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 150명의 지성에게 물었다
존 브록만 엮음, 최완규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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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존 브룩만이라는 이 책의 엮은이는, 엣지 재단의 창설자로, 매년 세계 석학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모아 해마다 출판하고 있다. 2010년의 올해의 질문은, "인터넷이 당신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꾸어놓고 있는가?"였고, 거기에 대한 답을 모아 엮은 책을 번역한 책이 이 책이다.

 

2. 이 책의 원제는 Is the internet changing the way you think? 이다. 즉, 책의 제목이 상당한 의역을 거쳤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터넷, 당신, 생각이다. 즉, 인터넷이라는 것이 당신 개인에게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는 방법을 바뀌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의역된 제목처럼 '우리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다면 거시적이며 일반적인 답변이 나왔을 것이다. 엣지 재단에서는 그 대신 질문을 받는 '당신'에 대상을 국한시킴으로써 포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고, 그 결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3.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 <몰입의 즐거움>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총, 균, 쇠>의 제레드 다이아몬드 등 이 질문에 답한 지성들의 면면은 화려하며, 흥미롭다. 이들의 답변은 길게는 11쪽, 짧게는 단 4줄까지 길이와 내용, 다루는 범위의 넓이와 깊이도 다양하다. 반드시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을 필요는 없으며, 목차만 훑어보고 흥미있는 부분만 띄엄띄엄 읽어도 될 것 같다. 물론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어가면서 인상 깊은 부분은 다시 반복해서 읽는 편이 이 책의 내용을 머릿속에 박아넣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차피 정답이 없는 문제 아닌가? 세계적 지성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였는데 이렇게나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답변의 효용성, 혹은 미래 사회의 예측에 대한 정확성에 대해 굳이 탐구하듯이 읽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사회에 대한 진단도, 결국 시간이 흐르고 이 시간이 과거가 되어야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니까.

 

4.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지만 대중을 상대로 한 책이기에 읽기에 어렵지 않다. 지루해지기 전에 금방 화자가 바뀌기 때문에 집중도가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세계적 지성이 주는 무게감에 비해, 그리고 이 책의 물리적인 두께와 질문의 심오함에 비해, 그다지 책 자체는 임팩트가 없었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는데 이 책의 핵심 주제, 즉, 인터넷이 어떻게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었나, 라는 명제에 대해서 내가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인터넷이라는 것이 처음 생겨난 때는 몇십 년 전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급속도로 보급된 것이 1990년대 후반일텐데, 그렇다면 이미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인터넷이란 용어가 더 이상 '신기한' 뭔가가 아니었고, 중학교 시절부터는 이미 지금과 비슷한 수준의 인터넷 환경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 자신 그리고 내 또래들에게 있어서 인터넷은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나라는 사람의 가치관이나 사고 방식, 행동 모습 등을 바꾼 적이 없기 떄문이다. 머리가 굵어지고, 스스로의 판단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사고를 하기 시작하는 사춘기 이전부터 나는 인터넷을 접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사회에 대해서 기억은 할 지언정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5. 만약, 스마트폰이 나를 어떻게 바꾸었나?를 주제로 삼는다면 어떨까? 내가 중학교 시절, 드물게 반에서 한 두 명 정도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 상당수의 아이들이 휴대폰을 소유했으며,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스마트폰이 처음으로 출시되었다. 현재 30대인 전세계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세계 유수 기관의 연구원들, 명문 대학의 박사과정 학생들, 미래가 기대되는 작가들, 촉망받는 음악가들 등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비록 그 깊이나 통찰력은 떨어질지라도 이 책보다는 더 나에게 흥미를 주었을 것이다. 사실, 인터넷이 어떻게 우리 삶을 바꾸었나?와 같은 명제는 나에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유럽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나? 와 다를 게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미래는, 어쩌면 말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오지 않을 시간일 수 있지만, 아마도 나에게는 멀지 않은 시간, 다가오고 있는 현재일 수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석학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에 있어서는 나와는 온도차가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답변이 개인의 경험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주관적이며, 짧다는 것도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깊이있는 사유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이들의 생각이 맞을 지도 의문스럽고, 설령 맞는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짤막짤막하게 진단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결국 어떻게든 큰 변화를 겪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그 변화 앞에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분명한 진실일 텐데.

