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의 쉐프 SE (2disc) : 디지팩
오키타 슈이치 감독, 사카이 마사토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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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힐링 푸드? 암튼 그런 장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단연 일본은 세계 제일일 것이다.

존재한다면, 이라고 단서를 달았지만, 적어도 일본 영화에 있어서만큼은 존재한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판타지 영화나 SF 일본 영화보다는 음식에 대한 일본 영화가 더 많지 않을까?

 

이 분야의 대표 주자라고 한다면 카모메 식당일 것인데, 이 남극의 쉐프는 여러 모로 카모메 식당과 닮았다. 일본 열도가 아닌 다른 곳이 배경이며, 장소가 어디든지 등장하는 사람들은 일본식의 음식을 먹고 일본식으로 정을 나눈다.

 

참, 일본이란 나라가 여러모로 재미있는 것이, 이렇게 대중 문화를 통해 접하거나 여행을 하면서 개별적으로 접할 때는 매력적이고 좋아하게 되는데, 어쩌면 지도자들의 역사 인식이라는 것은 그 모양일까, 생각하면 이렇게 다양한 면에서 수준이 불일치인 나라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나라도 남극 기지가 있다. 세종 기지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곳에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고 있고, 어떻게든 그 척박함 속에서 식생활을 해결하며 살아가겠지. 이 영화를 보면서는 최근에 개봉했던 엘리제궁의 요리사를 떠올렸다. 대통령 궁의 개인 요리사였던 과거와, 남극에 와 있는 현재의 주인공을 비교하는 장면에서 의외로 남극의 시설이 좋아서 흥미롭게 봤었는데 이 영화에서의 남극 기지의 모습은 훨씬 더 단촐하다. 수십 명이 되어 보이던 프랑스 남극 기지와는 달리 인원은 총 8명. 그 8명 속에 요리사도 의사도 연구원도 포함되어 있다.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지 못하고, 보고 싶은 가족은 목소리만 들을 수 있으며 영하 70도에 고립된 곳에서 단 8명이 산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정겹겠지만 한 편으로는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나의 공간 속에서 두 명은 용변을 보고 두 명은 세수를 하고 두 명은 대기를 하는 아침 모습을 보면서는 경악했지만, 군대를 다녀오는 우리나라 남자들이라면 씩씩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겠지.

 

남극하면 펭귄인데, 펭귄도 없는 곳이라기에 좀 이상했다. 알고 보니 일본의 남극 기지는 쇼와 기지라는 곳이 있고, 돔 후지 기지라는 곳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나오는 곳은 돔 후지라는 기지로, 펭귄이 있는 쇼와 기지보다 더 추운 곳이어서 펭귄이 없다는 대사도 나온다. 아마 엘리제궁의 요리사에 나왔던 남극의 프랑스 기지나 우리나라의 세종 기지는 쇼와 기지에 가까운 곳이 아닐까.

 

연구원들이 2500m나 되는 얼음기둥을 살펴보며  30만년 전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할 때, 남극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참 식상한 비유지만 자연 앞에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 또 한 번 알았다고나 할까. 아마도 감독의 선택과 집중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남극의 모습을 좀 더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은 조금 있었다. 남극이라는 공간, 여러모로 궁금한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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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레시피 Slow Recipe - 천천히 걷고 싶은 당신에게
휘황 글.그림 / 나무수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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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제목을봤을때는 요리책인줄 알았다.
이 책은 휘황이라는 재일교포3세인 모델이자DJ로2003년부터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청춘을 위한 네 가지 재료
free peace eco slow를 이야기하는데 이책은 그렇게 챕터 4개로 나누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아 물론 말랑말랑한 글과 함께 부드러운 사진도 덧붙여서.

읽다보면 소녀스러운 감성에 조금 오글거린다는 생각도 들고, 의외로 한국어 사용이 능수능란(?)하다는 생각도 들어 놀랍기도 하다. 어차피 책에서 소개하는 이런 일상들,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며 심신이 건강하고 따로 돈 들어갈 곳도 없는 업계에서 꽤 인정받는 프리랜서 아니고서야 그림의 떡이겠지만, 그러니까 오히려 한 시간 내외 정도 천천히 장을 넘겨가며 마치 이 삶을 잠시나마 내 것으로 만드는 기분도 꽤 괜찮다.

