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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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요일이다. 아침에 마음을 붙잡고 싶어 책을 들었다. 또 이 이야기를 읽었다.



알고 지내던, 또 친하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명백하게 누구의 잘못이라 말할 수 없는 관계들이 깨어지는 것을 마냥 바라보며 붙잡을 용기도, 노력도 서로가 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우리 모두는, 언니와 나를 닮았다. 이전에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에 담겨있는 <한지와 영주>의 한지와 영주를 매우 깊이 좋아했다. 아주 천천히, 그 글들을 다 씹어서 소화시킬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을 만큼. 다른 단편으로 넘어가기 싫고 그럴 수 없을 만큼. 이번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에 담긴 <시간의 궤적>이 그랬다. 시간의 텀을 두고 두 번을 읽었다. 어쩐지 읽을 때마다 나는 극심하게 외로워졌고,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가 황급하게 지워버리곤 했다.



16.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모두가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에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다가는 결국 낙오자가 될 거라고 말하지 않은 최초의 한국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언니가 좋았다.

프랑스의 어학연수에서 만난 언니와 나는, 취향과 가치관이 꼭 맞았고 무엇보다 자국을 떠나 타국에 있다는 동질감이 그들을 친밀하게 했다.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언니와 나는 낯선 세계에 꼭 그 둘만인 것처럼 우정을 나누었다. 하지만 내가 브리스와 결혼을 약속하면서 언니는 프랑스에 한시적으로 머물다 돌아갈 사람, 나는 여기에 남을 사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겼고, 손쓸 수도 없이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28. 나는 일주일에 세 번씩 운동화를 신고 나가 파리를 걸었고, 이따금씩 길을 잃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면 거리에 서서 조용히 울었다.

타국은 아니지만 타지에서 느꼈던 내 감정이 이 한 줄로 요약되는 느낌이어서 나는 목이 메어왔다. 그 외로움은 실체는 없지만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중 하나니까. 그 마음을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털어놓았을 때 나는, ‘본인의 시간을 만드세요’라는 대답을 가장 많이 들었고, 그 외에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거나 ‘어쩔 수 없지 않냐’라는 대답을 들었다. 당시에 나는 충분히 내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기에 얼마나 더 많은 내 시간을 만들어야 나는 덜 외로울 수 있을까,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내가 등신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이어졌고, 결국 나는 그런 마음들을 더 이상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어떤 대답들도 내게 와닿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대답들에 대해 ‘일리가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말들을 아직도 정답이라 여기고 싶지 않은 것은, 발버둥치며 힘들어했던 날들을 단순히 그런 이유로 치부해버리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시간들에 대해 꼭 필요했던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런 날도 있었다.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볼 뿐이다.



언니는 “네가 없었다면 나는 파리에서 정말 외로웠을 거야.”라고 말했고, 나는 소리 높여 동의했다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부터 언니가 미웠다. ‘네가 없었다면’이라니 언니는 곧 떠날 사람이면서. 그러면 언니가 떠난 뒤의 나의 외로움은?...이라고 생각하자 그 외로움이 내 것인 양 나는 갈증이 일었다. 언니는 내가 힘들어하는 상황에 대해 거리낌 없이 조언해 주고 응원을 해주었지만, 적어도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언니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 부분에 대해 나는 자격지심을 가졌던 것도 같다. 아니, 이야기의 나가 아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는 나는 그렇다. 언니의 다정함들이 의도와는 다르게 콕콕 찔러대어 나는 무기력해졌다.



18.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의 밤을 생각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습기였다. 세 달 남짓한 여름밤을 제외하면 거의 언제나 곧이라도 빗방울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대기가 얇고 부드러운 껍질처럼 우리를 감쌌고, 나는 그 안에서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골목들은 가로등의 따뜻한 불빛에 덮여 있었고, 도시의 오래된 건물은 나에게 영원을 떠올리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니를 그리워한다. 좋지 않게 끝난 관계가 있고, 물 흐르듯 끊긴 관계도 있다. 그 관계들이 그립다기보다 그때의 우리가 종종 그리울 때가 있다. 언니가 파리에 계속해서 남아있었대도 언니와 어떤 다른 이유로 관계가 깨어졌을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한다. 지금의 인연들과 남은 시간이 얼마만큼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할 뿐이고, 놓치기 싫다면 붙잡아보기도 한다. 결국 놓이고 끊어진 것들에 대해 나는 다시 진한 아쉬움을 남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들이 비록 미화의 감정일지라도, 그 시절들이 있기에 우리는 기꺼이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나를 살게 한 많은 시간들이, 마음에 고여있다기보다 담겨있다고 믿는다.

 

 

 

 

 

 

_책 속의 문장

17. “괜찮아요, 언니.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18. “나는 용감한 게 아니야. 단지 그런 척하는 거지. 척을 하다 보면 그래지기도 하니까.”


23. “우리는 전부를 걸고 낯선 나라에서 인생을 새로 시작할 만큼 용기를 내본 적 이는 사람들이니까, 걱정 마.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 원하는 걸 찾을 줄 아는 사람이야.”


36.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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