었기 때문에 배에 숨겨지거나 바다에 던져진 것도 아니다. 여기서 대전제가 뒤집힌다. 애초에 그 배에 채권이 있기나 했을까?

 

이집트 무덤의 모험

이집트 무덤 발굴단의 사람들이 잇달아 사망한다. 심장마비, 패혈증, 권총 자살, 파상풍... 곧 이집트 보물에 얽힌 저주와 연관된 옛 미신이 세간에 오르내린다. 크리스티 소설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결론으로 나올 리는 없다. 누군가의 살인이며,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하면 범인은 좁혀지게 된다.

 

그랜드 메트로폴리탄 호텔 보석 도난 사건

객실에서 사라진 보석. 객실 담당 하녀와 보석 주인의 하녀는 서로를 의심하고, 보석 주인의 하녀의 침대밑에서 사라진 보석이 발견되지만, 곧 모조품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보석 주인의 하녀가 방을 비운 사이는 단 두 번으로 각각 12초와 15초. 과연 범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이 범죄가 이루어진 것일까?

 

납치된 총리

영국 총리 암살 미수 사건에 이어, 총리가 납치된다. 24시간 후, 총리는 회담에 참석해야 하고, 극비로 정부 인사들이 푸아로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두 사건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하지만,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가 의문인데, 마침내 푸아로가 진실을 밝혀낸다. 영국 총리의 얼굴이 꼭 다쳤어야만 하는 이유. 연합국 회담에 무사히 참석한 총리의 명연설로 국가적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된다. 

 

대번하임 씨의 실종

은행가이자 재무 전문가인 대번하임 씨가 실종된다. 토요일에 한 투자자와 약속이 있었으나 대번하임의 부재로 투자자는 그냥 돌아가야 했다. 일요일에 경찰에 신고되었고, 월요일에 대번하임 씨의 서재의 커튼 뒤쪽의 금고가 부서졌으며 상당액의 무기액 채권과 지폐 뭉치, 보석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정원사는 토요일에 멀리서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정원을 통해 서재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며 그 시간은 오후 6시 이전이다. 하녀는 6시 15분 경에 투자자가 정원을 통해 서재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였으며, 그가 대번하임의 아내에게 인사하고 그 집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10분 후이다. 한편 대번하임씨가 늘 끼고 다니던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반지의 행방이 발견되었는데, 경관에게 행패를 부려 체포당한 한 좀도둑의 말에 따르면, 웬 신사가 몰래 버린 반지를 자신이 주워 전당포에 저당 잡혔다는 것이다. 대번하임씨의 정원에는 호수가 있는데 그곳에서 그의 옷이 발견되었지만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호수 건너편의 작은 문으로 나가면 석회 굽는 가마가 있는데, 가마에서 시체는 태울 수 있지만 반지 같은 금속은 녹일 수 없다는 사실까지 종합해보면, 토요일에 만나기로 한 투자자에게 완벽하게 불리한 정황이다. 이 와중에 대번하임 은행은 도산한다. 대체 이 사건은 어떻게 된 것일까? 푸아로는 묻는다. 그 남자였다면 어디에 숨었을 것 같냐고. 헤이스팅스는 그대로 런던에 있겠다고 이야기한다. 군중 속에 있는 쪽이 안전하니까. 재프 경감은 말한다.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세상에서 제일 외딴 장소로 뜨겠다고. 푸아로는 말한다. 만약 자신이 경찰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면 감옥 안에 숨을 것이라고!

 

이탈리아 귀족의 모험

한 이탈리아 백작이 살해되기 직전, 주치의의 집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마침 함께 있던 푸아로와 헤이스팅스는 의사와 동행하나, 그는 전화기를 손에 쥔 채로 뒤통수를 가격당해 살해당한 상태로 발견된다. 그가 있던 방에는 의자 세 개와 커피 세 잔, 시가 하나와 필터 담배 두 개가 발견된다. 하인 겸 집사의 말로는 전날 아침, 이탈리아 신사 두 명이 자신의 주인을 찾아왔으며, 살해당한 그 날 저녁에도 방문하였고, 자신의 주인은 오늘 밤은 아파트를 떠나 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아로는 여지 없이 살인자가 저지른 실수를 발견해낸다. 커튼을 치는 것을 잊었다는 것과 쌀을 넣은 수플레엔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남겨진 커피 세 잔에도 불구하고 백작의 이는 새하얗다는 것.

