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우 고스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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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심장이 뛴다」를 보기위해 들린 대전 아카데미. 인터넷에서 시간을 보고 간 우리는 16:10 영화를 보기 위해 갔는데, 인터넷과는 시간이 다를 수도 있다는 직원의 말에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그 다음 영화는 17:40… 흑, 그래서 결국은 보게 된 「헬로우 고스트」 음, 글쎄. 강력 추천한다던 내동생의 말과 웃기고도 슬픈데, 반전까지 있다던 친구의 말. 그래서 전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슬프다는 내용이 줄을 이어 본 것인데, 보면서도 어디가 슬픈거야? 반문하게 되는. 결말에 다가가서 아, 이거 - 하게 만드는. 하지만 중요한건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 많지 않았다는 것 -.,- 내가 그 개그(?)를 이해하지 못한 탓일까. 특별히 하하호호 웃을만한 웃음코드를 찾지 못했을 뿐더러, 슬픔코드가 깊은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감정이 메마른겐가요. 영화보면서 자는 것이 처음 있었던 일도 아니건만, 배우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잔 것은 또 처음. (-_-) 분명 난 상만과 꼴초귀신이 차를 훔치러(?) 갈 때 잠든 것 같은데, 어느 새 바다에 뛰어들고 있었다. 슬픔코드가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인지 영화보면서 쓸데없는 곳에서도 눈물을 흘린 경우가 많았는데, (국가대표를 보면서도 질질 짜댔던 나인데, 아직도 똑같은 곳에서 우는 나 -.,- ) 울라고 만든  영화에 울지 않은 적은 또 오랜만인 듯 싶다. 2011년 첫 영화였는데, 그는 영화표까지 버렸다. -_- (뭐, 사실 그 이유때문에 버린 것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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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사나이 - a man of vendet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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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수는 딸이 유괴되고 신들에 대한 믿음을 져버린 채,

걷고 있던 목사의 길을 박차고 나와버린다.

 





 

 

자신이 8년이나 키웠다는 범인 - 최병철

뭐가 그렇게 당당하신가.

 

 







오랜만에 영화나 볼까, 해서 기웃기웃거렸는데 마땅히 볼만한 영화가 없어서 친구에게 sos를 청했다. 친구에게 있는 영화가 몇 편 되는 모양인데 개중 가장 눈에 확연히 들어온 영화는 요것.! 그와 이 영화가 나올 때 즈음 영화 나오면 꼭 보자!했던 영화였는데, 바빴던 고새를 못참고 막을 확, 내려버린 요것. 아쉬움이 배로 남아 나중에라도 한번 봐야지, 하던 참이었다. 그렇지만 네이트온 전송은 무척이나 느렸고, 전송하는데 거의 하루를 다 써버린 듯한 -.,- 어찌됐든,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타이틀에 걸맞춰 잔인했다. 잔인한 것을 못보는 나로서는 참 힘겨운 영화였지,싶다. 그것도 혼자였으니…. 영화를 보며, 누가 날 죽이려고 뒤에 있진 않을까, 뒤를 슬쩍슬쩍 돌아보며, 조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보았더랬다. 하지만 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 각본때문이라는 평도 많으나, 결말이 밋밋하다는 평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싸이코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을 유괴하고, 납치한다는 설정은 좀 아니지 않은가, 싶으면서도 정말 저 사람 저런 사람 아니야? 싶을 정도로 능수능란함을 가감없이 보여준 최병철 역인 엄기준의 연기에 혼이 쏙 빠지도록 보았던 것 같다. 각본은 그렇게 배우의 연기로 조금 묻어지나 싶었다. 하지만, 이 영화와 거의 비슷한 「세븐데이즈」와 같은 반전을 꿈꾸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결말은 허무하게도 아 - 이게 끝이야? 라는 말이 절로 나오니, 재미있게 봐놓고서도 억울하다는 기분이 든달까. 다른 이들은 긴장감이라던가, 긴박감이 들지 않았다고 했지만, 나는 둘이 대화하는 부분에서 소름이 쫙 끼쳐서.. 특히 엄기준의 악의없는 듯한 웃음이 자꾸만 뇌리에 와서 박혀서 - 그래, 배우들의 연기는 참 좋았다. 김명민, 엄기준, 김명민의 딸 역할로 나온 아역의 연기까지. 누구 하나 모자름이 없는. (하지만 요즘 김명민의 영화선택이 참 -.,- 내사랑 내곁에도 그렇고, 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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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했다 : 우리를 닮은 그녀의 이야기
김성원 지음, 김효정 사진 / 인디고(글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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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그를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읽을 만한 가벼운 책이 필요했다. 결코 소설이어서는 안되었다. 그것은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는 집중하기가 힘들다,라는 생각도 물론 있었지만, 난 집중을 못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소설은 내가 내릴 때의 역이 되어서도 끝까지 손에 놓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까닭이다. 그럴 땐 역시 에세이가 최고지,하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음의 동반자로 데려갔던 책. 「그녀가 말했다」- 모든 감성 에세이가 그러하듯, 쫙 펴면 책 한 권이 손바닥에 견줄 만하고 두께는 감질맛날 만큼 얇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날 잡아끄는 것은 갈색 빛이 감도는 표지였는데, 이것은 스탠드를 켜고 봐도 예쁠 터인데 - 기차의 창문이 잔뜩 머금은 햇살에 갈색 빛이 더 영롱하게 비쳐져 한참을 쳐다보았다. 이토록 예쁜 책이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지, 기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이야기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책을 펼친다.

