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미모자를 그렸나 - 손미나의 로드 무비 fiction
손미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악마가 있소.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가 없지.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자기가 이번 생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허상만 좇게 된다니까. 어떤 일에 확신이 있을 때는 아가씨 마음속에 악마가 들어서게 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없소. 그 악마의 이름은 두려움이오.

 

수백 가지 우연 중에서 단 하나라도 살짝 어긋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이 소설은 아마도 손미나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소설이 아닌가 싶다. 현재 싱글인 그녀가 그리는 운명같은 사랑, 아직 정식 작가로 인정받지 않은 주인공. 너무나 소설 같은 소설, 정말 그런 얘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 할 수 밖에 없는 소설, 네 남녀의 이야기가 수십 년을 건너뛰어 파리를 배경으로 겹쳐지고 포개지는 결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플롯이고, 그렇게나 쉽게 사랑에 빠지는 이 ‘운명’적인 만남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잘 ‘빠진’ 소설이다. 매끈하고 군더더기가 없고, 이 소설 이전에 여러 편의 여행기와 번역서를 냈던 작가의 내공 때문인지 최소한 읽어가면서 불편하지는 않다. 처음 이 소설이 나왔을 때는 관심도 갖지 않던 내가 우연히 얼마 전에 산 스마트폰을 통해 이런저런 앱을 알아보다가 이 책의 체험판을 읽고 즉시 도서관에 가서 찾아내어 읽은 책이다. 그만큼 사람의 시선을 끌고, 붙들어 놓는 데는 충분한 장점이 있다는 뜻일 게다.

 

논쟁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밥을 먹던 테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다고 해서 갑자기 같은 무리에 속한 것처럼 느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나. 소위 말하는 파리 상류층 젊은 문화계 인사들 사이에 마르세유 출신의 무명 연극배우가 끼어 있으니 얼마나 재미난 눈요기 겸 안주가 되어주고 있던 것인가. 해 질 무렵 육지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며 어지럽혔다. 일종의 환멸과 자괴감의 블랙홀 속으로 온몸이 깊이 빨려드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느낌이었다.

테오는 어떻게든 그 블랙홀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언젠가 아버지한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낚시를 할 때 말이다, 왠지 좀 잡기 어려운 놈이다 싶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 오히려 그런 놈들은 큰 약점이 있기 마련이니까.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야.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놈들이야말로 결정적인 허점이 있지. 물론 웬만하면 누군가와 맞서 싸우는 일은 피하는 게 좋아. 하지만 살다 보면 대강 돌아가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정면 돌파를 해야 하는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때 중요한 건, 울화가 치미는 일일수록 부드럽게 접근해야 한번에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침착한 마음을 먹기 위해 애썼다.

“갑자기 다들 저를 쳐다보시니까 부담스럽네요. 티켓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구요.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졌어요. 저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쓸모없는 전단지. 입장권, 초대장, 그런 것들을 갖다 버리는걸요. 저라도 그 연극 티켓을 집에서 받아보았다면 아무 생각없이 버렸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정말로... 어쨌든 제가 참여했던 작품이 서민층 대중에겐 큰 호응을 받아서 전국 투어를 하게 됐으니 안 보신 분들은 다음에 파리에서 공연할 때 한번 오시면 되겠네요. 한 가지,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든 생각인데... 어차피 보보라는 건 처음부터 프랑스 상류층 젊은이들의 자기합리화 같은 걸 비웃으려고 미국 기자가 갖다 붙인 말 아닌가요? 부르주아인데 보헤미안처럼 산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잖아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느끼기에 진짜로 예술을 움직이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은 이런 자리에서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좌파라고 해서 무조건 행동하는 지식인인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볼 댄 두 분이 차이점보단 닮은 부분이 훨씬 더 많으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하시죠.”