부록으로 들어있는 CD는 내 취향도 아니지만 이 책의 전체적인 톤과도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잔잔한 음악과 커피와 함께 느긋하게 오후에 즐기며 잠깐 일 때문에 골치아팠던 머리를 식힐정도로는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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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2 (완전판) -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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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로는 독특한 외모를 한 키 작은 사내였다. 키는 163센티미터를 넘지 않았지만 태도는 당당했다. 두상은 정확히 달걀 모양이었는데, 언제나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콧수염은 아주 뻣뻣하고 군인을 연상시켰다. 옷차림은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말쑥했다. 옷에 묻은 한 점 먼지가 총알에 맞아 입은 상처보다 그에게 더 큰 고통을 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멋을 잔뜩 부린 기묘한 작은 사내는 이제는 보기에 딱할 정도로 심하게 다리를 절고 있지만, 전성기에는 벨기에 경찰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형사로서 그의 '후각'은 탁월했다. 그는 당시 가장 난해한 사건 몇 가지를 해결하는 위용을 보였다.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첫 책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푸아로는 세계로의 첫 등장인 것이다. 처음 선보이기 때문에, 이 소설 속의 푸아로의 외모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그릇에 꽉꽉 넘치도록 음식을 눌러담은 느낌이었다. 

 

더 뒤에 나온 크리스티의 책들은 그릇 자체가 커졌고, 

음식이 딱 알맞게 담겨 있는 느낌이랄까? 

 

 

스타일스 저택에는 노부부와 큰 아들 부부, 작은 아들, 

 

노부인의 온갖 허드렛일을 다 맡아하는 충직한 심부름꾼, 

 

노부인의 옛친구의 딸이 함께 살고 있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이란 노부인이 독살된 사건을 말하며, 

 

망자는 형제가 어릴 때 형제의 생부와 결혼하였고, 

 

현재 노부인의 남편은 형제의 생부가 사망한 후 재혼한 스무 살 연하의 남자로

 

사실 이 가족은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는 셈이다. 

 

 

 

이런 복잡한 가족 구성에, 

 

부검시 드러난 문제의 독극물에 접촉가능한 사람은 세 명이고, 

 

피살자가 사망 직전 다시 쓴 유언장, 

 

사망 전에 마신 음료는 커피와 코코아로 두 종류, 

 

거기에 마을에 퍼져 있는 추문을 비롯해 

 

젊은 남녀의 엇갈리는 로맨스까지 이 이야기는 펼쳐져 있는 내용이 너무 많다.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의 특징인, 

 

단순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놓쳤던 이면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사건 전말이 드러나는 가운데서 느껴지는 절제미,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조여드는 그 압박감을 이 소설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 첫 작품인만큼 이런저런 욕심을 부렸던 게 아닐까? 

 

 

 

어쨌든 이 작품이 크리스티의 베스트는 아니지만, 

 

첫 작품이 이 정도야? 하는 놀라움과 함께 흥미는 충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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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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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려 있는 단편들을 다 읽고 나니 자연스레 내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삽질'이었다. 열심히 땅을 파고 있는데, 알고 보니 파야 할 땅은 그 땅이 아니었다거나, 애초에 땅을 팔 필요조차도 없었다거나, 혹은 아무리 파려고 노력해도 삽만 허공에서 버둥댈 뿐 아무 성과도 없거나.

 

소설 속 등장인물 중 악독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평범하다기보다는 조금 더 착하고 순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면서 의도치 않게 실수하고, 몰랐던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며,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사람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라 한 때 분명히 그랬던 적이 있었고, 요즘엔 아주 조심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또 아니라, 읽다 보면 특정할 수 없는 모두에게, 혹은 내 옆의 누군가에게 연민을 품게 되는, 그런 소설들.

 

 

행정동
 -만지긴 누가 뭘 만졌다고 그래!

-아까 분명......

오재우는 말끝을 흐렸다.

-밀친 거야, 밀친 거라구! 아까 다 봤다며!

-그러니까 그때 분명......

오재우는 그때 잠깐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웠다.

-너, 내가 그렇게 일을 그만두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계속 이러는 거야? 응?

-아니, 난 아까 정말 다 봐서......

-남자 새끼가 치사하게 같은 조 사람 흠이나 잡으려고 들고......

여자는 그렇게 말한 후,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오재우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무언가 갑자기 그의 몸에서 쑤욱, 빠져나가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재우는 다시 뛰다시피 여자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여자의 어깨를 잡앗다.

-이 개새끼야!

여자가 메고 있던 가방으로 오재우를 내리쳤다.

-싫다잖아! 내가 싫다고! 내가 아니라잖아, 이 개새끼야!

여자는 제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뺵, 소리를 질렀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어쨌든 그 사건 조사하면서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구속할 수 있었지. 모양새가 좋잖아. 불순좌경세력들이 폭력까지 휘둘렀으니까, 우리가 예상한 그림보다 훨씬 좋은 그림이 나온 거야. 문제는...... 네 삼촌이었는데, 분명 모임엔 이름이 올라가 있으니까 기소를 하는 게 마땅한데, 그러기엔 내가 좀 미안한 거야. 그래서 내가 우리 반장한테 사실 저 친군 빨대가 맞다고, 내가 활동비로 따로 포섭한 친구라고 말해 거지. 그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던 게, 그 프라이드를 살 떄 내가 네 고모 명의로 넣어둔 돈 중에서 30만원이 빠져나갔거든. 물론 네 고모는 그떄 잠깐 빌려 쓴다고 생각했겠지만 말이야......