 

6. 나에게는 인터넷 이전 시절이 마치 TV 이전 시절, 라디오 이전 시절, 금속활자 이전 시절 처럼 똑같은 과거라면, 양쪽을 전부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어떨까? 그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버티어가면서 기존의 생활 양식을 어떤 방향으로든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의 막막함과 좌절감은, 짐작하기가 힘들다. 우리 아버지같은 경우 스마트폰을 좀 늦게 가지신 편인데, 한번은 젊은 직원들과 식사를 하다가 특정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게 몇년도에 일어난 사건이지~라고 이야기하니까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던 한 직원이 바로 그 자리에서 검색해 보고는 아, 맞네요~ 대단하세요~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작 아버지는 그 상황에 놀랐다고. 아마도 격세지감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정확하게 암기를 한다는 것은 이제 그다지 장점이나 특기가 될 수 없다는 그런 의미의 말을 하셨던 것 같다. 소싯적에 암기, 특히 연도와 숫자에 관한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정확성을 추구하시던 아버지꼐서는 그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 책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많은 작가들이, 뭔가를 쓸 때마다 컴퓨터를 켜 놓고 사실 확인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나온다. 나에게는 놀랄 것도 없는 이 당연한 사실이, 몇 십 년전부터 도서관과 필기한 노트를 뒤져가며 연구를 해 오던 세계적인 석학들에게는 분명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만큼 놀라운 사실이리라.

 

7. 대략적으로 이 책의 대답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번째, 인터넷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두번째,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이 인터넷을 만들어낸 것이다. 즉, 첫번째와는 화살표의 방향이 다를 것이다. 세번째, 대체 이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네번째, 잘 모르겠다.

 

8. 150명의 석학 중 내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70퍼센트 이상이 첫번째의 의견을 보인 것 같다. 여기서도 의견이 또 갈린다. 7과 구분하기 위하여, 1-1. 인터넷을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2. 인터넷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굳이 석학의 의견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 수준에서 알만한 것이 너무 많다. 정보의 접근성, 정치의 민주화, 불평등의 심화, 사생활 침해, 사유 능력의 상실, 비용의 절감, 급속화된 세계화, 판단력의 부재 등등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라면 한번쯤 다 접해보았을 말들이며, 그 중 몇가지는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9. 어찌 보면 대동소이한 이야기들이다. 누가 무슨 주장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어서 각 이야기들 간에 구별은 필요없어지고, 책의 절반쯤 오면 속도가 붙는다. 그 중에서도 물론, 빛나는 몇몇 조각글들이 있다. 과학사학자이자, 기계 속의 다윈Darwin among the machines의 저자인 조지 다이슨George Dyson의 글이 특히 그렇다. 알류트족Aleuts의 카약kayak과 틀링깃족Tlingit의 카누canoe의 비교. 절묘한 비유로 단 한 페이지에 압축적으로 주제가 들어간다. 어느 쪽이 옳은 방향인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했는데, 아마도 저자 스스로 확실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그것도 매력적이다. 다만, 저자의 심정만 정확히 세 문장으로 묘사했다. 분량이 제한되어 있는 밑줄긋기에 본문 전체가 다 들어갈 정도로 짧지만 단단한 글이다.

 

10. 그 외에도 인터넷은 행태를 바꾼다 _ 시리언 섬너Seirian Sumner의 글이 개인적으로 좋았다. 런던동물원, 동물학연구소 진화생물학 연구 교수인 그는 "change"에 초점을 딱 맞춘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전공이 진화생물학인만큼, 원시 사회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의 행태를 비교한 점도 좋았다. 독립 연구가이자 이론가인 주디스 리치 해리스Judith Rich Harris의 단 5줄짜리 글도 좋았고. 그녀가 썼다는 개성의 탄생No Two Alike: Human Nature and Human individuality도 궁금해졌고. 프리폼프로덕션컴퍼니FreeFormProduction Company 설립자인 제시 딜런Jesse Dylan의 글도 흥미로웠다. 영화제작자이면서 의학 사이트 Lybba.org의 설립자인데 전혀 공통점이 없어보이는 두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예를 든 일화도 글쓴이의 이력을 닮았는데, 시신경 척수염의 진단 방법이 발견된 일화를 통해 서로 다른 분야의 상호작용의 긍정적인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양한 분야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너무나 손쉽게 이루어지는 인터넷이 얼마나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지 실감이 들었다.

카약 대 카누-조지 다이슨
북태평양에서는 작은 배를 만들 때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알류트족 등 카약을 선호하는 부족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땅에 살며 해변에서 주워 모은 나무 조각으로 골조를 세워 배를 만들었다. 틀링깃족 등 나무 속을 파낸 카누를 선호하는 부족은 우림지대에서 나무를 통째로 실어와 카누만 남을 때까지 구석구석 파내 배를 만들었다.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지만 알류트족과 틀링깃족의 성과는 비슷했다.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인터넷으로 봇물이 터진 정보의 홍수도 비슷한 문화적 분열을 초래했다. 우리는 과거 카약 제조에 익숙했다. 가능한 모든 정보 조각을 주워 모아 물에 뜰 수 있는 골조를 세웠다. 이제는 속을 파내는 카누 제조법을 배워야 한다. 불필요한 정보를 솎아내 그 안에 숨겨진 지식의 속살을 드러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족족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도록 훈련받은 나는 뼛속까지 카약 제조에 익숙하다. 새 기술을 배워야 하는 현실이 정말 싫다. 하지만 배우지 않으면 카누가 아닌 통나무에 올라타 노를 젓는 신세가 되리라.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열려 있는 채팅방이 사라진다고?"
"그럼 어떻게 새 친구를 사귀는데?"
"외국 나간 친구들이랑 어떻게 연락하는데?"
"사람을 진짜로 만나서 직접 물건을 사야 한다는 뜻이잖아!"

