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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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소개를 채 접하기도 전에,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주저없이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에는 책의 제목이 대부분을 차지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나는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귀중하게 생각하고 혹여나 그것이 바스라질까, 두 손으로 보듬는 것이-, 그것이 책에 대한 애정이라고, 그렇게 미미하게나마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구지 어떤 책인지 소개를 보지 않고도, 제목만 보고서도, 끌림이 강했던 까닭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자칫 어린아이같은 발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그러한다는데 - 누가 시시비비를 논하겠는가. 아, 그런데 - 이 책, 생각보다 만만치않다. 언어라는 과목을 특출나게 잘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해력이 딸린 것은 아니라고 자신만만하며 살아왔는데,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나는 나의 이해력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나는 책 시작을 제대로 앞세우지 못하는 작가의 역량덕에 -그것이 의도한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나라는 독자에게 호소한 것엔 실패다- 무려 50페이지나 날려버린 셈이다. 그것을 나는 이해하겠다며 읽고 또 읽고, 적어도 세 번은 읽은 것도 같은데, 그것도 잠시뿐, 읽다 보면 알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읽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척이나 황량한 기분마저 든다.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책을 다 읽고 그 부분에 대해서 읽고 또 읽어 이해를 할 때까지 -자칫 무식하다 생각할 정도로- 읽어왔었는데, 이것은 왠지 구태여 그렇게 할 까닭이 없다는 판단 아래 그냥 지나쳤다. 지금도 여전히 이 책의 50페이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그 50페이지에 대해 장황하다,라는 단어밖에는 딱히 느꼈다고 말할 것이 없는 것이 책의 내용으로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빙빙 돌리고 있는 부분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아야했고, 손가락 사이에 낀 책장들이 자신들을 넘겨주지 않는다며 펄럭거리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 책장을 낀 손가락을 빼버렸다. 아마 어떠한 압력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이미 내 손을 떠났을 것이라는 것. 어쩌겠는가. 입 안에서 오물거리던 사탕이 내가 싫어하는 체리맛 사탕이었음을 깨닫고 퉤,하며 뱉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 반디라는 별명으로 ‘책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도형, 그는 어느 연유에서인지 그것을 그만두고 헌책방을 운영한다. -헌책방의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도리어 정겹고, 아련하다.- 그러던 그에게 언뜻 제과점 이름이라고 착각할 만한 미도당이라는 곳의 윤선생이 찾아와 ‘베니의 모험’이라는 책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고, 그는 어떠한 연유 덕에 그 모험을 감행하게 된다. - 내가 다른 이들을 위해 일러줄 수 있는 줄거리는 여기까지다. 이것이 혹자에겐 배려라고 할 만한 행동일 수도 있으나,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이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판타지하다는 소설이, 상상력이 기발하다는 소설이, 내게는 그리 와닿지 않은 것이 그 까닭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줄거리를 써놓는 까닭은 훗날 내가 이 책에 대해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할까봐.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을 보고 이 책이 어떤 내용이었더라 -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본래, 소설이란 것은 작가와 독자의 교감 형성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 책의 내용을 깊숙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좋은 결과를 낳진 못했을 게다. 까닭은 반디가 9권의 책을 찾아가면서 독자인 나는 도대체 무얼 했는가, 이 말이다. 나는 그저 반디의 행동반경을 보며 그가 그 다음번에 할 행동을 모색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적어도 추리소설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작가 혼자 풀어내는 것이 아닌, 적어도 독자에게도 생각할 여지를 남겨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슬몃 생각해본다. 어떤 아무런 단서없이 어쩔 수 없이 반디의 뒤만 졸졸 따라가는 ‘나같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재미없고, 지루하며, 건조하다. 내가 왜 그의 뒤만을 졸졸 쫓아야만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아니 - 반디는 따라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내가 따라가는 것, 딱 그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소설이라는 분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인 ‘재미’라는 부분마저 결여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책을 찾는 것뿐이라는걸. 이 책이 결코 추리에만 집중시키지 않았다는 -혹은, 못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으나, 이 책을 읽고 뇌엽에 박히는 것이 얼마 없다는 것이 굉장히 안타깝다. 게다가 그가 다른 책에서 -혹은, 실재하지 않는 책- 발췌해놓은 몇 가지의 문장만 보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나를 보니, 나는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는 것인가 - 하는 의구심마저 들더라, 이것이다. 좋게 말해서 책 사냥꾼이 책을 찾아 헤매는 것에 그래, 기발한 발상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미안하게도 그게 나같은 독자에게는 통하지 않음이 이토록 애통할 수가 없다. 어떤 책에 대해서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독자요, 실망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오롯한 독자 몫이니, 더이상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으나 그런 기대마저 없었다면 - 그래, 차라리 그랬다면, 이 책을 읽는데에 있어서 이런 배신감같은 이상한 감정 또한 일지 않았을 게다.