치욕감을 느꼈다고 해서 공격적인 자기방어를 하는 것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내던지는 일이 될 것 같아 테오는 최대한 차분한 태도와 밝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실제로는 귀가 멍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머리카락이 모두 하늘로 쭈뼛 서는 것만 같았고 하마터면 포크가 미끄러져 나갈 정도로 손에 땀이 배었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그런 굴욕적인 말을 듣고도 여유 있게 상황을 넘기는 젊은 배우를 보면서 적지 않게 놀라며 감동했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마르크와 제롬이 머쓱해서 입을 다물며 논쟁을 접은 것은 물론이다. 덕분에 테오는 단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저녁식사를 마쳤는데 특히 콜린 극장 연출자인 베르나르는 언젠가 함께 일하고 싶다면서 그의 연락처까지 받아 챙겼다.

많은 기대를 안고 참석했던 전설의 ‘아리스토텔레스’ 모임.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기도 했고 의외로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씨가 새로 피어올랐다. 내 언젠가는 당신들이 모두 만나고 싶어 하는 배우가 되어 있을 테니 두고 봐... 테오는 쟁쟁한 그날의 멤버들 속에 섞여 파티장을 나서며 스스로를 향한 다짐을 새롭게 했다.

 

이렇게까지나 이 부분을 길게 옮겨 적은 것은 너무나 환상적인 이 소설에서 이 부분이 가장 현실적이었고 또 묘사가 생생했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자면, 이 부분은 완벽한 창작이 아닌, 손미나 자신의 현실에 바탕을 둔 묘사가 아닐까. 분명히 인기 있는 아나운서였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소설로의 전업을 선언했을 때 비슷한 시선을 분명히 받았으리라. 그 사람들에게 소설을 빌려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또한 이런 경험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다가 아직까지도 그 현실을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제일 공감이 갔다.

소설 속의 사랑은 나를 저릿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앞으로 손미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고 그 책들은 분명히 이 책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은 비록 미숙하지만 작가가 엄청나게 노력했을 게 분명한 이 책을, 잠시나마 나를 처음 들어본 ‘봄레미모자’라는 프랑스의 시골마을로 데려가게 한 이 책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노란 꽃이 뒤덮인 그 마을을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리라 하고 마음 먹게 한 이 책을 조금은 사랑하게 되었다. 아직 어설프고 증명되지 않고 내세울 것은 가능성, 그 뿐인,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희망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그 격려를 해 줄 사람이 나 자신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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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모자를 그렸나 - 손미나의 로드 무비 fiction
손미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악마가 있소.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가 없지.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자기가 이번 생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허상만 좇게 된다니까. 어떤 일에 확신이 있을 때는 아가씨 마음속에 악마가 들어서게 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없소. 그 악마의 이름은 두려움이오.

 

수백 가지 우연 중에서 단 하나라도 살짝 어긋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이 소설은 아마도 손미나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소설이 아닌가 싶다. 현재 싱글인 그녀가 그리는 운명같은 사랑, 아직 정식 작가로 인정받지 않은 주인공. 너무나 소설 같은 소설, 정말 그런 얘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 할 수 밖에 없는 소설, 네 남녀의 이야기가 수십 년을 건너뛰어 파리를 배경으로 겹쳐지고 포개지는 결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플롯이고, 그렇게나 쉽게 사랑에 빠지는 이 ‘운명’적인 만남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잘 ‘빠진’ 소설이다. 매끈하고 군더더기가 없고, 이 소설 이전에 여러 편의 여행기와 번역서를 냈던 작가의 내공 때문인지 최소한 읽어가면서 불편하지는 않다. 처음 이 소설이 나왔을 때는 관심도 갖지 않던 내가 우연히 얼마 전에 산 스마트폰을 통해 이런저런 앱을 알아보다가 이 책의 체험판을 읽고 즉시 도서관에 가서 찾아내어 읽은 책이다. 그만큼 사람의 시선을 끌고, 붙들어 놓는 데는 충분한 장점이 있다는 뜻일 게다.

