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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레이먼드 카버,무척 익숙한 이름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속에서 접하였거나 어느 곳에서 분명 만났던 이름인데 하며 오래전 구매를 해 놓고 읽지 못하던 <대성당>을 집어 들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며 '헤밍웨이 이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 라는데 왜 내겐 기억이 없지. 그는 결코 행복한 삶은 아니었던 듯 싶다.그에게 글쓰기는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연장선이 아니었을까?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여 일찍 부모가 되었지만 불우한 삶을 살듯 많은 직업을 전전했던 그의 일상이 이 책에 소개된 단편들 속에 모두 녹아나 있는 듯 하다. 결코 행복하다고 볼 수 없는,뭔가 아픔을 간직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지만 단편적인 일상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 바로 저자가 있다. 정말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는 일상의 '찰나' 적인 부분들을 그만의 방식으로 잘풀어냈다.
깃털들, 직장에서 알게 된 버드가 잭과 그의 아내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들에겐 아직 아기가 없고 그들은 도시하고는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살기에 도시를 벗어나서의 시골생활은 아직 낯설다. 그렇다고 버드를 무척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흔히 직장에서 잡담처럼 서로의 아내에 대하여,집안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데 맞장구를 쳐 주는 정도인데 그의 아내의 이름을 깜빡하기도 하여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가가 이름을 몰라 그냥 끊는 경우도 있었다. 아내 프랜은 그들의 초대에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둘다 그런 초대에 낯설기도 하고 그들의 삶과 전반적인 것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반가운 초대는 아니지만 성의에 보답하듯 초대에 응하여 버드의 집에 가게 된다. 농장의 낯설 풍경과 집에서 마추친 커다란 새, 꼬리를 활짝 펴고 위협을 하듯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공작과 함께 사는 버드, 아내가 원해서라지만 그 공작을 집안에 들어오게도 하면서 살고 있다니 이들에겐 정말 받아 들이고 싶지 않은 그들의 생활이다.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고 낯설지만 그들의 아기에게는,무척 못생긴 아기지만 자신들에게 없는 아기를 보는 순간에 프랜은 아기를 원하여 그들도 아기를 갖게 된다. 하지만 아기를 갖게 되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은 '불행' 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어쩜 이 이야기 속에도 일찍 결혼을 하고 두아이 아빠가 되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마냥 현실을 걷돌던 자신이 녹아나 있는 것은 아닐까.
체프의 집, 자신의 집이 아닌 체프의 집에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는 모자라는 것 없이 일상이 행복하기만 하다.그런 일상에 느닷없이 체프가 나타나 집을 비워주길 바란다. 이 집에 살게 될 이가 정해졌다면서 집을 비워 달라고 한다. 앞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그 바다에서는 고기를 잡아 부족함 없이 지내던 그들,집안의 살림 또한 쇼파도 의자도 모두가 체프의 것이었나보다. 하지만 뚱뗑이 린다가 남편이 낚시배를 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기에 그녀가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체프의 집이잖아요. 라고 내가 말했다.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는 거죠.' 그간 돈도 받지 않고 빌려 주었지만 이젠 이 집에서의 생활은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바다에서 잡아 온 생선도 모두 다 먹어야 할지 모른다. 아무걱정없이 비록 남의 집이지만 모자람없이 지내던 그들에게는 정말 하루아침에 '방빼..' 라는 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일까? 하지만 담담히 받아 들인다. 자신들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집이 아닌 곳에서 살다 보면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다.아니 갑자기 전화하여 집세를 올려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세입자와 임대자의 다른 모습이다. 거기에 반기를 들 수는 없다. 모두가 체프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무일 없이 살았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보존, 석 달 전 회사에서 짤린 샌디의 남편은 소파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다. 소파는 샌디의 남편의 것이 되었다. 샌디는 어느 날 집에 돌아왔지만 남편은 소파에서 잠을 자는 것인지 안자는 것인지 모르게 움직임이 없다. 그녀는 냉장고 앞으로 가서 요구르트를 하나 꺼내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다가 깜짝 놀란다. 냉장고에 전원이 나가서 냉동식품은 모두 녹아 있고 다른 것들도 상할 조짐을 보이기 전에 먹어치워할 상황이다. 왜 그럴까? 전원코드는 분명히 잘 꽂아 있는데.남편은 반응을 하고 냉장고 앞으로 오더니 프레온가스가 나갔다고 한다. 남들은 이십년도 더 쓴다는데 십년도 못 쓰고 고장났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다 남편이 즐겨 보는 신문에서 '중고란'을 뒤져 중고냉장고를 사기로 하고 보다가 가까운 곳에서 '창고경매'라는 것을 보게 된다.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라 경매장에 가끔 가던 그녀였기에 남편보고 경매장에 가자고 하지만 그는 집을 벗어나길 두려워하듯 안간다고 한다. 그러다 남편은 집을 벗어나 창고경매 하는 곳에 가겠다며 말을 한다. 분명히 남편과 냉장고는 집안에 잘 '보존'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무언가 단단히 고장이 나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실직으로 인해 바깥출입을 안하게 되고 소파에 딱 붙어서 살게 되었고 냉장고는 잘 돌아가겠지 했는지 어느 순간 나가버렸다. 왜 보존이 안된것일까? 여자의 살림에서 냉장고와 같은 큰 살림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야 맘이 놓이듯 한집안에는 남편이라는 가장이 단단히 서야 집안이 든든하다. 그런데 지금 그 두부분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다시 무언가 새로운 것들이 필요한 때이다. 그것을 남편은 지금 시작하려 하고 있다.