  

 

 

책은 사람이 있는 곳에, 그리고 사람이 지나간 곳에 있다. 그래서 가끔 난, 한 권의 책을 찾는 것은 곧 그 책이 지나온 궤적을 더듬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한 사람의 삶의 길을 되짚어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물론 또한 책은 우연과 망각, 부주의로 인해 원래 있어야 할 곳을 떠나 세상으로 흩어지며 퍼져가기도 한다. p126 그러나 공교롭게도 난 이 문장을 보고 그래도, 내가 이 책에 애정을 표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점에 대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적어도 ‘책’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는 훼손되지 않았다는 점. 그 뿐이다. 그리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것은 ‘책’이었다는 점이 나를 안도케한다. 어쩌면 그것조차 부재했더라면 나는 이 책에 대한 손톱의 때 만큼의 애정조차도 표하지 않았을 뿐더러, 책장에 비어있는 곳이 있음에도 그곳에도 두기 싫어 책장이 아닌 바닥에 깔아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에게도 삶이 있다. 작가가 아버지라면 장정가는 어머니다. 인쇄소는 자궁이다. 누군가 표지를 여는 순간 책은 책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어떤 책은 끝까지 다 읽히지 못하고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 채 서가에 잠들어 있다. 어떤 책은 책장마다 무수한 삶의 흔적을 지닌다. 어떤 책은 복되게도 여러 주인을 섬긴다. 물과 불과 칼과 햇빛과 습기와 벌레와 짐승이 책을 병들게 하거나 해친다. 책의 가장 큰 적은 사람이다. 무지한 한 사람은 한 책의 책에 상처를 내고 무지한 100명의 사람은 다락방에 책을 넣고 잊어버리고 무지한 1만 명의 사람은 도서관을 불태운다. 책은 죽을 때 소리를 낸다. p212 잠시 외출을 할 때, 구지 그것을 읽지 않더라 하더라도 옆에서 나와 동행해야 마음이 편한 것. 그러다가 책을 떨어뜨릴 때도 있었고, 나와 맞지 않는 책이라고 하여 집어던질 때도 간혹 있었다. 그것은 책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분노를 그곳에 표출한 것이다. 그럴 때 책은 어떤 소리를 냈을까. 내가 상상하는 으악 - 같은 소리를 냈을까. 지금 나의 책장에서 읽히지 못해 뒤집힌 책들은 어떤 소리를 내고 있을지 - 먼지로 인해 숨이 턱턱 막혀 제대로 된 소리도 못내고 시름시름 앓고 있지는 않을지, - 또한, 나에게 책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한번 더 잘근잘근 씹게 한다. 전에는 책이 삶의 지침이었다면, 지금은 동기부여,라는 것. 그렇게 이 책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책’에 대한 깊은 저자의 사색과, 그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책들에 대한 나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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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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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올해(2011)에 들어서 첫번째로 읽은 책이 예상 외로 성과가 좋다는 것이 이렇게도 뿌듯할 수가 없다. 괜시리 입가에 미소가 실실 배어나오기까지 하니, 무려 일주일동안 붙잡고 있던 이 책이 성공이라 하여도 무리는 아니다. 작년엔 책을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집어삼키는 것처럼 읽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읽은 것 같기에 올해에는 책을 몇 권 읽지 않아도 좋으니 정독을 하자,라는 남모를 다짐으로 이 책을 시작으로 입을 앙 다물고 책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전에 읽었던 저자의 「개」와 「공무도하」 모두 집중을 못한 것인지, 이해를 못한 것인지, 그의 딱딱한 문체에 적응을 못한 것인지 책의 줄거리마저도 아스라할 정도인 까닭에 읽기 전부터 지레 겁을 집어먹고 쉽사리 읽어내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저자의 책을 읽기 전 맞닥뜨려야 할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이 손에 들어온 것은 그의 덕이다. 김훈 작가의 이야기가 나온 곳, 그곳은 실소를 머금을지도 모르겠지만 순대국밥집에서였다. 그는 그때 김훈 작가의 이 책을 읽고 있었고, 빌려줄까? 묻는 그에게 아니,라는 말을 내던졌다. 그는 애증이라면 애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김훈 작가의 글이 무척이나 사실적-이라는 까닭때문에 좋다고 했었다.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다, -였다, -했다’라고 딱딱 끊어버리는 그 정없는 문체가 좋다니, 나로서는 좋아할래야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문체들인데…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런데 왜 우리가 순대국밥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며, 그도, 나도, 피식 웃었더랬다. 하지만 이번엔 그는 틀렸다. 그리고 그에게 얘기한다. “이 책은 사실적이지 않아.”