 

논쟁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밥을 먹던 테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다고 해서 갑자기 같은 무리에 속한 것처럼 느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나. 소위 말하는 파리 상류층 젊은 문화계 인사들 사이에 마르세유 출신의 무명 연극배우가 끼어 있으니 얼마나 재미난 눈요기 겸 안주가 되어주고 있던 것인가. 해 질 무렵 육지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며 어지럽혔다. 일종의 환멸과 자괴감의 블랙홀 속으로 온몸이 깊이 빨려드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느낌이었다.

테오는 어떻게든 그 블랙홀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언젠가 아버지한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낚시를 할 때 말이다, 왠지 좀 잡기 어려운 놈이다 싶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 오히려 그런 놈들은 큰 약점이 있기 마련이니까.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야.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놈들이야말로 결정적인 허점이 있지. 물론 웬만하면 누군가와 맞서 싸우는 일은 피하는 게 좋아. 하지만 살다 보면 대강 돌아가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정면 돌파를 해야 하는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때 중요한 건, 울화가 치미는 일일수록 부드럽게 접근해야 한번에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침착한 마음을 먹기 위해 애썼다.

“갑자기 다들 저를 쳐다보시니까 부담스럽네요. 티켓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구요.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졌어요. 저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쓸모없는 전단지. 입장권, 초대장, 그런 것들을 갖다 버리는걸요. 저라도 그 연극 티켓을 집에서 받아보았다면 아무 생각없이 버렸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정말로... 어쨌든 제가 참여했던 작품이 서민층 대중에겐 큰 호응을 받아서 전국 투어를 하게 됐으니 안 보신 분들은 다음에 파리에서 공연할 때 한번 오시면 되겠네요. 한 가지,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든 생각인데... 어차피 보보라는 건 처음부터 프랑스 상류층 젊은이들의 자기합리화 같은 걸 비웃으려고 미국 기자가 갖다 붙인 말 아닌가요? 부르주아인데 보헤미안처럼 산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잖아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느끼기에 진짜로 예술을 움직이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은 이런 자리에서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좌파라고 해서 무조건 행동하는 지식인인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볼 댄 두 분이 차이점보단 닮은 부분이 훨씬 더 많으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하시죠.”

치욕감을 느꼈다고 해서 공격적인 자기방어를 하는 것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내던지는 일이 될 것 같아 테오는 최대한 차분한 태도와 밝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실제로는 귀가 멍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머리카락이 모두 하늘로 쭈뼛 서는 것만 같았고 하마터면 포크가 미끄러져 나갈 정도로 손에 땀이 배었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그런 굴욕적인 말을 듣고도 여유 있게 상황을 넘기는 젊은 배우를 보면서 적지 않게 놀라며 감동했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마르크와 제롬이 머쓱해서 입을 다물며 논쟁을 접은 것은 물론이다. 덕분에 테오는 단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저녁식사를 마쳤는데 특히 콜린 극장 연출자인 베르나르는 언젠가 함께 일하고 싶다면서 그의 연락처까지 받아 챙겼다.

많은 기대를 안고 참석했던 전설의 ‘아리스토텔레스’ 모임.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기도 했고 의외로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씨가 새로 피어올랐다. 내 언젠가는 당신들이 모두 만나고 싶어 하는 배우가 되어 있을 테니 두고 봐... 테오는 쟁쟁한 그날의 멤버들 속에 섞여 파티장을 나서며 스스로를 향한 다짐을 새롭게 했다.

 

이렇게까지나 이 부분을 길게 옮겨 적은 것은 너무나 환상적인 이 소설에서 이 부분이 가장 현실적이었고 또 묘사가 생생했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자면, 이 부분은 완벽한 창작이 아닌, 손미나 자신의 현실에 바탕을 둔 묘사가 아닐까. 분명히 인기 있는 아나운서였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소설로의 전업을 선언했을 때 비슷한 시선을 분명히 받았으리라. 그 사람들에게 소설을 빌려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또한 이런 경험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다가 아직까지도 그 현실을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제일 공감이 갔다.

