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그 천년의 이야기 - 상식으로 꼭 알아야
김동훈 지음 / 삼양미디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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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라는 과목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의 대학 진로의 잣대는 당연히 그쪽으로 향해 뻗어나갔지만 그것은 중간중간 회의를 몰고 오기도, 나락에 빠뜨리기도, 좌절이라는 팻말에 우뚝 세우기도 했던 그러나 나의 한쪽에 가슴 시린 꿈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것,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지어진 모든 것들은 영원히 함께 해야할 나의 과제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애증을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건축에 대한 책들이 속속 출간이 되면 번뜩이는 눈빝으로 설레이는 마음을 두 손 가득 쥐고 그것을 검색해본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전공을 하였다하지만 실은 그쪽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하얀 백지에 꼴랑 선 하나 그어놓았을 정도로 - 아니, 선 하나도 그리다 만 것일지도, 아니면 점 하나가, 그것도 아니면 완전히 백지상태일지도 모르겠다 -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가 아는 것은 폭이 넓지도, 깊지도 않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그것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들을 선호하게 되고, 이번에야말로 그 말에 부합되는 그런 책을 만난 것 같다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다. 사실, 이 책은 내가 재학 중일 때 교수(의 개인적인 일이)라는 명목 아래 휴강을 여러차례 했었고, 그를 보충하기 위한 강의 또한 숨이 차오를 듯 거세게 밀어붙였기에 흥미를 느낄 타이밍조차 찾아내지 못했던 ‘서양건축사’와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나는 책을 읽기 전 무엇을 안다,라고 하지 않기 위해 머릿 속을 정돈했다. 하지만 정돈했다고 생각된 머리는 참 오만하게도, 제대로 된 뜻조차 모르면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안다고 설치고 있는 나의 꼬락서니가 참 꼴불견이다.

 

 

 