 

 

 

‘나(조연주)’는 오년 여의 직장생활에서 총 두번을 사직한 후,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한 번의 우회전은 민통선 너머 수목원에서 나무와 꽃과 풀의 모습을 세밀화하는 작업을 하는 일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손수 작업하는 것이 사진은 꽃과 나무의 생명의 표정과 질감을 표현하기에 미흡한데, 그것이 사진의 사실성 때문이란다. 그래서 생명의 사실을 그리기 위해서는살아 있는 인간의 시선과 인간의 몸을 통과해나온 표현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나’가 그곳에서 일하게 된 까닭이다. 그곳의 안실장의 얼굴과 머리통과 어깨의 표정, 하물며 가마 둘레에 머리카락의 회오리까지도 빼닮은 그의 아들 신우의 모습에서 아버지와 자신을 투영시킨다. 아이를 부채질해주는 안요한 실장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문득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 생각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갑자기 내 마음속으로 쳐들어왔다. 마음의 일은 난데없다. 마음의 일은 정처없어서, 마음 안에서는 이 마음이 저 마음을 찌른다. p198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칫 그녀에게 있어서 부재의 존재이지만, 그것을 부재가 아니게끔 환기시켜주는 이는 어머니다. 죽기 두달 전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생식기를 내놓고 발작을 일으켜 ‘좆내논’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가엾은 수말은, 어머니에게 결핍되었지만, 결코 결핍되지 않은 아버지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인 셈이다. 어머니의 머릿 속에서 달그락거리며 등장하는 ‘좆내논’은 계속해서 아버지를 상기시키게 하고 끝내 어머니는 그것을 힘겨워하여 딸에게 전화를 걸어 “자니?” 라고 묻고는 그 대답은 결여되도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어나간다. 그러면서 “네 아버지가 나오면 갈라서야겠다.”는 말까지 유선을 통해 전하게 되는 것이다. 끝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관계를 맺지 못하는 듯 보인다. 둘을 이어줄 끈은 없어보이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말하지만, 아버지의 완벽한 부재(죽음)으로 깊은 울음을 토해내는 어머니를 보고서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말은 그들에게 실례가 됨을, 모르지 않는다. 어머니, 아버지를 제외한 그들도 서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것은 한걸음 내딛고 한걸음 다시 물러서는 꼴이다.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그 한계라는 갸날프고 얄팍한 무언가 인간의 살이라는 가죽 사이로 관통하는 것이 그 까닭이리라.

 

 

 

책을 덮음과 동시에 우회전을 하여 민통성 안으로 들어오는 ‘나’와 좌회전을 하여 서울로 나가는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멍해진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반전이 가미된 것도 아니요, 여운이 남는 결말 또한 아님을 나는 그의 작품을 이 작품을 세번째로 읽으며 여실히 깨달았다. 그가 이끌어내는 결말은, 도리어 싱거워서 소금이라도 넣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만한 결말,이라고 늘 그렇듯이 손 끝에서 활자들의 뭉뚱그려짐으로 채 아롱지지 못한 한 독자의 넋두리인 게다. 그런데 왜? 그것은 허무함과는 또 다르게도 묵직하게 깔린 공허감에 차디차게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을 입 안에 한가득 담고 온갖 인상을 써보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인 셈이다. 몇일 전 「밑줄 긋는 여자」를 읽고 나도 밑줄을 긋는 데 동조를 해야겠다, 마음 먹은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호락호락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난 ‘나’가 수목원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노란 색연필을 들고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만약 그의 책이 아니고, 내가 소장하는 나의 책이었다면 그었을까 - 생각해보지만, 그럼에도 그렇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어느 곳에 밑줄을 그어야할지 모르는 까닭이리라. 풍경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생각해본 적 없는 나에게는 그가 젊은 여성의 탈을 쓰고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찬연하다 생각할 정도였으니, 겨울, 봄, 여름, 가을까지 이르기에 밑줄을 죄다 그어버려 책이 너덜너덜해졌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리. 나의 마음이, 또 나의 두 눈이 그곳에 시선을 꽂고서 뗄 줄을 모르는 것을.