소설 속의 사랑은 나를 저릿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앞으로 손미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고 그 책들은 분명히 이 책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은 비록 미숙하지만 작가가 엄청나게 노력했을 게 분명한 이 책을, 잠시나마 나를 처음 들어본 ‘봄레미모자’라는 프랑스의 시골마을로 데려가게 한 이 책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노란 꽃이 뒤덮인 그 마을을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리라 하고 마음 먹게 한 이 책을 조금은 사랑하게 되었다. 아직 어설프고 증명되지 않고 내세울 것은 가능성, 그 뿐인,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희망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그 격려를 해 줄 사람이 나 자신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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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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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별 다섯 개를 준 것은, 책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최근 들어 이렇게 나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유다.

 

김영하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처음 접한 김영하의 소설은 ‘오빠가 돌아왔다’였다. 가부장제의 파괴, 그 현실을 시종일관 냉소적으로, 하지만 궁극에는 일말의 따스함도 보여주었던 그 소설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땐 내가 대학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아무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등 김영하의 책(의 제목만)을 볼 때마다 한순간 서늘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늘 궁금하면서도 선뜻 읽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일지도. 일껏 가벼워 보이면서도 촐랑대면서도 늘 진지했고 때로는 섬뜩하기까지 했던 그의 소설에 대한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내 감상 때문일 수도 있다.

 

퀴즈쇼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좀 있다가 나왔다. (표지만) 하도 많이 보아서 새로 나온 표지의 책을 보았을 때 딴 책인지 알았더랬다. 둘 중 굳이 옛날 버전을 택한 것은 작가의 말, 그리고 해설 때문이었다. 그만큼 김영하의 소설은 마냥 재미로만 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꽤 깊게 있었나보다, 몇 년 동안.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스물일곱, 대학원을 졸업했다. 학점도 나쁘지 않고, 영어실력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취업 준비생이다. 고아에, 땡전 한 푼 없이 창도 없는 고시원 쪽방에 사는 그는 편의점 알바도 때려치운다.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인 그는 “토익점수는 세계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다.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독서량도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지만 그는 백수다. 실업자다.

 

미치겠다. 이거 바로 내 얘기 아닌가.

 

비록 나는 부모님도 계시고 부모님과 함께 부모님 집에서 살고 얘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이 책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건 전부 내가 늘 하던 이야기였다. ‘80년대에 태어나 컬러 TV와 프로야구를 벗 삼아 자랐고 풍요의 90년대에 학교를 다니고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2002년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는 걸 목격’한 나는, ‘역사상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타고난 코스모폴리탄으로 자랐’기에 ‘이전 세대에 비하자면 거의 슈퍼맨’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바로 내가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닌’ 것이다.

 

그런데 이걸 활자로 읽으면서 왜 내 스스로 어이가 없어지는 것일까.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역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맘을 이렇게 알아주니 고마운 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왜 주인공이 찌질해 보이는 걸까. 그리고 그 찌질한 주인공에 나를 겹쳐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걸까.

 

