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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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베르테르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그때는 읽는 내내 베르테르가 잘 이해되지 않았고, 마지막 장면에 자살을 해 버리는 충격적인 소설로만 기억에 남았다.

 

다시 베르테르를 읽게 된 것은 지하철 신문 때문이었다. 박건형, 송창의가 더블 캐스팅 된 동명의 뮤지컬에 대한 기사와 광고를 보고 호기심이 들었다. 해사한 얼굴의 송창의와 그에 비하면 좀 더 저돌적인 인상의 박건형, 이 두 사람이 베르테르의 타협을 모르면서도 순수한 고집을 지닌 모습을 잘 반영했다고 느껴졌다. 여기에 더 불을 붙인 건 민영기라는 배우 때문이었다. 다른 작품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 배우는 내가 참 좋아하는 스타일의 배우이다.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유머 있는 모습, 그리고 날카롭지만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고 청량한 목소리 때문에 더 반했던 것 같다. 이 배우가 초연에서는 베르테르였는데 이번에는 알베르트로 나온단다. 결혼 이후 생각이 바뀐 부분이 많았다는데 그 기사를 보고 더더욱 뮤지컬이 보고 싶었다.

 

그게 여의치 않으니 책을 보게 된 것이다. 확실히 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쏙쏙 머리에 들어오고 가슴을 푹푹 찔렀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베르테르가 답답한 것은 여전했다. 아니 그 당시 베르테르가 이해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기 때문에 더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가슴으로는 베르테르가 이해되어도 머리로는 납득되지 않았다.

 

나는 여자니까, 아무래도 로테의 입장에서 베르테르를 보게 될 수밖에 없다. 여자의 입장에서 베르테르는 어떤 남자일까. 과연 로테는 베르테르를 사랑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갔다고 한다. 실제로 뮤지컬에서 엄기준이었나? 아무튼 이 배우가 베르테르를 맡았을 때는 로테가 베르테르를 사랑했다고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베르테르가 되어버린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아서-_-;;

 

베르테르는 어찌 보면 나약함과 우유부단의 상징일 수도 있다. 소설 내내 그렇게 보이던 그가 마지막 순간에 권총을 자신에 머리에 댄 것은 어찌 보면 동일한 인물의 행동으로 보이기에 놀랍기도 하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분명히 빌헬름은 로테의 결혼 전 베르테르에게 충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용기 내어 그녀에게 결혼 전에 고백하던가, 아니면 접으라고. 이런 절친의 충고에 베르테르는 나름의 이유를 대어 자신의 주저함을 변명한다. 그 이유가 뭔지 벌써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보기에 같잖은 이유였던 것 같다. 아마도 베르테르는 자신에게 천상의 존재나 다름없던 로테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을 무의식중에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누구 말대로 결혼은 현실이니까.

 

이렇게 현실에 살기를 부정하던 베르테르는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한 로테를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마치 엄마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오직 그녀만을 그리는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이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버리고 그녀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자 견딜 수 없게 된 베르테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내가 없어져야 그 둘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긴 채. 유치하고 어리석은 사고이다. 사랑은 ‘all or nothing’이 아니며, 때로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으며,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절벽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세우고 내려야 할 때도 있으며, 시간이 흐른 뒤 뒤돌아보며 추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 준 것에 대해 상대에게 고마워하며 다음 인연을 위해서 내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는 것을, 그게 성숙한 사랑이라는 것을, 어른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베르테르는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사랑이 과연 진짜 어른의 사랑인지 의심하게 되고 그의 슬픔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베르테르는 과연 ‘여자’ 로테를 ‘남자’로 사랑한 걸까.