 

 

 

쓰러졌지만 타는 가슴이 있던 하루, 일주일, 한 달, 그리고 몇 년간의 우리 청춘의 노래들’ 이라는 문장이 추천의 글로서 나를 맞이했는데, 사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이 글을 보면 갸우뚱거리게 된다. 내가 마지막까지 읽은 것은 ‘사랑’이라는 것으로 국한되어 있지 않았던가. 간혹 ‘꿈(미래)‘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완전히 어긋나지 못한다. ‘사랑’이란 추상적 대개념 속에서 꼼틀대는 소개념일 뿐, 철저히 분리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공감하고자 가볍게 읽은 감성 에세이에 이러쿵 저러쿵 논하고자 하는 내가 참 우습기 그지없다. 시각을 약간만 바꾸면, 위와 같은 문장은 청춘은 곧 사랑,이라는 것이고, 역으로 생각해보자면, 사랑없는 청춘이 가능한가 - 인데, 내 청춘의 모든 주소엔 사랑이 있었고, 그로 인해 나는 성장했고, 또 여전히 성장 중이기에, 그같은 물음엔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안 게다.

 

 

 

“몇 번이나 따라부르고 잊었어?” 그녀는 “이만큼.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만큼.”하고 두 팔을 벌리면서 말하더니, 곧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이상해. 지금은 그 사람이 보고 싶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아팠거든. 그래서 잊었어. 그런데 가끔…… 목에 뭐가 걸린 것 같고, 심장에 가시가 돋는 것처럼, 아파.” (…) “노래를 들어서 그렇지. 나도 가끔 그래. 아무 일 없는데도, 슬픈 노래를 들으면 어제 헤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무 일이 없는데도 슬픈 노래를 들으면 시선이 멈추는 곳에서 별안간 덜컹거리던 기차가 멈췄다. 광명역이라는 곳에서 기차에 문제가 생긴 것. 기차에서는 안내 방송으로 승객을 안심시키려 애쓰는 기관사가 있었다. 그리고 채 눈을 떼지 못한 책 속에는 수명이 다 한 사랑을 여전히 꼭 붙들고 있는 그녀를 위로하는 나(저자, 혹은 실재의 나)가 있었다. 나도 그런 적이 있노라고, 세상엔 잊을 수 없는 것 없고, 잊을 수 있는 것 없다고. 그저 무뎌지는 것이라며 책 속의 모든 것에 추억이 묻어 있었고 그래서 모든 것이 아팠던 것이다 ㅡ 그녀를 향해 날아드는 일만 개의 뾰족한 화살 는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오래 전의 그 기억들을 회상하고, 현재의 내 행복한 순간들에 감사하는 내가 있다.

