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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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두두둥, 그날 저녁에 본 옛날 프로그램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방영하던 편은 <인형의 집>이었다. 누군가를 질투하고 부러워해서 자신의 남편과 집을 똑같이 꾸민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도서관에서 빌려온 <인형의 집>을 꺼냈다. 책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었기에 비슷한 내용이려나ㅡ싶은 생각뿐이었다.


14. 낭비꾼 새는 귀엽지. 하지만 돈이 아주 많이 들어. 이런 새를 키우는 게 남자에게 얼마나 돈이 드는 일인지.

노라, 그녀는 헬메르 토르발의 노래하는 종달새이자 다람쥐이자 낭비꾼이다. (과자 봉투를 숨기며) 빨리 빨리! 과자까지 금지시키는 모습을 포함해 여러 장면들을 보면서 자신에게 그녀를 예속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녀는, 소유물ㅡ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때의 허탈함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노라는 몇 년 전에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할 때 필요한 돈을 크로그스타드에게 빌려야만 했다. 그것을 빌리려면 보증을 서야 했는데, 남편을 살려야했기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해서라도 그 돈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서명도, 날짜도 위조했다는 것이 탄로났다. 이후에(현재) 크로그스타드가 있는 은행의 총재로 취임하게 된 남편은 그를 해임하려고 하고 그는 노라에게 해임을 막아달라 부탁을 하며, 막지 않으면 그 사건을 폭로하겠다고 한다.

14. 당신은 정말 딱한 아이야. 당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당신은 돈을 손에 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 하지만 돈이 생기면 그 돈은 바로 당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그 돈으로 뭘 했는지도 당신은 전혀 모르고. 그래, 당신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피가 그러니까. 그래, 그래, 노라, 이건 유전이야.

책을 깊게 읽을수록 헬메르가 노라를 바라보는 관점 중 하나인 이 부분에 대해,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사실적이었으니까. 크로그스타드에게 빌린 돈에 대해서도 그동안 얼마나 갚아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돈에 대해서도 갚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날까 하는 생각에 더 급급한 모습을 보면서 한때는 가까웠던, 하지만 영영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라가 크로그스타드에게 돈을 빌린 걸 알고 헬메르는 길길이 화를 내지만, 곧이어 차용증을 돌려받게 되자 헬메르는 금세 노라를 용서하게 된다. 그 부분에 대해 노라는 회의를 느끼게 된다. 나는 그저 인형 아내,였구나 하고. 그녀는 자신에 대한 책임인 거룩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집을 나간다고 선언하게 된다. 돈을 빌려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서 노라는 말하지 않고 헬메르는 말하지 않는다. 편지나 차용증에 그 이유가 적혀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의 도리 그대로 나를 사랑했어. 통찰력이 부족해서 수단에 대해 옳은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이지. 라고 말하는 헬메르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편지에 쓰여있구나, 하고 짐작할 뿐)


책의 뒷부분에는, ‘근대극의 선구자 헨리크 입센이 ‘노라이즘’을 탄생시킨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이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과연 나는 이것이 헬메르 혹은 노라 어떤 한 사람만의 잘못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차용증서를 받았다고 하여 단박에 용서를 할 수 있는 헬메르도 우스운데, 그런 취급을 당했다고 하여 ‘너 때문에 빌린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는 것인 양 타인의 돈을 빌린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그 돈을 갚아야 한다는 책무도 느끼지 못하면서 121. 당신이 아주 확실하게 모든 책임을 지고 “모두 내 잘못입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던 노라의 말은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정말 배우자를 위해 한 행동이라는 것도, 남편의 명예가 실추될까 봐 혹은 남편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남편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모두 이해는 하지만 그것까지 감싸달라는 건 억지가 아닌가. 한 번의 사과라든지 변명은 했는가 말이다. 남편의 명예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생각이었던 노라라고 쓰여있는데 단추가 구멍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은 갑갑함을 느끼며 그녀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 책에서 ‘굳이’ 페미니즘을 찾아야 한다면, 노라보다 크리스티네 쪽을 겨냥한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지만 그와 사별하고 노라를 찾아와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23.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허전해. 나는 늘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제 그 누군가가 없잖아. 그리고 크로그스타드에게 먼저 청혼하기도 하는 등,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크리스티네였다. 노라이즘에 대해서 나의 경제관념이 바뀌지 않는 이상 수긍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라가 그곳을 떠나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것에 대해서는 행운을 빈다!




118. 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118. 나의 거룩한 의무가 뭔가요?

- 그걸 내가 말해야 아나?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아닌가!

내게는 다른, 그만큼이나 거룩한 의무도 있어요.

-아니, 없어. 대체 무슨 의무지?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


121.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명예를 희생하는 사람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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