“건축물이 탄생하기까지의 순간과 탄생 후에 건축물에 생긴 일들을 듣다 보면 마치 한 사람의 굴곡 많은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 건축을 읽는다는 것은 그 시대를 읽는다는 것입니다.” 홍익대학 건축도시 대학원의 김동훈 부교수가 책의 추천서를 정말 맛깔나게 써놓아 읽기 전 독자로 하여금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일조하기에 충분하고, 그것은 독자의 시선을 한 곳에 뿌리내려버린다. 천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올곧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서있는 건축물처럼. 하지만 중간중간 이야기 흐름이 원활하지 못함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 가장 신경을 쓰게 만들었던 부분인 이탈리아 로마를 예를 들어보면 포룸 루마눔→콜로세움→콘스탄티누스 대제→카라칼라 목욕탕을 설명하는 것에 너무 툭툭, 끊기는 것들이 그 장의 내용이 아닌 그곳으로 신경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현재 판테온에는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와 움베르토 1세, 그리고 라파엘로와 페루치 같은 예술가들이 잠들어 있다. / 로마 사람들은 특별히 목욕을 즐겼다. 그래서인지 로마 시내는 물론이고 로마인이 다스리던 곳에는 늘 공동 목욕탕을 지었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서 카라칼라 목욕탕을 설명하는 단계에서 넘어가는 것인데, 나만 그리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불편한 자세에서 편한 자세로 고쳐앉을 것처럼 아등바등댔고, 결국은 혼자 접속사를 만들어가며 읽었던 기억을 해내며 낄낄,거리며 웃는다. 지금에서야 쓸 때는 이렇게 쓰지만 읽는 내내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차라리 그것이 사진과 함께 한 장의 분량이 나온다면, 한 장에 채워 서로 다른 건축물들에 대한 간극이 조금은 필요하지 않았나 싶은데, 너무 오밀조밀하게 붙여놓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415페이지라는 책 속에 들어있는 건축물들 중 처음 보는 것은 또 어찌나 많던지, 나의 눈을 사로 잡는 것들은 비단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자태 그뿐만이 아닌 그것이 오랜 세월 치여야만 했던 외로움까지 피부 표면에 찰싹 붙어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 저마다 소리를 높여 목청껏 외치고 있는 것처럼 독자에게 sos를 청하고 있는 듯도 하다. 그 중 뇌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것 중 하나가 인도의 '아잔타 석굴'이었는데,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아 쇠퇴하였기 때문인데, 불교의 소멸과 함께 아잔타 석굴 또한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져 1,100여 년동안 밀림 숲으로 덮인 곳에서 사냥을 나간 한 영국군 장교에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훼손, 부식된 석굴과 감색되어 자신의 모양과 색깔을 잃어가는 조각상과 벽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애달픔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모든 건축물들이 하나 하나 그 특색에 맞게 경이로워 보여 혹여나 놓칠 새라 그것들을 눈에 익히려고 넋을 빼놓고 본 것도 수차례, 그것을 콧등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입으로 전해지는 그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를 그 웅장함과 섬세함을 그 곳에 서 있는 내 두 다리를 지탱하여 직접 눈으로 봐도 시원찮을 판에, 이렇게 책 속에 실려있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찬바람이 부는 새벽에 책을 덮으며 상념에 잠겼다. 미래에 대한 발전따윈 이미 하늘로 벗어둔 채로 그저 그런 일을 해나가며 편하게 살고 싶어질 때마다 내가 가장 초기에 가졌던 꿈을 생각나게 해주는 그런 원동력 중 하나가 되어달라고. 나의 옆에서 나의 모자란 지식들을 다시 한번 천천히, 그렇게 읊어주고 새겨달라고. 그때엔 별 다섯개가 아닌 아홉, 열개라도 원없이 주겠노라, 약속한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시리즈에 열광하는지 그제야 알겠다며 다른 책에 비해 길고 넓적한 책의 오만함까지 인정하듯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책장에 뒤집혀 있던 책을 바로 꽂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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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아이
김민기 지음 / 은행나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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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의 평이 결여된 채로 내 판단과 의지만으로 책을 선정한다는 것에 부담감이 한껏 밀려들어오는 까닭은 아직 책을 선정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이번 책을 선정하기 전, 역시나 다른 이의 리뷰를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 일전에 이 고질적인 습관때문에 책의 결말을 미리 다 알아버렸음에도 이것은 왜 그리도 고쳐지질 않는지 - 별 다섯개 만점에 반개짜리의 리뷰를 보는 순간 '아, 이건 아니다.' 싶었더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에 아른거리는 이 책의 지은이 그러니까 김민기 작가,가 궁금하여 검색해본 그의 전작인 장편소설 「가슴에 새긴 너」라던가,  「들꽃향기로 남은 너」의 평점이 무척이나 좋았기 때문에, 그리고 책의 띠지의 어느 날, 사랑하는 딸이 사라졌습니다. 《가슴에 새긴 너》의 작가 김민기가 선사하는 증오와 용서, 그리고 사랑의 슬픈 변주곡 이라는 문구때문에,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책이었고, 그 선택은 지금에 와서도 후회보다는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을 만나서 잘 읽었다고 생각하여 위로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미소를 걸치게 만드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의 내용은 ‘유괴·살해사건’이라는 분노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한 소재로 읽는 독자를 감싸고 있는 보호막을 깨어 찬바람이 스며들게 하여 몸서리쳐지도록 스산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야기는 결코 유괴·살해사건으로 끝내지 않고, 그가 불러낸 증오, 복수, 용서를 312페이지라는 두껍지 않은 장편소설에 작가의 역량을 발휘하여 펼쳐내고 있다. 박태수, 그는 9살인 예은이를 유괴,납치하여 14일동안 한 움막에서 성폭행을 하고 살해까지 서슴지 않고는 용서는커녕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으며, 심지어 입언저리에 실웃음을 걸어놓고 비아냥거리듯 예은이의 아비 한선재, 그를 쳐다보는 모습에서 독자는 아연실색하기에 충분하다.  더욱 경악할 사실은 박태수, 그에게는 심장이 좋지 않아 입원을 하고있는 11살인 하늘이라는 큰 딸과 프랑스로 입양보낸 작은 딸 하영이가 있다는 점이다. 자기 딸같은 자식인게다. 그런 아이에게 이 인간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란 말인가. 한선재는 그에게 왜 하필 예은이었냐고 묻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박태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다. "지난봄에 난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아주 근사한 선물을 받았지.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었어. 언젠가는 기필코 되돌려줘야 할 선물이었단 말이지.(······) 왜 하필 당신의 딸이냐고 물었소? 그 질문을 받고 나니까 문득 그게 궁금해지는 거요. 당신과 당신 마나님이 그때 나에게 준 선물을 벌서 잊은 건가 하고 말이요." 하지만 독자인 내 입장에서 고작 그 이유가 아직 아홉 살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하였을 때, 납득할 만한 근거가 타당치 않음은 날카로운 칼이 그의 허점을 들춰 긁은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차라리 '그냥'이라는 말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일런지도 모르겠다. 또한, 결말을 급조한 것 같다는 생각에 그동안의 이야기들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느껴야했음이 심심찮게 다가왔는데, 그것을 메울 간극은 아무 것도 없어보였다. 그저 독자 나름의 상상을 억지로 총동원하여 만드는 수밖에.