 

 

 

“연애할 때 가장 안타까운 게 뭔지 알아?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거야.” ㅡ 기억은 희미해진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하고, 동감한다. 많진 않지만 나 역시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처음’이라는 단어의 상실이었던 게다. 추억이 생길 때면, 그보다 전의 추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고, 그것의 반복이다. 나는 그것이 늘 아쉽고, 또 그립다. 오래 전의 그런 아쉬움들로 점철되어진 그것들로 현재의 나는 지금 내 옆에 있는 그와 과거의 이야기를 자주, 또 오래 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불과 일년 전의 그것들을 재연할 때면 “우와, 오랜만이다. 그치?” 라거나, 우연히 한 행동이 전의 기억을 회상하게 할 때면 “우리 예전엔 이런 것도 자주 했었는데….”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그것은 반가움을 동반한 기쁨으로 안면에 웃음을 띠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추억을 켜켜이 쌓아두는 것이 아닌, 옆에 나란히 놓아두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록한다. 행복을 다시 꺼내보기 위해, 행복했던 순간들을 다시 살기 위해. ㅡ 사라지지마, 내 곁에서

 

 

 

그를 만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낸 뒤 집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책을 다시 펼쳤다.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고, 또 새로운 이야기 시작이다. 기차에서 읽으면 이래서 좋다. 이게 무슨 내용이더라? 라며, 앞의 page를 넘겨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러다 핸드폰을 잡고 있는 내 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어. 만일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항상 그 소원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해.”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을 것. 완전한 형태를 갖지 못한 소원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기회는 별똥별처럼 나타나 안개처럼 사라지니까. ㅡ 별똥별이다 꿈을 닮아가기 위해 손을 뻗고 있는 그와 나, 그리고 나의 지인들 모두가 마음 속에 새겨두어야 할 문장이었다. 바셋 하운드, 엘비스를 읽으며 사냥개 엘비스처럼 나 역시도 안락한 생활 속에 녹아들어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생각했고, 별은 별빛을 찾는 사람을 위해 빛난다를 읽으며 항상 꾸었던 꿈을 어느 순간 잊고 있었다는 질책을 나의 내면으로부터 받아야만 했다.

 

 

 