 

아마도 로테도 이 정도는 눈치 챘을 것이다. 나는 여자니까, 단언할 수 있다. 로테가 사랑한 것은 알베르트라고. 베르테르에게 보낸 것은 연민이라고. 누나가 동생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정도의 애정일 뿐이라고.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난 후 동생들을 위해서는 엄마의, 아버지를 위해서는 안주인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모성애가 넘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넘치는 모성애로 맑은, 한편으로는 고지식한 베르테르를 가엽게 여기며 끌어안았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 버거운 짐을 짊어진 그녀에게 알베르트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꺼이 로테의 부담을 함께 감당하기로 일찌감치 결정했던 알베르트가 로테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또 알베르트가 곁에 없었더라면, 그녀는 결코 그녀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테르가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베르트가 로테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며 흥분하는 대목이야말로 베르테르의 좁은 시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테 같은 여자가 왜 내가 아닌 알베르트를 택했을까? 대화도 잘 통하고 영혼의 교감도 잘 되는 내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알베르트를 왜 택했을까? 이런 고민을 왜 베르테르는 해보지 않았을까?

 

이 소설은 대문호 괴테의 젊은 날의 자전적 소설이다. 괴테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어리석은 행동, 하지 말라고. 비록 이 소설의 발표 이후 미친 듯이 ‘베르테르 효과’가 번져갔지만 정작 이 소설을 만들어 낸 작가의 시선은 명확한 것이다. 이런 사랑, 이런 유치한 사랑, 딛고 일어나 아이에서 어른이 되라고 말이다. 거부당한 사랑에 힘들어하던 괴테는 이 소설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연의 슬픔에 매몰되어버린 베르테르, 실연의 슬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괴테, 우리의 슬픔은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진정으로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고 싶다면 베르테르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슬픔의 종착은 어디여야 할 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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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핑멈 - 초특가판
니올 존슨 감독, 리즈 스미스 외 출연 / 엔터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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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p Mum 잠자코 있다.

 

원제(Keeping Mum)만 보더라도 김지운 감독의 한국영화 ‘조용한 가족’이 떠오른다. 소재나 분위기, 내용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비슷한 듯 다른 영화이지만 ‘키핑 멈’은 영화 전체에서 영국식 분위기가 뚝뚝 넘쳐난다.

 

43년 전의 사건,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일들. 임산부라는 설정만 보더라도 대번에 그레이스와 굿펠로우 가족의 연관성을 눈치 챌 수 있다.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블랙 코미디이다. 너무 점잖아서 블랙 코미디 특유의 날을 다소 무디게 만든 듯한 아쉬움이 있지만.

 

‘은총’이라는 의미의 그레이스,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굿펠로우, 등장인물의 이름에도 이 영화의 숨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과연 그레이스는 신이 이 집에 보낸 은총일까. 결국 굿펠로우 가족은 겉으로 보기에만 괜찮은 사람들에서 진짜 행복한 사람들이 된 걸까.

 

로완 앳킨스는 ‘빈’ 시리즈로 유명한 배우이다. 이 영화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고지식한 목사로 이만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똑똑해서 코미디 연기를 과거에 그렇게 잘 했었나보다. 해리포터의 맥고나걸 교수로 유명한 매기 스미스의 연기도 좋다. 이 영화가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따뜻함을 잃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영화의 중심에 있는 그녀의 연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히스테리한 목사부인의 역할을 맡은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의 연기가 제일 마음에 든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여주인공이라고 한다. 유명한 영화지만 특별히 볼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그녀의 젊은 시절을 보기 위해서라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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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쉬 - 느리게, 단순하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
린다 에겐스 지음, 메어리 아자리언 삽화, 조연숙 옮김 / 다지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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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름을 처음 안 것은 ‘홍승기의 시네마 법정’을 통해서였다. 해리슨 포드 주연의 ‘위트니스’의 배경이 된 아미쉬 마을은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 대국에 이런 시간이 멈춘 듯한 마을이 현재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그 다음으로 본 것은 미국드라마 ‘본즈’의 한 에피소드였다. 단순히 아미쉬 마을의 모습을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낸(내 짐작이다. 나는 영화 위트니스를 글로만 보았기 때문에) 영화와는 달리, 미드의 에피소드에서는 아미쉬 마을을 떠나고 싶은 마음과, 남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작품 사이에 있는 세월의 흐름 때문일까.

