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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슬픔과 그리움보다 즐거웠던 일들이 무수히 되살아나고, 아무리 복잡한 길거리에서도 그날의 날씨에 상관없이 신선한 공기가 싸하게 가슴으로 흘러 들어온다. 마치 기적처럼.
그리고 가슴 언저리가 노르스름하고 따스한 빛으로 채워지고, 행복이 찡하게 온몸으로 번진다.
그립고 애틋한 마음과,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신비로운 감동이 내 온몸을 비추고, 그 빛은 내 안에 쌓여 있던 쓰잘 데 없는 것들을 말끔하게 씻어내 준다.
끝나 버린 장소 특유의 쓸쓸하고 호젓한 느낌이 나를 감쌌다.
겨울 하늘과 삼 층짜리 낡은 건물과, 울창한 숲 같은 정원. 메마른 식물의 달큰한 냄새와 톡 쏘는 고양이 오줌 냄새가 섞인 겨울 공기가 이곳에서만 결계 같은 역할을 하면서 싸늘하게 빛나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저 너머의 먼 세계에,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집들이 있고, 대형 슈퍼마켓이 있고, 나날의 잡다함이 있고, 시끌시끌함이 있는 세계가.
그리움이란, 모든 것이 달라진 후에야 비로소 싹트는 것,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머릿속에는 손으로 만져질 듯 또렷하게 있는데, 이미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눈물이 고일 때까지 마음껏 떠올릴 수 있다. 공상에 젖어 있다가 애처롭게 깨어나도, 혼자가 아닐 수 있다. 다른 생각으로 옮겨 갈 때까지, 차분하게 아픔을 견딜 수 있다.
이 옷에 휘감긴 투실투실한 몸속 어딘가에 아직도 그 시절 그대로인 아이가 남아 있을 텐데, 두 번 다시 만날 수는 없을 테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나 역시 많이 변해 있으리라.
정원에서 말없이 풀숲을 헤치는 동안만, 시간이 사랑스럽게 돌아와 있었다.
한없이 먼 이국을 여행하는 것이나 자기만의 유적을 만드는 것이나 그 시도의 근원은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에서 어떤 시대로 여행을 하고, 끝내는 사라진다. 영원 속에 소박한 저항을 새기는 것, 그뿐이다.
동생에게 받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없던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이 세상에 찾아와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사람이 왜 유적을 만드는 지 알아? 좋아하는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오늘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해서일 거야. 그건 인간이 영원토록 지니는 허망한 바람인 거야, 그리고 위에서 보면 목걸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신마저 부러워 매혹당하는 아름다운 빛의 알갱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