 

사라진 유언장 사건

막대한 재산을 가진 큰아버지가 사망 후 유언장이 공개된다. 사후 1년 동안 모든 재산은 조카딸의 소유가 되며, 그 사이에 그녀는 자신의 뛰어난 머리를 증명해야 하고, 그 기간이 지나면 집을 포함한 모든 재산은 여러 자선단체에 기부될 것이라고 적혀 있다. 현명한 그녀는 즉시 이 문제를 푸아로에게 상의하며 푸아로는 그녀가 유산을 받을 수 있게 한다.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헤이스팅스. 그러나 언제나 최고의 전문가를 고용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는 재산을 받을 자격을 충분히 증명했다고 푸아로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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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의 역사
프레데리크 루빌루아 지음, 이상해 옮김 / 까치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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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말 그대로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아마도 가장 많이 팔린 책일 성경부터, 이른바 최초의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는 '돈키호테', 최근의 '해리 포터'시리즈까지.

크게 16세기부터 시작해서 지난 500여년간의 서양 역사를 훑어내려오며 400여권에 달하는 책들에 대해 분석하며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파헤치는 책이다.

 

서문

제1부 책, 베스트셀러란 무엇인가
1 거대 숫자의 매력
2 성공의 시간
3 베스트셀러의 지리학

제2부 저자, 베스트셀러를 어떻게 만드는가
4 작가와 성공
5 사기꾼들의 소설
6 발행인의 부상(浮上)
7 검열 만세!
8 책과 이미지의 결혼

제3부 독자, 왜 베스트셀러를 구입하는가
9 의무적인 독서
10 파뉘르주 콤플렉스
11 안락의 문학

결론 : 기적은 계속된다


한국어 판 편집자의 후기
인명 색인
서명 색인

 

 

이 책의 목차만 훑어보아도 알 수 있듯이 첫째,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지, 둘째, 어떤 저자가 쓴 글이 베스트셀러가 되는지, 세번째, 어떤 독자가 책을 구입하여 베스트셀러를 만드는지에 대해 적고 있다. 베스트셀러란 빠른 시간 내에, 엄청난 판매량에 도달한 책으로, '시간'은 갈수록 짧아지는 경향이 있고 '판매량'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며 그 적절한 예로 '해리포터' 시리즈 특히, 전 세계 동시 발매 첫날에 1100만부가 팔렸던 7권을 든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냐? 반드시 훌륭하고 고상한 책만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책을 쓴 저자 정도의 애서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대체 왜 저런 영화가 대박이 나는지 모르겠으나, 대박이 나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하며, 한 영화의 성공 뒤에는 영화 자체의 훌륭함 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 않게, 혹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비중으로 수많은 영화 외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베스트셀러 또한 다르지 않다고.

 

400여권의 책들, 500여년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오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책, 학창 시절에 고전으로 읽었던 책들, 영화화된 책들, 최근의 베스트셀러 등 익숙한 이름들을 확인하여 그 뒷이야기를 알아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아쉬움도 물론 존재하는데, 단순히 작가가 프랑스인이라서 프랑스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많고, 동양의 책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는 것이 아쉽다. 다른 건 몰라도, <아라비안 나이트>와 <삼국지>는 포함이 되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오 쩌둥의 저서들은, 근대로 접어든 이후라서 책의 집계량이 어느 정도 정확히 잡히고, 역사적으로 중국이 서양과 여러 면에서 밀접했던 시기이기 떄문에 저자의 관심을 끌었던 것 같고, 근대 이전의 중세, 동양이 서양과 달리 독자적으로 존재했을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 아쉽다. 또 아쉬운 것은, 수많은 역사 속의 베스트셀러에 대해서 전부 논하다보니 결국 하나의 주장으로 모아지지 않고, 이것 저것 사례의 나열에 끝나버린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베스트셀러가 나오려면, 책의 분량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야 하며, 시대정신과 어느 정도 닿아 있으면서, 유명 인사가 직접 이 책을 언급하거나, 작가가 유명해지거나,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책의 발매 전후에 작가와 책 자체에 대한 스캔들이 발생하는 등의 일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이 책에서 가장 자주 꼽는 책 중 하나인 '해리포터시리즈'는 이 모든 공식에 들어맞지 않는 책이다.