낯선 것에 대한 경계와 의심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인간의 습성이다. 자리를 빼앗겨 자원을 도둑맞지 않기 위한 생존 본능이다. 전혀 낯선 사람까지 스스럼없이 보듬어주는 등 무분별한 행동을 부추긴다는 것도 인터넷의 특성이다. 며칠 전, `시리언Seirian`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인 페이스북 그룹에서 초청 메시지를 받았다. 이걸 뿌리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 내가 어딜 가서 열일곱 명이나 되는 시리언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겠는가. 마침내 여러 시리언이 참여하는 가상 네트워크에 연결된 노드가 될 기회가 온 것이다. 왜 가입했느냐고?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데다가, 현재 소셜 네트워크와 무관한 전혀 다른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보면 어떨까,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더 친근한 인연을 만들수록 잠재적인 보상도 커지기 마련이다.

페이스북 시리언 친구들이 가상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집을 불쑥 찾아와 현관문을 두드렸다면 과연 내가 가입했을까? 역시 어림없는 소리다.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사적이며, 자칫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내가 어디 사는지도 아는데, 전기 코드 뽑듯 간단히 인연을 끊을 수도 없다). 선조들의 행태와는 다르게 우리는 온라인에서 사생활 침해를 용인하며, 인터넷의 성공은 그런 습성 변화에 기대고 있다. 연결성은 사생활 침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그 덕분에 정보 습득과 전송이 크게 향상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처음에는 연결이 끊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출발했지만, 좀 더 고민해본 다음에는 인터넷이 어마어마한 자원이며 전통적인 정보 저장 및 전송 수단으로서 대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인터넷이 없으면 원하는 걸 어떻게 찾지?"
"정보에 아예 접근을 못하게 되잖아."
"실제로 쇼핑을 가고 도서관에 가야 한다는 거야?"
"너무 느려."
"삶이 작아지겠지."

인터넷은 지식 및 연결에 대한 갈망뿐 아니라 우리가 온라인에서 놀라울 정도로 헤프게 베푸는 온정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는 인터넷에서 과도한 애타심을 드러낸다.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조언하거나 다른 사람의 지식을 채워준답시고 익명으로 위키피디아에 기여하며 몇 시간씩 허비한다. 보답이 뒤따를 거라는 보장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은행 관련 정보든 음악적 성향이든) 개인 정보까지 내걸고 친구를 사귀고 낯선 사람을 믿는 것은 자연스럽게 경계심부터 내세우던 선조들의 행태에 배치되는 인터넷 사용자의 기본적인 성향이다. 우리가 페이스북을 통해 기꺼이 내주는 데이터는 전체주의 정권의 비밀경찰이 애를 써서 얻어내려는 천금 같은 정보다. 낯선 사람에 대한 의심(또는 인식)이 느슨해져 (무분별할 정도로) 애타심을 발휘해 우리의 자원을 나누어주고 그 대가로 더 큰 것을 얻곤 한다.

처음에는 나 스스로 인터넷 이전의 경험이 워낙 적어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사뭇 다른 유기체로 초고속 진화를 거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터넷이 꼭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놓으라는 법은 없지만, 행동을 변화시켜 사고 형성과 방향에 영향을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프라인에서 우리는 은밀하고, 인색하며, 사생활을 강조하고, 의심이 많으며, 자기중심적일지 모른다. 온라인에서는 박애주의적이고, 온정을 베풀며, 상냥하고, 친근하며, 위험할 정도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 오프라인 세계라면 온라인 행태는 자연도태되고 말 것이다. 아무도 협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이 대뜸 친구를 맺자는 데 기꺼이 응하거나 온정을 베풀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오프라인 행태는 온라인 세계에서 통하지 않는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양보하지 않으면 자원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우리의 인격마저 바뀌는 이유는 인터넷이 게으른 현실 도피를 위한 관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우스 한 번 움직이면 우리 행동의 결과가 현실이 아닌 듯한 세계에 들어설 수 있다. 온라인 및 오프라인 인격이 얼마나 다른지는 당연히 저마다 정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온라인 삶은 말 그대로 무사태평한 환상의 세계일 것이다. 세컨드 라이프의 환상 속 세계에서 무결점 아바타를 통해 대리 경험을 만끽하며 살지도 모른다. 오프라인 자아가 부대끼는 현실의 무료함과 고달픔에서 도피하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행태 변화는 적응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궁극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최대한 적응해 도태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된다. (말이든 글이든) 의사소통 기술을 사용해 서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꾸도록 남을 설득한다. 우리 선조들 역시 원시적인 구두 의사 소통 방식과 상형문자를 설득의 도구로 삼았다. 인터넷은 인류 의사소통 역사에서 세 번째 위대한 돌파구이며, 그런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려면 유연한 행동이 필수적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인터넷은 접속할 때마다 내 행동을 바꾸어놓는다. 그런 과정에서 내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다. 과감하고, 장난스러우며, 충동적이고, 상호작용을 즐기는 온라인 인격체는 내가 오프라인 테두리를 벗어나 생각하도록 부추긴다. 나는 인터넷에 맞게 생각한다. 인터넷의 지식을 사용해 내 사고에 영감을 주고 기존 사고를 흔들어놓는다. 이 에세이가 그 생생한 증거다. 페이스북이 내 사고에 불을 지피고, 이 에세이의 밑거름이 되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에세이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딱 좋아`의 기쁨-주디스 리치 해리스
인터넷이 정보를 쏟아내는 본새는 케첩 병이 케첩을 쏟아내는 본새와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너무 적다 싶더니 이젠 너무 많다.
그 중간쯤에 잠시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딱 좋아`의 순간이 있었다. 내게는 10년가량 지속되었다.
내 인생 최고의 시기였다.

