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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많이 떠올렸던 작품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이다. 나이를 초월한 우정, 감수성 예민한 소년이 인생의 쓸쓸함과 이별의 고통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 우정을 나눈 대상의 죽음 등이 놀랄만큼 닮아 있기 떄문이다. 소설 속 소년들이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것도,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읽었던 책의 표지가 노란색이었다는 것과,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이것을 신기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책을 읽던 당시 내가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면, 책을 읽으면서 아, 슬프다, 마음이 아프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활자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 흘렀고 그러고나서야 지금 내가 느낀 감정이 슬픔이로구나, 하고 꺠달았다는 이야기이다. 즉, 어떤 대상을 대하든 그 대상에 대한 감정을 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먼저 몸이 반응했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경험이 아마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에서는 처음이었던 데다가, 그 이후에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기 떄문이다.
<자기 앞의 생>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고, 마음이 무거워지긴 했지만, 눈물까지는 나지 않았다. 억지로 내 감정을 명료하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고, 글자를 읽어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오르는 구절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울음이 나오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좀 아쉽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감정의 진폭을 겪지 않았을까, 하고.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 놀랐던 그 당시의 내가 아직도 생생한데, 이유는 내가 읽었던 그 문장들에 직접적으로 슬프다거나, 아프다거나 하는 감정의 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픔을 느꼈다는 그 사실 자체에 내 스스로가 놀랐던 것 같다. <자기 앞의 생>도 마찬가지. 어린 화자의 눈으로 세상을 묘사하기에 그의 눈으로 본 세상은 더없이 슬프다. 왜냐하면 곧이곧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시각이기에 더 큰 비극이 느껴지니까. 마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화자 옥희가 불완전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세상과 실제 세상과의 간극 때문에 남녀의 사랑이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 소설은 사실 소설 자체만큼이나 그 뒷이야기 떄문에 유명한 책인데, 바로 이 책의 지은이인 에밀 아자르는 프랑스 유명 작가 로맹 가리의 필명이며, 죽기 직전 로맹 가리가 직접 밝힐 때까지 프랑스 문단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일생에 단 한 번 받을 수 있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쿠르 상을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라는 두 이름으로 수상하였기 때문에 유일무이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수상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프랑스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한 에밀 아자르를 찬양하는 평론가가 로맹 가리를 혹평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문학에 몸을 담고 있던 사람들이 실제로 보이는 것만큼 대단한 문학적 식견이 없거나, 로맹 가리가 대단한 천재였거나, 둘 중 하나였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 인물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작가라고 한다면, 로맹 가리는 자신의 소설 뿐 아니라, 마치 소설 속 인물처럼 또 다른 자신을 창조하여 그 인물이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살아 숨쉬게 했다는 점에서 최고의 예술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너무나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이 소설에서도 아쉬운 점은 있다. 중간 중간 설정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 할까? 유태인으로서 홀로코스트까지 겪은 로자 아주머니, 아랍계인 주인공 모모,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어린 유태인 아이 모세, 그 둘의 정체성을 바꾸어 말하는 로자 아주머니, 모하메드와 모세라는, 각각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선지자의 이름 등. 특히 모모의 아버지와 로자 아주머니가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작가의 주제 의식이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서 긴장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 전체는 정말 아름다우며, 주인공은 사랑스럽다. 특히 영화 더빙 장면에서 시간을 돌리고 싶어하는 모모의 그 장면은, 가슴이 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