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3 (완전판) - 비밀 결사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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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한번 그녀의 주인공들은 누가 있는지 죽 살펴볼 때가 있었다. 꽤 많은 탐정 목록에 부부탐정이 있었다. 부부탐정?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것인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토미와 터펜스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두 명의 탐정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며, 마지막에 둘의 사랑은 이루어진다. 아마도 이 소설 다음부터는 부부가 된 두 사람이 등장하는 모양이다. 전문 탐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둘의 모험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마음 졸이게 하며, 오히려 그 부분이 재미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 때문에 이 소설은 더욱 흥미로우며, 아마도 이후의 이 부부탐정들은 좀 더 노련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빠른 시간 내에 이 이후의 부부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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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책을 통해 그러한 기술을 접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 누군가를 직접 미행해 본 적은 없었다. 토미는 실제로 누군가를 미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갑자기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아타는 경우가 있다. 책에서는 간단하게 다른 택시를 잡아타거나 아니면 대기하고 있는 택시에 올라타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두 번째 택시가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극히 희박했다. 그럴 경우 토미는 택시를 쫓아 부지런히 뛰어야만 할 것이다. 런던 거리를 젊은 남자가 질주한다면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 큰길에서라면 그저 버스를 따라 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작은 길에서 뛴다면 참견하길 좋아하는 경찰관이 그를 불러 세워 꼬치꼬치 물어볼 것이다.

 

터펜스는 자신의 방에 숨어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구입한 물건의 포장을 풀었다. 5분 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장용 펜슬로 눈썹을 약간 다르게 그린 데다 풍성한 금발 가발을 쓰자, 휘팅턴과 직접 마주치더라도 전혀 못 알아볼 만큼 달라 보였다. 신발 안에는 키 높이 깔창을 넣을 것이고 모자와 앞치마를 두르면 완벽한 변장이 될 것이다. 터펜스는 병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간호사가 간호사복만 벗어도 환자들이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홀 박사는 멍하니 줄리어스를 바라보았다. 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을 보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아니에요."

줄리어스가 그의 시선에 대해 대답했다.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그 일은 완벽하게 가능합니다. 미국에서는 영화를 찍기 위해 매일매일 그런 일을 하는걸요. 영화에서 기차가 부딪히는 장면을 본 적이 없나요? 기차를 사는 것과 선박을 사는 게 뭐가 다르겠어요? 물건만 구할 수 있다면 바로 시작할 수 있어요!"

홀 박사는 그제야 제 목소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 비용이 문제입니다. 그 비용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돈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줄리어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홀 박사는 마치 도움을 청하듯이 제임스 경을 바라보았다.

제임스 경은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헤릇사이서 씨는 재산이 많소. 그것도 아주 많다오."

홀 박사의 시선은 다시 줄리어스에게로 옮겨졌다. 미묘하지만 아까와는 분명히 다른 시선이었다. 앞에 앉은 사람은 더 이상 나무에서 떨어진 괴팍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홀 박사의 시선에는 진짜 부자에 대한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정말로 대단한 계획입니다. 아주 대단해요."

홀 박사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계속 이어서 말했다.

"영화라....... 물론 가능할 겁니다! 어쩌면 촬영하는 방법에 있어서 영국이 조금은 뒤떨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아주 흥미로운 건 사실입니다. 그 계획을 정말로 실행에 옮길 생각입니까?"

"전 재산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홀 박사는 그의 말을 믿었다. 왜냐하면 앞에 앉은 사람이 바로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영국인이 그런 일을 하겠다고 했다면 그의 정신 상태를 심각하게 의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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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졸업 : 스페셜 에디션 콤보팩 (2disc: BD+DVD) - Blu-ray & DVD Double Edition
마이크 니콜스 감독, 앤 밴크로프트 외 출연 / 컨텐트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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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는 잘 몰랐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결혼식이 끝나기 전, 신부를 낚아채어 밖으로 뛰어가던 순박한 모습의 젊은이, 그리고 그와 함께 손을 잡고 웃으면서 달려나가는 신부의 장면만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영화니까. 특히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지금과는 다르게 오락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니까, 영화, 특히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이국적인 분위기와 세련된 영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으리라.

 

영화의 정확한 내용은 잘 몰랐다. 다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 장면 때문에, 사랑하는 남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결혼을 하지 못했고,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용감한 청년의 행동으로 극적인 해피엔딩에 골인하였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부모의 반대일 것이고, 부모가 반대하는 이유는 양가의 집안 격차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소박한 더스틴 호프만의 외모가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고, 그 외에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내 나이가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고.

