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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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정말로 돌아가고 있는 거요? 잘 모르겠는데.” 마틴이 말했다.

우리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 런던 아이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마틴 말이 옳았다. 움직이고 있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을 것 같았다.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A Long Way Down

 

아래로 떨어지는 길이 참 멀기도 멀다. 얼마나 멀었으면 90일이나 걸렸단 말인가. 원제도, 번역된 제목도 둘 다 책의 내용을 잘 드러낸다. 다만 표지는 원서의 표지가 더 좋은 것 같다. 아마 그 표지를 그대로 가져오기에는, 우리 정서와 좀 맞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원제라면 모를까, 번역된 제목과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연결하면 ‘자살’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직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니까.

 

닉 혼비의 평소 스타일과 사뭇 다르다는 이유로 한번 주목을 받았고, 무거운 삶의 문제를 유머 있게, 그러나 진중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확실히 이 책은 전작들과는 많이 다르다. 직업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빈둥거리는 게 태반이며, 음악이나 스포츠 등 취미에 미쳐있다. 영어로는 마니아, 우리말로는 광, 일본어로는 오타쿠. 오타쿠에 제일 가깝다. 철들지 않은 남성들의 다소 찌질해보이기까지한 생각, 행동, 말. 그의 전작 ‘어바웃 어 보이’는 휴 그랜트 주연의 영화로, ‘피버 피치’는 영화 ‘날 미치게 하는 남자’로, ‘하이 피델리티’는 책으로 읽고 존 쿠삭 주연의 영화를 보려 계획 중이다.

 

아스널에 미친 영국 남자가 레드삭스에 미친 미국 남자로 변화한 ‘날 미치게 하는 남자’는 확실히 재미가 떨어졌다. 역시 닉 혼비의 소설은 영국 작가의, 영국식 감성에 의한, 영국식 유머를 위한 소설이다. 함부로 할리우드에 이식을 해서는 안 된다. ‘어바웃 어 보이’처럼 영국 배우가 연기하는 영국 작품이었으면 평가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배우 ‘조니 뎁’에 의해서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고 표지에 설명이 되어 있었지만 여태까지 영화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무산된 것 같다. 여러 가지 실무적인 문제가 있었겠지만 미국식으로 각색되었다면 분명히 이 작품의 ‘맛’을 잃었을 것이다.

 

작품 속의 네 명, 다들 죽을 이유가 있다. 나이도, 직업도, 성별도, 사는 환경도 모두 다른 그들은 생애 동안 서로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절대 만나지 않을 수 있었던 그들이 바로 그 날, 아래로 뛰어내리고자 하는 때에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일단 ‘자살’을 ‘유예’한다.

 

이 책은 읽기 전에 사실 결말을 다 알고 출발한다. 당연히 이들은 자살하는 것보다 그래도 사는 결정을 할 것이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 속담은 우리나라에서만 맞는 말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 결말에 어떻게 도달하느냐다.

 

뭔가 드라마틱하게 변화가 있지는 않다. 잠시 그래 보이기는 했지만, 결국 제자리다. 그렇지만 90일 전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들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마치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돌아가고 있는 런던 아이처럼. (런던을 다녀오고 나서 이 책을 읽은 것이 다행이다. 정말 몇 년 전 런던에 갔을 때 실제 런던 아이를 보고 “저거 고장 난 거 아니냐?”며 우리끼리 깔깔 웃었던 기억이 난다. 직접 보기 전에는 타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보자 저것을 타면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길 것이기에 타지 않았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러자 마지막 이 구절이 확 와 닿았다.)

 

보고 있는 사람마저 지치게 할 정도로 더디게 가던 런던 아이. 하지만 분명히 시간에 맞추어, 더 서두르지도 않고 더 늦추지도 않고 자기는 자기에게 맞는 속도로 가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 “쟤 죽은 거 아냐? 살아 있기는 하냐?” 수군대도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

 