메이요클리닉Mayo Clinic에서 시신경 척수염neuromyelitis optica(NMO, 데빅 병Devic`s disease 또는 데빅 증후군Devic`s syndrome이라고도 알려져 있다)이라는 희귀병에 관한 영화를 만들 때였다. 이 병의 진단 방법이 발견된 경위에 관해 들었다.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 전문가가 한 심포지엄에서 연설하는데, 암 연구 학자가 듣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우연 덕분에 진단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보아하니 절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메이요클리닉을 세운 메이요 형제일 수도 있다)가 심포지엄을 다양한 분야의 연구 학자와 의사가 참석하는 행사로 만들어 그런 교류가 가능한 시스템을 수립한 덕분이다. 그런 사람과 아이디어가 합쳐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기에 진단법이라는 통찰을 얻게 된 것이다. 또 그 덕분에 희귀병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등 긍정적인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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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원경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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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존의 크리스티 소설과는 좀 다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동일하지만, 무대가 20세기의 영국이 아니라, 기원전 2000년 경, 이집트 테베의 나일 강 서쪽 강가이다. 물려줄 유산이 많은 아버지와 세 아들, 사별한 딸과 그를 흠모하는 아버지의 부하, 젊은 계모 등 흐름은 우리가 늘 보던 소설과 유사하게 흘러간다. 이 소설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것, 인간이 품는 희노애락애오욕이라는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진보하고, 문명이 발달하더라고 결국 대동소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굳이 이 소설의 배경을 이집트로 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비슷한 내용이더라도 무대가 수천년 전 이국적인 공간으로 바뀌면서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재미가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4계절이 아니라, 농경생활에서 더 유용하게 계산되는 3계절이라는 것도 새롭게 안 사실이었고, 죽은 사람의 묘를 관리하는 것이 단순히 자손이 아니라, 묘지기라는 별도의 직업이 있으며 죽은 사람의 재산을 기증받고 그 대가로 그 사람을 공양한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직업적인 묘지기는 꽤 많은 재산을 소유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책 앞에 나와 있듯이, 이 책은 크리스티의 친구였던 이집트 학자 스티븐 글랜빌의 요청에 의해 탄생했다.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추리 소설을 써 보라는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이 소설은 1945년에 발표되었다. 크리스티가 1930년 고고학자 맥스 맬로원과 재혼한 후 한동안 함께 이집트 등지를 여행했다고 손자가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경험들이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나일 강의 죽음 같은 작품들은 이전의 작품들의 주요 무대였던 영국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며, 그 배경 탓에 떄로는 신비롭고, 때로는 모호한 분위기를 쉽게 만들어낸다. 크리스티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나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미신 같은 것들은 예외없이 결말에서 전부 인간이 한 일이라고 밝혀지는데, 20세기 초반, 근현대의 영국 사람들이 애초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괴이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작품에서는, 역사와 신화, 민담과 전설의 구분히 모호했던 그 시대적 배경 떄문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맹목적인 믿음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이 작품은, 아마도 그녀의 재혼으로 인해 탄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데, 당시 이집트 사회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떄문이다. 어쩌면 스티븐 글랜빌도 재혼한 남편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일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8년간의 결혼 후 아이 한 명을 낳고 사별한 레니센브는, 딸 하나를 낳은 후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한 크리스티 자신의 분신이기도 할 것이다. 남은 일생을 혼자 살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인 한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보면서 문득문득 아이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자신에게 구애하는 남자 앞에서 왠지 머뭇거리게 되는 과정들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아마도 크리스티 자전적인 부분이 들어가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순수하고 사람을 잘 믿는 레니센브는 헤이스팅스의 변형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를 늘 걱정하는 호리는 푸아로, 할머니 에사는 마플 양이 변신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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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람도 마찬가지야. 장식 문을 만들지. 속이려고.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을 깨닫는 순간 자만과 허풍과 압도적인 권위로 장식된 근사한 문을 만들지. 그리고 얼마 후에는 정말로 그 존재를 믿는단다. 사람, 모든 사람은 그 문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하지만 레니센브, 그 문 뒤에는 벌거벗은 바위뿐이야....... 그래서 현실이 찾아와 진실의 깃털로 건드리면, 참된 자아가 모습을 드러내지. 카이트의 경우 온순함과 복종심은 그녀가 바라는 모든 걸 가져다줬어. 남편과 아이들. 아둔함은 그녀에게 손쉬운 삶을 선사했지. 하지만 위험이라는 형태로 현실이 찾아와 겁을 주자 본모습이 드러난 거야. 그녀는 변하지 않았단다, 레니센브. 그 힘과 그 무자비함은 늘 거기 있었어."