 

뚜껑을 열어 본 이 영화의 내용은 어렴풋이 내가 믿고 있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더스틴 호프만은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밖에 없는 청춘이 아니라, 부잣집 도련님에 명문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각종 클럽 활동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보였던, 그야말로 엄친아였던 것. 그럼 사랑하는 여자와 맺어지지 못할 뻔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 여자의 어머니와 불륜 관계였기 때문에.

 

어머니뻘 되는 유부녀, 그것도 자신의 부모와 가까운 사이인 상대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것도 영화에서나 평범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이지 실제로는 참 힘든 상황인데다가, 심지어 그녀의 딸을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 그것도 모자라 결혼식 당일 그녀와 함께 도주하는 결말이라니. 이거 아무리 할리우드라지만 뭐 이런 막장 스토리가 있나 싶다. 법적으로는 딸이더라도 입양을 했거나, 혹은 남편의 전처의 딸이라는 설정 등으로 생물학적으로는 남이라고 설정하는 식으로 피해가지 않고 왜 굳이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만든 것일까? 아마도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 그러니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면, 아무래도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데 역시, 원작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각은 좀 더 나아갈 수 있다. 대체 원작자는 왜 이런 스토리를 만든 것인가?

 

원작은 62년, 영화는 67년. '졸업'의 벤자민이 대학교를 '졸업'한 시기는 60년대. 그 당시 미국은 그야말로 혼란의 세대였다고.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젊은이들이 히피라는 이름으로 현상화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주인공 벤야민도 마찬가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젊음과 부, 집안 등 모든 것이 풍족해보이는 이 청년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확한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방황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장이 아마도 "앞으로 무엇을 할 계획이냐?" 이 말일 것이다. 벤자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한번씩 한다. 부모도, 친척도, 이웃들도. 부모는 그에게 대학원을 가라고 하고, 한 어른은 당시 첨단 산물 중 하나였을 '플라스틱'을 언급한다. 벤자민은 그 어떤 어른들의 말대로 하고 싶지도 않지만, 딱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른다. 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저런 현실적 제약으로 꿈만 꾸어야 하는 것과, 능력과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 둘 중 어떤 쪽이 젊은이에게 더 불행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방향을 잡지 못하는 60년대 미국 청춘의 이야기는 2010년대의 대한민국의 청춘에게도 유효하다는 것. 50년이 지난 이 영화가 당시에도 감독에게 아카데미 상을 안겨줄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까지도 고전이 되어 수많은 관객들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시대를 초월하는 이야기라서가 아닐까? 주제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세련된 부분이 많다. 카메라의 기법이나 화면 구도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로빈슨 부인이 유혹하는 장면에서 두 인물의 위치, 그리고 로빈슨 부인의 특정한 신체 부위에 카메라가 집중하는 것, 수영장에서 유유히 떠 있던 벤자민이 밖으로 훌쩍 뛰어넘는 장면이 바로 침대 위 로빈슨 부인에게 달려드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것, 결혼식 장면에서 하객들의 목소리가 무음으로 처리되고 두 남녀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등 지금 보아도 놀라운 장면들이 많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며 젊은 남자와의 외도로 공허함을 달래는 로빈슨 부인은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기성 세대를 의미하겠지. 그녀의 딸 일레인은 순수하면서도 당돌하고, 진실된 젊은 세대이다. 어머니와의 관계를 절연하고 딸과의 관계를 새롭게 쟁취한 벤자민은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이 상징성 때문에 벤자민이 관계를 가지는 두 명의 여자는 반드시 혈연관계여야 했을 것이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당시의 미국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와 생물학적으로는 연결되었을지언정 문화적으로는 전혀 다른, 혹은 다르다고 믿고 있는 부류였을 테니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환희에 빛나던 두 젊은이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표정이 다소 심란해진다. 아마도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겠지. 이 부분에 대한 해석도 사실 재미있는 것이 많은데,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500일의 썸머>가 떠올랐다. 바로 이 장면을 영화관에서 함께 보면서,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남자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후 여자는 남자에게 이별을 고했다. DVD의 특별 영상에서 이제 중년이 된 더스틴 호프만은 25년 후, 두 사람이 부부가 되고 자녀가 있는 이른바 졸업의 두번째 이야기를 구상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결국 저 둘은 얼마 안 되어 헤어질 것이라고 예감했는데 말이다.