안 죽고 90일 살았다. 뭐, 그래도 살만하데? 그럼 또 90일 더 살아봐? 보는 이에 따라서는 좀 김빠질 수도 있겠지만, 한번쯤 막다른 곳에서 최후의 생각을 단 한 순간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가장 공감이 가는 결말이다. 죽는 것 말고 해결 방법을 모르겠는데, 진짜 힘들어서 차라리 다 놓아버리면 편해질 것 같은데, 독하게 마음먹고 죽을 각오로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이게 또 그대로면 얼마나 좌절하게 될 것인가. 아마 이들 네 명이 결국 말리지 못한 그 사람은 자살 시도가 처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그를 보고 나서야 네 명은 깨닫는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없어. 저렇게 할... 용기가 없어. 마지막 보루로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 아무 형태도 없는 흙덩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그들은, 이제 진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냥, 그냥 사는 수밖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 온 경험(그것도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갔다가 자신의 의지로 되돌아 온), 이것은 어떤 형태로든 삶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각자 다른 이유로 자살을 결심했지만, 누군가는 ‘뭐 저런 이유로 죽냐?’ 하는 반응을, 누군가는 ‘어떻게 지금까지 살았을까?’하는 반응을 일으킨다. 남들이 어찌 보는지 몰라도, 일단 죽기로 결심을 했으면 그에게는 분명 감당하기 힘든 생(生)의 무게다. 떨어지기 직전, 팽팽하던 양팔 저울의 추가 1g만이라도 어느 한 쪽으로 쏠리는 순간, 삶과 죽음 사이에서 결론이 난다. 누군가는 저울에 올렸던 삶을 내려놓을 것이고, 누군가는 죽음 위에 올라탈 것이다. 그리고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마도 단 1g에 불과한 ‘무언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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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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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시작하기 전 작가의 말에 있는 구절이다. “내게도 팬이라는 게 있다면 이 소설은 그 팬들을 위한 특별판 소설이다.” 김연수의 소설은 이 게 처음이기 때문에 나는 그의 팬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의 팬이 될 것 같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선영아, 사랑해 라는 모 인터넷 포털 업체의 광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마도 작가는 거기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 광고, 분명히 한 지 꽤 되었을 것인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찰나의 순간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무서운 데가 있다. 그러고 보니 그 문구를 만들어낸 여성 CEO도, 김연수도, 이 책의 세 남녀도 전부 비슷한 나이 대이다. 한때는 386세대, 이제는 486인가?

 

대한민국 40대라면 아마 이 책을 읽으며 눈물 한 방울 찔끔,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이후 세대이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흥미롭게, 또 한편으로는 진지하게 이 소설을 읽었다. 운동권, 사회의식으로 대학시절 연대되었던 그들이 결혼하고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부분들, 특히 대학 동기들끼리 술을 마시며 과거와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다 결국 지저분하게 끝나버린 집들이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들 세대의 키워드가 ‘민주화’라면, 우리 세대는? 단연 ‘스펙’이다.

 

얼마 전 한 신문기사에 수백 개의 댓글이 순식간에 달렸던 적이 있다. ‘20대 백수’를 다룬 기사였는데 기사의 내용은 평범했지만 댓글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회 돌아가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스펙 쌓기와 소비에만 열중하는 20대와 대학만 졸업하면 학점 상관없이 취직 가능해 아무 경쟁 없이 회사 들어와 놓고 실력도 없는 40대의 대결구도, 혹은 단군이래 제일 치열한 경쟁 속에 아마 제일 똑똑하고 유사 이래 외국어도 가장 잘하는 세대이지만 취업 안 되어 좌절할 수밖에 없는 20대와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끝내 민주화를 만들어낸 40대의 대결구도가 볼만했다.

 

이 책은 연애소설이 아니라 사랑소설이다. 진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이 떠올랐다. 한 여자를 둘러싼 과거의 남자와 현재의 남자. 무엇보다 영화의 엄태웅과 소설의 진우가 겹쳐졌다. 진우에 비하면, 뭐 엄태웅은 양반이지만, 결국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나의 감정에 충실했다가 여자를 놓쳤다는 것은 똑같다. 책이든 영화든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면 늘 여자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보게 되는데, 두 작품 모두 다 열렬히 공감하면서 보았다. 21세기에 들어선지도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신데렐라 판타지 러브가 우세한 대중 문화에 지쳤나보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에 가슴 시리고 나도 모르게 풋 웃다가 조금 짠해진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사랑학 개론인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세상의 다른 모든 일들은 나이 든 사람들이 잘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만은 모험을 겁내지 않는 젊은이들의 전공 분야다. 젊은이들은 아직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혼자서 빠져 나올 때 마다 뭔가를 빼놓고 나온다는 점. 그리하여 사랑이 되풀이 될수록 그 관계 속으로 밀어 넣을 만한 게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쯤이면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더 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는데, 그건 이제 불타는 사랑이란 자신보다 더 어린 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질투란 숙주가 필요한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질투란 독립적인 감정이 아니라 사랑에 딸린 감정이다. 주전선수가 아니라 후보선수라 사랑이 갈 때까지 가서 숨을 헐떡거리면 질투가 교체선수로 투입된다. 질투가 없다면 경기는 거기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가’를 부르며 바지 지퍼를 내리거나 브래지어 호크를 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어야만 상대방이 수많은 양반 자제 중에서 자신을 알아볼 게 아닌가?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아, 미치고 환장하겠네. 누렁소나 황소나. 좋아하는 게 사랑하는 거지. 뭐가 그렇게 복잡해?”