 

 

 

"이 별을 보고 있으니까 생각이 나요. 옛날에 우리는 높은 언덕에서 살았어요. 밤에 집 앞에 있는 마루에서 누워서 하늘을 보면 별들이 정말 많았어요. 아빠하고 같이 별을 볼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아빠는 술을 많이 드셨어요. 언젠가 아빠에게 별들이 너무 예뻐서 한 바구니만 따서 갖고 싶다고 하니까 아빠가 당장 따주겠다고 하면서 마당을 펄쩍펄쩍 뛰었던 게 생각나요. 얼마나 웃겼던지 저는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지쳐서 더 이상 뛰지도 못하는 아빠가 그러셨어요. 술이 너무 취해서 못 따겠으니까 다음에 술이 깨면 따주신다고요. 지금은 그 생각만 하면 웃겨죽겠어요." 열한 살 하늘이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박태수도 아빠였다. 그런데 박태수의 입장은 책에서 보이는 그대로를 다 믿기엔 무리가 있는 듯 싶기에 그에 대한 부연설명이 조금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하며 그 고리를 끝까지 붙잡고 읽어나갔는데, 오산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그냥 그대로 끝나버림에 허탈하기까지 한 감정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서는 책을 읽고 난 뒤의 상념에 사로잡혀 몇 분간을 내리 허우덕대며 작가가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띠지에 나와있던 그대로의 증오와 용서뿐이었을까,를 되뇌이다 그런가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독자에게 던져진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오탈자 P37 , 20째줄 ː "내가 박예은이 아빠야." → "내가 한예은이 아빠야."

         p163 , 13째줄 ː 선재의 입에서 여자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 하늘이 혹은 아이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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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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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무실 책꽂이 한 켠에 꽂아두고 읽지 못했던 이유는 남이 그가 태동하였던 삶을 마음이 어지러운 요즘에 읽어도 될까, 하는 그런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손에 쥐었을 때 표지의 매끄러움은 손에서 떼고 싶지 않을 정도인지라 계속 붙잡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렇게 그 책의 첫 장을 넘겼다. 무심코 넘긴 첫 장인데 뜻밖의 선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렇게 시야에 들어왔다. ‘2010년 가을, 윤대녕’ 생각지도 못했던 소소하고 담백한 그의 필체다. 그리고 두어 장을 더 넘기니 새삼스럽게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에 대해서. 라며 알지도 못하는 그를 무뚝뚝하다,라고 혼자 치부해버리고 그것을 읽었다. 전체적인 느낌은 '가을'이었다. 쓸쓸하고 적막하고 고요하여 사색에 잠기기에 충분한 계절, 가을. 나는 이 책을 단풍이 곱게 물든 시월의 어느 가을에 품에 안고 읽었다는 그것에 감사하고, 또 다행이라 읊조린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작품으로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이 처음인 것도 무척이나 다행스레 생각하는데, 내가 찾아본 저자의 작품들은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신경숙 작가의 책과 견주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이나 멋스럽지 못한 표지들이 처음부터 나를 그의 문학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경계를 긋도록 했을지도 모르고, 샀다손 치더라도 오랜 시간동안 나의 책장 속에서 나오지 못했던 「딸기밭」과 같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되는 것이 그 까닭이다.