 

이 영화의 그 유명한 마지막 장면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OST. 사이먼 앤 가펑클이 이 영화의 음악을 맡았으며, 영화의 엄청난 흥행과 함께 사이먼 앤 가펑클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의 그룹 SG 워너비의 뜻이 바로 사이먼 앤 가펑클을 본받고 싶다는 의미라고. SG워너비의 초기부터 그들의 음악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이름이 참 특이하다는 생각과 함께, 저들이 그토록 본받고 싶다는 그 그룹은 대체 어떤 그룹일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갑자기 그 기억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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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목격자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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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리스티는 상당수의 책에서 맨 앞장에 '~에게'라는 말을 꼭 붙인다. 때로는 절친한 지기일 때도 있고, 때로는 바로 그 소설에 영감을 준 사람일 때도 있다. 특이한 것이 이 소설의 첫 장에는

가장 충직한 친구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동반자.

다른 어떤 개와도 바꿀 수 없는 나의 피터에게

라는 글이 있다. 애완견에게 이 책을 바치다니? 하고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이 책의 제목을 생각하면 아, 하는 생각이 든다. 벙어리 목격자. 말 못하는 목격자라니.

 

2. 크리스티의 소설의 특징은, 당대 영국의 모습을 정말 자세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추리 소설의 특성상 인물이나 사건 정황에 대해 성실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 되지 못하기 떄문이다. 다른 소설이라면, 문학적인 이유로 의도적인 누락이 가능했을 경우도 여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 섬세한 묘사는 필수적이며, 그것 때문에 소설 속 세계는 마치 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니 내가 소설 속에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3. 특이한 몇몇 풍습이 있다. 이 당시에는 보수를 받고 귀부인의 친구가 되어주는 여자들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하녀나 가정부, 집사나 비서와 비슷해보이지만 조금 다른데, 이것저것 심부름을 하거나 약간의 봉사를 할 수는 있지만 핵심은 말벗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정식으로 존재하는 직업의 형태였다고 하니 신기하다.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 형태는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나일 강의 죽음>이었던 것 같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다소 불분명한 지위까지 포함한다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분명하게 등장했던 부분은 젊고 가진 것 많은 여성이었고, 보수를 받는 그녀의 친구는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히 어느 책에서 등장한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부자 고용주가 말벗에게 결혼을 권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말벗이 누군가에게 청혼을 받았던 것 같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4. 이 소설 뿐 아니라 종종 크리스티 소설에서 등장하는 콩팥요리라는 게 있다. 대체 콩팥요리는 무엇일까? 소? 양? 돼지? 닭? 그 어떤 서술도 없이 달랑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 영국에서는 평상시에 자주 먹었던 것 같은데.

 

5. 여기에서는 푸아로의 왓슨, 헤이스팅스가 등장한다. 둘이 함께 등장하면 늘 재미있는 부분이 쏟아져 나온다. 푸아로의 심중을 알 길이 없는 헤이스팅스와, 그를 때로는 놀리고, 때로는 격려도 하면서 함께 활동을 하는 푸아로. 요즘 말로 하면 둘의 브로맨스는 그야말로 케미가 폭발이다. 예를 들면, 추리극에 푸아로를 데려가는 실수를 저지른 헤이스팅스가 군인을 전쟁물에, 스코틀랜드인을 스코틀랜드 연극에, 탐정을 추리극에, 배우라면 어떤 연극에도 데리고 가지 말라고 서술하는 대목이 그렇다.

 

6. 철저하게 심리에 집중하는 게임. 누군가가 죽어야만 입증이 가능한 이 사건은 마치 '커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강박관념에 싸여 있는 사람의 정신만이 가능한 것이라며 훔치거나 위조와 같은 연약한 상태의 범죄만 저질렀던 전과자를 제외시킨 점이나, 살인을 위한 계획을 수행할 만한 충분한 정신력은 있으나 자신의 욕망대로 맘껏 살아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 살인을 저지를 리 없다며 푸아로는 제외시킨다.