 

"네, 아마 두려울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돼요. 집안사람들 모두 부들부들 떨면서 사원으로 달려가 부적을 사고, 해 질 녘에는 이 길을 걷지 않는 게 좋다고 떠들어요. 하지만 사티피가 비틀거리다 추락한 건 마술이 아니었어요. 두려움이었어요. 그녀가 저지른 사악한 짓으로 얻게 된 두려움 말이에요. 젊고 강하고, 삶을 즐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건 나쁜 짓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사악한 짓을 한 적이 없고, 설령 노프레트가 절 미워했다 해도 그녀의 증오가 저를 해칠 수는 없어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리고 어쩄건 늘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러니 저는 두려움을 극복하겠어요."

 

"그녀의 말이 거짓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게 아닐까? 그녀가 진심으로 널 도와주면서 자기가 떠벌리는 사랑이란 걸 보여 준 적이 있니? 상처 주고 화를 불어일으킬 말만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면서 가족간의 불화를 조장했잖아?"

 

"카이트는 지나치게 아둔한 여자야. 하지만 나는 늘 아둔한 여자를 의심했단다. 그들은 위험한 존재야. 오로지 자기 주변의 일만 보고 한 번에 하나만 알지. 카이트는 자기 자신과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 아빠인 소베크만 존재하는 작은 세상의 중심에서 살아왔어. 야흐모세만 제거하면 제 자식들이 부자가 된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 문득 들었을 수도 있지. 소베크는 늘 임호테프의 눈에 마뜩찮았어. 경솔하고, 통제를 못 견디고, 순종을 모르지. 야흐모세는 임호테프가 의지하는 아들이었어. 하지만 야흐모세가 사라지면 임호테프는 소베크에게 의지해야 돼. 아마 카이트는 그렇게 단순한 생각을 했을 게다."

 

"전에 네가 노프레트의 등장이 악을 몰고 왔다고 말한 적이 있어. 그건 사실이 아니야. 악은 이미 가족들 마음속에 숨어 있었던 거야. 노프레트의 등장은 그걸 은밀한 곳에서 밖으로 끌어낸 것뿐이지. 그녀의 존재가 장막을 거둔 거야. 카이트의 온화한 모성은 자기 자신과 자식을 위한 무자비한 이기심으로 변했어. 소베크는 더 이상 쾌할하고 매력적인 젊은이가 아니라, 허풍 떠는 방탕한 약골이었고. 이파이는 매력적인 개구쟁이 소년에서 교활하고 이기적인 놈으로 변했지. 헤네트의 가식적인 헌신을 통해 그 독기가 명백히 드러나기 시작한 거야. 사티피는 악녀이면서 동시에 겁쟁이의 모습을 보였어. 임호테프 자신은 말 많고 거만한 폭군으로 퇴보했고......"

 