“야, 꿩 다르고 닭 다른데 그게 어떻게 같냐?”

“그러면 좋다, 선영아. 결혼은 닭하고 하고 나하고는 연애하자. 그럼 되잖아, 어때?”

“너도 소설가라고 결혼이 미친 짓인 줄 아니?”

 

“사랑이라는 건 서로 아끼고 위하는 거야. 사랑이란 한 번 사랑했다는 기억만으로도 영원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슬프게도 너한테는 그런 기억이 없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말을 쓰면 안돼.”

 

 

 

‘사랑’에 집중하는 작가 기욤 뮈소의 작품을 읽을 때의 미진한 느낌이 이 소설에는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김연수가 한수 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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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그림책
헤르타 뮐러.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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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을 알고 있었던 사람

특히 독일어권 작가들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은 독일에서 기획되었다. 책 원제인 BuchBilderBuch는 독일어로 책.그림.책 이며 아마 편지를 보낼 때에는 독일어로 작품을 낸 적이 있는 작가들 위주로 보내지 않았을까?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독일 문학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관통하는 듯한 그 느낌, 철학적 사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OK.

르네 마그리트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그림을 보며 상상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책의 그림들은 ‘책’이라는 코드가 있기 때문에 수많은 그림을 보다 보면 질릴 수도 있다. 비과학적인 그림 앞에 ‘어디 한 번 상상해봐!’하며 압박을 받는 느낌이랄까. 이러지 않을 수 있을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OK.

현실의 문제로 심신이 지쳐있는 사람

글을 읽지 않고 그림만 보면서 오후를 보내면 치유될 것 같은 사람

 

위의 언급된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

누군가에게 술술 읽혀 금새 읽지 않아도, 두고두고 책장에 놓았다가 볼 수 있는 책을 선물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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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할미 2011-01-17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표지에 있는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든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여운을 느끼면서 한 장 한 장 음미하며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속도가 경쟁인 이 시대에 치유마저도 순식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천천히 흘러가는 독일과 빠르게 변하는 한국의 차이인지?
 
아마데우스 SE (2disc) - 할인행사
밀로스 포만 감독, 톰 헐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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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이 영화에 있어서만큼은, 감독이 절대 음악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무후무한 음악의 천재인 모차르트에 대한 영화이기에, 오히려 영화는 어떤 면에서 보면 모차르트 메들리? 혹은 모차르트라는 메인 주제를 놓고 그의 음악이 서브 주제가 되어 이루어지는 뮤직비디오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살리에리를 맡은 배우의 이름이 먼저 올라갔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모차르트를 연기한 톰 헐스와 살리에리를 연기한 F. 머레이 에이브러햄 둘 다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은 에이브러햄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영화 외적인 에피소드를 떠나서, 영화만 놓고 볼 때도 이 영화의 축은 살리에리에게로 좀 더 쏠려 있습니다. 철저하게 살리에리의 시선으로 바라 본 모차르트에 대해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보다 살리에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서술이 더 길며, 영화 내내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심경은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지만, 정작 살리에리에 대한 모차르트의 진심은 마지막에서야 살짝, 그것도 일부만 조금 보일 뿐입니다. 아무리 모차르트라 하더라도 음악가 이외의 한 남자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아들로, 연인으로 살아간 삶이 분명히 있었을 테고 거기에 대한 인간적 고민, 또 그 자신과는 떼어놓을 수 없을 음악 자체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테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살리에리의 관점에서만 모차르트를 해석해냅니다. 어쩌면 적절한 영화적 선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대체 누가 모차르트의 입장에서 그에게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우리들은 영화를 본 이상 살리에리를 동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건 살리에리를 맡은 배우의 연기가 더 나아서일지도 모르고요. 확실히 톰 헐스는 기괴한 면 못지않게 천재적인 면 또한 부각시켜야 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팔을 휘두르는 장면 같은 경우는 ‘아까까지 반쯤 정신 나가 보이던 애하고 동일인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완벽히 다른, 그야말로 ‘천재’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에이브러햄의 눈빛이 순간순간 달라지는 것처럼요. 정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화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경이입니다.