 

7. 그 외에도 크리스티가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섬세한 장치들이 눈에 띈다. 의상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옷을 좋아하는 여성, 우아하게 차려 입은 여성을 보았을 때 나중에 그의 패션을 따라하기 위해 열심히 기억해 두려고 애쓰다 나중에는 어설픈 방식으로 모방하여 우스꽝스러운 차림이 되는 경우, 한때는 구하기 힘들었던 장신구로 소수의 패션 리더들만이 착용하다가 바로 그 다음해에 쏟아져 나와 지금은 흔해진 물건들 등 읽다 보면 아, 이런 섬세한 부분이 크리스티의 장점이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8.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푸아로는 한 장소에 사건의 모든 관계자들을 모아 놓고 늘 그랬던 것처럼 헛기침을 하고 난 뒤 말을 시작한다. 헤이스팅스는 푸아로와 가까이 지내면서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품위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이 중 한 명의 가면을 벗겨 살인자임을 푸아로가 밝혀내는 과정. 독자들도 마찬가지로 이 마지막 장에 도달하게 되면 드디어 사건이 다 끝났구나, 하고 안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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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크래커 2015-05-02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익숙한 것을 두고 새로운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고할미 2015-05-03 06:41   좋아요 0 | URL
네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익숙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면을 자꾸자꾸 시도한 데에서 매력이 있는 거겠죠.

나이튼 2015-09-28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푸른 열차의 죽음에서 그런 직업을 가진 매력적인 여인이 중요한 역할로 나옵니다. 캐서린 그레이.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 신분을 뛰어넘은 조선 최대의 스캔들
이수광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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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을 읽었다. 나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신기했다. 몇 년 전에 방송되었던 <다모>라는 드라마에서 비록 가상이지만 범죄를 수사하는 여자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고, 현재 시즌 10까지 나온 미드 <본즈>에 당시 꽤 빠져 있었기 때문에 더 그 책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는지도. 한때 법의학이라는 학문에 아주 살짝 열광했던 시절이 있었고 마침 그 책을 접한 시기가 그 때와 맞물렸기 때문에 더 설렜었는지도.

 

이 책은 동일한 작가가 쓰고 동일한 출판사에서 나오는 이른바 기획상품같은 것으로, 내가 본 책을 기준으로 하면 11쇄인 것을 보니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것 같기는 한데 나로서는 좀 실망스러웠다.

 

봉건시대를 뛰어넘은 남녀상열지사의 재발견

1장 _ 조선을 뒤흔든 왕조 스캔들
사랑에 미쳐 왕좌를 버리다 | 양녕대군 폐세자 사건
후궁의 죽음을 부른 한 통의 연애편지 | 왕의 여자가 사랑에 빠진 죄
질투의 화신, 현숙공주 독살 미수 사건 | 베일에 싸인 공주의 사생활
세종의 며느리 세자빈과 궁녀, 그들만의 사랑 | 궁궐 여성의 동성애

2장 _ 조선을 뒤흔든 남녀상열지사
목숨을 걸고 천민을 사랑한 처녀 | 신분을 초월한 용기 있는 사랑
기생과 사대부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 |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연애
자유연애를 꿈꾼 규방 부인 | 남편감을 직접 고른 여인
일부종사를 거부한 여성들, 감동과 어을우동 | 윤리보다 자유를 택한 두 팜므파탈

3장 _ 조선을 뒤흔든 연애기담
위험한 사랑이냐, 부도덕한 간통이냐 | 조선시대 근친상간이 일어난 이유
아버지의 연인을 빼앗은 사대부의 최후 | 어느 사대부의 일그러진 욕망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유린한 별종 | 양성을 넘나든 사방지 사건
일곱 살 아이가 아기를 낳은 사연 | 영조시대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
여인의 정조를 놓고 싸운 선비들 | 연애 스캔들을 둘러싼 조식과 이황의 대립

4장 _ 조선을 뒤흔든 불멸의 로맨스
삼의당 김씨 부부의 영원한 사랑 | 사랑의 시를 남긴 부부
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 심노숭 | 떠난 아내를 미치도록 그리워한 남자
첫사랑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다 | 기생이 열녀문을 하사받은 사연

 