"성장이라는 것 때문인지도 몰라. 점점 더 다정하고 현명하고 훌륭해지지 않으면, 그 성장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사악한 마음을 품게 되지. 혹은 공간도 시야도 없이 삶이 너무 폐쇄적이거나 너무 침잠해서 그럴지도 몰라. 아니면 전염성 병충해처럼 차례차례 병에 걸리거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기질로 보아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었어. 하지만 야흐모세는 항상 소심하고, 쉽게 굴복하고, 반항할 만한 용기가 부족했지. 그는 임호테프를 사랑했기에 그를 기쁘게 하려고 열심히 일했지만, 임호테프는 착한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멍청한 느림보라고 생각했어. 아들을 무시했지. 사티피 역시 불한당처럼 온갖 조롱으로 야흐모세를 괴롭혔어. 감춰져 있던 한 맺힌 분노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서서히 무거워지기 시작했어. 온순해 보일수록 내면의 분노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던 거야. 그러다 야흐모세가 마침내 아버지의 동업자로 인정받아 근면과 성실에 대한 보상을 거두는 꿈에 부풀었을 떄, 마침 노프레트가 나타난 거야. 마지막 불꽃을 점화한 것은 노프레트, 어쩌면 노프레트의 미모였겠지. 그녀는 세 형제의 남성적 자존심을 건드렸어. 소베크를 바보라고 조롱해 아픈 곳을 찔렀고, 이파이를 남자 자격도 없는 건방진 꼬마로 취급해 성질을 돋웠고, 야흐모세를 남자도 아니라며 멸시했지. 사티피의 혀가 마침내 야흐모세의 인내심을 무너뜨린 건 노프레트가 온 뒤 부터였어. 자기가 남편보다 더 남자답다는 조롱과 모욕 떄문에, 결국 그의 자제력이 무너진거야. 그는 이 길에서 노프레트와 마주치자 인내심을 잃고 그녀를 던져 버렸어."

 

"하지만 일단 마음이 악을 받아들이면, 악은 옥수수 밭의 양귀비처럼 만개하는 법이야. 어쩌면 야흐모세는 평생 폭력을 선망하면서도 그걸 얻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는 나약하고 순종적인 자신을 경멸했지. 아마 노프레트를 살해하고 나서 엄청난 힘을 느꼈을 거야. 우선 사티피에게서 그걸 꺠달았지. 자신을 위협하고 모욕하던 사티피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온순해졌으니까. 그러자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마음속에 묻혀 있던 모든 불만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어. 지난번에 이 길 위에서 고개를 쳐든 뱀처럼. 소베크와 이파이는 야흐모세보다 한 놈은 더 잘 생기고, 다른 한 놈은 더 똑똑했어. 따라서 제거 대상이었지. 야흐모세가 집안의 통치자가 되어 아버지의 유일한 위안이자 의지가 돼야 하니까. 사티피의 죽음은 살인의 즐거움을 증폭시켰어. 그 뒤로 더욱 강해진 것이지. 이후부터 그의 탐욕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어. 그떄부터 철저히 악에 사로잡힌 거야."

 

그날 배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던 카메니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잘생기고, 강건하고, 쾌활한 그를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피의 맥동과 가락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 그를 사랑한다. 카메니라면 크하이가 그녀의 인생에서 차지했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

'함께 살면 행복할 거야. 그래, 우린 행복할 거야. 함께 살고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면서, 튼튼하고 예쁜 아이들을 키울 거야. 바쁘게 일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고, 나일 강에서 배를 타는 즐거운 날도 있겠지. 크하이와 함께했던 그런 삶이 다시 시작될 거야. 그 이상 뭘 더 바라겠어? 그 이상 뭘 더 원하겠어?'

 

호리와 함께하는 삶이 어떨지 짐작할 수 없엇다. 비록 다정하고 그녀를 사랑하지만, 헤아릴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아름다움과 풍요의 순간들은 함께 나누겠지만 일상의 삶은 어떨까?

 

"네 인생을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어, 레니센브. 네인생이니까. 결정은 너만이 할 수 있는 거란다."

그녀는 아무런 도움도, 카메니처럼 금세 마음을 흔들어 놓는 말도 듣지 못한다는 것을 꺠달았다. 호리가 손마 잡아줬더라면....... 하지만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자 두 가지 선택이 가장 간단한 말로 확연하게 떠올랐다. 쉬운 삶과 어려운 삶. 그녀는 몸을 돌려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가, 이미 익숙한 평범하고 행복한 삶으로 돌아가고픈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예전에 크하이와 함께 누렸던 삶. 그곳은 안전했다. 늙어죽는 것 말고는 두려울 것 하나 없이, 일상의 기쁨과 고통을 나누는 삶.......

죽음. 그녀는 삶에 대한 생각들로부터 빙 돌아 다시 죽음에 이르렀다. 크하이는 죽었다. 카메니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그의 얼굴 또한 크하이의 얼굴처럼 그녀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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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를 타고 - [초특가판]
스탠리 도넌 외 감독, 데비 레이놀즈 외 출연 / 영상프라자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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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비'가 들어갔기에, 영화 속에서 비가 내리는 장면이 많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단 한 장면, 그 장면이 바로 영화의 포스터 대표 이미지로 나오는 사진의 바로 그 장면이다. 비가 내리는 장면은 바로 그 장면 단 하나지만, 그 장면이 이 영화 전체를 대표할 정도이기에 다 만들어진 영화에 이 제목을 붙였으리라.

 

원제는Singin' in the Rain.

우리 말로 번역되면서 사랑은 비를 타고,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원제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가 전혀 없기는 하지만, 그 유명한 비를 맞고 노래부르는 장면이 바로 사랑을 확인한 직후였다는 점에서 더 멋스럽게 느껴진다.