 

 

 

정작 책 속의 ‘나’는 숲에서 나왔는데, 그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나였다. 풍경에 대한 저자의 곡진함이 느껴짐에 괜히 숙연해져 책 속의 ‘나’와 함께 동행을 하지 못하고 그 기분을 만끽하고자 조금 더, 조금만 더 - 를 읊조리며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울창한 숲에 서서 나는 끝내 이뤄지지 않은 ‘나’와 김중위를 생각한다. 실은 처음에 책을 훑으며 화자가 젊은 여자임을 깨닫고는 아, 어쩌면 사랑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다 - 라는 것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에 자신은 ‘사랑’이니, ‘희망’이니 하는 말을 자신의 책 속에 넣지 않았다 이야기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가 그려내는 사랑이라는 것이 김중위의 고작 제 명함 잘 넣으셨지요?”가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다가올 수 있을까 지레짐작하며 사뭇 궁금해지려는데 그때 내 뇌엽에 사는 것 자체가 ‘사랑’이고, ‘희망’ 아니겠냐 - 라는 것이 어디선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쟁쟁쟁 - 거리는 조그맣고도 커다란 울림이 답한다. 그래, 그렇지. 바로 그거지. 그 소리는 무척이나 감미롭게 울려 깊은 밤, 숲 속의 향연에 나를 초대할게다. 나는 그곳에서 나무와 꽃과 풀이 건네는 문장으로 다리를 만들어 그것들에게 다가가고, 그것들이 바스라지기 전에 돌아올테지. 좋다, 그저 한 권의 책을 읽고 내 코 끝 구석구석에 머무는 숲의 향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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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그 유명했던 박범신의 ‘은교’도 아직 접하기 전이에요. 아이러니하게도 유명세를 타면 조금 거부감이 이는 까닭일까요. 비즈니스라는 단어와 표지는 그 조화될 수 없는 하나의 아이러니한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듭니다만, 오묘함이 함께 스며들어있는 듯함도 함께 느끼게 되네요. 책 소개를 언뜻 보니, 현 자본주의를 꿰뚫고 있는 듯도 하네요.

  

 

 

 

이 책의 소개를 처음 보았을 때, 혹시 ‘여행서’가 아닐까, 생각했네요. 저자가 여행한 곳을 토대로 쓴 소설이니, 그간 제가 읽었던 소설과는 어쩌면 조금은 낯선 기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봐요. 자전적 소설이라고 보아야하나요, 혹은…. 그것은 읽고 판단할 문제겠지요.

 

 

 

 

 

조정래님의 신간이 한번 더 나왔네요. 요즘 조정래 작가님은 책을 계속해서 내시는 것 같아요. 허수아비춤, 불놀이에 이어 - 대장경까지. 정치의 현주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음은 다른 이들의 서평에서 언뜻 본 적이 있는데 -실은 아주 많이요- 그 분의 작품은 읽어보지도 않은 주제에, 어렵다고만 느꼈던 이유인가요. 이 책은 대장경이 만들어진 이유보다는 그 뒤에 숨은 뜻을 말하고 싶어한다 _라는 글을 보게 되서인지, 역사를 남들 앞에 나서서 말하지는 못하지만 관심을 갖고 있는 저에게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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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01 2011-01-06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장경은 재간 아닌가요? 7번 국도도 새롭게 쓴 재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늘보리 2011-01-06 13:36   좋아요 0 | URL
둘 모두 재간 맞습니다. 하지만 재간되었다는 이유로 같은 책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용자체는 같겠지만, 추가되고 삭제된 부분은 분명 있을테니까요 -
 