-삼촌도, 삼촌도 그걸 알게 되었나요?

나는 술잔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으며 물었다.

-그럼, 잘 알지. 네 삼촌 조사 끝나고 나갈 떄 내가 다 말해줬으니까. 그떄 30만원이면 꽤 큰 돈이었거든.

나는 그제야 프라이드가 후진되지 않는 이유를, 그 수수께끼를 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것은 그 30만원과 관계된 일일지도 몰랐다.

-거기에 삼촌이 좋아했던 여자도 한 명 있었다던데...... 혹시, 모르세요?

-모르긴, 잘 알지. 주동급이어서 내가 직접 조서 꾸몄는 걸...... 걘, 그때 형기 받고 그다음 해에 바로 청주로 갔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김 박사님, 김 박사님...... 김 박사님께서 해주신 이야기 잘 들었어요. 하지만 김 박사님...... 이 개새끼야, 정말 네 이야기를 하라고!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네 이야기,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네 이야기 말이야! 나에겐 지금 그게 필요하단 말이야, 김 박사, 이 개새끼야.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당혹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하지만 그는 또 한편, 이 아이가 기증자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가 얼핏 생각한 기증자의 아이는,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채 열 살도 되지 않는 꼬마아이였다. 삼십대 후반이라는 기증자의 나이 떄문에 자동적으로 그런 그림이 그려진 것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능성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앞에 앉아 있는 이 아이는, 어쩌면 누군가의 문병을 온 학생일 수도 있고, 장염이나 빈혈 떄문에 입원한 환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환자복을 입고 있을지도 모르고, 혹 상복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가능성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 아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탄원의 문장
나는 조금 당황했다. 당황했지만 또 한편 어떻게든 변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그녀앞 소파로 다가갔다.

-아니, 나는 어쨌든 P에 대해선 최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교수님도 P에 대해선 잘 아실 거 아니에요? 그 개자식 말만 들으셨으니까.

여학생이 갑자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해 나는 어, 한 상태에서 그대로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 개자식이 종종 언니한테 손찌검한다는 것도 말하던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입증 불가능한 것들은, 어쩌면 입증 가능한 사실들로부터 나오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것은 '발견'의 영역이지, '발명'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사실들과 사실들 틈 사이에서 불가능한 것들은 시작되고 피어난다는 것, 그래서 숙명적으로 사실들의 세계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에서부터 최의 탄원서는 시작되었다.

 

 

이정(而丁)-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2
"언젠가 수환 학생이 이정 선생의 이름을 처음 말하면서 그게 '고무래가 되겠다'라는 뜻 아니냐고 물어왔던 적이 있고. 나는 그때 그런 뜻도 있지만 그건 그냥 글자 모양 그대로 보는 게 맞을 거라고 말해주었소. 그러니까 쇠스랑(而)과 망치(丁)가 맞을 거라고...... 우린 해석하기보단, 보이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화라지송침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지금 참아내고 있는 그 무엇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그렇게 못한 사람들, 죄의식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거절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망상을 참아내는 사람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사람들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내기도 한다. 누가 어떤 괴물 같은 짓을 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참아내고 있는가, 누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한계를 말해주는, 숨겨진, 또 하나의 눈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나 아내나, 우린 둘 다 기종 씨를 참아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나의 그것과 아내의 그것이 다를 수 있고, 나의 짐작과 아내의 진실이 같을 순 없을지라도 기종 시를 외면했다는 점에서 아내나 나는 같은 사람이었다. 나느 가끔 내가 그를 참아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그랬다면, 아내는 나 또한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결코 아내를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나 역시도 아내의 입장이었다면, 그건 또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내나 나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내는 선에서,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내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그게 조금 쓸쓸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게 또 우리였으니까.

 

내가 양돈축사를 떠나기 직전, 꽁지머리 남자에게서 들은 일화는 이런 것이었다. 기종 씨의 아버지가 양돈축사에어 가까운 폐비닐하우스에서 목을 맸다는 것, 의자를 밟고 올라가 목을 맸다는 것, 그 아래에서 기종 씨가 꼬박 사흘을 지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남자는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장님이 그 청년 아버지가 장사를 치러주었다고. 그다음부터 계속 머슴처럼 부렸다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나는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속옷은 속에 입는 옷이 맞잖아? 그치, 형? 그래야 속옷이 되는 거잖아, 응?

나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이며, 계속 형에게 묻고 또 물었다. 대화도 통 없던 형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나는 오래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이산 가족처럼 오래오래, 두서없이 말을 했다.

한데, 깊이 잠들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형이 갑자기, 툭, 한 마디 던졌다.