뭐지? 이 더러운 기분은? 차라리 현실에 패배해 목을 맸던 ‘옆방녀’가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면 눈물이 났을지도. 그런데 ‘이러니 저러니 멋진 말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기를 원하고, 자존심 조금 상한다고 돈도 안 받고 편의점은 제 발로 나오고 그 자존심 때문에 ‘옆방녀’에게 돈을 꾸며 “그깟 사 만원” “고작 십 만원” 이런 소리를 뱉고 있다. 누가 봐도 쥐뿔도 없으면서 눈만 높아 누가 조금이라도 자길 무시하면 못 견디는 요즘 아이 아닌가. 왜 같은 세대인 나에게조차도 비호감으로 보이는 이런 인물을 내세워 김영하는 뭘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젊은 세대에 대한 연민? 감상? 비판? 조롱? 기성세대임에 틀림없을, 해설을 쓴 교수도, 역시 80년생 주인공보다 정확히 12년 먼저 태어난 김영하도 어쩔 수 없이 ‘기성세대의 눈으로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도 아니면, 올해로 스물일곱인 내가, 이미 서른을 넘긴 80년생에게 공감을 못해서인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까지 끝끝내 희망은 한 건더기도 건져낼 수 없었다. 아무리 국자를 휘저어봐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간 물만 보일 뿐이다. 이제 서른셋이 되었을, 6년 전의 스물일곱 청년은 책 처음 시작에서 크게 변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어쩌라고? 주인공 너도 안 변하고, 그렇다고 사회에 대해 깊은 성찰이 담긴 것도 아니고, 나는 요 몇 달 동안 요렇게 조렇게 방황했느니, 이게 뭐 어쩌라는 소리인지? 그러니까 너는 그냥 너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잖아. 만약 네가 이 사회 구조에 어떻게든 너를 끼워 맞췄다면, 너는 ‘인생에는 더 높은 차원의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느니 ‘그냥 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싶’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시민으로 너의 처지에 안주하면 살았겠지.

 

물론 대학 입학 후 이 젊은이가 7년간 어떻게 변화해 왔을지가 생략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이런 비판은 가혹할지도 모른다. 패기 넘치고 자신만만했던 스무 살이 패배주의로 압사된 것 같은 스물일곱이 되기에 7년이라는 세월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래도, 올해 스물일곱이 된 나는 이런 소설은 더 읽고 싶지가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에 공감한다는 것은 끔찍하다. 싫다. 거부하고 싶다. 몰라, 나도 몰랐던 나의 속물적이고 이면적인 모습을 책을 통해 주인공으로부터 발견하고 거북했을 수도 있고, 누가 뭐래도 난 진짜 노력하고 있다고, 얘처럼 이렇게 나약하게 자포자기하는 애의 푸념과 나의 호소를 한 범주에 묶지 말라는 애원일 수도 있고.

 

제일 짜증나는 건 자기 서재와 침실이 별개의 방으로 구분된, 미국 동부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개인 배를 몇 채 가지고 있으며 딸에게 승마용 말을 선물해 주는 아버지를 둘 정도의 여자아이가 너는 ‘부모가 없어도 지금 이렇게 멋진 사람’이라고 속삭이며 ‘서로의 영혼으로 떠나는 이런 모험마저 없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무의미하지 않을까?’라는 문장을 쓴 너는 ‘속물이 아니라’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맑은 눈을 가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이런 플롯, 어디서 봤더라? 김영하 또래의 여성 작가가 쓴 일인칭 여자 주인공 시점에서 주인공 여자는 꼭 초반부에 이른바 속물적이고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남자와 헤어지고 이렇게도 몽상적이며 순수하고 영혼을 읽어주는 남자를 만나더라. 한결같이 그 남자는 부자에 나름의 아픔이 있으며 망설이는 여자 주인공에게 오히려 적극적이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기도 한다. 어쩜 남녀만 뒤바뀌었을 뿐 이 구도는 그대로이니. 아무리 젊고 그렇기에 사랑이 중하다지만 너네는 너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 꼭 너네에게 “잘 될 거야. 다 잘 될 거야”라고 이야기해 주는 누군가가 없다면 너네는 혼자서 결심도 못하고 힘도 못 내니? 아니면 거꾸로 내가 그 구원자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거야? 한심한 내가, 나보다 더 비루한 누군가에게 살고 싶어지고 살게 하는 무언가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거야? 아님 이 정도로 나약한, 상처받기 쉬운 젊음을 김영하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뭔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까. 놓친 게 있는 걸까.