별것 아닌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그녀는 아들이 생일파티를 해 주기 위하여 쇼핑센터에 가서 '스코티'이름으로 케익을 맞춘다. 그리고 스코티는 학교 가는 길에 친구들이 선물을 무엇을 해줄까 하는 상념에 빠져 있다가 발을 헛디뎌 인도 연석에 걸려 넘어지면서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그땐 사고인줄 모르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 기절하고 만 스코티. 스코티의 혼수상태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부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뺑소니 차에 치였다고 원망을 하지만 아들이 깨어나길, 두개골에 골절이 있다고 하지만 아무일 없다고 하는 의사의 말을 믿으며 깨어나길 바라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집으로는 이상한 남자의 전화가 가끔 걸려 온다.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들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던 그들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들이 끝내 숨을 거든 것이다. 눈으로 확인이 안되는 병에 걸려 그만 숨을 거든 것이다. 그들은 그 모두가 이상한 전화를 하는 남자의 책임인 듯 하며 그를 찾아 나선다. 스코티의 이름을 알려준 것은 케익 가게 뿐이라 빵집으로 향한다. 늦은 시간에도 빵을 만들고 있는 이남자, 그도 무척이나 외로운 삶을 평생을 살고 있다. 그는 스코티의 부모에게 먹을 것을 권하며 자신의 이야기도 담담히 풀어낸다. 먹을것과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가면서 그들의 마음의 벽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다. 순식간에 당한 슬픔 앞에서 그들은 정말 마음이 아프고 허기졌는지 모른다. 자신들만 외롭고 슬픈줄 알았는데 몸집이 큰 빵집남자도 평생을 외롭게 살았다. 자신의 슬픔 앞에서 비로소 다른 이들의 슬픔과 외로움도 들여다보게 되는,일상의 편린과 같은 이야기 속에서 일상을 보는 날카로운 저자의 눈을 볼 수 있다.
대성당, 아내에게는 오랜 친구가 있다. 그런데 그사람이 '맹인'이다. 그의 아내가 죽고 아내의 친척집을 방문하던 차에 아내를 만나러 오겠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아내와 그는 십여년전에 아내가 그를 위해 일을 해준 후로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만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녹음테이프'를 통해 알고 있다. 그가 드디어 그의 집에 왔는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람이다. 그가 생겼했던 맹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그를 보면서 모두 깨져버렸다. 맹인들이 흔히 쓰는 선글라스도 지팡이도 그는 쓰거나 집지 않았다. 아내와 그는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들처럼,아니 아내는 맹인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고 말을 해야하는지 몸에 베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하는데 그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그의 머리 속에는 그만이 그리고 있는 '맹인' 에 대한 생각뿐이니 말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러다 아내가 피곤함에 그들 곁에서 잠들고 맹인과 그가 함께 하게 되었는데 컬러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티브이에서 '대성당'에 대하여 나오는 것이다. 그는 눈으로 보는 것을 그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려고 하니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 그가 이해를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맹인이 그림을 그려보자고 한다. 그는 맹인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된다. 맹인의 손을 잡고 함께 대성당을 그려 나가는데 맹인은 커다란 종이 속의 대성당에 흡족한 듯,아니 이젠 그에게 눈을 감고 대성당을 그리게 한다. 마음에. 눈을 감고 있는 세상에서는 맹인이 인도를 한다. 그가 그려 나가는 대성당을 그는 비로소 마음으로 느끼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기쁨에 젖는다. '그려봐. 무슨 소린지 알겠지. 내가 자네 손을 따라 움직일 거야. 괜찮아. 내가 말한 대로 시작해보게나,알겠지.그려봐.'
둘은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 그들만의 대성당을 완성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눈을 뜨고 보아 온 대성당이 아닌 마음속에 종이에 그린 대성당은 분명 다른 대성당이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은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아. 젊은 양반? 그러기에 삶이란 신비롭다니까, 잘 알겠지만. 계속해.계속 그려봐.'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한 세상을 그는 지금 맹인과 함께 함으로 인해 접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왜 맹인과 친구인지도 이해를 못했고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고 다른 세상이라 여겼던 세상에 이제 첫발을 디뎠지만 결코 그것은 자신이 '맹인' 이었음을 직잠케 한다. 이 작품은 앞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말년에 쓰여진 작품이라는데 정말 대단하다. 한편의 완벽한 작품을 이루고 있다. 앞의 작품들은 결말이나 삶의 일부분을 옮겨 놓기도 했지만 열린 결말로 끝을 내서 물음표를 스스로 갖게 만든다면 이 작품은 짧지만 그 속에 담아야 할 것들을 모두 담아 내어 '대성당'을 지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우리는 흔히 나와 다르다고 하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장애와 비장애라는 구분을 정말 수도 없이 만들어 놓고 그 속에 갇혀 '장애인'를 구속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정말 장애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어쩌면 그들은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세상의 틈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