-미친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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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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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고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오프라 윈프리도, 말콤 글래드웰도, 조엘 오스틴도 아니었다. 이른바 행복 멘토라고 불렸던, 한 여성 유명 인사가 몇 년 전 유명을 달리한 사건.

 

그 사건이 충격이었던 것은, 평범한 가정주부를 지내다 활발한 방송활동을 통해 '행복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수많은 저서를 통해 절망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죽기 바로 직전까지도 행복과 긍정을 강조했다는 점이었다. 함부로 고인을 욕되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고인이 유서에서 직접 밝혔듯이 70여가지의 통증은 겪어보지도 못했으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해서도 안 될 일이다. 다만, 무한한 긍정이라는 것, 그 한계라는 게 너무나 아프고 따갑게 느껴질 뿐이다. 이런 저런 언급도 이미 돌아가신 분께는 참 죄송한 일이지만,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게 된다. 스스로 주장했던 긍정의 힘, 오히려 그것이 그분의 족쇄가 되지는 않았을까. 오히려 스스로 규정한 그 틀에서 벗어났더라면, 안타까운 그 결말만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책은 저자가 유방암을 선고받은 사건에서 출발한다. 다른 환자들에게서 '암은 축복'이라는 식의, 극도의 긍정적인 태도를 목격하면서 미국에 얼마나 긍정주의가 깊숙이 퍼져있는지 확인했고, 사회 곳곳에서 이른바 긍정 이데올로기가 어떤 방식으로 활개를 치고 있으며, 그 실상과 결과를 보고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암은 축복'이라는 부분은 정말 경악할 노릇이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한국 또한 미국 못지 않게 긍정의 힘에 대해 노래하는 나라이다. 그 유명한 시크릿이라는 책, 처음 보았을 때 대체 이런 책이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낙관주의, 긍정주의를 믿고 싶어하는 대중의 심리가 일정정도 존재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이 책에서 소개하듯이,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다룬 최초의 역작인 카네기 인간관계론이 출판된 것이 1936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좋은 면만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무의식적인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저자는 그 부분에 대해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 깊은 무력감이 놓여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긍정적 사고를 확산시키는 것에는, 이른바 돈냄새가 나는데, 흔히 말하는 동기 유발 사업의 시장 규모는 대략 200억 정도라고 이 책은 추산하고 있다. 기업 뿐 아니라 초대형 교회, 대중 매체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무한긍정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엉망진창인 현실, 바뀌는 길은 요원해보이고, 그렇다면 그것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는게 사실상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차피 바뀌지 않을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면 좀 더 긍정적으로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단순히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게 돈 좀 쓰고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의 정도가 아니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2001년 9월, 미국을 경악하게 했던 비행기 테러 사건의 경우, 불길한 조짐이 여러 곳에서 나왔으나 당시 부시를 비롯하여 미국을 지배하고 있던 긍정주의로 인해 그 경고들은 전부 무시되었고, 암 환자들에게 낙천성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긍정적인 사고에 실패한 암 환자는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며 제 2의 부담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긍정의 힘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조엘 오스틴 부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항공기 갑질 사건, 그와 유사하게 1등석 항공기에서 소란을 피운 조엘 오스틴의 아내는 30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고, 승무원이 소송을 제기했으나 그 소송은 기각되었다. 저자는 직접 오스틴의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 사건을 언급하며 부부는 단순히 우리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승리라며 청중들 앞에서 감격해했다고 한다. 대체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가르침은 어디에 간 것인지? 우리 나라의 사이비 교주들의 행태와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니나 다를까 미국에서도 수많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단자와 다를 게 없다며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리먼브라더스의 파산 2년 전, 글로벌 책임자는 CEO에게 부동산거품을 경고하며 비즈니스 모델을 다시 생각하자며 건의했다고 한다. 바로 그는 해고당했고, 파산하는 시점에서도 CEO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경영진은 더없이 사치스러운 세계에 격리되어 살아가고, 듣고 싶은 거짓말만 들으며 부정적인 의견에 눈과 귀를 닫았다. 리먼브라더스뿐 아니라 수많은 기업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는 현재 미국 경제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대안으로 심리학자 줄리 노럼의 '방어적 비관주의'를 제시한다. 긍정적 사고의 대안이 절망은 아니며, 부정적 사고는 긍정적 사고만큼이나 망상으로 빠질 위험이 있기에,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위험과 기회, 죽음의 확실성과 행복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주장한다. 조종사도, 자동차 운전자도, 배우자의 부정을 의심할 때에도, 자녀를 키울 때에도, 높은 수준의 경계심을 가지고 실패를 의식하며 예상까지 하는 수준의 현실주의는 생존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한편으로는 눈앞을 가리우고 있던 막이 벗겨지는 느낌이 드는 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누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행동을 취해야만 그나마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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