 

 

 

실은 난 책을 읽기 전 표지에 담겨 있던 저자에게 아무런 느낌없이 표지만 매끈하다며 좋아했더랬다. 어찌나 단순하신지. 책을 다 덮고 그 속에 담겨 있는 그를 조용히 불러보았다. 작가님... 순간, 웃음이라기에 억지 웃음을 띠고 있는 듯한 그의 얼굴에서 비감스러움이 감돌았는데, 그 점에서 발끈하는 분들도 더러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리 생각한 것은, 아버지와 나눈 기억이랄 것도 없는 삶 속에서 아버지와 둘만이 함께 했던 것은 초등학교 때 목욕탕에 간 기억, 그 하나뿐이라서 성인이 된 지금에도 목욕탕에서 싸구려 비누나 스킨, 남들이 쓰던 수건에서 부성애의 결핍을 보충하려 했는지도 몰랐을 그가 가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욕탕에만 가면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는 대목에서 시린 가슴을 부여잡아야만 했던 것도 그 까닭이다. 그는 더 나이들고 늙기 전에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는 것이 오랜 소원이자 바람이라 하였는데, 오랜 부성애 결핍이 가져다준 유년시절의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그로 인해 서서히 아물기를, 그래주기를.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그에게 문학이란, 아니 모든 작가들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전부터 궁금했다고 하면 거짓말일테고, 부제목을 보고 아차, 싶었다. 처음에 그가 고백하기를 더이상 갈 데가 없고 받아주는 데가 없어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라고 하기에 겸손함의 극치,라고 생각했었더랬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것은 세상에 속하고 싶은 애처로운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보기도 한다. 스물여덟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어렵사리 등단하고 그제서야 세상 속에 속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하였을 때, 당선 통보를 받고 작가가 된 자신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았다고 하였을 때, 그의 기대와 설레임이 잔뜩 묻어져 나오는 열정이 한없이 부러웠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곧 그에게 삶을 구속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그것에 대한 질퍽함은 곧 노동이 하고 싶어졌다 했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다. 하지만 그 질긴 운명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을뿐더러 그가 문학을 하도록 그를 더욱 거세게 붙잡고, 결국 그가 문학에 항복하는데 일조한다. 문학으로 뜨거운 국과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날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그래, 그것뿐이었다. 지금껏 아비에게도 단 한 번  굽히지 않았던 내가 기어이 문학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남자 나이 마흔이 됐으니 이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 세상과 매끈하게 어울리는 재주는 없으나 땀을 흘리고 뛰어와야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건 안다. 그러나 입장권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p161)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 두근거리며 읽어내린 윤대녕이라는 사람의 산문집은, 그가 태동했던 유년시절부터 시작하여 일상, 여행, 문학, 독서일기로 끝을 맺기까지 어느 것 하나 꾸밈없이 담백함은 마음을 동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곡진한 그의 글들이 머리가 아닌 마음에 켜켜이 쌓일 때, 그 때를 나는 「이 모든 극적의 순간들」의 한 장면으로 각인시키고 싶은 욕심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표현한 책이 짙은 감동을 전해줄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느낀 작품이기에 더욱 품에 안을 수 있는 것일런지도.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아직 접하지 않은 혹자가 어떠하냐 묻는다면 그를 여실히 표현하고 있는 산문집이 내게 당도하였을 때 그것은 이미 산문집이라는 의미를 상실한 채 윤대녕, 그대로 다가왔음은 한치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도중에 나는 그가 좋아질 것만 같다,라고 이야기했었고, 그것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짧은 가을에 그를 만난 건 대단한 행운이라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 가득 안고 책을 덮지만 나는 이 책을 계기로 그의 작품에 갈증이 나려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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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 바쁜 일상에 치여 놓치고 있었던, 그러나 참으로 소중한 것들 46
정희재 지음 / 걷는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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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당시 컨디션이 지독히도 좋지 않았다,라고 밖에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어쩌면 정희재 작가가 이야기해주는 힘들지만 아름다운 도시에서의 삶이 활자 그대로 마냥 아름답게만 그려지질 않았고, 삐딱한 자세에서 눈을 치켜뜨며 보는 세상이니, 내가 보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만하지 않은가. 요즘의 내 생활은 미처 풀지 못한 스트레스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데, 그때에 책을 잡고 오롯이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럴 때에는 감성이 듬뿍 담긴 책보다는 소설을 읽어야한다는 것이 나의 철칙이건만, 구지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는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는 이유 모를 압박감이었다. 실은 그 전에 이 책을 읽기 위해 손에 쥐었을 때, 그 때 정독했어야 한다는 말만을 뇌까린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책의 압박에 못이겨서 혹은, 흥미로운 책의 유혹에 이끌려 10월이 되면 제일 먼저 읽어주리라! 하며 다짐했던 이 책은 챕터2를 채 끝내지 못하고 덮어버렸었음이, 이 책에 머물러있던 시간이 고작 그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애달파서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음에 손에 꼬옥 쥔다. 장희재, 그를 만나는 시간이 즐거웠으면 좋겠다,라며 책을 펼쳐든다.