밑줄 긋는 여자 - 떠남과 돌아옴, 출장길에서 마주친 책이야기
성수선 지음 / 엘도라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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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 긋는 여자라 - 나도 한때는 책을 읽을 때 준비물이 포스트잇이 아닌 노란색 색연필이었던 적이 있었지, 하며 책장 속의 책을 뒤적거려보지만, 전부 포스트잇 플래그가 붙어 있는 책이나 페이지만 적어둔 책이 꽤 된다. 밑줄이 그어있는 책은 2007년 즈음에 읽었던 이미나의 ‘그 남자 그 여자’ 하나 뿐이었다. 밑줄 그어놓은 그 책을 보니 내가 왜 이런 곳에 밑줄에… 하며 낄낄 웃고 있었는데 그때는 마음에 와닿았던 것이 지금은 왜? 라고 반문하고 있으니 그것은 아마 내가 전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증거겠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녀를 따라 나도 색연필을 손에 꼬옥 쥐어본다. 하지만 난 이 책 어디에도 밑줄을 긋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여놓지도, 포스트잇에 페이지를 써놓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책에서 얻을 것이 하나 없었음이 아니라, 후에 한번 더 읽으며 그녀와 공유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녀가 읽은 책을 나는 부끄럽게 단 한 권,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이 책 뿐이었으니. 그때, 그녀와 내가 나눈 교감은 작가와 독자가 나누는 교감이 아니라, 작가도 침범할 수 없는 같은 책을 읽은 독자와 독자의 교감인 것이라고 난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저자는 앞서 프롤로그(지친 영혼에도 보습이 필요하다)에서 나는 회사원이지만 나의 책읽기는 ‘생산적인 책읽기’ ‘전략적인 책읽기’와는 거리가 멀다. 출세를 하려고 책을 읽은 것도, 실무에 필요한 책을 골라서 읽은 것도 아니다. 그저 책이 좋아서, 책을 읽을 때 행복해서 책을 읽었다. 라는 말은 그녀와 나의 책을 읽는 이유가 같다는 하나로 깊은 동질감을 표하기에 충분하다 생각하며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위에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책을 이야기했는데, 그 책은 작가 공지영이 딸 위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르게 이야기해서 독서에세이,라고 칭해도 될 것도 같다. 물론, 딸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에서 벗어나진 않지만, 공지영은 그곳에서 자신이 읽었던 수많은 책들을 깨워 딸에게 일러주는 식이다. 그러고보면 저자의 「밑줄 긋는 여자」는 ‘독서 일기’라는 점만 다를 뿐, 그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서 일기’라니. 그것은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나 윤대녕의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의 후반에서 나왔던 감상문과는 조금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의 느낀점이 아니라 실생활을 살아가며 그곳에서 책 구절을 끼워맞추는 식이랄까. 어쨌든 내게는 그동안의 틀에서 벗어난 독서에서 새로운 경험이 되는 신세계를 달착지근한 양념을 버무려 맛보여준게다. 나는 이 책을 덮고는 수첩을 뒤적거리고 집에 있는 책들을 하나씩 깨웠다.

 

 

 