 

요즘은 간단한 단어인데도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영어 원제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겠지만, 나는 그런 풍토가 약간 성의가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지만, 남녀 주인공이 굉장히 매력있고 춤과 노래가 흥겨워서 즐겁게 보게 된다. 남자 주인공 진 켈리, 그의 친구 도날드 오코너, 신예 여배우 역의 데비 레이놀즈, 얄미운 톱 여배우 진 하겐까지 전부 다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뮤지컬과 같은 노래부르며 춤추는 수많은 장면들은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생이 참 지루해지는 때,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삶이 참 괜찮게 느껴질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최근의 <아티스트>에 여러모로 영향을 준 것 같은데, 둘 다 좋지만, 좀 더 가볍고 청량감 있는 영화가 이 영화다. 물론, 후대에까지 길이 남을 영화도, 아마 이 쪽일 것이다. 고전이 왜 고전이고, 명작이 왜 명작인지 알 수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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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미셸 아자나비시우스 감독, 장 뒤자르댕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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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발렌타인은 남부러울 것이 없는 최고의 스타.

무성영화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그는 당시 유행이 시작된 유성영화의 흐름을 거부하며

“대중은 새로운 것을 원하고, 그들은 틀린 적이 없다.”라는 제작자의 말에,

“대중은 날 보러 오지,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라며 응수한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부와 명예, 인기를 바탕으로 스스로 무성영화를 제작하게 되지만, 같은 날 개봉한 다른 유성영화에 밀려 실패하고, 그는 파산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날 개봉한 유성영화의 여주인공은, 한때 조지를 흠모했고 무명 시절 그의 도움을 받았던, 페피 밀러.

 

자살까지 생각하던 그를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영화의 조류로 이끈 페피와의 탭댄스 장면에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는 2012년 아카데미 최다 부문을 수상했다. 감독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핵심적인 상을 전부 가져간 이 영화가, 프랑스 감독과 배우로 만들어진 영화이며, 무성영화 시대의 이야기를 무성영화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무성영화는 말 그대로 소리가 전혀 없는 영화. 3D는 물론이고 4D로까지 진화하고 있는 요즘 어찌 보면 관객에게 외면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 영화는 100퍼센트 무성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95퍼센트 무성영화? 소리없이 화면으로만 지속되다가, 갑자기 화면에서 소리가 들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때 관객이 느끼는 스릴은 아마 오래도록 각인이 될 것이다.

 

충분히 칭찬받을 영화이며, 좋은 영화라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이 영화에 쏟아진 평들은 조금 지나친 감도 있다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든다. 무성영화의 특성상, 복잡한 구성은 존재하기가 힘들기 떄문에 구성이 단순하고 명료할 수 밖에 없다. 즉, 그 당시 무성영화의 이야기는 대동소이할 것인데, 아마도 여기에서 채플린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성영화라는 한계 안에서도 최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뻗어나갔기에.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1920년대 무성영화를 그대로 답습하였고, 그 이상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즉 충실히 재현은 하였지만, 그게 다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아마도 마지막 탭댄스 장면과, 조지 발렌타인의 꿈 장면이 포함이 될 것인데, 그 장면들은 제한적으로 소리가 들어간 장면이라는 점도 아이러니이다. 이 영화의 95퍼센트가 무성영화 시대를 그대로 가져왔는데, 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장면들이 이 영화의 명장면인 것이다.

 

아마도 아카데미를 열광하게 만든 것은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 루돌프 발렌티노와 같은 시대 속으로 사라진 수많은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들에 대한 향수와 경의의 표시일 것이다. 주인공 이름이 조지 발렌타인인 것은 루돌프 발렌티노를 연상시키며,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유성영화의 시대로 편입하게 됨을 암시하는 부분에서는 채플린이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올렸던 것은 <사랑은 비를 타고>. 1952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그 시기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의 내용과 톤은 물론 완전히 다르다. 남자주인공의 고민은 훨씬 더 짧으며, 순조롭게 새로운 조류에 몸을 담고, 결국 성공을 거둔다. 다만 신인 여배우와의 사랑과, 그녀를 통해 위기를 극복한다는 점이 비슷했다. 내가 가장 연관지을 수 있던 장면은 1929년 10월 25일, 바로 대공황의 시작이었던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다음 날이자 조지 발렌타인이 제작한 영화의 개봉일 아침 신문을 집어 든 조지가 “우린 파산한 것 같군. 영화가 성공한다면 몰라도”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결국 파산한 조지의 모든 물건들이 경매에 붙여지는 장면.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실패를 예감한 진 켈리가 "영화가 개봉되면 나는 파산할테니, 지금 이 집에 있는 이 물건들을 잘 봐두라고. 곧 없어질테니까"라고 말하는 장면과 겹쳐졌다. 물론, 위기를 잘 모면하고 유성영화의 흐름에 순조롭게 합류한 진 켈리는 파산하지 않았지만.