이렇듯 책 속의 그녀는 여전히 끊임없이 조잘조잘거리며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 혹은 저자는 늘, ‘완전한, 완성된’이 아닌 ‘불완전한, 미완성된’ 것들만을 스스럼없이 내보여주고 있다.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것을 완전하고 완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가가는 해결책을 넌지시 제시해주지만, 그것 또한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닐 터. 그녀 혹은 저자 역시 나와 같은 상태로 아직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서투른 판단을 내려본다. 그저 나는 나보다 조금 더 폭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속에서 공감을 하고, 그것을 되새김질하며 또 하나의 책을 기억한다. 그리고 바래 본다. 책 속의 그녀들이, 그리고 그녀들을 똑 닮은 내가, 행복으로 번지기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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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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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왠만큼 끌리지 않으면 책 날개를 읽지 않고 그저 흘깃 보고는 넘겨버리는 좋지 않은 버릇이 들었다. 작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에 대해 가늠할 수 있을 터인데, 그 통과의례를 나는, 가벼이 무시하는 경향이 생겨버린 것이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헌데, 워커 퍼시 -「바보들의 결탁」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가 쓴 서문이 날 멈춰버리게 했다. 책의 끄트머리도 아니고, 서문에서. 내가 책 날개를 다시 펼친 것은 그때였다. 오래된 습관을 버리기라도 한 듯, 무척이나 자연스레 또 뻔뻔하게. 「바보들의 결탁」의 저자 ‘존 케네디 툴’은 이 책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원고를 완성시켰으나,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당하고, 계속되는 원고 수정과 출판사들의 퇴짜, 어머니와의 불화로 생긴 우울증과 편집증으로 1969년 서른두 살이라는 창창한 나이에 자살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멀고 먼 길을 택하게 된다. 본격적인 책의 첫 글자도 읽기 전, 읽으려는 작품의 저자가 생을 마감했다는 문장은 당황스러운 적막을 선사했고, 급기야 숙연함까지 깃들게 했다. 그렇다고 하여, 여지껏 다른 저자의 유작을 읽은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으려던 이 작품은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단 한 권의 유작이라는 점은 안타까움이라는 한 단어로 치부해버리기엔 약간 모자란 듯함을 느끼게 하고, 다 읽고 난 후엔 유문 -이그네이셔스가 자주 칭하던- 속에서 똬리를 트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초록색 사냥모자가 살덩어리 풍선 같은 머리통 윗부분을 쥐어짜듯 꾹 덮고 있었다. (…) 북슬북슬한 검은 콧수염 밑으로는 두툼한 입술이 일자로 앙다문 채 툭 불거져 있었고, 양쪽 입아귀는 불만스런 기색과 포테이토칩 부스러기가 덕지덕지 달린 잔주름이 되어 쑥 꺼져 있었다. (…) 코끼리 같은 몸짓으로 육중한 엉덩이를 한쪽씩 들썩이며 쿵 쿵 제자리걸음을 걷자 부픗부픗한 살들이 트위드 바지와 플란넬 셔츠 밑에서 잔물결을 일으켰고, (…) ㅡ 이토록 괴상망측한 그의 이름은 ‘이그네이셔스J. 라일리’ - 그는 관절염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간 어머니를 홈스 백화점 앞에서 기다리는 중인 게다. 벌써부터 그는 용의주도하게 단어를 고르고 골라 어머니께 퍼부을 비난의 문장을 다듬고 있었다. 후회하게 만들거나, 그게 안되면 혼이라도 쏙 빼놓을 작정이었다. 어머니가 분수를 깨닫도록 자주자주 쓴소리를 해줘야 했다. 이런 막돼먹은 아들을 두다니. 아, 불쌍한 ‘라일리 부인’. 하지만, 라일리 부인도 만만치는 않다. 부인의 과음으로 인한 음주운전은 서른 살에 만년 백수인 아들을 억지로 그가 빅치프 노트에 써놓은 벌이를 해야만 하는 변태적인 상황으로 내모는 계기가 되었고, 그때부터 독자는 새로이 이야기가 다시 시작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는 멀쩡하랴. 책은 그 사회의 일원이 된 이그네이셔스를 조명한다. 아니, 끝이 보이지 없는 그의 벨탄샤웅(세계관)이 더 이상 빅치프 노트가 아닌 현실에 반영되는 순간부터 그가 만들어 내는 걷잡을 수 없는 사건들을 조명한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읽는 동안,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리 웃으면서도 마음껏 대놓고 하하하 - 거리며 눈물나게 웃을 수 없고, 그럴 거리도 내게는 없었음을 밝힌다. 또한, 무엇인가가 묵직하게 눌러 앉아있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다. 빅치프 노트에 중세를 흠모하고 타락한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장문의 고발장을 기가 막히도록 써내어 내가 알고 있는 그가 맞나? 하다가도, 그의 저속한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역시나,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급기야 도대체 이 인간,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데,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내 눈에 그는, 그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부적응자‘와도 다를 것 없다는 것이다. - ‘존 케네디 툴’이 ‘이그네이셔스’를 통해 시대의 자본주의 체제를 통렬하게 풍자하려고 만들어 낸 인물이라면 사실 목적은 제대로 달성한 셈이다. ‘이그네이셔스’라는 인물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희생양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자본주의 체제를 따르라는 사회(혹은 라일리 부인)와 그것을 거부하는 이그네이셔스 - 그것의 간극에 우리는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체제에 따르고 있는 현대인인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이그네이셔스를 동정할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는 게다. 그런 인간이라면 혼쭐을 내줘야 하는 것이 맞고,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면 경찰에 신고하고, 정신병원에 처넣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우리인 까닭이다.