 

차라리 주인공이 부자 여자를 작정하고 잡을 작정으로 덤볐다면, 흔한 막장 드라마가 되었을지언정 오히려 속 시원하고 통쾌했을 거다. 일체의 물질적인 것, 거부하겠다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도, 차라리 그 체제에 편입해버리겠다는 발악도, 고차원적인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넌 그냥 너가 싫은 거고, 그저 편한 게 좋은 거고, 차마 맞설 용기도 없는 거고, 그냥 너 자신을 그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거짓말처럼 짠 하고 나타나기를 바라는 거 아니니, 너보다 훨씬 더 우월한, 너를 거기에서 건져내 줄 수도 있고 같이 있는 동안은 최소한 품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유희를 할 수 있는. 이건 대체 남자 신데렐라 콤플렉스니 아니면 온달 콤플렉스니. 아니면 도저히 있는 그대로 소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꼬인 거야? 정말 김영하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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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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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별 다섯 개를 준 것은, 책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최근 들어 이렇게 나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유다.

 

김영하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처음 접한 김영하의 소설은 ‘오빠가 돌아왔다’였다. 가부장제의 파괴, 그 현실을 시종일관 냉소적으로, 하지만 궁극에는 일말의 따스함도 보여주었던 그 소설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땐 내가 대학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아무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등 김영하의 책(의 제목만)을 볼 때마다 한순간 서늘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늘 궁금하면서도 선뜻 읽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일지도. 일껏 가벼워 보이면서도 촐랑대면서도 늘 진지했고 때로는 섬뜩하기까지 했던 그의 소설에 대한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내 감상 때문일 수도 있다.

 

퀴즈쇼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좀 있다가 나왔다. (표지만) 하도 많이 보아서 새로 나온 표지의 책을 보았을 때 딴 책인지 알았더랬다. 둘 중 굳이 옛날 버전을 택한 것은 작가의 말, 그리고 해설 때문이었다. 그만큼 김영하의 소설은 마냥 재미로만 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꽤 깊게 있었나보다, 몇 년 동안.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스물일곱, 대학원을 졸업했다. 학점도 나쁘지 않고, 영어실력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취업 준비생이다. 고아에, 땡전 한 푼 없이 창도 없는 고시원 쪽방에 사는 그는 편의점 알바도 때려치운다.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인 그는 “토익점수는 세계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다.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독서량도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지만 그는 백수다. 실업자다.

 

미치겠다. 이거 바로 내 얘기 아닌가.

 

비록 나는 부모님도 계시고 부모님과 함께 부모님 집에서 살고 얘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이 책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건 전부 내가 늘 하던 이야기였다. ‘80년대에 태어나 컬러 TV와 프로야구를 벗 삼아 자랐고 풍요의 90년대에 학교를 다니고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2002년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는 걸 목격’한 나는, ‘역사상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타고난 코스모폴리탄으로 자랐’기에 ‘이전 세대에 비하자면 거의 슈퍼맨’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바로 내가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닌’ 것이다.

 

그런데 이걸 활자로 읽으면서 왜 내 스스로 어이가 없어지는 것일까.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역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맘을 이렇게 알아주니 고마운 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왜 주인공이 찌질해 보이는 걸까. 그리고 그 찌질한 주인공에 나를 겹쳐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걸까.

 

