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여자 - 떠남과 돌아옴, 출장길에서 마주친 책이야기
성수선 지음 / 엘도라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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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 긋는 여자라 - 나도 한때는 책을 읽을 때 준비물이 포스트잇이 아닌 노란색 색연필이었던 적이 있었지, 하며 책장 속의 책을 뒤적거려보지만, 전부 포스트잇 플래그가 붙어 있는 책이나 페이지만 적어둔 책이 꽤 된다. 밑줄이 그어있는 책은 2007년 즈음에 읽었던 이미나의 ‘그 남자 그 여자’ 하나 뿐이었다. 밑줄 그어놓은 그 책을 보니 내가 왜 이런 곳에 밑줄에… 하며 낄낄 웃고 있었는데 그때는 마음에 와닿았던 것이 지금은 왜? 라고 반문하고 있으니 그것은 아마 내가 전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증거겠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녀를 따라 나도 색연필을 손에 꼬옥 쥐어본다. 하지만 난 이 책 어디에도 밑줄을 긋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여놓지도, 포스트잇에 페이지를 써놓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책에서 얻을 것이 하나 없었음이 아니라, 후에 한번 더 읽으며 그녀와 공유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녀가 읽은 책을 나는 부끄럽게 단 한 권,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이 책 뿐이었으니. 그때, 그녀와 내가 나눈 교감은 작가와 독자가 나누는 교감이 아니라, 작가도 침범할 수 없는 같은 책을 읽은 독자와 독자의 교감인 것이라고 난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저자는 앞서 프롤로그(지친 영혼에도 보습이 필요하다)에서 나는 회사원이지만 나의 책읽기는 ‘생산적인 책읽기’ ‘전략적인 책읽기’와는 거리가 멀다. 출세를 하려고 책을 읽은 것도, 실무에 필요한 책을 골라서 읽은 것도 아니다. 그저 책이 좋아서, 책을 읽을 때 행복해서 책을 읽었다. 라는 말은 그녀와 나의 책을 읽는 이유가 같다는 하나로 깊은 동질감을 표하기에 충분하다 생각하며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위에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책을 이야기했는데, 그 책은 작가 공지영이 딸 위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르게 이야기해서 독서에세이,라고 칭해도 될 것도 같다. 물론, 딸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에서 벗어나진 않지만, 공지영은 그곳에서 자신이 읽었던 수많은 책들을 깨워 딸에게 일러주는 식이다. 그러고보면 저자의 「밑줄 긋는 여자」는 ‘독서 일기’라는 점만 다를 뿐, 그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서 일기’라니. 그것은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나 윤대녕의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의 후반에서 나왔던 감상문과는 조금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의 느낀점이 아니라 실생활을 살아가며 그곳에서 책 구절을 끼워맞추는 식이랄까. 어쨌든 내게는 그동안의 틀에서 벗어난 독서에서 새로운 경험이 되는 신세계를 달착지근한 양념을 버무려 맛보여준게다. 나는 이 책을 덮고는 수첩을 뒤적거리고 집에 있는 책들을 하나씩 깨웠다.

 

 

 

그리고는 수선이의 도서관이라는 온라인 서재(http://www.kleinsusun.com)가 소개되어 있어, 그곳에 들어갔는데 실은 실망을 금치 못했음은 책과는 좀 다른 그녀의 문체랄까. 그냥 자신이 기억하기 위해 쓴 말 그대로 독서 일기기에 내가 가타부타 이야기 할 것이 못되지만 책과는 다른 느낌이었달까. 독서 일기가 그녀의 온라인 서재에 담겨있는 그것이라면 내가 쓰는 서평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에 조금은 의아했지만, 그래도 내가 읽은 것은 그것이 아닌 책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난 아사다 지로를 좋아한다는 그녀에게 ‘수준이 그게 뭐냐?’며 교수가 핀잔을 주기에 화가 난 그녀도 대들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좋지 않게 말하면 발끈하던, 작가가 있었다. 기욤 뮈소 - 낄낄낄. 한 편, 두 편을 읽고 세 편 - 그의 네 권째 책을 들었는데 아차, 싶었었다. 틀에 박혀있는 사람이구나 - 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그런데 한 친구가 나에게 그 사람 책은 다 똑같아.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좋지 않은 말이 튀어나오더라 그 말이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까지 예찬하거나 그의 작품이 나오는 즉시 사재끼거나 그러진 않지만, 그럼에도 난 그의 책을 -읽었던 책에 한해서- 아직 좋아한다. 하지만 그 다음의 작품까지도 좋아할 수 있느냐 물으면 그건 또 아닐 것 같다. 참 아이러니다. 큭큭. 어쨌든 나에게도 그런 작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책의 중간 즈음에 “밥도 안 되고 돈도 안 되는 소설을 왜 읽어?“어차피 다 지어낸 얘기, 읽어서 뭐 해?” “괜히 읽어서 이 생각 저 생각 많아지면 피곤하기만 해.” 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고 작가는 털어놓는다. 실은 나도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자주 하곤 했었다. 물론 지금은 책을 읽을라치면 소설 먼저 찾게 되는 내가 전에는 그런 말을 했었다는 것에 의아해지기도 하지만, 한때는 나도 그런 감정고갈 상태의 말을 자주 했었다는 것. 그러고보면 예전에 무뚝뚝한 표정 때문에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넌 감정이 메말랐어.” 라는 말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떤 특정한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기보다는 어쩌면 책이 한 몫 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 옆에 있는 책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과시하게 된다. 바로 어제, 어떠한 이유때문에 당분간은 인문·예술만을 읽어야 겠다고 말하는 내게 그가 했던 말은 ”맨 밥만 먹는 기분이겠다”였다. 그래서 그때 갑자기 탁, 하고 드는 생각이 “소설은 고기 반찬이지.”라는 말이었다. 아 - 그 말보다 더 딱 들어맞는 말이 어디있단 말인가. 쿡쿡. 책에서 저자는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들고 있는데, 소설·에세이·인문·예술·자기계발이라는 장르를 떠나서 나는 그저 나에게 맞는 책이고, 어떤 책이든 간에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재미가 있으니까 읽을 뿐, 그것에 어떤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무리는 아닐 터다. 설득을 한다고 하여 읽을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좋을꼬, 하지만 언젠가 자신을 흔들어 소설에 손을 집게 두는 것이 어쩌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또 읽지 않으면 어떠한가. 그런 사람은 그렇게 살게 둬야하는 것이다. 자는 사람을 억지로 흔들어 깨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고기 반찬’인 소설을 읽고, 그곳에서 메마른 감성들을 다독이며, 그들과 함께 발맞추어 동행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들과의 동행에서 벗어나서 현실을 직시하고, 가끔 그들과 함께 걸었던 그 길을 그리워하겠지. 그리고 또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또 친구가 되어서 - 난 그렇게 소설을 뭣하러 읽느냐,라고 의문점을 남기는 이들과는 다르게 하나의 삶을 여러 각도로 바라보며 책에서 다른 이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삶의 모습을 공유하고, 때로는 그 속에서 예기치 않게 위로도 받고, 때로는 동질감을 표하며 공감도 하며, 그렇게 재미나게 살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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