읽으면서 내내 평화로운 마음을 느꼈다. 로러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장 심란하고 촉박하고 기대고 싶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시험기간에 읽지도 않을 것이면서 책을 괜히 빌린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편. 안. 함. 을 느끼고 싶어서.......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지난 25년간 북미 전역의 아미쉬인이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2000년에는 144000명이란다. 정작 아미쉬의 시작인 알사스 지역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는 사라진 이 조직은 초기 기독교 교리에 충실하다는 이유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편견으로 인해 시달리기도 했다. 단추는 검소하지 않아서 옷에 달지 않고, 전화도, 자동차도 세탁기도 없다. 서로서로 도와야 하기 때문에 보험에도 들지 않고 정부의 보조도 받지 않는다.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원칙 때문에 군대에 가지도 않고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도 대응하지 않는다. 답답하리만큼 고집스러운, 그러면서도 순수한 이들을 보면서 대단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서울대-카이스트 부부가 낙향해 산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정도의 차이일지라도 누구든 살면서 아미쉬 같은 삶을 꿈꾼다. 마치 연어가 가진 본능인 것 같다. 원시시대부터 우리 몸에 내재된 태초의 방식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다른 것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텔레비전이 없어서 아쉬운 적이 없었듯이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욕심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지켜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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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위트 사전
앰브로즈 비어스 지음, 정예원 옮김 / 함께(바소책)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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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일본의 ‘독소 소설’ 시리즈 정도는 아니었어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단 문화적 환경이 다르고(같은 동양문화권이 아니라 미국임) 시대가 다르다 보니(저자는 남북전쟁에 참가했던 사람이란다. 지금으로부터100년 전이다.) 읽고, 0.01초 만에 감탄이 나오지 못하고 다소 버퍼링이 걸렸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요즘을 보면, 아무리 혼란기라도 이럴 수가 있는가 할 부분이 많다. 법치주의, 민주주의, 원칙 앞에 어떠한 지연, 학연, 혈연도 통하지 않는 나라(물론 그 rule이라는 것이 패권주의와 가진 자의 자기 방어일 수 있지만, 어쨌든 rule은 rule이다.)가 초창기에는 이런 나라였구나라고 생각하니 새삼 신기하다. 아마도 요새 신문의 만평에 실릴 정도의 이야기일 것 같다. 안 그래도 작가를 검색해보니 비판적인 저널리스트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종교인, 공권력, 정치인에 대한 신랄한 비판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었겠지만 지금의 시각으로는 주석을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와 일치하는 부분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분명히 우화집이랬는데 우화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환상우화집'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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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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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이렇게 재기 넘치고 따뜻한 작가였던가? 1주일간 공항에서 보냈던 그의 이야기는 옮긴이의 말처럼 “한 바퀴 원을 돌며 출발지로 돌아왔지만, 그 원은 평면의 원이 아니라 상승 나선운동을 하는 원”이다. 냉철하고 날카로워서 때때로 정떨어질 정도(!)였던 그의 과거의 작품에 비하면 그의 또 다른 이번 보고서는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원래 작가들은 젊었을 때는 날카롭게 세상을 비판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숙하게 자리한다고 한다. 그래서 몇몇 그의 골수팬들(대부분 그보다 10년씩이나 어린 사람들)에게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러한 변절(?)이 반갑다. 얼마나 그가 변화했는지는 이후에 계속해서 나오는 그의 작품을 보아야 알겠지만. 이 책을 쓸 때의 그는 서른아홉, 우리 나이로 마흔이다. 이전과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또한 변하고 싶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을 빌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인천 공항의 민영화 논란을 다룬 시사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민영화의 ‘나쁜 예’로 ‘히드로’가 꼽혔다. 뭐에 대한 비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비용이 몇 배가 올랐다고, 결국 그 부담은 이용자에게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영국에서도 꽤나 논란이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보통이 왜 자신이 이른바 ‘고용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그리도 자세하게 쓴 게 이해가 되었다. 중세의 예술가들을 언급하며 슬쩍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은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귀여웠다.