뭐지? 이 더러운 기분은? 차라리 현실에 패배해 목을 맸던 ‘옆방녀’가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면 눈물이 났을지도. 그런데 ‘이러니 저러니 멋진 말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기를 원하고, 자존심 조금 상한다고 돈도 안 받고 편의점은 제 발로 나오고 그 자존심 때문에 ‘옆방녀’에게 돈을 꾸며 “그깟 사 만원” “고작 십 만원” 이런 소리를 뱉고 있다. 누가 봐도 쥐뿔도 없으면서 눈만 높아 누가 조금이라도 자길 무시하면 못 견디는 요즘 아이 아닌가. 왜 같은 세대인 나에게조차도 비호감으로 보이는 이런 인물을 내세워 김영하는 뭘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젊은 세대에 대한 연민? 감상? 비판? 조롱? 기성세대임에 틀림없을, 해설을 쓴 교수도, 역시 80년생 주인공보다 정확히 12년 먼저 태어난 김영하도 어쩔 수 없이 ‘기성세대의 눈으로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도 아니면, 올해로 스물일곱인 내가, 이미 서른을 넘긴 80년생에게 공감을 못해서인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까지 끝끝내 희망은 한 건더기도 건져낼 수 없었다. 아무리 국자를 휘저어봐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간 물만 보일 뿐이다. 이제 서른셋이 되었을, 6년 전의 스물일곱 청년은 책 처음 시작에서 크게 변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어쩌라고? 주인공 너도 안 변하고, 그렇다고 사회에 대해 깊은 성찰이 담긴 것도 아니고, 나는 요 몇 달 동안 요렇게 조렇게 방황했느니, 이게 뭐 어쩌라는 소리인지? 그러니까 너는 그냥 너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잖아. 만약 네가 이 사회 구조에 어떻게든 너를 끼워 맞췄다면, 너는 ‘인생에는 더 높은 차원의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느니 ‘그냥 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싶’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시민으로 너의 처지에 안주하면 살았겠지.

 

물론 대학 입학 후 이 젊은이가 7년간 어떻게 변화해 왔을지가 생략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이런 비판은 가혹할지도 모른다. 패기 넘치고 자신만만했던 스무 살이 패배주의로 압사된 것 같은 스물일곱이 되기에 7년이라는 세월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래도, 올해 스물일곱이 된 나는 이런 소설은 더 읽고 싶지가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에 공감한다는 것은 끔찍하다. 싫다. 거부하고 싶다. 몰라, 나도 몰랐던 나의 속물적이고 이면적인 모습을 책을 통해 주인공으로부터 발견하고 거북했을 수도 있고, 누가 뭐래도 난 진짜 노력하고 있다고, 얘처럼 이렇게 나약하게 자포자기하는 애의 푸념과 나의 호소를 한 범주에 묶지 말라는 애원일 수도 있고.

 

제일 짜증나는 건 자기 서재와 침실이 별개의 방으로 구분된, 미국 동부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개인 배를 몇 채 가지고 있으며 딸에게 승마용 말을 선물해 주는 아버지를 둘 정도의 여자아이가 너는 ‘부모가 없어도 지금 이렇게 멋진 사람’이라고 속삭이며 ‘서로의 영혼으로 떠나는 이런 모험마저 없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무의미하지 않을까?’라는 문장을 쓴 너는 ‘속물이 아니라’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맑은 눈을 가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이런 플롯, 어디서 봤더라? 김영하 또래의 여성 작가가 쓴 일인칭 여자 주인공 시점에서 주인공 여자는 꼭 초반부에 이른바 속물적이고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남자와 헤어지고 이렇게도 몽상적이며 순수하고 영혼을 읽어주는 남자를 만나더라. 한결같이 그 남자는 부자에 나름의 아픔이 있으며 망설이는 여자 주인공에게 오히려 적극적이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기도 한다. 어쩜 남녀만 뒤바뀌었을 뿐 이 구도는 그대로이니. 아무리 젊고 그렇기에 사랑이 중하다지만 너네는 너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 꼭 너네에게 “잘 될 거야. 다 잘 될 거야”라고 이야기해 주는 누군가가 없다면 너네는 혼자서 결심도 못하고 힘도 못 내니? 아니면 거꾸로 내가 그 구원자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거야? 한심한 내가, 나보다 더 비루한 누군가에게 살고 싶어지고 살게 하는 무언가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거야? 아님 이 정도로 나약한, 상처받기 쉬운 젊음을 김영하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뭔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까. 놓친 게 있는 걸까.