일단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은데, 이 중 몇 가지 이야기는 다른 역사서를 통해서 접한 적이 있었고, 그 뒷이야기는 오히려 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었기에 이 책의 이야기는 좀 밋밋하기도. 하지만 역사를 깊이 알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벼운 읽을 거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꽤 괜찮은 책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여 책을 읽기보다는 잠깐의 휴식이 필요하지만, 전혀 머리를 쓰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더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죄책감이 들었을텐데, 이 책은 효과적인 처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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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1 (완전판) - 죽음과의 약속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연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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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2부에서야 살인사건이 일어나며, 1부에서는 보인턴 가족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초반에 사건이 벌어지고, 푸아로의 활약을 주로 서술하는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이 소설은 가족과 그 구성원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여기서 푸아로는 사건을 풀어나가는 주체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과,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비중이 가고 있다. 즉, 어쩌면 살인 사건 자체에 대한 해결이나 범인이 누구인지를 파헤치는 것 보다는, 어쩌면 살인 사건 자체는 그저 이야기에 집중시키기 위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고, 실제로 크리스티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마치 다른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방식은 사실 최근의 작가들이 많이 쓰고 있는 방식인데, 약간의 미스터리적 요소, 혹은 반전이 있는 결말 등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크리스티의 소설만으로 놓고 보자면, 나는 여러가지 면에서 <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가 떠올랐다.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가진 가장, 그가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가족 구성원들, 변화가 없어 보이는 견고함에 외부의 요소로 생기는 균열, 그리고 젊은이들의 로맨스. <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는 총 3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여기에서도 살인 사건은 소설이 꽤 진행되고 나서야 발생하고, 그 전까지 가족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물론, 재혼한 고고학자와의 여행 때문에 이야기가 서술되는 무대가 지금의 중동지역이라는 것도.

 

여러 사람의 심리에 집중한다는 점도 당연히 공통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크리스티의 거의 대부분의 소설의 특징이므로 패스.

 

소설끼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크리스티답게, 이 소설에서도 연결고리들이 등장한다. 푸아로가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계기는 레이스 대령이 카버리 대령에게 써 준 소개장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오랜 친구이자 정보부 동료로 설정되어 있으며, 레이스 대령은 <갈색 양복의 사나이>에 나왔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일 강의 죽음>에도 나왔다고. 그 외에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ABC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된다. 시간 순으로 그 이후에 이 작품이 쓰여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이 작품들이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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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알잖아? 그 여자는 죽어야 해."

예루살렘에 도착한 첫 날 밤 탐정 에르퀼 푸아로는 우연히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을 엿듣게 된 것이다.

"내가 가는 곳마다 어김없이 범죄의 냄새가 풍기는군."

푸아로는 입속말을 중얼거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소설가 앤터니 트롤럽의 일화를 떠올렸다. 트롤럽은 대서양을 건너던 도중 승객 두 사람이 그의 시리즈 소설 중 최근작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 하지만 그 진절머리 나는 노파는 좀 죽여 주면 좋겠어."

한 남자가 선언하듯 말했다.

소설가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신사분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당장 가서 그 노파를 죽여 버리겠습니다."

 

새라는 겨우 얼마 전에야 힘든 감정적 위기를 헤체고 나올  수 있었다. 한 달 전 4년 선배인 젊은 의사와 파혼했던 것이다. 서로 많이 좋아했지만 기질적으로 너무 많이 비슷했다. 당연히 의견충돌과 말다툼이 잦았다. 흔들림 없고 독단적인 그의 주장을 잠자코 받아주기에는 새라 자신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 새라 자시의 성격도 한때는 힘을 숭상했다. 다스림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다스릴 수 있는 남자가 나타나자 그 사실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던 것이다! 파혼은 상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새라는 현명하게도 단순히 서로 이끌린다는 사실이 평생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앗다. 그래서 단지 진지하게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기억들을 털어 버리려고 일부러 신나는 휴가를 계획했던 것이다.

 

그때 노부인의 시선이 느닷없이 그를 향했다. 순간 제라르는 숨을 들이켰다. 이글거리는 작고 검은 눈이 그를 쏘아 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서 뭔가 힘 같은 것이, 그것도 아주 강하고 고약한 적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제라르는 그 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버릇없는 응석받이 폭군들이 부리는 터무니없고 시시한 변덕이 아니었다. 노부인의 힘은 강력햇다. 적의로 번득이는 그 눈빛은 코브라가 뿜어내는 눈빛과 몹시 닮아 있었다. 늙고 쇠약하고 질병의 먹이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보인턴 노부인은 결코 무력하지 않았다. 노부인의 힘의 의미를 아는 여자, 평생 힘을 휘두르며 살았고 한 번도 자신의 힘을 의심해 본 적 없는 여자였다. 제라르는 언젠가 호랑이들을 부리며 굉장히 위험하고 화려한 쇼를 펼치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위대한 야수들은 느릿느릿 자기 자리로 기어가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묘기를 부렸다. 호랑이들의 눈빛과 낮은 울부짖음은 분명 광포하고 비통한 증오를 표출하고 있었지만 고분고분 여자의 말에 복종하고 있엇다. 그 여자는 젊고 오만했으며 어두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엇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노부인과 똑같았다.