 

누구나, 누구나, 한번쯤은 살리에리와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에, 이른바 ‘열폭’하는 ‘찌질한’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에게서 볼 수 있기에 차라리 ‘그래, 나 질투해’라고 관객들이 쉽게 인정해버릴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보통 질투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난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 영화의 미덕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됨으로써 질투에 눈 먼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가련해질 수 있는지 깨닫게 해 주는 것 말입니다. 최소한 이 영화에서 말년의 살리에리의 모습을 머릿속에 간직하는 한, 함부로 누군가 시기하는 것은 저절로 삼가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결말은 다소 충격적이기도 씁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충격적이라는 것은, 이미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 ‘몇 십 년 후’ 살리에리의 현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차르트가 죽어서까지, 질투에 눈멀어 그 지경이 되기까지도 모차르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살리에리에 공감이 갈 뻔 했다가 끝내 공감가지 못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모차르트 필생의 역작, 당대 모든 관습을 뛰어넘은, 혁명이라 부를 작품 ‘피가로의 결혼’ 초연시 모차르트의 후원자였던 왕은 하품을 합니다. 모차르트와 그의 작품에 압도되어 있던 살리에리는 그런 왕의 모습을 보고는 기뻐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당시에 왕이 세 번 하품을 하면 그 작품은 못 올리고, 한 번 하품을 하면 그냥 그저 그랬답니다. 이 장면을 보고 나니 살리에리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이 싹 사라진 거죠. 왕이 하품을 했던 건 작품 여부에 상관없이 그냥 피곤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왕의 음악적 수준이 다소 부족했기 때문이겠죠. 모차르트가 당대의 ‘트렌드’에 따르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어찌 되었든 비록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을 만들 재주는 없어도 알아볼 재주는 있었던 살리에리가 왕이 지겨워하는 장면을 보자마자, ‘그래, 왕이 별로라고 하니까 모차르트 넌 이번엔 안 되겠다’며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니 다소 혼란이 옵니다. 이때까지 살리에리가 원하는 건 모차르트의 천재성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대체 그가 진짜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술은 몰라도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높은 이들로부터의 인정? 당시 대중으로부터의 흠모? 100년을 앞서가는 천재성? 아니면 이 모든 것? 혹은 이 모든 것도 아닌 그냥 자타가 공인하는 ‘내가 최고다’, 이거? 대체 그가 음악을 하는 음악인으로서 추구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신을 찬양하고 싶다는 그의 초심이 질투에 눈 먼 그 순간부터 단순한 욕망으로 바뀌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노력하는 둔재가 천재를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 믿지 않습니다. 대체 천재를 어떻게 이깁니까? 더구나 세 살 때 피아노 치고, 다섯 살 때 작곡하고, 이런 애를 무슨 수로 이깁니까? 절대 아니죠. 천재는 말 그대로 천재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도 있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못 이기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못 이긴다는 말. 여기서 말하는 천재는 당연히 ‘노력을 게을리 하는’ 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고, 노력하는 사람은 재능이 전혀 없는데 맨 땅에 헤딩하듯 노력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모차르트는 음악을 즐겼고, 모차르트를 알고 난 후의 살리에리는 더 이상 음악을 즐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죠.

 

저는, 음... 천재가 아닌 것은 확실하니까 열심히 노력하고 열정적으로 즐기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신동인 모차르트는 못 되더라도 감히 에드워드 엘가는 꿈꿀 수 있지 않을지...