 

흥미로웠던 점이, 이 영화의 감독도 배우도 전부 프랑스인이었다는 것. 이 정도로 화제를 모은 작품에 남녀 배우 둘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는데도 왜 이 작품 이후에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없었을까, 생각했는데 아마도 언어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야말로 배우든, 관객이든, 언어의 장벽이 없는 그런 엉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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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6 (완전판) - 엔드하우스의 비극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원경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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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장 가능성 낮은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네, 헤이스팅스. 틀림없이 탐정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럴 거야. 실제 삶에서는 십중팔구 가장 가능성 높고 가장 확실한 인물이 점죄를 저지르는데."

 

푸아로와 그의 친구 헤이스팅스가 등장하는 작품. 헤이스팅스는 홈즈의 왓슨같은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 책에서 푸아로가 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여주인공이 헤이스팅스에게 당신은 왓슨이겠군요, 하고 말하는 대사도 나온다.

 

잉글랜드 남부 해변 마을인 세인트루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던 두 친구는 우연히 한 젊은 여자의 살인 미수 현장을 목격하면서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알고 보니 젊은 여자는 이미 세 번의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고, 푸아로가 개입한 후에도 여자의 숄을 두르고 있던 친척이 밤에 살해되기도 한다. 이상한 것은 이 젊은 여자는 딱히 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죽는다고 해도 이득을 보는 사람도 없고, 드러난 정황만 봐서는 특별히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은 일도 없는 것 같다.

 

황금가지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차례차례 읽어나가고 있는데, 전집의 넘버링이 발표된 순서가 아니라, 아마도 그녀 작품 중 가장 많이 읽히고 유명한 작품들 순서로 배열된 것 같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애거서 크리스티 말년의 작품들이 앞쪽에 있게 되는데, 간만에 크리스티의 초기 작품을 읽다 보니 주인공도 젊고, 또 서술해 나가는 크리스티의 문장들도 활기차서 힘이 넘쳐서, 인간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다 보니 다소 정적이었던 후기 작품에 비해 속도감이 있어서 읽기에 즐거웠다. 읽으면서 '그래, 이게 크리스티지' '이게 푸와로지'하는 감탄이 실시간으로 들 정도.

 

다만 아쉬운 것은 번역의 문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황금가지 뿐만 아니라 해문출판사에서도 전집이 나온 것 같다. 크리스티의 손자가 있는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과 직접 계약을 맺었다기에 황금가지 출판사의 편으로 보고 있는데, 군데군데 번역이 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전체를 다 본 것이 아니지만 몇몇 부분을 다른 출판사의 다른 번역가와 비교해보면, 황금가지 쪽이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나는 번역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감으로만 알 뿐이고 확신할 수는 없으며, 어쩌면 크리스티의 원문에 가장 충실하게 번역한 판이 또 황금가지 쪽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읽으면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는 요즘이다. 번역가마다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할지, 한국 상황에 맞추어 의역할지, 가치관과 소신이 다르고 독자들마다 또 선호하는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좀 심했던 게, 단순히 번역할 때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가 아니라가 기술적인 문제가 좀 많이 눈에 띄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바로 헤이스팅스가 푸아로에게 말을 할 때, 존대말과 반말이 뒤섞여있는 점이다. 즉, 동일한 인물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통일이 되어 있지 않는다. 영어라면 큰 차이가 없지만, 우리말로 옮길 때는 둘 중 하나를 확실히 택했어야 하지 않을까. 황금가지 출판사의 크리스티 전집에서, 헤이스팅스가 등장하는 다른 책들에서는 푸아로에게 존대를 하고 있다. 아마도 번역자가 권마다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 아닐까 싶다. 분명히 동일 인물인데 이 책에서만 대화의 톤이 달라진다는 것도 우습고, 이 책만 놓고 보더라도 어미가 자꾸 바뀌는 것도 우습다. 별 것 아닐 수 있겠지만 존대를 할 경우에는 푸아로의 영민함이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지며, 둘 사이의 나이 차를 의식하게 되고, 헤이스팅스는 푸아로에 비해 아직 세상을 잘 모르고 덜 여물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서로 말을 놓을 때는 둘의 관계가 좀 더 대등하게 느껴지고, 둘 사이가 비슷한 나이라고 느껴지며 동일한 나이의 헤이스팅스의 순수함이 돋보이며 상대적으로 푸아로가 영악하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이런 전집을 펴낼 때는 부담스럽더라도 출판사 측에서 전집을 한 사람의 번역가에게 맡겼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푸아로가 등장하는 모든 소설은 한 사람에게, 마플 양이 등장하는 소설은 또 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몰아서 맡겼어야 맞다고 생각이 든다. 뭐가 되었든, 이 책만으로도 놓고 봤을 때, 두 사람의 대화가 오락가락 하는 것은 실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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