 

아마도 책의 맨 마지막 장, 작가의 말만이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드는 유일한 결론일 것이다.

 

토머스 쿤은 과학적 혁명의 구조에 대한 시론에서 우리가 어떤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지적인 틀 속에 위치해 있는 한, 그 틀에 들어오지 않거나 그 패러다임과 모순되는 사건이나 사실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패러다임을 바꿀 때까지 불가능하다. 이런 인식은 문제가 되는 사실들이 자리를 잡는, 더 이상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새로운 이해의 틀을 정립하도록 이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것이 바로 문학계 혹은 출판계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탐정소설이란 독자들을 매료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짧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가 미리 그 독자들이 지속적이고 어려운 독서에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중적인 독자는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것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예단한다. 그리고 우리는 거꾸로 여유가 있고 교양이 풍부한 사람들은 아무리 그들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이라도, 피곤에 절은 프롤레타리아들이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기차 3등칸에서 읽는 책을 상기시키는 형태로는 절대 읽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우리가 이런저런 작품이 조금이라도 성공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패러다임들은 막연한 경험주의에 근거한 가설들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 어떤 일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그 일이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경험주의 말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난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사라지게 하고, 수많은 모방자들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볼 때, 스티그 라르손은 2004년 이후로 서점들의 진열창을 가득 채운, 하지만 『밀레니엄』의 대성공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웅장한 탐정소설의 선구자였다.

패러다임이 폭발하기를, 그러면 불가능한 것이란 더 이상 없다. 그떄 기적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패러다임의 사라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이 느낌을 더욱 굳건히 해준다. 우리가 딱 하나 아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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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4 (완전판) - ABC 살인 사건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18번째 장편소설이며, 푸아로가 등장하는 11번째 작품이다. 크리스티의 소설이 워낙 많다보니, 그녀의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다. 탐정에 따라서 분류할 수도 있고, 살인 방식이나 벌어진 장소, 범죄자의 유형 등등 비슷한 그룹으로 묶는 것이 가능한 경우가 많은데, 그 중 어느 분류에도 속하지 않는, 그런 유일한 소설들이 있다. 이 소설도 그 중에 하나다.

 

이 소설은 1935년 6월, 남아메리카로 이민갔던 헤이스팅스가 영국을 잠시 방문하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푸아로의 초현대식 거처를 보며, 이런 곳에서는 암탉도 사각형 알을 낳는 것이 아니냐는 농담을 하는 부분에서는 <푸아로 사건집>의 '대번하임씨의 실종'이 떠오르며, 네 사람이 브리지 게임을 하다가 한 명이 빠져나와 난롯가에 있던 한 사람을 죽인다면, 누가 범인일 것 같냐는 푸아로의 말은 이 소설 이후에 씌여진 <테이블 위의 카드>와 연결된다. 푸아로의 말처럼, 이상적인 범죄라는 표현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 소설에서 탐정과 용의자는 각각 네 명이 등장하므로 크리스티 입장에서 이상적인 추리 소설로 꽤 많은 시간 고민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ABC라는 것은 살인자가 푸아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계획 범죄를 예고하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기도 하며, 살인 기법이기도 하다. A로 시작되는 도시에서 A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살해되고, 그 다음은 B, 그 다음은 C...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1800년대 후반 영국에서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끝내 잡히지 않았던 잭 더 리퍼를 떠올리기도 했고,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던 조디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둘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사실 범인의 이름도 정확하지 않다.

 

이 소설도 마치 이런 살인광의 소행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반전이 밝혀지는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푸아로의 다른 사건들과 전혀 다른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악마스러운 범인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 작가 또한 이 작품이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서언에서 아서 헤이스팅스 대위가 대영제국 제 4급 훈장 수훈자라는 설명까지 덧붙이며 그의 입을 빌려 '푸아로가 이전에 다루었던 것들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말이지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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