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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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올해(2011)에 들어서 첫번째로 읽은 책이 예상 외로 성과가 좋다는 것이 이렇게도 뿌듯할 수가 없다. 괜시리 입가에 미소가 실실 배어나오기까지 하니, 무려 일주일동안 붙잡고 있던 이 책이 성공이라 하여도 무리는 아니다. 작년엔 책을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집어삼키는 것처럼 읽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읽은 것 같기에 올해에는 책을 몇 권 읽지 않아도 좋으니 정독을 하자,라는 남모를 다짐으로 이 책을 시작으로 입을 앙 다물고 책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전에 읽었던 저자의 「개」와 「공무도하」 모두 집중을 못한 것인지, 이해를 못한 것인지, 그의 딱딱한 문체에 적응을 못한 것인지 책의 줄거리마저도 아스라할 정도인 까닭에 읽기 전부터 지레 겁을 집어먹고 쉽사리 읽어내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저자의 책을 읽기 전 맞닥뜨려야 할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이 손에 들어온 것은 그의 덕이다. 김훈 작가의 이야기가 나온 곳, 그곳은 실소를 머금을지도 모르겠지만 순대국밥집에서였다. 그는 그때 김훈 작가의 이 책을 읽고 있었고, 빌려줄까? 묻는 그에게 아니,라는 말을 내던졌다. 그는 애증이라면 애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김훈 작가의 글이 무척이나 사실적-이라는 까닭때문에 좋다고 했었다.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다, -였다, -했다’라고 딱딱 끊어버리는 그 정없는 문체가 좋다니, 나로서는 좋아할래야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문체들인데…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런데 왜 우리가 순대국밥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며, 그도, 나도, 피식 웃었더랬다. 하지만 이번엔 그는 틀렸다. 그리고 그에게 얘기한다. “이 책은 사실적이지 않아.”

 

 

 

‘나(조연주)’는 오년 여의 직장생활에서 총 두번을 사직한 후,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한 번의 우회전은 민통선 너머 수목원에서 나무와 꽃과 풀의 모습을 세밀화하는 작업을 하는 일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손수 작업하는 것이 사진은 꽃과 나무의 생명의 표정과 질감을 표현하기에 미흡한데, 그것이 사진의 사실성 때문이란다. 그래서 생명의 사실을 그리기 위해서는살아 있는 인간의 시선과 인간의 몸을 통과해나온 표현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나’가 그곳에서 일하게 된 까닭이다. 그곳의 안실장의 얼굴과 머리통과 어깨의 표정, 하물며 가마 둘레에 머리카락의 회오리까지도 빼닮은 그의 아들 신우의 모습에서 아버지와 자신을 투영시킨다. 아이를 부채질해주는 안요한 실장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문득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 생각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갑자기 내 마음속으로 쳐들어왔다. 마음의 일은 난데없다. 마음의 일은 정처없어서, 마음 안에서는 이 마음이 저 마음을 찌른다. p198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칫 그녀에게 있어서 부재의 존재이지만, 그것을 부재가 아니게끔 환기시켜주는 이는 어머니다. 죽기 두달 전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생식기를 내놓고 발작을 일으켜 ‘좆내논’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가엾은 수말은, 어머니에게 결핍되었지만, 결코 결핍되지 않은 아버지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인 셈이다. 어머니의 머릿 속에서 달그락거리며 등장하는 ‘좆내논’은 계속해서 아버지를 상기시키게 하고 끝내 어머니는 그것을 힘겨워하여 딸에게 전화를 걸어 “자니?” 라고 묻고는 그 대답은 결여되도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어나간다. 그러면서 “네 아버지가 나오면 갈라서야겠다.”는 말까지 유선을 통해 전하게 되는 것이다. 끝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관계를 맺지 못하는 듯 보인다. 둘을 이어줄 끈은 없어보이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말하지만, 아버지의 완벽한 부재(죽음)으로 깊은 울음을 토해내는 어머니를 보고서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말은 그들에게 실례가 됨을, 모르지 않는다. 어머니, 아버지를 제외한 그들도 서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것은 한걸음 내딛고 한걸음 다시 물러서는 꼴이다.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그 한계라는 갸날프고 얄팍한 무언가 인간의 살이라는 가죽 사이로 관통하는 것이 그 까닭이리라.

 

 

 

책을 덮음과 동시에 우회전을 하여 민통성 안으로 들어오는 ‘나’와 좌회전을 하여 서울로 나가는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멍해진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반전이 가미된 것도 아니요, 여운이 남는 결말 또한 아님을 나는 그의 작품을 이 작품을 세번째로 읽으며 여실히 깨달았다. 그가 이끌어내는 결말은, 도리어 싱거워서 소금이라도 넣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만한 결말,이라고 늘 그렇듯이 손 끝에서 활자들의 뭉뚱그려짐으로 채 아롱지지 못한 한 독자의 넋두리인 게다. 그런데 왜? 그것은 허무함과는 또 다르게도 묵직하게 깔린 공허감에 차디차게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을 입 안에 한가득 담고 온갖 인상을 써보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인 셈이다. 몇일 전 「밑줄 긋는 여자」를 읽고 나도 밑줄을 긋는 데 동조를 해야겠다, 마음 먹은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호락호락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난 ‘나’가 수목원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노란 색연필을 들고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만약 그의 책이 아니고, 내가 소장하는 나의 책이었다면 그었을까 - 생각해보지만, 그럼에도 그렇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어느 곳에 밑줄을 그어야할지 모르는 까닭이리라. 풍경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생각해본 적 없는 나에게는 그가 젊은 여성의 탈을 쓰고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찬연하다 생각할 정도였으니, 겨울, 봄, 여름, 가을까지 이르기에 밑줄을 죄다 그어버려 책이 너덜너덜해졌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리. 나의 마음이, 또 나의 두 눈이 그곳에 시선을 꽂고서 뗄 줄을 모르는 것을.

 

 

 

정작 책 속의 ‘나’는 숲에서 나왔는데, 그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나였다. 풍경에 대한 저자의 곡진함이 느껴짐에 괜히 숙연해져 책 속의 ‘나’와 함께 동행을 하지 못하고 그 기분을 만끽하고자 조금 더, 조금만 더 - 를 읊조리며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울창한 숲에 서서 나는 끝내 이뤄지지 않은 ‘나’와 김중위를 생각한다. 실은 처음에 책을 훑으며 화자가 젊은 여자임을 깨닫고는 아, 어쩌면 사랑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다 - 라는 것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에 자신은 ‘사랑’이니, ‘희망’이니 하는 말을 자신의 책 속에 넣지 않았다 이야기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가 그려내는 사랑이라는 것이 김중위의 고작 제 명함 잘 넣으셨지요?”가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다가올 수 있을까 지레짐작하며 사뭇 궁금해지려는데 그때 내 뇌엽에 사는 것 자체가 ‘사랑’이고, ‘희망’ 아니겠냐 - 라는 것이 어디선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쟁쟁쟁 - 거리는 조그맣고도 커다란 울림이 답한다. 그래, 그렇지. 바로 그거지. 그 소리는 무척이나 감미롭게 울려 깊은 밤, 숲 속의 향연에 나를 초대할게다. 나는 그곳에서 나무와 꽃과 풀이 건네는 문장으로 다리를 만들어 그것들에게 다가가고, 그것들이 바스라지기 전에 돌아올테지. 좋다, 그저 한 권의 책을 읽고 내 코 끝 구석구석에 머무는 숲의 향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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