 

 

 

나아가 이그네이셔스라는 인물은 나를 비롯한 현 시대 젊은이들의 군상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대학을 졸업한 동시에 4년을 눌러 앉아 석사 학위까지 땄으며 앞서 말했듯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고발장을 쓸 정도로 -내 보기엔 과대망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유능한(?) 인물임을 간간히 일러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취직 거부 사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벨탄샤웅(세계관)을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는 까닭이다. 게다가 허세는 어찌나 대단하신지. “실망시켜드려 죄송하지만, 급료가 적정 수준이 아닌 듯한데요. 석유계의 어떤 거물이 현재 저를 개인비서로 쓰겠다고 수천 달러를 흔들어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로선 제가 그 사람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받아 들일 수 있을지, 결정을 고민하는 중이죠. 최종적으론 그 사람한테 ‘종습니다’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바로 이것이다. 대학, 대학원, 학위. 그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는 이 곳은 나와 맞지 않아, 내가 원하는 곳은 이런 곳이 아니야, 라며 소위 말하는 대기업 - 물론, 이그네이셔스의 목적은 대기업이 아니었지만- 에 취직하려고 눈을 밝히는 영락없는 우리네들 모습인 게다. 그것은 위에 발췌해 놓은 ‘리바이 팬츠’에서 월급을 상향조정하는데 있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실 난 영미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호하게 딱 잘리는 문장들이 힘은 있을지언정 그 흔한 정이 없어 보인다는 것과, 재미있다는 그 문장들의 행간이 내게는 지루하게만 느껴지고,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그 까닭이다. 그러나 이 책, 영미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 나도 킥킥거리며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작가가 강한 확신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생각된 까닭도 그곳에 있다. 그의 다음 작품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결점이겠지만, 그만큼 라일리 부인의 ‘대관절’ 타령과 클로드의 ‘빨갱이’ 타령과 무엇보다 이그네이셔스의 이미 단물이 쪽쪽 빨려 나를 웃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짜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유문’ 타령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서문에서 세 번째 읽었을 때가 처음 읽었을 때보다 더 경이로웠다는 워커 퍼시의 말처럼 나도 두번 째 읽을 때가 언젠가는 오길, 기대해본다.

  

 

오탈자 : p20 : 15째줄 : 따옴표 ”

            p258 : 12째줄 : 이그타니우스 → 이그네이셔스

            p464-468 : 따바, 내나, 안대 (라틴 여자의 말이라고 일부러 써놓은 것 같지만, 계속되는 반복에 신경쓰이는 것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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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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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가 진다. 손 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깊고 애절한 그리고 집어 삼킬 듯 탐욕스러운 허기가 내 안에 존재하고, 나는 때때로 그것과 마주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추악한 그것이 더이상 추악하다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련하고 슬퍼져서 그만 그것을 어루어 만지게 되는 것이다. 이쯤되면 내가 말하는 허기가 비단 굶주림만이 아니라는 것 만큼은 추측할 수 있을 터. 육체의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전달되는 허기의 선연함은 자신 이외에는 감히 아무도 느낄 수 없는 하나의 무언의 대화와도 같아서 그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닌 오롯한 자신의 몫이다. 헌데, 나는 늘 그것을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채우곤 했던 것이다. 허기가 진다는 것 자체는 삶에 대한 깊은 굶주림이고 회한인데, 지금 이 순간, 어쩌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허기가 지는 때에 그에 걸맞는 제목인 「허기의 간주곡」을 읽게 된 것이.