그리고는 수선이의 도서관이라는 온라인 서재(http://www.kleinsusun.com)가 소개되어 있어, 그곳에 들어갔는데 실은 실망을 금치 못했음은 책과는 좀 다른 그녀의 문체랄까. 그냥 자신이 기억하기 위해 쓴 말 그대로 독서 일기기에 내가 가타부타 이야기 할 것이 못되지만 책과는 다른 느낌이었달까. 독서 일기가 그녀의 온라인 서재에 담겨있는 그것이라면 내가 쓰는 서평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에 조금은 의아했지만, 그래도 내가 읽은 것은 그것이 아닌 책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난 아사다 지로를 좋아한다는 그녀에게 ‘수준이 그게 뭐냐?’며 교수가 핀잔을 주기에 화가 난 그녀도 대들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좋지 않게 말하면 발끈하던, 작가가 있었다. 기욤 뮈소 - 낄낄낄. 한 편, 두 편을 읽고 세 편 - 그의 네 권째 책을 들었는데 아차, 싶었었다. 틀에 박혀있는 사람이구나 - 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그런데 한 친구가 나에게 그 사람 책은 다 똑같아.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좋지 않은 말이 튀어나오더라 그 말이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까지 예찬하거나 그의 작품이 나오는 즉시 사재끼거나 그러진 않지만, 그럼에도 난 그의 책을 -읽었던 책에 한해서- 아직 좋아한다. 하지만 그 다음의 작품까지도 좋아할 수 있느냐 물으면 그건 또 아닐 것 같다. 참 아이러니다. 큭큭. 어쨌든 나에게도 그런 작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책의 중간 즈음에 “밥도 안 되고 돈도 안 되는 소설을 왜 읽어?“어차피 다 지어낸 얘기, 읽어서 뭐 해?” “괜히 읽어서 이 생각 저 생각 많아지면 피곤하기만 해.” 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고 작가는 털어놓는다. 실은 나도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자주 하곤 했었다. 물론 지금은 책을 읽을라치면 소설 먼저 찾게 되는 내가 전에는 그런 말을 했었다는 것에 의아해지기도 하지만, 한때는 나도 그런 감정고갈 상태의 말을 자주 했었다는 것. 그러고보면 예전에 무뚝뚝한 표정 때문에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넌 감정이 메말랐어.” 라는 말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떤 특정한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기보다는 어쩌면 책이 한 몫 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 옆에 있는 책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과시하게 된다. 바로 어제, 어떠한 이유때문에 당분간은 인문·예술만을 읽어야 겠다고 말하는 내게 그가 했던 말은 ”맨 밥만 먹는 기분이겠다”였다. 그래서 그때 갑자기 탁, 하고 드는 생각이 “소설은 고기 반찬이지.”라는 말이었다. 아 - 그 말보다 더 딱 들어맞는 말이 어디있단 말인가. 쿡쿡. 책에서 저자는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들고 있는데, 소설·에세이·인문·예술·자기계발이라는 장르를 떠나서 나는 그저 나에게 맞는 책이고, 어떤 책이든 간에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재미가 있으니까 읽을 뿐, 그것에 어떤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무리는 아닐 터다. 설득을 한다고 하여 읽을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좋을꼬, 하지만 언젠가 자신을 흔들어 소설에 손을 집게 두는 것이 어쩌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또 읽지 않으면 어떠한가. 그런 사람은 그렇게 살게 둬야하는 것이다. 자는 사람을 억지로 흔들어 깨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고기 반찬’인 소설을 읽고, 그곳에서 메마른 감성들을 다독이며, 그들과 함께 발맞추어 동행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들과의 동행에서 벗어나서 현실을 직시하고, 가끔 그들과 함께 걸었던 그 길을 그리워하겠지. 그리고 또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또 친구가 되어서 - 난 그렇게 소설을 뭣하러 읽느냐,라고 의문점을 남기는 이들과는 다르게 하나의 삶을 여러 각도로 바라보며 책에서 다른 이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삶의 모습을 공유하고, 때로는 그 속에서 예기치 않게 위로도 받고, 때로는 동질감을 표하며 공감도 하며, 그렇게 재미나게 살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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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김진명 작가 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천년의 금서」의 덕택이다. 혹자가 그 작품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실망스러운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서평을 통해 만났었더랬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은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으니 뭐 어떻다 말할 처지가 아니었고, 도리어 실망스럽다던 그 작품에 나는 풍덩 빠져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 그 책을 읽다가 무려 네 번의 버스를 놓칠 정도로 무척이나 흥미있게 읽었었던 기억에 김진명이라는 작가에 호기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한(韓)씨 성을 가진 이가 大韓民國이라는 단어 중 ‘韓’의 어원에 의문을 품고 시작한 이야기가 그에 따른 어마어마한 진실을 내놓기까지의 그 과정이 흥미롭게 읽혔는데, 사이사이 지루하다 할 틈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내가 이번에 읽은 「1026」을 들기까지 딱 일년이 걸렸다. 읽던 책을 사무실에 놓고 온 것이 이 책을 생각보다 빨리 손에 들게 만들었다. 금세라도 엎어져 잘 듯할 정도로 피곤했기에, 자기 전 조금만 읽는다는 것이 푹 빠져 읽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졸음이 가득한 눈에 활력을 줄 정도였으며, 심지어 그 다음 날은 읽고 있던 책을 제치고서라도 주욱 읽고 싶은 심정이었음은 내가 이 책에 얼마나 빠져있었던가를 알려주는 것이 된다.

