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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가 잃어버린 모자 ㅣ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2
토베 얀손 지음, 이유진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3월
평점 :
특별하지 않은 계기로 무민에게 꽂혀서 무민 관련 책들을 천천히 읽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무민 코믹 스트립보다는 확실히 이 소설 시리즈가 훨씬 좋다. 날카로운 풍자가 불편하더라도 여전히 무민 세계에 발을 디디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시리즈는 훨씬 다정하게 다가온다. 읽는 내내 여러 번, 곰돌이 푸 시리즈가 연상되기도 했다.
숲 꼭대기까지 천천히 떠오른 태양이 무민과 스너프킨의 얼굴에 빛을 곧게 내리비추었다.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 위에서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면서 태양을 향해 실눈을 뜬 둘은 무심한 듯 다정한 기분을 느꼈다.
바로 이 강에서 무민과 스너프킨은 배를 타고 세상 속 무수한 모험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무민 골짜기에 있는 집으로 데려왔다. 무민마마와 무민파파는 무민과 스너프킨의 새로운 친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이하며 새 침대를 들이고 더 큰 식탁을 만들기만 했다. 그래서 무민 가족의 집은 일을 잔뜩 벌여놓기만 하고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여간해서는 걱정하지 않는 손님들로 바글바글 붐볐다. 가끔 충격적이고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는 했지만, 그래서 아무도 따분할 틈이 없었다. (크게 바로 큰 장점이었다.)
"하! 부질없어."
또 잠시 뒤 헤물렌이 말했다.
"내 우표로 뭘 하겠어! 화장실 휴지로나 쓰면 모를까!"
스노크메이든이 충격을 받아 소리쳤다.
"하지만 헤물렌!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모은 우표들은 세상에서 가장 멋져!"
헤물렌이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바로 그게 문제야! 내 수집이 완성돼 버렸어! 내가 모으지 못한 우표는, 인쇄가 잘못된 희귀본은 없어. 하나도 빠짐없다고! 이제 난 뭘 하면 좋지?"
무민이 천천히 말했다.
"이제 좀 알 것 같아. 너는 이제 수집가가 아니야. 그냥 소장가일 뿐이지. 그러면 재미있을 것도 없고."
헤물렌이 마음 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응. 전혀."
"헤물렌, 나한테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뭔가 전혀 다른 걸, 그러니까 색다른 걸 수집해 보면 어떨까?"
헤물렌이 수긍했다.
"그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지."
그렇지만 헤물렌은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가슴 깊이 낙담했다가 단박에 즐거워질 수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무민이 의견을 내놓았다.
"나비 같은 건 어때?"
헤물렌은 다시 우울해져서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 친사촌이 나비를 수집해. 그리고 난 그 사촌이 견딜 수 없이 싫어."
"아무도 날 믿어 주지 않다니! 엄마, 저 좀 자세히 보세요. 그럼 틀림없이 아들을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무민마마가 유심히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무민의 왕방울만한 눈을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본 무민마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무민이구나."
그 순간 무민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눈과 귀와 꼬리가 홀쭉해졌고, 코와 배가 큼지막해졌다. 그리고 무민은 모두의 눈앞에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온전히 서 있었다.
무민 마마가 말했다.
"엄마 품으로 오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엄마는 언제나 우리 꼬맹이를 알아볼 수 있단다."
"다행이야. 문이 열려 있어. 덜렁대는 게 좋을 떄도 있다니까!"
8월 말이었다. 밤이면 부엉이가 울었고, 새까만 박쥐 떼가 날아들어 정원 위를 소리 없이 맴돌았다. 숲은 섬광으로 가득했고, 바다는 들썩였다. 어디에나 기대감과 서글픔이 감돌았고, 커다란 달은 따사로운 빛깔을 내뿜었다. 무민은 늘 여름의 마지막 한 주가 가장 좋았는데, 왜 좋은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바람소리도 파도소리도 달라졌고, 세상 모든 것이 변화의 기미를 보였고, 나무들은 가만히 서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