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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모자를 그렸나 - 손미나의 로드 무비 fiction
손미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악마가 있소.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가 없지.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자기가 이번 생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허상만 좇게 된다니까. 어떤 일에 확신이 있을 때는 아가씨 마음속에 악마가 들어서게 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없소. 그 악마의 이름은 두려움이오.
수백 가지 우연 중에서 단 하나라도 살짝 어긋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이 소설은 아마도 손미나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소설이 아닌가 싶다. 현재 싱글인 그녀가 그리는 운명같은 사랑, 아직 정식 작가로 인정받지 않은 주인공. 너무나 소설 같은 소설, 정말 그런 얘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 할 수 밖에 없는 소설, 네 남녀의 이야기가 수십 년을 건너뛰어 파리를 배경으로 겹쳐지고 포개지는 결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플롯이고, 그렇게나 쉽게 사랑에 빠지는 이 ‘운명’적인 만남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잘 ‘빠진’ 소설이다. 매끈하고 군더더기가 없고, 이 소설 이전에 여러 편의 여행기와 번역서를 냈던 작가의 내공 때문인지 최소한 읽어가면서 불편하지는 않다. 처음 이 소설이 나왔을 때는 관심도 갖지 않던 내가 우연히 얼마 전에 산 스마트폰을 통해 이런저런 앱을 알아보다가 이 책의 체험판을 읽고 즉시 도서관에 가서 찾아내어 읽은 책이다. 그만큼 사람의 시선을 끌고, 붙들어 놓는 데는 충분한 장점이 있다는 뜻일 게다.
논쟁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밥을 먹던 테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다고 해서 갑자기 같은 무리에 속한 것처럼 느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나. 소위 말하는 파리 상류층 젊은 문화계 인사들 사이에 마르세유 출신의 무명 연극배우가 끼어 있으니 얼마나 재미난 눈요기 겸 안주가 되어주고 있던 것인가. 해 질 무렵 육지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며 어지럽혔다. 일종의 환멸과 자괴감의 블랙홀 속으로 온몸이 깊이 빨려드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느낌이었다.
테오는 어떻게든 그 블랙홀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언젠가 아버지한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낚시를 할 때 말이다, 왠지 좀 잡기 어려운 놈이다 싶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 오히려 그런 놈들은 큰 약점이 있기 마련이니까.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야.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놈들이야말로 결정적인 허점이 있지. 물론 웬만하면 누군가와 맞서 싸우는 일은 피하는 게 좋아. 하지만 살다 보면 대강 돌아가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정면 돌파를 해야 하는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때 중요한 건, 울화가 치미는 일일수록 부드럽게 접근해야 한번에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침착한 마음을 먹기 위해 애썼다.
“갑자기 다들 저를 쳐다보시니까 부담스럽네요. 티켓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구요.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졌어요. 저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쓸모없는 전단지. 입장권, 초대장, 그런 것들을 갖다 버리는걸요. 저라도 그 연극 티켓을 집에서 받아보았다면 아무 생각없이 버렸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정말로... 어쨌든 제가 참여했던 작품이 서민층 대중에겐 큰 호응을 받아서 전국 투어를 하게 됐으니 안 보신 분들은 다음에 파리에서 공연할 때 한번 오시면 되겠네요. 한 가지,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든 생각인데... 어차피 보보라는 건 처음부터 프랑스 상류층 젊은이들의 자기합리화 같은 걸 비웃으려고 미국 기자가 갖다 붙인 말 아닌가요? 부르주아인데 보헤미안처럼 산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잖아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느끼기에 진짜로 예술을 움직이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은 이런 자리에서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좌파라고 해서 무조건 행동하는 지식인인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볼 댄 두 분이 차이점보단 닮은 부분이 훨씬 더 많으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하시죠.”
치욕감을 느꼈다고 해서 공격적인 자기방어를 하는 것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내던지는 일이 될 것 같아 테오는 최대한 차분한 태도와 밝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실제로는 귀가 멍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머리카락이 모두 하늘로 쭈뼛 서는 것만 같았고 하마터면 포크가 미끄러져 나갈 정도로 손에 땀이 배었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그런 굴욕적인 말을 듣고도 여유 있게 상황을 넘기는 젊은 배우를 보면서 적지 않게 놀라며 감동했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마르크와 제롬이 머쓱해서 입을 다물며 논쟁을 접은 것은 물론이다. 덕분에 테오는 단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저녁식사를 마쳤는데 특히 콜린 극장 연출자인 베르나르는 언젠가 함께 일하고 싶다면서 그의 연락처까지 받아 챙겼다.
많은 기대를 안고 참석했던 전설의 ‘아리스토텔레스’ 모임.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기도 했고 의외로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씨가 새로 피어올랐다. 내 언젠가는 당신들이 모두 만나고 싶어 하는 배우가 되어 있을 테니 두고 봐... 테오는 쟁쟁한 그날의 멤버들 속에 섞여 파티장을 나서며 스스로를 향한 다짐을 새롭게 했다.
이렇게까지나 이 부분을 길게 옮겨 적은 것은 너무나 환상적인 이 소설에서 이 부분이 가장 현실적이었고 또 묘사가 생생했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자면, 이 부분은 완벽한 창작이 아닌, 손미나 자신의 현실에 바탕을 둔 묘사가 아닐까. 분명히 인기 있는 아나운서였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소설로의 전업을 선언했을 때 비슷한 시선을 분명히 받았으리라. 그 사람들에게 소설을 빌려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또한 이런 경험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다가 아직까지도 그 현실을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제일 공감이 갔다.
소설 속의 사랑은 나를 저릿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앞으로 손미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고 그 책들은 분명히 이 책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은 비록 미숙하지만 작가가 엄청나게 노력했을 게 분명한 이 책을, 잠시나마 나를 처음 들어본 ‘봄레미모자’라는 프랑스의 시골마을로 데려가게 한 이 책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노란 꽃이 뒤덮인 그 마을을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리라 하고 마음 먹게 한 이 책을 조금은 사랑하게 되었다. 아직 어설프고 증명되지 않고 내세울 것은 가능성, 그 뿐인,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희망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그 격려를 해 줄 사람이 나 자신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