 

무엇보다도 작가로서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이 일기가 멈추지 않고, “실체에 비하면 책이란 얌전하다고” 인정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내 주변을 둘러싼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으며, 고향은 많은 가능한 세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는 말에도 타성에 젖지 않으려는 결의가 느껴진다. 나도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나이가 들어도 늘 날카롭게, 그 날카로움이란 상대를 찔러서 상처를 내는 날카로움이 아니라 어떤 사물을 보아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날카로움이다.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공항 편을 스케치한 적이 있다. 영상이라는 것이 생생함을 전달한다는 매력이 있음과 동시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한다는 단점이 있다. 정확히 이 책과 반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공항이 이렇게 차분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아마도 보통이 지적한 책의 한계가 이것인가 보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터미널’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서는 공항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헤어짐과 만남, 출발과 도착, 떠남과 돌아옴이 있는 곳. 산업 혁명 시절의 핵심적인 공간이 ‘공장’이라면 현대의 특징적인 공간 중 하나는 공항일 것이다. 그 공간을 통해 나와 너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래서 “현대 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다른 기관에 상주하는 꿈을” 꾼다는 보통의 말이 반갑다. 그가 “은행, 핵발전소, 정부기관, 양로원 같은 곳”에서 쓰는 “무책임하고, 주관적이고, 약간 별나면서도 세상에 대한 보고가 담긴 글”들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우리 대부분은 치명적인 재난에 가까운 상황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야만 일상생활에서 좌절과 분노 때문에 인정하지 못했던 중요한 것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일하기 좋은 곳이 실제로도 좋은 곳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조용하고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서재는 그 흠 하나 없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실패에 대한 공포를 압도적인 수준으로 높이곤 한다. 독창적인 사고는 수줍은 동물과 비슷하다. 그런 동물이 굴에서 달려 나오게 하려면 때로는 다른 방향, 혼잡한 거리나 터미널 같은 곳을 보고 있어야 한다.

 

나의 수첩은 상실, 욕망, 기대의 일화들, 하늘로 날아가는 여행자들의 영혼의 스냅 사진들로 점점 두꺼워졌다. 터미널이라는 살아 있는 혼돈의 실체에 비하면 책이란 얼마나 얌전하고 정적인 것이냐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는 힘들었지만.

 

이런 수정 같은 맑은 관점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 다른 현실, 튀니스와 하이데라바드에 존재하는 현실에 관해 알고 있는 것과 고향이 늘 균형을 이루게 하고 싶다. 여기 있는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으며, 비스바덴이나 뤄양의 거리는 다르고 고향은 많은 가능한 세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

 

그런 순간이면 죽음을 피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죽음을 영원히 계속 속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도 공존하며, 그 때문에 이 장면이 더욱 가슴 아리다. 어쩌면 이것도 죽을 운명에 대비해 연습을 하는 한 가지 방법인지 모른다.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자식은 일상적인 출장을 떠나기 전에 늘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것이며, 그러다 집행유예는 어느 순간 끝이 날것이다. 한밤중에 멜버른의 한 호텔의 20층에 있는 방으로 전화가 걸려와, 세계 반대편에서 아버지가 치명적인 발작을 일으켰으며, 의사들은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날 이후 이제 어른이 된 소년은 도착 라운지에 늘어선 사람들 속에서 늘 빠져 있는 얼굴 하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작가들이 가정 내의 경험을 넘어서 밖을 내다보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현대 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다른 기관에 상주하는 꿈을 꿔보았다. 은행, 핵발전소, 정부기관, 양로원 같은 곳. 그런 곳에서 여전히 무책임하고, 주관적이고, 약간 별나면서도 세상에 대한 보고가 담긴 글을 쓰는 꿈을.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항구를 굽어보는 방 두 개짜리 숙소, 시칠리아의 순교자 성 아가타의 유해를 자랑하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 무료 저녁 뷔페가 제공되는 야자나무들 속의 방갈로.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 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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