 

 

 

 

작가가 말해주는 세상은, 또 표현들은 무척이나 섬세하여 읽는 내내 호흡을 쉬이 하지 않고 길게 늘어뜨리며 그리 읽었는데, 간혹 그의 글에 호흡이 멈출 때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작가도 나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물러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 위안이 될줄은 미처 몰랐었다. 또한 글을 읽으며 이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며 감탄을 자아내며, 그렇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꾸만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려있는 듯한 기분을 받았는데, 분명 그의 은유법은 결코 남루하지 않으나 그것이 문장을 어지럽게 만들었고, 감성을 극대화로 끌어내려는 듯한 시도가 눈에 확연하게 띄어 조금은 인위적임이 스며들어 있는 것과 같은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음이 그 까닭이었다. 메마른 현대인의 감성을 자극하기엔 조금 부담스러움이 들 수도 있었겠다,라며 조심스레 얘기해보지만, 독자라는 탈을 쓴 내 모습을 합리화시키며 작가의 어법에 왈가왈부하기엔 건방지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글의 중간에 「전화하기 , 도시에서 손전화없이 살아보기」라는 장이 있는데, 그것을 읽으며 전화기만 쳐다보게 되는 사람들의 행동도 싫고, 그것때문에 사람을 조급하고 외롭게 만드는 것 같다,는 최강희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우리 실생활은 전화기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나,싶다. 나도 마음이 복잡하여 그 무엇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이 스무 살 때 찾아왔었는데, 그 땐 걱정해주는 지인들도, 심지어 가족조차도 외면해버리는 그런 상황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중증도 그런 중증이 어디 있나 싶다. 그래서 무턱대고 전화기를 정지했었는데, 한달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살렸었더랬다. 그동안 전화기는 별 필요없다는 내 말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깟 전화기 하나로 인해 세상과 단절되는 것이라는 게, 혼자 남겨졌다는 그것이 쓸쓸함과 적막함을 넘어 외로움으로 다가와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었는데... 결국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싶어 전화기를 정지했던 내가 사람들이 풍기는 체취에 자연스레 섞인 그 속에서 어울리고 싶어서 다시 살린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전화기가 내 외로움을 달래주느냐, 그것도 아니란 말이다. 차라리 그것 하나에 외로움을 느끼는 단순한 것이 나라는 인간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지. 그런 나를 약삭빠른 그가 눈치챘는지 조심스레 귀띔을 해준다. 손전화가 있어도 외롭고, 없어도 외롭다면 문제는 손전화가 아니라고.