'동퇴즈(조련사).'

 

"그래서 마음 편히 전 재산을 그 부인에게 물려 주고 자식을 맡겨 버린 거군요. 우리 프랑스에서는 그런 일이 법적으로 불가능하지요."

"미국인들은 절대적인 자유를 믿습니다."

코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라르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프의 말이 특별히 인상적이랄 건 없었다.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서도 그와 같은 말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유가 어떤 특정 국민의 특권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현명한 제라르는 어떤 종족도, 어떤 국가도, 어떤 개인도 자유롭다고 일컬어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정도는 다르지만 어디나 구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사실이 횡포의 원인이었다는 건가요? 예전 직업에서 비롯한 습관이라는 거군요."

제라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각도로 보는 건 잘못이에요. 마음 깊이 자리 잡은 강박증의 관점에서 봐야 해요. 간수였기 때문에 횡포 부리는 걸 좋아하게 된 게 아니에요. 그보다는 횡포 부리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간수가 되었다고 하는 게 옳겠군요. 내 말은 노부인이 그 직업을 택하게 된 건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은밀한 욕망 때문이라는 거예요."

제라르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인간의 잠재의식에는 그처럼 기묘한 것들이 숨어 있어요. 권력에 대한 욕망, 잔인함에 대한 욕망, 찢고 부스고 싶은 욕망.......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유산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전부 그대로예요. 잔인성도 야만성도 욕망도...... 거부하고 의식적으로 피하려 한들 그런 것들의 위력은 때로 너무나 강하지요."

새라가 몸을 떨었다.

"저도 알아요."

제라르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늘날에도 그런 모습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어요. 정치 강령에도, 국가의 운영에도 보입니다. 이건 인도주의, 연민, 동포애적 선의의 반작용이에요. 정치 강령은 이따금 지혜로운 체제, 유익한 정권 등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 역시 잔인성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권력에 의해 강제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폭력의 사도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이유로 케케묵은 야만성과 잔인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아, 정말 어려운 문제이지요. 인간이란 조금만 건드려도 균형감을 잃어 버리는 동물이니까요. 인간은 원초적인 욕구를 갖고 있어요. 바로 생존의 욕구지요. 너무 앞서 가는 것은 뒤처지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인 일입니다. 생존해야 하니까요! 어쩌면 그 때문에 케케묵은 야만성을 유지하려는 거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숭배하는 것만은 절대 안 됩니다!"

 

"그렇지요. 코프 씨는 선량하고 정직하고 다정다감하고 평범한, 미국인다운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이에요. 악이 아니라 선을 믿지요. 보인턴 가족의 분위기가 뭔가 아주 잘못됐다는 걸 알지만 노부인의 행동을 악한 행동이라기보다는 삐뚤어진 헌신이라고 생각하더군요."

"그걸 보면서 노부인은 즐거워하는 거고요."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새라가 이내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걸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텐데요."

제라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들은 그럴 수가 없어요. 혹시 수탉을 가지고 실험 하는 걸 본 적 있나요? 오래된 실험인데 바닥에 분필로 선을 그은 뒤 수탉의 부리를 거기에 대어 주고 못 움직이게 하면 수탉은 자기가 거기에 묶였다고 믿어 버려요. 그래서 머리를 쳐들지도 못하지요. 이 가엾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노부인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지배가 정신적인 것이었다는 점도요. 노부인은 그들에게 최면을 걸어 자기를 거역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무시하겠지만 새라라 씨와 나는 잘 알고 있잖아요. 노부인은 자기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믿게 만들었어요. 그들은 감옥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기 때문에 문이 열려 있어도 그걸 보지 못하게 된 겁니다. 적어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은 더 이상 자유를 바라지도 않는 것 같더군요. 게다가 그들은 전부 자유를 두려워하게 되었고요."