 

차라리 주인공이 부자 여자를 작정하고 잡을 작정으로 덤볐다면, 흔한 막장 드라마가 되었을지언정 오히려 속 시원하고 통쾌했을 거다. 일체의 물질적인 것, 거부하겠다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도, 차라리 그 체제에 편입해버리겠다는 발악도, 고차원적인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넌 그냥 너가 싫은 거고, 그저 편한 게 좋은 거고, 차마 맞설 용기도 없는 거고, 그냥 너 자신을 그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거짓말처럼 짠 하고 나타나기를 바라는 거 아니니, 너보다 훨씬 더 우월한, 너를 거기에서 건져내 줄 수도 있고 같이 있는 동안은 최소한 품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유희를 할 수 있는. 이건 대체 남자 신데렐라 콤플렉스니 아니면 온달 콤플렉스니. 아니면 도저히 있는 그대로 소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꼬인 거야? 정말 김영하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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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은 내가 약한 것을 알고 와락 쳐들어왔어.

눈길 가는 곳 어디에나 사랑이었어.

빈자리가 없었어.”

 

사람이란 건 참 이상한 것이어서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죽으면 어떻게 하지, 안 돼 살아야 해, 하고 마음속으로 온갖 기도를 하고 내려갔는데 막상 자기 집에 누워 사람들의 간호를 받고 있는 그를 보자 미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입술이 다 터지고 까맣게 타들어간 그의 얼굴을 보자 정말 “사랑이란 게 뭘까?”하는 유명한 화두가 머릿속을 웅웅거렸다.

 

“그냥 내버려 둬. 죽으면 자기 팔자지. 수경 스님, 문 신부님 저렇게 무릎 아프고 힘드신데 무슨 사랑 타령이야, 이 나이에.”

내가 화를 내자 버시인이 정색을 하고 내게 말했다.

“우리가 어렸던 1980년대에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 하지만 수경 스님이 삼보일배하는 것도 L선배가 섬진강가에서 헤매는 것도 다 사랑이야. 네가 보기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하나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실내에서 하는 운동과 달리 산행이 몸에 좋은 까닭은 평소에는 전혀 쓰지 않는 근육을 쓸 수밖에 없는 자연의 불규칙성에 있다고 했던가. 산이 예찬 받는 이유 또한 그 불가해성이 삶과 닮아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멀리서 파도치듯 이리로 다가서는 산들은 생명으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기 양의 배에서 새로 돋는 것처럼 보드랍게 초록빛 털들이 몽실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생명의 고갱이 속을 걸어가며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는 이제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랑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우리가 중학교 때 다 배웠고 L선배마저 이 지리산 자락에서 늦은 사춘기를 마쳤으니까 말이다.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中

 

 

원래 청춘의 특징이라는 게 자기가 청춘인 줄 모르는 것에 있기도 하니 하는 수 없기는 하다.

 

그 여자네 반짝이는 옷가게 中

 

 

읽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내가, 내가, 많이 고갈되어 있었나 보다. 읽는 내내 나도 이런 친구 있었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살라고 하면 못 살 것 같지만. 왠지 지리산에 가기만 하면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고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내가 많이 지친 까닭일까. 이런 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공지영은 독자의 마음을 흔들고 공감하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쿨한 척, 시크한 척, 현실을 관조하고 거리를 두는 방식은 역시 나와 맞지 않는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 공지영은 단연 열정이다. 때론 흥분하고, 때론 성급하더라도 공지영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글 속의 장소로 데려가서, 공지영과 등장인물들과의 대화에 참여하게 하고, 사진으로만 나와 있는 음식을 맛보게 하고, 같이 지리산자락을 거닐게 한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지리산 사람들과 이미 친해진 것 같다. 힘들 때, 지쳤을 때, 바닥까지 고갈되었을 때, 어떠한 가식이나 거추장스러운 예의도 벗어놓고 달려가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기댈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아니 그러한 장소가 이곳 서울, 단 한 평이라도 있다면, 그런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퍽퍽한 세상 살기가 얼마나 편안해질까. 거칠었던 호흡도, 불규칙했던 맥박도, 고르고 느긋해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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