 

 

 

실체를 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문제의 원인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불쾌해하는 내 마음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p143) 이 글귀를 읽으며 순간 움찔했던 까닭은 그 어떤 문장보다도 맹렬하게 심장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항상 불평·불만투성이의 사람이고, 늘 부정적인 사람인지라 누가 좋게 호의를 베풀었다해도 그 호의가 내게 좋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미 호의가 아니라고 받아들이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나의 옆에 있는 그 사람도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긍정적마인드라고 말할 만큼 나를 가열차게 비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 또한 좋게 받아들여야지,하면서도 어느 순간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를 나도 제어할 수 없으니, 미칠 노릇인데 그 때 마침 이 글귀가 내 눈동자를 고정시킨 것이다. 앞으로도 수도 없이 찾아올 불쾌함과 그것을 표출해내기 직전의 그 순간, 나의 마음을 소리없이 두드릴 친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같은 하늘 아래 동시대에 부대끼고 허덕이며 사는 우리가 서로를 껴안고 살 수 있다면, 그래서 외로움이 조금이나마 덜어진다면 우리는 마땅히 서로를 껴안아야 할 것이라고, 비단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 일러주고 있다. 또한 수려한 외관을, 밤에는 반짝이는 네온사인의 화려함을 한껏 뽐내는 도시라는 녀석도 외로움을 가득 안고 있구나, 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외로운 도시에서 외로운 사람들이 만나 살아가는 세상, 참 맛깔나지 않은가. 도시,라고 하니 이 책을 읽으며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에서 윤이 새로 이사한 그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걸어다녔다는 것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난 이 곳에서 23년동안을 살아왔고 수도 없이 걷고 또 걷고 있지만, 아직도 난 이곳에 적응해 나가기가 발에 바위덩어리를 얹은 것처럼 힙겹기만 하고, 앞으로 얼마나 힘겨울 날들이 저멀리서 기다리고 있는지 예상 밖에 있어 두렵기만 하여 어떤 것에 기대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현재 내가 느끼고 있는 복합적인 감정 중 하나의 회로임을 고백한다. 그런 나에게 작가는 서문을 벗삼아 건네고 있다. 나와 당신, 그리고 자신에게. 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 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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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호의 우문현답 -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를 잡아준 그 한마디 공병호의 우문현답 시리즈 1
공병호 지음 / 해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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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두 번째이지만, 무척이나 오랜만에 읽는 듯한 공병호 박사, 그의 책. 박사라는 수식어를 과감히 떼어버리고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이상할 것 하나 없다는 듯 그의 책이 속속 출간되고 있고, 그것들은 나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이 책이 출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 한번 읽어보리라 다짐하고 있던 중에 손에 안착된 그 느낌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펼친 순간 그와 함께 밀려들어오는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갑갑증을 불러일으켰다. 실은 나는 그의 책 중 「에스프레소, 그 행복한 사치」라는 자기계발 한 권에 「공병호 대한민국의 성장통」이라는 경제학 한 권을 더하여 고작 두 권을 읽고, 이제 세 번째의 작품을 접하는 내가 책은 읽어보지도 않고 책의 속지들을 눈대중으로 슥 훑어보고는 실망을 한다니 나조차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경제학이었다면 사전을 옆에 끼고 어려운 경제단어들을 찾아서라도 보았을 법하지만 이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를 잡아준 그 한마디'라는 부재가 붙어있고, 눈대중으로 본 책 내용 역시 그러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자기 전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규정지었다. 또한 그렇게 했었기 때문에 욕심을 내어 몇 십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던 것들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하루의 마무리를 공병호 박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듯,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실은 이 책을 선택했던 것은 공병호 박사, 그가 그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중간중간 인상깊었던 글귀들을 발췌하여 심어놓은 책인줄로만 알고 있었지, 작년즈음 읽다가 결국 포기해버린 「365 매일 읽는긍정의 한줄」의 두번째를 보는 기분을 안겨줄 줄은 몰랐음에 적잖이 당황했던 참이었다. 아마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있었더라면 두어달동안 읽었거나, 혹은 포기해버렸을런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조심스레 해볼 수도 있을 만큼 이런 류의 책을 꺼리는 것이 내게 이 책의 가치를 실축시킨다. 그나마 내가 가장 읽을거리가 있었던 것은 중간중간 반가운 그의 이야기였는데, 실은 나는 그가 발췌한 글보다 그가 써내는 글에서 공감을 했고, 그곳에서 눈길이 조금 더 머물렀으며, 생각의 깊이 또한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기에 충분했다. 이를테면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린 것입니다. 좋았던 순간이든, 괴로웠던 순간이든, 이미 우리 손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는 것이었는데 나라는 사람은 과거에 무척이나 연연하여 그 기억을 시도때도없이 매순간 떠올려 실망과 자책과 후회와 좌절이라는 사종셋트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이 이미 습관화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과 행동이 제각각이니 나도 나를 제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서두르면 되던 일도 그르친다고, 너무 빨리 조급하게 그것을 고치려하기보다는 조금 더 slow , slow. 하지만 심지어 이 결심을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과거를 추억하고, 여전히 과거 속에서 '아, 조금만 더!'를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란 사람, 정말 못말리겠다.