 

"나는 적어도 크리스천 신앙의 핵심 교의 중 하나는 믿고 있어요. '작은 일에도 만족할 줄 알아리.'라는 것이지요. 나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야망이, 그리고 성공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해악을 알고 있어요. 그런 욕망의 실현은 오만과 폭력, 그리고 결국 채워지지 않는 탐욕으로 이어질 뿐이에요. 그 욕망이 거부당하게 되면...... 아! 그렇게 되면 정신병원은 증가할 것이고 광인들은 자기 이야기만 늘어 놓겠지요! 정신병원에는 평범하고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을 참아 낼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그곳에서 현실 도피의 수단을 찾아 내어 현실과는 평생 담을 쌓아 버릴 거예요."

새라가 불쑥 말했다.

"보인턴 노부인이 정신병원에 있지 않은 것이 유감이네요."

제라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노부인의 자리는 실패자들 틈이 아니에요.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이지요. 성공했으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룬 겁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 시도해야 한다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에요. 개입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막대한 해를 끼칠 수도 있어요. 그 문제에 대해 명확한 판정을 내리는 건 불가능해요. 어떤 사람들은 개입에 있어서 천재성을 보입니다. 아주 훌륭히 수행해 내지요! 그러나 서투르게 개입해서 내버려 둔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는 사람도 있어요! 또 나이라는 문제도 고려해야 해요.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과 확신에 대해 용기가 있어요. 실제보다 이론에 더 가치를 둡니다. 하지만 사실 이론과 실체는 모순적일 수도 있잖아요? 그들은 그걸 아직 경험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일이 정당하다는 신념만 있다면 그러한 모순이 있음에도 굉장히 가치 있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지요. 부수적으로 상당한 정도의 해로움을 끼치는 경우도 많지만! 반면 중년에 이르면 경험이 쌓이기 때문에 해로움도 이로움만큼 크다는 사실을,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현명하게도 개입하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공평해요. 진지한 젊은이는 해로움과 이로움을 모두 끼칠 수 있는 반면, 신중한 중년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니까요."

 

"코프 씨, 나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상심리들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에요. 인생의 아름다운 면만 보는 것은 좋지 않아요. 일상의 체면치레와 관례 이면에는 이상심리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예를 들어 잔인함 그 자체를 즐기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더 깊이 잠재된 무언가가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다는 깊고도 측은한 욕망이지요. 그것이 방해를 받으면, 즉 자신의 불쾌한 인간성으로도 필요로 하는 반응을 얻지 못하면 다른 방법으로 돌아서게 되는데, 그 자신이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의미 있게 여겨져야 하기 때문에 갖가지 이상하고도 도착적인 방법들에 귀착하게 되는 거죠. 다른 습성과 마찬가지로 잔인성도 길러질 수 있고 제어할 수 있는......"

 

"푸아로 씨, 제가 듣기론 오리엔트 특급열차 사건에서 공식 평결을 받아들이셨다고 들었는데요?"

푸아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까?"

"그게 사실인가요?"

푸아로가 천천히 말했다.

"그 경우는 달라요."

"아니요. 전혀 다르지 않아요! 그때 살해를 당한 사람은 악마였어요."

 

"그렇다면 코프 씨는 감상주의자로군요."

푸아로가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사람이 가진 이상은 사실 천성적으로 깊이 뿌리박힌 게으름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인간성을 최고로 보고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기는 것은 분명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결과적으로 제퍼슨 코프 씨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에 대해 최소한의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거예요."

"떄로는 그런 태도가 위험할 수도 있겠네요."

푸아로가 말했다.

제라르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보인턴 일가의 상황'이라고 일컫는 그 상황을 그는 잘못된 헌신의 경우라고 계속해서 말하더군요. 잠재된 증오, 반역, 굴종과 비참함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아주 미미했어요."

"어리석군요."

푸아로가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가족을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도록 만들어 놓고 왜 이런 해외여행을 감행했느냐 하는 겁니다. 외부와 접촉할 위험과 자신의 권위가 약해질 위험이 분명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제라르가 이렇게 말하자 제라르가 흥분한 표정으로 몸을 숙였다.