 

P.S. 에드워드 엘가. 처음에는 법률가를 꿈꿨지만 여의치 않았고, 음악가로도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으며 ‘사랑의 인사’, ‘위풍당당 행진곡’이 유명하죠. 첫 소절만 들으면 바로 ‘아~!’ 할 만큼 너무나 많이 들었던, 그러면서도 언제 들어도 반갑고 기분 좋아지는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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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영 씨, 산티아고에는 왜 가셨어요? - 진짜 가수 박기영의 진짜 여행
박기영 지음 / 북노마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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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 박기영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물론 그녀의 노래 몇 곡을 알고 있고, 시원하게 내지를 수 있는 그녀의 가창력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 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뭐 가창력 인정 받는 가수라고 해서 전부 내가 좋아해야 할 필요는 분명히 없으니까. 물론 나에게도 참 저게 가수냐 싶은 가수, 저것도 노래냐 싶은 노래가 있다. 하지만 콘서트형 가수 뿐 아니라 비주얼 위주 혹은 흔히 트렌드를 따르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 또한 똑같이 좋아한다. 또한 양쪽의 노래를 즐겨 듣는 편이다.  

오히려 나는 어느 한 쪽이 한 쪽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일종의 거부감이 든 적이 많다. 김태원이었던 것 같다. 모 방송에 나와서 "음악을 차별하는 것은 인종차별보다도 나쁘다"고 비틀즈의 한 멤버가 말했었다고 한다.(그 멤버 이름을 김태원은 밝혔는데 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방송을 본 순간 저거다 싶었다. 내가 록음악을 잘 몰라도 김태원이 우리 나라 록음악에 한 획을 그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그가 질풍노도의 청춘을 다 거쳐 아저씨가 되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일방적인 타협이나 변절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음악을 하기 위한 포용력으로 느껴진다. 왜 서정주의 시처럼 소쩍새가 되어 봄에도 울고 천둥이 되어 여름에도 울다가 가을이 되어 핀 꽃 앞에 설 수 있는 것처럼. 힘든 세월을 돌고 돌고 돌아 큰 깨달음으로 돌아온 것처럼. 

나에게 적어도 음악이란 것은, 듣는 순간 위로가 되고 계속 생각나서 흥얼거릴 수 있고, 또 그때마다 새롭게 위안이 되는 것이다. 너무 어려우면, 마치 완벽하지만 한 번 읽어서는 잘 모르겠는 고전처럼 계속 곱씹어야 된다면 나에게는 좋은 음악이 아니다. 나에게는. 첫 소절 듣는 순간부터 아, 이 거다, 싶어야 한다. 그래서 나와 이런 면에서 생각이 좀 다른(혹은 다르게 들릴 수 있는) 뮤지션들의 주장에는 거부감이 먼저 든다. 그런 면에서 내가 이 책을 우연히 카페에서 보게 된 것은 다행이다. 만약 통상 내가 책을 읽을 때 저자를 알고 읽듯이 박기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나서 이 책을 접했더라면, 아마 안 읽었을 것이다. 

쉽게 쉽게 가지 않고, 구태여 어려운 길을 택하는 그녀.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성격 문제가 아닐 것이다. 쉽게 가는 그 순간, 그녀 자신의, 가수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없기에 몸부림치면서 지켜왔을 것이다. 이 또한 책을 읽고 나서야 든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 참 대단하다. 책을 통해서 한 사람의 생각을 이렇게나 확장시켜 놓다니. 

다소 성깔(이 단어 외에 다른 단어가 생각이 잘 안난다. 이 단어와 최소한 유사한, 그러나 어감은 좀 부드러운 단어를 찾고 싶었는데 생각이 도저히 안난다.)이 있어보이는, 또한 그것을 구태여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그녀라서 더 호감이 갔다. 최소한 책에 적힌 그녀의 이야기는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으니까. 중간 중간 드러나는 약한 부분에 나도 진심으로 응원을 하게 해 주었으니까. 마지막 도착지에서 흘린 눈물에 나도 순간 찡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음악인으로서의 자존심, 도도함, 자의식, 고집과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미래를 꿈꾸는 그녀를 머릿속에서 따로따로 떨어뜨리지 않게 해 주었으니까. 

나는 앞으로 그녀의 노래를 즐겨 듣게 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그녀가 책을 낸다면 다시 독자가 될 가능성은 100%이다. 

P.S. 엉뚱하게도 책을 다 읽은 내 머릿속에 가장 남는 부분은 박기영과 결혼한 사촌 언니와의 대화이다. 아내로, 엄마로, 살면서 예술인으로서의 '나'를 포기하고 사는 언니가 '행복해'라고 하자 박기영은 화를 낸다. 그 다음 순간, 크게 웃으며 이어진 언니와의 대화. 나 또한 그렇게 될까. 지금은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잘 안 보여서 모르겠고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묘하게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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