 

 

 

“바…… 박 대통령…… 비밀…… 10·26…… 비밀을…… 내가…… 수연…… 하……하……하우스…… 으……으……헉.” 수연의 부탁으로 전화를 대신 받게 된 경훈은 제럴드 현이 남긴 위와 같은 말을 유언을 단서로 모순으로 점철된 10·26의 실상을 파헤친다,라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간략한 줄거리다. 1979년 10월 26일. 내가 태동하기 약 10년 전, 그러니까 나와는 동떨어진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시간이 그렇게 흘렀음에도 아직도 확실하게 매듭지어지지 않은 이야기. 그래서 그때의 그 사건에 궁금증을 품은 이가 자신이 생각하는 가설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이야기의 발단은 결코 특이하거나 희귀하지 않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기에 말도 안된다며 발끈하거나 그럴 거리도 없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좀 아쉽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경훈과 나는 분명 동등선에서 출발했고, 모든 대화 내용도 나도 함께 들었음에도, 그가 변호사라는 직업 탓인지, 내가 그때의 정치 상황을 제대로 꿰뚫지 못했던 탓이 컸던 것인지 -혹은 그 둘 다 인 것인지도- 두뇌 회전이 빠른 그가 문제를 다 풀어버려서 그것을 공유하기 보다는 아, 그렇구나 - 라며 자연스레 관찰자가 되버린다는 것. 그리고 직접 발로 뛰어 알아내는 것 보다는 대화를 통해 알아내는 것이 더 많았던지라 아, 이거 생각보다 일이 빨리 풀리겠는데 - 했던 것. 풀릴 듯, 풀릴 듯 하면서도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꼬이느냐, 또 그것도 아니다. 이야기는 절대 꼬이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레 그에 따른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은 답답하다고 표현하기보다는 도리어 흥미롭다. 하지만 국가의 몇급비밀‘씩’이나 되는 것을 변호사라는 이유만으로 툭 -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의아스럽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 우리는 이 책에서 조금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위안이 되더란 것이다. ‘10·26’ 드디어 그 실루엣을 공개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 그것에 관하여 의문을 품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나였다. 나는 고등학교때 문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일사부재리의 원칙, 미란다의 원칙, 헌법 따위를 달달 외우기만 했을 뿐, 한국근현대사에 대해서는 초,중학교를 다니며 배운 국사가 전부였다.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임기 중 김재규에 시해되었다,라고만 알고 있었지 - 어떤 연유로 그랬을지, 그 배후엔 누가 있었을지, 심지어 김재규, 그는 어떤 이인지 직접 찾아본 적도 없거니와, 궁금해 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음이 이토록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부끄럽다. 그것은 스무 살하고도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실재와 허구가 적당히 버무려진 「1026」이라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이것을 전부 실재라고 믿어버릴지도 모르는 나 때문에, 그때의 사건과 관련된 기사들을 검색하여 찾아보고 있는 내가 보인다.

 

 

 

마지막 부분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등장하며 햇볕정책이 계속 나오는데,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작년에 이 책을 읽었다면 햇볕정책의 긍정적인 면들에 대해 조금은 고개를 주억거릴 수도 있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라면야  어디 그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말이다. 책에서 북한은 우리의 동포이고, 혈연이기에 “리 국민은 우리의 동의 없이 미국이 일방적으로북한을 공격했을 때 절대로 미국의 편에 서서 핏줄 간의 전쟁을 치르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지금은 어디 그런가. 초,중,고등학교 때에는 분명 북한은 우리의 형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배웠던 나는 올해(2010) 끄트머리에 와서 국방백서에 ‘북한정권·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고 다시 정정하여 명기되는 것을 지켜보는 현세에 있다. 아, 통한스럽다.

 

 

 

나는 아마 작가의 또 다른 책을 읽게 된다면 -그럴테지만- 그저 김진명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기분 좋게 읽을 테다. 우선 그의 작품은 강하고, 묵직하다. 그리고 과감하다. 하지만 마무리는 그저 아쉬움만 남긴다. 퇴보하는 경향이 있달까. 점진적인 흐름을 꾀하여 결말을 지을 수도 있었을텐데, 작가의 늘 급진적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은 아쉽다. 서평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 여담이지만, 두어 달 전 내 방에서 책장 앞에 서서 기웃기웃거리는 아빠를 보았다. 아빠가 나가시고 나는 백권도 훨씬 넘는 책들을 보았는데 아빠에게 무엇 하나 떳떳하게 추천해드릴 수 있는 책이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더란 거다. 시시콜콜한 소설책을 추천해드리기엔 석연치 않은 마음과 또 한편으로는 속에서 꼬물꼬물거리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 때문에 결국은 책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 어떤 책도 추천해드리지 못했던 것이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는데, 이 책 만큼은 웃으면서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릴 수 있겠다,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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