"하지만 몽 비외(오랜 친구), 그건 이런 겁니다! 노부인들은 지구상 어디나 똑같아요. 싫증이 나는 겁니다! 그들의 특기가 인내라 해도 인내에 너무 익숙해지면 싫증이 나는 법입니다. 그러면 분명 새로운 인내가 필요하죠. 인간을 지배하고 고문하는 것이 취미인 노부인도 좀 어처구니없게 들릴 수 있지만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노부인을 동퇴즈(조련사)로 생각해 본다면 호랑이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거예요. 자식들이 사춘기를 지날 때까지는 상당한 희열과 흥분을 느꼈을 겁니다. 레녹스와 네이딘의 결혼은 흥미진진한 모험이었겠지요. 하지만 갑자기 그 모든 게 시들해진 겁니다. 레녹스는 지나치게 울적함에 빠져 버린 나머지 상처를 주는 것도, 고통을 가하는 것도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졌어요. 레이먼드와 캐럴은 반항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지네브라는 아! 포브르(불싸한) 지네브라, 그 아가씨는 노부인의 눈으로 보자면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없는 사냥감이에요. 그 아가씨는 스스로 탈출구를 찾았으니까요! 현실에서 공상의 세계로 탈출한 거예요. 어머니가 못되게 굴면 굴수록 핍박받는 여주인공이 되는 은밀한 전율에 빠져든 겁니다! 보인턴 노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부 지긋지긋한 거예요.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처럼 새롭게 정복할 신세계가 필요했던 거요 해외 여행을 계획한 겁니다. 길들여 놓은 야수들이 반항할 위험은 있지만 새로운 고통을 줄 기회도 생기거든요.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새로운 긴장과 전율이 필요한 거였습니다."

 

"연기라고요?"

"예,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있어요. 지네브라는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또 반드시 성공해야 해요! 근본적으로 지네브라는 어머니와 성격이 많이 닮았거든요."

"아니에요!"

새라가 발끈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일부 본성은 똑같아요. 두 사람 다 중심이 되고 싶어하는 강한 욕망을 타고 났어요. 두 사람 다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 가엾은 아가씨는 번번이 위협과 억눌림을 당했지요. 강렬한 야망과 인생에 대한 사랑, 발랄하고 로맨틱한 기질을 표출할 출구가 어디에도 없었던 거예요."

 

"끔찍했어요.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아래로 내려와 천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군가를 불렀어야 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잡지책만 뒤적이며 기다리다가......."

그가 말을 멈추었다.

"믿지 못하겠지요? 그럴 거예요.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았냐고요? 네이딘에게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나도 모르겠어요."

제라르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건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보인턴 씨. 당신은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한 상태였어요. 순식간에 몰아친 두 번의 큰 충격 때문에 그런 심리 상태가 된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바이젠홀테르 반응이라고 하는데, 창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새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겠군요. 창문에 머리를 부딪친 새는 회복이 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다른 행동을 삼가게 됩니다. 신경중추에 적응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지요. 영어로는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이런 겁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결단을 내려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심리적 마비 상태였으니까요."

 

"보인턴 노부인의 성격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노부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더군요. 늙은 포악한 조련사다. 심리적 사디스트다. 사악함의 화신이다. 미쳤다........ 이것 중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내 생각에는 새라 킹이 예루살렘에서 순간적으로 떠올렸다는 '완전한 구제불능'이라는 말이 제일 근접할 것 같군요. 구제불능일 뿐 아니라 무익한 존재였지요!

자, 그렇다면 노부인의 심리 상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봅시다. 노부인은 거대한 야망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힘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승화시키지도, 그것을 다스릴 방법도 찾지 못했어요. 물론 그 여자는 그 욕망을 즐기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잘 들으세요, 결국에는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유력한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광범위한 영역에서는 두려움과 미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어요! 고작해야 고립된 한 가족의 보잘 것 없는 폭군에 불과했지요! 제라르 박사의 말로는 보인턴 노부인도 다른 노부인들처럼 그런 자신의 취미에 싫증을 느껴서 활동 범위를 넓히고 지배력을 위험에 빠뜨림으로써 희열을 느끼려했다는군요! 해외에 나가자 노부인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 처음올 깨닫게 된 겁니다!"

 

"5분 뒤 웨스트홀름 부인이 미스 피어스를 다시 찾아가 방금 본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뒤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각인시킵니다. 그런 다음 산책을 나가면서 암벽선반 밑에 잠시 멈추고 서서는 노부인을 올려다보며 소시를 지릅니다. 노부인한테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을 거예요.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웨스트홀름 부인은 미스 피어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콧방귀를 끼다니 아주 무례하군요." 미스 피어스는 노부인이 실제로 그랬다고 여깁니다. 노부인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것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지요. 필요하다면 실제로 들엇다고 진지하게 맹세라도 할 거예요. 웨스트홀름 부인은 회의를 할 때 미스 피어스와 같은 유형의 여자들으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자신의 명성과 지배근성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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