 

 

 

개 중 또 하나, 잊고 싶지 않은 글귀는 생각이란 머릿속을 이리저리 떠다니는 희미한 구름 같은 것이 아니다. ······ 생각은 리허설 중인 행동이다. 당신의 생각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잭 캔필드, 잭 캔필드의 Key」 라는 문장이었는데, 잭 캔필드, 잭 캔필드...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대표작이 있지만, 그것을 건너뛰고 「가족,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라는 책으로 만났던 그였다. 내가 읽었던 그 책은 많은 작가들이 총출동이라도 하듯 무더기로 '가족'이라는 타이틀로 단편을 내놓는 바람에 지루하기도 했고, 끊기는 맥이 짜증났던 그런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 말이 샜다. 어쨌든 「잭 캔필드의 Key」라는 책에서 마음을 흔드는 이런 글귀가 숨어있다니 당장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론다 번의 시크릿을 재연할 생각이신가,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책이랜다. 아, 그냥 책에서 본 것을 감사해하며 글귀에서 그쳐야겠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흔들고 결심은 견고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백마디 말이 아닌 하나의 문장이라 생각하고, 과연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수한 글귀들을 나열해놓기만 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나열해놓지만은 않았고, 구절 밑에 자신의 짤막한 생각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식의 책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떤 유명하거나 특별한 책이 아닌 손때가 묻은 책을 읽으며 찾아서 그 속에서 얻는 깨달음인데, 그것은 천군마마를 얻은 것보다 더한 감동의 쓰나미를 안겨주고, 그것은 나는 상상할 수도 없는 나의 머릿 속 어느 곳엔가 안착하여 두고두고 나를 위로한다. 하지만 글귀가 나열되있는 것은 생각보다 그 여파가 크지 않음에 책을 허투루 읽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 책을 힘겹게 읽은 후에야 나중에 다시 한번 책장에서 꺼내 들춰봐야겠다,며 생각하지만 그것은 한낱 기약없는 약속에 불과함을 모르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작품은 조금은 허무하고 허망하여 허탈한 기분마저 감돈다고. 애초에 전에 읽었던 에스프레소와 같은 맛이 나는 자기계발서일 것임을 확신하며 기대한 내 과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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