 

 

 

에텔 - 부르주아 가정의 소녀가 보는 세상,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성장기를 그려낸 한 권의 소설이 여기에 있다. 증조부 솔리망씨가 에텔에게 보여준 연보라색집은 이 책에서 희망이 되는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던 중 혁명으로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어머니와 언니들과 러시아에서 독일로 도망갔다 마침내 프랑스에 거주하며 연명해나가는 삶이 힘들다는 제니아와 친구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깊어져 가는 골이, 돈을 둘러싼 다툼들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음이 느껴지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에텔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없는 까닭일까, 친구 제니아의 질척거리는 힘겨운 삶이 에텔에게는 신비로움을 넘어 동경하는 삶으로 싹트는 것이다. 만약 제니아에게, 제니아의 어린 시절에, 그녀가 살아온 삶의 매 순간에 그런 신비로움이 없었더라면 에텔이 그녀를 그처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에텔은 자신의 감정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 그런 허접을 안고 있음을 깨닫고 괴로워했다.(p46) 그렇게 에텔에게서 우정과 사랑,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솔리망 씨뿐인 듯했던 그 시절은 지나고, 그것의 화살은 제니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다른 증조부 솔리망씨가 숨을 거두면서 남긴 유산은 친권자라는 명목 아래 아버지인 알렉상드르에게 넘어가게 되고, 그것은 그녀의 유복할 미래를 몰락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한 시나리오를 작성케 한다. 그와 동시에 에텔은 성장하고 있었다. 채 성장이 마치지 못했을 때,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말려든다. 전쟁과 개인이라는 지층은 두텁고도 단단하여 쉬이 깨뜨릴 수 없다. 그렇게 전쟁의 한가운데에 그녀의 몸이, 조금 더 나아가서 한 가정 -브룅 가족-이 던져지며 그렇게 또다른 생이 주어진 것이다. 유년기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야 했다. 삶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 모든 것에.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러니까, 더는 척하지 않기 위해.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잊기 위해.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두 눈의 물기는 말라 있었다. (p159) 그녀는 그렇게 급작스레 어른이 되어버렸다. 더이상 코탕탱 가의 살롱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수첩에 받아 적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기에, 공증인 봉디를 만나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수순을 밟지만….

 

 

 

아르튀르 랭보의 「허기의 축제」를 인용하며 출발하기에, 나는 허기를 잘 알고 있다,라는 문장이 첫 스타트가 되며 육체적인 허기를 이야기하기에 보이는 그대로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허기를 잘 알고 있다는 문장의 끝은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그것과는 또다른 허기에 관한 것이다. (p14) 이었기에 그와 반대되는 정신적인 허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심지어 책을 다 읽고 난 뒤 서평을 쓰면서조차도 - 허기에 대한 본질적 의미는 그대로 밑바탕에 깔아두고, 현상적 의미를 끌어올리려 애썼다. 가까스로 끌어올렸는데, 나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게 맞는가, 자문하고 있었던 게다. 그러다 문득, 아무렴 개개인의 독자가 받아들이는 것 말고 또 다른 정답이 있을까, 싶었더랬다. 어쨌든, 그것은 에텔의 우정과 사랑, 애정을 받을 수 있는 단연코 한 사람뿐인 솔리망씨의 상실에 대한 허기였다. 좀 더 나아가 에텔의 로망이자 꿈이었던 연보라색집의 상실로 인한 허기였고, 고향에 대한 애수(향수)에 대한 허기였으며, 앞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허기인 것이다. 그런 허기들이 하나의 음을 되찾고, 결국 그것은 웅장한 교향곡 사이사이에 끼어들어가 간주곡이 된다. 그녀가 울리는 허기의 간주곡을 들어볼 생각이 없는가. 당신이 조금 허기진 상태에서 듣게 된다면 그것을 채워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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